힉소스 Hyksos | |||||
베니 하산의 크눔호테프 2세 무덤 벽화에 그려진 힉소스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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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집트어: ḥqꜣ(w)-ḫꜣswt
이집트어 발음: hekau khasut
그리스어: Υκσως
영어: Hyksos
이집트 제2중간기 시기인 기원전 1650~1550년까지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에서 나일강 중부 일대를 지배한 셈족 계열의 민족. 고대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이집트 문명을 지배한 외부 정복자 세력이다.
2. 기원
힉소스(Υκσως)는 고대 이집트어 '헥카우-하숫트(ḥqꜣ(w)-ḫꜣswt)의 그리스어 표기로, "외국 땅의 통치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기원전 300년대에 활동한 이집트 사학자 마네토는 힉소스를 '양치기(목자, 유목민)의 우두머리'라고 지칭하면서, 이들을 "애매모호한 민족(γενος ασημοι)"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고대 이집트 문헌에 쓰인 '해시(hsy)'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한 것으로, 본래 의미는 '악한' 또는 '비천한'이다. 이집트인들이 이방민족에게 사용한 전형적이고도 일반적인 멸칭일 뿐이다.이집트인들은 기원전 2천 년 즈음 이집트 제11왕조 시대에 삼각주 동부 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아시아 유목민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할 때부터 헥카우-하숫트라는 용어를 썼다. 힉소스에 관한 유일한 그림 자료는 중부 이집트 베니 하샨의 크눔호텝 2세의 무덤 벽화이다. 크눔호텝 2세는 이집트 제12왕조 아메넴헤트 2세 시대에 오릭스 주의 주지사를 지내다가 다음 파라오인 세누스레트 2세 시대에 고위 관직인 '동부 광야의 감독관'으로 임명된 인물이다.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슈(Shu) 지방 출신의 아시아인 37명이 눈 화장품을 팔러 이집트로 온 사건을 묘사했는데, 이들의 우두머리는 아비샤(Abisha)로 불리는 자로, 그를 '헥카우-하숫트'로 적었다.
이집트 기록에서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거주민들을 '아무(3mw)'라고 불렀으며, 주로 '아시아인들(Asiatics)'로 번역되었는데, 힉소스의 경우 이러한 '아무' 집단 중에서도 통치자들을 지칭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다만 남쪽의 누비아인들이나 서쪽의 리비아인들의 통치자들은 힉소스로 지칭되지 않았다. 벽화에서 등장하는 이들은 이집트인과는 구별되는 헤어 스타일과 의복, 무기류들을 갖추었는데, 학계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벽화 등 유적들과 대조한 결과 시리아-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셈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히브리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에서 힉소스를 "우리의 조상"이라고 지칭했다.
3. 이집트 정복 과정
이집트인들은 예로부터 '신들의 땅'이라고 명명한 나일강 유역에 집단 거주하면서, 유목, 상인, 용병, 노예 등 다양한 이유로 이집트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을 나일강 삼각주의 동쪽 변두리에 살게 했다. 이들은 그곳에서 집단촌을 형성하면서 서아시아와의 무역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고고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가나안 양식의 사원, 팔레스타인 유형의 매장(말 매장 포함), 팔레스타인 유형의 도기, 다수의 우수한 무기, 크노소스 및 테라의 양식과 유사한 문체로 구성된 일련의 미노아 프레스코를 발굴했다.가장 눈에 띄는 정착지는 나일강 삼각주 북동쪽에 있는 아바리스(현재 탈 알다바)였다. 아바리스의 발굴자 만프리드 비탁은 제12왕조 말기인 기원전 1800년경 비블로스 출신의 페니키아인들이 이곳에서 무역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이집트는 이집트 고왕국 시대부터 백향목을 구하기 위해 비블로스와 무역 거래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일리 있다는 평을 받는다.
기원전 17세기, 번영을 구가하던 이집트 중왕국은 대기근과 왕권 약화, 지방 총독들의 군웅할거로 인해 쇠락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이집트 제13왕조와 이집트 제14왕조는 이러한 혼란상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변경 지역에 조용히 살아가던 이방인들은 이 때를 틈타 나일강 삼각주 전역을 점진적으로 공략해 이집트 제15왕조를 세웠다. 기원전 300년대의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는 이들이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다고 기술했지만, 현재 다수의 이집트 고고학자들은 당시에 광범위한 약탈과 파괴가 벌어졌다는 것을 입증할 유적을 찾을 수 없다며 부정한다. 학자들은 마네토가 이집트 말기 왕조 시기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 외세가 쳐들어와서 이집트를 파괴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고 역사적 기억을 소급시켜 힉소스 역시 그랬을 거라고 여겼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800~1600년경 아바리스에 거주했던 이들의 유골에 대한 스트론튬 동위원소 분석 역시 수많은 남성이 이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걸 암시하는 물증을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여성의 77%가 비 현지인이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아바리스에 거주하는 이들이 이집트 토착민들과 통혼 혼혈을 대체로 꺼렸다는 것이 드러났다.
4. 통치(제15왕조)
힉소스 왕의 명단은 다음 세 가지 자료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다. 첫째는 '튜린 케논(Turin Canon)'이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파피루스 기록이다. 이 왕 명단은 힉소스 시대 이후에 기록된 왕 명단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2중간기의 왕들을 수록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15왕조 앞부분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왕 카무디(Kamudi)만 나타나며, 그 대신 15왕조의 통치 기간은 108년이며 6명의 파라오들이 존재했다는 구절이 담겨 있다.둘째, 스캐럽과 기타 이집트 기록 등에 등장하는 힉소스 왕들의 이름이다. 여기서는 3명(키안, 야네스, 아페피)이 등장한다. 풍뎅이 모양의 스캐럽은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인 부적과 장신구인 동시에 실용적인 도장으로 활용되었다. 힉소스 왕조의 스캐럽은 누비아의 케르마와 이스라엘의 델 엘-파라, 텔 엘-아줄, 여리고, 바르카이 등지에서 발견되었으며, 지금까지 밝혀진 6명의 힉소스 왕들 중에서 초기의 두 왕인 쉐쉬와 야쿱-헤르만 확인되었다. 한편 1969년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의 고대 항구도시였던 쉬크모나에서 발견된 야곱 스캐럽은 그 주거층이 기원전 18세기에 속해 다른 힉소스 스캐럽보다는 적어도 100년 정도 앞섰다. 학자들은 이 야곱은 이스라엘의 지역 통치자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셋째,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에 기술된 6명의 힉소스 왕들이다. 비록 10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 서술되었고 그 순서와 이름 표기 면에서 기존의 역사 기록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힉소스에 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마네토가 당시 현존하던 파라오 명단을 참고했다는 전제하에 참고 대상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네토는 힉소스 왕들이 103년을 통치했으며, 총 6명이 집권했다고 기술했다. 학자들은 이 3가지 자료와 1966년 아바리스 발굴 이후 새롭게 드러난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힉소스 왕들의 명단을 재구성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대: 쉐쉬 / 마네토: 아시스(살라티스/살리티스)
2대: 야쿱-헤르(셈어식 이름: 야쿱-하두)
3대: 키안(셈어식 이름: 키야란) / 마네토: (아파)크난
4대: 야네스-이덴(셈어식 이름: 야나시-아단)/ 마네토: 야나스
5대: 아페피 / 마네토: 아포피스
6대: 카무디
2대: 야쿱-헤르(셈어식 이름: 야쿱-하두)
3대: 키안(셈어식 이름: 키야란) / 마네토: (아파)크난
4대: 야네스-이덴(셈어식 이름: 야나시-아단)/ 마네토: 야나스
5대: 아페피 / 마네토: 아포피스
6대: 카무디
힉소스인들은 13왕조와 14왕조를 멸망시키고 나일강 삼각주 전역을 장악했지만, 더 남쪽의 테베로 영역을 확장하지는 않았고, 그들의 남쪽 경계는 이집트 중부의 헤르모폴리스와 쿠사에에 이르렀다. 상이집트에 거주하는 이집트인들은 테베에 이집트 제16왕조를 세워 제15왕조와 대치했다. 힉소스인들은 현지 이집트인들을 중요한 직위에 앉혔고, 이집트의 관습과 복장을 채택했으며, 이집트 신들에 대한 숭배를 그들 자신의 믿음과 의식에 포함시켰다. 이들은 시리아의 폭풍의 신 하다드(Hadad)를 섬겼는데, 이집트인들은 이 신을 사막과 폭풍의 신인 세트와 동일시했다.
힉소스인들은 이집트를 장악한 뒤 아바리스 외에도 텔 파라샤, 텔 엘-마구드, 엘-카타나, 인샤스 등지를 추가로 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일강 서부 삼각주 가장자리에 있는 코멜-히슨에는 당대 서아시아 양식의 물건들이 출토되었지만, 주민들은 대부분 이집트 양식으로 매장되었다. 나일 강의 펠루시아 지류와 타니트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텔 바스타 유적지에는 힉소스 왕 키안과 아페피의 기념물이 발견되었지만, 힉소스인들이 여기에 거주했다는 걸 입증할 다른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나일 강의 또다른 지류인 시나이 강 인근의 텔 엘 하브바에도 이집트 토착민이 아닌 이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확인되었지만, 대다수 거주민들은 이집트인 또는 이집트화된 셈족으로 추정된다.
나일 강 삼각주 동쪽에 있는 50km 길이의 마른 강 계곡인 와디 투밀랏(Wadi Tumilat)에는 15왕조의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이는 수많은 레반트 풍 도자기들이 발견되었으며, 인근의 텔 엘-라타바와 텔 엘-사하바에는 힉소스식으로 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무덤들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 또한 멤피스와 와디 투밀랏 사이에 위치한 텔 엘-야후디야에는 거대한 토루가 발견되었으며, 인근의 레반트식 매장지도 확인되었다. 이로 볼 때 와디 투밀랏에 힉소스인들이 정착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시나이 반도, 남부 레반트, 홍해에 접근할 수 있는 무역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레반트식 상품들은 바그다드와 크노소스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로 볼 때 힉소스인들은 광범위한 무역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5. 제16, 17왕조와의 전쟁과 몰락
힉소스의 제15왕조와 이집트 현지민들의 제16왕조는 한동안 서로를 인정하며 교류를 이어갔던 듯하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마찰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제16왕조의 파라오 네비리라우 1세가 후와 에드푸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가 도로 밀려난 사건과 연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16왕조의 뒤를 이어 테베에 세워진 이집트 제17왕조 시대에 작성된 기록에 따르면, 힉소스인들은 테베를 공격해 제16왕조를 멸망시키고 왕궁과 신전을 대거 약탈했다고 한다. 그 후 제17왕조를 건국한 테베의 유력 귀족 출신인 라호테프는 아비도스나 콥토스 지방의 신전들을 복구하는 등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후대 파라오들은 상이집트를 점차 장악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나일강 삼각주를 탈환할 기회를 노렸다.기원전 1210년경 펜타웨르라는 서기관이 작성한 샬리어 파피루스 제1권에 따르면, 제15왕조의 파라오 아페피는 아바리스에 거주하면서 삼각주의 좋은 산물을 생산하는 북쪽 땅을 포함한 온 땅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세트를 주인으로 모셨고, 그 땅에서 세트 이외의 어떤 다른 신도 섬기지 않았다. 그러던 기원전 1570년경 제17 왕조의 파라오 세케넨레 타오와 아페피 사이에 외교 마찰이 벌어졌다. 아페피는 테베에 사절을 보내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세케넨레 타오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사신에게 물었다.
"당신의 주인은 우리 도시 동쪽에 있는 하마의 연못에 관해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사신이 답했다.
"(일부 훼손) 그 때문에 내가 파견되었다."
그러자 세케넨레 타오는 사신에게 고기와 과자를 비롯한 훌륭한 식량을 제공하면서 그에게 답했다.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내가 그대로 시행하겠다고 전하여라."
파피루스의 뒷부분이 훼손되어서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 길이 없지만, 양국은 힉소스가 테베에 대해 시사적으로 종주권을 강요한 이 때를 기점으로 적대관계가 되어 전쟁을 벌였던 모양이다. 세케넨레 타오는 이 전쟁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이 소장한 그의 미라의 두개골 여러 군데에 무기 자국이 있는데, 이는 사후에 의도적으로 가까이에서 도끼 등 둔기로 내려쳐서 생긴 것이었다. 또한 턱뼈가 조각나 치아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대다수 학자들은 그가 힉소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가 힉소스인들에게 둘러싸여 처참하게 죽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세케넨레 타오의 뒤를 이어 파라오에 오른 아들 카모세는 힉소스를 상대로 대대적인 전쟁을 감행했다. 그가 세운 2개의 전승 기념 석비가 카르낙의 아문 대 신전에 세워졌고, 나중에 그 내용을 나무판에 베껴쓴 카르나르본 서판이 현존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루스 제3년... (중략) 한 족장은 아바리스에, 그리고 다른 족장은 쿠쉬에 있어서 나는 아시아인[2] 및 흑인[3]과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들이 각각 이집트를 나와 함께 나누어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 권력은 과연 어떻게 행사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헤르모폴리스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집트 강이 흐르는 멤피스까지도 갈 수 없다. 아시아인들이 부과한 세금 때문에 사람들이 강탈당하여 아무도 평화롭게 정착할 수 없다. 나는 그를 붙잡아 그의 배를 갈라놓을 것이다. 나의 의지는 아시아인들을 무찌르고 이집트를 구하는 것이다.
나는 충분히 강하기 때문에 공정한 아문 신의 조언에 따라 아시아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쳐들어갔다. 나의 용맹한 군대가 마치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처럼 앞서 나갔다. (중략) 날이 밝았을 때 나는 송골매처럼 그에게 접근했다. (중략) 나는 두 강에 접해 있는 아바리스를 황폐화시켰으며, 그들의 도시를 파괴하고 집들을 붉은 폐허더미가 되도록 불태웠다.
나는 충분히 강하기 때문에 공정한 아문 신의 조언에 따라 아시아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쳐들어갔다. 나의 용맹한 군대가 마치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처럼 앞서 나갔다. (중략) 날이 밝았을 때 나는 송골매처럼 그에게 접근했다. (중략) 나는 두 강에 접해 있는 아바리스를 황폐화시켰으며, 그들의 도시를 파괴하고 집들을 붉은 폐허더미가 되도록 불태웠다.
이 비문을 볼 때, 카모세는 아시아인들에게 세금을 내야 하고 북쪽과 남쪽의 이방인들과 이집트를 나눠가져야 하는 상황에 심히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힉소스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벌여 아바리스를 파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공세 이후에도 힉소스인들이 여전히 하 이집트를 장악하고 아바리스는 힉소스의 요새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 석비는 다소 과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모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흐모세 1세는 당시 10살 밖에 안 되었기에 어머니 아호텝이 대신 섭정을 맡아 이집트를 다스렸다. 아호텝은 나름대로 이집트를 잘 관리했다. 테베의 귀족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막았고, 아흐모세 1세가 직접 이집트를 다스릴 기반을 깔아주면서 아흐모세 1세에게 군사 경험을 쌓아주었다. 이후 아흐모세 1세가 성년의 나이가 되자 아호텝은 바로 아흐모세 1세에게 전권을 넘겨주었다. 아흐모세 1세가 언제부터 힉소스인들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는지는 불명이지만 학자들은 기록을 근거로 대략 재위한지 11년 되는 해부터 전면전이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아흐모세 1세는 10여 년간 길러온 군대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북진했다. 아흐모세 1세는 헬리오폴리스를 떨어뜨린 뒤 군대를 몰아쳐 힉소스인들의 고향인 가나안 지역과 힉소스인들의 수도 아바리스를 차단했다.
이후 3차례에 걸쳐 아바도스를 공격했지만, 상이집트에서 소규모 반란이 일어나는 등 여러 사건들이 터지며 지체되어 실패했다. 4번째 공격에서야 최종적으로 아바도스를 함락시켰고, 뒤이어 힉소스인들의 마지막 요새인 샤루헨을 공격해 함락시켜 힉소스인들을 아시아로 추방시켰다. 이로써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한 아흐모세 1세는 '두 땅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스스로 올렸고, 이로 인해 130여 년 정도 지속되었던 이집트 제2중간기가 끝나고 이집트 신왕국의 막이 올랐다.
아흐모세 1세는 이집트를 통일한 직후 누비아와 시리아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고, 재위 22년 차에는 레반트에 당도해 거의 유프라테스 강 일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멀리까지 원정을 간 이유는 힉소스가 반격할 여지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추정한다.
이리하여 이집트에서 축출된 힉소스인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이집트 신왕국은 이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들을 철저히 파괴해 제15왕조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려 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한때 자신들을 지배했던 힉소스인들을 기억에서 쉽사리 떨쳐내지 못한 모양이다. 기원전 1460년경, 제18왕조의 하트셉수트는 중부 이집트의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에 건설된 신전 벽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했는데, 그 중에는 다음 문구가 있다.
"들어라 모든 민족아! 나는 내 마음의 조언대로 이 일을 행하였다. 나는 잊지 않았고 잠들지 않았으며, 파괴된 것들을 복구하였다. 이전에 아시아인들이 삼각주 땅의 아바리스에 거주하며 그 중의 유목민들이 기존의 건물들을 무너뜨렸지만, 나는 파괴된 것들을 다시 세웠다. 그들은 라 없이 통치했으며, 나의 통치 이전까지는 신들의 명령 없이 행동하였다. 나는 이제 라의 보좌를 세웠다. 나는 특정한 기간 동안 타고난 정복자라고 예견되었다."
6. 후대의 전승: 히브리인과의 관계
이집트에서 밀려난 뒤 천 년 이상 잊혔던 힉소스는 기원전 300년대의 이집트 역사가이자 제사장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를 통해 새롭게 등장했다. 그런데 이 글은 공교롭게도 헬레니즘 시대에 반유대주의 논쟁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서기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 학자 아피온은 <유대인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를 인용하면서, 과거 이집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나병 환자들이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출애굽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었다.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사서이자 스토아 철학자 카이레몬도 아피온과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이시스 여신이 꿈 속에서 당시 파라오 아메노피스에게 나타나 전쟁 중에 자신의 신전이 파괴되었음을 꾸짖었고, 거룩한 서기관 프리토바우테스가 파라오가 이집트에서 오염된 사람들을 쫓아낸다면 더 이상 경고를 받지 않게 뎌리라 권했다고 서술했다. 이에 파라오는 병자 25만 명을 모아서 추방시켰는데, 그들의 지도자 중에는 모세와 요셉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에서 한 때 유대인들이 이집트인을 통치했으며 나병 때문에 쫓겨났음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야곱-요셉을 기점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체류와 모세의 출애굽이 힉소스의 이집트 침공 및 추방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전제하에 힉소스의 어원을 포로와 연관시켰다.
그들 모두의 인종은 힉소스, 즉 '목자 왕'이라 불렀다. 힉(hyk)은 '왕'을 뜻하며 소스(sos)는 일반적으로 '목자', 또는 '목자들'을 의미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아랍 민족이라고 한다. 다른 자료에서는 힉이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포로된 목자'를 지칭한다. 이집트 어 힉이 실제로 학(hak)으로 발음될 때는 곧 '포로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이 더욱 설득력이 있고 고대 역사와도 잘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요세푸스는 마네토의 글을 인용해 힉소스가 포로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이집트를 정복했지만, 테베의 이집트 왕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이집트에서 쫓겨난 뒤 광야를 지나 시리아에 들어가서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 예루살렘을 건설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어디에서인지 모르나 이집트에 들어갔고, 트로이 전쟁 천 년 전에 이집트를 떠나 독자적인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후대의 성경학자들은 힉소스와 관련해서는 출애굽기보다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에 주목하여, 히브리인 요셉이 이집트의 재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봉사한 왕조가 같은 아시아 출신인 힉소스 왕조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위에 나온 것처럼 힉소스 왕 중에 '야쿱-헤르'라는 왕이 있는데, 야쿱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매우 비슷한 이름이기도 하다.
7. 이집트에 전차를 도입한 민족인가?
19~20세기 중반 서양 학계에서는 힉소스인들이 강력한 전차를 동원하여 이집트를 정복했다는 이야기가 통설로 자리잡았고, 이들이 히타이트 또는 앗시리아와 연관있을 거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이들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전차를 도입했고,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군이 대량의 전차 부대를 동원해 정복 전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그러나 힉소스인들이 전차를 특별히 운용했다는 걸 입증할 고고학적 물증은 현재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힉소스와 직접적으로 맞서 싸웠던 제17왕조와 힉소스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통일한 제18 왕조 시대 이집트 기록에서도 힉소스인들이 전차를 동원했다는 내용은 전혀 기술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 다수의 학자들은 힉소스인들이 이집트에 전차를 가져왔다는 가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 이집트인들이 신왕국 시대에 영토 확장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전차를 주무기로 활용하는 적과 맞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차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