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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익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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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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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체3. 활동4. 기타5. 참고

1. 개요


대한제국의 신문사. 사무소는 한성 중앙에 있었고, 국민들이 볼 수 있는 사보(社報)를 매일 발간하는 동시에 국가에 긴요한 서적도 인쇄하는 통신사의 임무를 담당하였다.[1] 1902년에 설립하여 1909년에 해체했다고 알려졌다.

2. 정체

사실 대한제국 황제 직속 정보기관이었다. 오늘날의 국가정보원과 비슷한 기관이지만 역할은 달랐는데, 대부분 고종의 밀서를 외국에 전달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완벽한 보안을 요구했으므로 겉으로는 통신사로 위장했으며, 줄여서 익문사(益聞社)라고 불리기도 했다.

3. 활동

독리 아래에 3명의 장교(사무, 서기, 서신)들이 있으며, 기자로 위장한 61명의 정보원이 활동하였다.

기타 활동에 대해서 임시 통신원이 있으며, 국외 정보는 72개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당시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일본에 대해서만 16부문에 이르렀다. 조사 내용은 일본군의 동향, 일본 경찰, 정치인, 사회 등 다방면에 걸쳤다.

구체적인 기록이 아직 발견되고 있진 않지만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기 위한 활동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안중근 의사의 관할 권한을 일본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옮기려는 시도도 있었다.

현재 설치 목적과 활동 영역, 조직 운영 시스템 등에 대한 규정집인 제국익문사 비보장정(帝國益聞社秘報章程)이란 책이 남아 있다. 제국익문사비보장정은 제국익문사의 목적, 활동, 인원 등에 대한 23개조의 사항을 규정했으며, 이 책에 따르면 황제에게는 매일 화학 비사법[2]이라는 특수한 방법으로 보고하였고, 보고서가 있는 봉투에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성총보좌(聖聰補佐)란 글귀를 넣은 전용 인장을 찍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 비자금 조달 및 순종의 옆에서 외부의 상황을 알리기도 하였으나 결국 발각되어 1920년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4. 기타

5. 참고



[1] 출처[2] 종이를 빛에 비춰야만 글자를 볼 수 있는 방법[3] 정작 본인들도 남말할 처지가 절대 아니었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고종의 통치 정도로는 명함조차 못 내밀 정도로 더 악랄했고, 20세기 초중반에 불었던 피바람을 생각해보면 본토마저 똑같은 정치, 그 이상으로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