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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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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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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국 포상팔국 연맹
신라-왜 전쟁
,(신라의 일본침공사례),
,364 ~ 404
(291 ~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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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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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잠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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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잠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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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칠중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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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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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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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중성 전투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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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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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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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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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 전투
,673,
고구려 부흥군 당나라
호로와 왕봉 전투
,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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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733,
당나라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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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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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구의 일본 침입
,811 ~ 936,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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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 ~ 936 ,
원종ㆍ애노의 난
,889,
- 원종애노
대야성 전투
,901,
- 후백제
대야성 전투
,916,
- 후백제
대야성 전투
,920,
- 후백제
서라벌 기습
,927,
고려 후백제
고창전투
,930,
후백제 고려
운주성 전투
,934,
고려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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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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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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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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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제국의 대외 전쟁
백강 전투
白江戰鬪
파일:attachment/white_river_war.jpg

백강 전투의 기록화
파일:금강 백마강 하구.png

백강 전투의 무대로 비정되는 금강 하류(백마강)의 전경
<colbgcolor=#4a2d5b,#0e0f37><colcolor=#fbe673> 시기 663년 (문무왕 3년) 음력 8월 27일 ~ 9월 8일
장소 백마강(금강 하류) 또는 동진강 하류, 주류성 일대
원인 부여풍의 백제 부흥 운동
교전국 신라-당
(수세)
백제부흥군-왜-탐라국
(공세)
주요 인물
신라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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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군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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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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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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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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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군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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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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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연합군: 17,000명 ↑
- 당군: 17,000명 (추정)
- 신라군: 병력 규모 불명
연합군: 27,000명~42,000명 ↑
- 왜군: 27,000명~42,000명[11]
- 백제 부흥군: 병력 규모 불명
- 탐라군: 병력 규모 불명

병선: 1,000척[12]
피해 규모 불명 전사자: 1,0000여 명
결과 신라-당 연합의 승리
영향 백제부흥운동의 실패

1. 개요2. 명칭3. 배경
3.1. 백제부흥운동나당연합군의 소탕작전3.2. 상륙한 왜군, 신라를 위협하다3.3. 모든 것이 주류성으로
4. 양측의 편제5. 양측의 병력6. 전개
6.1. 신라 정예기병의 기습6.2. 피비린내로 가득한 백강
7. 결과8. 평가9. 창작물에서
9.1. <삼국기>9.2. <대왕의 꿈>9.3. 기타 작품
10. 기타11. 전투 관련 기록

[clearfix]

1. 개요

백강 전투(白江戰鬪)는 서기 663년에 백강[13]과 인근 주류성 일대에서 신라, 당나라 연합군과 백제 부흥군, 왜국 연합군이 맞서 싸운 전투다. 탐라도 백제/왜 연합 측에서 참전한 것으로 《구당서》 <유인궤 열전>의 기록을 근거로 추정하기도 한다.[14][15]

이 전투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일본의 정규군이 충돌하여 전쟁을 벌인 전투이기도 하며,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직접적으로 관련된 최초의 국제전이다.[16] 후술되어 있듯이 왜국의 중앙집권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이 승리하면서, 3년 전 의자왕이 항복한 후 백제부흥운동의 잔존 세력들은 사실상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 전투에 참전한 왜군 병력은 사이메이 덴노가 우방국 백제를 구하기 위해 파병한 병력이었다.

2. 명칭

<colcolor=#fbe673> 언어별 명칭
한국어 <colbgcolor=#fff,#000>백강 전투(白江戰鬪)
백강구전(白江口戰)
백강전쟁(白江戰爭)
백촌강 전투(白村江戰鬪)
일본어 [ruby(白村江, ruby=はくすきのえ)]の[ruby(戦, ruby=たたか)]い
[ruby(白村江, ruby=はくそんこう)]の[ruby(戦, ruby=たたか)]い[17]
중국어 白江口之戰/白江口之战[18]
영어 Battle of Baekgang[19]
한국에서는 백강 전투, 백강구 전투, 백촌강 전투가 혼용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白江口戰鬪)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일본에서는 하쿠스키노에 또는 하쿠손코의 싸움(白村江の戦い)이라고 부른다. 村을 스키(すき)로 읽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江의 훈인 에(え)은 한국어나 중국어의 강(=하천)이 아니라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하구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른다면 하쿠스키노에는 '하쿠스키 하구'로 옮길 수 있다.

3. 배경

3.1. 백제부흥운동나당연합군의 소탕작전

660년사비성이 점령 당하고 의자왕부여융이 수모를 당한 뒤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백제가 멸망한다. 그 후, 백제 남부에서 귀실복신, 승려 도침 등이 부흥군을 일으켰고, 다른 왕족들이 당나라로 끌려갔기 때문에 왜국에 있었던 왕자 부여풍을 데려와 왕으로 세워 백제 부흥 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또한 왜 정부는 백제부흥군에게 물자를 지원해주며[20] 연합작전을 진행한다.

부흥전쟁 초기에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될 뻔 하고 오히려 1,000여명의 당군이 백제부흥군에게 박살나는 등 백제부흥군의 움직임은 매서웠다. 여기에 신라는 전염병이 돌아 병력 차출에 어려움을 겪었고 당나라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류성 공략에 나섰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은 백제 영토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나선다. 신라의 중앙군은 거열성을 점령한 이후, 본대는 안덕으로 일부는 전라남도 남부지방에 위치한 요충지 4곳을 점령해 소각하는 등 지방 곳곳에서 발원한 백제 부흥군을 분쇄하기 시작했다.[21]
(662년) 봄 2월 을유삭 병술(2일)에 백제가 달솔 금수(金受) 등을 보내 조(調)를 올렸다. '''신라인이 백제 남부의 사주(四州)를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安德)[22]등의 요지를 빼앗았다. 피성(避城)[23]은 적에게 너무 가까워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므로, 도로 주유로 돌아갔다. 다쿠쓰(田來津)가[24] 생각한 바와 같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2년, 백제가 금수를 보내옴 / 피성에서 주유성으로 다시 돌아감

(663년) 2월, 흠순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25]을 쳐서 빼앗고, 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쳐서 항복시키고, 덕안성(德安城)을 쳐서 1,070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권6 <문무왕 본기> 백제 거열성을 빼앗다

또한 웅진성과 사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은 백제부흥군을 공격하는데, 유인궤, 유인원 등이 진현성을 함락시킨다. 백제부흥군은 서로 단결해도 모자랄 상황에 도침, 복신 등의 다툼으로 내분이 벌어졌고 복신이 도침을 죽였다. 이 기회를 틈타 유인궤는 신라와 연합해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을 공격했고 백제 부흥군은 왜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용삭 3년(서기 663)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부흥을 도모하였다. 그 두목은 두솔성(豆率城)에 웅거하면서 왜(倭)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지원을 삼으려고 하였다. 대왕이 직접 유신인문천존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 길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42 <김유신 열전> 2권 ##

3.2. 상륙한 왜군, 신라를 위협하다

왜국은 이 상황을 지켜보다 도움을 요청받자 구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이를 주도한 자는 사이메이 덴노와 나카노오오에 황태자로 사이메이 덴노가 후쿠오카에서 준비를 하는 도중 사망하자 나카노오오에 황태자는 즉위식을 미루고 병력부터 파견할 정도로 중시했다.[26]

663년 3월에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를 비롯한 장수들과 27,000명에 달하는 왜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게 된다. 이때 왜군은 전(前), 중(中), 후(後)군으로 나뉘어 출병했는데 한꺼번에 상륙한 것이 아닌 전군이 먼저 상륙해 기반을 닦으면 이후 중군과 후군이 도착하는 방식이었다. 한편,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일본서기》에는 왜국의 이누카미노키미(犬上君) 가문의 사람이 고구려에게 출병 사실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생각해보면 고구려-백제-왜 간의 긴밀한 군사적 협의가 있었음을 추측해볼수 있다. 이들은 석성(石城)[27]에서 부여풍으로 추정되는 규해를 만나고 귀실복신(鬼室福信)과의 갈등을 듣게 된다.

그리고 3개월후인 662년 6월에 선발대였던 전군(前軍)에 의한 백제 지원 작전이 시작된다. 첫 시작은 사비(沙鼻)[28], 기노강(岐奴江)[29]를 함락시키며 신라의 수도인 경주 근방에 도달하는데 성공[30]한다. 그리고 이 시기 사실상 실권자였던 귀실복신부여풍이 반란죄를 엮어 처형시켜, 부여풍은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데 성공한다.

한편, 백제부흥운동 지도부의 갈등이 폭발해 귀실복신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라는 곧바로 백제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침공하려 준비하게 되는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부여풍은 이미 이 소식을 들었으며 오히려 10,000명에 달하는 왜의 중군이 도착한다며 부하들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3.3. 모든 것이 주류성으로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bwi1cKeHN1sqk8veo5_1280.png 파일:Battle of Baekgang map.jpg
신라는 중심부가 공격당했음에도 오히려 반격의 기회로 삼아 주류성 공격을 준비하자, 당고종도 이에 호응하여 추가 병력 파견을 준비한다.
663년 5월, 당 황제가 조칙을 내려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에게 병사 400,000명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였다. 그는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진군하였다.
삼국사기》 권27 <문무왕 본기> 3년
유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淄)ㆍ청(靑)ㆍ내(萊)ㆍ해(海)의 병사 7,000명을 징발하고,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병사를 통솔해 바다를 건너 인원의 병사를 도와주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당나라가 40만 대군을 동원했다는 <신라본기>의 기록은 <백제본기>와 사료 교차검증을 해 보면 호왈 40만으로 확인되며,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당나라 병력은 많아봐야 7,000~20,000명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31] 한편 신라는 김유신을 위시한 28명 혹은 30명에 달하는 장수들이 참가한, 사실상 신라의 모든 병력을 끌어 모아 출전했으며 8월 17일, 170척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온 당군과 합류해 한발 앞서 백강에 도착하여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였다.
무술(17일)에 적장(賊將)이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戰船)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白村江;하쿠스키노에)에 진을 쳤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주유성이 포위되고 당의 군사들이 백촌강에 진을 침

8월 17일 신당군이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며 170여척의 당 수군은 백강구에 이르러 육군에 공급할 식량을 하역한 후, 진을 치고 바다로부터 주류성을 구원하려는 적병, 즉 왜병을 대비하고 있었다. 27일 왜 수군이 백강구에 도달하여 주류성에서 온 일부 왜군 및 부흥군과 합세하였다.
노태돈. 《삼국통일사연구》 中

한편 8월 13일, 부여풍이 기다리던 1,000척에 달하는 왜의 지원군이 도착해 백제부흥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주류성 밖에서 포진, 나당연합군의 진격을 막고자 했다.

그리고 8월 17일, 나당연합군의 선봉대였던 신라 기병대가 왜선이 정박한 항구를 수호하던 백제의 정예 기병대를 향해 돌격하며 백강 전투가 시작된다.

4. 양측의 편제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공격, 포위할 육군과, 육군의 금강 도강을 지원하고 왜 수군을 상대할 수군으로 나눠 편성하였다. 《구당서》에 의하면 문무왕이 신라 육군을, 손인사유인원(당나라)이 당 육군을 지휘했고, 유인궤와 두상(杜爽), 부여융이 당 수군을 지휘하고 해상 보급을 담당했다. 《구당서》나 《일본서기》에 신라 수군의 존재가 등장하지 않아 신라군은 기병대를 비롯해 육군이 주로 참여하고, 수상전은 당 수군이 대체로 전담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융이 수군에 편제된 것에 대해서 한밭대 심정보 교수는 백강 하구의 밀물과 썰물 물때, 요해처 같은 지리적 정보 제공 때문이라 보았다. 만약 백제 왕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유민들을 회유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게 목적이라면 육군에 편제해 주류성을 포위하는 게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5. 양측의 병력

이 전투에 참여한 병력에 대해서는 이상한 오해가 퍼져 있는데 이 전투에 당군 130,000명, 신라군 50,000명이라는 대병력이 참전하였으며, 백제는 겨우 5,000명, 왜국이 42,000명이라는 비교적 적은 병력을 동원하여 이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병력이 말이 안되는 것이 660년 사비성을 함락시킬 때 동원한 13만 대군은 의자왕을 붙잡은 뒤 얼마 안 있어 대부분 당으로 돌아갔다. 다시 백제에 대군을 파병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당시 고구려 정벌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수십만 대군을 고구려 원정에 동원한 당나라가 13만에 달하는 군사들을 또 다시 백제에 파병했으리라 보긴 어렵다.[32] 신라 역시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5만 명을 동원했지만 663년 백강 전투에도 5만 명을 참가시켰다는 명시적 기록은 없다. 백제부흥군은 풍왕이 복신을 죽여 지도부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던 것이지, 주력 병력은 건재한 상황이었다.

실제 사료에서 확인되는 병력은 다음과 같다.
왜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웹상에서 이설이 많은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3월에 와카코의 부대 27,000명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됐고, 8월에 다시 오미의 부대 10,000명을 부대를 백제에 파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중국측과 한국측 사료에 관련된 기록이 보이는 것은 8월 백강 전투뿐이다. 따라서 3월에 기록된 병력 27,000명이 실제로는 8월에 출전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만약 27,000명과 10,000명을 따로 파견했다면 37,000명이고, 여기에 《일본서기》 661년 9월에 보낸 병력 5,000명을 포함한 것이 바로 최대 추정치인 42,000명설이 나온 근거인 듯하다. 해외 사이트에서는 대부분 백강 전투의 왜군을 42,000명이라고 소개한다.[35]

아무튼 실제 전투는 동원된 함선의 숫자로 보았을 때, 그 질이 어땠는가와 별개로 백제-왜국 연합군의 병력 숫자가 나당연합군의 병력 숫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이 정도만 해도 임진왜란 이전까지 900년 동안 깨지지 않을 최대 규모의 일본 정규군이 참여한 대규모 전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보아도 백강 전투가 무려 23만 명이 참가한 대전(大戰)이었다고 보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참고로 나당연합군의 병력 수를 잘 보자. 어디서 많이 보던 숫자 아닌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은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동원한 숫자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면 백제군 5,000명의 비밀도 자연히 풀리는데 바로 계백 장군의 5,000명의 결사대. 즉 660년 나당연합군의 병력규모가 663년 백강 전투 병력으로 그대로 Ctrl+C, Ctrl+V 된 것이다.

어째서 이런 오해가 발생했는가 하면 660년 백제가 멸망당하기 직전 벌어진 마지막 전투는 사비성 전투인데, 연구자에 따라 사비성 전투를 '백강 전투' 라고도 불러서이다. 사비성이 백강 근처에 있었기 때문.# 혹은 기벌포 전투라고 칭하는 연구자도 있는데, 이러면 나당전쟁 당시에 있었던 676년 기벌포 전투와 헷갈린다.

당연히 이 660년 백강 전투는 663년 백강 전투와 이름도 같고 시기도 비슷해서 헷갈리기 쉬운데 인지도는 663년 백강 전투 쪽이 넘사벽이다. 660년 백제 최후의 전투는 사비성 전투로 불리건, 백강 전투로 불리건 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계백의 5,000 결사대가 뚫리자 백제가 멸망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부지기수. 이런 상황에서 660년 백강 전투 병력표를 663년 백강 전투 병력으로 자연스럽게 오해하여 663년 백강 전투를 20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 한번에 맞부딪힌 화끈한 전투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 전투에는 당, 신라, 백제, 왜국의 4개국이 동시 참여했으니 더욱 그렇게 볼 소지가 높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위에서 밝힌대로다.

6. 전개

6.1. 신라 정예기병의 기습

8월 17일, 나당연합군의 선봉대였던 신라의 기병대는 백강 인근 언덕 위에서 진을 치고 왜 선단을 호위하고 있던 백제의 정예기병을 향해 돌격했다. 이 '백제의 정예기병(精騎)'은 정예란 표현이 사용되었고, 언덕 위에서 왜국 함선을 수호하는 역할이라면 기병보단 보병이 어울리는 상황인데 기병이 있었다는 점에서 왜 수군을 맞이하러 나온 부여풍을 호위하는 근위 병력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아무튼 이 돌진에 백제는 패배해 물러나게 되었고, 상륙을 준비하던 왜 선단 또한 기항할 곳에 적군 육군이 들어차 모두 일단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백제 부흥군에게는 뼈아픈 패배였는데 첫째로 왜의 합류를 지연시킨 나당연합군 육군이 왜군을 신경쓰지 않고 주류성을 공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줬다는 점이다. 왜군이 여기 온 이유가 백제부흥군의 전시 수도 주류성을 구하러 온 것인데 시간 끌다 주류성이 떨어지면 왜군이 여기까지 바다 건너 온 것이 무의미해진다. 둘째로 주력군으로 활용될수 있던 왜군이 상륙조차 하지 못하고 후퇴했다는 점이다. 후술할 8월 27에 왜군이 결전을 서두른 것도 주류성을 빨리 구해야 하는 왜군의 상황도 있지만, 당장 본인들이 상륙할 곳이 마땅치 않아 물 위에서 불안한 상태로 떠 있어야 했던 상황 때문일 수 있다.[36]

6.2. 피비린내로 가득한 백강

8월 27일, 퇴각했던 왜군이 백강 하구에 다시금 출현한다. 의외로 왜 수군은 8월 27일과 28일 두 번 다 선제공격을 했다. 부흥군의 전시 수도인 주류성이 육군에 포위당한 상태에서 마음이 급한 것은 왜군 쪽이었기 때문. 왜군 수군 선발대가 당군을 상대로 도발을 하자, 이에 당군이 왜군을 향해 돌격하게 되고 왜군 선발대는 싸워봤지만 불리해서 퇴각했다.

하루가 지난 8월 28일, 일본군과 부여풍은 다시 나당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아마 나당연합군의 포위를 풀기 위해선 어떻게든 왜의 병력이 이들을 유인해 격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듯 한데 문제는 조급함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명 포위가 길어질수록 주류성은 버티기 힘든 상황에 이르게 될테기에 반드시 해야할 작전이었지만 기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어떻게든 공격만을 생각한 것이다.
8월 28일에 일본의 장군들과 백제왕이 기상을 살피지 않고, “우리가 선수를 친다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대오가 흔들린 일본 중군(中軍)의 병졸을 이끌고 다시 나아가 진열을 굳건히 하고 있는 대당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불길이 하늘을 덮었다는 묘사처럼 당 수군은 화공을 걸었고, 기상 상황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입한 왜 수군은 적벽대전의 조조군처럼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거기다 전, 중, 후군 중 중군만이 나가 싸웠다는 점도 백제-왜 연합군의 큰 실책이었다. 전 병력을 동원해도 모자랄 판에 부여풍을 비롯한 지휘부가 중군만을 이끌고 나섰다는 것은 앞서 부여풍-도침-복신이 서로 다퉜던 것처럼 지휘부 간의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이들은 견고하게 진이 쳐져있는 당군의 진영을 향해 돌격했는데, 전력을 다해도 승리 여부를 점칠 수 없던 전투에서 조급함, 갈등, 악화된 기상 등이 여러 겹치며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장을 스스로 만들어 버린 셈이 되었다.

백제-왜 연합군의 병력 중 부여풍이 이끄는 왜 수군 10,000명은 진을 짜고 기다리고 있던 당군을 향해 돌격했다. 당군은 이때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왜 수군의 양측을 포위한 후 그들을 둘러싼 진형을 구축했다. 총 4차에 걸친 혈전이 진행된 백강에서의 전투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바뀌게 된다. 유인궤의 당나라 수군은 수천 척[37]의 왜 선단을 포위하고 불화살을 쏘며 맹렬하게 공격했고 이에 당황한 왜 선단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으나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볼 수 있듯이 촘촘한 포위망을 푸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왜군은 뜨거운 불길과 당군의 돌격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만다.
인궤가 왜병을 백강 하구에서 만나 네 번 싸워 이기고 그 배 4,000척을 불태웠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 적의 무리는 크게 무너졌다.
신당서

부여풍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고립된 주류성에 들어갈 생각도 못 하고 남은 백제부흥군을 버리고 배를 타고 그대로 고구려로 도주하고 만다.[38] 그리고 왕을 잃은 여러 성들은 하나하나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항복했고, 9월 8일[39] 왕을 잃고도 일주일 넘도록 전시수도 주류성을 지키던 충승, 충지도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남아있는 백제군, 왜군을 거느리고 항복하고 만다. 아직 임존성의 지수신 등 일부 부흥군이 남아있었지만 공세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이상 패배는 시간 문제였고 결국 여기서도 흑치상지가 배신하며 성이 함락되자 이로써 700여년을 이어온 백제의 이름은 끊기게 되었다.
9월 신해삭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성(州柔城)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 이때 국인(國人)들이 “주유가 항복하였다. 사태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테례성(弖禮城;테레사시)에 가서 일본 장군들과 만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자.”고 말하였다. 그리고 먼저 침복기성(枕服岐城;시무부쿠기사시)에 가있던 처와 아이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 이 기사를 끝으로 백제부흥운동과 관련된 기록은 《일본서기》에서 사라진다.

7. 결과

이 전투로 인해 부여풍이 이끄는 백제부흥군 세력은 멸망했다. 살아남은 부여풍은 고구려로, 그 외에 부여자신 등 부흥군의 지도자들은 왜국으로 망명했고, 흑치상지사타상여 등은 당나라에 항복한다. 한편, 부여충승부여충지 등 주류성의 부흥군 주력은 문무왕이 거느리는 신라군에게 항복하였다. 백강 전투는 백제부흥운동의 끝을 알린 전투 중 하나이며, 당시 백제와 왜국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후 두 달 가량 버틴 임존성마저도 함락당하고, 지수신 역시 고구려로 도주하면서 독자적인 백제부흥운동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친당계열의 백제부흥운동으로 당의 기미국이라 할 수 있는 웅진도독부가 있었으나 당나라의 제어를 받는 형태라 온전한 부흥운동이라 하기도 어려웠고 이 역시 약 10년 후 나당전쟁으로 광탈했다.

한편, 일본 측 기록에서 '더 이상 조상무덤을 보러 못 가는구나.' 하고 한탄했다는 문구를 두고 대중역사학계에선 당연히 의문을 품었고 왜인이 백제를 조상이라 여겼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 대목은 당연히 백제를 떠나 왜국으로 망명하는 백제인들이 말한 것이다. 한탄 직후 바로 다음 문구가 일본의 제장들과 상의해보자는 구절이라서 한탄한 게 백제인들임을 알 수 있다.

이 전투 이후로 신라와 왜국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을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정반대로 《일본서기》 기록상 신라와 왜국은 서로 사신을 주고받는 횟수가 이전보다 크게 늘어난다. 백강 전투 이후 신라 사신 김동엄이 왜국에 파견된 후 곧 신라와 왜국 사이 국교가 재개되어, 8세기까지 외교교섭의 빈도수는 백제 때만큼 끈끈하지는 않았지만 후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잦고 활발했다. 이는 왜국과 신라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국 측은 백제 저항세력 수뇌부가 백강 전투로 완전히 무너졌으니 더 이상 백제 잔여 세력을 도와줘봐야 백제 부흥의 가능성이 없는데다가, 백제 저항세력에 이어 고구려까지 제거한 나당연합군이 이번엔 동맹의 한 축이던 왜국에도 쳐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규슈 지역 해안에 방어성을 쌓는 등, 혹여나 나당연합군이 왜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대비했다. 결국 실행되진 않았지만 <답설인귀서>에 의하면 당이 왜를 공격한단 명분으로 함선을 수리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 측의 설레발만도 아니었다. 신라 측 역시 이 전투 전후로 백제 잔여세력과 왜군을 정리한 직후 고구려, 그리고 결국 당나라와도 동맹을 깨고 싸우게 될 것을 차츰 확신할 여러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40] 그 전에 후방의 일본 방면으로부터의 위협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이런 신라와 일본의 우호관계는 나당전쟁을 거쳐, 8세기에 발해라는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해 신라와 당이 다시 화친할 때까지 계속된다.

8. 평가

에서 수만명의 군대가 대한해협을 건너올 정도로 거대했던 대규모 국제전이었지만, 단판 승부격으로 허무하게 끝난데다가 당시 흐름이었던 나당 연합의 선전이라는 큰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기에 대중적 인지도는 상당히 낮은 편. 국내 교과서에서도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수준이고[41] 일본 교과서에선 중국 정규군과 처음 격돌한 전쟁이기 때문인지 그나마 조금 더 길다. 이후 일본과 중국은 임진왜란, 청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싸움이 이어진다.
사실 백촌강 전투는 신라나 당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전투 중에 하나에 불과하였으나, 왜의 입장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가장 큰 규모의 병력(27,000명)을 해외에 동원한 전투였고, 그런 만큼 일본 열도 사회에 미친 영향도 크고 깊었다.8) 백촌강에서 왜가 唐에 패배했지만 그 후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주요 논점이었다.

8) 이근우 <백촌강 전투와 대마도> 《동북아문화연구》 , 34, 2013, 47쪽.
서영교 교수. <백강전투(白江戰鬪)와 신라(新羅)> 중(中)

충북대학교 양기석 교수는 당군이 일원적 지휘체계에 따라 훈련된 반면, 왜군은 정규군이 없고 단지 지방 호족 휘하에 소속된 사병적 성격의 군대였기 때문에 병력의 질적 차이도 컸다고 보았다. 전투 과정에서도 나당연합군은 진을 형성하고 일정한 전술에 따라 체계있게 움직인 데 비해 왜군 측은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된 《일본서기》를 봐도, 기상 상황이나 지리정보 같은 것도 신경쓰지 않는데다 돌진해서 근접전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개별 전투에서는 강하지만 진형을 갖춘 대규모 전투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것. 중국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손자병법》이 나와 애독서가 되는 등 전술을 오래 갈고 닦아왔고 일본은 아직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단계였기 때문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42]

그리고 백강 전투의 패배로 인해 백제 부흥군이 몰락하면서, 고구려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우게 된다. 더 이상 남쪽에서 신라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져버렸기 때문. 이로 인해 고구려는 남쪽의 신라와 서쪽의 당나라라는 본격적인 양면전선을 강요당하게 되고, 백강 전투 5년 후인 668년 멸망한다.[43]

9. 창작물에서

한중일 모두 관련된 최초의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달리 전투 1번에 끝난데다, 결국 실패해서 정세를 바꾸지 못했고[44] 기록 자체도 적은 편이라 대중매체로 나온 건 적다. 한중일 모두 백강 전투보단 메인 포커스를 다른 쪽으로 다루기 때문에 백강 전투가 나오더라도 잠깐 언급하거나, 짧게 때우는 수준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사극 쪽에서는 삼국통일전쟁을 다루는 매체에서도 대충 표현하고 바로 고구려 멸망 쪽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차라리 창작물보단 교과서나 역사서가 오히려 백제부흥운동과 백강 전투를 더 자세히 다루는 상황.

일본에서는 최초의 해외파병이자, 최초의 한중일 대격전이지만 패전으로 끝났기 때문인지 백강 전투를 메인으로 다룬 창작물은 없다. 중국은 워낙 전쟁이 많아서 한국의 삼국통일전쟁기 자체가 마이너하지만, 그 중에서도 차라리 고구려와의 대결전 쪽에 관심이 모아지는 편이라 백제와의 결전, 백강 전투 쪽은 짧게 넘어가거나 아얘 생략된다. 중국의 수많은 사극 중에서도 백강 전투를 언급도 안 하거나 간단하게 재현하는 거 말고, 최소 5분 이상 재현해 준 사극은 현재까지 없다.

9.1. <삼국기>

<삼국기> 이래 삼국통일전쟁을 다루는 사극이나 영화 등이 제법 등장했지만, 어쨌든 백제부흥운동을 가장 최초로 다룬 사극이 <삼국기>이다보니 이 드라마에도 백강전투가 등장하기는 등장한다. 다만, 시대의 한계 때문에 백강 전투 자체는 정말 짧게 등장한다. 당시 사극에서 해전이나 수전은 제대로 연출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45] 세트장에서 배 두 척이 서로 충각 상태로 부딪치고, 선상 백병전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전투는 끝이다.[46] 대신 드라마에서는 백제부흥군 지원을 위한 야마토 조정의 노력에 상당부분이 할애된다. 오히려 이런 내용은 아래 서술된 <대왕의 꿈>보다 디테일하다.

9.2. <대왕의 꿈>

드라마 최후반부인 68화에서 등장. 한국 사극 사상 유례없는 고대의 수상전을 묘사하였으며, 이제껏 사극 속 수상전에서 흔치 않았던 충각 전술과 갈고리 전술, 투석기 활용, 수상 화공 등 시청자들의 갈증을 풀어줄 실감나는 수상 전투 장면들과 동시에 병행된 백병전까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볼만한 전투였다는 평까지 나올 정도였다. 반면 배 2척을 세워놓은 것이 티가 날 정도로 빈약하며, CG의 규모도 작아서 1,000여 척에 이르는 일본군의 함대 규모를 살리지 못했다는 평도 있다. 사실 한국 사극에서 초반은 그럴듯하다 후반부가 부실해지는 건 워낙 고질적인 병폐라 드라마 막판에 이 정도로 묘사한 것도 이례적이다.

왜 조정에서 백제를 돕기 위해 전선 1,000척, 군사 27,000명을 파견했다고 하며, 당군은 손인사가 이끄는 170척으로 웅진도독부로 향한다. 백제 부흥군에서는 부여풍은 부여충승에게 당군의 배보다 군량미와 병장기를 실은 일본군의 배가 먼저 도착할 것이니 일본군의 배를 맞이하라고 하는데, 충숭은 당군이 덕물도에 당도했고 신라도 사비에 군사를 파견했음을 이야기하며 대비해야 한다고 하지만 부여풍은 이를 가볍게 여긴다.
나당연합군에서는 김유신은 부여풍이 일본군과 합세한 후에 사비성으로 진격할 것이고 그 전에 주류성을 함락해야 한다고 했다. 당의 유인원은 일본군이 어디로 들어올지 모른다면서 주류성을 공격하기 위해 사비를 비운다면 오히려 허를 찌를 수 없다고 우려를 표한다. 김유신은 기벌포로 들어와 백강 하류에 상륙해 일본군과 합세할 것이며, 저들은 먼 뱃길로 지쳤을 것이니, 상륙하기 전에 수전으로 공격하고 철기병을 앞세워 부여풍의 군사들을 공격하면서 저들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 와중에 군량미를 실은 일본군의 선발대가 백강 하구로 상륙해 백제 부흥군에게 병장기, 군량미 등을 보급하며, 부여풍은 충숭에게 일본군의 본대와 합류해 그들을 지휘해 백강 하구로 상륙할 것을 지시하면서 부여풍 자신은 일본군의 군사를 맞이했다가 사비를 공격하기로 하면서 군대를 둘로 나눈다. 부여충승은 일본군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백강을 건너려 했지만 후방에서 유인원이 이끄는 당군의 배가 나타나 화살을 쏘자 부여충승이 이끄는 일본군은 승산이 없다고 여겨 퇴각하기로 하며, 당군은 추격해 화살을 날리지만 일본군의 배의 속도가 매우 빨라 별다른 피해도 주지 못한다.
문무왕이 군율을 세우기 위해 나당연합군의 지휘권을 김유신에게 맡기기로 하고 당군들에게도 김유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자 당군도 응했으며,[47] 다음날 김유신은 회의를 소집해 주류성에서 나오는 부여풍이 기벌포로 나온 일본군의 함대와 백강 하류에 합세할 것이니, 문무왕, 손인사 등에게 이들을 격퇴시키라고 한다. 유인원에게는 신라 수군과 합세해 전선들이 상륙하는 것을 막고 강 위에서 괴멸시켜야 한다고 했으며, 유인원은 자신들의 배는 170척뿐이니 적선 1,000척을 저지할 수 있겠냐고 우려한다. 김유신은 병력이나 배가 많지만 물때와 바람이 낯설다는 점을 이용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 하며, 김예원, 김양도, 김삼광에는 유인원의 배에 승선하게 하고 유인궤에게는 사비성을 지키게 한다.
유인원이 이끄는 당군의 배는 백강으로 진격하는 부여충승,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이끄는 일본군을 기다리다가 백강 하구의 육지에서 문무왕과 부여풍이 싸우는 것을 본 김유신이 당군의 배에 진격할 것을 지시하며, 이를 들은 당군의 배가 일본군의 배로 진격하자 서로 화살을 쏘면서 전투를 벌인다. 당군의 배가 일본군의 배를 그대로 들이받는데, 김유신은 일본군의 배는 날렵하고 빠르지만 선체가 작고 목재가 물러 당군의 배가 부딪히면 좌초될 것이라 한다.
또한 일본군의 배 1,000척이 백강으로 들어오면 배를 돌리기가 어려워 당파 전술로 일본군의 배를 공격하면서 육지로 들어가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했으며, 당파 전술을 통해 일본군의 배를 좌초시키고 일본군의 배로 진입해 난전을 벌인다. 물때와 바람이 바뀌는 시각이 되자 짚더미, 기름항아리를 투척하며, 당군에서 일본군의 배에서 퇴각할 것을 명령하고 일본군의 배에서 모두 물러나자 불화살을 날려 일본군의 배를 모두 태운다.
부여충승은 싸우던 도중에 예원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화공으로 큰 피해를 입는 도중에 육지에서도 부여풍이 패해 물러나자 일본군은 육지에서 신라군이 날린 포차의 공격을 받으며, 일본군은 백 400여 척이 부서지는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9.3. 기타 작품

10. 기타

11. 전투 관련 기록

용삭 3년(서기 663)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孫仁師)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부성을 구원할 때, 신라의 병마도 역시 정벌에 참여하였다. 행군이 주류성 아래에 이르렀을 때 왜국의 수군이 와서 백제를 도우려 하였다. 왜선 1,000척이 백강(白江)에 머물러 있었고, 백제의 정예 기병들이 강가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들이 중국 군대의 선봉이 되어 먼저 강 언덕의 진지를 쳐부수니, 주류성은 대적할 용기를 잃고 곧바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권7 <문무왕 본기>#

용삭 3년(서기 663)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부흥을 도모하였다. 그 두목은 두솔성(豆率城)에 웅거하면서 왜(倭)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지원을 삼으려고 하였다. 대왕이 직접 유신ㆍ인문ㆍ천존ㆍ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 길에 올랐다. 그들은 웅진주(熊津州)에 가서 진수관(鎭守官) 유인원의 군사와 합세하여 8월 13일 두솔성에 이르렀다. 백제인들은 왜인과 함께 나와 진을 쳤는데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크게 깨뜨리니 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권42 <김유신 열전>#

인궤가 왜병을 백강 하구에서 만나 네 번 싸워 이기고 그 배 4,000척을 불태웠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 적의 무리는 크게 무너졌다. 풍장은 겨우 탈출하여 도망갔다. 그 보검(寶劍)을 빼앗았다. 위왕자(僞王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남녀와 왜인, 탐라국 사신을 거느리고 함께 항복하였다. 백제의 모든 성들이 모두 귀순하였다
구당서》 권 제199 열전 제149 동이

8월 무술일: 적의 장수가 주유[51]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당의 장수가 전선 170척을 거느리고 백촌강에 늘어섰다.
8월 무신일: 일본의 수군 중 처음 도착한 배들이 당의 수군과 만나 싸웠는데, 일본이 불리하여 물러났다. 당은 굳게 진을 치고 지켰다.
8월 기유일: 일본의 장수들이 백제왕(百濟王)과 더불어 날씨를 살피지 않고 서로 "우리들이 선두를 다투어 싸운다면 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 하였다. 다시 일본의 어지러운 대오(隊伍)와 중군(中軍)의 군졸들을 이끌고 나아가 굳게 진 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쳤다. 당(의 선박들)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의) 관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 타쿠츠(朴市 田來津)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이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고려로 도망했다.
9월 신해 초하루 정사: 백제의 주유성이 비로소 당에 항복했다. 이 때 나라 사람들이 서로 "주유가 항복하였으니, 일이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다만 대례성(弖禮城)에 가서 일본군의 장수들과 만나 서로 현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라고 침복기성(枕服岐城)에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1] 上毛野君 稚子. 직책은 전장군(前將軍).[2] 巨勢神前臣 譯語. 직책은 중장군(中將軍).[3] 阿倍引田臣 比邏夫. 직책은 후장군(後將軍).[4] 阿曇 比邏夫連[5] 狹井連 檳榔[6] 朴市秦造 田來津[7] 間人連 大蓋[8] 三輪君 根麻呂[9] 大宅臣 鎌柄[10] 廬原君 臣.[11] 왜군 42,000명설은 661년 백제에 파견된 왜군 5,000명+《일본서기》 663년 3월 기사의 27,000명+8월 기사의 10,000명을 별개 병력으로 본 것이다.[12] 삼국사기에 백강 전투 당시 왜의 배 1,000척이 백강에 정박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3] 오늘날의 금강으로 보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으나 근래에는 동진강 설도 상당하다. 한편, 아산만 근처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14]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에서는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 왜군과 같이 싸웠다고 소개하고 있다.[15] 다만 탐라는 한•일•중 역사서에 모두 나오는 이 전투 관련 기록을 통틀어봐도 《구당서》 <유인궤 열전> 외엔 언급이 없고, 그 《구당서》에서도 제•왜연합군 잔병들이 항복할 때 탐라인도 같이 데리고 항복했다는 구절이 전부라, 이 전투에서 비중이 미미해 본격적으로 많은 병력을 보내 참여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앞서 662년에는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을 청했다는 모순적인 기록도 있어, 둘을 모두 인정할 경우 당시 탐라는 백제/왜와 신라/당이라는 양대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이후 나당전쟁 끝에 당나라까지 쫓아내고 한반도의 전란이 종료된 679년에 다시 한 번 탐라국을 경략한다.[16] 2번째는 임진왜란.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에도 2차 원정 때 강남군 10만 남송(한족)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몽골에 의해 파병된 군대지, 남송이 보낸 군대가 아니다.[17] 백촌강의 전투(싸움).[18] Báijiāngkǒu zhī zhàn, 백강구지전.[19] 경우에 따라 Battle of Hakusukinoe로 부르기도 하나 주된 명칭은 아니다.[20]일본서기덴지 덴노 원년##.[21] 노중국 교수는 이때 신라군의 본대가 현재의 거창군-함양군-남원시를 거쳐 주류성으로 진격한 것으로 추정했다.[22] 현재 위치는 불명이나 백제 5방 중 한곳인 덕안(德安)의 오기로 보고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으로 추정.[23] 전라북도 김제시.[24] 일본서기에는 백제 부흥군 정부가 주류성이 비좁고 길이 험해서 양식이 다하면 방어가 어렵다며 물자를 더 수월하게 얻을 수 있고 농사로 자급자족도 가능한 피성으로 거점을 옮기자고 했을 때 에치노 다쿠쓰만 주류성은 비좁고 길이 험하지만 군사적으로 천연의 요새이고 피성은 물자를 얻기는 쉬워도 적진과 하루 거리인데 당장의 굶주림을 피하자고 방어의 유리함을 버릴 수 없다고 반대했었다. 이후 에치노 다쿠쓰는 풍장이 백제로 돌아올 때에 호송을 맡았던 인물인데, 백강에서 왜군 함대가 처참하게 박살나는 꼴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맹세한 뒤 이를 갈며 적진에 뛰어들어 수십 명을 죽이고 전사했다고 한다.[25]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26] 백제가 망하면 나당연합군이 이번엔 왜국으로 쳐들어 올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따라 당군을 막기 위해 일본 최초의 성이 건설되기도 하는 등 본토에서도 대비를 했다.[27]부여군 석성면으로 추정하나 홍성군 장곡면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28]경상남도 김해시로 추정.[29]경상남도 의령군으로 추정.[30] 왜군이 어째서 백제 주류성으로 합류하지 않고 신라쪽으로 침공했는지는 여러 의견이 나뉜다. 3개월간 단 2개의 성밖에 취하지 못한 것이기에 왜군의 능력이 생각보다 형편없었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노태돈처럼 오히려 옛 백제지역의 소탕작전에 집중하고 있어 방비가 상대적으로 허술했던 신라 중심지를 공격해 시간을 벌 작전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31] 애초에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을 때 동원한 병력이 당 130,000명, 신라 50,000명이었으며, 당시에 13만 대군을 이끌었던 소정방과 손인사의 관직 차이를 보더라도 이 전투에 40만 대군이 동원되었을 가능성 및 손인사가 40만 대군을 이끌었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32] 그리고 백제 멸망 이듬해인 661년 평양성 근처에서 고구려에게 야전군단 하나가 지휘관까지 포함해 전멸해 버리는 바람에 당나라는 대병력을 파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33] 《자치통감》.[34] 한편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에는 40만명의 당나라 수군이 웅진부성에 도달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이는 호왈 40만으로 확인되며, 사료 교차검증을 해 보면 실제 동원된 당나라 병력은 많아봐야 20,000명 정도로 확인된다.[35] 당시 일본의 인구는 약 50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들 인구의 약 0.8%를 파병한 것이다. 2021년 기준 대다수 국가의 인구 대비 군인 비율은 0.3~0.8%이며, 대한민국이 약 1.1%이다. 근대 이전까지의 군대가 치안까지 담당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용할 수 있는 군대는 다 내보냈다는 뜻이며, 단순하게 숫자로만 따지면 인구 약 5000만명의 대한민국이 단 한 번에 42만명을 파병한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이 이 전쟁에 얼마나 사활을 걸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36] 현대 해군의 군함도 크기가 작은 경비정이면 황천이 심하면 버티기 힘들 정돈데, 고대 일본의 목선 수준에서야 기약 없이 떠 있다가 폭풍이라도 치면 원나라의 일본원정 때처럼 몰살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태다.[37]자치통감》에는 총 4,000여 척을 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38]신당서》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데 고구려로 도주했다는 카더라가 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유인궤전에는 백강 전투 직후에 유인궤가 올린 상주문에 “부여풍이 고구려로 도망가서 왜국에 있는 자기 동생 부여용과 내응하고 있다”는 언급이 있으며, 《자치통감》에서는 고구려 멸망 때 잡혀가 끌려간 포로 중에 부여풍의 이름이 나온다. 이로 인해 중국에 남게 된 부여풍의 후손인 여선재가 고려 때 귀국해 의령 여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부여풍장이 전투 직후 고구려로 도망쳤다고 분명히 명시한 것은 《일본서기》가 최초이다.[39] 《일본서기》에는 9월 7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0] 김문영 참수 소동, 웅진도독부 설치, 웅령 회맹, 취리산 회맹 등이 있다.[41] 동아시아사 과목에서는 나름 비중있게 언급된다.[42] 심지어 수백 년 뒤인 원나라의 일본원정에서도 구대륙 전체에서 갈고 닦은 여몽연합군에 비해 일본의 전술이 투박하고 뒤떨어져 하카타 상륙 첫 날 일본군이 크게 패배했다. 이후 센고쿠 시대 내내 전투경험을 쌓고 나서야 동아시아 본토 이상의 전술을 구사하게 되었다.[43] 다만 고구려의 멸망 원인은 대막리지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해 버린 것이 가장 크다.[44] 완전히 생략해도 백제 멸망부터 나당전쟁까지 전체 흐름 이해에는 별 문제가 없다.[45] 본격적인 해전이 등장한 최초의 드라마는 <태조 왕건>이다. <태조 왕건> 이후부터 드라마에서는 "제대로 물 위에서, 배 위에서" 찍은 전투장면을 볼 수 있었다.[46] 전투장면 자체는 딱 5초 정도 나온다.[47] 손인사가 가장 먼저 문무왕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유인원 등 나머지 당군 장수들도 응했는데, 이는 손인사를 천거한 소정방이 그에게 "승전하려면 김유신의 지휘를 따라라"고 귀띔해 줬기 때문이다.[48] 훗날 한재규는 《환단고기》를 접한 후 환빠로 흑화해 관련 만화를 그렸다.[49] 당에 의해 설치된 웅진도독부통일신라 이후.[50] 중국 25사에 기록된 장수들의 업적을 여러 문헌을 토대로 간략히 적어 놓은 위인집이다. 상중하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51] 백제 부흥군의 근거지인 주류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