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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대 경상좌수영에서 촬영한 구군복 사진 |
1. 개요
조선 시대 후기에 문무관이나 병사들이 입던 군복이다. 흔히 이 옷을 구군복이라고 부르나, 사실 구군복이란 말을 하나의 이름이거나 혹은 옛날 군복이라는 뜻으로 舊(옛 구)+군복 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사실은 具(갖출 구)를 쓴 합성어다. 직역하자면 "군복을 갖춰 입는다" 라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시대때 불리우던 원래 이름은 그냥 "군복"이다.[1]2.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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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군복은 크게 협수[2]+전복의 구조로 볼 수 있으며, 무관들의 업무복이자 행사복으로서 쓰여졌으며 전투시 갑옷의 받침옷으로도 쓰였다.
백관의 군복은 군졸의 군복과 비교했을때 더 높은 신분의 옷이기에 삼각형의 무가 내려오고 동다리의 바탕색이 달라 여러가지색으로 이루어지는 등 더욱 화려하다.
3. 역사
| 출처: 우용곡의 블로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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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삼장군 초상에서 보이는 구군복과 최원립 장군묘 출토 협수 | |
조선시대의 군복은 처음부터 협수위에 전복을 입는 모습이 대표적인게 아니었다. 고려 시대 후기에 원나라로부터 유래한 철릭이 당시의 군복을 대표했으며 이는 조선까지 이어져 융복이라는 이름으로 임진왜란 이전 까지는 군복으로서 많이 쓰여졌다.[3] [4]
시간이 흘러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에 철릭이 군복에서 의례복인 성격이 점점 세져 품과 소매가 커지고 실전에서 쓰기 힘들어졌다. 동시에 병자호란까지 나라를 휩쓸고 지나가자 조선은 군사복식을 개혁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렇게 17세기 후반부터 익히 알고있는 "협수+전복" 양식의 군복이 등장하기 시작히여 현대의 구군복에 이르게 된다.
군복에 대한 기록은 인조대에 이르러 처음보이고, 또한 임진왜란 당시에 철릭의 소매가 넒음이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의 기록도 있기 때문에 최소 임진왜란 이후부터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때의 구군복은 우리가 아는 구군복과는 형태가 달랐다. 극초창기의 구군복은 위의 이삼 장군의 초상처럼 소매가 좁은 협수 형태이고, 트임이 커 활동 하기에 편한 소창의 형태의 옷 위에 전복을 겹쳐 입고 전대나 요대를 두른 형태이고 연갈색 목화를 신었다.[5] 이후 시대별로 계속 개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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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운 장군 초상 | 18~19세기의 구군복 양식 |
18세기에 홍색 소매는 1747년 금군의 요대를 만들다 남은 붉은색 단을 금군의 소매에 붙이는 것에서 시작되어 1777년 부터 법제화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구군복의 형태가 처음 등장한 18세기의 무관이었던 이창운의 초상을 보면 아직 구군복 하면 떠오르는 그림과는 조금 다르다. 조선 후기와 달리 아직 동다리 색이 토홍색이 아닌 녹색이고 홍수 부분도 매우 짧은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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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구군복 실물사진들 | ||
조선 말기로 갈수록 토홍색이 가장 흔해진다.19세기 이전까진 소속 부대에 따른 색상을 썼을 것으로 보이나[6], 19세기 부터 황색 협수에 남색, 자색 전복으로 통합되듯이 한다. 또한 갈수록 홍수의 길이가 소매정도로 짧던 것이 팔을 다 덮을 정도로 길어져서 동다리의 색깔이 부분이 어깨를 덮는 부분만 보일 정도로 좁아지며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로 변했다.
약 2세기동안 쓰여졌던 구군복은 1895년(고종 32) 육군 복장 규칙을 반포하여 더는 구군복을 입지 않게 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1. 다양한 구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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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 어진 군복본 | |
조선 시대 임금이 입던 임금용 구군복도 존재하는데, 이 역시 임금의 제복인 곤룡포와 마찬가지로 오직 임금만이 입을수 있었다.
조선 25대 왕인 철종의 어진에 그려진 경우처럼 왕이 입는 융복, 군복의 경우는 용보가 붙어있고 화려한 자수가 새겨져있다. 또한 왕의 갓의 전면에는 면옥이라는 옥으로 만들어진 특수한 판이 부착되어 신하들과는 또 다른 차이점을 두었다.
사실 어느 나라이든 군주라 함은 예나 지금이나 문관과 무관의 일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며, 이 때문에 동서고금 어느 나라에서든 군주 등의 최상위 신분을 가진 사람만을 위한 전용 군복이 따로 존재했다. 임금 전용 구군복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존재하던 의복인 셈이다.[7]
위에서 등장한 지방 수령이나 무관들의 구군복과는 달리 병부 주머니가 없는 것도 눈여겨 볼 점. "병부"라는 것은 군권을 나누어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인데, 왕은 모든 군권 그 자체를 스스로 통수하는 사람이므로 누군가로부터 권한을 나누어 받았을리도, 이를 보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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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대의 미디어에서
한복 중에서도 관복 하면 곤룡포와 함께 가장 유명한 의복으로,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사극, 만화,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의 조선시대 배경 창작물들에서는 민중들과 관계가 깊었던 마을을 다스리는 수령인 사또[9]나 포도청[10]의 우두머리인 포도대장의 옷으로 자주 등장하며 한국 사람들이 흔히 조선시대 때 전형적인 사또의 옷차림으로 생각하는 옷.[11]| | |
| 1816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 해군이 그린[12] 조선 비인현감 이승렬과 부하들의 모습 | 1817년 조선을 방문한 일본인 야스다 요시카타가 그린 충청관찰사의 모습 |
같은 군사복식인 포졸복에 비하면 고증이나 활용부분에서 훨 낫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들이 많다. 보통 전쟁터에서 갑옷없이 구군복만 입고 싸운다던가, 구군복의 색이 한가지로 통일되어 있다던가 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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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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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군복도 존재했으나 매체에서는 조선왕조오백년 드라마에서만 나왔다.
일러스트레이터 최민준(필명 금수) 작가가 일러스트로 보는 조선의 무비-군사복식편이라는 책을 통해 조선시대 군복들을 총정리하였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참조해도 좋다.
[1] 일제강점기 이후 어느 시점부터 구군복이라고 잘못 불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 이전시기인 조선시대 문헌에는 전부 이 옷이 군복으로만 나와 있다. 허나 현대의 한국인들은 군복이라고 하면 다들 국방색의 현대 군복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치 고조선과 고구려처럼 앞과 뒤를 구분하기 위한 용도로서 계속해서 구군복이라 부르고 있다. 굳이 길게 부르자면 '조선 시대 군복' 정도.[2] 동다리[3] 예로 들면 '신립이 자기 부장으로 하여금 이일에게 갑옷을 벗어주고 부장 자신은 구군복으로 싸우게 했다'는 기록에 나오는 '구군복'은 일반적으로 구군복 하면 생각하는 동다리가 아닌 융복이다. 또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에 싸움에 나가는 남편을 위해 철릭을 쇠로 마름질하고 철사로 바느질한다는 구절이 확인된다. 그만큼 철릭은 전투용 옷으로서 쉽게 쓰였었다.[4] 사실 구군복이 기존의 군복인 철릭을 대체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으나 그렇다고 하여 철릭이 군복으로 쓰여지지 않은것은 아니다. 이는 당시에 융복이 군복과 같은 군사복식이라는 인식 덕분에 혼용이 가능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동다리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계속 군복으로서 입어졌고, 정조17년에 융복 폐지론이 한번 일어나긴 했으나 결국은 조선 말기까지 군복으로서의 노릇을 이어가다가 구군복과 함께 사라졌다.[5] 언뜻 보면 후기의 군졸들이 입던 군복과 비슷해 보인다.활동성을 중시한 군졸이 입은 옷처럼 보일 만큼 당시엔 오로지 성능에만 몰두한 구군복[6] 소속 부대가 없는 경우엔 원하는 색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7] 현재 유럽 여러 나라의 국왕들도 공식 석상에서는 군 예복을 입고 참석하며, 대한민국 대통령도 군복을 입을 때는 계급장 부분에 대통령 상징인 봉황 휘장을 계급장 대신 부착한 군복을 입는다.[8] 조선 전기에 철릭 위에 답호를 껴입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쾌자는 답호와 친척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어찌보면 구군복의 원시적인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9] 단 아래에 나오듯이 이것은 오류이다.[10] 조선시대 때 죄인의 심문과 도적의 포획 및 도적·화재 예방을 위해 순찰 등의 일을 맡았던 곳.[11] 실제로는 무관들이 군복 차림을 갖추는 일을 뜻한다. 전립을 쓰고, 동달이를 입은 장표 위에 광다회와 전대 띠를 매고, 목화를 신고, 동개와 활집을 메고, 환도를 차고, 등채를 손에 드는 것.[12] 이 그림을 당시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보여준다. 링크[13] 참고로 청군이 갑옷을 입지 않고 청 후기식 음양두를 하는 등 반영 오류가 좀 있다.[14]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선 역사덕후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을 검은 갑옷을 입은 군대로 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을 보고 과거 창칼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아무리 계급이 낮은 병사라도 갑옷을 걸치지 않고 전투에 나갔을 리는 없을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많고,
19세기말~20세기초 일본의 유명화가였던 오오타 텐요오(太田天洋: 1884~1946)가 칠천량 해전을 묘사하여 그린 조선전역해전도의 일부를 보면 조선군에서 포졸모자를 쓰고 있는 낮은 병졸도 흉갑(전체적으로 보호하진 못해도 윗몸에 둘러서 상체를 대체적으로 보호할수 있게 만든 갑옷)을 입고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조선군 전원이 갑옷을 입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또 포졸복항목에서 볼 수 있듯 프로이스는 조선원정에 직접 참여한 이도 아니다. 이 때까지도 조선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개인용 병장기와 갑옷은 개인이 구매하는 물품이었다. 예로 들었던 스페인 군대도 말할 것도 없거니와, 스페인 군대는 장창값조차 병사의 급여에서 거둬갔다. 병사들은 어쨌든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서 최소한 흉갑과 투구만큼은 어떻게든 마련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대규모 갑옷 공방이 발달하게 된다. 조선의 경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갑옷을 구비할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병사들은 맨몸으로 나섰으리라는 정도의 추측은 가능하다. 그러니까 국가 예산과는 별 관계가 없다. 심지어 조선군이 갑옷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민족 기록화를 근거라고 들었는데 민족 기록화는 현대에 와서 상상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이걸 어떻게 근거로 든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같은 포졸이어도 좀 유복하면 나름대로 갑옷을 맞춰다 입었을 수도 있었지만 진짜 찢어지게 가난하면 갑옷 맞출 돈이 없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포졸복마냥 전복만 겨우 구해다 입는 수준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