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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5:45:29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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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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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Domus Iulio-Claudia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시기 기원전 27년~68년
성씨 율리우스(Iulius)
클라우디우스(Claudius)
창건자 아우구스투스
주요 직책
[1][2]
임페라토르
프린켑스 세나투스
폰티펙스 막시무스
파라오[3]
파테르 파트리아이[4]
주요 황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1세
네로

1. 개요
1.1. 상세 소개
2. 성립 배경3. 황실 가문과 동맹 귀족 가문들
3.1. 아우구스투스 가문(domus augusta)3.2. 옥타비우스 가3.3. 안토니우스 가3.4. 빕사니우스 가3.5. 도미티우스 가3.6. 리비우스 가3.7. 발레리우스3.8. 아이밀리우스 가3.9. 유니우스 가3.10. 코르넬리우스
4. 역대 황제5. 역사
5.1. 아우구스투스 시대5.2.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시대5.3.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
6. 주요 황족
6.1. 남성 황족6.2. 여성 황족
7. 네로 몰락 이후의 후손 이야기8. 여담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왕조로, 당대 로마인, 로마군, 원로원, 황제와 황실 모두 부른 이름은 공식적으로 아우구스투스 가문 또는 카이사르 가문이었다.[5] 서기 4세기 경의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는 이름은 후대에 학계 구분 명칭에 따라 편의상 지어진 것이다.

창건자부터 마지막 황제 모두 이름과 그 영향력 모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단해 이후의 로마 제국 황제들의 제호, 관습, 법제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장 해당 세습왕조의 당대 진짜 이름인 아우구스투스 가문, 카이사르 가문 자체가 왕조 멸문 이후에도 황실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중세 유럽에서도 그 영향력과 상징성이 대단했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콜론나 가문, 오르시니 가문은 각자 자신들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진짜 후손이라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율리우스 씨족과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하나의 가문으로 결합된, 일종의 연합 왕조로서,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씨족과 그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혈통상의 본가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카이사르(Caesar) 가문'으로 합쳐져 제위를 세습한 왕조이다.[6]

제1대 아우구스투스부터 제3대 가이우스(칼리굴라)까지는 혈연과 입양에 의해 율리우스 씨족의 이름이 전해졌지만, 칼리굴라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 뒤를 이은 제4대 클라우디우스 1세와 제5대 네로의 씨족명은 클라우디우스였다.[7]

1.1. 상세 소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시조는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그 의견이 분분하다.

고대 로마인들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존 공화정 체제를 뒤엎기 위해 내전을 벌여 승리한 것이 왕조의 사실상의 시작[8][9]이라고 봤다. 따라서 카이사르부터 시작된 세습 왕조라고 할 수 있고, 오늘날 일부 서적이나 논문에서도 카이사르를 실질적인 시조로 보고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제시되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는 문자 그대로 확정적인 결론은 아니며, 보통은 최초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를 시조로 보고 있다.

실질적으로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기 전 작성해놓은 유언장에 자신의 누나인 율리아의 외손자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해두어서[10] 세습의 포석을 깔아두고 있었기에 카이사르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11] 옥타비아누스는 유언장을 통해 외종조부[12]의 양자로 입적된 이래[13], 정식으로 카이사르의 가문을 이어받아 두 차례의 내전을 벌여 승리하고, 제정의 기초를 닦게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세 번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결혼으로 맞이했던 스크리보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대 율리아 외엔 자녀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및 그녀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아 데리고 온 두 양자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누나 소 옥타비아의 아들로 조카이자 사위인 마르켈루스의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본인의 가문에 완전히 결합시켰다. 그들이 바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인데, 이들은 연합왕조 같아도 하나의 가문, 가족으로 완성되어, 당대부터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지파성씨를 따서 카이사르 가문으로 불렸다.

율리우스 씨족과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결합된 카이사르(Caesar) 가문과, 아우구스투스의 카이사르 가문을 중심으로 이어진 로마의 전통 명문 귀족(파트리키) 가문 사이의 입양과 혼맥을 통해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이었다. 즉, 로마 공화정 시대의 주요 파트리키 및 노빌레스들의 결합으로 완성된 왕조가 이 황가였다. 따라서 존속 내내 로마 공화정 후기의 족벌주의적인 모습, 로마 공화정 시기 귀족들 특유의 지위 승계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공화정 시대의 노빌레스 가문들이 방계 황족 또는 황실과의 인척 관계를 맺고 있고, 귀에 익숙한 가문들이 많이 등장한다. 네로 황제의 출신 가문인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도미티우스 씨족을 비롯해, 제2차 삼두정치의 한 축이었던 레피두스의 후손과 친족들인 아이밀리우스 씨족,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 본가이자 상징이었던 풀케르 가문 출신의 남성들을 입양해 후계를 이은 리비우스 씨족발레리우스 씨족은 물론, 네로 황제의 사촌 형으로 독재관 술라의 직계 후손이었던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가 속한 코르넬리우스 씨족, 유니우스 씨족 등 이름만 들어보면 그 가계를 알 수 있는 수많은 왕정~공화정 시대의 노빌레스 가문들이 왕조 가계도에 방계 황족을 구성하고 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 이래, 종신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적, 법적, 정치적, 사회적 후계자를 자처했고, 두 사람을 통해 인기와 정통성 모두를 획득했다. 따라서 로마의 역대 세습왕조 중 평민, 군인, 지식인 심지어 속주민과 옛 정적들인 원로원에게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후 황제들과 달리 개인 이름(프라이노멘)을 임페라토르라는 것에 끼워 맞춰 강조하지 않고 사용했으며,[14] 플라비우스 왕조의 역대 황제와 그 이후 황가들과 달리 자신들의 가문명인 카이사르를 황제, 황족, 부제 등의 칭호로 이름을 짓거나 강조해 활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태생적 혹은 입양을 통해 얻은 합법적인 권위가 있어 본인 이름 뒤에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손자)'과 같은 것만 붙여도 로마인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다섯 명의 황제 모두 원로원 안팎에 끼친 영향은 후대 세습왕조 중 강력했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왕조보다 대단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부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네로까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속했으나, 단 한 번도 직계 혈통으로 제위가 세습되지 못했다. 이중 티베리우스를 제외하면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었지만, 네로는 카이사르 가문으로 불린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따라서 제위는 보통 입양을 통해 이어졌고, 이는 로마 제국의 최초 세습 황가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왕조가 황제 사후 교체기때마다 숙청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황제들이 암살 음모에 시달린 원인이 되었다.

왕조의 등장 직후부터 황실의 정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두 씨족 사람들의 상호 입양과 근친혼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율리우스 성씨를 쓴 카이사르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성씨를 쓴 네로 가문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가문이 되었다. 더욱이 같은 집안 사람들끼리 형제이면서 동서 지간이 되거나, 삼촌/고모부이면서 사돈이 되고, 사촌 형이 사촌 동생을 입양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제4대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조카인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했고, 클라우디우스의 형인 게르마니쿠스는 6촌 누이인 대 아그리피나와 결혼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는 근친혼이 전혀 없지 않고, 친척끼리 상호 입양을 해온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자손이 많지 않았던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결정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피를 이은 후계자' 양성을 위해 테오도시우스 왕조 등장 이전까지 어떤 왕조보다 복잡한 혼인, 입양 등을 통해 왕조의 뼈대를 구축했다.

이 왕조를 비롯해 이후의 세습왕조들인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세베루스 왕조는 입양과 모계 중심으로 황제의 혈통이 계승되었기 때문에, 직계 여성 황족들의 발언권이 대단히 강력했다. 특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경우에는 복잡한 가계도처럼 이런 경향이 강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가 외동딸 대 율리아와 그녀의 차녀인 대 아그리피나 및 이들의 자녀들, 누나 소 옥타비아와 그녀의 막내딸인 소 안토니아 및 그녀의 자녀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후손인 이유가 컸다. 여기에 더해 아우구스투스가 아내, 누나, 딸, 조카딸, 손녀 등을 통해 거미줄처럼 복잡한 친인척 관계를 맺어 놓았고, 리비아 드루실라로 대표되는 황실 여성들에게 권한을 부여해준 까닭에 이 왕조 여인들의 위엄, 권위, 명예는 어떤 로마 귀부인들보다 강력했다. 따라서 왕조 존속 기간 내내 힘있는 황실 여성들이 꾸준히 등장했다. 리비아 드루실라, 대(大) 아그리피나, 리빌라, 소(小) 아그리피나 등이 그녀들인데, 이들은 당대 로마인들의 평가처럼 "영악하다"는 표현 그대로 정치 활동, 사회 활동에 적극적인 황실 여인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현직 황제가 건재한 상황에서도 정국을 쥐고 흔들거나 음모에 개입해 황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결과, 권력 싸움에 끼여든 여성들을 중심으로 대개 암투와 모략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최악의 간신 세야누스 같은 이들까지 음모에 깊숙히 가세하면서,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꾸려 놓은 제위 계승 서열과 여러 권력 보호장치가 흔들렸다. 당연한 말인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남녀 황족들이 비명횡사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 대 드루수스의 미망인인 소 안토니아의 딸이자 소 드루수스의 아내이기도 한 라빌라는 세야누스와 결탁해 자신의 남편이자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드루수스를 살해했고, 황제의 친아들을 살해하는 것도 모자라 소 드루수스의 아들 게멜루스와 게르마니쿠스의 막내 아들 가이우스 마저 살해하려 들었다. 이를 막은 것은 다름 아닌 대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자 리빌라의 어머니인 소 안토니아였다.[15] 이 비극은 클라우디우스대에 와서 다시 재현되는데 클라우디우스를 자신의 아들인 네로를 황제로 만들려던 아내인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암살당했고[16] 소 아그리피나는 폭주하는 자신의 아들 네로를 통제하려 하다가 자신의 친아들의 손에 살해 당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그토록 집착한 혈통은 그의 사후 그가 황권의 안녕을 위해 창설한 근위대와 친 혈육들의 손에 55년만에 박살나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다섯 명의 황제는 이런 궁중 음모속에서 원로원 내 반대파와 야심가, 여성 황족들을 견제하고자 다양한 무기를 만들었다. 그 도구가 간통죄반역죄인데, 이는 창건자인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이 두 법에 따라 황실 반대파들이 꾸준히 제거되는 황제의 무기가 되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을 황족 여성과 묶어 한꺼번에 처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티베리우스가 생전에 말한 것처럼 황제를 노린 암살 음모들이 원로원 내에서 시작되어 실제 유죄 판결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다섯 명의 황제들은 지속적으로 이를 견제하는 모양새를 취했는데[17],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걱정대로 이들의 혈육인 제3대 황제 칼리굴라는 측근과 황궁 관료, 해방노예의 손에 암살되었다.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우구스투스 사후 그 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중 장남인 티베리우스가 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40년 넘게 만든 원수정을 항구적인 체제로 만들어 반석에 올렸다. 그러나 그는 지나칠 정도로 냉혹했고, 아우구스투스의 생전에 제위를 보장받은 양자이자 조카인 게르마니쿠스와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요절한 뒤 카프리 섬으로 스스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은둔 정치를 펼쳤다. 그리고 이런 상황속에서 리빌라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근위대장 세야누스가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며, 대대적인 피바람을 일으키고 공안통치를 펼쳤다. 다행히 세야누스는 제거되었지만,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 일당의 색출을 위해 공포정치를 펼쳤다.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 즉 가이우스는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황족이었다. 그는 황실 가족 중 노예를 비롯한 모든 로마 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이었다. 티베리우스가 붕어하기 이전까지 세야누스 일당에게 복수를 펼치며 로마 전체를 공포로 몰아 넣은 까닭에, 그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였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즉위 후 몇 개월만에 중병으로 쓰러졌고, 그가 몸을 회복한 뒤 취한 각종 권력 강화 조치는 냉혹한 티베리우스 시대와 비슷해 로마 정국이 시끄러워진 이유가 되었다. 칼리굴라는 수에토니우스, 세네카,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과 달리 섹스와 폭력, 광기에 사로잡힌 암군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공화정의 전통이 당연한 것으로 평가받던 로마 제국에서, 노골적으로 '프린켑스'의 권한 강화를 시작했다. 이는 칼리굴라가 암살된 뒤, 길거리에서 돌던 변태스럽고 판타지 가득한 비방성 소문과 엮여 그가 로마의 미치광이로 알려진 원인이 되었다. 칼리굴라의 시대는 4년에 불과했지만, 애매모호한 로마 황제의 자리는 그의 급진적인, 변덕적인 통치술과 냉혹한 개인적인 성향과 엮이어 확고해졌다. 허나 이 과정에서 칼리굴라는 재위 1년도 되지 않아 암살 미수 음모를 계속 맞이했다. 그러다가 서기 41년 1월, 그는 일부 근위대와 원로원, 관료들의 배신으로 4년 만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후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으로, 칼리굴라의 친삼촌이었던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임신했다가 아우구스투스와 결혼 후 얻은 대 드루수스(티베리우스 황제의 동생)의 막내아들이기도 했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했고, 어릴 적부터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어머니 소 안토니아, 누나인 리빌라에게 냉대받고 또래 귀족들에게 무시받거나 왕따를 당해 내성적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예측과, 살아 생전 아우구스투스의 철저한 교육 덕분에 가문 멸문의 위기를 극복했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칼리굴라의 암살 직후, 하루도 안 되어 황제 암살을 주도한 이들을 제거하고, 일부 반란, 원로원의 공화정 복귀 시도 등 난잡한 혼란상을 정리했다. 이후 그는 원수정 체제 강화를 시작하면서 관료제 확립, 원로원 개편 등을 단행했고, 국고의 재정 확충과 안정에도 힘을 쏟았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조카 칼리굴라가 추진 중이었던 제국 인프라 건설과 사법 재판 개편, 황제의 조폐권 확보 등을 이어나가, 로마에 원수정 체제를 항구적인 체제로 확립시켰다. 이후 브리타니아를 침공하여 오늘날의 영국 땅 중 잉글랜드 남부와 중부 일부를 로마 속주로 편입시켰다. 이 외에도 그는 로마의 외항으로 곡물 수송 등의 역할을 한 오스티아 인공 항구를 건설하고, 시민권 특별법을 만들어 고급 교육을 받은 지중해 동부 출신의 교육자, 학자, 거상들에게 성씨를 주고 로마 제국의 다양성을 확대시켰다.

클라우디우스 1세의 뒤를 이은 것이 그 악명 높은 네로였다. 네로는 본래 칼리굴라의 여동생이었던 소 아그리피나의 아들로,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의 외증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외삼촌인 칼리굴라가 제위 계승에 대한 교통정리를 하면서, 외삼촌과 사이가 나쁜 어머니와 함께 제위 계승 및 상속 보장을 받지 못한 처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네로는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 1세의 후비로 들어가면서, 황궁에 들어갔고 어머니와 손을 잡은 세네카와 부루스의 도움 아래 클라우디우스 1세의 둘째 사위가 된 뒤 입양 절차를 거쳐 차기 제위를 노릴 수 있게 되었다.

네로의 즉위는 클라우디우스 1세의 급사 이후, 어머니와 세네카, 부루스가 궁중쿠데타를 벌여 만든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소년 네로는 총명했고, 제왕 교육을 잘 받으며 주변 사람이 올바른 길로 이끌면 훌륭한 황제가 될 자질이 풍부했다. 허나 네로 즉위 직후부터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는 제 야심을 위해 아들을 꼭두각시로 여겼고, 세네카와 부루스 역시 부와 권력을 쥐기 위해 네로에게 취미 활동에 전념하고 황제로서의 의무에 소홀해도 된다고 조언했다. 그 결과, 네로는 통제 불가능한 황제가 되었다. 설상가상 그는 로마인들이 당시 삐딱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던 그리스 문화를 열렬히 사랑한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예술가로 자처해 황제 본연의 의무를 망각했다. 이런 개인적인 성향보다 더 큰 문제가 된 것은 그가 벌인 숙청과 존속살해였다. 그는 즉위 이후 자신의 어머니 및 아내들을 비롯해 직계 친인척들을 살해하고, 수많은 명사들을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죽였다. 그래서 네로는 로마 대화재 이후 모든 이들의 원한을 샀다. 따라서 서기 69년, 반란이 일어나 네로는 로마군, 원로원, 근위대 모두에게 버림받고 국가의 적이 된 뒤 자살했다. 이후 노년의 갈바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네로 황제를 끝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네로가 재위 기간 내내 본인 외의 모든 아우구스투스 혈육들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제거해,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멸족한 것이 컸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 외에도 로마 시민들, 특히 로마군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고귀한 혈통만으로는 이제 충분하지 않았다. 음모나 꾸미고 서로 싸워대기나 하며, 수도 로마에서 사교와 연회를 즐기고, 자기들 사이에서의 평판에만 신경쓰던 로마 출신의 명문 귀족들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적합한 경력과 인망을 갖고 있다고 간주되어 황제로 추대된 갈바조차 정작 즉위 후에는 이런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며 근위대에게 목숨을 잃었다. 더군다나 네로의 치세를 거치면서 귀족 중 아우구스투스의 남성, 여성 후손들이 전멸하고 공화정 시대 명문 귀족 가문들 역시 몰락 귀족이 되거나, 네로 손에 거진 살해 혹은 추방되어 제위를 차지할 이가 부족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네로 시대 동안 황제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제정이 확립되어 정착하면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현상과도 연관된 일이었다.

군권이 결합되면 제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었던 기존 귀족들을 경계했던 왕조의 황제들은, 황제 휘하에서 성장한 지방의 기사 계급(에퀴테스) 출신들에게 주로 군, 특히 근위대를 맡겼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존속 기간 동안, 이들은 로마 제국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자리잡아 신흥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 이래, 황제를 도우면서 신주류층이 되었고, 공화정 시대 귀족들이 몰락하는 틈을 타 신흥 귀족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오현제 시기 이전부터 세습귀족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기성 귀족들은 실권을 잃고 몰락해 평민보다 못한 처지가 되거나, 힘을 못 쓰는 처지가 되었다. 즉, 해당 왕조 아래에서 혈통주의는 빠르게 붕괴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발레리우스, 도미티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마르켈루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안토니우스 등 공화정 시기에 이름을 떨쳤던 온갖 세도가 및 명문대가들과 통혼하면서 황가의 정통성을 보강했던 것과는 무색하게, 제위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은 물론이고 로마의 세습 귀족들에게도 이어지지 않았다. 네로 사후의 제위는 명문대가 출신의 갈바에게 넘어갔으나, 그는 로마 최초의 왕조가 붕괴된 비상상황에서도 원로원과 명문대가들의 지지를 얻는 데만 골몰하다가 근위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명문 귀족들이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들에게는 황위를 장악할 배경과 역량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이후 제위는 명문대가가 아니었으나 황제의 측근 역할을 하며 성장했던 가문 출신의 오토비텔리우스에게 넘어갔으며, 결국에는 내전을 거쳐 지방 유지 출신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에 넘어갔다. 네로 사망 뒤 겨우 30년 후에는 첫 속주 출신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탄생했다. 심지어 오현제 시대가 끝나고 즉위한 페르티낙스는 해방 노예의 아들이었다. 이후 군인 황제 시대의 역대 황제들은 거의 모두가 속주의 별 볼 일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심지어는 반 게르만족인 막시미누스, 시리아 베두인족인 필리푸스 아라부스 같은 황제도 등장했다. 다만 이후 황제들도 모두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를 자칭했고, 혈통이 아닌 상징적인 정통성은 제국이 끝날 때까지, 아니 제국이 끝난 뒤에도 유지되었다. 그 예로 독일의 카이저, 러시아의 차르 같은 칭호들은 카이사르에서 유래했다.

2. 성립 배경

아우구스투스는 두 차례 내전을 벌여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올랐다. 첫 번째는 공화주의자들을 상대로 한 내전이었고, 다음은 동지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싸운 내전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반대파를 배려하지 않으면 또 다른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공화정 복귀 선언을 하는 등, 모양새만큼은 1인 지배 체제가 아닌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는 1인 지배 체제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그 자신이 쓰러지더라도, 그 다음 주자, 그 다음에는 다시 다음 주자가 안정적으로 제위를 이어가도록, 즉 항구적인 체제를 만들어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혈통을 중심으로 왕조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혈통 중심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즉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아닌 사람이 제위에 앉으면 내전이 일어날 것을 아우구스투스는 무척 우려했다. 개인사적으로 어렸을 적에 부유한 집안 출신이긴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입지 없이 (본인의 정치 욕심이 어쨌건 간에) 조용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종조부가 양자로 지명해서 순식간에 로마를 뒤흔들 정도의 권력을 얻었다는 점이 당시 시대의 혈통의 중요성을 본인에게 정확히 지각시켜 주었을 것이다.[18]

아우구스투스는 동시에 자신의 혈통으로는 왕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속했던 옥타비우스 가문은 평범한 지방 유지 정도에 불과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율리우스 씨족에 속하게 됐지만, 공화정 전체에서 놓고 봤을 때 당시 율리우스 씨족은 몰락한 귀족 가문 정도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유서 깊은 클라우디우스 씨족과의 연합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혈통을 보강하는 동시에, 유력 씨족과의 연합을 통해 정권을 안정화하려 했던 것 같다. 뒤에 쓰겠지만,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알바롱가 출신으로 로마시의 역사보다도 유서 깊다는 명문가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혈통상으로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출신이었고,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출신의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라는 두 아들을 데려왔다. 이 둘은 리비아의 전 남편인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에서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피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은 모두 리비아 드루실라와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후손들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 역시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에 시집가 마르켈루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에게 딸 대 율리아를 시집보내[19]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지만 마르켈루스는 요절했고, 애통해한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 극장을 지어 그를 기렸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중요한 패였지만 일찍 요절해 버렸기 때문에 그에게는 흑역사.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가 숙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들 역시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조카들이었으니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이는 안토니우스파와의 상징적인 화해의 제스처이기도 했다. 대(大) 안토니아는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집안에 시집가 네로의 할머니가 되었고, 소(小) 안토니아는 앞서 언급한 대 드루수스와 결혼해 클라우디우스 1세의 어머니이자, 칼리굴라와 소 아그리피나의 할머니가 되었다.

3. 황실 가문과 동맹 귀족 가문들

왕조의 명칭에서 드러나듯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리비아 드루실라의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을 중심으로 한 왕조이다. 그러나 이 문서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두 개의 가문이 오랜 입양, 혼인으로 하나의 가문인 탓에 제3대 황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에서는 로마 일대를 통제함과 동시에 공화정 복귀 논의를 하면서 “율리우스 가문, 특히 카이사르 가문 남성은 안 된다. 클라우디우스도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고 클라우디우스 가도 같은 카이사르 가 집안이지 않냐.”라고 목소리가 일관되게 나왔고, 원로원은 이후에도 두 가문을 카이사르 가라고 부르며 하나의 가문임을 분명히 짚었다.

이는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소 아그리피나와 재혼을 발표할 당시 벌어진 '근친혼' 논쟁에서도 찬반측 모두에게 사실로 지적되고 언급됐다. 이 당시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율리우스 가문이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며,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율리우스 가문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주장에 대해 황제와 클라우디우스의 재혼을 옹호하던 비텔리우스 등 원로원 재혼 찬성파들조차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두 가문은 하나의 가문이 맞다”고 인정함과 동시에 두 가문이 하나의 가문이며 굳이 나눌 필요가 없음을 인정했다. 따라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사실상 하나의 가문이며, 클라우디우스가 즉위 후 취한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전혀 다른 집안 사람이 어거지로 붙인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아들이자 로마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정통 직계[20]라고 말한 브리타니쿠스의 경우에는 제호와 관련없는 풀네임 자체가 아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는 생전 자신들의 가문을 중심으로 어떤 로마 상류층보다도 복잡한 인척 관계를 맺었고, 두 사람과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 외동딸 대 율리아와 그 자녀를 통해 직계혈통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두 가문 내 상호 입양뿐만 아니라 근친혼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친조카, 외손자가 요절하기 전부터 꾸준히 계속 이어졌다. 또 아우구스투스 부부는 이 과정에서 로마 귀족들의 전형적인 정략결혼을 활용했다. 그래서 카이사르 가문이라고 불린 두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된 명문 귀족 가문들도 상당히 많아서, 로마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사람들과 그 가문 및 후손들이 대거 등장한다.

위 문서에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중심으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본가뿐만 아니라 파트리키 명문가인 유니우스[21],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가(家) 외에도 공화정 시대 등장한 신흥귀족 가문들인 리비우스, 도미티우스 등도 이 왕조의 가계도에 대거 나온다. 그래서 이 문서에서는 카이사르 가문이라고 통칭해 불린 율리우스 가와 클라우디우스 가 외에도 여러 가문들을 서술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생전에 "로마를 슬프게 한, 부도덕한 귀천상혼"이라고 평가받아 철저히 외면받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루벨리우스 가문 등 방계 여자 황족들이 재혼으로 혼인 관계를 맺은 기사 계급 가문이나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가 처음 시집가 맺어진 폼페이우스 외증손 일가에서 피소 가문과 결합해 만든 가문인 폼페이우스 가(家)의 경우에는 왕조 존속 당시부터 비중이 크지 않아 제외했다. 반면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사위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자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의 가문이자 로마 최고의 명문가인 코르넬리우스 술라 가문은 클라우디우스 급사 전 이 사람이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로 낙점되던 상황이었던 점, 네로 집권 기간동안 벌어진 여러 사건과 연관되는 집안이기 때문에 간단히 서술하도록 하겠다.

3.1. 아우구스투스 가문(domus augusta)

왕조의 창건자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로마 원로원, 로마 시민,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는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와 그 혈연 남녀 황족을 아우구스투스 가문(도무스 아우구스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이름을 시작으로 파생되어 현대에 이르러 붙여진 로마 제국의 팔라티노 황궁을 부른 학계상 명칭이 도무스 아우구스타나(Domus Augustana)다.

얼핏 보면,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란 단어는 학계에서 임의상 만들어 부른 명칭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명칭은 학자들이 후대에 학술상 편의를 위해 붙인 이름이 아니다. 실제 원로원과 로마인 모두가 공식 문서상 부른 명칭이다. 심지어 이마저도 이 가문의 창건자 아우구스투스가 명확하게 본인 일가 중 몇 명을 콕 집어 넣고 상속자 자격을 부여해, 원로원에게 승인으로 받아낸 공식 명칭의 가문명이다. 따라서 오비디우스의 아우구스투스 일가 칭송 서사시와 호소문에도,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덕목과 성스러움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원로원이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한 뒤 벌어진 피소 총독 재판을 제국 전역에 포고하고 설치한 <피소 판결 동판>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됐듯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은 아우구스투스 사후에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상속권과 직결된 명칭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4년 티베리우스 정식 입양 이후, 이를 명확히 규정했고, 사후 유언장을 통해, 본인 비문에 이를 적어 상속 순위를 명확히 규정했다. 하지만 비문이 있던 아우구스투스 영묘는 많이 훼손됐고, 아우구스투스 비문은 유실돼, 그 명단은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록을 통해서만 유추가 가능하다. 다만, 21세기 이르러 <피소 판결 동판>을 통해,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 중 게르마니쿠스 요절 직후를 기준으로 볼 경우에는 그 순위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티베리우스 기준으로 보면, 원로원은 이때 생전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명확히 규정한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가 교묘히 본인의 친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해석시켜 언급함에도, 기본적으로 5명 혹은 6명이 반드시 포함됐다.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티베리우스, 대(大)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소(小) 드루수스가 그들이다.

고대 기록들을 보면,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아우구스투스가 언급해 상속자로 규정되고 아우구스투스 가문원으로 선정된 이들은 율리아 아우구스타로 이름을 바꾸게 될 리비아 드루실라를 포함해,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쿠스, 소 안토니아, 클라우디우스 1세, 소 드루수스 순으로 기재됐다고 한다.

따라서 여러 연구자들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후반부에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정식 친양자로 입양하고,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양자 대 드루수스를 언급해, 대 드루수스를 통해 클라우디우스, 소 드루수스의 정통성을 끌어올릴 목적 차원의 선전용 정치적 선포 이상의 가문 명칭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일 것이라고 평한다. 즉, 티베리우스를 입양하면서 정통성을 끌어올리려는 목적 이상의 아우구스투스 특유의 정치적 셈법 아래 철저히 만들어진 집안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당대 진짜 이름인 아우구스투스 가문 완성이었다는 말이다.

원로원과 오비디우스로 대표된 로마 지식인들은 이 정의에 대해 아우구스투스 일가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지위, 특권을 상속받는 의미로 선전해 사용했다. 이는 당사자인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역시 비슷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문"을 가족 패밀리 네임으로 카이사르 가문,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고 가족 고유 코그노멘으로 활용해 사용했다.

이런 배경 아래의 황실인 아우구스투스 가문은 대개의 후대 로마 황실처럼 직접적인 제위계승권을 가진 5인 외의 남녀 황족들 역시, 아우구스투스 생전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선포되면 여기에 포함됐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 유언장, 원로원의 공인 아래에서도 그 개념이 정립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특유의 정치적 행보 그대로, 한 가지 일을 하면서도 최악까지 고려해 만들어낸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평을 듣는다. 왜냐하면 그는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교묘하게 자신의 친혈육 중 직접 언급되지 못한 황족에게까지 본인의 피만 이으면 제위가 가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22] 이런 배경 때문에, 황실의 한 축이며 본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이 무너짐에도 다른 한축인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이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문이 되는 구조가 완성됐던 것이다.

이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즉위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이를 살펴보면 아우구스투스가 숙고 끝에 이런 것까지 만들어 본인과 그 일가의 제위계승권을 만들었음이 확인될 정도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조카 칼리굴라가 서기 41년 1월 암살된 뒤, 공화정 선포와 부활을 결의한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 가문 멸족을 언급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인 클라우디우스를 반드시 찾아 없애야 한다는 공통 의견 당시 숙청대상이 됐음에도, 이를 무사히 넘긴 뒤엔 아주 자연스럽게 황실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는 아우구스투스 가문에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간접적으로 포함되고, 유언장에서는 상속자로 직접 언급됐기에, 이를 기반으로 황제 위엄도 갖출 수 있게 됐다.[23]

아우구스투스 가문은, 공식 문서와 원로원 결의를 통해 정식으로 "도무스(가문)"으로 언급되어, 국가 차원에서 하나의 황실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다른 귀족들의 가문(도무스)과 달리, 황제를 최정점으로 하여 황후(아우구스타), 장남(프린켑스 유벤투티스, 공동황제), 장손 등의 체계를 5인 명단으로 묶어 이론화 하고, 가문의 클리엔테스는 이론상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 원로원 전원도 포함해, 가족법을 확장한 반역죄와 불경죄 명분이 자동으로 만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또 국가 직책과 별개로, 가문에서 생사결정권을 쥔 가부장과 집안 내 여성 최연장자는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타를 존칭 형태로 원로원에게 승인으로 받은 다음 이를 공식 석상에서 사용했다. 이런 관습은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가 최초였는데, 이런 선례는 황가가 네로를 끝으로 실각한 뒤 개인성씨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황제와 황족 등이 황제, 황가를 뜻하는 표현으로 굳어진 선례가 됐다.

이런 아우구스투스 가문은 로마인들에게 아우구스투스 ~ 네로 시대까지 "절제", "겸손", "성실", "인내", "관용", "경건", "시혜와 헌신" 등의 덕목을 가지고 있고, 그 미덕을 실천하는 수호자로 불렸다. 이중 아우구스투스가 선물로 받은 시민관은 로마시민의 대표임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사저 대문에 걸리면서 인정받았다. 그리고 또 다른 선물인 황금 방패에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이 가문이 이 덕목과 미덕을 수호하는 상징으로 새겨져, 가주(家主) 혹은 당주인 로마 황제(아우구스투스~네로)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한 하나가 됐다.

이러한 해당 황실은 율리우스 씨족에 속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씨족에 속한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중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小) 옥타비아의 자녀들(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 안토니우스 가문) 그리고 아그리파가 대 율리아와 결혼해 낳아 입양된 남녀 황족으로 완성됐다.

3.1.1. 율리우스 가(家)

율리우스 씨족은 왕정 시대부터 내려온 아주 오래된 귀족 가문이었다. 가문 내 전설에서는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베누스와 닿아 있었다고 하며, 때문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이 베누스 여신의 후손이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할 수 있었다. 잘 알려진 가문명인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씨족의 지파 이름으로, 종전에는 코끼리를 뜻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했던 율리우스 씨족의 선조가 전공의 대가로 이 칭호를 수여받았다고 했었다. 하지만 현대 연구가들은 '풍성한 머리를 가진'이라는 뜻인 '카이사리에스'의 변형으로 본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머머리지[24]

율리우스 씨족은 명문이었지만, 클라우디우스, 코르넬리우스, 아이밀리우스, 발레리우스 씨족처럼 거물 정치인들을 다수 배출해내지는 못했다.[25] 마리우스 이전, 공화정 중기의 유명한 카이사르 가문 출신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이처럼, 공화정 중기의 카이사르 가문은 전통만 있고 실질적인 영향력과 재산은 많이 떨어지는 가문이었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당시 귀족들이 모여 살았던 팔라티노 언덕에 살지 않았다. 그는 서민 주거지로 여겨지는 수부라에 거주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오래된 귀족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원로원 보수파에 속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워낙 잘 알려져 있듯이 민중파의 지지를 받으며 원로원파와 대척점에 선 정치인이었고, 친척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이 아닌 동맹시 시민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율리우스 법을 제안해 통과시켰다.

카이사르 가문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딸을 시집보냈다.[26] 마리우스가 다섯 번 연속 집정관에 연임되는 등 엄청나게 출세하고[27] 민중파의 거두로 부상하면서 카이사르 가문 역시 민중파의 색채를 강하게 갖게 된다. 카이사르 자신도 민중파의 또 다른 거두인 킨나의 딸과 결혼했다.[28]

이런 혈연 관계 때문에 카이사르는 출세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민중파의 대표격으로 인식되었고, 귀족 공화정에 반대하는 반체제 세력의 수장이 되었다. 또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공화정을 군사적으로 쳐부순, 즉 공화정에 대한 승리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때문에 표면적으로나마 공화정을 계승한다고 외친 아우구스투스는 미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카이사르의 칭호는 물려받았지만, 이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는 일부러 원로원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호를 바치게 해 이를 카이사르보다 먼저 내세웠다.[29]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들이 즉위할 때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의 통치를 본받겠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항상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앞에 놓였다.[30] 형식상으로나마 공화정이 지속되었던 원수정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대놓고 들먹이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황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가문이었지만, 카이사르의 정통성은 일부 부정되어야만 했다.

여담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할 때 갈리아 부족의 많은 유력자들에게 '율리우스'라는 씨족명을 하사했다. 갈리아인들과 자신의 유대를 강화하고, 동맹자들을 확보하려는 수단이었다. 그 덕분에, 많은 ‘율리우스’들이 제정 시대에 활약했지만, 이들은 카이사르와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없었다. 비록 그들 중 카이사르의 사생아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3.1.2. 클라우디우스 가(家)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로마 역사에서나, 영향력에서나 왕정과 공화정 이래로 로마 최고의 명문 중 하나였다. 사비니 출신 씨족으로 로마 건국 후 합류한 집단은 아니나, 공화정 초기부터 귀순하여 합류한 일족이다. 즉 이들의 역사는 로마시의 역사보다도 길었다. 로마의 시작부터 함께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귀화한 사비니족 출신의 대표격으로 사비니, 움브리아, 오스카 지역 색이 강했고, 이런 특징을 가진 거물 정치인들을 수두룩하게 배출했다. 로마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 인물만 열거해도 다음과 같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위에서 언급됐듯 입양과 복잡한 근친혼, 정략혼으로 율리우스 씨족을 계승했지만, 혈통적으로는 티베리우스 이후부터 사실상 클라우디우스 씨족이며, 가풍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 자체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내로 혈통상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인 리비아,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가 클라우디우스 가문 특유의 가풍을 유지한 까닭 때문이다. 그래서 율리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문과 완전히 한몸이 됨에도 루키우스 같은 이름을 아예 사용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성씨를 공유하는 등 독특한 특징을 내세웠다.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실체를 구성한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은,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에서 가장 명망 높던 유력 가문 네로, 풀케르, 마르켈루스 가문이었다. 이중 풀케르 가문은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누명을 쓰고 불명예 속에 몰락귀족이 되고, 그 자리는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티베리우스의 네로 가문이 차지하게 된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아우구스투스와 일찍부터 결혼을 통해 가족관계를 맺었고 이런 인연으로 이 가문의 유력한 세 분파 가문들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지지세력이 됐다. 그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인연은 꾸준히 계속되었는데,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측과 화해하는 과정에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의 딸과 약혼까지 해 대단한 풀케르 가와 인연을 잠시 맺었고, 스크리보니아와 이혼 후 혈통적으로는 풀케르 가 출신인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하면서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분파 가문들과 모두 친인척 관계를 맺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와 결혼하면서, 리비아가 전 남편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자식을 데리고 가지 않았지만 아내의 차남 대 드루수스가 자신의 사저에서 태어난 이후에도 한동안 키웠고 세간의 비난 탓에 다시 돌려보냈다. 그러다가 리비아의 전 남편이 죽자 “내전으로 이들 형제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내의 아들 두 명을 모두 자신의 집에 데려간 뒤 사실상 친아들로 키우고 정을 쏟았다. 이들의 이름은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로,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2대 황제가 되었고, 대 드루수스의 둘째 아들인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4대 황제, 손자인 칼리굴라는 로마의 3대 황제, (외)증손자이자 양손자인 네로는 5대 황제가 되었다. 리비아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출신이었으나, 리비아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는 리비우스 가문의 양자로서 원래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의 구성원이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를 통해 일찍이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과도 연결되었고 친조카 마르켈루스를 외동딸 대 율리아와 결혼시켜 후계자를 보려고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의 둘째 아들 대 드루수스를 누나 소 옥타비아의 딸 소 안토니아와 결혼시켜 자녀 3명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의 아들로 대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지명해 입적시켰고, 그의 막내 아들이 칼리굴라이다. 반면 유일하게 남아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이 된 대 드루수스의 차남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대 드루수스의 3남매 중 둘째인 클라우디아 리빌라를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시집보냈다가 다시 티베리우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양손자인 소 드루수스(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결혼시켰는데, 소 드루수스와 클라우디아 리빌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중 한명이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였다.

3.2. 옥타비우스 가

아우구스투스의 본가인 옥타비우스 가문은 위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씨족과 달리 로마 근교의 벨리트라이 출신으로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평민에 해당되는 기사 계급이었다. 옥타비우스 가문은 대대로 은행업과 행정에 종사한 가문으로 상당히 부유했고,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 이전에도 종가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일가는 일찍부터 원로원 의원을 배출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직계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쪽의 경우에는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원로원에 편입된 신참자 가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증조부는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군 대대장에 복무했고, 조부는 지방 행정 서기 등을 거쳤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39]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인 아티아와 결혼했는데, 때문에 카이사르는 소 옥타비아와 옥타비아누스의 종조부뻘이 된다.

옥타비우스 가 중 아우구스투스의 직계가 되는 쪽은 유일한 남자혈육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어 공식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불리게 되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출신 가문임에도 왕조의 이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3.3. 안토니우스 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숙적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모계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혈연이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외숙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통칭 카이사르)의 6촌 형, 어머니 율리아 안토니아는 카이사르의 6촌 누나였기에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는 혈연상 친척 범위 안에 들어가는 7촌 관계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동복 누나인 소 옥타비아와 BC 40년 결혼해 그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는데 바로 대(大) 안토니아와 소(小) 안토니아 자매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는 BC 32년 이혼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두 딸을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안토니우스 사후에도 황제 가문의 일원으로 대우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내전 승리 후, 안토니우스의 둘째 아들인 율루스 안토니우스 역시 누나 소 옥타비아의 의붓 아들이라 해서 용서하고 조카 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그는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두고 있었음에도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대 율리아와 불륜을 저질러 간통죄, 반역죄 혐의로 처형됐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외종손인 이들을 보호했고,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20대의 성년임에도 "나이가 어리고 배울 것이 많아 유학을 보내겠다"며 마르세유로 법학 공부를 이유로 유학가는 선에서 정치적 공격을 피했다.

안토니우스 가문은 율루스 안토니우스 숙청 후 위기가 있었으나, 티베리우스 황제때 아우구스투스의 본가 옥타비우스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명분 아래 키케로 아들때 내려진 개인 이름 마르쿠스 사용을 허락받고, 이탈리아 귀국을 허락받아 복귀했다. 따라서 이들의 손자(혹은 증손자)는 마르쿠스를 다시 사용했는데, 이중 한명이 네 황제의 해에서 플라비우스 왕조 창건에 기여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라는 설이 있다.

3.4. 빕사니우스 가

빕사니우스 가문은 로마사 전체에서, 에트루리아와 북이탈리아 일대 농촌에서 농부가 대부분인 에트루리아계 로마 평민 씨족이며, 동맹시 전쟁 이후 등장한 무명 중 무명 집안이다. 그러나 이 가문 중 전형적인 이탈리아 시골의 소작농 루키우스 아그리파의 막내아들은 가문 역사상 그 이름을 날렸고, 그의 활약 아래에서 기사계급이 되고 일가의 피를 이은 제정 시대 원로원 신흥귀족들은 그 이름을 물려받아 사용했다. 그가 바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다.

아그리파는 평범한 평민 가문 출신이었지만, 노부스 호모 중 공화정 이래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로서 그의 군대를 지휘하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아우구스투스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제국 체제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아우구스투스와의 개인적인 유대관계도 깊었다. 그에 대한 아우구스투스의 사랑, 존경은 유례가 없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로 불린 10대때부터 아그리파를 자신의 친구 이상의 분신으로 여겼다. 이런 배경으로,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평민귀족들의 전유물인 호민관에 입후보시켜 당선시켰고, 그의 누나 빕사니아 폴라 일가를 후원해 그 일가 전체를 기사계급으로 위상을 끌어올렸다. 자신에게 칼을 겨눈 친구의 형 루키우스 아그리파에게도 사면을 내리고 그 후손들이 지역유지로 사는데 도움을 줬다.

그렇지만 이보다 중요한 점은,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였던 조카 마르켈루스 생전부터 아그리파를 가문의 인척으로 맞아 그를 품었던 결정이었다. 그는 누나 소 옥타비아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마르켈루스의 누나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를 아내로 맞았다. 이후 마르켈루스가 요절한 뒤, 그는 사별하게 된 딸 율리아를 아그리파와 재혼시켰다. 이를 통해 노부스 호모 중 소작농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아그리파는 최고 권력자의 가족이 되고, 사위까지 됐고, 율리우스 가의 일원이 되었다.

비록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보다 먼저 사망했지만, 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후일 아우구스투스 가문, 카이사르 가문으로 불린 율리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와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네로 가의 완전한 결합의 접착제이자 가교 역할을 맡았다. 그는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의 스승 역할도 수행했고,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게르마니아 정복 계획과 동방 속주 관리 계획 역시 직접 그 초석을 닦았다. 그러면서 그는 세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라는 많은 자식을 보았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 후대로 이어지고, 아우구스투스가 아내 리비아의 두 아들 중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했고 선정한 대 드루수스와 그의 세 자녀들이 아그리파의 후손들과 겹사돈 형태로 결합체가 될 정략혼을 펼치는데 큰 힘이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장남과 차남인 가이우스 카이사르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입양시켜 후계자로 삼았지만 두 명 모두 아우구스투스보다 일찍 사망해 황제가 되지 못했다. 율리아와의 둘째딸 대 아그리피나게르마니쿠스와 결혼하여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의 어머니이자 네로 황제의 외할머니가 되었다. 막내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원래 아그리파 가문을 이을 예정이었으나 두 형의 죽음 이후 아우구스투스에게 입양되었다. 하지만 포스투무스는 과대망상, 정신분열과 폭력적인 성격으로 인해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계부이자 법적형제인 티베리우스의 보호에도,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숙청됐다. 그는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원로원 호소와 직접 탄핵을 받아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죽음 직후 아우구스투스가 서거 전 내린 조치인 티베리우스의 원활한 계승을 위해, 아우구스투스 휘하 경호 담당 백인대장 손에 살해당했다. 포스투무스의 입양 및 사망으로 아그리파 가문 직계는 단절되었다.

하지만 아그리파 가문은 아그리파의 두 딸 빕사니아 아그리파 자매의 아들들이 물려받았고, 이들의 이름은 제정 중기까지 남았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와 그 아들인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가 그들이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는 아그리파가 첫 아내 아티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빕사니아 아들인데, 외조부 가문을 함께 이어받았다. 그런데 그는 명연설가 아버지 퀸투스 하테리우스를 뒀음에도 말솜씨가 좋지 않고, 기사계급임에도 매우 귀족적이고 거만했다. 더군다나 그는 "졸린 인간", "졸고 있는 생물체"라고 멸시받을 만큼 능력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각 가문 출신 사람의 인원수를 제한해야 한다."고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건의해, 이 부분에서 고민거리가 많은 황제를 진노케 했다. 그래서 서기 32년 세야누스 일당 처벌 당시, 티베리우스 황제의 공포정치 속에서 숙청됐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는 외할아버지가 아그리파였기 때문에, "외할아버지 이름 덕에 능력보다 아주 높은 지위를 얻은 얼간이" 소리를 들었음에도, 네로 황제의 고모 대 도미티아 레피다와 결혼했다. 그래서 황실 인척이 됐는데, 이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이다. 그는 아그리파의 누나 빕사니아 폴라의 후손과 결혼해, 이중으로 빕사니우스 가문에 속했다. 그렇지만 그 인간성과 소비 습관은 아그리파, 빕사니아 폴라 남매가 존경받은 덕목인, 매우 검소하고 절제적인 성향과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그는 고종 사촌동생 네로처럼 사치가 심해, 황족들이 받는 연금 5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펑펑 쓰면서 부모가 남겨준 재산까지 줄 위협에 처했다. 이에 그는 사촌동생 네로에게 습관처럼 돈이 모자르다고 불평을 쏟았다. 따라서 고종사촌형을 존중하고 사랑한 5대 황제 네로는 그에게 연금을 필요 이상으로 퍼줬다가, 꼼수로 그의 이름을 부자들 유언장에 넣게 했고, 그는 이를 이유로 일부 부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넣으라고 강요한 추태를 보였다. 따라서 아버지처럼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방계황족임에도 본인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아그리파 가문을 이어 세간에게 "유산 사냥꾼"으로 불렸다.

한편 아그리파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의 아내가 되었고, 티베리우스의 유일한 친아들 소 드루수스의 어머니였다. 아그리파 사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티베리우스는 율리아와의 재혼을 위해 빕사니아와 이혼을 강요당했다. 빕사니아는 이후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와 재혼하여 5남 1녀 이상의 많은 자식들을 보았고 아들들 대부분이 집정관까지 올랐다. 갈루스는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된 뒤 그에 의해 처형되었다.

3.5. 도미티우스 가

네로의 본가는 도미티우스 씨족 중 한 갈래인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이었다. 아헤노바르부스 가는 도미티우스 씨족 분파 내에서도 유력 정치인을 여럿 배출한 유서 깊은 로마 귀족 가문이었고,[41] 독특한 이름 물려주기 전통을 지닌 도미티우스 씨족 내 분파 중에서도 다른 귀족 가문들과 차별되는 독특한 이름 대물림으로도 유명했다.[42][43]

네로의 본가인 아헤노바르부스 가는 술라의 내전 당시 마리우스파였기 때문에 골수 옵티마테스파는 아니었으나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에는 대부분의 파트리키 가문들처럼 카이사르와 그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를 맹렬하게 반대하는 가문이었다. 그래서 가문의 수장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필리피 전투 당시 카시우스-브루투스 연합군의 해군 제독으로서 삼두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고, 이후에는 옥타비아누스 대신 안토니우스에게 가담했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소 옥타비아의 딸인 대 안토니아가 그나이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을 하면서 가문의 역사가 이어진다.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할아버지와 이름이 똑같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였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동복친형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일찍 요절한 탓에 사실상 외아들과 다름없었다. 그는 이모 소 안토니아의 아들인 이종 사촌 형 게르마니쿠스의 딸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오늘날 네로로 잘 알려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다. 또한 대 안토니아의 세 딸 중 소 도미티아가 발레리우스 가문으로 시집가 낳은 딸이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의 황후 발레리아 메살라였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여타 노빌레스 가문 사이에서도 대대로 잔인하고 거만하며 성질이 급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집안노예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십자가형에 처하는 등 악행도 많이 저질렀다. 이런 이유로 마리우스와 술라 사이의 내전 직전부터 가문의 평판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특히, 네로의 친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이 가문 남성 중 가장 난폭하고, 함량미달의 포악한 성품과 각종 불법행위로 최악으로 불렸다. 따라서 폭군 네로 또한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영향이 있다는 말도 있다.

3.6. 리비우스 가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정인, 리비우스 씨족은 공화정 시대부터 수많은 집정관, 법무관, 원로원 의원을 배출한, 로마의 노빌레스이다. 이들은 공화정 초기부터 파트리키와 어깨를 나란히 한 명문가이다. 로마 공화정을 기준으로 공화정 초기부터 8명의 집정관, 2명의 감찰관, 1명의 독재관, 3번의 개선식, 1명의 치안판사를 배출한 가문이다.

씨족 성씨 리비우스의 뜻은 청회색 혹은 푸른 납을 뜻한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다만, 에트루리아어에서 유래한 라틴어 중 하나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따라서 건국 초부터 유명한 평민귀족임에도 라틴계, 에트루리아계 중 어느 혈통인지는 주장이 갈린다.

리비우스 일족 가문 중 가장 위세를 떨친 지파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이다. 이 가문은 리비우스 일족의 여러 지파 중 덴토르 가문에서 다시 갈라진 집안이다. 기원전 390년 집정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덴토르의 아들인 마르쿠스 리비우스는 적들을 쫓아 빼앗긴 재물을 되찾았다. 이때 그는 갈리아족의 용감한 족장 드라우수스에게 정당한 룰 아래 공평하게 칼과 방패만 가지고 일기토를 벌여, 그에게 항복을 받고 죽였다. 그러면서 드라우수스에게 약속한 그대로 상대인 그의 용맹함을 기린 뜻에서 변형한 드루수스를 가문의 성씨로 취했다. 이 가문은 일찍이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에게 여러 남성을 입양으로 보냈고, 이런 배경 때문에 스크리보니우스 일족 중 '리보(Libo)'를 지파 성씨로 취한 리보 가문이 탄생했다. 이와 함께 이 가문은 플레브스들이 집정관에 오를 때부터 이름을 떨치면서, 일찍이 아이밀리우스 가문과 통혼한 역사가 깊었다.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은 한니발 바르카와 벌인 2차 포에니 전쟁 아래 가문 남성들 중 대를 이을 사람이 거의 없게 될 정도가 됐다. 따라서 일찍부터 통혼을 통해 서로 친인척이었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 남자 아이를 입양했다. 그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인데, 그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형제였다. 그는 형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만큼 유명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혈연상 사촌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임페리움 문제 등으로 관계가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은 수 대에 걸쳐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과 사실상 한 몸이었고, 일찍부터 그라쿠스 형제의 정책에 반대의사가 명확한 노빌레스였다. 그 이유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이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레피두스 두 가문과 서로 아들을 입양보내거나, 딸을 시집보내면서, 사실상 한 가문으로 관계가 매우 돈독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이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차남이 BC 112년에 집정관을 지낸 대(大)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이다.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혈통적으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 사람으로 어머니는 코르넬리우스 가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혈통상 사실상 파트리키였고, 실제 성향도 파트리키 중 완고하기로 유명했다. 젊을 적부터 그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 기본적으로 완고하고, 비판적이었다. 특히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는 정적이었고,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대립해 호민관 재임 당시 그를 제거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 반대했지만, 정작 그 아들 중 차남으로 가문을 이은 후계자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동맹시 전쟁 직전 이탈리아 주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보수파에게 암살되었다.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아들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조부 이래 전통처럼 혈통적 본가인 아이밀리우스 가에서 양자를 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친형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의 아들들 대신, 일찍이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에 시집간 누나의 어린 아들인 외조카를 양자로 들여 손수 키웠다. 그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였다. 그는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였는데, 법적 양아버지이자 혈연상 외삼촌인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달리 보수적인 원로원파 멤버였다. 그는 또 다른 외삼촌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와 달리 온건한 면이 적고 고지식했다. 그래서 그는 카이사르와 2차 삼두정 모두를 격렬하게 반대했고,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진군 직후 그리스로 피신한 뒤, 필리피 전투에 직접 참전해 싸웠다, 하지만 2차전에서 패배한 이후 동료 의원들과는 달리 항복을 거부하고 자결했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에게는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오빠로 아버지보다는 온건한 옵티마테스였다. 그는 내전 기간에 죽었는데, 일찍 결혼해 리비아 풀크라, 리비아 리빌라라는 두 딸 외엔 가문을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아누스는 아주 일찍이 본래 혈연적으로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사람인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문[44]에서 자신과 혈연상 친척인 소년을 양자를 구해, 본인의 상속자이자 죽은 아들의 동생이며 양자로 입적시켜 키웠다. 그가 바로 리비아 드루실라의 남동생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였다. 드루수스 리보의 친고모는 아우구스투스의 두 번째 부인인 스크리보니아(대 율리아의 친모)였고, 친부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장인이었던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소년 시절부터 누나 리비아 드루실라와 매형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했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 아래에서 황제를 보좌한 사제단 등이 되는 등 외척으로 명망을 쌓았다. 그는 조카 티베리우스와도 관계가 돈독했고, 티베리우스의 지지자이자 보호자였다. 따라서 티베리우스 시대에 모함을 받았는데, 티베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외삼촌을 모함한 죽마고우 친구 등 리보를 곤경에 빠뜨린 인사들을 모조리 반역죄로 기소해 처형했다. 드루수스 리보 역시 아들이 없어 일찍이 형제의 아들을 입양했다. 하지만 혈연상 조카인 일명 뚱보 리보는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리보 모두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 들통났다는 혐의로 자살 강요 형태로 쌍둥이 형제와 함께 처형되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그는 양자 리보 외에도 여러 자녀를 뒀는데, 훗날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의 첫 번째 결혼 상대자였지만, 결혼식 당일 갑자기 사망한 리비아 메둘리나 카밀라의 아버지로도 추정되고 있다.

한편, 리비우스 가문 중 대(大)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딸(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여동생) 리비아 드루사는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처음 결혼해 세르빌리아(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카이사르의 정부)를 낳았고, 카토와 재혼하여 소(小) 카토를 낳았다. 세르빌리아는 브루투스(카이사르의 암살자)와 유니아 세쿤다(카이사르의 암살자인 카시우스와 결혼), 유니아 프리마(제 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레피두스와 결혼)를 낳았다.

3.7. 발레리우스

발레리우스 씨족은 로마가 건설될 무렵부터 함께한 아주 오래된 로마 파트리키 명문가 중 명문가다[45]. 그들은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과 마찬가지로 사비니족이었고, 가문의 어원 역시 사비니어를 로마식으로 번안해 사용했다. 발레리우스 가는 코르넬리우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이밀리우스, 유니우스, 칼푸르니우스 씨족 등과 함께 로마의 오래된 명문가였는데, 공화정 초기부터 활약해온 귀족 중 그 명성과 인기는 가장 많은 수의 집정관을 배출한 코르넬리우스 씨족보다 훨씬 높았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로 대표된 이 가문 태생의 여러 유력 정치인들은 공화정 초창기부터 파트리키임에도 평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민중들의 인기를 받았다. 이때 푸블리콜라 등 발레리우스 가 사람들은 인기가 아닌 공익을 위해 평민들을 자발적으로 후원했다. 따라서 ​발레리우스 가문은 평민들의 자발적인 지지 아래 매년 선출직 관직에 최소 1명 이상의 남성이 이름을 올리게 됐고, 선출직 경력자 수는 코르넬리우스 가문보다 훨씬 많았다. 또 귀화한 외국인이나 자유민들이 자발적으로 발레리우스를 성씨로 사용할 정도로 명성과 지지를 모두 얻었던 명문가였다. 이런 연유로 초기 공화정 시대 전부터 발레리우스 가는 "가장 고귀하고 공익을 위해 사적 야심을 버릴 줄 아는 명문가"로 찬사를 받았다.

발레리우스 가는 그 성씨가 자유민들의 성씨로 자발적으로 이용될 정도로 명망 높았기에, 가문의 클리엔테스로 성을 하사하면서 그 세를 불린 여타 다른 원로원 귀족 가문들과 비교해 그 가세가 대단했다. 더욱이 오래된 집안답게 시조 이래로 일찍이 그 지파들이 귀족과 평민으로 나눴는데, 공화정 시대 아래에서 두 신분의 지파 모두 명문가가 됐다. 그 지파 중 일부는 '위대한 자'를 뜻한 막시무스와 같은 최고의 찬사를 일찍부터 지파의 코그노멘으로 사용했다. 즉, 발레리우스 가는 많은 최고위 공직자를 배출한 공화정 시대 최고의 명문이면서도 사회적으로도 그 위상이 대단한 명문 중 명문이었다[46]. 그런데 이 대단한 가문 역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과 여러 번의 결혼을 통해 인척 관계를 맺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결혼해 아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를 낳았다. 이 세 남매 중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47]는 15세가 가까울 무렵, 자신보다 5살 즈음 많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아피아누스와 결혼했다. 아피아누스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출신 양자로 추정되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씨족 우대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결혼에서 딸 클라우디아 풀크라와 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가 태어났다. 하지만 이 결혼은 아피아누스가 BC 12년 사망하면서 끝이 났다.[48]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딸인 클라우디아 풀크라는 대 아그리피나의 오랜 친구였고, 그녀가 장남 네로 카이사르와 함께 반역죄로 고발될 때 함께 엮여 망명 중 사망했다. 반면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는 성년이 된 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대 안토니아의 딸 소 도미티아 레피다와 결혼해 딸 발레리아 메살라(메살리나)를 얻었다. 메살리나는 16세의 나이에 할아버지뻘 나이였던 먼 친척 클라우디우스 1세와 결혼했다. 이후 칼리굴라가 암살되고 갑작스레 남편이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됐다.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 1세와의 사이에서 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아들 브리타니쿠스(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를 낳았지만, 일찍부터 지나친 사치와 불륜, 음모를 통해 사람들을 고발하고 사형에 처하게 하는 등 심각한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후 그녀는 원로원 의원이자 콘술이었던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간통했고, 공개적인 결혼식까지 올렸다. 실리우스와 메살리나가 일으킨 이 엄청난 사건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다. 따라서 이 사건 후 그녀와 불륜을 저지른 실리우스는 간통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1세는 아내의 처벌을 자꾸 뜸들이며 미뤘다. 이런 까닭에 황제의 측근인 나르키소스가 루쿨루스 별장에 머물던 그녀를 살해했다.

3.8. 아이밀리우스 가

제2차 삼두정치의 한 축이었던 레피두스가 속해 있었던 씨족으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본가로도 잘 알려진 전통 세습 귀족 가문이다. 가문의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2대 왕 누마에서 시작된 가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공화정 시대 내내 수많은 정치인, 장군 등을 배출했다[49].

아이밀리우스 가문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레피두스 가문은 본래 혈연상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 남성인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를 입양해 대를 이어진 특징이 있었다. 따라서 공화정 말기~제정 초기의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은 네로의 본가였던 아헤노바르부스 가문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이름의 대물림과 괴상한 이름 짓기 방법으로 당대부터 상당히 유명한 명문 귀족으로 알려져 있었다.[50]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은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생전부터, 그가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와 친분 있고, 그가 술라에게 카이사르를 살려달라고 부탁한 전례 등 때문에 카이사르 일가와 인연이 깊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 등장 이후에도 일찍부터 그 관계가 복잡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후일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받고, 기원전 29년부터 로마를 제국으로 바꾼 뒤, 이 가문과 해묵은 관계를 정리했다. 그러면서 결혼을 통해 인척 관계를 맺었다. ‘삼두’ 마르쿠스 레피두스의 조카인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소 율리아(빕사니아 율리아)와 결혼했지만 소 율리아는 간통죄로 섬으로 추방당하고, 본인은 반역죄로 사형당했다.

티베리우스 시대에는 이 가문 출신의 아이밀리아 레피다게르마니쿠스대 아그리피나의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결혼했다. 하지만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세야누스의 음모에 가담해 남편을 배신했고, 그 결과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황궁 지하실에 유폐돼 굶어죽었으며, 그녀 역시 노예와 간통한 혐의로 고발된 뒤 자살했다. 또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형제로 추측되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역시 친척 관계인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딸 율리아 드루실라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율리아 드루실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며, 마르쿠스는 전 부인의 오빠인 칼리굴라를 암살하려고 한 혐의로 체포돼 유배 후 처형됐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가문의 여러 사람들이 집정관을 역임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으며, 타키투스에 의하면 티베리우스 황제의 잠재적 경쟁 상대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특히 유력한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 역임자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위의 소 율리아의 남편 루키우스의 형제)의 경우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레피두스는 제국을 다스릴 능력이 있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는 말까지 있다. 이 레피두스는 권력에 대한 열망을 보이지 않고 처세술을 발휘했기에 티베리우스 시대의 대숙청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3.9. 유니우스 가

유니우스 씨족은 코르넬리우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씨족과 함께 로마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 귀족 가문이었으며, 역사의 유구함과 명성 면에서 율리우스 가문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명 정치인들을 여럿 배출했다. 로마 왕정 시절부터 시작된 유니우스 씨족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 시대를 연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으며, 카이사르의 암살자들 중 가장 유명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이 가문 출신이었다. 브루투스 가문 외의 유니우스 씨족 내 분파 가문들 역시 로마 건국부터 제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명 정치인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배출했는데, 그 중 공화정 중기 이후로 브루투스 가문과 나란히 두드러진 것이 실라누스 가문이었다.

실라누스 가문의 조상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히스파니아에서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휘하의 사령관이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였으며, 이후 명문 파트리키 귀족인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가문의 사람을 입양하여 지속되기도 했다.

공화정 말기, 실라누스 가문은 카이사르의 정부이자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어머니로 유명한 세르빌리아를 아내로 맞이했고, 갈리아 전쟁에서 군단장을 맡는 등 카이사르파에 가까운 입장을 보였다. 제2차 삼두정치가 끝난 후 실라누스 가문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협력 귀족 가문이 되었고, BC 25년 옥타비아누스과 함께 하는 동료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배출했다. BC 25년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손자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녀[51]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다. 그는 아이밀리아 레피다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의 세 아들과 두 딸은 모두 폭군 네로의 손에 살해당하거나 누명을 쓴 뒤 유배되었다.

장남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52]는 클라우디우스 1세가 급사하고 네로가 궁정쿠데타를 통해 즉위한 직후 억울하게 반역죄로 고발된 뒤 죽임을 당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동생이자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차남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아그리파와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레피두스 동생의 후손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 네로 즉위 직후 형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뒤에도 꽤 오래 살아남았는데, 결국 네로에게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임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기소된 뒤 죽임을 당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죽임을 당하기 전, 마르쿠스와 데키무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역시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는 일찍이 클라우디우스 1세의 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자신의 아들을 옥타비아와 결혼시킬려고 한 소 아그리피나의 음모로 인해 명성이 크게 손상되었다. 이때 그는 조작된 소문인 누이동생과의 근친상간 의혹만으로 소 아그리피나에게 고발당한 뒤 원로원 의석이 박탈되었고, 소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 1세와 결혼한 당일, 자살을 강요당해 사망했다.

마르쿠스의 아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마르쿠스가 죽을 당시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고모인 유니아 레피다와 고모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 의해 양육되었다. 하지만 루키우스가 성인에 가까워지자 위협을 느낀 네로는 유니아 레피다와 조카 루키우스 사이의 근친상간 혐의를 씌워 카시우스를 사르데냐로 추방하고, 루키우스를 바리로 유폐시켰다. 네로는 결국 루키우스를 죽이기 위해 백인대장을 보냈고 루키우스는 맨손으로 저항하다가 장렬히 사망했다. 그가 죽은 2년 뒤 네로는 자살했는데, 만약 루키우스가 살아 있었다면 황제 후보 중 하나였을 것이다.

실라누스 가문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마지막 남자 후손들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따라서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으며, 네로 사후 혈통에 의한 황제 후보는 전멸하고, 각지의 속주 총독들이 황제를 자칭하는 데 걸림돌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딸 유니아 레피다는 후손을 남겼으며, 유니아의 딸 카시아 롱기나는 장군 코르불로와 결혼하여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황후가 돠는 도미티아 롱기나를 낳았다.

3.10. 코르넬리우스

로마 역사상 클라우디우스, 파비우스 씨족과 함께 오래된 최고의 명문 파트리키 가문이 있다면 바로 코르넬리우스 씨족이었다. 이 파트리키 가문은 공화정 시대동안 가장 유력한 집안답게 독재관, 개선장군, 감찰관, 법무관 등 주요 관직 경력자를 수없이 배출했다. 특히 분파 가문 중 스키피오 가문은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전까지 그 누구도 건들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 영향력과 명성이 대단했던 공화정 명문가의 상징이었고, 종신독재관 술라의 등장 이전까지 다른 분파와 달리 영향력이 떨어졌던 술라 가문 역시 독재관 술라 이래 이름을 날렸다.

이중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즉 카이사르 가문이 결혼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은 코르넬리우스계 가문은 그 유명한 술라 펠렉스의 직계인 술라 가문이었다.

종신독재관 술라의 차남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는 내전 당시 원로원파로 참전해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찍이 섹티아와 결혼해 두 아들을 뒀다. 장남은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 차남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인데 형제는 모두 아우구스투스 일가와 그 방계 친인척과 결혼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인척이 됐다.

술라의 손자 파우스투스 술라 루쿨루스는 서기 31년 집정관을 지냈고 40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누이 소 옥타비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대 안토니아의 딸 소(小) 도미티아 레피다와 결혼해 사이에서 아들을 뒀는데 그 아이가 후일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맏사위이자 브리타니쿠스의 외삼촌이 되는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다.

술라의 또 다른 손자로 술라 루쿨루스의 아우가 되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역시 최근 발굴돼 해석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비문에 따르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결혼을 통해 인척관계가 됐음이 확인된다. 그는 서기 33년 집정관을 지낸 원로원 의원으로, 티베리우스 시대 당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중재로 같은 소장파에 속한 코르불로와 언쟁이 붙었다가 화해한 이력이 있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비문에 따르면,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처남"이라고 적혀 있데,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 삼남 칼리굴라 모두 코그노멘이 게르마니쿠스였고,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종종 드루수스 율리우스 게르마니쿠스로 공적 이름도 병행 사용했기에 로버트 사임을 비롯한 학자들은,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의 숙부인 그가 소 아그리피나의 두번째 남편이었던 이름 미상의 귀족이라고 추정한다. 만약 이 주장이 맞다면, 네로의 어머니로 외숙모였던 소 아그리피나와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잠시나마 숙모와 조카 사이가 되게 된다.

메살리나의 이부동생이 되는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는 모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를 이었고, 술라 가문 남성 중 황족 특권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장인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작성한 유언장이 그대로 집행됐다면, 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본인 계산대로 1~3년만 더 살았다면 나이 어린 브리타니쿠스를 보호하면서 잠시 황제에 올라 이를 물려줄 징검다리 황제가 될 뻔 했다. 그는 어머니 소 도미티아 레피다가 네로의 고모였으므로 네로의 고종사촌형이었고, 네로가 입양 후에도 본명 아헤노바르부스로 불린 것과 달리 황제와 황실, 원로원 모두에서 성실함, 정직함, 온화함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는 자신의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가 첫남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요절로 일찍이 홀로 되자 아내 메살리나의 추천과 주변의 추천에 따라 딸을 대 안토니아와 도미티아 레피다,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파우스투스와 결혼시켰다. 이 결혼을 통해 아우구스투스 일가는 술라 가문과 손을 잡고, 손이 귀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적통 후계자 브리타니쿠스를 보호하려고 했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어린 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제왕 교육을 시작할 시기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아들의 조력자 내지 징검다리로 술라를 염두에 뒀다고 하는데,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고 소 아그리피나, 세네카, 부루스 주도의 궁정쿠데타로 또 다른 사위이자 양자 네로가 황제로 옹립되면서 무산되었다.

네로는 동서 사이이며, 고모 소 도미티아 레피다의 아들이기도 한 사촌형 파우스투스 술라를 끊임없이 견제했고 어린 시절부터 아주 미워했다. 따라서 즉위 직후인 서기 55년부터 사촌형 파우스투스를 제거하려고 안달이 났는데, 이는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의 간접적인 반대로 어려워져 이런 관계는 네로 모자가 1년도 안 되어 정적 관계가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네로는 처남이자 법적 형제지간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고,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살해하고, 정실 부인이자 황후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에게 누명을 씌워 처형하면서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를 완전히 멸문시킨 뒤 사촌형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제거하려고 움직였다. 이런 까닭에 파우스투스 술라는 네로와 티겔리누스가 공동모의해 조작한 다음 터트린 팔라스, 부루스 주도의 반란음모사건이 처음 언급될 당시 기소된 이후 지속적으로 네로에게 공격을 받았다. 따라서 네로는 그를 처음 기소한 이후 3년 뒤인 서기 58년 어거지로 유죄를 만들어 기어이 갈리아의 마살리아(오늘날의 프랑스 마르세유)로 추방시킨 이후 서기 62년 비열한 방법으로 몰래 죽였다. 이후에도 네로는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까지 피소음모 사건을 터뜨릴 때 제거했다[53]

4. 역대 황제

대수 이름 재위 기간
1대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7년 1월 16일~기원후 14년 8월 19일
2대 티베리우스 14년 9월 19일~37년 3월 16일
3대 가이우스(칼리굴라) 37년 3월 18일~41년 1월 24일
4대 클라우디우스 41년 1월 24일~54년 10월 13일
5대 네로 클라우디우스 54년 10월 13일~68년 6월 9일

5. 역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카이사르를 포함할 경우 6대, 카이사르를 제외할 경우 5대간 존속했다. 하지만 보통 일반적인 로마 제정 세습왕조사 관점에서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로마사 학자들은 카이사르를 제외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존칭된 시대부터를 이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따라서 해당 세습왕조의 시대는 보통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27년 /기원전 29년 ~ 기원후 14년)/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시대(서기 14년 ~ 41년)/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서기 41년 ~ 68년)로 구분해 설명 중이다.

5.1. 아우구스투스 시대

5.2.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시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자 티베리우스의 종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로 널리 알려진)가 집권한 시대다. 선대 아우구스투스와 묶여 간혹 '율리우스 가의 시대'로 불리거나, 후대의 클라우디우스까지를 묶여 네로 시대와 구분해 설명되는 경우도 있다.

초기 프린키파투스가 로마 내 정착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각종 황제 암살 음모와 원로원의 도전,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후계자 계승 문제로 인한 복잡한 가정사 문제 등으로, 후대의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원로원 중심 입장에서 "냉혹하고 변덕스러운 통치"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시대는 각종 음모 속에서 벌어진 황제들의 권한 강화와 애매모호한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밖으로 꺼내는 과정 속에서 벌어진 시대로 재평가 중이다. 이런 까닭에 서기 41년 가이우스의 암살 이후에도 원로원의 공화정 복구 시도가 내부적 논쟁 속에서도 실패해, 로마 정체가 프린키파투스를 이어나가게 됐다고 평가받는다.

오늘날에는 프린키파투스가 공화정체에 확고히 자리잡는 과정에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설명되며, 두 황제 치하에서 취해진 각종 행정, 사법 명령들, 경제적 취약성 문제 극복시도, 속주체계 정비 등이 높게 재평가 중이다. 따라서 과거와 달리 마냥 암울한 시대로 불리지 않고 있다.

5.3.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

서기 41년 가이우스 암살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이 멸문한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남자혈육 클라우디우스의 집권(서기 41년)부터 그의 사위, 외종손, 양자 네로의 몰락(서기 68년)까지를 묶어 언급하는 시대다. 클라우디우스의 법적 성씨가 율리우스가 아닌 클라우디우스인 까닭에 같은 집안임에도 앞의 세 황제와 달리 이 시대 황제들의 성씨는 클라우디우스이다.

클라우디우스 시대부터 네로 시대까지의 기간은 율리우스 가의 시대와 비교해, 그리스 문화 등이 네로 대에 로마 사회와 문학 분야에 크게 유행해 종종 은(Sliver) 시대로 언급되기도 한다.

클라우디우스 네로(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문이 황실을 계승했고, CAESAR가 개인 성씨가 아닌 황제를 뜻하는 또 다른 제호 개념으로 확립된 시대이기도 하다. 물론 두 황제는 태생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 방계혈육이고 가문의 코그노멘이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카이사르이기도 해서, 플라비우스 가의 세 황제와 달리 이 명사를 황제를 뜻하는 제호라고 한 적이 없다.

클라우디우스 치하에서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확고히 안착했으며, 가이우스 시대부터 진행된 내각 구성 및 관료제 강화 조치, 이탈리아와 로마 내 인프라 구축 등이 이때 거의 완성된다. 또 가이우스 시대 중반부터 드루이드 문제 등으로 공론화된 브리타니아 전쟁과 정복도 바로 이때 벌어졌다.

네로 시대는 이전 세 황제 시대와 다를 것이라는 즉위 첫 원로원 연설로 엄창난 기대 속에 시작한다. 그러나 어린 네로는 모후 소 아그리피나, 스승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의 꼭두각시였고, 이들의 야심과 권력 투쟁 속에 밀실정치로 진행됐다.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 측의 대립 속에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육들이 거진 네로 손에 살해된다. 이런 가운데 부루스 사후 근위대장으로 티겔리누스가 임명되고, 네로가 친정을 벌이면서 이전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시대에 벌어지지 않은 황제의 불법 행동을 비롯해,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고문, 납치, 협박, 증거조작, 위증 등이 매일같이 계속된다. 그러다가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네로가 기독교도들에게 죄를 덮어 씌우고 잇딴 망언을 벌이며 네로의 인기는 전 계층 사이에서 빠르게 식는다. 이후 피소 음모사건, 베네벤툼의 음모, 코르불로 숙청 등이 터지고, 유대전쟁까지 벌어지는데, 친정 직전부터 흥청망청 돈을 써대며 국고를 고갈낸 네로 정부는 병사들의 임금까지 체불한다. 그러다가 갈리아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의 반란을 시작으로 네로는 각 속주 총독들, 군대, 프라이토리아니, 원로원 모두에게 불신임을 받고 몰락한다.

네로의 몰락은 로마 제정 사상 첫 황제 탄핵이었고, 원로원의 형식적 권위와 권한까지 침범한 일로 터진 사건이었다. 따라서 네로의 실패는 플라비우스 왕조 창건 후 사태를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 아래에서 프린키파투스가 법제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6. 주요 황족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계획 아래 상호입양, 근친혼으로 맺어진 만큼, 상당히 가계 자체가 복잡하다. 여기에서 언급한 황족들은 다섯 황제를 제외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내 아우구스투스 직계[54] 황족이므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와 같은 타 가문 방계황족들에 대해서는 따로 서술하지 않겠다.

6.1. 남성 황족

6.2. 여성 황족

7. 네로 몰락 이후의 후손 이야기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그리고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복잡하게 만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혈통은 네로의 손에 방계황족들까지 거의 몰살됐음에도 극소수나마 살아 남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물려받았을지언정, 모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물려받지 못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피를 이은 로마 귀족들은 최종적으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까지 이어졌다.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를 이은 후손 중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공교롭게도 아우구스투스 손에 숙청된 소 율리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부부의 후손들이었다. 이 부부의 딸로 과거 클라우디우스와 약혼했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불경죄의 진노를 사서 파혼된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후손들이 그들이다.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와 결혼해 많은 자녀를 뒀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네로 손에 살해됐다. 하지만 유니아 칼비나, 유니아 레피다 자매는 숙청을 면했다. 이중 유니아 칼비나는 자녀를 낳지 못했고, 입양도 하지 않아 그 대가 완전히 끊겼다. 그렇지만 유니아 레피다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결혼해, 딸 카시아 롱기나를 낳았다. 그리고 그 딸인 카시아 롱기나는 칼리굴라의 처남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다. 이중 한명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아내인 도미티아 롱기나, 다른 한 명이 유니아 레피다이다.

이중 가장 유명한 도미티아 롱기나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결혼으로 맞이했던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푼다니우스를 얻었다. 푼다니우스는 이후 비텔리우스의 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해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라미아 실바누스를 얻었고, 딸 푼다니아를 이어 얻었다. 이중 푼다니아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방계 황족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의 아내가 됐다. 안니우스 리보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사촌동생인데, 푼다니아는 리보와의 사이에서 비트라시아 파우스티나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러나 그녀의 자녀들과 외손주들은 모두 루킬라가 벌인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에 개입했다가, 콤모두스 황제 암살 미수 사건으로 기소돼 모두 처형됐다.

도미티아 롱기나의 여자형제 유니아 레피다는 카시우스 레피두스로 알려진 아들을 낳았는데, 카시우스 레피두스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외조부로 유명하다. 따라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아주 멀게나마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후손이었는데,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었다는 거짓보고를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장남과 함께 살해됐다. 이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남은 아들, 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더 이상 기록이 없다. 다만, 서기 204년경까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딸 아비디아와 그녀의 4자녀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볼 때, 혈통적 후손은 숙청을 면한 아비디아의 자녀 중 한명인 딸까지 귀족 신분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아비디아는 그리스 혈통의 로마귀족 티티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리안티아누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얻었다. 첫째는 아들인데, 그 이름은 클라우디우스 카시우스 아그리피누스이며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리고 세 딸의 이름은 클라우디아 마이키아나 알렉산드라, 클라우디아 베티아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아 드리안티아 플라토니스인데, 이들의 마지막 공식 행사 참가는 서기 204년 이후 아예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아비디아의 자녀들은 세베루스 왕조 초기까지는 이어졌을 것으로 셀라 제임슨 등 현대학자들은 평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은 최종적으로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그 명맥이 완전히 끊겼다고 분석된다.

한편 티베리우스의 손녀로 할아버지 생전에 완전히 찍힌 율리아 리비아의 자녀들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일가의 숙청 당시, 네로의 명령으로 모조리 몰살되어 단절되었다. 다만, 율리아 리비아의 수양딸 루벨리아 바사는 숙청을 면했는데, 루벨리아 바사는 네르바 황제의 외삼촌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에나스와 결혼했고, 이들의 후손이 서기 131년 집정관을 지낸 세르기우스 옥타비우스 라에나스 폰티아누스라고 한다. 그렇지만 루벨리아 바사의 후손들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혈연적 후손이 아니고, 법적 후손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 후손들로 평가받지 못한다.

8. 여담



[1]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엄연히 로마 제국은 법적으로 공화국이었다. 더해 우리가 아는 로마 황제란, 디오 카시우스를 시작으로 현대 학자까지 평하듯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40년, 티베리우스가 23년, 칼리굴라로 많이 불린 가이우스가 4년에 걸쳐 만들어 낸 산물로 이 직책과 여러 권한을 합쳐 만들어 낸 것이었다.[2]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초기 프린키파투스 특성상 후일 로마 황제가 가진 직책을 하나씩 차지하고 이를 승인해 쓴 결과이다.[3] 2010년 이집트에서 발굴된, 기원전 29년 이시스 신전에 설치된 일명 "승리의 비문"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아이깁투스의 파라오라고 표기되어 있음이 공식 확인되었다. 해당 비문은 아우구스투스의 휘하 군인으로, 시인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명을 내려 설치했다고 한다. 여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카이사르로 적혀 있는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 파라오로 공식 즉위하지 않음에도 통치자로서 이집트 주민에게 파라오로 인식돼, 파라오 직책을 확보했고, 후일 파견될 대리인(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이 있을 것 등이 확인되고 있다.[4] Pater Patriae(국가의 아버지).[5] 황실 구성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란 황실의 성씨 중 가문 성씨인 카이사르 가문 안에서도,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황제와 그가 지명한 제위계승자들을 뜻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가문은 카이사르 가문 안에서도 제위 계승권과 연관된 직접적인 황실 자체를 뜻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혼자 주장한 것이 아니라서 당대부터 원로원에게 공인받은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불경은 곧 반역죄가 되었음이 피소 판결 동판 등을 통해 확인된다. 참고로 해당 명칭은 아우구스투스의 두 외손자이자 양자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생전이 아닌, 이들이 모두 요절하고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정식으로 입양하면서, 게르마니쿠스소 드루수스를 넣고, 두 차차기 황제의 정통성을 위해 대 드루수스와 그 일가를 포함해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가문에 속한 대 드루수스를 통해, 그의 차남이었던 클라우디우스는 자연스레 혹시 모를 사태가 터지더라도 이를 토대로 제위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6]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서방의 왕조는 조선 왕조 같은 동방의 왕조와는 그 개념이 많이 다르다. 동양의 왕조는 직계 자손 위주로 계승되지만, 서방의 왕조는 꼭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으므로 이해함에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그 차이와 더불어 로마 귀족 특유의 족벌주의, 6촌 이내 친인척 간의 복잡한 혈연과 입양으로 맺어져 있다.[7] 실제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입양한 때부터 이미 태어난 아우구스투스 가문 상속자들은 율리우스 씨족 내 카이사르 가문이 건재한 상황에서부터 카이사르를 우선시하면서 이를 물려 쓰고 있었다. 그래서 코그노멘으로 카이사르, 네로를 병행하면서 쓰고, 노멘 역시 율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를 결합해 함께 같이 쓰고 있었다. 가령 티베리우스의 둘째 아들로 아우구스투스의 딸 대 율리아가 낳은 티베릴루스의 경우, 흔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로 알려져 있으나 진짜 전체 이름에는 이 부분이 포함되었다. 이는 티베릴루스의 이복 형이자, 티베리우스의 장남으로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아우구스투스 가문 남성으로 공인된 소 드루수스 일가 역시 비슷했다. 소 드루수스가 리빌라와 결혼해 낳은 일란성 쌍둥이 이름도 비슷했다. 이들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중 티베리우스 유언장을 통해 공동 후계자였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의 전체 이름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였으며, 이름 뒤에 붙은 게멜루스는 "쌍둥이"만을 뜻한, 집안 내 별명 정도였다.[8] 카이사르가 기존의 공화정 체제와는 다른 로마를 설계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가 공화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카이사르가 꿈꾼 새로운 로마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어야졌다. 다만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하고 유언장에 양아들 아우구스투스를 지명한 점등을 보았을 때 자신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설계한 제정만큼 정교한 체제는 아니었겠지만, 이처럼 1인 세습 통치 체제를 구축할 구상 정도는 해 두었을 것이다.[9]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변호사이자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이나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 회의록》의 발언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로마인들은 이 왕조의 시작을 카이사르로 봤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직계를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또는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문이라고 불렀다.[10] 유언장의 내용은 사후에 공표되었다.[11] 다만 확실한 건 아니다. 애시당초 제정으로 갈 것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가문은 이어야 했기 때문. 혈통만 갖고 논한다면 차라리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카이사리온에게 물려주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유언장으로 친척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당시 로마에서도 흔한 방법이었다.[12] 어머니의 외삼촌이므로 외외종조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나 이는 옳지 않아 일반적으로 외종조부라고 설명 중이다.[13]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의 딸이었으며, 아티아의 아버지는 폼페이우스의 고종 사촌 형제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혈연적으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먼 친척이었다.[14]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본명) 아우구스투스"의 제호 틀은 네 황제의 해 중 오토가 처음 쓰고, 베스파시아누스비텔리우스를 제거하고, 《제위 계승법》을 원로원에게 성문법으로 받아내 얻어낸 틀이었다. 따라서 이 법 이전에 집권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황제는 설령 그 틀의 기원이 아우구스투스일지라도 법적 의무로 기속될 이유가 없었다. 더해 이들은 한 가문인 터라, 호적상 율리우스 성씨를 못 쓴 클라우디우스, 네로 모두 굳이 집안 코그노멘을 제위 계승자를 뜻한 카이사르로 공인받을 이유가 없었고, 국가직책 역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특성상 다양해 임페라토르를 프라이노멘으로 못 박아 둘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의 네 명의 후계자는 자신들이 로마군에게 몇번이나 임페라토르로 찬사받았는지를 표기하고, 이를 홍보했다.[15] 소 안토니아가 사형을 선고받은 자신의 딸을 살해한 방법도 매우 단호했는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자신의 딸을 방에 감금하고 굶겨죽였다.[16] 독버섯을 먹고 급사했다고 알려져있지만 고대 역사학자들과 현대 역사학자들 모두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살해된 것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17] 간통죄는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 1세가 주로 활용했다. 반역죄 기소 이후 반대파 제거 방식은 티베리우스 말기의 공포정치와 칼리굴라 시대 중 갈리아 출전 직전 두 집정관의 모반 사건이 들통난 직후 많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시대의 반역죄 처벌은 세야누스파 제거나 실제로 황제 암살 시도가 적발된 이유가 컸다. 그러나 네로 시대때 급증한 반역죄 처벌은 지극히 황제 개인이 죄가 없는 친인척과 부자들을 제거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18] 아우구스투스의 우려는 네로 사후에 그대로 적중했다.[19] 사촌 간의 근친혼이다.[20] 제5대 황제 네로의 경우에는 부계와 모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맞지만, 부계를 통해서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고 모계를 통해서만 이어받았다. 아울러 네로의 경우에는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한 직후 어머니, 세네카, 근위대장 부루스의 친위쿠데타를 통해 공동계승권자 브리타니쿠스를 밀어내고 즉위한 케이스였고, 선황 생전부터 아헤노바르부스라고 불리면서 양자 입적 이후에도 정통성 부분은 첫 아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통해 의지했다.[21] 이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엄밀히 따지면 파트리키는 아니고 노빌레스 평민귀족에 속한다. 하지만 왕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만큼 오래된 가문이며 공화정 초창기에는 파트리키 지위를 가졌다는 설도 있다.[22] 다만, 이 역시 기본적으로 황제가 살아생전 "너는 아우구스투스 가문이 아니며, 카이사르 가문의 상속권도 없다"고 하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 생전에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손녀 율리아 리비아와 그녀의 자녀들, 칼리굴라 생전에 심한 갈등 속에서 오빠에게 본인과 아들 네로 모두 이것이 박탈된 소 아그리피나, 네로 모자는 이런 배경 때문에 카이사르 가문 피를 이음에도 계승권과 상속권이 제한된 특징이 있었다.[23]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이런 논리가 있더라도, 현실적으로 혼자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남게 된 아우구스투스 가문 남성이며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었기 때문에, 무리하게나마 조카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을 추진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이 없었더라도 외종조부이자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준 이 후광은 네로가 몰락한 뒤 플라비우스 왕조가 수립될 때,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말함), 클라우디우스, 브리타니쿠스"로 언급되고, 이들의 정통성을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두 아들이 잇는다는 선포로 강조된 명분이 됐다.[24] 탈모는 후천적인 영향도 있지만 유전적 영향으로 인해 세습 되므로 카이사르란 가문명은 그 가문 구성원들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결과물로 보기도 한다.[25] 귀족 가문이라고 해서 무조건 유명한 정치인들을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공화정 중기 이후로 가면서 귀족과 평민의 구분은 점점 희미해졌고, 아무리 귀족이라도 선거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공직에 나설 수 없었으며, 오랜 세월 정치인을 배출해내 귀족보다 더 귀족답게 여겨지는 평민 가문도 많았다. 예를 들어 폼페이우스 가(家)의 영향력과 권위는 당시 카이사르 가(家)의 영향력과 권위를 압도했다.[26] 그래서 마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부가 된다.[27] 공화정 로마에는 한 번 집정관에 당선되면 10년간 집정관을 역임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 게르만족의 침공, 즉 킴브리 전쟁으로 로마가 위기 상황이었다지만, 어쨌든 이 규정을 생까고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집정관에 당선된 것이다.[28]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 펠릭스가 킨나의 딸과 이혼할 것을 카이사르에게 강요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하고 도피 생활을 한다.[29] 다만 카이사르 본인은 자신이 공화정을 무너뜨렸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했다. 독재를 했지만 법의 테두리 내에서였고 원로원을 없애거나 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워낙 가던 길이 길이다보니 왕좌를 노린다는 말을 듣지 않기는 힘들었지만 말이다.[30] 카이사르는 제위 계승자에게도 내려지는 칭호였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칭호였다. 심지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로마가 넷으로 나뉠 때도 정제(正帝)는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썼고, 부제(副帝)는 카이사르를 썼다.[31] 계급은 플레브스(평민)으로 마르켈루스 가의 중시조 혹은 일원으로 추정된 인물이다.[32] 마르켈루스 가문은 클라우디우스 일족의 평민 분파로, 귀족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 또는 그 후손이라는 추측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33] 굳이 번역하면 ‘선한 여신’이라고 부르는 축제로 오직 여성들만 참석할 수 있던 제사 의식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성들의 출입은 엄금되었고, 이를 어길 경우 신성 모독죄라는 중죄로 처벌받았다. 따라서 이 제사 의식은 베스타 여사제가 담당했고 최고 제사장인 카이사르조차 출입이 금지됐다.[34] 이때 나온 말이 카이사르가 폼페이아와 이혼하면서 발언한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였다.[35] 클로디우스는 주로 카이사르와 협력했지만, 카이사르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36] 부모 양친이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혈통인 사람이다.[37] 이 사람은 카이사르 암살 직후 원로원에서는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 탓에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지만, 카이사르파에 속한 젊은 귀족 중 한명이기도 했다. 그는 카이사르 밑에서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카이사르군의 해군 제독으로 알렉산드리아 해전을 치렀으며, 카이사르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은 갈리아 일대의 로마화 작업 책임자로 파견됐다. 아울러 그는 법무관 재임 무렵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편에 있으면서 한때 옥타비아누스의 주요 정적 중 한명이었다.[38] 3세기 때의 황제인 푸피에누스가 모계를 통해 이 가문의 피를 이어 받았고, 그의 아들과 후손들이 이 가문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현대 연구에서 밝혀졌다.[39] 스파르타쿠스 잔당들을 토벌했으며, 법무관을 거쳐 마케도니아 총독까지 역임했다. 특히 마케도니아 총독을 맡던 시절, 키케로가 자신의 동생 퀸투스에게 편지로 그에게 조언을 받으라고 충고할 정도로 성과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로마 귀환 중 객사했다.[40] 네로의 원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였다.[41] 단, 로마 전통 귀족인 파트리키에는 속하지 않아 평민 귀족으로 분류되었다.[42] 도미티우스 씨족 가문은 공통적으로 남자 아이에게 '그나이우스'를 프라이노멘(개인이름)으로 지어줬다. 아울러 분파 가문마다 그나이우스를 공유하면서도, 서로 분파 출신임을 구분하는 또 다른 프라이노멘을 정해 상호간에 금기시했다.[43]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도미티우스 씨족 중 그나이우스 외의 또 다른 개인이름으로 '루키우스'를 선택했다. 이런 까닭에 공화정 후기에서 제정 초기에 존속한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경우, 그나이우스-루키우스-그나이우스-루키우스 식으로 두 세대마다 같은 프라이노멘을 사용하는 패턴을 보인다.[44] 리보 가문은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 출신으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의 피도 흐른 남성이 노빌레스 가문인 스크리보니우스 일족에 입양되면서 그들 가족성씨로 리비우스의 변형인 리보를 취해 시작됐다. 따라서 이들 역시 본래의 혈연적 본가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와 성향이 비슷했다.[45] 유니우스, 코르넬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처럼 귀족과 평민 모두를 아우르는 집안이기도 했다.[46] 제정 시대 이후에도 그 명성이 대단했다. 따라서 발레리우스를 성씨로 쓰던 몇몇 황제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이 이 가문 후손이 아님에도, 후손임을 자처했다.[47] 어머니 소 옥타비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재혼할 무렵 뱃속에 있었다.[48] 이후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는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로도 불려지는 전직 콘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와 재혼했다.[49] 다만,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의 친정으로 로마의 오래된 귀족가문 칼푸르니우스 가처럼 진짜 2대 왕 누마의 아들을 시조로 둔 집안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50] 같은 씨족의 대가 끊긴 다른 가문명인 '파울루스'를 레피두스 뒤에 붙이거나 아예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하는 등 매우 헷갈리는 작명 방식으로 후대의 연구자들까지 고생하게 만들었다. 친형제인데 장남은 가문명이 파울루스, 차남은 레피두스인 경우까지 있다. 또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는 여타 다른 귀족가문들과 달리 딸들의 이름까지 괴상하게 짓는 것으로 악명 높았는데,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딸들에게 첫째, 둘째 등을 뜻하는 이름 뒤에 추가로 또 다른 구분법까지 뒀다. 이런 이유로 황족과 통혼한 명문 귀족인데도 가문의 가계도조차 확정되지 못하고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51]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소 율리아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52] 타키투스의 기록으로 대표되는 신뢰성 높은 로마 시대 기록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가 생전 양보다 순하고 온화한데다 개인비리 같은 사소한 문제 자체도 없다고 말한 명문 귀족이었다.[53] 다행히 술라 가문은 또 다른 방계 황족 가문이었던 유니우스 실라누스 가문처럼 네로 사후에도 그 혈통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3세기 초의 세습왕조인 세베루스 왕조 시대까지 술라 가문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술라 가문은 희대의 막장군주 엘라가발루스에게 카파도키아 총독에 재임 중인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제대로 찍혀 살해되면서 그 이후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54] 원로원과 황실 사람들 모두 기본적인 황실의 직계로 본 것은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형제, 칼리굴라와 브리타니쿠스로 이어진 혈통, 그리고 티베리우스와 그의 아들 소 드루수스, 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였다.[55] 제5대 황제 네로와는 풀네임이 다르다. 네로의 경우, 양자 입적 후 즉위 전 공식 풀네임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였다.[56] 이 가문에서 배출한 교황만 3명(첼레스티노 3세, 니콜라오 3세, 베네딕토 13세)이었고, 추기경은 34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