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2-22 12:16:18

1961년 프랑스 쿠데타 시도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961년 프랑스 쿠데타 시도
Putsch d'Alger[]알제의 반란이라는 뜻이다.]
انقلاب 1961 في الجزائر
Algiers putsch of 1961
알제리 전쟁의 일부
일시
1961년 4월 21일 ~ 1961년 4월 26일
장소
프랑스령 알제리
원인
알제리의 자결권 부여에 대한 군부의 반발
대치 세력
프랑스 정부 프랑스군 내 강경파
주요 인물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샤를 드골 대통령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미셸 드브레 총리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라울 살랑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에드몽 주오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모리스 샬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앙드레 젤레르
결과
쿠데타 실패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clearfix]

1. 개요

알제리 전쟁 중인 1961년 4월 알제리에 자결권을 부여하고자 했던 샤를 드골 대통령에 반발한 프랑스군의 장성들이 알제리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장군들의 반란(Putsch des Généraux)으로도 불리는 이 반란은 4월 21일부터 4월 26일까지 이어졌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58년 프랑스 쿠데타 시도(1958, 프랑스)[3], 23-F(1981, 스페인)[4],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2024, 대한민국)[5]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선진국에서 일어난 극히 드문 쿠데타다. 다만 말이 프랑스에서 일어난 쿠데타지 실제로 쿠데타가 일어난 곳은 프랑스령 알제리였기에[6] 23-F와 윤석열 계엄령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2. 배경

1954년부터 이어진 알제리 전쟁이 수렁에 빠진 가운데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의 출범 이후 대통령으로 취임한 샤를 드골은 알제리에 민족 자결권을 부여할 것을 천명했다. 1961년 1월 8일에 실시된 국민투표는 프랑스 본토에서 75%, 알제리에서 69%의 찬성이 나왔으며 당시 총리였던 미셸 드브레는 알제리 임시정부와의 협상을 시작했다.

한편 샤를 드골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한 것은 프랑스군이었는데 에드몽 주오라울 살랑은 2월 비밀군사조직을 결성하여 알제리 독립 시도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3. 전개

1961년 4월 22일 알제리의 독립을 반대하던 퇴역 장군과 현역 군인들은 프랑스 극우 정치인인 장자크 쉬지니의 도움을 받아 알제를 장악하였다.[7] 또한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 제1외인낙하산연대 및 프랑스 육군 공수부대는 이들을 도왔다. 알제를 성공적으로 장악한 쿠데타군은 오전 7시 군이 알제리와 사하라 사막을 장악했다는 메시지를 발표한 뒤 당시 알제리를 방문 중이던 정부 고위 관료들과 군인들을 체포하였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샤를 드골 대통령은 알제리에 비상 사태를 선언했고 프랑스 좌파 정당과 노동 조합은 군부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8]

다음 날 드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입었던 군복을 입고 병사들에게 쿠데타군에 가담하지 말라고 호소하였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던 징집병들은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거나 이들을 투옥하였다. 한편 알제리 제2, 제3의 도시인 오랑콘스탄틴의 지휘관들은 쿠데타에 참여하라는 모리스 샬의 명령을 거절하였다.

4월 25일 화요일, 프랑스 정부는 쿠데타군의 손에 원자폭탄이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예정보다 빨리 원자폭탄 실험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점차 쿠데타군은 사분오열하기 시작하였고, 더 이상의 와해를 막기 위해 모리스 샬 장군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3,000여명의 피에 누아르 앞에서 알제리 독립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데타군의 와해는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다음 날 쿠데타 군은 '프랑스의 알제리 만세!'를 외치면서 알제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 쿠데타를 주도한 모리스 샬이 자수를 함과 동시에 쿠데타군은 항복하였다.

4. 결과

모리스 샬과 앙드레 젤레르는 금고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다른 주동자였던 에드몽 주오와 라울 살랑은 에비앙 협정 체결을 방해하기도 했으나 1962년에 체포되었다. 에드몽 주오와 라울 살랑은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1968년 모두 사면되었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재임한 1982년 에드몽 주오와 라울 살랑은 피에르 비고, 자크 포르, 마리미셸 구로, 귀스타브 망트레, 장루이 니코, 앙드레 프티 등 다른 가담자들과 함께 복권되었다.

반란을 주도했던 모리스 샬과 앙드레 젤레르는 1979년에, 라울 살랑은 1984년에, 에드몽 주오는 1995년에 각각 사망하였다.

[] [2] 반란을 주도한 4명의 장군. 왼쪽부터 앙드레 젤레르, 에드몽 주오, 라울 살랑, 모리스 샬이다.[3] 원래는 파리까지 점령할 계획이었지만 코르시카를 점령한 후 끝났다.[4] 다만 이쪽은 군사정권 종식 5년 후라는 시대 배경도 감안해야 한다.[5] 이쪽은 친위 쿠데타다.[6]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 비교하면 일본, 영국 본토가 아니라 일본령 조선, 영국령 아일랜드와 비슷한 포지션이다.[7] 쉬지니는 당시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의 독립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자 반란을 일으키다 체포당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가석방 기간 도망쳐 알제리에 도착하였다.[8] 샤를 드골이 비상 사태를 선언하면서 한 말이 유명하다. 그 말은 '여러분, 이 문제의 심각한 점은 그것이 심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Ce qui est grave dans cette affaire, messieurs, c’est qu’elle n’est pas sérieus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