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역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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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짧게 보는 아일랜드의 역사.
유럽 대륙과 브리튼 섬에서 게르만족으로부터 밀려난 켈트족이 마지막까지 버틴 지역으로 현재 남아 있는 켈트 신화 중 대다수는 아일랜드 출전이다. 나머지는 웨일스 신화 정도.
2. 구석기
12,500년 전 ~ 10,000년 전최후 빙기 시절 빙하의 이동과 인간의 유입
구석기 시대 아일랜드식 움막집.
구석기 시대(Palaeolithic)인 약 12,500년 전부터 브리튼 제도와 아일랜드 섬에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발견된다.
왼쪽은 칼 자국이 새겨진 곰의 뼈. 오른쪽은 아일랜드, 클레어의 그웬돌린 동굴.
상당한 양의 구석기 시대의 구석기들이 발견되어 온 반면에 아일랜드에서 구석기 시대의 정착지를 확실하게 찾은 것은 전무하다. 하지만 1903년에 앨리스(Alice)와 클레어(Clare)의 그웬돌린 동굴(Gwendoline Cave)에서 곰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그 뼈는 석기들과 더불어 절단 표시의 깨끗한 흔적들이 보이고 방사성 탄소 연대(Radiocarbon dated)가 약 12,500년 전 무렵으로 나왔다.[1]
3. 중석기
10,000년 전 ~ 6,000년 전수렵 채집인들의 움막집.
중석기 시대(Mesolithic) 이후 북극 만년설들의 후퇴에 따라 기후가 더욱 혹독하게 변화했던 때가 중석기 수렵 채집인들이 아일랜드에 퍼진 가장 이른 시기라 확인되었다.
왼쪽은 킬그레니 동굴. 오른쪽은 내부 모습.
하지만 아일랜드 남서부에 있는 먼스터(Munster) 지역의 킬그레니 동굴(Kilgreany Cave)에서 발견되어 온 흔적들이 약 11,000년 전일 여지가 있다.[2] 일부 학자들은 그 시기에 아일랜드와 브리튼 섬이 연결되어 육로가 존재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더 후대의 연구들은 일부 지역들에서 기후가 아직 춥고 그 지역 빙하들이 있었을 때인 약 16,000년 전 무렵에 브리튼 섬 본토로부터 아일랜드 섬이 분리되었다고 보았다.
4. 신석기 (6,000년 전 ~ 4,500년 전)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 문화유산 | 1993년 보인 굴곡부의 고고 유적군 Brú na Bóinne - Séadchomharthaí cheantar seandálaíoch na Bóinne | 1996년 스켈리그 마이클 Sceilg Mhichíl |
||<-3><tablewidth=450><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FFF,#1F2023><#000>
유네스코 세계유산 ||
유네스코 세계유산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아일랜드어|]] Brú na Bóinne - Séadchomharthaí cheantar seandálaíoch na Bóinne | ||
[[영어|]] Brú na Bóinne - Archaeological Ensemble of the Bend of the Boyne | |||
[[프랑스어|]] Brú na Bóinne - Ensemble archéologique de la Vallée de la Boyne | |||
[[한국어|]] 보인 굴곡부의 고고 유적군 | |||
국가·위치 | 아일랜드 미스 카운티(Meath County) 북위 53° 41′ 40.9″ 서경 6° 28′ 31.8″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93년 | ||
등재기준 | (ⅰ)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 ||
(ⅲ)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
(ⅳ)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
지정번호 | 659 | }}}}}}}}} |
아일랜드식 고인돌.
기원전 3200년 전후 아일랜드 미스 주(County Meath) 브루 너 보너(Brú na Bóinne) 지역 보인 강 북쪽으로 1 km 떨어진 곳에 건설된(지어진) 유명한 신석기 시대 아일랜드식 통로 돌무덤(Irish Passage Stone Tomb) 유적인 뉴그랜지(Newgrange).[3]
신석기 시대(Neolithic)인 약 6,000년 전까지 아일랜드에는 수렵 채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현존하고 있는 신석기 유적들의 흔적을 보면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갈라져 나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이베리아인의 한 분파인 것으로 추정된다.
코노트 시드 평원(Ceide Fields in Connacht)의 탐험으로 높은 신석기 시대의 문화와 도기류의 등장에 의한 특징, 정교한 석기들, 직사각형의 나무 집들, 공동 거석 무덤들(Communal Megalithic Tombs)에 이르는 다양한 생활 흔적들이 발견되었고, 크노스(Knowth)와 도스(Dowth)에서의 무덤들 중 일부는 거대한 돌 기념물들과 통로 무덤들(Passage Tombs of Newgrange)이 발굴되었다. 고인돌과 코트 케언, 통로 무덤들, 쐐기 모방의 갱도 묘들로 식별되어 온 아일랜드 거석 무덤들(Irish Megalithic Tombs)의 4개의 주된 양식들이다. 렌스터와 먼스터 지방에서 각각의 성인 남성들이 흙 제방들 아래에 조각들이라 불리는 작은 돌 구조물들 안에 매장되었고 독특한 장식이 된 도기류도 있었다. 이 시기에 섬은 인구 밀도가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신석기 시대 말엽에 가까워질 무렵 원형의 제방 울타리들과 원형의 제방 목재, 돌, 배치되고 움푹 들어간 원들과 같은 새로운 기념물들이 나타났다.
5. 청동기
기원전 2500년 ~ 기원전 500년경청동기 시대 초기 아일랜드식 스톤헨지.
청동기 시대(Bronze Age)인 약 2,000년 전 무렵 아일랜드에서 정교한 금, 청동 장식, 무기, 도구들의 생산물이 보인다. 공동 거석 무덤들의 건설에서 묘지들, 원형의 대지 또는 석조로 지어진 흙 무덤들, 케언으로 알려진 매장지에 위치 할 수 있는 작은 돌 조각들, 단순한 구덩이들로 죽은 자의 매장에 이르기까지의 움직임이 있었다. 시대의 경과에 따라 흡착 매장은 화장으로 이어졌고 청동기 시대 중기에 유물들은 자주 대형 매장 유골 단지 아래에 놓여지게 되었다.
민족적 구별이라고 부를 만한 인류 정착이 시작되었고, 현 아일랜드의 원주민인 켈트족의 게일인들이 이때 유입되었다. 신화에서는 밀레시안의 상륙으로 묘사되고 아일랜드 신화 대계(Mythological cycle)의 주 배경이 되는 시대다. 이 당시를 설명하는 후세의 문헌들은 미신적 화소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실제 역사적 사건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논쟁이 있다.
일반적으로 신족인 투어허 데 다넌은 그리스도교 상륙 이전 아일랜드의 애니미즘 토속신앙을 인격화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포모르 역시 허구의 존재거나 비문명화된 야만 부족을 상징한다. 반면에 피르 볼그는 당시 청동기 부족을 이끌었던 실존하는 연맹 국가와 군장들의 이야기가 다수 포함되었다. 밀레시안은 기독교 전래 이후 창작된 종족이다.
6. 철기
기원전 500년경 ~ 기원후 500년경아일랜드 신화의 등장 인물과 종족 | ||||||||
신화 대계 | 얼스터 대계 | 피어너(오신) 대계 | ||||||
카사르* | 파르홀론* | 네메드 | 피르 볼그 | 투어허 데 다넌 | 투어허 데 다넌 | |||
밀레시안* | 쿠 훌린, 콘호바르 막 네사 등 | 핀 막 쿨, 디어르머드 우어 디브녀 등 | ||||||
포모르 | 포모르 | |||||||
*고대 신화 기록 중, 《에린 침략의 서》를 편찬한 후대 아일랜드인이 윤색한 것으로 추정되는 종족. |
아일랜드의 철기시대는 대략 기원전 500년 무렵 시작되었다. 기원전 6세기 여러 켈트 왕국들의 흔적들이 문헌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근처 브리튼 섬이나 지중해 지역과 교류를 하거나 약탈을 하였다. 철기 후기까지도 아일랜드 역사는 신화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일랜드 신화의 4대 고리 중 얼스터 대계(Ulster Cycle)와 피니언 대계(Fenian Cycle)가 이 시대를 다루고 있다. 대표적으로 쿠 훌린 같은 영웅들의 활약이 유명하다. 히베르니아 시대나 이베리아인이 정착한 시기도 이때로 추정된다.
7. 고대 시대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 |
게일인 | 픽트족 |
브리튼인 (로만 브리튼) |
8세기 무렵 아일랜드 섬의 왕국들을 지배하는 부계 왕조들(Patrilineal Dynasties)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이 지금의 영국 잉글랜드 지역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를 점령했을 때도 아일랜드에는 미치지 않아 켈트족의 고유 문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아일랜드 섬을 '히베르니아(Hibernia)'[4]라고 불렀다. 다만 아일랜드인들은 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게일인 시대의 아일랜드는 5~9개[5]의 왕국들로 이루어졌다. 이 왕국들을 쿠어거(Cuaighe)라고 한다. 아일랜드의 다섯 지방으로 알려진 울라(얼스터), 무운(먼스터), 러인(렌스터), 코나흐타(코노트), 미데(미스)들이 이런 쿠어거들이었다. 각 쿠어거들은 투어허(Tuatha)[6]라는 수많은 소왕국들로 나뉘었다. 쿠어거의 왕을 리(Rí)라고 했다. 또한 아일랜드 섬 전체에 대한 군주로서 쿠어거의 '리'들 위에 아르드리(Ard Rí, High king)가 있었다. 아일랜드 신화에서는 아르드리가 기원전 19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되고 적게 잡으면 846년, 최대한 높여도 459년에야 아르드리가 출현했다. 아르드리의 왕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쿠어거의 '리'들 중 힘센 자가 아르드리를 겸했다. 그래서 쿠어거들은 국력이 좀 강해졌다 싶으면 군사를 일으켜 아르드리에게 도전했다. 아르드리의 권한은 강하지 않았고, 지극히 형식적인 왕위였다. 미데의 플란 너 시나너, 무운의 브리안 보루마(클론타프 전투에서 전사) 등의 아르드리가 통일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아일랜드는 중세 내내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다.
4세기 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시기에 아일랜드의 켈트족들은 오히려 브리튼 섬의 웨일스(Wales), 콘월(Cornwall) 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했었다.[7] 이들이 그 땅에 세운 왕국들 중에서 단명하지 않은 유명한 국가로는 웨일스 남서부 지역의 더베드(Dyfed) 왕국과 남부 지역의 브레콘(Brycheiniog) 왕국이 있고 둘 다 500년 이상 유지되었다.
5세기에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전파했다고 알려진 성 파트리치오(St Padraig, Saint Patrick)도 노예로 잡혀갔다가 가톨릭에 귀의하여 일련의 선교사들과 함께 켈트족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했다. 아일랜드는 기존의 켈트 다신교인 드루이드 신앙 체제가 소멸하고 600년경에 거의 완전히 가톨릭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8. 중세 시대
8.1. 바이킹의 침략
바이킹의 아일랜드 침략을 묘사한 그림들.
바이킹이 아일랜드 섬에 침입한 경로.
8세기 말 바이킹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할 무렵에 아일랜드 섬도 약 200년에 걸친 기간 동안 그들의 침공을 받았는데 당시 아일랜드 섬에 있던 여러 왕국들은 바이킹에 맞서 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795년에 처음 아일랜드를 공격한 이래 여러 지역에 걸쳐서 그들이 점령한 거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852년 현대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도 그들이 이 땅의 원주민인 켈트족들을 쫓아내고 건설한 거점이었다.
왼쪽부터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맨 섬에 위치한 라운드 타워.
아일랜드 동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원통형의 석탑인 라운드 타워[8]는 중세 시대에 망을 보거나 바이킹의 침략에 대비하고 피하기 위해 지어진 토착민들의 방어 시설이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많은 성직자와 학자들이 아일랜드로 망명하여 중세 아일랜드는 문예의 부흥기였다. 하지만 바이킹의 침략과 약탈로 아일랜드의 학문적 전통이 끊어지고 방대한 기록 유산들이 멸실된다.
바이킹 노르드인들은 스코틀랜드 서부의 군도에 정착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고대에 아일랜드 게일인들이 먼저 정착한 곳이었다. 바이킹 지배자(역사에 따르면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인 약골 이바르)는 수세기에 걸쳐 게일인과 혼합되었다. 그들은 스코틀랜드 내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아일랜드로 피난가기도 했는데, 대부분 용병으로 활동했다. 이들이 바로 수백년 간 아일랜드와 브리튼 섬의 군사력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친 갤로글라(갤로우글라스)다. 갤로글라는 아일랜드의 군소 왕과 영주들에게 고용되어 작은 규모의 전쟁에서 활용되었으며 이전에는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도 활약한 바 있다.
8.2. 잉글랜드의 침략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의 승리로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에 올라 '윌리엄 1세'가 되면서 노르만 왕조가 세워지고, 노르만족 기사들이 잉글랜드의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다. 윌리엄 1세는 자신의 원정에 동행한 노르만족 부하들에게 잉글랜드의 영지를 분배했으나 토지를 상속받지 못하는 차남 이하의 노르만계 기사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용병으로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일랜드 섬도 유럽 각지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왕국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서부 지역의 코노트 왕국(Kingdom of Connacht)의 국왕이 힘을 얻어 이웃 소국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넓히며 통일 아일랜드의 지배자(High King of Ireland) 자리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남부 지역의 렌스터 왕국(Kingdom of Leinster)이 정복당하자 추방당한 렌스터 왕국의 국왕이 봉신이 되는 대가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헨리 2세[9]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헨리 2세가 거절하자 렌스터 국왕은 잉글랜드 내에 다른 귀족들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해 왕위를 넘긴다는 대가로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한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는 독단적으로 노르만계 기사들을 이끌고 1169년 아일랜드를 침공하며 몇백 년에 걸치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악연이 시작됐다.리처드 드 클레어의 군대가 아일랜드에서 승승장구하자 헨리 2세는 그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군벌화됨을 경계했다. 결국 헨리 2세는 당시 교황 하드리아노 4세[10]를 설득해 아일랜드 섬 전체를 잉글랜드에 귀속시킨다는 <교황 칙서>(Laudabiliter)[11]를 받아냈고, 이를 근거로 1171년 손수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 섬의 소왕국들을 복속해 '아일랜드의 영주'(Lord of Ireland)가 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력은 더블린 일대[12]나 코크(도시), 리머릭 등 일부 지방 거점에 한정된 것이었고 여전히 게일인 토착 세력들이 아일랜드 각지에 건재했다.[13] 이들 게일인 원주민들을 견제하기 위해 잉글랜드는 노르만계 잉글랜드인 정착민들에게 영지를 하사해 아일랜드에 장원제를 도입했다. 이렇게 중세 시대에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한 노르만인들은[14] 때때로 잉글랜드 국왕의 편에 서서 게일인들과 충돌했지만 종종 게일인 귀족들과 통혼을 하고, 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튜더 왕조가 들어서는 중세 말에는 대부분 동화되어 '아일랜드인'(Irish)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15]
9. 근세 시대
사실 중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잉글랜드 국왕들은 아일랜드 통치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고[16] 피츠제럴드(FitzGerald) 가문과 버크(Burke) 가문 등을 위시한 토착 귀족들에게 암묵적으로 자율권을 주었다. 그러나 장미 전쟁이 끝나고 들어선 튜더 왕조 이후부터 잉글랜드 국왕들은 직접적으로 아일랜드에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중앙집권체제를 도입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킬데어 백작 토마스 피츠제럴드 등 아일랜드의 유력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말았다. 한편 잉글랜드 국교회를 세워 로마 가톨릭과 결별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국왕이 겸임하는 '아일랜드의 영주'(Lord of Ireland)라는 지위가 교황의 봉신이라는 점에 불만을 품고, 1542년에 아일랜드 왕국(Ríocht na hÉireann, Kingdom of Ireland)[17]을 세워 아일랜드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잉글랜드가 성공회를 받아들여 개신교 국가가 되면서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는 더욱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잉글랜드는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의 토지를 몰수해 개신교를 믿는 잉글랜드인들에게 조직적으로 분배[18]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1세는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의 통치를 더욱 공고히 했는데 이런 움직임에 반발하여 티론의 2대 백작이었던 이 모르 오 넬은 '9년 전쟁(The Nine Years War, 1593~1603: '티론의 반란'으로도 불림)'을 일으켰다. 그는 용감하고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므로, 잉글랜드 군대는 그와 대항한 7년간의 전투(1593~1600)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1601년에 있었던 '킨세일 전투(The Battle of Kinsale)'에서, 4,500명의 스페인 원군의 지원을 받은 아일랜드 군대는 결국 잉글랜드 군대에게 패했다. 비록 이 전투에서 오 넬이 살아남긴 했지만, 그의 세력은 와해되어 마침내 잉글랜드 왕에게 항복했다. 이어 1607년 9월 14일, 오 넬과 루드라거 오 돔날을 비롯한 90명의 얼스터 귀족들은 반역자로 낙인이 찍혀 땅을 몰수당한 채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 대륙으로 도주했다. '백작들의 도주(The Flight of the Earls)'[19]로 알려진 이 사건은, 아일랜드 역사에서 300여년 후 아일랜드에 아일랜드 자유국이 세워지기 전까지 '아일랜드인에 의한 아일랜드 통치'가 종식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후 얼스터 지역이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아일랜드의 전 지역이 더블린을 중심으로 잉글랜드 왕실로부터의 직할통치를 받게 되었다. 심지어 아란 제도(Aran Islands)처럼 멀리 떨어진 곳도 왕의 대리인이 직접 통치했다.
이 과정에서 잉글랜드 정부는, 이미 중세시대 아일랜드에 이주한 잉글랜드계 이주민(Old English)들은 가톨릭을 믿고 아일랜드인들에 동화됐다는 이유로 잉글랜드에서 버린 자식 취급하며 배제하고, 이들 대신 성공회를 믿는 새로운 잉글랜드 이주민(New English)들을 새로 이주, 정착시켰다. 이렇게 근세에 새롭게 아일랜드로 이주해 아일랜드 독립 이전까지 지배계층으로 군림한 잉글랜드계 개신교 이주민들을 앵글로 아이리시(Anglo-Irish)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아일랜드 전역에 토지를 소유하는 지주로 군인들을 많이 배출[20]하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기에 독일 제국의 융커들과 비교되기도 한다.[21]
한편 이와 별개로 스코틀랜드계 스튜어트 왕조가 잉글랜드에 들어서면서 스코틀랜드인들도 아일랜드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1세는 아일랜드 식민정책의 연장으로 북부의 얼스터 지방[22]에서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토착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장로교를 믿는 저지대 스코틀랜드인들을 대거 정착시켰다.[23] 이들을 얼스터 스콧(Ulster Scots) 또는 스카치 아이리시(Scotch Irish)[24]라고 불렀다.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상대적으로 극소수의 엘리트 계층이었던 '앵글로 아이리시'와 다르게 얼스터 지방에 거주하던 '얼스터 스콧'들은 중소지주나 상공인 등 중하류층 출신들이 많았고, 현지에 뿌리박고 살기 시작하며 17세기 말 얼스터 지역에 적지 않은 개신교 커뮤니티를 형성해 훗날 북아일랜드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641년,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닥친 흉년과 높은 소작료에 폭발한 아일랜드인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온 지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의 3분의 2를 점령한 아일랜드 반란군들은 곧 1642년에서 1649년까지 존재한 아일랜드의 독립 정부인 아일랜드 가톨릭 연맹(Irish Catholic Confederation)을 결성하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보낸 토벌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수도가 킬케니에 소재했기에 킬케니 연맹(Confederation of Kilkenny)이라고도 했던 연맹은 1641년 아일랜드 반란 이후 아일랜드 귀족, 가톨릭 사제, 군사 지도자들이 모여 정부를 형성했으며, 대의회(General Assembly)라는 입법부와 최고평의회(Supreme Council)라는 행정부, 자체적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찰스 1세와 의회 간의 반목으로 잉글랜드 내전까지 터지자 아일랜드도 이 전쟁에 휘말려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아일랜드 가톨릭 연맹이 아일랜드의 자치권과 가톨릭교도 차별 폐지 등의 조건으로 왕당파 편에 서자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 군대가 아일랜드에 상륙해 무자비한 보복을 하기 시작했다. 1649년 찰스 1세의 목을 치고 영국 내전을 승리로 이끈 올리버 크롬웰이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아일랜드 가톨릭 연맹을 멸망시켰고, 아일랜드는 이후 더욱 혹독한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당시 크롬웰의 군대가 일으킨 학살로 20~30만명의 아일랜드인들이 죽어나갔는데 이는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4분의 1 정도였다. 특히 얼스터 지방에서 반란군의 세가 강했는데 크롬웰은 자신 휘하의 군인들에게 얼스터 지방의 가톨릭 교도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여 하사하고 그들을 모두 아일랜드 서부의 척박한 코노트 지방으로 추방해버렸다.[25][26]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얼스터 지방에서 개신교도의 세가 강해지도록 만들었다.
얼스터의 가톨릭교도 원주민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쉽사리 동화당하거나 개종하지 않고 영국에 대한 분노를 쌓아갔다. 반란이 꾸준히 터졌고 그때마다 게일인들은 영국계 이주민 정착촌을 공격했다. 영국 통치로 인해 희생된 가톨릭교도들의 수가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되긴 하나, 이때의 학살 위협이 북아일랜드 개신교도들의 공포를 자극해 현대까지 영국계 집단 사이에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아일랜드 통일에 반대하는 연합주의가 강해진 원인이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한편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스튜어트 왕조가 복귀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숨통이 조금 트이기 시작했다. 가톨릭교도인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토지와 재산을 빼앗긴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에게 보상안을 제시하고 가톨릭교도가 공직에 오르는 것을 허용해 아일랜드 개신교도들에게서 반발을 샀다. 결국 명예혁명으로 가톨릭교도였던 제임스 2세가 국외로 추방당하고 그의 딸인 메리 2세와 사위 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의 공동 국왕이 되자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주장하는 자코바이트 세력에 가담했고, 아일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은 윌리엄 3세를 지지하는 윌리어마이트(Williamite)가 되었다. 결국 아일랜드는 1689년 다시 내전(윌리어마이트 전쟁, Williamite War in Irealnd)에 휩싸였고, 가톨릭교도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제임스 2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1691년 윌리엄 3세의 원정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윌리어마이트 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단창단(短槍團, rapparee)[27]이 게릴라 저항을 벌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이후 아일랜드 사회는 성공회를 믿는 소수의 개신교도들이 헤게모니를 잡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가톨릭교도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28]
10. 근대 시대
사실 16세기 잉글랜드 종교 개혁[29] 이후 19세기 초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의 완전 합병까지 아일랜드 왕국의 국교는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였다. 따라서 성공회를 믿고 있던 극소수의 앵글로 아이리시(Anglo-Irish) 주민들을 제외한 가톨릭을 믿던 대다수 아일랜드인들과 장로회를 믿던 북아일랜드의 얼스터 스콧(Ulster-Scot) 주민들은 주요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교도들과 일부 개신교도들[30]이 서로 협력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에 뛰어들었다.[31] 때마침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은 아일랜드인들은 연합 아일랜드인 협회(Society of United Irishmen)를 세우고, 1798년 무장 혁명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이러한 반란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아일랜드를 직할령으로 삼기 위해 1801년 아일랜드 왕국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흡수하고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을 세웠다. 아일랜드가 연합왕국의 구성국이 되면서 영국 정부는 그동안 시행했던 장로회 신자와 가톨릭 신자에 대한 법적 차별을 폐지하기 시작했는데, 이 영향으로 협력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가톨릭과 장로회가 연합한 아일랜드 민족 진영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대니얼 오코넬을 위시한 가톨릭교도들은 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에서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아일랜드 자치권 운동(Irish Home Rule movement)을 시작했고[32] 아일랜드가 영국의 직할령으로 남길 바라는 장로회 신자들은 성공회 신자들과 연합해 가톨릭에 맞서는 개신교 연합을 구성했다.[33]이 분열은 훗날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을, 영국에선 가톨릭 vs 개신교의 종교 분쟁으로, 아일랜드에서는 식민 vs 반식민의 이념 분쟁으로 보게 된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19세기와 20세기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구성원들은 대다수의 가톨릭교도[34]+소수의 개신교도[35], 친영 진영은 소수의 가톨릭교도+대다수의 개신교도[36]였다.
10.1. 영국 병합
1801년 1월 1일 이전까지는 형식상의 동군연합이었지만 <연합법>에 따라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합병하여 형성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과 아일랜드 왕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으로 병합되어 공식적으로 한 국가가 되었다.10.2. 아일랜드 대기근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을 결정적으로 자극하게 된 감자 대기근은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다. 감자가 전래된 후로 아일랜드인은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는데[37] 상품상의 이유로 럼퍼[38]라는 이름의 한 가지 품종의 감자만 키우다가 이 품종을 숙주로 하는 전염병이 생겨 1845년에 아일랜드 대기근이 벌어졌다. 1840년대의 아일랜드 인구는 절정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때 수백만명이 병사/아사하고 수백만명이 이민을 가서 인구가 계속 줄어든 이후로 아일랜드 전체의 인구는 아직까지 그때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감자 대기근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아일랜드에는 밀과 고기 등이 넘쳤기에 그것들만 풀면 대기근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재배한 모든 곡식들을 배에 실어서 브리튼 섬으로 운반했고, 영국의 반대로 영국 상인들은 밀을 구호품으로 쓰지 않았다. 이때 다수의 아일랜드인이 굶어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배에 타고 대부분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서 많은 지역에 아일랜드인 공동체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도 순탄한 삶을 산 건 아니었다. 당시 아일랜드계 미국인은 하얀 흑인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낮은 대우와 더불어 차별을 당했다. 미국이 아니더라도 아일랜드 이주자라면 고장을 불문하고 핍박받는 것이 예사였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No Irish, No Blacks, No Dogs"라는 구호를 보기 힘들지 않을 정도였다. 아일랜드인은 '패디'(Paddy)라고도 불렸는데 '패디 왜건'(Paddy Wagon)은 속어로 경찰차를 뜻하는 말이다. 기근을 피해 피난 온 빈곤층 출신이기도 했고 영국계의 WASP들이 유난히 아일랜드인만을 천시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에도 이러한 영국계 미국인들이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을 멸시한 부끄러운 역사들의 그림자가 잘 드러나 있다. 그 밖에도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과 <디파티드>,<아이리쉬맨>을 비롯하여 <분닥세인트> 등, 사회적으로 트러블을 일으키는 문제아 혹은 갱스터가 아일랜드계 미국인 혹은 미국내 아일랜드인 커뮤니티로 등장하는 영화가 상당히 많다. 아일랜드인들을 천대하고 차별하였던 미국 사회 내의 현실이 문화를 반영하는 작품들에 그대로 묘사된 것. 그러나 정작 그 아일랜드계 이민자들도 수십년 후에 집중적으로 오기 시작한 이탈리아인에게 엄청 텃세부리고 차별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은 심각해졌다. 이 과정에서 입헌 투쟁을 벌였던 19세기 민족주의자 대니얼 오코넬(Daniel O'Connell)[39]의 운동이나 아일랜드어를 살리기 위한 아일랜드 문예 부흥 운동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와 존 밀링턴 싱(John Millington Synge) 등의 주도로 일어나기도 했다.
11. 현대 시대
아일랜드는 왜 둘로 갈라졌는가? |
11.1. 자치 운동
관련 문서: 영국의 자치권 이양내셔널리즘 열풍이 거세게 불자 아일랜드인들의 독립 의지는 점점 강해져갔고,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수많은 무장 봉기가 일어났으나 번번이 진압되어 독립은 좌절되었다. 그래도 아일랜드는 영국 영토인만큼 영국 본토처럼 지역에서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아일랜드인들의 들끓는 여론이 중앙 정치계에 전달될 수 있었다. 이에 영국 자유당을 중심으로 19세기 중반부터 아일랜드에 자치를 허용하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웨일스처럼 현지에서 양원제 의회를 구성하고 아일랜드에 관련된 입법 권한의 많은 부분을 영국 중앙 정부 의회에서 새로 생길 아일랜드 자치 의회에 넘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 본토에서는 영국 보수당을 중심으로 이 방안에 대해 연합 왕국을 해체할 것이라며 격렬한 반발이 일었고, 아일랜드 내에서도 가톨릭이 대다수인 아일랜드 대부분의 지역과는 다르게 신교도가 주류였던 얼스터 지역은 자치 방안에 대해 결사 반대했다. 결국 자치 논의는 더 진전되지 못했다.
1910년대에는 총선에서 보수당과 자유당이 하원에서 비슷한 의석을 점하고 아일랜드 자치를 주장하는 아일랜드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Party)이 약간 의석을 얻어 캐스팅 보터가 되었다. 그리고 자유당이 아일랜드 의회당과 연립 정부를 꾸리면서 자유당 정부가 아일랜드 의회당의 요구를 반영해 1911년에 <아일랜드 자치 법안>을 하원에 상정했다. 이 때에도 격렬한 논쟁이 일어 <아일랜드 자치 법안>은 하원에서 가결되었지만 보수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거부되기를 3번이나 반복했다. 결국 하원에서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40] 바로 국왕 조지 5세에게 법안을 넘겼다. 그러나 이 법안이 결국 의회를 통과하자 얼스터에서는 난리가 나서 얼스터 연합주의자(친영 진영)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가 민병대를 구성해 폭력 사태를 벌이는 등 혼란에 빠졌고, 결국 조지 5세는 법안 재가를 연기했다. 그리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의회는 <자치 법안>을 보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조지 5세가 이 법안을 <아일랜드 자치 법안>과 함께 재가하여 아일랜드 자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로 미뤄졌다.
11.2. 독립 운동
이렇게 '합법적' 자치 운동이 지체되자 1916년에는 독립 전쟁의 서막으로 불리는 부활절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고, 결국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조직되어 영국에 대한 무장 독립 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무렵에는 일부 아일랜드 출신 군인들이 독일군에 협조하여 영국을 뒤에서 치는 계획이 시도되기도 했다.[41]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8년에 영국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여기서는 신페인이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 거의 전역의 의석을 석권했다. 그리고 아일랜드 지역구에서 당선된 신페인 국회 의원 73명은 당선되자마자 따로 아일랜드 의회(Dáil Éireann)를 차려 아일랜드 공화국[42]의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의회 등원을 거부했으며[43] 이로 인해 이들과 영국 정부 사이에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아일랜드 독립 진영은 그 규모로는 영국에 대적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므로, 이들은 영국의 공공 기관을 공격하고 후퇴하는 식의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 영국은 독립 진영의 군사 조직 IRA가 공격에 나서지 않는 한 이들을 민간인과 구분할 수 없었으므로 아일랜드에 계엄령을 발동해 아일랜드 민간인들을 수색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군이 민간인의 집을 불태우고 그들을 죽이는 일도 있어 아일랜드 민중의 영국에 대한 반감을 높였다. 그리고 이렇게 아일랜드 민간인들이 피해를 보면 IRA는 더 강경한 공격을 하게 되고 다시 영국군이 강경한 대응을 하는 등 폭력이 끝없이 이어졌다.
아일랜드 독립 진영은 더 나아가 투쟁 전선을 잉글랜드로 확대하여 잉글랜드에서도 요인 습격, 공공 기관 습격 등의 군사 행동을 했다. 영국 정부는 영국 본토에도 계엄령을 발동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영국 국민들이 1차 대전에 지쳐 반대하는 바람에 달성되지 못했다.
한편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내각은 1920년에 친영 세력이 많은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를 분리해 각각 따로 자치 의회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남아일랜드의 자치 의회는 128명의 의원 중 친영 진영에 속한 4명을 뺀 124명이 신페인 당원이었고[44] 이들은 자치 의회의 의정 활동을 거부했다.
11.3. 아일랜드 자유국과 내전
결국 영국은 1921년에 아일랜드를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캐나다, 호주와 같은 자치령으로 지정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독립 세력에게 자치령 지정은 못미더운 것이었다. 자치령은 비록 폭넓은 자치를 누리지만 군사권과 외교권을 영국 본국이 갖고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섬겨 아일랜드에 그를 대리하는 총독을 두어야 하는데 그들은 완전한 독립국 아일랜드의 건설을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자치령 지정을 약조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서 신교도가 다수인 얼스터 지역 6주를 영국의 직접 통치 지역으로 남길 것을 규정하자[45] 아일랜드 독립 세력은 조약 찬성파와 조약 반대파로 분열했다. 조약 찬성파는 조약이 못미더웠지만 이것을 발판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으리라 보아 조약에 동의했고, 조약 반대파는 완전한 독립과 아일랜드 분단을 이유로 반대했다. 아일랜드 의회에서 조약 비준안이 근소한 차로 통과하자 에이먼 데 벌레라 등 조약 반대파는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의 모든 지위에서 사퇴하고, 별도의 무장세력을 꾸려 아일랜드 내전을 개시했다. 이 와중에 독립영웅 중 마이클 콜린스가 1922년 8월 조약 반대파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결국 아일랜드 내전은 조약 찬성파의 승리로 끝났다.
한편 이 내전은 아일랜드 역사학을 비롯한 아일랜드 향토를 다루는 학문 분야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내전은 앞서 말한 조약 반대파가 더블린의 아일랜드 대법원인 포 코츠(Four Courts)를 점거하고, 자유국 정부군이 이를 진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포 코츠 바로 뒤에 있던 문서 보관소가 포격에 피해를 입으면서 수백년에 걸쳐 쌓인 아일랜드 관련 기록물이 대규모로 손실되었다. 이 때문에 아일랜드 향토사를 다루는 학문 분야는 심각한 자료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1.4. 독립
내전이 끝난 후 데 벌레라를 비롯한 많은 조약 반대파측 인물들이 체포되었으나, 내전이 끝난 직후 유화정책을 취한 자유국 정부에 의해 대부분이 짧은 기간 안에 풀려났다. 1926년 반조약파의 거두였던 에이먼 데 벌레라가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 합법 투쟁을 주장하며 자유국의 정계에 참가할 것을 선언했고, 피어너 팔(공화당)을 창당하여 이듬해 의원에 당선되었다.피어너 팔이 집권하면서 아일랜드 독립은 더욱 가속화된다. 피어너 팔이 집권한 1932년부터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영국의 흔적을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의 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1937년 <신헌법>을 선포하면서 국명을 에이레(영어명 아일랜드)로 변경했고, 공화국임을 선언하면서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 집무실을 폐쇄했으며, 더 이상 영연방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자유국 성립 시기부터 영국 국왕과 그가 임명하는 총독에게는 실질적 권한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아일랜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거부하고, 중립 입장을 취했다. 아일랜드 국내는 독일 편에 참전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고,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아일랜드를 연합군 편으로 참전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음에도 아일랜드는 중립에 머물렀다. 일부 의용군이 개인 자격으로 영국군에 가담한 것이 전부이다.
11.5. 2차 대전 이후
1948년 제2차 세계 대전 후 <아일랜드 공화국 법>을 제정해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서 예우한다는 조항을 완전히 폐지했다.1949년 영국은 그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아일랜드의 영연방 탈퇴를 마침내 승인했다.
독립과 전후 시기 아일랜드 인구는 조금씩 증가하기도 했지만 오랜 정체를 겪고 있었다. 서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빈국으로 남아있던 아일랜드는[46] 상당 기간 인구 성장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 들어서 다시 일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다.[47]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장 개방을 통해 이민을 많이 받고 외국의 투자를 유치해 산업을 빠르게 성장시키면서 서유럽에서도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가 된다. 이 과정에서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구제 금융을 받을 정도로 타격을 꽤나 심하게 받았으나 현재는 꾸준한 회복세를 보이는 중이다.
[1] 출처:BBC_2, Earliest evidence of humans in Ireland.#[2] 출처:Prehistoric-Waterford, Kilgreany Cave.#[3] 아일랜드어로 시 언 우루(Sí an Bhrú)라고도 불리는 이 유적 안에는 석실들이 있는데 동짇날 석실 내부로 햇빛이 들어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종교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을 터이다.[4]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정복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5] 수를 확정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멸망하기도 하고, 분열되기도 했다는 뜻이다.[6] 투어허 데 다넌의 투어허다. '투어허'는 원래 민족, 족속이라는 뜻이었다가 이 시기에 소왕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시골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러모로 영어의 country와 비슷하다.[7] 그래서 '켈트 나무 문자'라고도 불리는 아일랜드의 전통 문자인 '오검 문자'(Ogham script)가 이 지역들의 해안가에 걸쳐 곳곳에서 발견된다.[8] 아일랜드 본토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맨 섬에도 각각 2개와 1개씩 있다. 당장 위의 사진 중 두 번째 것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것이다.[9] 사자심왕으로 유명한 플랜태저넷 왕조의 명군인 리처드 1세가 그의 3남이다.[10] 역대 교황 중 유일하게 잉글랜드 출생이다.[11] 형식적으로 아일랜드 섬 전체는 교황의 봉토이나 실질적인 통치는 잉글랜드 국왕이 행사한다는 것이다.[12] The Pale이라고 불렸다.[13] 아일랜드가 워낙 농업을 하기에 좋지 않은 땅이다보니 감자가 보급되기 전에는 정복 및 동화에도, 자체 사회 발전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는 클랜 문화가 온존한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도 비슷하다.[14] 올드 잉글리시(Old English)[15] 노르만계 혈통 아일랜드인의 대표적인 예로 월트 디즈니와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등이 있다.[16] 백년전쟁(1337~1453)과 장미전쟁(1455~1487)의 영향도 있었다. 따라서 15세기까지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통치는 제한적이었다.[17] 이후 1801년 영국에 흡수돼 사라졌다.[18] 아일랜드의 식민화(Plantations of Ireland)[19] 아일랜드어: Imeacht na nIarlaí(이먀흐트 너 니어를리), 영어: Flight of the Earls,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와 땅과 특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지원군을 모으는 것이었으나, 오 넬과 오 돔날은 로마에서 망명 중에 사망했다.[20] 대표적으로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21] 대표적인 앵글로 아이리시 출신으로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C. S. 루이스, 다우닝 가 10번지 이름의 유래가 된 조지 다우닝 남작, 기네스 맥주의 창립자인 기네스 가문 등이 있다.[22] 지금의 북아일랜드. 얼스터는 제임스 1세의 식민화 정책 이전까진 아일랜드 전역에서 가장 게일 문화색이 강하고 잉글랜드 침략자들에게 가장 격렬하게 반항하는 지역이었다. 단적으로 아일랜드 신화의 상당수 출전이 현재는 개신교 연합주의자들의 존재로 인해 영국령으로 남아있는 얼스터 지방이다.[23] 이는 영국 통치에 가장 반항적인 얼스터를 개신교로 동화시킬 목적과 오랜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져 도적 혹은 용병화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지대 주민들을 얼스터에 재정착 시킬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추가로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 로우랜드 귀족들에게 땅을 제공하려는 의도와 같은 게일 문화권인 아일랜드와 하이랜드 사이의 연계를 끊기 위함도 있었다.[24] 스카치 아이리시라는 말은 얼스터 스콧에 밀려 현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낡은 단어 취급받는다. 하지만 이들이 대거 재이주해 유의미한 집단을 형성한 미국에서는 얼스터 스콧 개신교도들을 가톨릭 아일랜드인 이민자와 구분하기 위해 자주 쓰인다. 북미로 이주한 스카치 아이리시들은 대거 변경의 애팔래치아 산맥 지대로 이주하여 독립적으로 살았다.[25] 사실 이런 정책은 크롬웰이 최초가 아니라 튜더 왕조부터 17세기까지 잉글랜드 당국이 실시한 아일랜드 식민 계획을 계승한 것이다.[26] 현재 게일어 거주 구역이 코노트 지방에 분포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27] 이들이 가지고 다니던 짧은 창(rapaire)에서 유래함[28] 이 당시 아일랜드 왕국의 공식 국교는 잉글랜드 왕국을 따라 성공회였기 때문에 장로회를 믿는 스코틀랜드 이주민들조차 상대적으로 비주류에 속했고,(물론 같은 개신교인만큼 가톨릭을 믿던 아일랜드인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대우가 나았다.) 성공회 신자가 아니면 공직에 오를 수 없다는 <Test Act>가 1703년 제정되자 많은 이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 스카치 아이리시 아메리칸이 되었다.[29] 잉글랜드 국교회 탄생[30] 정확히는 장로회 신자들[31] 아일랜드 국기의 구성(녹색-가톨릭, 흰색, 주황색-개신교)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32] 이 과정에서 가톨릭이 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의 상징이 되었다.[33] 개신교 신자들은 아일랜드가 연합왕국내에서 자치권을 얻으면 소수인 개신교 신자들이 다수인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아일랜드 자치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34] 대표적 인물은 대니얼 오코넬.[35] 민족주의 진영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이들 개신교계였으며, 주로 고교회파(高敎會派, High Church, 가톨릭적 특성 강조) 성공회에 속해 있었다. 대표적 인물은 찰스 스튜어트 파넬.[36] 주로 저교회파(低敎會派, Low Church, 개신교적 특성 강조) 성공회와 장로회 등에 속해 있었다. 대표적 인물은 에드워드 카슨.[37] 영국인들이 감자를 제외하고 상당수를 가져갔다.[38] 생산량이 매우 많다.[39] 가톨릭계 민족주의자였으며, 현재 더블린의 중심부에 그의 이름을 딴 오코넬 거리(O'Connell Street)가 있다. 원래 명칭은 17세기에는 드로게다 거리(Drogheda Street), 18세기에는 새크빌 거리(Sackville Street)였으나 1924년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동상을 거리에 세우고 명칭을 변경하였다.[40] 1911년에 통과된 <의회법>에 따라 하원은 제한적인 상황에서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 바로 국왕의 재가로 넘길 수 있게 되었다.[41] 이후 독일이 나치 치하에 들어갔을 때 아예 독일군에 블루 셔츠(청의사)라고 불리는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에도 파쇼 세력으로 참여했다. 스페인 공화정부군의 반가톨릭적 성향에 대해 보수 가톨릭이 지배적이었던 이들이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공화정부군에 참여한 아일랜드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IRA 소속으로 공화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42] 영어: Irish Republic, 아일랜드어: Poblacht na hÉireann 또는 Saorstát Éireann[43] 이 전략은 abstentionism이라 하여 신페인 당원들이 자주 써먹는 것이다. 오늘날 북아일랜드에서도 신페인은 영국 의회 총선에 출마하는데 당선자들은 영국 의회 의원으로서의 의정 활동을 하지 않는다. 북아일랜드 자치 의회에는 참석한다.[44] 친영 성향 4명은 더블린 대학교 선거구에서 당선된 의원들이었다. 당시 대학 진학률을 볼 때 일반 아일랜드 민중들은 절대 다수가 신페인을 밀어줬다는 뜻도 된다.[45] 아일랜드의 각 주(county)에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탈퇴할 권한을 줬다. 이때 아일랜드 자유국의 정식 성립과 함께 얼스터 지역 6주가 탈퇴해 영국의 직할 통치 지역이 되었다.[46]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의 2배를 넘긴 게 1972년이었을 정도.[47] 이때 며칠 정도 버틸 짐과 돈을 가지고 가까운 영국으로 페리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떠나는 아일랜드 젊은이들이 많았다. 관련된 영화 <싱 스트리트>의 초반부 BBC 뉴스는 당시 실제 보도된 것을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라피나도 그렇게 영국으로 떠나지만 실패하고 결국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