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호왈백만(號曰百萬)은 백만대군이라 불렀다는 뜻이다.현대에는 주로 비현실적 대군이 등장하는 전근대 기록을 두고 근거가 부실하다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 언급한다.
2. 특징
적군을 쳐부순 공식 문서에는 하나를 열로 계산하는 관습이 있었으나, 국연은 싸움터에서 베어 노획한 적군의 목을 상주할 때, 그 실제적인 숫자와 똑같게 했다. 태조가 그 까닭을 묻자, 국연이 말했다.
"대체로 경계 밖의 도적을 정벌하고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숫자를 실제보다 많게 보고하는 것은 무공(武功)을 크게 하여 백성들의 귀에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하간은 봉토 구역 이내인데도 전은 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우리가 크게 이겨 공을 세웠더라도 저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국연을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옮겼다.
삼국지 권11 위서11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국연전.
"대체로 경계 밖의 도적을 정벌하고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숫자를 실제보다 많게 보고하는 것은 무공(武功)을 크게 하여 백성들의 귀에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하간은 봉토 구역 이내인데도 전은 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우리가 크게 이겨 공을 세웠더라도 저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국연을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옮겼다.
삼국지 권11 위서11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국연전.
전근대 동북아 기록에서는 병력의 수에 대해 호왈(號曰, 그렇게 불렀다)이라고 서술한 경우가 많다. 행정 체계가 빈약해서 보고를 재검증하기 어려웠기에 부르는 그대로 쓴 것이다. 삼국지에서도 "적국을 격파한 후 장수들이 올리는 공문서에 1명을 10명으로 세서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전투 이전에는 아군의 병력을 과장하는 것이 동요를 막고 적을 위협하는데 효과적이었으며, 전투 이후에는 적군의 병력을 과장하는 것이 명성을 높이고 공적을 키우는데 효과적이었다.
후대 역사서에서도 이를 특별히 재검증할 방법이 없는 이상 기록을 그대로 썼다. 사기에서는 "항우는 40만의 병력을 100만이라 호하였고, 패공(유방)은 10만의 병력을 20만이라 호하였다."라는 기록했는데, 초한전쟁 100년 뒤의 인물인 사마천이 찾아낸 기록이 그러해서 그대로 쓴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중국 전국시대의 전쟁이나 초한전쟁의 기록에서도 50만 100만 대군이 등장하지만, 현대 연구에서는 실제 병력이 그보다 작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비수대전의 기록에서 언급되는 병력도 실제는 백만에 못 미쳤을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서양에서도 검증이 어려운 고대 전투에서 병력 과장이 발견된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페르시아군 470만 명, 가우가멜라 전투의 페르시아군 100만 명, 헤이스팅스 전투의 잉글랜드군 120만 명 등 당시 여건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록이 발견된다. 현대에 전투 유적지를 발굴해보면 병사 유골과 무기의 규모가 기록보다 훨씬 적은 경우가 허다하다.
실질적인 백만대군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들어서 가능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군이 철도를 이용해 9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는데 성공하면서 백만 단위의 전쟁이 현실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강대국 간의 총력전이 일어나면서 양측 모두 백만을 크게 넘는 병력을 동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3. 전근대 백만대군이 어려운 이유
- 인구와 자원의 한계: 군대는 직접 식량과 물자를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뒷받침해 줄 인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 비하면 전근대 사회는 1인당 생산력이 매우 낮고 그 성장세가 오래 정체되어 있었다. 건장한 청년이 농사를 짓지 않고, 오히려 그를 먹이고 입히기 위해 다른 청년들까지 붙여주는 일은 잉여 생산물이 넉넉하지 않은 전근대 사회에서 큰 부담이었다. 무리하게 병력을 일으키거나 큰 손실을 입으면 충격을 회복하는데 수십 년 이상이 소요됐다. 중화제국조차 각자의 상비군에 들어가는 예산에 늘 압박을 느꼈고, 잘못된 전투로 수만 명의 병력을 잃으면 큰 위기를 겪었다. 인구 1억의 명나라가 사르후 전투에서 9만 명을 손실한 것으로도 국력이 크게 쇠하고 멸망으로 이어졌다.
십만도 국운을 걸어야 하는데 백만은 동원한 것만으로도 나라가 망할 숫자였다. 중국 전국시대 장평대전에서 진나라와 조나라가 동원한 병력 기록을 합산하면 110만 이상이 되는데, 기원전 3세기 중국 인구는 약 2~3,000만 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니 인구의 5% 정도를 끌어썼다는 말이 된다. 당시 국가가 그만한 동원력을 가졌다고 해석하기보다는, 기록의 잘못이나 과장이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 때문에 고구려-수 전쟁도 곧잘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이쪽은 기록이 너무 상세하게 되어 있는지라 일단은 100만 대군을 넘겼다는 게 정설로 취급된다. 거기에 이후 벌어진 수나라의 상황도 위의 우려와 같이 인과관계가 딱 맞게 떨어지는지라 이런 반박이 나오기도 했다.
- 비전투 병력 등의 합산: 당시 기록에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비전투 병력까지 합산된 경우가 많았다. 전근대에는 전투병 외에 보급 인원, 군속, 노예/노비/시종, 상인 등은 기본에, 경우에 따라서는 심지어 포주/창녀와 군인 가족까지 다수의 비전투 병력 및 민간인들이 군대와 같이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묵자에는 "만일 군사를 일으킨다면 군자가 수백이요, 서민이 반드시 또 수천이며 인부가 십만의 곱절이 된 뒤에야 충분히 출병할 수 있으리라"는 구절이 있고, 사기에 따르면 장의는 한선혜왕에게 "대왕의 군대는 모두 모아도 30만이 안 되며 그 중에는 잡부와 짐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방의 역참과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20만 명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했으며, 심괄의 몽계필담은 군사 10만을 출정시킬 때 30만의 군량 수송자가 필요하다고 썼다.# #
- 기록의 과장: 국가의 행정능력이 부족하거나, 관리들의 실적을 부풀러 보고되는 병력들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중국 전근대 경제력의 황금기라고 평가받는 송나라는 서류상 가용 병력이 100만 명을 넘었으나,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복무 중 상비군은 50만 명이 넘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재정 압박으로 더 적은 수의 병력만 전방에 있었다.[1] 몽골 제국도 전성기 때 장부상으로는 대략 160만 명의 대군이 있었으나 실제 병력은 그보다 적었다.
- 통신 수단의 한계: 대군을 통제하려면 계층적 조직과 신속한 명령 전달 체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전근대에는 깃발이나 전령 같은 제한된 통신 수단만 쓸 수 있었다. 많은 병력을 유기적으로 통제하고 지휘할 방법이 없으니, 훨씬 작은 병력 단위의 부대가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병참 보급의 문제: 전근대 사회에서는 교통이 열악했고 대규모 물자 수송 수단이 부족했다. 특히 식량은 부피가 크고 무게가 무거워 소수의 중심지[2]를 제외하면 지역에서 생산해 소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군대는 대규모의 인원을 한 장소에 모아야 하므로 지역의 식량 공급 체계에 큰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병력이 수천 명만 되어도 현지 조달에 어려움이 생기고, 수만 명이 모이면 외부에서 보급을 연결할 육로와 수로를 유지하기 위해 늘 고민해야 했다.
한서 조충국전(趙充國傳)에 따르면 보병이 움직이는 것만으로 매일 최소 0.8kg의 곡물이 들어간다.[3] 십만 명이면 매일 최소 약 100톤[4], 백만 명이면 매일 최소 1,000톤이 필요한 셈이다. 전투나 공사처럼 힘 쓰는 일을 시키면 더 많이[5] 먹여야 한다. 소와 말 역시 먹이를 운반해야 한다. 기록에 따르면 말 1필이 먹는 양은 6인 가정이 먹는 양과 같으니, 매일 곡물 6kg 이상을 먹여야 한다.[6] 건초는 열량이 낮아 더 많은 무게가 필요하다. 위진남북조시대에서 소나 말이 끄는 수레의 운송량은 540kg 정도로, 말몰이꾼 한 명과 말 한 마리가 한 달 거리를 오가는데 수레의 곡식을 대부분 먹어야 한다. 소모되는 의복과 장구류, 무기류 등을 보충하려면 물류 부담은 더 늘어난다. 수레 한두 대가 지나갈 육로로는 그만한 물자가 지나갈 수 없고, 수로를 따라가더라도 여전히 힘든 규모이다.
- 전장의 공간적 제약: 한 장소에 수천 수만 명을 모으려고 해도 상당히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하물며 진짜 백만 명이 전장에 배치되려면 밀집 대형을 짜는 냉병기 시대임을 감안해도 최소 수 ㎢의 면적이 필요하다. 개발되지 않은 야지에서는 산/강/숲과 같은 지형으로 인해, 개발된 곳은 된 곳대로 시가지 등 인공 구조물로 인해 제약이 따른다. 백만대군이 모여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곳은 현실에서 찾기 어렵다.
[1] 북송에선 사회 복지적인 측면에서 극빈층을 구휼하는 제도로써 군대가 사용되었기에 서류상 병력, 상비군 규모만 컸지 이걸 실제 총전력으로 보기엔 좀 힘들긴 하다.[2]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바그다드, 장안, 개봉 같은 전근대의 대도시들도 백만 단위 인구는 전성기 때나 겨우 가능한 수치였다.[3] 곡물만 이 정도이고, 각종 부식품은 물론 현대의 기준과 같이 풍요롭지는 못했을망정 또 별도다. 백미 기준으로 100g당 열량이 약 350kcal이니, 깨끗이 도정된 건조 곡물 0.8kg이면 약 2800kcal이다. 전근대인이 현대인에 비해 체구와 대사량이 작았을 것을 감안해도, 무거운 완전 군장을 지고 하루 종일 행군하려면 못해도 일일 3000kcal 이상은 필요했다. 심지어 저 0.8kg의 곡물은 보관 문제로 인해 도정된 곡물도 아니고 겨가 제거되지 않은 통곡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급된 곡물에서 얻을 수 있는 열량은 2800kcal보다도 최소 수백 kcal 낮았을 것이다. 이러면 부식을 통해 최소 약 500kcal~1000kcal는 공급되어야 식량 부족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을 수 있다.[4] 후대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소련군에게 포위된 독일 제6군의 25만여 명 병력들을 유지하기 위해선 식량만 하루 최소 약 300톤의 공중 보급이 필요했다고 하니, 고대의 식량 보급 소요와도 얼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식량은 포위망 내부의 1달 비축분으로 버틴다 치고, 연료와 탄약이 도합 일일 최소 300톤은 필요하여 산출한 보급량이 한달 간 일일 최소 300톤, 권장 600톤이었다. 여기에 공세와 같이 연료와 탄약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작전 행동을 벌이면 당연히 보급 소요량은 더더 늘어났을 것이다.[5] 그것도 가능하면 지방 및 당류와 단백질과 알코올을 추가 공급해야 했다. 추가적 무게와 보관/운송 중 변질 위험성은 둘째 치더라도, 당연히 원가도 곡식보다 비싸다.[6] (≪鹽鐵論⋅散不足≫: “夫一馬伏櫪, 當中家六口之食, 亡丁男一人之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