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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따위 장난질이 제발 끝나길 희망하며 (À faut espérer q'eu jeu la finira bientôt)》 미셸 에냉(Michel Hennin), 1769년, 에칭[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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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 왕국의 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구체제(舊體制)' 또는 '구제도(舊制度)'로 번역된다.2. 정의
앙시앵 레짐, 곧 구체제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정치적 변동과 개혁을 '누보 레짐(Nouveau Régime, 신체제)'이라 부른 것에서 이에 대응하는 어휘로 탄생했다. 이는 '오래된(old)'이라는 뜻의 '앙시앵(ancien)'과 체제라는 뜻의 '레짐(régime)'의 결합이다.앙시앵 레짐을 단순히 봉건제(feudalism)의 비유 또는 동의어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근간이 봉건제이기는 하다. 정확히 말해, 중세 이후 확립된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흐름 속에서 오랫동안 왕과 귀족층의 대립이 지속된 결과가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누적되며 형성된 체제가 앙시앵 레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등장한 마르크스주의에서 구체제의 적폐를 몰아내는 것을 '반봉건(anti-feudal)'이라고 부르는 용법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유럽의 앙시앵 레짐을 주도한 프랑스는 근대에 정치적 격동의 시기를 거쳤다. 절대적인 왕권과 지방 귀족이 추구한 권력 분산이 공존하였고, 단기적인 효율성 및 통치의 편의를 확보하기 위한 효과적인 행정조치가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이런 일련의 개혁이 누적되다 보니, 앙시앵 레짐은 법률이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 지배층에게 많은 의무를 부여하되 회피할 수 있는 길을 터놓은 반면, 피지배계층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한 동시에 모든 것이 불가능한 적폐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3. 구체제의 특징
3.1. 신분제적 특징
기본적으로 국왕과 왕족 밑에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이 피라미드형 신분제를 들여다보면 동일한 신분끼리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았다.상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소수 지배층과 다수 피지배층의 갈등이라는 구도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복잡했다. 추후 앙시앵 레짐의 특권층이 전복된 것은 특권층 자신들부터가 분열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택에 프랑스에서도 특권 폐지를 떠나, 귀족과 성직자의 전면적 숙청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다소 높았다.[2] 덕분에 다수의 특권층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3] 이들은 보통 내세울 게 없는 하급 귀족이거나 시골과 중소도시 성당의 하급 성직자였다. 마찬가지로 평민 취급을 받아서 특권이 유명무실했던 데다, 상층부가 갈수록 견고해지면서 차라리 특권층이 없어지는 것이 출세하는 발판이 되다 보니, 혁명에 협조적이었다.
3.1.1. 왕가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한 절대왕정은 루이 14세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루이 15세와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점점 허울만 남은 껍데기가 되어 갔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악화로 프랑스 왕가의 절대적인 힘이 약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일례로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귀족들이 왕을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했지만, 루이 16세 대에는 오히려 '귀족들이 권력을 논하는 장소'로 변화했으며, 루이 14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사법권을 충실히 집행했던 파리 고등법원과 기타 여러 지방 법원들은 다시 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1789년 혁명 전야쯤에 절대왕정은 이미 이름뿐인 개념이 되어버렸으며 루이 16세 또한 나라를 변혁할 의지뿐만 아니라 능력도 없었다.부르봉 왕조가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지 못하고,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 서로의 욕심 때문에 분열해 있었던 것은 왕실의 힘을 더욱 약화시켰다. 형인 루이 16세가 왕실조차 꽉 잡지 못하고 물렁물렁(?)했던 것 때문인지, 뒷날의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는 은근히 왕위에 야심을 품고 있었으며, 루이 14세의 동생의 자손으로 방계 왕가인 오를레앙 공은 이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왕가의 권위를 깎아먹는 반 왕실 활동을 후원하다가 혁명이 일어나자 대놓고 혁명을 부추겼다. 부르봉 직계와 오를레앙 가의 이러한 대립은 무려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에도 도움을 줬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이어졌다.
3.1.2. 제1신분(기도하는 자)
성직자/수도자 계층으로 약 13만 명이었다. 기본적으로 왕권 아래에 있지만, 교황의 신하이기도 한 이중 지위였다. 하지만 교황은 근세쯤 오면 힘이 없어졌던 탓에 실질적으론 프랑스 왕의 신하나 다름없었다. 1신분의 숫자는 0.8%~1% 미만에 불과했지만 경작 가능 토지의 10%를 차지하고 있었고, 교회의 십일조[4]와 수도원의 토지까지 합쳐 여러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면세 특권으로 대단한 부를 축적했다.고위 성직자/수도자와 하위 성직자/수도자끼리도 계층이 갈려서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 같은 고위급 성직자 및 수도자들은 귀족 가문에서 충원되었고, 주요 직위들도 귀족 출신이 독점하였다. 이런 큰 성당과 수도원은 특혜도 많았기 때문에 이곳의 고위 성직자는 귀족층과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반면에 지방의 작은 본당이나 시골의 일선 성직자/수도자들은 당시에 평민들과 직접 자주 만나면서 현실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었고, 신분도 귀족과 먼 이들이었다. 교회의 자금도 일괄적으로 거두어가서 재분배하는 형태였는데, 최소 단위 교구나 본당에는 자금이 내려오지 않은 데다 내려오더라도 얼마 안 됐고,[5] 그리하여 하위 성직자/수도자들은 고위 성직자/수도자들과 이해관계가 달랐다. 이는 이후 방데 학살을 통해서 농민들이 성직자들에게 우호적으로 나오는 원인이 된다.
3.1.2.1. 갈리아 교회주의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지만, 절대왕정 시기 "프랑스 교회가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에 완전히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 교회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이단심문이 일어날 수 없었고, 교황의 결정 사항도 일단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를 지지한 루이 14세는 프랑스 교회를 자신이 더 통제하고자 했지, 분립을 원하지 않았다.프랑스는 로마 이단심문관의 집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독자적인 종교재판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군주는 멀리할 수 없는 강력한 동맹이었으므로 암묵적으로 유지되었다.[6] 이는 앞의 고위 성직자/수도자 부분과 시너지를 일으켜 문제가 되었다. 신자로부터 거두어들인 헌금이 교구에서 교구장까지 올라가면, 교구장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 고위 성직자를 끝으로 흐름이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헌금이 로마 교황청까지 도달했다면 교구 단위까지 지원을 보내라는 로마 교황청을 위시한 외부의 압력이라도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자면, 스페인에서는 하급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 17세기 대항종교개혁 이래로 귀족들이 고위 성직을 돌려먹지 못하게 지속적으로 칙령을 내렸고 스페인은 교황청의 칙령에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3.1.3. 제2신분(싸우는 자)
귀족으로, 약 35만 명 정도 되었고 프랑스 전체 토지의 25%를 소유했다. 일단 프랑스 귀족들이 가진 봉건 특권은 절대왕권에 짓눌렸다. 그러나 몇 가지 사소한 특권이 있었는데, 교회의 특별석에 앉았고, 큰 칼을 찰 수 있었으며, 마차에는 가문의 인장을 그려넣을 수 있었고, 사냥권을 바탕으로 숲을 관리하였으며, 헌금할 때 기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특권보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이 면세 대상이었으며 성직을 포함한 고위직을 독점하는 계급이라는 것이었다.당시 프랑스에서 귀족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부계에서 이어지는 역사를 가진 뼈대 있는 가문의 경우 '대검귀족(La noblesse d'épée)', '혈통 귀족'으로 불리었고 세습되는 작위와 토지에 기반한 장원의 귀족들이었다. 반대로 왕의 신임을 받은 법관이나 행정 관료로 귀족이 된 자들은 '법복 귀족(La noblesse de la robe)', '종루 귀족'으로 불리었고 고등법원과 행정을 장악하였다. 이런 후천적인 귀족들은 왕의 신임 외에 관직을 매매함으로써 귀족이 될 수도 있었으며 관직은 매매가의 60분의 1만 납부하면 세습이 가능했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혈통 귀족은 소수였고 행정직을 장악한 후천적인 귀족이 다수이었다. 이는 왕이 자신의 친위 세력을 육성하면서 장원을 가진 혈통귀족을 견제하려 한 결과였지만, 점점 법복귀족의 배타성이 강해지면서 새로운 구성원의 유입을 차단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고위 장교를 1400년대 이전부터 귀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자로 제한함으로써 새로운 귀족의 등장과 출세길을 막고, 왕에게 저항하여 귀족이 될 수 없게 된 부르주아 계층의 증오를 샀다. 또한 귀족층도 경제적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한때 사문화되었던 봉건 특권을 마구 부활시켜서 영지 주민을 압박했다. 이는 농민의 증오를 받아 프랑스 혁명 때 귀족이 농민에게 도륙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들도 하위 귀족과 상위 귀족으로 또 나뉘어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상위 귀족에 대한 불만이 크다 보니, 혁명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법복귀족과 대검귀족 모두 태양왕 대에 축소되었던 전통적인 귀족세력의 권력을 회복시키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연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삼부회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층의 저항은 영국처럼 의회가 중심이 되지 못했지만, 대신 세습 특권을 가진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국왕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반 왕실 귀족 계급은 혁명을 일으키는 데 상당히 큰 역할을 하였다. 근대적인 학문 체계를 먼저 받아들인 것도 이 계층이었다. 소위 혁명파 귀족은 귀족부인의 살롱에 모여들어 저명한 학자를 불러놓고 강연을 들으면서 근대적 지식을 쌓았다. 테니스 코트의 맹세에서 3신분 위원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라파예트를 위시한 일련의 귀족이 이들이다. 특히 라파예트는 대검 귀족임에도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여한 독특한 인물이다.
다만 귀족층도 완전 면세가 아니었다. 후술할 타이유(taille)는 면제되었지만 '싸우는 자' 답게 병역의무가 있었고 군사관료로서의 역할을 기대받았다. 쉽게 말해 전쟁이 나면 당연히 참전해야 할 뿐 아니라, 병력을 모집하고 훈련시켜야 했다. 사병이 아니라 관군이므로 급료는 국고에서 지출되었는데, 모집한 귀족이 급료를 선제적으로 지불하면 나중에 국고에서 충당하는 식이었다. 귀족 본인이 떼먹는 것도 많았지만 귀족이 떼먹힐 때도 많았다.
당연하지만 귀족층은 많은 부담을 적극적으로 3계급에게 전가했다.
3.1.4. 제3신분(일하는 자)
인구의 2%도 안 되는 왕족과 1, 2신분을 제외한 프랑스인 약 98%였다. 대다수는 농민으로 약 2700만 명이었다. 이들은 가장 많은 부담을 지고 가장 큰 억압을 받았다. 하지만 제3신분의 주도층이 된 세력은 농민이 아니라 도시에 거주하는 부르주아였다.반면 부르주아는 교육을 받아서 생활수준이 높았고 지식과 능력으로 귀족층과 경쟁할 수 있었다[7]. 그렇지만 신분의 제약으로 인해 납세에 상응하는 혜택이 없고, 정치적 억압을 받는 데 큰 불만을 품었다. 삼부회에서 다층적인 간접선거를 하면 부르주아가 제3신분을 대표하였다. 물론 제3신분은 그 숫자만큼 다양한 층위를 이루었다.
농민도 토지 소유에 따라 부농과 자영농부터 빈농까지 다양한 층위로 분류되었다. 부르주아의 층위는 더 다양했다. 특히 대농장주, 무역상, 금융업자 등 귀족에 가까운 부르주아도 있었고 변호사, 교수, 의사 등 학자 계층도 있었으며, 도시의 소상인과 제조업자 등 도시 경제의 하층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다채로운 층위는 프랑스 혁명이 복잡성을 띄게 만들었다.
3.2. 정치적 특징
절대왕권 사상에 따라 국왕이 나라를 다스렸으며, 자문위원회 격인 참사원이 국왕에게 붙어 있었다. 참사원은 국왕에게 조언을 할 수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반영구적인 의회가 존재했고 실권 또한 쥐고 있었으나, 루이 13세가 왕권을 본격적으로 강화하면서 상징적 위치만 보유하게 되어버렸다. 어디까지나 왕이 대표에게 자문을 구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의회는 의결권이 없었으며 소집과 의제를 제기할 권한은 왕에게 있었다.[8] 이는 1302년 필리프 4세가 처음으로 소집한 후 의회로 발전했으나 귀족과 부르주아 간 이해관계가 달라 대립과 분쟁이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루이 13세 때 마지막으로 열리고 그 후 170년간 단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다. 비록 중앙의회가 유명무실화되었다고 해도, 일부 지방 삼부회는 건재했다. 그리고 지방은 지역주의가 강해서 왕권에 다소 반항적이었다. 물론 의회가 없는 지방도 있었다.
프랑스의 계급사회는 중세 후기 즈음 성직자에 의해 구상되었지만, 왕권신수설은 의외로 근대적인 발상이었다. 앙리 4세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왕은 제한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잉글랜드처럼 왕권을 직접적으로 제재하는 대헌장 같은 건 없었지만, 왕명 대부분이 귀족 가문과 삼부회, 그리고 제1,2계급이 중심인 의회를 거쳐야 했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대귀족과 성직자 계층의 노력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다. 왕권신수설은 제3계급과 소귀족층의 호응으로 구상되었다. 왕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귀족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고, 부르주아 입장에서도 국왕은 멀고 귀족은 가까우니 왕권을 명분으로 귀족을 억누르는 게 이득이었다. 16세기 후반, 왕권신수설 사상가 중 대표적인 샤를 루아조(Charles Loyseau)와 카르뎅 르 브레(Cardin Le Bret) 등 법학자에 의해 구상되었다. 이때부터 왕은 대귀족층을 멀리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큰 가문 출신이 아닌 법학자와 관료들을 곁에 두기 시작했다. 루이 13세는 본격적으로 콩시니 후작과 리슐리외 추기경 등 대귀족 출신이 아닌 인물을 등용해 중대한 권력을 맡기는 총신 정치를 시작한다. 이런 결정은 대귀족층의 심기를 건드리고, 이들은 영국식 의회군주제를 요구한다. 비록 왕권이 막강했지만, 이전 세대(앙리 4세 이전)에 비해서 강했다는 것이지 완전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라 전능한 왕은 아니었다.
3.3. 경제적 특징
18세기 초반 프랑스의 경제는 다른 전근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불안정으로의 회귀'가 이어졌다. 특히 국가 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절대적 비중과 전근대적 농업 기술로 인한 빈약한 생산물이 불안정한 사회를 구축했다. 풍년을 맞아 수확량이 무난하면 사회가 어찌어찌 유지되겠지만, 흉년과 전쟁이 일어나면 기반이 불안정한 경제가 심각하게 요동친다. 이 과정에서 사회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인구가 감소하면서 이전의 불안정한 상태로 회귀하게 된다.역설적이게도, 전체 사회가 풍요로워질 때 경제가 파탄났다. 18세기 프랑스는 인구가 2천만명에서 2600만명으로 증가함으로써 당대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다. 경제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하고, 사회 전체가 누리는 부의 총량 역시 증가했다. 하지만 대다수 민중이 누리는 삶의 질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제1, 2신분 수십만 명의 자산이 배로 증가할 때, 빈곤층은 수백만 명 늘어났다.
근세 프랑스에서 일반 농민이 자유롭게 소유한 토지는 아예 없었다. 소유권이 농민에게 있었지만, 귀족에게 지대를 납부해야 하는 전통적인 봉건적 관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타이유'(taille)라고 한다. 소유권이 농민에게 있는데 지대를 납부해야 되는 배경에 대해서는 한국사의 식읍 개념과 대비하면 이해가 빠르다. 그 탓에 라부뢰르(laboureur)같은 소수의 독립 부농을 제외하면 삼중고(교회의 십일조, 영주의 부과조, 왕에게 내는 세금)를 겪었다.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유한 대상인을 제외한 중소 상공업자는 농민과 같이 높은 세금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이들 중에는 세금을 못내어 재산을 압류당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인구증가도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원인이었다. 농부 1가구가 1000평짜리 농장을 경작한다고 하자. 그가 자식을 낳아 땅을 분할상속하면 2명이 500평씩 받는다. 250평, 125평... 내려가다 보면 그럭저럭 부농이었던 농부의 손자, 증손자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빈농이 되어버린다. 정복전쟁과 개간을 통해 농지를 늘리거나, 식민지로 이주해 인구를 줄이거나, 새로운 작물과 기술을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거나, 상공업으로 해외 식량을 수입하거나, 피임을 통해 인구증가를 정체시키는 방법이 있었으나, 이 당시에는 식민지로의 이주가 그리 활발하지도 않았고,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경제 규모가 확장되면서 농산물의 가격도 상승했지만 이러한 구조 때문에 농민이 직접 혜택을 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지주는 농산물 가격 상승을 빌미로 지대를 더 올렸다. 더구나 프랑스 농업은 가족 규모의 소농 경영 체제로서, 수확물 역시 삼중고로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가정에서 소비했다. 따라서 이들은 시장의 가격 변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계층이었음에도 지대 상승으로 인한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거기다 혁명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밀과 포도 가격이 침체되었는데, 귀족층은 이 때문에 일어난 손실을 농민에게 지워서 탕감했다. 흉작이라도 일어나면 꼼짝없이 굶어죽는 상황이었다. 이전까지 프랑스 농민은 국왕과 귀족층의 권력을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신분적 차이를 당연시했지만, 점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제3신분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농민을 적으로 돌린 귀족층은 결국 단두대로 손에 손 잡고 사이좋게 끌려갔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건 1786년 영국과 맺은 무역조약인 이른바 이든 조약(Eden Treaty)이었다. 이 조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의 수출품에 관세를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조약이 성사되자 영국에는 가격이 낮아진 프랑스 농산물(밀)의 수입이 늘어났고 프랑스에서는 가격이 낮아진 공산품(면직물 등)의 수입이 늘어났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밀 가격은 폭등하고 이로 인해 빵 값이 올라가 밥상물가가 오르고, 비단이나 면직물을 만들던 제조업자는 망하여 그 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9] 여담으로 영국으로의 수출이 기대되었던 포도주는 막상 별로 수출이 늘어나지 않았단다.
3.4. 제도적 특징
앙시앵 레짐의 행정은 혼란스러웠다는 말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혼란 그 자체였다.3.4.1. 중앙 행정
왕은 국가의 각 분야에 대해서 대신을 임명해서 통치를 했다. 그런데 영국과 달리 각 대신 간에 내각 같은 통일된 의사 합의 구조가 없었다. 대신들 간의 업무 분야가 명백하지 않았으며,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다투기 일쑤였다. 결국 통일된 행정이 어려웠다.교육과 호적 등의 일반 행정업무는 가톨릭교회가 담당하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조금 자라면 첫 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받고, 성인이 되어 결혼하면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하고, 죽으면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했다. 이 모든 것은 성당에 문서 기록으로 남았고, 교회의 행정 업무는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교회는 이 대가로 십일조를 징수했다.
3.4.2. 지방 행정
이론상으로는 지방행정은 왕이 파견한 행정관이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봉건귀족들의 저항으로 현실은 이론대로 되지 않았다. 왕의 말을 잘 듣는 지방도 있었지만, 봉건 특권의 저항이 극심하여 왕의 지배가 제대로 미치지 않는 지방도 많았다.역대 프랑스의 국왕들은 지방 통제권을 강화하려고 여러 차례 다른 형식으로 행정관을 파견했는데 이게 오히려 행정구역의 중복 현상만 극심해지게 만들었고 지방행정의 통일성은 약화되었다. 행정구역과 세금징수 구역, 군대의 관할구역, 고등법원의 관할구역이 일치하지가 않았다. 봉건적인 지방 구분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 지역끼리 피차 다른 나라로 취급했다. 각지에 관세가 있었으며, 도량형의 통일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10], 각지의 관습법이 달랐을 정도였다. 언어도 지방마다 차이가 컸다. 브르타뉴 지방에는 켈트어가 아직도 남아 있었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만 해도 남프랑스에서 온 사람의 연설을 파리 시민이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각 지방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관습에 의지하고 있었다. 지방의 경계가 상당히 불확실 했던 것인데, 이름까지도 불확실해서 지금의 '아키텐' 부근을 파리에서는 옛 발음 아키텐이 변형된 '귀엔'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라는 나라의 국경도 명확하지 않았다. 나바르 왕국이 잔존하고 있었고[11], 신성 로마 제국과의 국경 지대에 독일계 귀족층이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12]
3.4.3. 사법 제도
사법적으로는 왕국 전체에 하나의 법이 통용되지 않았다. 몇몇 도시는 세제 특권을 가졌고, 남부는 성문법화된 로마법을 따랐지만 북부는 관습법을 따랐다. 이 무렵 유럽의 왕국들은 흔히 로마법과 관습법을 지방에 따라 달리 적용했다.프랑스는 중세 초기부터 왕의 '칙령'이 법률과 동등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파리 고등법원에 의하여 '등기'가 이루어져야 정식으로 반포될 수 있었다[13]. 실제로 파리 고등법원은 이를 종종 왕권에 대항하는 무기로 삼았다.
매관매직[14]의 폐단이 가장 심한 곳이 법조계였다. 앙리 4세와 재무장관 쉴리는 국고를 든든히 하기 위해 관직 세습 세금을 추가로 부과한다. 프랑스 판사직위는 모두 매관매직되고 세습되었다. 단적으로 재판관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했는데, 이것은 재판 수요가 많아서가 아니라 더 많은 관직이 있어야 더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직 수의 증가는 기존 관료층의 반발로 결국 막히게 되었다. 자신들이 매입한 관직의 희소가치가 보장되어야 그 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법관직은 꾸준히 가격이 올랐다. 이 탓에 10대에 중앙재판관이 된 사람도 있었고, 재판은 부정부패를 피할 수가 없었다.
3.4.4. 조세 제도
이 복잡한 행정 체계 중에서도 가장 어지러웠던 것이 바로 세금이다.세금은 왕, 귀족, 성직자 계급이 각각 거뒀다. 왕은 임의로 백성에게 전체적으로 토지세, 20분의 1세, 소금세 등 각종 세금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귀족, 성직자는 이런저런 면세특권이 있었으므로 결국 평민이 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방의 농민에게는 각종 사업에 동원되는 부역까지 추가되었다.
문제는 루이 16세의 프랑스가 오랜 전쟁과 패전 및 심각한 기근으로 대대적인 적자를 낸 것이다. 특권층도 납세하던 오스트리아 제국과, 채권으로 자금을 조달한 영국에 반해[15], 평민층 혼자 세금을 내던 프랑스는 채권도 잘 팔리지 않았다. 왕실이 빚을 지고 먹튀한 역사가 유구한 탓이었다. 결국 프랑스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2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 번째가 법복귀족을 만들어 돈을 받는 것이고, 두 번째가 바로 징세권의 판매였다.
징세권을 넘겨주는 것은 행정기술의 미비와 일시적인 재정난 해결을 위해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용된 방법이었다. 내용은 단순한데, 일정 지역의 정해진 세율만큼 특정인이 국가에 먼저 바치고, 나중에 해당 지역에서 자기가 징세권을 위임받아 직접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방식이었다. 징세권을 구입한 이들이 자선사업을 하지 않는 한 국가에 납부한 돈보다 더 많이 뜯어가야 했다.[16] 성경에서 만인의 지탄을 받는 세리가 앙시앵 레짐에서 징세청부업자라는 이름으로 프랑수아 1세 시기부터 등장한다. 이것은 프랑스 국왕에게 일부결제금액이월약정(카드 리볼빙)과 같은 역할을 했다. 긁기 쉽고 지불을 유예할 수 있지만, 기존 수입이 빨려들어감에 따라 부담이 뻥튀기되었다. 결국 왕들은 전쟁과 사치에 들어가는 돈을 빌리면서 청부업자에게 징세권을 차곡차곡 넘겼으며, 청부업자들은 그렇게 넘겨받은 징세권을 바탕으로 세금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루이 16세가 즉위하기 전부터 프랑스 영토 절반 이상의 징세권이 수십년에 걸쳐 이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징세청부업자가 얼마나 프랑스 재정을 박살내고 돈을 긁어들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앙투안 라부아지에다. 당장 구명에 가담한 사람이 하나같이 강대국 출신의 외국인과 해외 거주 프랑스인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그를 비롯한 징세청부업에 대한 프랑스 백성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다. 징세청부업의 폐단을 함께 지켜본 내국인 과학자 자크 샤를과 몽골피에 형제는 라부아지에를 지탄했다. 심지어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코뱅당이 몰락하고 과도하게 내려진 처벌에 대한 복권이 이뤄질 때까지 라부아지에의 판결은 뒤집히지 않았다. 죄 없는 아내를 풀어주고 1796년 연구 자료를 돌려주는 선에서 그쳤다.
설상가상으로, 고위 경제관료가 대놓고 나서서 국가에 돈을 빌려주고 특권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국가를 대신해서 빌리고 자기가 빌려주다 보니 이자율이 가관이 되었다. 루이 14세는 정의법정을 열고 이런 무리들을 부정부패 혐의로 재판에 세웠는데, 대상을 고른 것은 루이 14세가 마음대로 고른 것이지만 혐의는 거짓이 아니었다. 루이 14세는 역사상 최대규모였던 이 정의법정 한 방으로 프랑스 1년 지출액에 필적하는 벌금을 걷었다. 그러나 그 돈은 전쟁과 상비군 유지비로 날려버렸고, 루이 14세가 마음에 드는 파벌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지 않은 탓에 징세청부업의 적폐는 청산되지 않았다.
3.5. 종교적 특징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의 세력이 매우 강한 국가여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프랑스의 개신교는 하급 귀족과 상인 계층의 지지를 받아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주요 근거지는 프랑스 남서부와 노르망디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도 가톨릭이 대다수였고, 개신교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칼뱅 신학의 영향을 받은 위그노는 국가의 통일을 해치는 요소로 여겨져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위그노 역시 불리한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적인 독일, 네덜란드 개신교도와 자주 동맹을 맺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과 위그노 전쟁이 그 예시였다.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종교 전쟁은 일단 끝났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개신교도들과 가톨릭 교도들간의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고, 소수인 개신교도들을 위해 8개의 무장 도시를 허가하는 등 군사적인 자유권도 보장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권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남용되었고 나중에는 프랑스 왕국에서 분리독립을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리슐리외 추기경은 1628년 위그노들이 분리독립 농성을 한 라 로셸을 포위공격하여 함락하고, 그 결과로 맺어진 조약에서 종교적 자유는 그대로 보장하는 대신, 군사적인 자유는 박탈하면서 개신교 세력은 위축되었다.
1610~1635년 프랑스 남부에서 일련의 내전이 계속 일어났다. 처음에는 라이벌 귀족 가문간의 싸움으로 보았으나, 프랑스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연구를 더 진행한 결과 종교분쟁으로 밝혀졌다. 위그노 전쟁이 종식되고 낭트 칙령이 발표된 뒤에도 그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개신교도들에게 더욱 강경한 대책으로 일관했다. 처음에는 선교사를 보내 개종하도록 했다. 이 때는 개종을 하는 자에게는 금전적인 보상을 주었다. 그 다음에는 형벌을 부과하고 개신교도들의 학교를 폐쇄하였으며, 직업에 종사치 못하게 했다. 나중에는 용기병 부대를 보내 위그노의 집을 약탈하도록 하여 강제 개종을 시도했고, 이는 낭트 칙령의 폐지 (1685년 10월 18일)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위그노 약 18만 명이 프랑스를 떠나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과 남아프리카 등지로 이주했고, 약 4천명은 미국으로 떠났다. 이렇게 떠난 위그노는 상인, 학자와 같이 사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이었기에 프랑스에 뼈아픈 손실이었다. 다만 나머지가 그대로 죽거나 한 건 아니고 무늬상 개종한 것으로 보이면 더 문제삼지 않았기에, 대부분 명목상 가톨릭이고 실제로는 개신교도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각종 차별이 철폐되자 이들 대부분은 다시 본래의 신앙인 개신교도가 된다.
3.6. 군사적 특징
프랑스는 카페 왕조 이후부터 점차 중앙집권화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중앙에서 시작해 지방에 이르기까지 국왕이 모든 군사권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상비군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그 유지비를 국왕이 지불하였고, 이는 국왕이 각종 조세를 거둘 명분으로 작용했다.그러나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잦은 전쟁으로 인해 군대의 규모 또한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루이 14세 때 군대의 규모는 약 40만에 육박했으나 루이 14세의 무모한 정복 야욕으로 끊임없는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군비의 지출이 증가하였고 군대의 규모 또한 40만에서 점차 증가시키면서 군비의 지출을 더욱 부추겨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국경을 따라 요새 역시 지나치게 축성해 그에 따른 유지비 또한 부담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한 장교의 계급 승진 또한 신분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 나중엔 일개 최하위 위관급인 소위마저 귀족자제들이 차지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귀족층이 군 지위를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돈으로 계급을 사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이마저도 귀족층이 돈을 주고 사는 폐단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점점 심화되어 혁명 전야의 군대에는 평민 출신의 장교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이 귀족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귀족 장교의 질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이 15세 때 창립된 왕립 사관학교의 경우 원래 가난한 귀족 자제를 훌륭한 귀족 장교로 키워내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주된 교육은 군사학보다는 수학, 문법, 역사, 지리 등이었고, 그나마 있는 군사학은 요새 구축법이 전부였으며, 군사 훈련도 현실과 동떨어진 승마, 펜싱 등이 대부분이었다. 이러니 군대의 질이 떨어짐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아이러니하게, 이거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귀족 출신 장교가 단두대에 목이 날아가거나 외국으로 도주하거나 강제전역당함에 따라 장교의 공백이 생긴다. 혁명정부는 이 자리에 민간인을 명망가라는 이유로 임명했다. 게다가 지휘권을 제대로 주지도 않았다. 이렇게 변호사 출신 장군, 의사 출신 참모가 넘쳐나는 데다, 이들이 실전 경험을 쌓은 뒤 뭔가를 하려고 하면 사병들이 난리치는 판이니, 열정만 가득한 프랑스 혁명군이 프랑스 혁명전쟁 초기에 처참하게 패한 것이다. 결국 국민 공회가 붕괴된 뒤 총재 정부 하에서 앙시앵 레짐의 핵심을 맡은 귀족과 죄가 가벼운 귀족을 구분하고 후자를 포용하기로 하면서, 일부 귀족 출신 장교들은 공화정에 충성을 맹세하고 봉건적 특권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복귀를 허락받았다. 전쟁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면서 많은 경험을 쌓은 장교가 나타난 뒤에야 이 상황은 겨우 해결되었다. 혁명전쟁 초기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이 유난히 포병 출신 장교들이 두각을 나타냈고 프랑스군의 질적 주력도 포병이 주류를 차지했는데 이 또한 이와 연관이 있다. 포병은 특성상 수학, 탄도학, 지리학 등의 기반 지식이 반드시 필요했고 이 때문에 유능하지만 뒷배경이 부족했던 인재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쉬운 분야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특성상 혁명 이전부터 포병은 하급 귀족이나 평민 출신 지휘관이 많았고, 이 때문에 혁명으로 인한 전력 공백도 상대적으로 덜 발생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나마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육군만의 이야기. 프랑스 해군은 이조차 불가능했다. 해군으로서 경험을 쌓으려면 우선 바다 위에서 범선을 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육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상당한 기간의 교육과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별 수 없이 스페인 해군에 의존했지만, 프랑스의 반 속국이 된 스페인 해군이 잘 싸울 리 없었다. 그러니 호레이쇼 넬슨에게 호되게 털릴 수밖에. 프랑스 해군이 위상을 회복하려면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도 오랜 세월이 지나야 했다.
4. 구체제의 타파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 혁명 문서 참고하십시오.프랑스는 1789년 혁명을 거치면서 앙시앵 레짐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근대 국가로 재편되었다. '왕정복고'조차도 혁명의 '제도 개선' 성과는 도저히 되돌리지 못했다.
[1] 앙시앵 레짐의 3신분제를 표현한 유명한 회화로, 농민이 성직자와 귀족을 업느라 새가 곡물을 쪼아먹고 토끼가 양배추를 먹는 것을 쫓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당시 귀족들은 토끼장과 비둘기장을 소유할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곡물을 쪼아먹는 비둘기와 양배추를 먹는 토끼는 농민에 대한 수탈을 상징한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혁명 이후 풍자 그림도 그렸는데 상황이 반대로 되어 있고 문구도 'Vive le roi, Vive la Nation(왕 만세, 국가 만세)'로 바뀌었다. 깨알같이 죽어있는 토끼와 새는 덤. 여성 버전도 있다.[2] 자코뱅이 몰락한 이유가 이것이다. 재미있는 건 로베스피에르 본인이 이런 숙청을 반기지 않았다는 것이다.[3] 예를 들면 20세기 프랑스 공화국의 과학자인 루이 드 브로이는 공작 작위를 갖고 있었는데, 특권만 없었지 재산은 많았고 칭호도 허가되었다.[4]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교무금'이라고 한다. 액수 또한 반드시 10분의 1을 낼 필요는 없고, 자율적으로 형편에 맞게 낸다.[5] 그래서 이들 중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시골 농민들한테 구걸을 하면서 겨우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6] 한동안 저 포지션의 주인은 스페인이었으나, 루이 14세의 집권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을 제치고 유럽 최강국이 되면서 스페인 국왕이 하던 역할을 프랑스 국왕이 대신하게 되었다. 심지어 18세기에 이르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끝에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들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중남부의 파르마 공국,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더더욱 부르봉 왕조의 수장인 프랑스 국왕을 멀리할 수 없었다. 이후 갈리아 교회주의는 종교에 관심 없던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무너졌다.[7] 지식과 능력에서 귀족을 능가하는 이들이 많았다. 절대왕정이 잘 유지되던 시대에는 자신의 능력과 재산을 바탕으로 귀족이 될 수 있었지만, 미리 진출한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귀족들이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면서 울분이 쌓이게 되었다.[8] 다만 '자문회의'라는 성격은 중세 유럽의 모든 의회가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다.[9] 물론 여기에는 관세가 낮아진 것 이외에도, 영국은 수력 방적기와 방직기로 면직물을 대량생산을 하고 있는데 프랑스는 여전히 수공업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도 한 몫 했다. 쉽게 말해 농산물을 팔고 공업제품을 구입하는 전형적인 식민지 무역이었고, 현대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지는 구도다.[10] 혁명 이후 의회가 헌법 제정과 함께 추진했던게 도량형 통일이었다. 이 유산이 오늘날의 미터법.[11] 나바르 왕위는 프랑스 왕이 겸했지만, 어느 정도 독자적인 행정 조직이 유지되었다.[12] 프랑스 혁명기에 이 지역의 영지를 몰수한 것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와 외교 마찰이 벌어지게 된다.[13] 군주의 칙령이 각료의 비준을 받아서 효력을 지니는 형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등 기원전의 고대국가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14] 한국사의 매관매직과 동일선상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동양권은 군주가 관직을 팔았다가 그 관직을 가진 자가 해임되면 관직이 다시 임금의 손으로 돌아오는 중앙집권화된 구도인데, 프랑스의 매관매직은 A가 관직을 산 다음 가격이 오르면 B에게 다시 팔 수도 있었다. B는 A에게 관직을 사고, 군주에게 일정액을 주는 것으로 관직과 그에 수반된 작위를 차지했다.[15] 물론 영국도 빚이 늘어나서 갚는데 고생했다. 7년 전쟁만 해도 영국이 승리했지만 전비조달한다고 국가 빚이 무려 1억 3천만 파운드나 되었다.[16] 봉건시대 때는 최소한의 불문율이 있었다. 추수가 끝난 후 떨어져 있는 이삭은 그냥 가져가도 눈감아주었다. 절대왕정이 되면 이런 것마저 모두 절도로 취급하여 악형을 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