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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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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김원봉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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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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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필 권준 김광추 김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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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정이소 최수봉 황옥불확실
최용덕 한봉근 한봉인 홍가륵
유시태 이원대 이원기 윤병구
유석현 정율성불확실 문시환 이춘암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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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조성환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원봉
金元鳳 | Kim Won-bong
파일:IE002494971_STD.jpg
이명 최림(崔林)[1]·진국빈(陳國斌)[2]
왕세덕(王世德)·김암일(金岩一)·이충(李冲)
왕석(王石)·김설봉(金雲峰)·김국빈(金國斌)
진충(陳冲)·김약삼(金若三)·김세량(金世樑)
아호 약산(若山)
본관 김해 김씨[3]
출생 1898년 9월 28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 57번지
(現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감천2길 30-2)[4]
본적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
(現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사망 1958년 10월 2일 이후 (향년 60세 이상)
학력 밀양공립보통학교 (중퇴)
동화중학교 (중퇴)
경성부 중앙학교 (중퇴)
덕화학당 (중퇴)
금릉대학[5] (영어과 / 중퇴)
신흥무관학교 (중퇴)
황포군관학교 (졸업 / 4기)
신체 163cm[6]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정당 조선공산당재건동맹
→ 조선민족혁명당
→ 인민공화당
→ 조선인민공화당[7]
종교 무종교 (무신론)

1. 개요2. 일생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서훈 및 독립유공자 지정 논란
4.1. 긍정4.2. 부정
5. 오해와 사실들
5.1. 김원봉이 김일성에게 부정적이었다?5.2. 김원봉이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다?5.3.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고 뺨을 맞았다?5.4. 좌익 탄압의 위협 때문에 월북했다?5.5. 김원봉의 현상금은 김구보다 높은 100만원이었다?5.6. 김원봉이 6.25 남침을 반대했다?5.7. 김원봉의 남파 '간첩'은 가짜 뉴스다?
6. 가족7. 여담8. 어록9. 인물 연표10. 대중매체에서11. 참고 문헌 및 저자 소개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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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약산img2.jpg
△ 가장 잘 알려진 사진.[8]

일제강점기 시절 좌익 계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 독립운동가로서는 3.1 운동 이후인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등 많은 단원들의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통치기관 파괴 활동을 이끌었고,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진영 통합 운동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로 활동하였으며,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이 되어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부 대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 노선에 있어서 그는 무장투쟁 이외의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비판하면서 독립운동의 주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를 앞장서서 주장했고 때문에 우익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9] 또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혁명가 최창익, 김두봉 등과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을 벌였다. 초기에는 좌익 독립운동 단체에서 의열단 활동을 한 김원봉이 압도적인 위세를 과시했으나 1940년 이후 공산주의자 최창익과 김두봉이 주도권을 잡으며 연안파가 탄생했고, 김원봉은 연안파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말았다.

연안파에서 배제된 김원봉은 한때 반목했던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광복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결국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좌익 계열의 인민공화당을 이끄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남한 내의 좌익 계열 인사들과 단체들이 미군정과 우익 세력에 의해 와해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1948년월북했다. 이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북로당 계열로부터 '남조선 출신 비공산주의자'라는 지분으로 배려를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의 초대 국가검열상이 되었으며 1952년 5월 8일, 국가검열성이 인민검열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국가검열상에서 해임, 로동상으로 이임하였다. 후임 인민검열위원장으로는 1953년 1월 23일, 리기석이 임명되었다. 6.25 전쟁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노력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또다시 로력훈장을 수여받았으나, 1958년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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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3.1. 긍정적 평가

"일제 경찰이 백범 김구 선생보다 더 높은 현상금을 내걸 정도로[10] 항일 투쟁의 치열함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분. (중략) 일제시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대로 평가하고, 해방 후의 사회주의 활동은 별도로 평가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략)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
-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김원봉은 항일무장투쟁 노선으로는 절대 빼놓으려야 뺄 수 없을 만큼 굵직굵직한 여러 사건을 도맡았다. 다시 말하면 김원봉의 거취에 따라 무장투쟁세력들의 판도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무장투쟁활동 활약상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묻혀버렸고, 대한민국에서는 북한 정권에 공헌한 공산주의자로 인식되어 독립운동 경력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감이 있다.

독립운동을 했던 적이 있어서, 역사 교과서에도 실린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의열단조선의용대의 활동 내용이 출제가 되면서 입시를 위해서라도 김원봉을 기억한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 그리고 영화 암살밀정 등 대중 매체에서 조금씩 다뤄지기 시작하면서 김원봉의 사건이 재조명받고 있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은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로, 김원봉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남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평가했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와 입장을 달리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라고 말했다. 이어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하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사실 김원봉이 활동한 의열단은 무정부주의적 성향이 더 강한데, 김원봉이 공산주의자에 무정부주의자였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무장투쟁 분야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했을 뿐 일본 그 자체에 대한 극단적인 반일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용대 창설부터 일본의 반전운동가가 참여한 것도 있고 이후 조선의용대는 일본반전동지회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반전동지회는 1941년 10월 3일 조선의용대 성립 3주년을 맞아 타카하시 신지 등 4인 명의로 김원봉에게 축사를 보내기도 했다.

3.2. 부정적 평가

"교활한 공산주의자."
- 민필호,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동아시아, 2006년, 142p)에서.

김구의 측근이었던 임시정부 내 보수 세력인 민필호는 '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들었다'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장준하 역시 '비록 그가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이었다'며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지목, 비난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영입 노력 역시 비판했다. 일본군을 처음 탈출한 장준하 일행이 김원봉과의 연대를 거절하자 김원봉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때 장준하는 김원봉이 동지들을 이간질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여기에서 장준하는 또다시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 무리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증언했다. 장준하는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 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 공작을 시작했다'고 그의 저서 돌베개에 기록했다.

장준하는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김원봉이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김원봉이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부대로 하여금 임정이나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그 어부지리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이었다'며, 광복군 편입을 거절하고 버티던 일본군 출신 부대의 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에게 김원봉이 직접 이소민을 파견, 광복군 제1지대로 끌어들일 공작을 했다는 것이다.

김원봉은 자원입대 또는 강제징집으로 일본군으로 입대,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을 적극 영입하려 하였는데, 장준하는 그의 책 돌베개에서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군 소위 출신 황용주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지청천에게 보고했다.[11]

게다가 김원봉은 월북 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고,[12] 북한 정권에 부역하여 대한민국에 직접적 피해를 준 바가 있는데, 국가검열상에 있을 때 6.25 전쟁 도중 간첩단을 파견한 것이다. 실제로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은 '우리 당국이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선거 방해, 모 정당 와해를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4. 서훈 및 독립유공자 지정 논란

북한 최고위직을 지낸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수여에 대해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린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알앤써치에 의뢰해 실시한 2019년 4월 정기 주간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39.5%는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수여에 대해 찬성했고, 39.2%는 반대했다. 찬성과 반대 의견은 오차범위(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0%p) 안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잘모르겠다'고 의견을 유보한 응답자는 21.3%였다.#

이런 논란은 2019년 6월 6일 현충일, 문재인 대통령이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했던 추념사 내용 중, 한국독립운동의 무장항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김원봉에 대해 언급한 것을 언론과 야당에서 지적하며 재점화되었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 중 일제 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을 언급하면서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하였으며,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언급했다.* 당시 광복군이 구성을 보면 좌익 진영과 우익 진영이 합쳐저서 결성된 합작군임에는 틀림 없다. 다만 해당 부분이 논란이 있는데 해당 부분은 아래 참조

다만 청와대 측에서는 6월 10일, "김원봉의 서훈이나 독립유공자 지정은 현행법상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해당일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만나 "군의 뿌리가 김원봉이라라고 하여 안타깝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백선엽은 정확히 말하면 야전사령관이었기 때문에 행정 업무에 가까운 국군 창건 당시에는 딱히 공로가 없고[13], 한국 전쟁 당시에 국군에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나마도 간도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만주국 간도특설대에서 중위로 복무한, 즉 친일반민족행위자였기 때문에 이 문제를 논의할 사람으로는 부적절하며, 오히려 논의 대상은 이 분들이 2019년에도 살아 있었다면 김홍일, 채명신[14], 장준하[15]에게 더 어울렸을 것이다.

김원봉 서훈 논란이 의도치 않게 북한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주장이 있다. 지상욱 "北, 국정원에 '김원봉 거론말라' 요구⋯서훈 원장, 사실 밝혀야" 실제로 북한은 숙청을 통해 독재 정권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김원봉은 숙청된 인물이므로 그들의 역사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김원봉 본인은 친북 논란으로 비판받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김원봉이 부각되는 것을 오히려 싫어한다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김원봉은 전쟁 전에도 인민공화당계 반대한민국 빨치산을 양성했다. 김원봉은 북한 내각으로서 6.25 전쟁 중 김일성을 찬양하였다. 6.25 전쟁 중인 1953년 3월 21일 로동신문에 '김일성장군의 교시를 지침으로 인민의 충실한 복무자가 되자'라는 글을 썼다.# 김원봉이 건국훈장을 받는다면 북한 내각 일원이었던 독립운동가와 빨치산이었던 독립운동가에게 대부분 건국훈장을 줘야 형평성에 맞는다.

4.1. 긍정

2019년,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자는 서훈을 받을 수 없다'라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 덕분에 독립유공자 선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48년 11월 11일에 남로당에 연루되어 14연대 반란사건을 일으킨 죄로 사형 구형을 받고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사람이 있다. 누군지 아시냐?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러고 나서 박 전 대통령이 선거에 나섰을 때 상대방 윤보선 후보 측이 이 문제를 거론하며 빨갱이라고 공격하니까, 매카시즘 안 되고 종북몰이 색깔론 하지 말라고 그랬다."라며 "지금 현재의 김원봉도 마찬가지다. 광복 정국에서 이념이 뭐가 중요하냐. 일제로부터 우리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모든 사람들은 독립유공자고 애국지사가 아니냐."라고 말했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6월 6일 약산 김원봉 선생의 평가에 대해 황장엽과 김원봉을 두 사람을 비교해 김원봉이 훈장을 받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의 SNS에서 주장을 했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을 정립하여 김일성 세습 독재체제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는 독립운동에 전혀 기여한 바 없었으나, 북한 정권의 숙청을 피하여 월남하는 데 성공한 공적으로 2010년 이명박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라고 설명하며,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대장, 광복군 부사령,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내면서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노덕술 등 친일 경찰에게 모욕받은 데다가 정치적 동지였던 여운형이 암살당하는 것을 본 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남북협상에 참석했다가 북한에 눌러앉았다라며 전국적 명성을 지닌 그는 북한에서 국가검열상과 로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지만, 김일성과는 소원한 관계에 있었다."라고 두 사람을 비교해 설명하며 "그(김원봉) 역시 황장엽과 마찬가지로 김일성 일파의 숙청을 피하여 탈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처형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이 현충일에 김원봉을 언급한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펄펄 뛰는 사람들, 북한 주민들을 '주체사상의 포로'로 만든 최악의 사상범 황장엽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는데, 김일성 일파에게 숙청당해 남한에서 '반공 교육 자료'로 활용돼 온 김원봉이 훈장을 받지 못할 이유는 뭔가요"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 역시 황장엽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에 귀순하며 전향했고, 국내 정보기관에 여러 협조를 한 공도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죽을 때까지 북한 정권의 고위 인사였던 김원봉과 비교할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김원봉의 조카 김태영씨는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전에 자유한국당의 뿌리인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보라"며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일제에 충성 혈서를 쓰고, 광복 후엔 남로당에 입당한 박 전 대통령이야말로 뼛속까지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이 찍어서 내려 보냈고 6.25 전쟁에 책임이 있는 사람 아닌가. 독립운동 경력도 김원봉에 견줄 바가 못 된다."라며 "김원봉을 김일성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덧붙였다.#

현충일 추도사 논란이 일어나자, 진보 측에서는 보수층이 옹호하는 만주군 장교 출신 군사 반란 총책임자가 해방정국 당시 남로당에 활동한 전력이 있다는 것이나 주체사상의 선구자가 1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되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거나,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의 김무성, 김을동 등 대표 의원들이 2015년 광복절을 앞두고 김원봉을 다룬 영화 암살을 보고 만세삼창을 했던 전력이 알려져 친문 성향이 강한 커뮤니티에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해당 당 소속의 밀양시 시장이 약산 김원봉이 밀양 출신인 것을 들어 의열기념관을 세운 사실이 있다. 당연히 해당 기념관은 "김원봉 장군"이라고 표기했다. 또한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 당시 국정교과서에선 김원봉의 이름을 12번 넘게 언급하며 김원봉의 업적을 찬양했다는 것, 새누리당 기관지 새누리비전 2015년 8월호 14페이지에서 약산 김원봉을 독립투사로 묘사한 것이 밝혀지며, 좌우를 떠나 독립운동에서 부정할 수 없는 김원봉의 활약을 문재인 정부 쪽에서도 인정한 한 마디를 가지고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과도한 공격을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했다.

4.2. 부정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선정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내놓자 자유한국당 정태옥 의원이 "북한 정권수립에 직접 기여한 사람도 보훈 대상자가 되면 김일성도 독립운동 때 큰 역할을 했으니 훈장을 줘야 하고, 그 손자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한테는 보훈연금을 줘야 한다"고 비판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김원봉이 북한 정권수립에 기여했던 만큼 자유 대한민국의 국가 유공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2019 3월 27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표-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좌파 독버섯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고 있다"라면서 "피우진 보훈처장이 드디어 정부의 본심을 드러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 역시 김원봉을 "북한 정권의 공신이자 남침에 기여한" 인물로 규정했다. 정 의원은 "대한민국에서 북한 독재자에 대해 해괴한 칭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영웅에 대한 모멸감이 높아가고 있다"라면서 "그 역사전쟁 중심에 문재인 정부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 역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페이스북을 언급하며 "문재인 대통령이 공산주의를 흠모하는 게 아닌가 싶다"라면서 "대한민국이 급속도로 물들어가고 있다. 나라의 앞날이 지극히 우려스럽다."라고 지적했다.#

김원봉을 비롯해 6.25전쟁 이전 월북[16]한 인사들은 애초에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며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사람들이다.

즉,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는 "일제강점기에는 한민족을 대표해서 일본인에게 맞서 싸웠으나, 광복 후에는 비록 국가는 다르지만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다른 하나의 국가에 충성을 바치며 민족 통일을 이루려 했던 불운한 사람" 정도로 이해해줄 여지가 있지만, UN으로부터 인정받은 정통 국가인 대한민국 국방의 관점에서는 괴뢰 적성 세력인 북한의 편을 들어 한국을 공격하려한 반역자인 셈이다. 즉, 앞서 말한 "광복 정국에서 이념이 중요하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이는 오히려 박정희처럼 일찌감치 재전향한 인물들에게나 적용해볼 법한 논리이다. 침략전쟁을 지지한 시점에서 이런 변명은 설득력을 잃는 것이고, 그건 좌우논리를 떠나 남한이 선제공격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현충일 추도사 역시, 광복절이나 3.1절도 아닌 호국영령을 기리는 현충일에, 호국영령이 잠든 현충원에서, 6.25 참전자 등 북한과 싸운 사람들이 추념사를 다 듣고 있는 상황에서 김원봉을 옹호하는 언행은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소모적인 갈등만 부추길 위험이 있는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것이 비판적인 학자들의 시각이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 예비역 육군대령인 윤형호 건양대 교수, 김근식 경남대 교수 등은 각각 "역대 현충일 추념사중 가장 이상한 추념사", "대통령이 공식 추념사에서 김원봉을 건국과 연결한 것은 부적절하다", "오히려 진보·보수간 소모적인 이념갈등만 야기할 위험이 있다"며 비판하였다.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 또한 천안함ㆍ연평도 희생 장병까지 모두 껴안아야 할 대통령이, 이는 언급조차 못 하고 되레 논쟁적 인물을 띄우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꼴”이라고 지적하였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의 야당 또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희경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6·25 전쟁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북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 창설의 뿌리, 한미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고 비판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일국의 대통령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마저 저버린 것은 아닌지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6.25 참전 용사의 가족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입니다. 현충일의 의미를 외면한 것입니다"라고 비판하였으며, *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은 "북한 정권의 수립과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자 한 김원봉에 지금 건국훈장을 수여하려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라고 할 수 없다"며 "대한민국 국회 정무위원으로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 끝까지 막을 것"이라고 하였다. *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며,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공산주의무정부주의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가 월북했다 하더라도 거기까지는 개인의 자유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우익테러 세력들이 김원봉의 자택을 습격하거나 정치적 동료인 여운형이 암살되는 등 남한에서 있다가는 자칫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원봉이 북한의 침략전쟁을 도와 대한민국을 침략하는 데 참여한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물론 그가 아니었어도 다른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으리라 변명해볼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6.25전쟁의 개전을 적극적으로 막기는 커녕 심지어는 전시 내각의 일원으로서 한국민들을 희생시킨 데 일조하는 길을 걸었던 것은 김원봉 본인의 선택이 낳은 결과였다. 김원봉이 대한민국의 체제를 파괴하는데 앞장서고 반국가단체인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17] 만일 김원봉이 월북하지 않고 남아있다가 여운형처럼 극우세력한테 암살당하거나, 아니면 6.25때 납북된 것이라면 아마 좌우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서훈을 수여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설령 월북을 했다해도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면, 최근에 나오는 김원봉 재평가 여론에 맞추어 민주당이 집권했을 시기에 당시 목숨을 위협받던 상황을 참작하고 훈장을 수여했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 김원봉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김원봉은 국군의 뿌리라면서 그를 서훈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김원봉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고 해서 그가 곧 현재의 대한민국의 헌법상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가 내지는 정부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김원봉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언사를 해왔다. 대표적으로 944년 2월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비서장 오철성을 만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일컬어 소수의 교민을 대표하는 조직 정도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부로서 존재를 부정하였다.*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선에 반대하였다고 해서 서훈을 주면 안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원봉의 경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정부의 정규군인 광복군의 지휘부에 몸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부정하였다. 나아가 민필오와 장준하 등의 증언을 보더라도 김원봉은 광복군 내에서 분열공작을 펼쳤다.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라 부르며 서훈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보수권에서는 80~90년 전 독립운동을 한 북한의 6.25 남침에 참여하고 지원한 북한 정부의 인물을 끄집어내서 여권에 반대하는 사람은 친일파로 모는 여론을 형성시킨다고 반발하고 있다.

보훈처에선 서훈 근거가 영화 암살 관객 수가 1,200만명 이라는걸 근거로 내세워서 논란이 됐다. 그래서 현실과 자유롭게 창작한 영화를 구분 못 한다고 보훈처가 비판받았다.

따라서 후에 김원봉은 이적단체 설립에 참가하였고 6.25 전쟁 범죄에 적극 협력했기 때문에 받을 길이 없다.

5. 오해와 사실들

[김원봉 서훈 논란②] 약산 김원봉은 北노동당 핵심 권력자?…오해와 사실들

김원봉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며 서훈 논란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선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했던 공로들이 분명히 컸지만, 김원봉이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고 6.25 전쟁 이후 로력훈장을 받은 인물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뉴스와 보수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김원봉이 6.25 전쟁의 '주범'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다만 여기에는 오해가 끼어있는데 김원봉을 김일성 밑에 있었던 인사로 착각하는 것이다. 김원봉은 조선로동당원이 아니었다. 군소정당인 '조선인민공화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야당인사였다. 이런 혼란이 온 이유는 이름이 같은 조선로동당의 김원봉이 동명이인으로 있고, 게다가 이 인물도 김원봉과 같은 시기 숙청당해서 더욱 혼선을 주었다.

야당인사였다고 6.25 전쟁에 소극적이었거나 북한 정권과 각을 세웠다는 뜻은 아니니 주의. 8월 종파사건도서정리사업을 거치며 김씨 유일체제가 된 북한만 생각하고 만주파, 갑산파,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같은 여러 정치집단이 연립형태를 띄고 있던 50년대 북한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처음부터 김씨 일가의 유일지배체제였던 걸로 생각하니 북한정권 수립=김일성의 수하 혹은 변호한답시고 조선로동당원이 아니고 김일성과도 거리가 있었으니 6.25 전쟁에 찬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오류가 도출되는 것.

김원봉은 북한 초대 내각 국가검열상으로 1952년까지 내각의 일원이었고 검열상에서 내려온 뒤엔 바로 로동상(노동부 장관)으로서 전시 핵심 관료를 지냈으니 남한 침공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본인이 사임한 적도 없고, 맡은 업무도 남파간첩 파견과 노동력의 전시 동원과 무기 생산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었는데 북한 권력 핵심이 아니라는 주장은 무리다.

임시정부 폐지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단편적으로 듣고 김원봉이 (우파) 독립운동을 근절하려고 했다는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김원봉이 임시정부 폐지를 주장한 것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민족혁명당과 통일동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조직을 일원화하자는 주장이었다. 민혁당 계획이 좌절되고 조선의용대가 분열되는 와중에도 끝내 중국공산당으로의 합류를 거부하고 임시정부에 합류했을 정도로, 독립운동가 시절의 김원봉은 좌우 합작과 민족 단합을 일관적으로 추구했다. 이런 행보가 그가 공산주의 성향 보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임정에 공헌한 김원봉을 수훈시켜야한다"는 주장에 대해 "김원봉은 임정 폐지를 주장한 인물이 아니냐?"는 반론이 나오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이처럼 해방 이전의 공과 해방 이후의 과, 둘다가 명백한 것이 김원봉이라는 인물의 생애이기 때문에 김원봉에 대해 찬반 의견이 갈라지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2015년 영화 암살로 부각된 이후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 의해 지속적으로 띄워지고 있는 이유는 그의 화려한 독립운동 경력도 있지만, 해방정국에서 노덕술에게 고문받았다는 일화의 영향도 컸다.[18] 대한민국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고 오히려 친일파가 권력을 장악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역사관 및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진보 측이 제일 먼저 재평가해야 할 인물 중 하나로 꼽혔기 때문이다. 즉, 진보세력의 친일파 청산 실패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진보측 입장에서는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 과거사 청산 작업 중 하나가 김원봉 복권 및 서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원봉이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았다는 주장은 논란이 많고 아직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다만 이를 지적하는 측에서는 친일파가 권력을 장악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주장도 과장되었다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정부 수립에 관여했고 주요 요직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좌우익 대립 속에서 상당수 우익 독립운동가는 친일파와 손잡고 좌익 독립운동가를 탄압했고 친일파는 처벌받지 않았고 좌익 독립운동가는 확실히 탄압당했다. 차라리 김원봉만 특별히 불쌍한 것이 아니니 특별취급해서 예외적으로 서훈을 주자는 주장은 공정성을 훼손한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5.1. 김원봉이 김일성에게 부정적이었다?

일부 아마추어 학자들은 김원봉이 김일성에게 부정적이었다는 주장을 단언하고 증언을 인용하고 있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할 기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황용주[19]는 김원봉과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황용주에 따르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일성을 찬양하였다. 6.25 전쟁 중인 1953년 3월 21일 로동신문에 '김일성장군의 교시를 지침으로 인민의 충실한 복무자가 되자'라는 글을 썼다.#

김원봉의 김일성 평가에 대해선 전문가의 논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한상도, 『김원봉의 월북 배경과 이후 정치활동 궤적』,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88, 2019, 219~221에 따르면 '김원봉이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에 부정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김원봉은 1940년부터 김일성 측을 동경했으며 북한에게 실제로 기대감을 느꼈고, 이는 김원봉이 월북한 배경 중 하나였다고 한다.

5.2. 김원봉이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다?

김원봉의 주요 연구인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 비평사, 1993, 404~410, 413~415; 한상도, 『해방정국기 김원봉의 정치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No.64, 2018, 122·130·133·149~150·157; 한상도, 『김원봉의 월북 배경과 이후 정치활동 궤적』,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88, 2019, 219·224의 주석 67·225·227·242; 김광운, 『김원봉의 1945년 광복 이후 정치 행적과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No.68, 2019, 276.에 의하면 김원봉은 친공산주의 성향의 좌파는 맞지만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아닌 좌익 민족주의자라는 게 정설이다.#

염인호에 따르면 “약산은 개화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이 과저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었”고 “약산 사상의 밑바탕에는 항상 민족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가 흘렀”다. 독립운동 시절에도 일관되게 “민족주의”성향으로 활동하였다. 김원봉·의열단·민혁당과 적대적인 다른“민족주의자”들은 “의열단·민혁당=사회주의 단체”라 주장하였으나 “중국공산당과 혈투를 벌이고 있던 국민당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단지 조선인들은 단결심이 약해 서로 헐뜯기 좋아한다는 정도로 치부하였”다. “의열단·민혁당은 사회주의 단체이기보다는 민족주의 단체임이 분명하며, 약산 역시 민족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약산 김원봉 진영은 사회주의는 아니고 다만 “사회주의자들과의 연합에 의해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그런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이었다.김원봉은 해방 뒤에도 일관되게 공산주의 계열과 구분되는 민족주의 세력이라 구분됐고 해방 후를 기준으로 하여도 약산 김원봉은 “민족주의”, “진보적 민족주의”로 분류된다.

한상도에 따르면 미군정에서는 김원봉을 "민족주의 좌파세력", "임정 군무부장 겸 광복군 부사령 출신의 좌파 민족주의자", "좌파 민족주의자", "민족주의 좌파세력", "민족주의자, "친공산주의 활동", "비공산주의계열의 좌익 지도자인 김원봉"이라고 평가한 것을 인용하며 " ‘비공산주의자인 좌익 지도자’로 분류되었던 그였지만, 어느새 두 발은 공산주의 진영 깊숙이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한다. 김원봉의 월북 후에도 “김원봉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남한에 있어 보아야 정치원으로 큰 무엇이 없겠고, 지난날 관계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북에 있고 하니, 이북으로 갔을”인물 이라는 정화암의 평가를 인용하며 "초대 국가검열상"에 "‘남한 출신’ 및 ‘비공산주의’의 지분으로 입각", " ‘남한 출신’ 및 ‘비공산주의’에 대한 배려 원칙이 적용", "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 "남한 출신의 비공산주의자들", " ‘비공산주의자’, ‘비남로당’으로 분류되는 민전 의장"이었다고 명시한다.

김광운도"민족주의 성향"이었다고 명시한다.

학계에선 김원봉이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아닌 좌익 민족주의라는 게 정설이다.

5.3.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고 뺨을 맞았다?

김원봉이 악명 높은 친일 경찰이던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고 뺨을 맞았다는 주장은 '친일파가 득세하고 독립운동가가 홀대받은 세상'이라는 인식을 함축시켜 보여주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지만[20], 이 논란 역시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 일단 노덕술에게 체포당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를 지적하는 측에서는 친일파가 권력을 장악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주장도 과장되었다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정부 수립에 관여했고 주요 요직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좌우익 대립 속에서 상당수 우익 독립운동가는 친일파와 손잡고 좌익 독립운동가를 탄압했고 친일파는 처벌받지 않은 대신 좌익 독립운동가는 확실히 탄압당했다. 사실 기득권이 된 독립운동가들이 자신들과 노선이 같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일은 타 신흥독립국들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5.4. 좌익 탄압의 위협 때문에 월북했다?

이것은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월북동기 좌익탄압설 일부 긍정 한상도, 『해방정국기 김원봉의 정치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No.64, 2018; 157,한상도, 『김원봉의 월북 배경과 이후 정치활동 궤적』,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88, 2019, 218~219.
월북동기 좌익탄압설 부정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 비평사, 1993, 413.

한상도의 2018년 논문에 따르면 1947년 8월 하순 미국은 "남한 단정안의 현실화를 위한 사전 조사 작업의 일환"으로 "미 대통령 특사 웨드마이어 중장"은 "허헌·김원봉과도 만나길 희망"하였으나 김원봉은 “다른 민주지도자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있으며, 자신들에 대한 체포령이 취소되지 않는 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서 "면담을 거부하였고" "유엔 감시 하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으로 진전된 1948년 초 ‘한국인의 의견을 청취’하려는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방한"하였고 "제2분과위원회에서는 미군정에 허헌·유영준·백용희·김원봉·허성택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이에 "미군정 측에서도 이들을 구금 체포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미국 내부 자료로 검증되는 사실이지만 “김원봉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였다.”며 설명했다.(한상도, 2018, 157.)

하지만 2019년 논문에선
이렇듯 생명의 위협이 월북의 주요 동기가 되었을 개연성은 그에 대한 위협이 극성을 부리던 1947년 8월 말까지 인민공화당이 지방조직 확충을 시도하였던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이는 김원봉이 인민공화당의 조직 확충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강화해 나갔음을 알려준다. 미군정과 우익세력에 의한 신변 위협이 없었더라면 남한 정국에서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모색하였으리라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가 기정사실화되어 가던 상황 또한 북행 결정의 일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명분으로나 실재 현실의 측면에서 선거 참여가 불가능한 그에게 있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자신의 정치적 토양이 황폐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월북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던것이다(한상도, 2019, 157.)
고 썼다. 다만 한상도는 그 외에도 김원봉이 1940년에도 김일성 측을 동경했으며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세력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으며, 월북정치활동 이전부터 북로당 측과 제휴하며 북한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사실도 월북의 이유 중 하나임을 명시한다.(한상도, 2019, 219~222)

염인호는 “미군정이 최후까지 약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안전을 보장하는 등 노력을 다했다는 점을 두고 볼 때 테러 위협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염인호, 1993, 413.)며 좌익에 대한 테러 위협으로는 월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5.5. 김원봉의 현상금은 김구보다 높은 100만원이었다?

김원봉이 항일무장투쟁을 할 당시 일제가 김원봉에게 100만 원[21]이라는 현상금을 걸었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현상금 100만 원에 대한 객관적 사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조차도 하나의 '신화'에 불과할 뿐 근거 없는 주장이라 밝혔다.# 또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역시 김구보다 김원봉의 현상금이 높았다는 얘기는 가짜 뉴스라고 반박했다.# 김원봉 현상금 100만원설은 어떠한 사료적 근거도 없는 가짜뉴스다.

5.6. 김원봉이 6.25 남침을 반대했다?

김원봉이 6.25 남침을 반대했다는 주장이 인터넷에서 존재하지만 김원봉을 연구한 염인호•한상도•김광운의 논문에선 전혀 등장하지 않는 주장이다. 즉, 6.25 남침에 대해 김원봉은 찬성이나 반대 중 어느 견해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6.25 남침 발발전부터 남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한 건 사실이다. 아래 참고.

5.7. 김원봉의 남파 '간첩'은 가짜 뉴스다?

오마이뉴스 기자이자 약산김원봉기념사업회 비상임 이사가 쓴 「약산로드 7000km」에서는 경향신문의 후속보도가 존재하지 않고 기사에서 존재하고 있는 오류들 때문에 김원봉이 간첩을 남파했다는 것은 가짜뉴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지만 정확히 뭐라고 주장했는지는 출처를 통해서 알 수가 없다. 기자의 주장에 의하면 경향신문 보도가 김원봉을 '8.15 직후 괴뢰집단 국가검열성 고문'이라고 명시한 점(실제로는 해방 직후가 아닌 48년부터 52년까지만 국가검열상을 맡았고 보도된 시점에는 국가검열상이 아니라 이미 노동상이 되어있었음)등을 비추어 볼 때 김원봉의 직책도 틀리고 시기도 틀리기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어마어마한 간첩단이라고 말했는데, 경향신문의 이 보도 이외에는 후속 보도가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요 간첩사례를 다룬 <북괴대남스파이전선(1979)>, 중앙정보부의 <북한대남공작사>, 국군보안사령부의 <대공30년사> 등에도 경향신문이 보도한 '약산의 간첩 남파'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식의 말장난인데 김원봉은 간첩 개념의 집단을 남파하진 않았지만 밀양에서 자신이 결성한 인민공화당의 일부 당원들을 북한에서 훈련시킨 후 남파하거나 기존 남한에 있던 당원들을 지휘해서 (6.25 발발전부터) 남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한 건 진실이고 학계에서 상식이다. 김원봉에게 지시를 받아 공격을 수행한 단체는 김원봉이 결성한 인민공화당이었다. 이에 대해서 남한 자료와 북한 자료가 교차검증되므로 학계에서 논란이 없다. 논문들을 스캔한 자료는 다음을 참고. 펨코, 군갤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 조직을 재건하여 이를 기반으로 삼았다. 1946년 3월 16일 밀양극장에서는 500여 명이 참석하여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족혁명당 지부 결성식이 열렸다....1947년 5월 11일에는 민족혁명당 대전지부당부 결성대회가 열렸고, 6월 1·2일 개최된 민족혁명당 제10차 전당대표대회에서는 당명을 인민공화당으로 변경
한상도, 『해방정국기 김원봉의 정치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No.64, 2018, 145~146쪽. #
그가 남한 내 인민공화당 조직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지침을 내려보냈고, 월북한 인민공화당 당원들에게 당 재건 및 대한민국정부를 전복시키고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투쟁 등의 임무를 부여하여 남파시키는 등, 월북직후에도 인민공화당을 기반으로 한 대남 정치활동을 중단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상도, 『김원봉의 월북 배경과 이후 정치활동 궤적』,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88, 2019, 225쪽.#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적의 선거기관과 선거장소를 파괴 습격하며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선거를 완전히 파탄시키라! 인민유격대의 무장투쟁을 백방으로 원호하며 광범한 농민봉기를 일층 맹렬히 전개 하라! 이 승만 매국역도들을 타도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방책을 우리들 자신 의 손으로 실시하라! …… 조국의 영예와 당의 영예를 위하여 자기의 피와 생명을 아끼지 말고 원쑤들을 소탕하는 길에 용감히 전진하라!
김원봉, 1950년 5월 20일 조선중앙방송국 라디오를 통해 인민공화당 당원들에게[22]
김광운, 『김원봉의 1945년 광복 이후 정치 행적과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No.68, 2019, 285쪽.#
북한 정권 수립 후 평양에 있던 인민공화당 중앙은 남한 내의 당 조직으로부터 당 사업을 보고받는 한편 당 활동 지침을 일일이 내려보냈다...알려진 사례 한를 들면 1949년 6월 15일에는 부산시 초량동 이기우의 자택에서 인민공화당 경남도당 조직을 재조직하는 한편 6월 18일에는 도당에서 일반 정세, 조직광작 현황, 투쟁상황, 선전공작 상황, 재정공작 상황 등의 경남도당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여 인민공화당 중앙당으로 발송하였다...7월 19일에는 중앙당에서 경남도위에 하달하는 지령문을 내렸다.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 비평사, 1993, 384쪽. #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김용회는 1947년 7월 부산에서 인민공화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는데 이미 1948년 2월 1일 경에 월북, 강동정치학원에 입학...강동정치학원은 1947년 9월 평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평남 강동군 승호면 입석리에 일제시대의 탄광 사무소와 합숙소를 개수하여 만들었는데 초기에는 남로당 도당 부위원장과 부장, 군당위원장, 부위원장급 등을 입교시켜 3개월 정도의 강습과 훈련을 실시하고 다시 남파하였다. 그러다가 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와 같은 해 8월 20일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하였던 남로당과 그 우당(근로인민당·인공당 등) 및 각 사회단체 간부들이 대거 월북하게 되자 이 단체의 구성원도 받아들여 교육하였다...50년 초에는 해산...(김용회는 강동정치학원에서) 같은 해 4월 23일 졸업, 월남...후일 경남도당 선전책으로 임명되었다.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 비평사, 1993, 384쪽. #
이만식은 1948년 6월 경남도당 간부 김진달과 신남근, 구중복, 문관홍, 안수열과 함께 상경하여 17일 개성에 도착, 송악산을 거쳐 월북하여 같은 달 28일 평양을 경우, 강동정치학원에 입학한 뒤 철학, 조선역사, 소련혁명사, 신민주주의 정치기구, 해방 후의 조선 등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그런 뒤 1948년 10월 20일 경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졸업한 이튿날인 21일 이만식은 평양에서 있던 인민공화당 사무소에서 당수인 약산을 만났다...

약산은 이들에게 (1)당의 핵심이 될 것 (2)당 재건운동을 전개할 것 (3) 청년으로서 당 사업에 열렬히 투쟁할 것 (4)대한민국정부를 파괴 전복시키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도록 투쟁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만식은 남파되어 후일 인민공화당 경남도당 책임자를 맡았다.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 비평사, 1993, 384~385쪽. #
송삼훈의 경우...그는 1948년 8월 2일 진주에서 인민공화당에 입당하고 같은 달 10일 경에 월북, 강동정치학원에 입학, 같은 해 11월 10일경에 졸업하여 월남하였다...남한의 인민공화당원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끊임없이 당 조직 복원운동을 전개하였다. 당 조직은 경남, 충청도, 서울에서 한국전쟁 때까지 유지되었다. 특히 경남은 A 지구 부산, B지구 마산·창원·통영·함안, C지구 진주·의령·사천·합천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만큼 경남일대에 세력이 강했음을 보여준다...당은 조직 복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북한에 수립된 인민공화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라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인민공화국은 합법 정부이며 노동자·농민은 인민공화국을 받들어야만 착취를 당하지 않고 자유스럽고 행복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다” 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고 “미군은 즉시 철퇴하라” “인민공화국 만세” “남조선 단독 괴뢰 정부를 타도하자” “유엔한국위원단 물러가라””인민공화국 만세”등의 벽보를 전신주에 따위에 붙이거나 이러한 내용을 벽에 낙서하였으며 인민공화당 및 민전 호소문 등을 가옥에 투입하거나 각 기관에 우송하였다.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 비평사, 1993, 385쪽. #
당 활동이 활발하였던 경남지역에서는 무장운동까지 전개되었다. 1949년 7월 19일 인민공화당 중앙당에서 경상남도위원회에 하달한 지령문에서는 이만식을 유격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있으며 1949년 7월 30일 C지구에서 경남도당에 보낸 보고서에는 35명으로 야산대원을 조직하고 있으며 야산대원에게 교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또 당이 독자적으로 유격대 조직을 시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로당이 전개하고 있던 무장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 비평사, 1993, 386쪽. #
이같은 당의 활동이야말로 평양에서의 약산의 권위를 지키게 하는 하나의 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 내에서의 운동은 우당이었던 남로당과 상호 협조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러는 가운데서도 인민공화당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진주의 당 간부는 당원들을 교양하면서 약산의 항일 투쟁을 담은 『약산과 의열단』을 매입하여 탐독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 당의 노선인 ‘4대 자유’에 대한 학습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약산은 당원들에게 중앙당 지령 또는 약산 자신의 지령문을 통해 평양에서 남한 내의 당 활동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 비평사, 1993, 386쪽. #
김원봉은 1948년 2월 초 핵심당원들을 북한에 있는 강동정치학원에 입교시켰다. 그리고 이념교육과 향후 활동지침을 하달했다. 김원봉은 이 자리에서 당재건운동을 전개할 것 등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인민공화당 활동이 활발했던 경남 일부 지역에서는 당원들이 무장유격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약산 김원봉 평전』 (김삼웅, 시대의창, 2008) p584.#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라는 암살의 유명한 대사와 함께 밀양의 관광지에서도 김원봉이 밀양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김원봉의 지휘로 남한을 공격했던 인민공화당이 밀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당이라는 점과 더불어 밀양의 사회적 이미지 때문에 역으로 조롱까지 받고 있다.디시 실시간 베스트(서적과 논문 스캔자료가 포함된 자료)

6. 가족

파일:김원봉의 가족.jpg
김원봉이 국외에서 항일무장투쟁 중일 때 국내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하여 그의 가족과 국내에 잠입했던 의열단원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원봉의 부친이며 그 옆이 김원봉의 계모다. 앞줄 중앙이 김원봉의 막내 동생 김학봉이다. 뒷줄 오른쪽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의열단 단원이다.
파일:첫아들 중근을 안고 있는 김원봉.jpg
1946년 여름, 김원봉이 첫아들 '중근'을 안고 밀양의 표충사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김원봉은 총 3명의 여인과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봉이 가장 처음 결혼한 여인은 평안도 출신의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이었다.[23] 하지만 최씨 성을 가진 여인이라는 사실 이외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본처와 사별 후 박차정[24]에게 새장가를 든다. 박차정은 김두봉의 5촌 조카뻘인데, 박차정의 외당숙이 바로 김두봉이다. 박차정의 어머니가 김두봉의 사촌동생이라고. 김원봉과 박차정은 1931년에 결혼하였다. 박차정은 1939년 장시 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총상을 입어 후유증이 생겼고 1944년 충칭에서 사망했다. [25]

세 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 최동선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중근이고 둘째는 김철근이다. 연구자들은 김원봉이 김일성에 의해 숙청될 때 부인은 물론 아들들도 모두 피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물급 월북/납북인사들의 소식은 냉전 시기에도 판문점 채널[26]이나 조총련 계열 재일교포들을 통해 알음알음 전해졌고, 특히 국가통제가 일시적으로 붕괴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외부로 알려진 바가 많았는데, 김원봉 일가의 소식은 감감무소식이다. 이는 50년대 중후반 김일성의 숙청작업으로 숙청된 인사들의 공통점인데, 숙청 후 시간이 오래 지나서 숙청된 인사들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남은 가족들 중 동생들은 한때 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모두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남동생 김봉철(1918~1986)과 여동생 김학봉(1932~2019)[27]은 생존했다. 김봉철은 4.19 혁명 당시 동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했는데, 이후 이를 근거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옥살이를 하다 1986년 사망하였고, 2010년 유족들의 노력으로 인해 대법원에서 재심 결정 및 무죄를 선고받았다.# 여동생 김학봉은 고향 밀양에서 살다가 2019년 2월 24일 사망했다.#

7. 여담

8. 어록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우리가 광복운동을 시작한 이래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혹은 군대를 조직하고, 혹은 공산당과 제휴하고 혹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등 여러 가지 실책(實策)을 강구해보았으나 무슨 얻은 바가 있었는가? 우리 단원이 노리는 곳은 도쿄와 경성의 2개 소로서 조선총독을 죽이기를 5~6명에 이르면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을 것이고, 도쿄에 폭탄을 터뜨려 해마다 2번 이상 놀라게 하면 조선 독립 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그들 스스로 조선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공산당 선언에서 말하기를 "과거 일절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급 투쟁이 있기 전에 종족적 투쟁이 있었으며 또 금일까지도 의연히 종족의 투쟁이 계속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일본의 민중이 조선의 민중을 침탈하였고 일본 무산자가 조선의 무산자를 침탈하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조선 내 연년히 이주하는 이민이 일본에서는 무산자가 아니었던 것이 없지마는 조선에 와서는 이삼 년만 지나면 유산 계급이 되기 쉽습니다."
- 동아일보를 통해 기고한 '합치(合致)되는 두 운동(運動) -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 내용 일부.#
"중국의 형제들, 길이 악수합시다. 공고히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참으로 우리의 진정한 동아의 행복의 국가를 건설합시다."
- 조선의용대의 선무 공작 내용 일부.

9. 인물 연표

연도 행적
1898년 경남 밀양 출생
1916년 중국 망명
1919년 신흥무관학교 재학 (6~9월)
- 의열단 창설 (11월)
1920년 부산·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열단원 박재혁·최수봉)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열단원 김익상)
1922년 일본군 대장 저격 미수 (의열단원 김익상·오성륜·이종암)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및 도심 총격전 (의열단원 김상옥)
-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집필
1924년 도쿄 궁성 폭탄 공격 미수 (의열단원 김지섭)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학
- 동양척식(주)·식산은행 폭탄 투척 (의열단원 나석주)
1927년 중국공산당 봉기 참여, 의열단 조직 위기
1929년 '레닌주의' 창간호 발간,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 결성
1932년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교장 취임)
1935년 난징에서 의열단 등 5개 단체 '민족혁명당' 결성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독립운동단체 연합) 결성
1938년 '조선의용대' (군사조직) 결성
1941년 조선민족혁명당, 임시정부 참여 선언
1942년 조선의용대 광복군 편입 (부사령관 취임)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
1945년 광복 후 귀국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취임
1947년 노덕술에게 체포, 십여 일후 석방
1948년 월북
북한 정부 국가검열상(북한 정부 서열 7위)
1952년 북 '로력훈장' 수상
북 로동상
195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58년 숙청
출처.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조.

10. 대중매체에서

『아리랑(Song of Arirang)』(님 웨일스 지음, 조우화 옮김, 동녘)과 『김산 평전』(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에 주인공 장지락이 만난 주요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김원봉이다.

1985년작 KBS1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이춘식, 1989년작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선 나영진, 1995년 KBS1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백준기가 각각 맡았다.

2000년작 영화 아나키스트에서 정원중이 연기한 '윤 선생'은 그를 모티브로 삼은 인물이다. 작중 의열단 멤버들의 수장으로 암살을 사주하고 자금관리, 계획등을 지시하며 상당한 카리스마를 지녔다. 하지만 '정의로운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오히려 조직을 배반한 동료는 가차없이 죽이거나 후반부에는 아나키스트인 주인공들에게 사회주의로 전향 할 것을 권유하는 등, 순수한 이념보다는 권력과 정치적 목표를 우선시하는 냉혈한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후 에필로그에서 상구(김인권) 회고를 통해 과거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자, 3일간 대성통곡을 하곤 월북을 해버렸다고 언급된다.
하하하하… 이봐, 미군 동무. 이분이 누구신 줄 아시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내신 김원봉 동무이시오!
심영의 소개
그 반동놈의 자식...!
우리 국군 준비대를 해산하라, 이런 말이오?
야인시대에서의 김원봉의 주요 대사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심영의 소개와 함께 등장하여 남한 지역의 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나레이션으로 독립군 출신의 사회주의자라고 언급된다. 배우는 맹봉학.[34]

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직접 등장은 없지만, 이동우(서울 1945)의 아버지 이인평이 인민재판 과정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낸 것을 확인하기 위해, 영수증의 출처를 알아보는 차원에서 언급된다.

2011년 MBC 광복절 특집극 절정에서 김원봉 단장이 등장한다. 윤세주의 천거로 이육사의열단에 받아들이게 된다.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중에서 2013년 2월 20일에 업로드된 29화에서 김원봉 특집을 다루어 매체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독립운동가를 알게 됐다는 평이 많았다. 다만 해당 방송은 김원봉에 대한 낭만적인 인식이 강하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팟캐스트 다시또역시 25화를 참고하면 된다.

위의 팟캐스트 다시또역시 25화에서도 김원봉에 대해 방송하였다. 다시또역시는 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는 역사학 전공자들이 진행하는 방송이니, 김원봉에 대해 좀 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내용을 듣고 싶다면 이 방송을 추천한다.

2015년작 영화 암살에서 비중있는 조역으로 등장한다. 사실상 한국 내 영화, 드라마 내에서 김원봉에 대한 의미있는 조명은 이 영화가 처음이라고 봐도 좋다. 한국사회가 70년 동안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알게 해주는 부분. 배우는 조승우. 여담으로 암살의 흥행과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2013년 초에 업로드했던 이이제이 김원봉 특집 편의 순위와 구독수가 급상승했다고 자신들의 방송에서 언급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서도 응원 메세지를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들도 이 영화를 보고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치면서 환호했었다.기사

암살에 이어 2016년 9월 개봉된 영화 밀정에서 이병헌이 맡은 역할인 정채산이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의열단 단장으로 나왔다.[35]

2018년 7월 공영방송국 KBS에서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3년 만에 다시 부활하는 KBS 대하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김원봉이 선정되었다.# 다만 보수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김원봉의 월북과 북한 정권 수립 참여 행보를 두고 반발하고 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정책위부의장은 김원봉의 남파 간첩단 파견을 근거로 드라마 제작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KBS에서 방송은 무산되었다. 2019년 MBC에서 첫방송된 드라마 이몽의 주인공으로 김원봉이 선정되었고, 유지태가 역을 맡기도 했다.

2018년 8월 공영방송국 EBS에서 지식채널ⓔ를 통하여 김원봉에 대해 처음으로 방송하기도 했다.#

2019년 1월 MBC에서 기억·록, 100년을 탐험하다를 통하여 김원봉에 대해 방송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전쟁 영웅이 되었다에서는 김두봉을 패고 있던 김일성을 말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때 이름은 직접 나오지 않지만 북한 군인들의 대화에서 밀양 출신이라는 언급과 일제강점기 시기 일제의 평가를 보여주며 그가 김원봉임을 유추할 수 있게 했다. 이후 김일성은 확실히 아니라고 판단해 작전을 짜서 김일성이 국군에 체포되는데 기여하지만 그를 믿지 않은 이강산에 의해 추포된다.[36]

카이저라이히에서 민감기의군(국민당 좌파) 소속 장군으로 등장하며, 국민혁명정부-중화민국이 한반도를 해방하면 한국의 지도자가 된다.

라스트 엠파이어에서는 장군으로 등장.

하츠 오브 코리아에서는 공산주의 루트인 임시인민위원회 선택시 한국군 장군으로 쓸수 있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대한제국이 살아남았기에 익문사소속의 요원으로 나온다. 담딘 수흐바타르와 만나는데 그에게 밀리지 않는 대담한 모습을 보인다. 민족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면서도 다른 우익지도자들과 달리 파시즘에도 무관해서인지, 정보조직의 최고수장이된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한국군 정보원으로 등장하며 수카르노와 만나서 의형제가 된다. 비범한 인물로 테러나 사보타주 계획을 전부 외워서 머리에 기억하고 있기에 비밀 문서나, 증거를 남기지 않고, 2주만에 인도네시아 어를 외워버리는 인물로 나온다.

11. 참고 문헌 및 저자 소개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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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할 때 사용한 가명이다.[2]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교섭할 때에 주로 사용된 가명이다.[3] 시조로부터 73세, 참판공파 42세손.[4] #[5] 현재 중국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난징대학의 전신이다.[6]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작은 키로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평균 키였다. #[7] 조선로동당에 가입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8] 해방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9] 그러나 중국에서의 한인 군관 육성에 있어서 김구와 김원봉은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지며 협력했다. #1, #2[10] 후술하는 대로 이는 근거 없는 소리에 불과하나, 이 당시에는 김원봉 재평가의 붐이 일던 시기라 사실관계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11] 다만 민필호와 마찬가지로 장준하 역시 우익 민족주의자이자 당시 기준으로도 극단적인 수준의 강경 반공주의자였으므로 좌익인 김원봉에 대한 그의 평가는 좋지 않을 수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12] 국가보훈처 내부규정에 의하면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사람은 건국훈장 수여 명단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김원봉은 건국훈장을 받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받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13] 한국 육군 창건에 큰 역할을 한 건 이응준 등이다.[14] 백선엽과 달리 친일 논란이 전무하다.[15] 실제로 김원봉과 같은 독립운동가였으며 김원봉을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판한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16] 조건을 단 이유는 그 이후는 사실상 납북된 사람들 뿐이므로[17] 전쟁 이후에도 북한의 군사도발과 북한 정권의 영향으로 징병제를 아직도 시행 하고 있어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물론 중국이 건재한 한 북한이 없다고 징병제를 안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청년들의 2년을 날려보내게 만든 건 사실이다. 게다가 북한 청년들 입장에서는 굳이 적대할 이유도 없는 우리나라를 두고 부정적인 세뇌 교육을 받느라 인생의 10년 가까이를 허비해야 한다.[18] 일단 노덕술에게 체포된 적이 있는 적만큼은 사실이다.[19] 뒷날 MBC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20] 일단 김구 암살 당시에도 해당 소문이 유명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언이 있다. 증거[21] 의열단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1920~1927년을 기준으로 놓으면, 2023년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66억 3000만~84억 4000만 원 상당이다.[22] 김원봉이 인민공화당계 유격대를 지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23]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김학준, 민음사, 2005)에서.[24] 여성 독립운동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냈다.[25] 정화암은 김원봉의 본처인 최씨와 박차정이 모두 화류계에 밥먹듯이 드나들었던 김원봉으로부터 성병에 감염되어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다만 정화암이 김원봉과 사이가 좋지 않아 사실과 다른 기록을 소문만 믿고 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공식적인 사인은 총상이다. 당시 미인계를 써서 의용군을 모집한다면서 김원봉이 성병환자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26] 북한 기관지나 언론인을 통한 북한의 공식 입장이다.[27] 김원봉과 무려 34세 차이가 난다. 당시 결혼 연령으로 보면 거의 손녀뻘에 준하는 수준.[28] 이 2시간 이야기는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광복 후 이야기다.[29] 실제로 일제는 김원봉에 대해 "보기엔 우유부단한 것 같지만 성질이 극히 사납고 치밀하다. 오안부적(傲岸不敵: 거만해서 대적할 자가 없음)의 기백과 신출귀몰하는 특기도 가졌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30] 아직 확실하지는 않음[31] 현재의 북한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32] "몇 사람씩 따로 불러다가 술을 사 먹인다든가 혹은 금품으로 매수하는가 하면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계열에서는 심지어 미인계를 쓰기도 하였다." -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돌베개, 2003년 8월 5일)에서.[33] 장준하의 평생지기 절친이자 같이 한국광복군 중 한 명이었던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김준엽김두봉의 딸이자 김원봉의 수양딸이었던 김상엽에게 호감을 갖고 몇 번 서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가 주변 동료들로부터 김원봉측에서 미인계를 쓰는 것이 분명하고, 이 김원봉이 쓴 미인계로 인해 암살을 당한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듣고 등골이 오싹해져서 그 이후로 김상엽과 만나는 것을 삼갔다고 한다. 다만 김준엽 본인은 김상엽이 본인에게 미인계를 쓴 것 같지 않다고 한듯 하다. 그리고 김준엽의 경우 장준하와는 다르게 나름 김원봉에게 호기심을 갖고 거주하는 집에 직접 찾아가보거나 충칭시 시내 한복판에서 우연히 김원봉을 만나서 먼저 다가가 인사도 해보았지만, 오히려 김원봉 측에서 김준엽을 피하는듯한 인상을 줬다고 한다.[34] 1963년 5월 25일생이며, 1부에서는 번개에게 소매치기 당한 전차 승객으로, 이후 106회에서 법무부 장관 역을 맡았다.[35] 재미있는 건 내부자들에서 같이 출연한 조승우, 이병헌이 한 번씩 김원봉 역할을 하게 되었다.[36] 과거 독립운동 경력덕에 테러나 사보타주 관련 전문가라 혹여 마음이 바뀌면 다시 한국에 해가 될 가능성이 있고 따지고 보면 김원봉도 결국은 전범이었기 때문이다.[37] 광복 직후 김오성이 좌익계 인물들의 생애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대해 서술한 평론집이다.[38] 광복 이후 박태원이 조선문학가동맹 집행위원, 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부 중앙위원회 조직 임원으로 선정되었을 때 서술한 책이다.[39] 월북 이후 내용은 기사를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