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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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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3. 중세
3.1. 줄란드 왕조3.2. 이바디 이맘국3.3. 이란의 침공과 극복
4. 근세, 근대5. 현대

1. 개요

이 문서는 오만역사에 대해 다룬다. 오만이란 지명은 오만인의 주류를 이루는 아즈드 아랍인들의 고향인 예멘 마리브의 사라 산 근처 와디 오만에서 유래되었다. 본래 마리브 댐을 이용한 관개 농업에 종사하던 아즈드 아랍인들은 기원전 145년, 댐에 1차 붕괴가 일어나 삶의 터전을 잃자 부족장 말리크 빈 파흠의 인도 하에 현재 오만으로 이주해 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현대 오만인들의 직계 조상이다. 말리크의 아즈드 부족은 칼하트를 거점으로 페르시아 인들과 싸워 결국 니즈와 부근에서 승리하였고, 페르시아 인들이 철수하자 소하르를 접수하여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2. 고대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BC. 668-627) 치세에 현재의 오만 북동부에 위치한 이브리(현재에도 같은 위치에 같은 이름으로 있다)에서 사람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역사기록에서 오만의 첫 등장이다. 오만 북부 지역은 마간(magan), 마카(maka), 마준 (Mazun) 등으로 불리면서 고대부터 걸프만 지역과 인도와 구리, 유향(frankincense)무역으로 교역했다고 한다. 사산 제국아르다시르 1세가 걸프 해안을 정복할 당시 오만의 군주는 아므르 빈 와키드 알 힘야리였다고 한다. 후자는 사산 군대에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후 사산 제국은 소하르에 총독부를 설치해 일대를 다스렸다. 내륙의 투암 (알 부라이미, 알 아인 근처)을 근거지로 독립을 유지하던 오만 인들은 현재 푸자이라 토후국에 속하는 디바를 교역항으로 활용하였다.

작은 부족과 토후국들로 분열되어 아라비아 반도의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잠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이라크 육상 무역루트가 막히자 오만쪽으로 빙 돌아가는 무역이 성행해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현지 아랍인들은 6세기 말엽 줄란다 왕조를 세웠다. 이슬람 도래 당시에는 창건자 알 줄란다 빈 무스타크비르의 두 아들인 압드 (아야드)와 자이파르가 통치하고 있었다. 북부 해안의 소하르에는 페르시아측 총독이 있었고, 상호 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슬람 이전에 오만에서는 마나, 둘 칼사, 둘 슈라, 바지르 등의 우상이 숭배되고 있었다. 630년, 무함마드의 개종 권유 편지를 받은 압드와 자이파르는 이를 수용하여 무슬림이 되었다. 당시 사절단을 이끈 자가 바로 아므르 이븐 알 아스였고, 아부 자이드 알 안사리가 동행하였다.

이슬람을 수용하지 않고 지즈야 역시 거부한 페르시아 인들은 추방되었다. 7세기 들어 사산 제국이 약화되며 이미 소하르는 줄란다 가문에게 위탁된 상태였기에 그들은 순순히 파르스로 돌아갔다. 한편 무함마드의 사후 벌어진 릿다 전쟁 당시에는 아즈드 부족 출신의 라키트 빈 말리크가 스스로 예언자라 칭하며 디바를 중심으로 자립하였다. 디바의 징세관 후다이파 빈 무흐신 알 아즈디는 아부 바크르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후자는 하와진 부족의 징세관이자 기존 쿠라이쉬 지도자였던 이크라마 빈 아비 자흘을 파견하였다. 이크라마는 라키트의 병사 수백을 전사시키며 승리하였고, 디바에 입성하여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 메디나로 보내었다. 포로 중에는 후일 우마이야 조의 장군이 되는 무할라브의 아버지 아비 수프라도 있었다. 포로들은 우마르가 칼리파가 된 후 몸값 없이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줄란다 가문이 총독위를 세습하였다.

3. 중세

파일:무함마드 이슬람 편지.jpg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오만의 압드와 자이파르에게 보내어 이슬람 개종을 권유하는 서신

이슬람 정복기에 바레인-오만 총독 우스만 빈 알 아스 앗 타카피는 우마르의 명을 받들어 3천 군대를 조직, 줄파르 (현 라스 알 카이마)에서 출항해 파르스를 습격하였다. 3천의 군대에는 세 장군이 있었는데, 그중 라스 이므란 부대를 이끈 이가 바로 아비 수프라였다. 키쉬 (이븐 카완) 섬을 거쳐 이란에 상륙한 무슬림 군대는 슈흐라크가 이끄는 4만의 페르시아 군에 맞서 그를 전사시키며 승리를 거두었다. (644년, 투즈 전투) 승전 후 우마르의 소환령에 우스만은 동생 알 하캄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귀환하였다. 이슬람 제국 하의 아라비아 반도에서 오만은 처음으로 지역 왕조가 세워진 곳이었다. 오만인들은 659년 칼리파 알리가 파견한 총독 알 할루프 빈 아우프 알 아즈디를 살해할 정도로 독립성이 강하였다. 이에 알리는 마킬 빈 카이스 알 리야히를 파견해 알 할루프 살해의 주동자 후라이스 빈 라쉬드 앗 나지를 처단하였다.[1]

3.1. 줄란드 왕조

무아위야 1세의 치세 동안 오만은 자이파르에 이어 압드의 아들 압바드가 통치하고 있었고, 그는 중앙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조용히 지내었다. 678년 다수의 아즈드 오만인들이 바스라로 이주한 것 외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680년대 들어 오만계 아즈드 부족은 바스라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그중 무할라브 이븐 아비 수프라는 바스라 군대를 이끌고 카와리지와 싸웠다. 한편 자카트도 내지 않고 거의 독립 상태를 유지하던 줄란드 '왕조'의 오만은 2차 피트나 시기부터 전장이 되었다. 686년, 네즈드의 카와리지 지도자 나즈다는 부관 아티야 빈 알 아스와드에게 오만을 정복하게 하였다. 압바드는 패하였고 아티야는 아불 카심을 오만 총독으로 두고 귀환하였다. 다만 얼마 후 압바드의 아들 사이드와 술레이만이 아불 카심을 죽이고 줄란드 가문의 지배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10여년 후 이번에는 내전을 끝낸 우마이야 왕조가 오만을 노렸다.

693년 네즈드의 카와리지 세력을 일소한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694년부터 이라크 총독을 맡고 있던 알 핫자즈 빈 유수프에게 오만 토벌을 명하였다. 알 핫자즈는 우선 사절을 파견하여 복속과 자카트 납부를 요구하였다. 사이드와 술레이만 형제가 이를 거부하자, 알 핫자즈는 우선 무사 빈 시난 빈 살마를 총독으로 파견했으나 격퇴되었다. 그러자 알 핫자즈는 타필 빈 후세인 알 바흐라니를 파견하였고, 후자는 오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으나 현지인들의 저항은 지속되었다. 알 핫자즈는 타필을 소환하고 하집 빈 쉬바흐를 대신 파견했는데, 그럼에도 효과는 미미하였다. 교착 상태가 계속되던 701년, 압둘라흐만 빈 무함마드의 반란을 진압한 알 핫자즈는 줄란드 가문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카심 빈 샤와흐 알 무자니 휘하의 정규군을 파견하였다. 우마이야 함대가 하탓트에 상륙하자 술레이만은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카심을 포함한 원정군 다수를 전사시켰다.

분노한 알 핫자즈는 바스라 내의 아즈드 부족 지도부가 오만의 친척들을 돕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며 니자리 부족에 징병령을 내려 4만 대군을 편성하였다. 카심의 동생 무자아 빈 샤와흐 알 무자니가 이끄는 원정군은 2만씩 나뉘어 각각 해상, 육상으로 진군하였다. 함대의 준비가 지연되었기에 말 혹은 낙타를 탄 기병이 먼저 오만에 당도하였다. 이에 술레이만은 말에 탄 3천, 낙타에 탄 3천 5백인으로 구성된 기병으로 맞섰다. 여기서 술레이만은 다시 승리하였다. 한편 줄파르에 상륙하려던 무자아는 육군의 패전보를 접하고는 줄파르 대신 무산담 반도를 돌아 소하르의 바티나 해안에 상륙하였다. 육군에 맞서기 위해 술레이만이 줄란드 주력군 대부분을 데려갔기에 동생 사이드에게는 소수의 병력만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바크라 전투에서 무자아는 손쉽게 사이드를 격파하였다. 대적할 수 없다고 여긴 사이드는 아크다르 산지로 피신하였다.

무자아는 산중의 사이드를 포위하였고, 술레이만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 남하하였다. 도중 술레이만은 무스카트 항구에 정박한 3백척의 우마이야 함대를 공격, 그중 50척을 불태웠고 나머지는 열린 바다로 피신하였다. 한편 포위를 풀고 하산한 무자아는 아크다르 산지와 무스카트 사이의 사마일에서 술레이만과 격돌하였다. 술레이만은 여기서도 승리하였고, 패주한 무자아는 줄파르에 이르러 배에 올라 도주하였다. 무자아의 지원 요청을 받은 알 핫자즈는 압둘라흐만 빈 술레이만에게 바디야 출신의 5천 시리아 기병을 주어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우마이야 군에 복무하는 바스라 출신 아즈드 부족원에게서 이를 전해들은 술레이만과 사이드는 더이상 원정군에 맞설 여력이 없다고 여겼다. 이어진 전투에서 형제는 용감히 싸웠으나 무자아에게 패하였고, 이후 가족과 측근들을 대동하고 동아프리카로 피신하여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반세기 만에 오만을 평정한 무자아와 압둘라흐만은 줄란드 조에 협력한 주민들을 처벌하였다. 알 핫자즈가 임명한 오만 총독 알 카야르 빈 수브라 알 무자쉬는 현지인들을 착취하였고, 714년 핫자즈가 사망할 때까지 총독위를 유지하였다. 핫자즈 사후 이라크 부왕이 된 야지드 이븐 알 무할라브는 자신 역시 아즈드 부족 출신이었기에 오만을 동정하였다. 야지드는 동생 지야드를 오만 총독으로 파견하였고, 후자는 부임한 후 알 카야르를 처형하였다. 다만 720년대 들어 바스라에서 파견되는 오만 총독들이 수탈을 일삼자, 현지인들의 원성을 접한 칼리파 우마르 2세는 우마르 알 안사리를 직접 파견하였다. 우마르 알 안사리는 관용적인 정책으로 현지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후 지야드 이븐 알 무할라브가 재차 총독이 되어 750년까지 재임하였다.

3.2. 이바디 이맘국

3차 피트나 (우마이야-압바스 교체기)를 틈타 750년 카와리지이바디파는 이맘국을 세운다. 비록 2년 후 압바스 군에게 점령되었지만 793년 다시 세워졌고 한세기 후에 압바스 조에게 정복되었지만 10세기 경에는 베두인들의 카와리지에게 점령되었다.

3.3. 이란의 침공과 극복

그외에도 오만은 워낙 중요한 무역루트였기 때문에 여러 강대한 제국들, 특히 바다 건너 이란 세력이 처들어와서 점령을 하는 일이 잦았다. 10세기 후반 부와이 왕조를 시작으로 1053년경에는 셀주크 제국이 오만 일대를 정복하였다. 이후 이바디파를 신봉하는 나바니 왕조가 셀주크를 몰아내고 1154년 성립되었다. 바다(아라비아 해페르시아 만)에 접하여 오스만 제국 때도 상당수의 해군력이 여기에서 충당되었으며, 이미 9세기에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와 무역 중이었다고 한다. #


오만 제국 전에는 1154년부터 아즈드 족의 나바니 왕조가 말리크를 칭하며, 이바디파 이맘을 맘루크 왕조 시절의 아바스 칼리파처럼, 상징적인 위치로만 모셔두고 오만을 다스렸다. 이당시의 이바디 이맘은 1153년부터 1406년까지 기록조차 남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후 나바니 왕조의 말리크의 권력이 약화되자, 이맘들의 세력이 15세기부터 다시 강화된다. 다만 나바니 왕조의 세력은 주변의 우윤왕조나 페르시아 세력에 밀려 바흘라를 제외한 오만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4. 근세, 근대

1500년대에 해상제국을 세웠던 포르투갈 제국이 잠시 쳐들어와서 무스카트의 해안가 지방을 150년간 지배했다. 이 후 인도양 무역을 포르투갈이 방해하면서 카타르와 페르시아 호르무즈 지방,인도 서부의 해안가 지방도 진출한다.

이 상황에서 약화된 나바니 왕조를 대체하여 등장한 야루바 왕조의 술탄들은, 오스만 제국과 연합하여 1650년경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여 축출하고 영토를 회복하였다.

이 후 1730년대에 동아프리카 지방의 아주란 술탄국스와힐리 지방의 포르투갈인들을 역공하여 축출하고 계속 남진하여 19세기 초중반까지 아랍 유일의 해상제국을 이룬 오만 제국을 세웠다. 동아프리카의 소말리아, 케냐, 잔지바르, 탄자니아의 해안 지역과 서,남쪽으로는 아랍에미리트예멘 남부 일부 지역등 아라비아 반도 남부 일대, 동쪽으로는 이란 남부, 심지어 오늘날 파키스탄 령인 발루치스탄신드의 해안가 지방 까지 진출했다. 그 당시 오만 제국은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 스페인과 더불어 노예 무역으로 유명했다. 덕분에 오만의 지배를 받았던 탄자니아 등지에서는 지금도 오만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다. 신밧드의 고향이 북부의 소하르 출신이라는 (신빙성은 조금 의문시 되는) 민담이 전해져 것도 이 때문. 그리고 오만 제국의 수도는 오만 본토가 아니라 오만 제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있는 잔지바르였다. 해상 무역과 노예 무역으로 벌어들인 부가 이곳으로 몰렸기 때문.

1740년대에 이란의 전쟁기계 나디르 샤가 쳐들와서 쑥대밭이 되고 잠시 정복당하였다. 수도가 잔지바르로 옮겨간 것도 이 시기. 그러나 사이드 가문을 중심으로 다시 이란인들을 축출하고 독립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사이드 왕조가 성립되었으나 술탄 사이드 빈 알 부사이드가 1856년 죽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3번째 아들이 무스카트와 오만을 잇고 6번째 아들이 동아프리카 지역과 잔지바르 등을 접수해 오만 제국은 분할되었다. 이때부터 후계자 승계에 조정을 맡은 영국과 서구 열강들의 영향력이 강해져 오만에 내정간섭을 하는일이 잦았다. 1885년 경에 독일이 진출하여 탄자니아 지역에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건설하여 영토를 강탈하고 소말리아 해안가는 이탈리아가 접수하였다. 영국-잔지바르 전쟁 결과 케냐를 비롯한 나머지 동아프리카 지역도 깨끗하게 분할되었다. 오만도 1922년 노예매매를 금지하는 조약을 맺어 사실상 경제적으로 종속되었다.

5. 현대

1951년, 1955년에는 일련의 수호통상조약을 맺어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보호국 취급을 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해안부의 '무스카트와 오만 술탄국'과 내륙부의 '오만 이맘국'이 병존하였으며, 1954년 오만 이맘국의 새 이맘 갈리브 알히나이가 무력투쟁을 전개하여 동생 타리부는 카이로로 망명하여 오만 이맘청을 설치하고 분리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오만 전쟁(또는 제벨 악다르 전쟁)이 발발, 영국이 술탄국을, 아랍 여러 국가가 이맘국을 지원했다. 전쟁은 5년 가까이 이어지다 1959년에 이맘국이 1200년 역사를 뒤로 한 채 패망하고 알히나이는 사우디로 망명[2], 술탄국이 오만을 통일한다.

1960년 아랍 10개국은 오만 문제를 영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UN의 의제로 채택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후 오만 문제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그 보고서에 근거하여 1965년 12월 영국의 의존으로 인한 오만국민의 민족자결권과 독립을 방해하고 있다는 취지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1970년 7월 족장단이 술탄 사이드의 퇴위를 강요하여[3] 그의 외동아들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가 술탄을 계승하였다. 이 때 국명을 무스카트와 오만 술탄국에서 현재의 오만 술탄국으로 개칭하였다.

새로운 술탄은 정치범을 석방하고 중세기적 국가에서 탈피하여 오만의 국정을 개혁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1972년 정식으로 UN에 가입하였다. 카부스 술탄 하에서 오만은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경제적,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전제군주국이라는 특성상 후계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나라의 장래도 결정될 듯 하다.

2013년 5월부터 오만은 주말을 금, 토로 변경했다.

2020년 1월 술탄 카부스가 서거했다. 오만은 후계자를 선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 술탄에겐 자식이 없기 때문에 후계자는 카부스의 사촌동생이자 문화유적부 장관 하이삼 빈 타리크 알사이드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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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후라이스를 도운 나지야 부족원들 일부가 체포되었으나 알리에 의해 석방됨[2] 2009년 사우디에서 객사[3] 아들과는 달리 워낙 실정을 많이 저지른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