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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7 08:39:42

클론타프 전투

파일:클론타프 전투.jpg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1. 개요

서기 1014년 봄 아일랜드 동부 해안 더블린 근처 클론타프에서 아일랜드의 제183대 아르드리 브리안 보루마의 군대와 더블린의 왕 시그트뤼그 실켄비어드, 렌스터의 왕 말 모르다 막 무르차다, 그리고 해외의 바이킹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아일랜드에서의 바이킹 시대를 종식시킨 전투이다.

2. 배경

8세기 말, 유럽 각지를 종횡무진하던 바이킹 무리가 아일랜드 섬을 침략했다. 당시 아일랜드에는 여러 국가들이 각기 세력을 갖추고 분쟁을 벌이고 있어서, 바이킹의 침략에 맞서 집단 대응을 하지 못했다. 바이킹은 아일랜드의 여러 수도원을 약탈하여 수많은 서적과 보물들을 약탈하고, 현지 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나중에는 아예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꾸리기까지 했다. 이때 바이킹에 의해 개척된 항구 도시 중에는 훗날 아일랜드의 수도가 될 더블린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킹 역시 아일랜드 전역을 석권하지 못했다. 아일랜드 현지 주민들의 저항이 강하기도 했고, 바이킹 내부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바이킹이 아일랜드보다는 잉글랜드 정복에 중점을 둬서 아일랜드에 있던 전사들이 잉글랜드로 떠난 뒤 다시는 돌아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아일랜드 현지의 바이킹들이 인력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일랜드 현지 국가들도 바이킹을 몰아낼 힘이 없어서, 양측은 한 편으로는 갈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하는 형태로 공존했다.

그렇게 1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바이킹은 토착 아일랜드인과 통혼하면서 혼혈 집단을 이루었다. 이 혼혈 집단은 더블린 등 아일랜드 동부 해안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잉글랜드의 상인들을 맞이하여 그들로부터 곡물을 사들이고 아일랜드에서 출토된 귀금속을 파는 형태의 무역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대는 한 인물에 의해 150여년 후 종식된다. 그는 바로 브리안 보루마[1]였다.

보루마는 서기 941년 아일랜드 먼스터 지역의 2개의 소국 중 하나인 달카시아 왕국의 케네티그 막 로칸 왕의 12명의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2] 10살 때인 951년 아버지가 바이킹과 전쟁을 벌이던 중 전사했고, 형 라흐트나 막 케네티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2년 뒤 암살당했다. 이후 다른 형인 말 무어드 막 브리안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장성한 보루마는 형과 함께 바이킹과의 전쟁을 수행하였고, 977년 리머릭의 왕 이바르와 두 아들을 전장에서 처단하기도 했다. 978년 형이 전사하자, 그가 3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보루마는 왕위에 오른 직후에 치른 벨라치 레흐타 전투에서 적장 도누반과 아랄트를 처단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샤논 강에 들어오는 무역선을 토대로 유럽 대륙의 선진 무기 기술과 선박 건조 기술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984년 더블린 왕국에 맞서 워터포드, 맨 섬의 바이킹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후원을 받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 남부 일대의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세력을 크게 키웠고, 997년 클론페르트에서 아일랜드의 182대 아르드리 말 세크날 막 돔날과 협정을 맺어 말 세크날이 아일랜드 북부의 지배권을 갖는 대신에 자신은 남부 지배권을 갖기로 합의했다.

서기 999년 12월, 킬데어 일대를 지배하던 렌스터 왕 말 모르다 막 무르하가 더블린 왕 올라프 크바란의 아들 시그트뤼크 올라프손과 연합하여 보루마에 대항했다. 이에 보루마는 말 세크날과 연합하여 이에 맞섰고, 999년 12월 30일 킨데어의 아드글로 부근 글렌마마에서 격돌한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렌스터의 말 모르다와 더블린의 시그트뤼그 모두 포로로 붙잡혔다. 보루마는 이 기세를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얼마 안가 말 세크날과 맺었던 협정을 파기한 뒤 아일랜드 전체의 군주가 되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육군과 수군의 합동 공세를 벌인 결과, 말 세크날은 결국 굴복하였고, 보루마는 서기 1002년 아르드리를 차지하면서 전 아일랜드의 군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그의 통제는 불안정했고, 여전히 보루마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특히 지난날 그에게 패배를 면치 못했던 렌스터 왕 말 모르다와 더블린의 왕 시그트뤼그 실크비어드는 복수를 꾀했다. 서기 1012년, 두 왕은 반기를 일으켜 미데를 침공했고, 아르드리를 상실한 뒤 미데의 국왕으로 지내던 말 세크날은 보루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보루마는 1013년 렌스터 일대를 약탈한 뒤 더블린으로 진격했지만, 오랜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함락되지 않자 일단 군대를 거뒀다. 이후 더블린 왕은 해외의 바이킹들에게 구원을 호소했고, 브리튼 섬 북부의 오크니 제도와 서부의 맨 섬의 왕국으로부터 지원군을 얻는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1014년 봄, 양측은 더블린 근교의 클론타프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인다.

3. 전투 경과

얼스터 실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 동원된 보루마 측 병력은 약 7천 명이었고, 반란군의 숫자는 6천 6백명이었다고 한다. 보루마의 군대는 주로 그의 고향인 먼스터 출신이었으며, 그 지방에서 토착인들과 통혼한 바이킹들도 포함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전 아르드리였던 말 세크날도 보루마와 한 편이었다고 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이 전투에서 별다른 사상자를 입지 않은 걸 볼 때 전투에 참여하기 회피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블린의 반란군은 아일랜드에 귀화한 바이킹의 후손인 노르드게일인으로 구성되었고, 국왕 시그트뤼그 실켄비어드와 동생 두브갈 막 암레브의 지휘하에 있었다. 시그트뤼그의 삼촌이자 렌스터의 왕인 말 모르다 역시 많은 병력을 지원했다. 여기에 맨 섬과 오크니 제도에서 몰려온 바이킹의 후원도 있었다.

중세의 기록에 따르면, 클론타프 전투는 1014년 4월 23일에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기독교 왕 보루마의 죽음과 이교도들에 대한 승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류의 구원에 비유하기 위해, 일부러 성금요일과의 연관성을 필사본에 추가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전투의 자세한 진행 상황은 당대의 기록이 부실해서 확인이 어려우며, 백여 년 후에 기술된 중세의 기록들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예를 들어 얼스터 실록에는 이 전투에서 바이킹만 6천 명이 죽거나 익사했으며 양측 도합 7천 명에서 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기술되었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클론타프 전투로부터 100여 년 후에 집필된 아일랜드식 전쟁시 콘가드(cogadh)에 따르면, 전투는 보루마 측의 전사와 반란군 측 전사가 뛰쳐나와 들판 한 가운데에서 결투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 치열한 결투를 벌이다가 둘다 죽고 말았다. 서로의 가슴에는 칼이 꽂혀 있었고, 서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고 한다. 이후 양군은 서로에게 달려들었고, 전투는 해가 질 때까지 지속되면서 엄청난 피를 양산했다. 코가드는 이 전투를 아일랜드에서 전례 없는 규모와 잔혹성이 펼쳐친 것으로 묘사하며, 양측 모두 수많은 고급 장교들을 잃었다고 서술했다.

해가 저물 무렵, 좀더 앞선 무기로 무장한 보루마의 군대에게 밀린 적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시그트뤼그는 더블린 요새로 피신했고, 다른 군대는 배로 도주하거나 숲을 통해 호스로 피신하려 했다. 보루마의 군대는 이들을 추격하여 두브걸 다리 전투에서 적군을 무참히 학살했다. 배로 도망치려던 바이킹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하필이면 썰물이 밀려오면서 함선들이 더블린 만으로 분산되어 버린 것이다. 바다로 빠져나갈 수 없게 된 바이킹 전사들은 적에게 무참히 도륙되거나 익사했다.

하지만 보루마 측의 희생도 컸다. 중세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들 무르하, 콘초바르, 플란이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를 지휘하다가 함께 전사했다고 한다. 한편 70대 후반의 노인이었던 보루마는 전투에 직접 참전하지 않고 천막에서 전투 결과를 기다리며 기도했다. 코가드에 따르면, 바이킹 전사인 브로지르가 다른 바이킹 전사들과 함께 전장을 탈출하다가 브라이언의 천막을 마주쳤다고 한다. 코가드는 보루마가 바이킹 전사의 접근을 알아채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를 향해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행원이 말했다.
"어떤 사람들인가?" 브리안이 말했다.
"삭막한 푸른 색에 벌거벗은 사람들입니다." 수행원이 답했다.
"아아!" 브리안이 말했다. "그들이구나!"
그는 벌떡 일어나 방석을 밟고 칼을 빼들었다.

코가드에 따르면, 브로지르는 처음엔 눈앞의 늙은이를 평범한 성직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곧 보루마라는 걸 알아채고 곧장 달려들었고, 얼마 안가 늙은 왕의 복부를 검으로 찔러 죽였다. 이후 브로지르는 동료들과 함께 피신하다가 왕의 경비병들에게 붙들려 배를 찔러 내장이 흘러내린 채 죽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클론타프 전투는 양측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은 채 종결되었다.

4. 결과

얼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더블린 왕의 동생 두브갈 막 암레브와 레스터 왕 말 모르다, 오크니 백작 시구르드 등이 전사했다고 한다. 더블린 왕 시그트뤼그는 생존하였지만, 클론타프 전투 이후로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042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뒤 더블린 왕국은 렌스터의 왕 디아마트 막 말 남보에게 정복되었고, 아일랜드에서의 바이킹의 시대는 종결되었다.

한편, 보루마가 죽은 뒤 후계 자리를 놓고 살아남은 두 아들 도너하 막 브리안과 타이그 막 브리안이 대립했다. 형 도너하가 먼스터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타이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1018년 형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도너하는 오른팔을 잃었을 뿐 목숨을 보전하였고, 곧바로 반격하여 1023년 타이그를 암살했다. 이렇듯 형제간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먼스터는 쇠퇴하였고, 전 아르드리였던 말 세크날이 이를 틈타 아르드리에 복위했다.

1022년 말 세크날이 사망한 뒤, 도너하는 다시 아르드리를 자칭하여 부친의 권위를 되찾고자 했으나, 아일랜드의 다른 국가들은 이미 쇠약해진 먼스터의 통제를 받기를 거부했다. 급기야 타이그의 아들인 터렐라흐 오브리언이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도너하에 대항한 끝에 1058년 렌스터의 디아마트와 함께 협공하여 도너하를 축출하였다. 이후 먼스터는 두 번 다시 아일랜드의 지배권을 되찾지 못했고, 아일랜드는 수많은 소국간의 분쟁이 지속되면서 잉글랜드 왕국이 침략할 때까지 통합 왕국을 이루지 못했다.


[1] 전체 이름은 브리안 보루마 막 케네티그(Brian Bóruma mac Cennétig)이다.[2] 막내였다는 설이 있으며, 어렸을 때 수도원에 보내져 라틴어와 아일랜드의 역사를 공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