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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6 17:58:01

플란 너 시나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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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드리(역사 시대)
Ard Rí na hÉire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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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n na Sionainne
847년? - 916년 5월 25일

1. 개요2. 기타

1. 개요

9세기 아일랜드의 아르드리. 재위 기간은 879년-916년.

역사성이 확실한 최초의 아르드리 말 세크날 막 말러 루어나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말 세크날은 아르드리이면서 동시에 미데(오늘날의 더블린 및 그 서부 일대)[1]의 리였다.

862년 말 세크날이 죽으면서 아르드리 자리는 알레크(오늘날의 도니골)의 리 아드 핀들리어흐가 먹었고, 미데의 리는 계승분쟁이 일어난 끝에 로르칸 막 카할이 차지했다. 아드는 섬의 북쪽 구석인 알레크가 기반이라 먼 쿠어거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권위를 세우기 어려워, 아르드리들의 연례행사인 제후국 조지기를 시전했다. 그 결과 864년 아드에게 패한 로르칸은 눈이 뽑히고 폐위당했고, 돈카드 막 아다칸이 미데의 리로 바지사장이 되었다. 이후 부왕 사후 15년만인 877년에 플란은 돈카드를 죽이고 미데의 리로 등극한다. 이것이 플란의 역사상 첫 등장이다.

플란은 아드의 딸 에흐너와 결혼했고, 아드는 플란의 어머니이자 전 아르드리 말 세크날의 왕비 란[2]과 결혼했다. 이로써 아드는 플란의 계부이자 장인이 되었다. 879년 11월 20일 아드가 죽자 플란이 아르드리로 선출되었다.

플란도 아드와 마찬가지로 쿠어거 조지기에 나섰고, 상당히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러인(오늘날의 렌스터)를 시작으로 881년 울라(얼스터)를 굴복시켰는데, 이 때 더블린의 "이방인"[3]인 이바르 왕조의 더블린 왕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더블린의 바이킹들과의 동맹은 파탄나고, 888년 플란은 "필그림 전투"에서 바이킹들에게 패배한다. 그러나 얼마 뒤 잉글랜드에서 앨프리드 대왕의 색슨인들이 바이킹들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바이킹들의 세가 약화되었다. 1년도 지나지 않아 바이킹들의 더블린 탈출이 시작되었고 901년 플란의 사위 케르발이 이끄는 군대가 더블린을 점령, 더블린 왕국은 일시적으로 멸망한다.

플란의 다음 표적은 외사촌 나라 오스라거였다. 905년 플란은 오스라거를 공격해 굴복시키고 서쪽의 무운으로 진격, 908년 무운 왕 코르막 막 킬레난을 죽였다. 910년에는 미데와 알레크의 사이에 있는 브레프네(오늘날의 리트림, 캐번 주)를 공격했다. 『베르칸의 예언서』[4]에서 플란은 “창도 칼도 그를 죽일 수 없을 것이며, 그는 가는 길마다 무기로서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과연 플란은 전쟁에서 연전연승했다. 하지만 문제는 집안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901년에 이미 플란의 아들 말 루어나드가 화재로 사망했고, 904년에는 플란이 켈스 수도원[5]로 쳐들어가 거기 숨어 있던 아들 돈카드를 사로잡고 돈카드의 당여 여럿을 도륙했다. 무슨 맥락으로 아들과 분쟁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914년, 플란의 사위 니얼 글룬두브와 플란이 가장 총애한 아들 옹구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해 전투 결과 옹구스가 전사했다. 이듬해인 915년 플란의 아들 돈카드와 콘호바르가 반란을 일으켰다.사방에서 일어나는 친족들의 반란으로 정권이 무너지는 가운데 플란은 916년 니얼 글룬두브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병으로 사망했다.

플란이 죽고 이듬해인 917년, 이바르 왕조의 시그트뤼그 카흐가 더블린으로 돌아왔고, 니얼 글룬두브를 비롯한 여러 게일인 왕들은 시그트뤼그를 몰아내기 위해 919년 동맹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해 모두 전사했다.

2. 기타


[1] 다만 당시 더블린은 바이킹 왕조인 이바르 왕조가 정착해서 더블린 왕국을 세운 상태였다.[2] 무운(오늘날의 먼스터)의 속국이었던 오스라거를 하나의 쿠어거로 독립시킨 커발 막 둔렁거 왕의 누이.[3] 아일랜드에 정착한 노르드인 바이킹들을 말한다.[4] 아일랜드의 역사를 "예언"의 형식으로 쓴 필사본.[5] 세계기록유산 켈스의 서가 쓰여진 그 수도원이다.[6] 스코틀랜드의 초대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