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아랍에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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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나흐얀 왕가가 유래한 리와 오아시스
두바이의 구도심
18세기에 지어진 아즈만 성채
1. 영국의 보호령
그전에는 작은 토후국들이 난립하던 지역이었는데, 해적이 성행해서 영국인들은 이곳을 '해적 해안', 트루셜 해안, 오만 해안으로 불렀다.1819년에 영국은 이 트루셜 해안 일대의 실권자이던 카와심 가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820년 영국의 보호로 이어지게 된다. 영국은 트루셜 해안 일대를 식민지화하지 않고 스스로 통치하도록 만들었다. 영국 입장에서는 전략적 거점으로만 삼아 활용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세워져, 1820년 영국과 걸프의 아랍 토후국들 (아부다비, 샤르자, 아즈만, 움 알쿠와인, 라스 알카이마) 간의 보호 협정이 체결되어 아랍에미리트의 전신인 협정 국가들 체제가 시작된 라스 알카이마의 알 팔라야 성채.
1820년 트루셜 스테이트 성립[1] 이후에도 1819년 전쟁을 했던 카와심 가문이 다시 공격을 감행을 하였고, 영국은 방어에 성공한다. 결국 영국의 인적, 물적 피해가 커지자 이런 해적 행위를 조정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1820년부터 각 토후국들과 여러 조약(truce)을 맺고 지역민의 해적 행위를 종결시켰다. 이 지역은 그래서 트루셜 스테이트 또는 트루셜 오만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1892년부터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 지역은 1873년부터 1947년까지는 영국령 인도 당국에서 관리하다가 인도의 독립 이후에는 영국 외무부에서 관리했다. 1952년에 푸자이라가 영국으로부터 승인받아 마지막으로 트루셜 오만에 가맹했다.
이 지역은 딱히 경제적으로 성장하기 힘든 토양 탓으로 매우 빈곤한 지역이었으며, 주력 산업이었던 진주 산업 또한 1920년대 일본의 진주 양식 성공을 기점으로 완전히 쇠락한다.
1930년대에는 대공황 여파까지 겹쳐서 돈 대신 대추야자를 화폐 대용으로 삼을 정도로 극악한 경제난에 빠진다. 이러한 고난은 1962년 아부다비에서 석유 생산에 성공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52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이 지역 일부의 소유권을 주장했는데, 다시 영국이 보호 조약에 따라 빼앗긴 지역을 되찾게 된다.
1968년 개최된 페르시아만 토후국들의 연합을 결성하기 위한 회담. 이 회담에는 지금의 아랍에미리트를 구성하는 토후국들과 바레인과 카타르가 참여했다. 이후 바레인과 카타르, 라스 알카이마 토후국은 내정간섭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연합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다.[2]
2. 독립 이후
1968년에는 앞으로 영국군의 주둔이 끝나고 독립적인 나라를 세울 것을 트루셜 스테이트에 알렸으며, 이후 성공적으로 그 과정이 성사되었다.1971년 7월 9개 토후국들의 연합 국가가 임시 출범했으나, 바레인과 카타르, 라스 알카이마가 논의에서 빠지면서 그해 12월 2일 6개 토후국으로 정식 출범했다. 이때 가맹하지 않았던 라스 알카이마는 이란의 연안 섬들 점거로 위협을 느껴 이듬해인 1972년 2월 10일에 뒤늦게 가입했다. UAE 출범 이전에는 각 토후국마다 우표도 따로 발행했는데 옛날 우표들을 보면 이런 토후국 명의로 나온 우표도 보인다.
중세 도시 유적과 두바이 스카이라인
2022년 1월 17일 아부다비 국제공항과 석유 시설에 공습이 발생해 3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했다.
2024년 4월 16일(현지시간) 두바이 전역에 폭우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