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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 전투 蛇水 戰鬪 사수 대첩 | 蛇水 大捷 | ||
<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연개소문의 사수싸움. 정영렬. 1975년 작 | ||
시기 | 662년 (보장왕 21년) 음력 2월 18일 | |
장소 | 고구려, 사수[1] | |
원인 | 제2차 고당전쟁 중, 당군의 평양성 포위. | |
교전국 | <rowcolor=black> 고려 (공세) 승 | 당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연개소문 (대막리지) | 지휘관 방효태 (옥저도행군총관) † |
참가자 연남생 (막리지) | 참가자 소정방 (평양도행군총관) 임아상 (패강도행군총관) † 정명진 (누방도행군총관) †[2][3] 소사업 (부여도행군총관) 글필하력 (요동도행군총관) |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4]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옥저도행군 전멸[5] 패강도행군 전멸 |
결과 | 고구려의 대승 -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의 포위 해제 | |
영향 | 당의 對 고구려 군사작전 잠정중단[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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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二十一年, 春正月, 左驍衞將軍·白州刺史·沃沮道㧾管龐孝泰, 與蓋蘇文戰於虵水之上, 舉軍沒, 與其子十三人皆戰死. 蘇定方圍平壤, 㑹大雪, 解而退. 凡前後之行, 皆無大功而退.
662년 봄 정월, 당나라의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 방효태(龐孝泰)가 연개소문과 사수(蛇水)강변에서 싸웠다. (당의) 전군이 죽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도 전사했다. 소정방이 평양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해제하고 군대를 물렸다. 물러남에 앞뒤의 행군 모두 큰 공이 없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662년(보장왕 21년), 고구려의 사수에서 벌어져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을 마무리하는 대전이다.662년 봄 정월, 당나라의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 방효태(龐孝泰)가 연개소문과 사수(蛇水)강변에서 싸웠다. (당의) 전군이 죽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도 전사했다. 소정방이 평양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해제하고 군대를 물렸다. 물러남에 앞뒤의 행군 모두 큰 공이 없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방효태를 위시한 옥저도행군과 임아상을 위시한 패강도행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2. 배경
660년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661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평양으로 대군을 보냈다. 임아상을 패강도행군, 글필하력을 요동도행군, 소정방을 평양도행군, 소사업을 부여도행군, 방효태를 옥저도행군, 정명진을 누방도행군의 지휘관으로 삼아서 영남 수군, 돌궐과 위구르의 기병 등이 포함된 35군을 함께 육지와 바다로 나누어 공격하게 했다.당나라는 이전의 패배를 교훈삼아서 요동 방어선에서의 전면전을 피하고, 이를 우회하여 평양에 상륙하여 포위하고 압록수에 들이닥치는 등 고구려의 중심부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소정방을 중심으로 평양성에 접근한 당군은 평양성의 방벽을 뚫지 못했고, 소사업, 글필하력[7]은 육로로 진군하다 퇴각했다.
이에 따라 패강도행군과 옥저도행군, 남쪽의 신라군 보급부대는 평양도행군을 돕기 위해 평양으로 급속히 진군했는데, 그 과정에서 패강도행군과 옥저도행군이 평양성을 지키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군과 싸운 것이 사수 전투이다.
3. 전개
발석거로 사수의 얼음을 깨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을 꼼짝 못하게 한 뒤, 연개소문은 패강도행군을 급습해 임아상이 난전 중 전사했다.[8]옥저도행군의 총사령관인 방효태는 영남의 수군을 이끌고 사수에 진영을 쳤는데, 연개소문이 사수 언덕에서 방효태에 맞서 싸웠으며, 방효태가 대패하면서 당군 수만 명이 전사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유백영이나 조계숙의 진영에 피신하기를 원했지만 자신이 끌고 온 영남 자제들이 모두 전멸했는데 혼자만 살 수 없다고 이를 거부하며 싸우다가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다.[9]
4. 결과
이 전투까지 당나라는 6개 도행군 가운데 절반[10]이 사령관을 잃었다.[11] 당고종의 요구로 고구려 영토 내로 진입해야 했던 신라군과 평양에서 해메던 소정방군은 적지에서 싸그리 몰살당할 대위기에 처했고, 고구려 입장에서는 지긋지긋한 전란을 단 한 번에 완전히 종결시켜버릴 기회를 얻었다고 할 정도로 고구려의 결정적인 승전이었다.하지만 여기서 김유신의 신라군은 놀라운 기동으로 고구려의 방위선을 우회한 뒤 폭설이 내린 날을 노려 소정방군을 압박하던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풀어냈고, 소정방은 신라가 지원해준 보급품을 받은 뒤 바로 퇴각했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군은 소정방과 김유신 양쪽을 추격했으나, 양쪽 모두에 치명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한 채로 격퇴하는 정도만 성공했다. 비록 당군에 대해서는 수뇌부의 절반을 공중분해시킨 수준의 대타격을 입혔으니 덜 아쉬웠겠지만, 신라군의 재치있는 대처로 인해 신라군의 수뇌부에 결정타를 날리지는 못한 점은 많이 아쉬웠을 듯 하다.
당나라에서는 소모전 전략에 이어 결정타를 날리려 했으나 이전부터 계속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전쟁 일체의 중단을 선언하게 되었으며, 웅진도독부에 대한 지배마저도 재고하고, 철군하거나 신라에 의탁하려 했다. 하지만 유인궤의 결사적인 반대로 인해 결국 웅진도독부의 유지를 결정하고, 이는 수년 뒤에 신의 한 수로 작용하게 된다. 마침내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끝내 수•당의 침공을 막아낸 고구려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명실상부한 지배자임을 증명했다.
5. 창작물
KBS 사극 <대조영>에서는 주인공 대조영의 활약을 강조하려다 보니 연개소문의 능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방효태가 사망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사령관은 설인귀로 묘사되고, 연개소문은 설인귀의 활에 맞아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SBS의 사극 <연개소문>에서는 98화 단 1화 만으로 묘사되었다. 전략, 전술이라고는 멍청한 적들이 대놓고 사지에 들어가는 매복, 기습, 수공, 그리고 날씨를 바꾸는 초능력만 묘사되는 드라마 특성상, 사수 전투 역시 수공으로 단 번에 대군을 몰살시키는 것으로 묘사되었다.[12] 그것도 살수 대첩의 공격 장면을 복붙한 것에 불과했다.
6. 관련 문서
[1] 현 북한 평양 인근을 흐르는 보통강 혹은 합장강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견은 있으나 이후 668년 사천 전투의 사천(蛇川)이 '사수'라고도 불리어 같은 강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 정명진의 진격로는 미상이나 누방도의 지명상 평양 인근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3] 최근에는 정명진 휘하 누방도행군의 행로를 신성 일대로 보며, 공략 실패 이후 글필하력의 요동도행군과 소사업의 부여도행군이 철군할 때 고구려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난전 중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가 있다.[4] 《삼국사절요》에는 사수에서의 최후 교전에서 죽은 방효태 군사만 수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5] 방효태가 지휘하던 옥저도행군의 규모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최후의 전투에서 수만 명이 전사하고, 행군이란 부대 편성이 최소 10,000명 이상인 건 분명한 사실이라 대군이었던 것은 확실하다.[6] 사실상 고구려 정복 자체를 원점 재검토하게 되었다.[7] 글필하력은 압록수에서 연남생의 군대를 대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 고종의 조서를 받고 퇴각했다.[8] 임아상은 당나라 초기의 유명한 재상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열전이 없고 고구려군과 패강도행군 간의 전투 과정 기록이 없다. 이는 패강도행군이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임아상은 연개소문에게 참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9] 이때의 광경을 묘사한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군이 방효태의 군대를 포위하고 화살을 비처럼 퍼부어서 방효태의 군대가 화살에 맞아 몰살당했다고 전해진다.[10] 패강도행군과 누방도행군, 옥저도행군[11] 병력의 99% 이상을 상실한 살수대첩에서도 사망한 지휘관은 신세웅 정도로, 당시 당군의 피해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12] 고구려군이 계속 후퇴를 하면서 당군을 사수로 유인했다. 이미 날이 밝았음에도 당군은 주변 지형을 정찰하지 않고, 안일하게 사수를 건너다가 일제히 몰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