{{{#!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1e43, #002654 20%, #002654 80%, #001e43);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르봉 왕정복고| 왕정복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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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000092><colcolor=#000092,#fff> 출생 | 1878년 10월 15일 |
프랑스 바스잘프 바르슬로네트 (現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알프드오트프로방스 바르슬로네트) | |
사망 | 1966년 9월 21일 (향년 87세) |
프랑스 뇌이쉬르센(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오드센 뇌이쉬르센) | |
출신 정당 | 민주공화동맹[1] |
재임기간 | 제77대 총리 |
1940년 3월 21일 ~ 1940년 6월 16일 | |
약력 | 재정경제부 장관 (1930, 1938 ~ 1940, 1948) 법무장관 1932, 1938 외무장관 (1940) 프랑스 총리 (1940) 프랑스 하원의원 (1919 ~ 1924, 1928 ~ 1940, 1946 ~ 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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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실상 프랑스 제3공화국의 마지막 총리.영국의 윈스턴 처칠과 함께 1930년대 내내 대독강경파로 이름을 날렸고 위기상황에서 총리가 된 것까지 동일하였으나 처칠과 달리 조국이 전쟁에서 처참히 패하면서 잊힌 인물이다.
2. 생애
2.1. 2차대전 이전까지
섬유사업으로 성공한 부친덕분에 어릴 적부터 학업에 전념하여 파리 고등상업학교와 파리 대학교 법학부를 거쳐 법률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19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중도우파 정당인 민주공화동맹(Democratic Republican Alliance) 소속으로 활동하였다.1920년대에는 특별한 커리어가 없었지만 상당히 강경하게 대 독일 징벌책을 주장하고, 독일 전쟁배상금 삭감안 등에 강력히 반대하여 1차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높은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1931년 2월부터 1932년 2월까지 식민지 장관을, 1932년 2월부터 6월까지 법무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나 입각 이후에도 지나치다시피 한 대독강경책을 주장하여[2] 독일의 재군비와 확장, 침략이 본격화되는 30년대 후반까지는 입각하지 못한다. 소속 당에서조차도 지나치게 강경하며 독단적이고 외골수라는 평가를 들을 지경이었고 결국 당을 뛰쳐나가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레노는 영국과의 강력한 동맹을 유지하며 동시에 독일 견제를 위해 소련을 안보 파트너로 삼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으며, 독일의 재군비에 대응하여 프랑스군의 현대화, 기계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샤를 드골의 주장을 적극 지지했다[3].
독일의 재군비가 본격화되고, 안슐루스가 일어나자 미래를 예언한 선견지명있는 정치인으로 재평가받으며 1938년 4월 법무장관으로 재입각했고 같은 해 11월 재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재무장관으로서 그는 프랑화의 가치절하를 주도하여 디플레이션을 유도, 물가를 안정화하고 금융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주력을 다했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한가하게 돌아가지 않아서 그가 재무장관으로 재임 중이던 1939년 9월 마침내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는 대독 유화정책의 책임으로 맹공받았다.[4]
2.2. 2차대전기
결국 달라디에는 내외부의 압력을 받다가 최종적으로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가 소련에 항복하자 그 책임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고[5] 그 뒤를 이어 폴 레노가 1940년 3월 21일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총리가 된 레노에게 주어진 과제와 부담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당장, 전시라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의회는 좌우의 대립으로 제대로 된 거국전시내각이 구성되지 못했다. 심지어 소속당조차도 레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이는 같은 시기 영국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6] 이를 타파하기 위해 레노는 좌우 양측 정당을 조율함은 물론, 달라디에가 기존에 겸직 중이던 전쟁, 외무장관직을 계속 맡게 하였다.전쟁수행에 있어서는 처칠과 행동을 같이하여 노르웨이 전역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으며, 발칸 및 동유럽에서 제2, 제3의 전선을 형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독일에게 제2전선을 강요하여 전략적 이점을 얻음은 물론, 지난 대전에서 프랑스가 전화의 중심이 되어 국토가 큰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교훈을 잊지 않은 덕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레노가 애타게 찾던 동유럽의 동맹국들은 이미 이전 내각에서 다 팔아넘겼거나 망한 뒤여서 어떠한 성과를 거둘 수도 없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레노는 전쟁수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월 28일, 레노는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과의 회담(영프 최고전쟁협의회)을 통해 영프 양국 중 어느 1개국에 의한 단독 종전을 금하고, 전쟁종식은 양국간의 협의하에 이뤄진다고 문서화했다. 내부적으로도 병력동원과 훈련을 서두르고 민간산업의 군수산업화를 조속히 이행하여 군수품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이어진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군이 처참하게 패하면서 물거품으로 돌아가버렸다. 5월 15일, 처칠과의 전화 통화에서 레노는 "이제 다 끝났다. 우리는 패했다."고 말하여 처칠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5월 18일에는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을 전격 경질하고 후임으로 막심 베이강을 임명했으나 어차피 그 밥에 그 나물이었고 지휘관 하나 바꾼다고 수습될 전선은 아니었다. 같은 날, 달라디에가 맡고 있던 국방장관직을 회수하고 자신이 직접 맡으며 전쟁지도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5월 26일, 레노는 런던에서 처칠을 만나 "단독강화를 할 의사는 없지만 프랑스에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시기가 되면 한때 이름을 날리던 대독강경주전파 레노는 사라지고 계속된 패전에 좌절하고 멘붕한 정치인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처칠은 영불연합 구상을 내놓고 레노도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영불연합을 강력히 추진할 만한 정치적 권력이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결국 이탈리아의 참전은 레노의 마지막 저항을 무너트렸다. 레노는 장관들, 그리고 동료 의원들로부터 영프합의를 파기하고 단독강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계속해서 받고 있었는데 이탈리아가 선전포고하면서 이들의 압력을 막을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당장 이탈리아 참전 소식을 듣고 총사령관인 베이강이 총리관저를 방문하여 대독 강화를 요청하는 판국이었다. 거기다가 레노의 정부는 총리관저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레노와 그 주변인들에게 항복을 강권하고 있었다.
결국 강화파의 강력한 압력에 못이겨 레노는 단독강화를 하지 않겠다는 영프합의를 파기함과 동시에 임시수도 투르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이미 그가 사의를 표명하기 전부터 정부관료들과 외교관들은 자체적으로 대독강화를 타진하는 중이었다. 그의 사의는 역시 항전파인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에 의해 반려되었지만 6월 16일 내각회의에서 압도적으로 대독강화를 지지하기로 결정되면서 레노는 페탱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물러난다. 레노는 런던으로 망명하라는 처칠의 권유도, 독일의 손길을 피해 주미대사직을 제안한 페탱의 제안도 거부하고, 대신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로 옮겨 항전을 지속하고자 했으나 탈출 도중 몽펠리에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1942년 비시 프랑스의 패전책임을 묻는 재판에 출석했다가 비시 프랑스 자체가 흔들리면서 오스트리아의 이터 성으로 이감되었고, 1945년 5월 5일에 있었던 이터성 전투에서 다른 프랑스 VIP 포로들과 함깨, 미군과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 그리고 독일 국방군 육군(극소수의 무장친위대 인원 포함) 병력에 합세하여 포로학살을 꾀하던 항전파 무장친위대 부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7]. 이 전투 후 다른 포로들과 생존했고, 종전 후 해방되었다.
2.3. 전후
패전 당시의 총리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전후에도 유력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자유 프랑스 이후 구성된 프랑스 제4공화국에서 재무 및 금융장관, 극동관계장관, 총리대리 등을 역임하고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개정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1962년, 드골이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주도하고 이에 반대하는 국회를 해산하자 여기에 반발하여 드골과 결별했다.이후 회고록을 남기는 등 저술활동에 힘쓰다가 1966년 타계했다.
3. 평가
만약 프랑스가 전쟁 끝까지 본토를 사수했다면 영국의 처칠과 더불어 후대에 길이길이 명성을 남기는 정치인이 되었겠으나, 프랑스가 초기에 패전함으로써 잊혀진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전시총리로서 그 역할을 다했지만 군이 졸전하는데 한 명의 정치인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최후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항전을 모색한 덕분에 비시 프랑스에 가담했던 다른 지도자들보다는 훨씬 좋은 평가를 받는다. 레노의 평판이 나빴다면 2차대전 이후에 정치인으로 복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죽을 때까지 프랑스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1] Alliance républicaine démocratique[2] 아직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기 이전이었다.[3] 뿐만 아니라 전차를 그저 보병 지원용 병기로 치부하고 여전히 보병이 전쟁의 핵심 병과로 인식하던 모리스 가믈랭을 일찍부터 경질시키려 했으나 가믈랭의 명성이 보통이 아니었던 만큼 해임은 결국 개전 후로 미뤄졌다. 해당 시점에서 야전군 하나가 단어 그대로 증발해 있었던 것은 덤.[4] 다만 달라디에 총리도 대독 유화론자라 보긴 어렵다. 당장 뮌헨 협정 당시 평화를 지켰다며 자신을 환영하러 온 군중들을 보고 "바보들."이라고 내뱉었다.[5] 이때는 아직 1940년 3월이었다. 아직 독일과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묶인 상황에서 독일의 우호국인 소련이 또다른 약소국 핀란드까지 무너트리는 동안 내각은 뭘 하고 있었냐는 책임이 제기된 것이다.[6] 영국의 경우 개전 직후 보수당과 자유당이 연합당 거국내각이 형성되었다. 노동당이 불참하긴 했지만 이는 네빌 체임벌린 개인에 대한 비토였지 거국내각 참여에 대한 비토가 아니었다. 결국 체임벌린이 실각하고 처칠이 총리가 되자 노동당도 전면적으로 거국내각에 참여한다.[7] 레노를 포함한 프랑스인 포로들이 같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연합군 쪽의 병력이 워낙 부족했던데다가, 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남성 포로들이 1차 대전 당시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독일 제국군과 싸운 경험이 있어 무기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연합군 편으로 돌아선 독일 국방군 부대의 지휘관인 요제프 강글 소령은 전투 중 레노를 보호하려다가 항전파 무장친위대 측에서 쏜 탄환을 맞아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