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gcolor=#030><tablebordercolor=#030> 이터 성 전투
Schlacht um Schloss Itter
Battle of Castle Itter ||
Schlacht um Schloss Itter
Battle of Castle Itter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1945년 5월 5일 | |
장소 | |
오스트리아 슐로츠-이터 성 | |
교전측 | |
방어측 | 공격측 |
미합중국 육군 독일 국방군 투항한 무장친위대 오스트리아 저항군 | 나치 충성파 무장친위대 |
지휘관 | |
존 잭 리치 대위 헤리 베세 중위 요제프 강글 소령† 쿠르트지크프리트 슈라더 대위 | 게오르크 보흐만 상급대령 |
전력 | |
미합중국 육군 16명 독일 국방군 12명 무장친위대 1명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와 프랑스 포로들 M4 셔먼 1대 | 무장친위대 150명 8,8cm FlaK 1문 FlaK 30/38 2문 |
결과 | |
미군과 국방군의 승리 | |
기타 | |
역사상 최후의 공성전 서부전선에서의 공식적인 마지막 전투 | |
피해규모 | |
미국 전차 1대 격파 방위군 장교 1명 전사 4명 부상 | 50명~60명 전사 100명 포로 |
[clearfix]
1. 개요
Die Schlacht um Schloss Itter / Battle of Castle Itter이터 성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5년 5월 5일경 일어난 전투이다. 연합군과 독일 육군 및 소수의 투항한 무장친위대, 그리고 소수의 프랑스 VIP들이 연합해서 나치 충성파 무장친위대 잔당들과 싸운 전투이다.
2. 배경
이터 성은 오스트리아 이터 마을 근처의 작은 성으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 독일이 공식적으로 임대한 성이었다.[1] 이 성을 임대한 이유는 VIP들의 전용수용소로 쓰기 위함이었다. 즉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인사들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이 곳에는 특히 프랑스인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는데 막심 베이강 대장, 모리스 가믈랭 대장, 에두아르 달라디에 전 국무총리, 폴 레노 전 국무총리, 불의 십자단을 이끌던 우익계 정치인 프랑수아 드 라 로크, 노조 운동가 레옹 주오[2], 심지어는 샤를 드골의 누나와 테니스 선수 장 보로트라(1994년 사망)[3]까지도 수용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타데우시 코모로프스키 등 프랑스 외 타국 VIP나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분리된 수감자들이 유지•보수와 잡일을 위해 수용되어 있었다.이들은 형세가 불리해질 시 연합국에 대한 교섭용 인질로 쓸 수 있도록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따로 수감되어 있었다.
3.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고 전쟁이 거의 끝나자, 교섭용으로 잡아두고 있었던 이들 프랑스인들이 쓸모가 없어졌다. 일반적인 군대라면 자신들은 항복하고 포로들은 평화롭게 인도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이터 성은 그 악명 높은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소관 지역이었고, 관리자들은 무장친위대였다. 그래서 당연히 이들은 쓸모가 없어진 포로들을 처형하고자 했다.한편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으로 활동하다가 포로로 잡혀 들어온 즈보니미르 추치코비치(Zvonimir Čučković)라는 크로아티아인이 있었는데 윗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는지 이터 성의 지휘관인 제바스티안 비머(Sebastian Wimmer) SS 대위의 명령에 따라 마을로 심부름을 나가게 되었다. 기회를 잡은 추치코비치는 인근까지 진격한 미합중국 육군에게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근처 아무 미국인에게나 줄 심산으로 영어 편지를 가지고 성이 위치한 산에서 5km 거리의 뵈길 마을로 내려갔으나 아직 독일군이 점령 중인 것을 확인, 곧장 인스브루크로 향했으며 인스브루크 시 외곽에 진주해 있었던 연합군인 미 육군 제6군단 소속 제103보병사단 제409연대와 만났다. 비보를 전해들은 409연대는 이터 성으로 향했으나, 뵈길 주변을 경계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독일군의 포격이 격렬했기에 진격을 중단했다.
4. 전투의 전개
이터 성 전투의 45초 요약
비머 대위는 심부름 삼아 내보낸 추치코비치가 돌아오지 않자 연합군을 만나러 갔다고 판단, 친위대원들과 함께 도망쳤으며, 비머 대위는 이후 잠적해 오늘날까지 생사 불명 상태이다. 남아있는 포로들은 무기를 접수해서 무장했고 이터 성으로부터 5km 거리의 뵈길[4]로 가 레지스탕스와 협력을 시도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게오르크 보흐만 SS 상급대령이 지휘하는 무장친위대 부대가 접수한 상태였고, 그들은 이미 처형을 계획하고 있었다.
포로들에게는 천만다행히도 엉뚱한 곳에서 구원이 내려왔다. 바로 요제프 강글 소령의 독일 육군 병력들이었다. 이들은 소수 병력이었기에 이터 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는데, 미 육군 제12사단에 항복을 했고, 제23기갑대대의 존 잭 리 육군 기갑대위와 함께 이터 성 공세를 하게 된다.
하지만 성으로 가는 길목과 가교가 너무 부실했다. 때문에 증원된 부대는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M4 셔먼 전차 "Besotten Jenny" 1대와 14명의 미 육군 보병, 그리고 독일 육군 10여 명 및 그들을 실은 트럭 1대와 함께 성으로 향했다. 이들은 길목을 검문하던 SS 병력을 격파하며 성에 도착했고, 무장친위대 장교 출신이지만 포로들과 협력하는 쿠르트지크프리트 슈라더(Kurt-Siegfried Schrader) SS 대위[5]와 함께 수성을 하게 된다.
5월 5일이 되자 150명 규모의 무장친위대가 이터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1차 공격 직전 독일 육군 병력 몇몇이 몰래 탈영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당연히 자발적으로 항전파 SS 부대에게 정보를 불거나 탈영길에 우연히 마주쳐서 심문 끝에 실토당하는 등, 이터 성 내부의 방어 병력에 관한 정보가 상당수 누설이 되는 참사가 벌어져서 성 내부의 '미군 + 항복파 독일군 + 오스트리아 저항군 + SS 대위 + 프랑스 포로들' 연합부대에게 있어서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셔먼 전차가 있었으나 셔먼을 격파하기 쉬웠던 무장친위대의 8,8cm FlaK에 격파당했고, 무전시설까지 파괴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다행히 격파당한 셔먼 전차는 천만다행으로 포탄이 내부에서 연료통이나 탄약고를 건드리거나 폭발하지 않고 차체를 뚫고 빠져나가 파편에 무전수가 부상당한 것 외엔 부상자나 전사자가 없었다. 12시가 되어 증원 인력인 미 육군 142연대가 왔지만 무전시설 고장으로 적 위치를 도통 알릴 수가 없었는데, 장 보로트라가 농부로 변장하여 무장친위대의 감시망을 뚫고, 포화를 피하며 142연대에 알렸다. 해당 전투를 다룬 넷지오의 다큐에 따르면 장 보로트라는 이전에도 농부로 변장해서 이터 성을 빠져나가려다가 딱 걸렸던 적이 있었는데, 일전에 실패한 방식으로 성공한 셈이었다. 결국 오후 4시가 되자 무장친위대는 142연대의 공격을 받고 괴멸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항복파 육군 병력을 이끌던 강글 소령은 같이 싸우던 폴 레노 총리를 보호하다가 저격당해 전사했다. 이로 인해서 강글 소령은 사후 미국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강글 소령은 오스트리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아서, 현재도 뵈길 마을에 강글 소령의 기념비가 남아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5. 의의
이 전투는 독일군과 연합군인 미군이 같이 싸운 전투로도 유명하다.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2일 전에 벌어진 전투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서 가장 기묘한 전투이기도 하다. 또한 공식적인 기록으로 최후의 공성전이라는 특이한 기록도 지니고 있다. [6]다만 일각에서는 이 전투를 근거로 들어 국방군과 친위대의 차이를 강조하는 식으로 국방군 무오설을 은근슬쩍 주장하기도 한다. 독일이 멸망하는 날까지도 나치 이념을 광신했던 친위대와는 달리, 국방군은 포로를 지키고자 나치와도 싸울 정도로 신사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전투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이다. 독일 군사사학자 볼프람 베테(Wolfrahm Wette)의 연구에 따르면 국방군 참전자 1,700만 명 중 나치 정권에 적극적인 저항을 한 사례는 고작 100건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국방군 장병들은 친위대와 마찬가지로 나치 정부의 결정에 순응했다. 그들은 전쟁 범죄와 홀로코스트에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즉 연합군과 손을 잡은 요제프 강글 소령의 행동은 국방군 절대 다수의 그것과는 명백하게 다른 것이었다. 때문에 이 전투를 들어 국방군을 옹호하는 행위는 역사 왜곡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절대다수의 국방군 장병들과 달리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던 요제프 강글 소령과 그 부하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강글과 함께 싸운 쿠르트지크프리트 슈라더 SS 대위나 '아우슈비츠의 선인' 한스 뮌히 SS 소위[7] 등의 업적으로 친위대라는 집단의 범죄 책임이 감경되지는 않는 것처럼, 강글 소령과 국방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전투를 다룬 노래가 있다. Sabaton의 'The Last Battle'이다.
이터 성 전투 직전인 1945년 4월 28일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데,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호스타우(Hostouň)에 있던 구 합스부르크 황실 소유의 리피자너 품종 목장의 말들을 무장친위대의 네로 명령 집행에서 구출하기 위해 목장을 관리하던 독일 국방군 수의관들이 미 육군에 지원을 요청하여 미 육군이 '카우보이 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병력을 보내 독일군 수의관들과 이 목장에서 격추로 입은 부상을 치료받던 독일 공군 조종중령, 현지에서 미군에게 항복한 독일군 소속 카자크 기병들의 도움을 받아 700마리 이상의 말들을 구출해 낸 일이 있었다.#
[1] 물론 말이 임대였지 1943년 하인리히 힘러의 명을 받은 오스발트 폴이 성주 프란츠 그뤼너로부터 성을 탈취하여 사실상 무장친위대 소유가 되었다.[2] 훗날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3] 프랑스 오픈의 유래가 된 4명 중 한 명이다.[4] 추치코비치가 처음 가서 독일군이 점령 중인 사실을 알고 다른 지역으로 가기로 했던 그곳이다.[5] 참고로 이 사람은 무장친위대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별다른 전쟁범죄를 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1941년 7월 18일 'SS 대원으로서의 가치가 결여된 행동'으로 인해 엄격한 문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존재(# 단 어떤 이유로 인한 문책인지는 불명)하는 등, 하여튼 다른 전범의 행적들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과 이 전투에서 연합군과 같이 힘을 합쳐서 항전파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는 점으로 인해 전후 연합국 측 재판관들의 호의를 얻게 되어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6] 비공식적으로는 5년 뒤인 6.25 전쟁 당시 미군이 서울 탈환을 시도할때 행주산성에서 농성하는 북한군을 상대로 공성전을 시도 한 기록이 있다.[7] 아우슈비츠의 친위대 의사로, 멩겔레 등과 달리 실험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수감자들을 치료해주기만 하였으며 이로 인해 전후 최고 국가 재판에서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받았다. 간수로서는 유일하게 전후 생존자들의 초청을 받아 수용소 해방 5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대해서도 평생 비판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