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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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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NondescriptCapriciousThreateningTray, 합의사항1=한사군과 미소군정을 틀에 존치하는 대신 첨자로 추가설명, 토론주소2=AnUtopianAndLudicrousThrill, 합의사항2=대한민국의 역대 공화국들은 글자 크기를 줄여서 존치, 토론주소3=SelfishFaultyLongingTurkey, 합의사항3=부제에 강조 표현을 삽입하기, 토론주소4=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4='구한말(개화기)' 서술을 '개화기'로 서술, 토론주소5=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5='남북국시대'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6=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6='삼국시대' 시대구분 표 내 칸은 세로 3칸으로 분리하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첫 번째 칸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 -> 두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하며 -> 세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서술, 토론주소7=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7= '주호'는 삭제하되 -> '탐라' / '우산'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8=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8=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술은 존치하되 -> 남북한 / 임시정부 / 미군정 / 소련군정을 제외한 현대의 단체들의 이름 및 수식어는 모두 삭제한다., 토론주소9=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9=세로 열에 height를 모두 동일하게 지정하여 시각적으로 각 칸이 구별될 수 있도록 한다., 토론주소10=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10=본 틀 내 가야에 대한 첨자로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을 서술한다., 토론주소11=RealChildlikeExclusiveJewel, 합의사항11=근대시점을 개화기\, 일제강점기로 구분하고 해당 정치체로서 개화기에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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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주요 민족: 예맥 · 삼한 · 한민족}}}}}}}}}



삼국시대
三國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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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3세기 ~ 676년[1]
이전 이후
원삼국시대 남북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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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2] 가야 부여
건국 <colbgcolor=#FFF,#1F2023> 기원전 37년 <colbgcolor=#FFF,#1F2023> 기원전 18년 <colbgcolor=#FFF,#1F2023> 기원전 57년 <colbgcolor=#FFF,#1F2023> 42년 <colbgcolor=#FFF,#1F2023> 기원전 3세기 경?
멸망 668년 660년 935년 562년 494년
군주 수 28명 31명 56명 10명 ?명
건국 군주 동명성왕 온조왕 혁거세 거서간 수로왕
이진아시
동명왕
멸망 군주 보장왕 의자왕 경순왕 구형왕
도설지왕
잔왕
수도 졸본성
국내성
평양성
위례성(한성)
웅진성
사비성
서라벌(금성) 김해
고령
함안
고성
창춘시
지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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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삼국2.2. 삼국 이외의 국가
3. 주요 전투 및 사건4. 시대 구분
4.1. 전체적 구분4.2. 고구려의 시대 구분4.3. 백제의 시대 구분4.4. 신라의 시대 구분
4.4.1. 삼국사기의 상중하대 구분4.4.2. 삼국유사의 상중하고 구분4.4.3. 현대의 구분
4.5. 가야의 시대 구분
5. 삼국의 특징
5.1. 삼국과 가야의 외교 관계5.2. 삼국의 국력5.3. 삼국의 순서5.4. 교과서에서
5.4.1. 중학교 1-4단원 고조선과 여러나라의 성장5.4.2. 중학교 2단원 삼국의 성립과 발전
6.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6.1. 게임6.2. 드라마6.3. 만화6.4. 뮤지컬6.5. 소설6.6. 애니메이션6.7. 연극6.8. 영화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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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한반도에서 북부의 고구려, 중서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를 주요 3국으로 묶고, 북부의 부여, 남부의 가야, 제주의 탐라 등을 비롯한 기타 소국가들이 정립했던 한국사의 시대 구분.

2. 역사

2.1. 삼국

정사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기원전 57년 가장 먼저 건국되었고, 뒤이어 고구려기원전 37년에, 마지막으로 백제기원전 18년 건국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는 고고학적 실증 자료의 부재로 인해 삼국사기의 기록의 연대를 수정해 건국 연대를 내려야 한다는 설이 어느 정도 지지를 얻고 있다.[3] 풍납토성몽촌토성, 나정의 발굴 등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설은 어느 정도 약화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완벽히 극복할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1세기 ~ 2세기부터 신라와 백제가 치고받고, 진흥왕 이전의 신라군이 오늘날의 함경도 지역까지 올라간다거나 하는 기록은 거의 대부분의 역사학자가 신뢰하지 않고 있다.[4]

일반적으로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이 등장하는 시점부터 대강 삼국 시대로 분류하는 편이지만 실제로 한반도에 다른 소국 없이 삼국만 있던 시기는 가야 제국(諸國)들이 신라에 병합된 562년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고작 98년에 불과하다. 그나마 가야가 완전히 소멸한 뒤에도 한반도 외부 지역이면서 한국사의 영역이라고 보는 탐라국 등 곁가지격인 소국가들 몇몇은 계속 반독립적으로 있었다. 일단은 엄밀한 의미를 따지지 않더라도 3세기 중엽을 묘사하는 《정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한반도 중부 이남에 78개국이 존재했다고 설명하고,[5] 이 외 옥저, , 부여 등 한국사를 설명할 때 함께 설명되는 국가들이 여전히 존재했다고 묘사된다. 게다가 한사군의 잔재, 최후의 낙랑군이 망한 것은 4세기 초인 미천왕 때였다.

따라서 실제로 '삼국시대'로 칭할 수 있는 시기는 아무리 일러도 4세기 이후이며,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는 위서 동이전의 국가들을 삼국시대 이전 국가들로 배치하고 있기도 하다.[6] 학계에서는 따라서 대략 3세기까지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통해 삼국시대에서 배제시키고 있는 편이다.

실질적으로 각국이 주변 일대 패권을 확립한 것은 고구려2세기 ~ 3세기, 백제4세기, 신라5세기 중엽 이후나 되어서의 일이므로, 빨라도 4세기 ~ 5세기 정도 이후에 한정지어야 할 용어이다. 가야6세기 초중엽까지는 존속해있기 때문에 엄연한 의미에서 삼국시대로 통칭할 수 있는 시기는 100여 년 정도이다. 그래서 사국시대 같은 용어를 미는 경우도 간혹 보이는데, 해당 문서에 설명되어있지만 사국시대라는 용어도 허점이 많아 삼국시대 용어보다 더욱 적합한 표현이라기엔 애매하다. 가야가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을 완료했다면 사국시대로 명명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수 있기 전에 망했다. 연맹 체제라는 설명도 있는데 그렇게 보면 백제, 신라 또한 연맹 체제였던 기간은 가야 못지 않다.[7] 차이는 영도국의 국력이 다른 거수국들을 압도했는가 안 했는가밖에 없다. 때문에 최근에는 가야 연맹설은 부정되는 게 통설이다. 가야 연맹 안에 리더십이 있는 거수국이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던 게 이유.

마한은 영도국이 교체되었을 망정 유력한 영도국은 늘 하나였고(건마국 → 목지국 → 백제국), 진한은 아예 말할 필요가 없는 반면, 가야는 대부분 복수였다. 가야 극초기인 1~2세기에는 금관국, 고자국, 안라국, 독로국 사두 체제였고, 3세기 초 포상팔국의 난으로 고자국과 독로국이 쇠퇴한 이후 금관국, 안라국, 반파국 삼두 체제였다. 4세기 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금관국이 참패한 후 리더십을 상실한 다음, 5세기 나제동맹 VS 고구려 시절 전성기를 누린 후기에는 반로국, 안라국, 고자국 삼두 체제였다. 물론 전기에는 금관국, 후기에는 반로국이 가장 유력했던 건 맞지만, 충청도 북부 목지국 잔여 연합, 침미다례나 훗날 엉뚱하게 가야 연맹으로 넘어가버리는 전라도 동부 일대 소국들을 내내 일방적으로 혼자서 찍어누른 백제국, 진한 내 소국들을 각개격파하며 기선제압한 사로국과는 달리, 금관국과 반로국은 안라, 고자국 등에게 그렇게 고압적인 자세로 나가지 못하였다.

2.2. 삼국 이외의 국가

이런저런 대체표현이 제기되고 있지만 '삼국 시대'라는 단어는 일반인들에게 고조선 이후의 한국사를 설명하는 일반 용어로 굳게 자리잡았고, 이로 인해 제법 이름이 알려진 네임드 국가들도 삼국의 성장 과정에서 먹힌 잡몹 취급 당하고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국가들이 피해자.


이 수 많은 국가들 중 율령제를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고 삼국시대 마지막 백여 년간 한국사의 패권을 두고 실질적으로 경쟁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세 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뿐이므로 삼국시대라는 단어 자체는 타당성이 높은 편이다.

가야를 감안해 삼국 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간혹 제기되지만 어차피 사국 시대라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애초에 가야는 다른 삼국과 달리 1개의 나라가 아니라 여러 나라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아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 가야 말고도 비슷한 시기 여기저기에 나라가 많았기 때문에 오직 4개 나라만 있었던 적은 없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대가야가 말기에는 나름대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실증 자료를 찾기 힘들고, 규모도 작은 탓에 대부분의 인식은 중앙 집권화에 실패한 연맹체 또는 소국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는 입장이다.

최근에는 가야라는 이름이 연맹 왕국이 아니라 그냥 특정 지역을 통째로 가리키는 명칭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가야 문서 참고.) 구삼국사, 삼국사기의 기초가 되는 사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사서와 후대의 명칭 등을 보면 최소한 고려 시대부터는 '이 시절은 삼국 시대'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던 것 같으니 지금 와서 고친다는 것도 당위성이 떨어지는 말이기는 하다.

대개의 고대 국가들이 그러하듯 정확한 시작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학계 공통으로 정확히 끝났다고 평가되는 연도는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해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고 통일을 완성한 676년. 아주 간략화해 설명하는 경우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을 삼국시대의 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당과 얽혀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잔여 세력과 영토를 신라가 흡수한 것이 나당전쟁 와중이므로 676년을 끝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건국되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터를 잡으면서 남북국시대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삼국 시대는 삼국 중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일본 국가의 형성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주었던 시기이며, 일본인들의 직간접적인 조상들이 이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가기도 했다.[11] 심지어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와 백제인의 후예들이 1300년도 더 전에 멸망해버린 조국을 기리는 신사들도 여전히 있을 정도. (대표적으로 고구려를 기리는 히다카 시에 위치한 고마 신사). 그야말로 재일교포 0세대. 물론 더 나중에 망한 신라를 기리는 신사들 역시 많이 남아있고 가야 신사도 있다.[12]

이 삼국 시대란 용어는 다소 사후처리적인 용어인데, 어떤 통일 정권이 삼국으로 분립된 게 아니라 삼국이 신라로 정리된 이후에 이전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삼국 시대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삼국시대와 명칭이 같지만 중국의 삼국은 하나의 통일 왕조가 멸망하고 다음 통일 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의 혼란기, 과도기라는 점, 삼국이 지속된 기간 등에서 한국사의 후삼국시대와 비교될 수 있다. 한국사의 원삼국과 삼국 시대는 아직 통일 왕국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소국들이 서로 경쟁하고 병합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서 한국사 버전 춘추전국시대에 가깝다.[13][14]

3. 주요 전투 및 사건

4. 시대 구분

4.1. 전체적 구분

교육과정에서는 삼국시대 초반부의 경우 '초기 여러 나라의 성장' 단락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나라는 고구려, 부여, 옥저, 동예, 삼한(마한, 진한, 변한).

교과서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학계 일각에서는 이 삼국시대 초반 시기를 가리켜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있다. 그 외 다른 용어를 미는 경우도 많은데 상황이 복잡하기 때문에 원삼국시대 문서를 참조.

이후는 4세기 백제의 전성기(근초고왕 재위기),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장수왕 재위기), 6세기 신라의 전성기(진흥왕 재위기) 3단으로 구분해 도식화하는 편이다. 각 세기에 팽창해 한강 유역 등 많은 영토를 군사적으로 차지하고 체제정비가 이루어지던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4.2. 고구려의 시대 구분

삼국 중 고구려란 나라를 지칭해 시기별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졸본성, 국내성, 평양성 도읍기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2차례의 천도가 있었고 이것이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기에 간편하기 때문이다.

4.3. 백제의 시대 구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2차례의 천도가 있었고 수도의 변천이 백제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기에 적절하기 때문에 위례성, 웅진성, 사비성 도읍기를 기준으로 삼아 '한성백제시대', '웅진백제시대', '사비백제시대' 등으로 구분하는 편이다.

한성시대는 백제의 성장과 발전기, 웅진시대는 백제의 침체기, 사비시대는 중흥 및 멸망기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런 백제 정치사는 노중국에 의해 전체적으로 정리가 되었다.

4.4. 신라의 시대 구분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는 천도한 적이 없으며[15] 비교적 사회변혁이 복잡해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

4.4.1. 삼국사기의 상중하대 구분

가장 전통적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통용되는 구분법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실의 변화에 따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었다.

4.4.2. 삼국유사의 상중하고 구분

삼국사기의 구분이 왕의 계통이라면 삼국유사의 구분은 불교와 연관돼있다.
보다시피 삼국사기의 상중하대 구분과 삼국유사의 상중하고 구분이 묘하게 겹치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어 간단한 시험에서는 암기사항으로도 자주 출제되는 편이다.

4.4.3. 현대의 구분

건국 초기 신라에 대해서, 특히 고고학적으로 말할 때는 지증왕이 국호를 확정하기 전에 많이 사용됐던 사로국으로 지칭하는 편이다. 이는 대체로 '상고기 신라'와 의미가 겹친다.

'삼국 중 하나였던 신라'와 '나당전쟁 종료(676년) 이후 영토가 넓어지고 삼한일통 의식을 정립한 신라' 둘을 구분하기 위해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로 구분한다. 해당 문서 참조.

4.5. 가야의 시대 구분

보통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던 초기 혹은 전기 가야(연맹), 대가야가 주도권을 잡은 후기 가야로 구분하는 편이다. 연맹설은 학계에서는 거의 부정되고 있지만 교과과정이나 각종 시험에서는 아직 연맹이란 단어를 써서 가르치는 편이고 연맹이란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전기, 후기라는 단어는 아직도 많이 쓴다.

굳이 상세히 구분하자면 건국기: (42~116년), 변한시기: (116~209년), 분열기: (209~215년), 금관가야 주도기: (215~400년), 쇠퇴기: (400~475년), 대가야 주도기: (475~529년), 아라가야 주도기: (529년~548년), 백제간섭기: (548~554년), 멸망기: (554~562년)이다.

5. 삼국의 특징

5.1. 삼국과 가야의 외교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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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삼국의 국력

국력을 계량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현대 국가를 대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전근대 역사, 자료의 유실이 극심한 고대 한국에서 국력을 계량적으로 단서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다만 많은 면에서 고구려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일 대 일로 비교하면 가장 강대국이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고 그것은 당대 이래로 쭉 내려온 인식도 그러하다.[17][18] 비록 인구에 관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구라는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국토 면적과 그에 따른 종심 방어의 유불리, 북방 민족의 동원 여부, 강대국들과의 오랜 실전 경험, 선진 문화에 대한 접근성 등등 고구려가 남부의 나제 양국보다 우위를 점할 요인이 많기 때문에 고구려의 국력 우위가 설명되지 않는건 아니다.

이러한 고구려 1강 체제는 백제와 신라의 전성기로 알려진 4세기와 6세기에도 예외는 아닐 수 있다. 백제나 신라가 약진하고 양면전선에 놓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중원 왕조 및 북방 유목민과 접하면서 남는 여력으로 나제를 상대하는 고구려의 상황과 비교할 바는 아니다.[19] 무엇보다 근초고왕 사후 백제는 고구려와 접한 북방 영토를 빠르게 상실했고 진흥왕 사후 신라도 북방 영토를 일부 잃었던 반면 고구려는 150여년간이나 전성기 영토를 유지하였기에 지속성 측면에서 5세기 고구려의 업적을 4세기 백제나 6세기 신라의 스퍼트보다 우위로 볼 여지가 있다.

외교적인 대우나 국제적인 위상에서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 항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20] 군사력 측면에서도 30만 대군을 여러차례 동원하는 고구려와 비교해서 최대 병력 동원이 수만에 남짓한[21] 신라, 백제와는 양적인 차이가 현격하며 질적으로도 중국이나 유라시아 교역로와 가까워 선진 문물과의 접촉이 많아 최신화가 빠르고 전투력이 탁월한 북방을 다양하게 아우르며 한국사상 다른 시기에는 상상조차 힘들 정도의 전과를 쌓아올림으로써 증명하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드넓고 험한 북방에서도 패권을 유지한 명실상부한 강대국이었다.[22]

하지만 국력 순서대로만 보면 고구려가 순탄하게 삼한을 통합해야 했으나 그런 일 없이 오랜 기간 기각지세를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한국을 병합할 역량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원리로, 고구려는 중원, 몽골 방면의 세력을 맞댄 이중, 삼중의 전선을 감당하면서 남한에 투사할 여력까지 갖추지는 못했다. 사실 남한 일대의 역량도 상당한 수준이라 일치단결해서 우주방어를 실천하면 고구려는 물론이고 당조차도 이를 뚫고 불도저처럼 밀어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1:1 국력으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압도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양면/삼면전선을 극복하고 한반도에 일원적 정치체를 구축할 국력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의 우열에 관해서는 미궁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논란의 기록이지만 파편적인 인구 기록이라도 있는 백제와 달리 신라의 경우 그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백제가 멸망 직전까지도 신라에 쭉 공세를 유지했고 누적적으로 한 세대 동안 투사한 군사력 역시 만만치 않다. 신라는 백제 멸망 5년 전에도 신라를 작은 세력, 백제를 큰 세력으로 지칭하였던 만큼 백제의 우위를 말할 근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라의 수세적 상황은 대륙에서의 고구려의 경우와 비슷하게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2중 3중 전선이 되어버린 형세에 기인한 신라의 수세로 볼 수도 있다. 오히려 삼국시대가 막바지에 다다른 7세기 중반 기준 현재 행정체계상 충남, 전북, 전남, 경남 서부를 가진 백제보다 경북, 경남 중~동부, 충북, 경기, 강원을 가진 신라가 1:1로는 약간 더 우위였다고 해석할 근거 또한 있다. 누적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신라는 백제 멸망 당시 5만, 고구려 멸망 당시 20만[23] 대군을 발하는 등 역시 만만치 않는 역량을 지녔다고 볼 만한 근거도 있다.[24]

그리고 신라의 후방을 위협하는 왜국도 삼국시대 거의 내내 백제 편을 들어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동해 바다와 멀지 않은 경주에 중심지가 있는 신라는 항상 후방에 예비 병력을 남겨둬야 했을 것이므로 백제와 전력으로 싸울 여유가 없었던 점도 고려할 수 있다. 게다가 관산성 전투가야멸망전처럼 아예 백제군과 일본군이 합류해서 연합군을 편성해 신라와 싸우기도 했다.

5.3. 삼국의 순서

우선적으로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순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이다. 이렇게 부르는 기준은 상당히 애매한 편이고 주로 많이들 하는 설명이 고대 국가로서 자리잡은 순서[25]를 기준으로 한다고들 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가나다순으로도 고백신 순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신의 순서가 자리잡힌 것은 길게 봐야 해방 후 대한민국 정권이 수립된 이후이다.

고려 시대~조선 시대 내내 통용된 삼국의 순서는 통상적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본기 순서이기도 하고 그외 고려와 조선의 여타 사서에서도 주로 이 순서로 통용되는 경우가 많다. 기준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 기준은 우선 건국 연도 순[26]이다. 삼국이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이 순서로 기재하는 것이 합당하는 의견.

다만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는 후대에 고구려와 비슷한 시기로 맞추기 위하여 소급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학계에서도 삼국사기 내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보다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연대적 신뢰성을 낮게 책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일단 고구려는 한국보다 더 먼저 기록문화가 자리잡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접해 있어서 초기 기록부터 교차검증이 되는데[27] 백제와 신라는 그렇지 않고 3세기에 와서야 그 존재가 삼한 78개국의 일원 정도로나마 교차검증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연대의 경우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후 삼한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의도적으로 고구려보다 늦은 자신들의 국가 생성 연대를 고구려보다 20년 앞서 소급시키고 초기 국왕들의 재위기간도 늘여서 본인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해석이 꽤나 지배적이다.[28]

실제로 신라가 건국 및 초기사 연대를 선대로 소급한 간접적인 흔적은 삼국사기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우선 삼국사기상 혁거세 거서간이 신라를 건국한 연도(기원전 57년)는 고구려의 건국 연도(기원전 37년)가 포함된 육십갑자의 첫 해이다. 그리고 혁거세 거서간은 정확히 그 육십갑자가 지나는 서기 4년에 사망하는데 상당히 인위적인 개입이 들어간 듯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그외에도 출생 이전에 신라로 건너온 탈해 이사금의 이야기나 조손관계인 박아도박제상의 활동 연대가 2세기가 넘게 차이나는 등 말이 안되는 기록들이 초기 기사 곳곳에서 드러난다.

한편 백제의 경우에도 그 건국시조인 온조 혹은 비류를 고구려 건국왕 주몽의 연대와 맞추기 위해 백제 왕실 측에서 의도적으로 끌어올렸을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다.[29] 실제 온조왕 이후 초기 국왕들의 재위 연대가 평균적으로 40~50년을 상회하는데 이 역시 현실성이 떨어진다. 참고로 조선조 500년의 국왕 27명 중 가장 오래 재위한 국왕이 52년간 왕위를 지킨 영조인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사대로라면 영조급 군주가 건국 초기부터 연속적으로 등장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식으로 보면 신라와 백제 초기 국왕들의 비정상적인 재위기간 및 모순적인 연대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즉, 다시 말하면 삼국사기상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는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이다.[30][31]

다만 이러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의 연대 신뢰성 문제는 12세기 당시 전해지던 원전 자체의 문제이지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 등 편찬자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이미 김부식의 손에 들어온 원전에서 비롯된 신뢰성 문제를 훨씬 후대 사람인 김부식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오히려 삼국사기 곳곳에서 김부식이 의문을 남긴 흔적이 종종 있을 정도로 김부식 역시 삼국사기를 지으면서도 모순적인 기년에 대해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와 발해, 고구려, 백제, 가야에서 남겨놓은 공문서와 사서같은 원사료들은 후삼국시대여요전쟁의 전란속에 다수가 소실된 상태였고, 이 때문에 김부식의 시대가 되면 대다수가 2차 인용된 사료들이 주로 남은지라 김부식으로서도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기준은 한국사에서의 중요성과 비중 문제이다. 신라 자신을 비롯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래도 신라가 삼국을 첫번째로 통일하였고[32] 현대 한반도 국가의 원형이 676년에 탄생했기에 신라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해 신라를 가장 앞에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수•당과 여러 차례 공방을 주고받아 한민족 세력의 대표주자로 대외적으로 공인받았고 훗날 고려의 국호와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고려, 조선시대 내내 외적의 침입에 시달릴 때마다 정신적 향수를 제공하였기에, 아무래도 존재감이 미미한 백제보다는 후대 영향력이 앞선다 할 수 있어 순서상 백제보다 앞에 놓인다. 또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고구려 유민이 세운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완수하였고 신라는 물리적 통일만 하였다 뿐이지 삼국 유민의 독자적 국가정체성을 소멸시키진 못하였기에 분명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33] 그럼에도 신라가 삼국통일을 최초로 완수한 국가로 인정받고 있었고 발해,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의 국체는 668년에 끝난 반면 신라의 국체는 훨씬 후대인 935년까지 이어졌기에 적어도 직접적인 영향력은 신라가 강했던 건 사실이다. 따라서 후손들 입장에선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부를 근거는 타당했다.

이처럼 삼국을 부르는 순서에서 우리는 당대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반영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신라의 삼한일통과 한반도 통일 왕조의 원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신라를 배려해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부르곤 했다. 그러나 발해가 재조명되면서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한 통일이었다는 평가가 강해지는 한편 근현대사에서 외세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를 겪은 반작용, 민족주의의 영향 등으로 고구려에 대한 인식이 더욱 높아지면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을 차지하지 못한 신라가 상대적으로 격하되어 현대 한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부르는 경향이 잦다고 할 수 있다.[34]

5.4. 교과서에서

교과서 속에서 삼국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나오지만 고등학교의 내용은 매우 부실하다.

중학교: 1-4 고조선과 여러나라의 성장, 2-1 삼국의 성립, 2-2 삼국의 발전과 가야, 2-3 삼국의 문화 3-1 고구려의 대외항쟁과 신라의 삼국통일까지가 삼국시대의 내용이다.

고등학교: 1-1 고대국가의 형성과 정치체제 부분이 1-2는 고대국가의 문화가 끝이다.

5.4.1. 중학교 1-4단원 고조선과 여러나라의 성장

고조선 멸망 이후 철기의 내용을 다루고 '여러나라의 성장'파트로 넘어가는데 나오는 나라 수가 역사에 비해 매우 적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나라들은 부여와 고구려를 제외하면 건국에 대한 이야기도 서술되지 않으며 오직 풍속과 문화에 대한 내용 뿐이다.

5.4.2. 중학교 2단원 삼국의 성립과 발전

고구려, 백제, 신라만이 주체로 다뤄지며[37] 나머지 나라는 거의 언급이 되지않는다.[38]솔직히 말해 탐라, 우산, 두막루, 삼한의 일개 소국들은 교과서에 쓰기엔 내용이 너무 적고 중요하지 않은게 맞지만 부여와 가야는 역사에 비해 확실히 대우가 너무 박하다.

6.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6.1. 게임

6.2. 드라마

6.3. 만화

6.4. 뮤지컬

6.5. 소설

6.6. 애니메이션

6.7. 연극

6.8. 영화

7. 관련 문서


[1] 신라의 당 축출[2] 존속기간과 역대 군주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 포함[3] 이런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의 시작이 하필 일제강점기 일제 어용사학계였어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 같은 것이 나오기도 했다.[4] 이러한 기록에 대해서는 백제와 신라가 자신들이 정복한 국가의 역사를 자국을 주체로 바꾸어 표기한 것이 않느냐는 주장도 제시된다. 예를 들면 전라도 일대의 성읍국가 A와 경상도 일대의 성읍국가 B 사이에 1~2세기경 전쟁이 발발했고 이후 A와 B가 각각 백제와 신라에 정복당했다면 백제와 신라 측에서는 이 성읍국가들 간의 역사를 승자인 자신들로 주체로 바꾸어서 표기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백제와 신라가 후대 5~6세기에야 있었던 사건을 자신들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과시하려고 끌어올린 것이라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렇게 일본서기를 쓰기도 했고...[5] 마한 산하 54개국, 진한 산하 12개국, 변한 산하 12개국으로 중국 시각에서 '편의상' 분류했다. 각 국가의 목록은 각 문서 참조.[6] 다만 고구려, 백제, 신라 단락에서 태조왕, 고국천왕, 동천왕, 고이왕 등을 넣어두기도 했다.[7] 백제는 적어도 4세기 중반까지, 신라는 5세기 후반까지 연맹체제였다. 가야가 6세기 중반에 멸망했음을 고려하면 신라와 백제도 상당히 긴 기간동안 연맹 체제였음을 알 수 있다.[8] 경남 동쪽 끝 양산시는 가야의 영향이 있긴 했지만 진한 문화권에 가깝고 문헌에서도 신라와 가야의 전선이 양산 아래 황산하(낙동강)에서 형성된 기록이 등장한다. 그리고 경남 서쪽 끝 남해군은 발굴조사 결과 일찍부터 백제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이곳을 통해 일본과 교류하는 항해로를 이용했음이 밝혀졌다.[9] 3세기 초반까지 김천, 구미, 상주, 문경 일대까지, 4세기 후반까지는 성주, 경산, 대구 일대까지, 그 이후엔 고령 일대만 통치했다.[10] 5세기 중반 이후 한정. 지역은 구례, 광양, 순천, 장수, 진안, 임실, 남원, 곡성, 여수[11] 물론 삼국 간에도 일본에 준 영향력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백제>>>고구려>신라.[12]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삼국 시대 중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집단 이주가 가장 많이 일어났던 시기는 광개토대왕의 가야 공격 즈음으로 추정된다.[13] 사실 은, 주 시대, 즉 춘추 전국 시대 이전의 양쯔강 일대는 중원과 정체성 자체가 아예 달랐다. 애초에 초나라부터가 아예 주나라와 그 산하의 수많은 제후국에 속하지 않은 묘족의 국가에서 출발했다는 말도 있고 초나라 이남으로 가면 한장어족이 아니라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나 오스트로네시아어 등의 언어를 쓰던 종족들이 살고 있었으니 말 다한 셈. 한반도에서도 초기철기시대가 개막할 무렵에는 이전 한반도 남부 청동기문화를 이끌었던 송국리문화와 주로 울산과 그 이북지역에서 확산된 검단리문화, 춘천 중도유형을 위시한 크로노프카 문화 및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한반도로 이주해온 점토대토기 문화 등 다양한 문화유형이 공존하고 있었다.[14] 다만 흔히 인터넷 상의 반도 일본어설 지지자들이 단순화하는 대로 송국리문화=일본어족 / 점토대토기문화=예맥족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근거는 고고학 상에서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점토대토기문화가 이주해오면서 재지문화가 약세를 이루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일부 지역에서는 이주민인 점토대토기문화가 역으로 재지민에 동화되어 사라진 경우도 있다.(박진일, 서울경기지방 점토대토기 문화 시론) 오히려 근래 밝혀지는 양상은 점토대토기문화가 이주한 이후 재지 문화와 관계를 맺는 양상은 결코 일률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송국리문화와 같은 재지문화와 점진적으로 융합, 통합되는 가운데에 지속적으로 중국계 문물을 수용하고 있는 양상에 가깝다.(진영민, 중서부지방 점토대토기문화 취락의 변천과 성격) 오히려 흔히 반도 일본어설 지지자들이 이주민에 밀려 사라졌다고 자극적으로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반대로 송국리문화는 점토대토기문화 및 중국계 철기 문화가 유입되는 가운데에서도 기원 이후까지 뚜렷한 족적을 남기다가 삼한 계열 정치체로 연속되기도 한다.(김규정, 호남지역 마한 성립기 주거지 일고찰) 요컨대 기원전후한 무렵 한반도는 다양한 출자와 전통을 가진 문화유형이 공존하고 있는 와중에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 흡수, 동화, 재편되는 과정을 따라 점진적으로 통합되어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어느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일본 열도로 밀어냈다는 식의 자극적인 주장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15] 689년 신문왕이 달구벌(대구)로 천도하려고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16] 사실 삼국사기의 서술과 달리 현대의 연구로 성골 개념의 시작시점이 불분명해졌지만, 어쨌든 성골의 끝이 진덕여왕인 것은 이견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상대는 성골이 끝날 때까지라고 정의해서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17] 여전히 이도학 등 일부 학자들은 백제 멸망 당시 인구 76만호, 620만구 등의 기록을 취신하며 멸망 당시 70만호였던 고구려보다 백제가 체급 면에서 큰 국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 인구 70만호와 백제 76만호의 기록을 대하는 학자들의 태도는 취신하는 학자의 수효가 적지 않다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논박을 통해 보수적인 설에 비해서 명백한 우위를 점하고 통설이라 할 정도의 추세에 있다는 점에서는 후자와 다른 점이 있다.[18] 3세기를 기준으로 보자면 ‘중국에 의해 대략적으로 파악된’ 고구려 강역의 인구는 백제+신라 강역의 인구 대비 2~3배에 달한다. 반대로 조선시대에는 하삼도의 인구가 북삼도의 인구의 1.5~4배에 달한다. 이렇듯 쟁점이 되는 7세기 무렵과는 시차가 있고 이에 따라 영토의 영유, 개발 정도가 다를 수 있고 무엇보다 전근대 인구 조사 자체가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간접적인 단서 정도로만 볼 수 있다.[19] 북방민족만큼 강력한 세력은 아니지만 나제의 후방에도 백제 뒤에는 전성기를 맞아 호남을 잠식해나간 대가야가 있었고 신라의 뒤에는 꾸준한 왜군의 침공이 있었기는 하다.[20] 전략적인 면, 쇠퇴기에 겹치면서 백제 무령왕 시기에 봉작의 품계가 뒤집힌 것은 한 순간 있었다.[21] 668년 신라의 20만 동원 기록을 부정하는 경우. 668년의 신라는 '삼국시대 신라+백제 일부+연정토가 바친 고구려 인구'가 더해진 상태기 때문에 참작할 필요가 있으나, 그 외에 신라와 백제의 중요 전쟁에서 보여주는 병력 동원은 대체로 5만 플러스알파 정도다.[22] 여제 양국이 멸망할 당시 고구려의 고토에는 1도호부 9도독부가 설치되었고 백제의 고토에는 1도호부 5도독부를 설치하려다가 1개 도독부를 설치하는데 그쳤다. 책임자의 위상도 대장군급 이상이던 안동도호부와 중랑장급이던 웅진도독부 사리에는 격차가 있었다. 물론 도독부를 철저하게 인구비례로 설정하는 건 아니지만 당나라가 고구려를 9개, 백제를 1~5개로 파악했던 것을 두 나라의 체급이나 위상에 대한 참고사항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멸망 이후 요인들에 대한 예우도 백제에 비해 격차가 있다는 것도 참고사항이 될 수 있다.[23] 이 경우에는 특이값으로 신뢰성이 낮다고 보기도 한다.[24] 위에서 언급하였다시피 백제 인구 76만호, 620만구 등의 기록을 취신하여 고구려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분명 있긴 있다. 이 경우에는 또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25] 고구려- 1세기 태조대왕, 백제-3세기 고이왕, 신라-6세기 지증왕[26]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준으로 신라는 BC 57년, 고구려는 BC 37년, 백제는 BC 18년에 건국되었다.[27] 여기서 교차검증이라 하면 기원전 1세기 후반~서기 1세기 초반 무렵 고구려 왕조의 존재가 교차검증된다는 뜻이지 고구려본기 기사 하나하나가 신뢰성을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당장 왕망에게 죽은 고구려후 추를 삼국사기의 연비로 보는 학자가 그리 많지도 않고 서기 1세기~2세기 무렵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의 계보 또한 그대로 취신하는 경우가 전무하다.[28] 사실 어떻게 보면 인간 심리상 당연한데 신라인 입장에서 100~200년 후에야 형성된 본인들 국가가 고구려를 제치고 통일했다고 하면 삼한일통의 정통성이 훼손될 수도 있기에 본인들 국가가 삼한 중 가장 정통성 있는 국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 하다.[29] 실제 이러한 점은 일본서기이주갑인상의 문제에서도 확인되는데 백제가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기에 역사 소급의 원조가 백제였을 수도 있다. 사실 원조를 따질 것도 없는게 심리상 국가의 신성성을 높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초기사의 왜곡, 각색이다.[30] 물론 고구려의 기원전 37년도 아주 정확한 연대는 아닌게 구려후 추동명성왕으로 해석하면 고구려 역시 건국연대가 30년 가량 뒤로 밀린다. 또한 호동왕자 설화로 대표되는 대무신왕 시기 낙랑국 정복,(낙랑군으로 해석할 시 온조왕의 마한 정벌 기사 마냥 논란이 있다.) 태조대왕부터 신대왕 시기에 집중되는 비정상적인 수명 및 재위기간을 고려하면 고구려본기의 연대도 그대로 취신하기는 곤란하다. 물론 구려후 추 관련 기록의 경우 동명성왕(추모왕)을 가리키는 것은 맞지만 해당 사건 자체는 중국 신나라측의 프로파간다라는 주장이 한국과 중국의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당장 후대의 중국 역사가들도 이것이 왕망의 프로파간다가 아닌가 사실 여부를 의심하였다. 그래도 고대사라는 한계를 고려해 봤을때 반세기 미만으로 연대가 차이난다는 점에선 셋 중 그나마 양반이긴 하다.[31] 참고로 북한의 경우 고구려 역사 900년을 주장하면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올렸는데 이러한 주장 역시 무리수라 볼 수 있다. 기원전 277년이면 아직도 단군조선이 엄연히 한반도 북부를 통치하던 시기이고 중국에선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기도 이전이다. 상식적으로 고구려가 이 시기부터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을 리는 없다. 물론 고구려현의 존재는 분명 BC 37년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는 중국사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현과 고구려 왕조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사학계에서도 후대의 고씨 고구려 왕조가 국명을 선대에 존재하던 지명에서 가져왔다고 추정한다. 고구려 역사는 딱 700년 전후 정도인 것으로 보이고 그렇기에 기원전 37년 전후가 딱 적당하다. 실제로 고구려 역사가 700년 정도라는 사실은 한중일 역사서에서 모두 교차검증되는데 중국과 일본의 사서에도 고구려 역사가 700년이라는 언급은 많다. 한서에서 기원전 107년이나 기원전 75년에 등장하는 구려 역시 고구려의 원형이 되었음은 자명하지만 고구려 왕조와 동일한 정치체로 보는 것은 무리인게 고구려인들 본인부터가 기원전 75년보다 확실히 이후인 동명성왕을 시조로 보았기 때문이다.[32] 당시 발해에 대해서는 통일신라 때도 고려 때도 고구려의 한 방계 일파 정도로는 쳐줬지만 고구려를 이은 정통 왕조라고 보진 않았다.[33] 이 점은 삼국의 통치를 모두 받아본 경기 지역이 신라, 백제가 아닌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사실 경기 지역은 BC 18년 백제의 건국 시점부터 475년 한성백제의 몰락 시점까지 500여년간 마한~백제로 이어지는 흐름의 지배를 받았고 553년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부터 901년 궁예가 봉기하기까지 300년 넘게 신라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경기 지역이 택한 나라는 백제나 신라가 아닌 1세기도 제대로 지배하지 못해본 고구려였다. 이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한반도에서 얼마나 큰 위상을 가졌는지를 상징하는 바라 할 수 있다.[34] 물론 어느 분야에서든 마찬가지이듯이, 어감의 영향도 있다.[35] 사실 요즘 사학계에서 북부여와 동부여는 같은 나라인데 고구려인들이 일부러 시조 전승을 지어내는 과정에서 동부여라고 따로 만들어낸걸 김부식이 헷갈리는 바람에 기록이 짬뽕되었다고 추측한다. 즉 옛날 학설의 잔재인셈. 다만, 이건 주몽 신화 등 고구려 극초기 기록에 나오는 동부여를 말하는 거고, 나중에 북부여가 침략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는 등 큰 타격을 입으면서 유민들 중 일부다 동쪽으로 달아나 진짜 동부여를 세우기는 했다.[36] 마한의 남은 세력이 아니라 마한의 나라 중 하나인 '침미다례'가 근초고왕때 멸망했을 뿐이다.[37] 이외에도 부여, 가야 등이 나오긴 하지만 각각 고구려와 신라의 내용에 붙어서 나온다.[38] 사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한강점령기와 명확한 전성기가 존재했고,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명백한 고대 국가였으나 부여나 가야는 그렇지 못했고, 또한 역사서의 기록이 삼국에 비해 눈에 띄는 정도로 부실하다.[1단락] 삼국의 성립[2단락] 삼국의 발전과 가야[41] 통일신라와 발해의 발전[42] 삼국통일전쟁까지 관여한 김유신의 생애까지 다루며 이쪽은 라디오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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