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성어 | |||
號 | 曰 | 百 | 萬 |
부르짖을 호 | 말할 왈 | 일백 백 | 일만 만 |
1. 개요
백만을 부르짖는다는 뜻의 사자성어. 실상보다 수를 과장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허장성세, 뻥튀기, 블러핑.뜻 그대로 직역하자면 자신들에게는 백만대군이 있다며 자랑하기만 할 뿐인 것이다.
2. 특징
2.1. 호왈백만의 이유
이세환 기자: (별무반의 수가 17만이었는데,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20만이라고 이야기했었고요, 원정 끝난 기념비에는 30만이라고 적었습니다. 계속 수가 늘어나죠?
허준: 예전에 뭐 중국 원나라(의 병력)와 비교하면 ⅓에 육박하는 숫자가...
임용한 교수: 중국에 비하면 우리는 참 뻥이 작아. 중국이었으면 (17만을) 100만이라고 썼어.
이세환 기자: 제가 항상 말했죠. 중국 역사서에서 군사 수는 항상 0 하나는 더 들어간다고.
『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려 vs 여진 2부 中 5분 54초부터
상당수 역사서에 적힌 당시 군대의 숫자가 보급대 등 비전투 병력까지 포함시키거나 뻥튀기한 것으로 의심받는 경우가 많다 보니 주로 비꼬는 의미로 쓰인다. 다만 이렇게만 보면 부정적인 단어 같지만, 고대 전쟁에서 병력 수를 부풀려 말하는 것은[1] 단순히 크고 아름다운 걸 좋아해서가 아니라 대병력이라는 위압감을 줘서 상대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전의를 떨어뜨리려는 목적이 있었다.[2] 그리고 무조건 백만으로만 부풀리는 것도 아니고, 실제 병력이 좀 적어서 척 봐도 백만이 아니다 싶을 땐 수십만 정도로 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정말 백만대군을 동원해냈다면 2백만, 3백만으로 뻥튀기를 해서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백만대군을 동원한 경우가 매우 흔치 않을 뿐이다.허준: 예전에 뭐 중국 원나라(의 병력)와 비교하면 ⅓에 육박하는 숫자가...
임용한 교수: 중국에 비하면 우리는 참 뻥이 작아. 중국이었으면 (17만을) 100만이라고 썼어.
이세환 기자: 제가 항상 말했죠. 중국 역사서에서 군사 수는 항상 0 하나는 더 들어간다고.
『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려 vs 여진 2부 中 5분 54초부터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근현대 이전의 역사를 보면 백만 혹은 그에 준하는 거대한 군세를 동원했다고 주장하면 되려 패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전근대의 국력으로 백만대군을 유지하기에는 부담이 심한 것도 있고, 통신수단도 발달하지 않던 시절이라 대병력을 지휘하기 어려운 것도 있는 듯하다. 군담소설 같은 데서는 더더욱 사망 플래그에 가까운 취급이다. 아무래도 단순히 병력 우위를 앞세워 밀어버리기보단 뭔가 계략을 짜거나 장수가 활약해서 적의 대병력을 박살내는 게 전개상으로 더 재미있으니까 백만 혹은 그에 준하는 대군을 동원하는 쪽은 대개 승리보다는 패배하는 쪽이 되는 것이다.
2.2. 호왈백만의 실상
보통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병력의 수를 "호왈(병력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삼국지에서도 "실제로 적국을 격파한 후 장수들이 올리는 공식 장계(공문서)에는 1명을 10명으로 세서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적군을 쳐부순 공식 문서에는 하나를 열로 계산하는 관습이 있었으나, 국연은 싸움터에서 베어 노획한 적군의 목을 상주할 때, 그 실제적인 숫자와 똑같게 했다. 태조가 그 까닭을 묻자, 국연이 말했다.
"대체로 경계 밖의 도적을 정벌하고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숫자를 실제보다 많게 보고하는 것은 무공(武功)을 크게 하여 백성들의 귀에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하간은 봉토 구역 이내인데도 전은 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우리가 크게 이겨 공을 세웠더라도 저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국연을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옮겼다.
삼국지 권11 위서11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국연전.
이 밖에도 중국 전국시대의 전쟁이나 초한전쟁의 경우에도 50만이니, 100만이니 하는 수가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작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표적으로 100만 대군을 동원한 기록 중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때와 비수대전 때 전진이 동원한 병력은 현대에는 실제 원정군이 백만은 안 되었다는 추정이 많다.[3]"대체로 경계 밖의 도적을 정벌하고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숫자를 실제보다 많게 보고하는 것은 무공(武功)을 크게 하여 백성들의 귀에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하간은 봉토 구역 이내인데도 전은 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우리가 크게 이겨 공을 세웠더라도 저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국연을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옮겼다.
삼국지 권11 위서11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국연전.
흔히 중국이 이 분야에서 유명하지만, 서양에서도 0의 갯수가 바뀌는 식의 병력 과장이 종종 발견된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페르시아군 470만 명, 가우가멜라 전투의 페르시아군 100만 명, 헤이스팅스 전투의 잉글랜드군 120만 명 등이 대표적이다. 문서 상단에 언급된 고려 별무반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가장 압권인 건 미얀마의 유리궁 연대기인데, 코끼리만 3,600만 마리, 병력은 1의 뒤에 0이 42개 들어간 숫자라고...
당연히 역사서를 기술하는 편찬자들의 경우 정치적인 의도나, 의도적인 깎아내림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왜곡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기록이 그렇게 남아 있기 때문에 작성한 것이다. 사기의 홍문연과 관련된 기록 중 "항우는 40만의 병력을 100만이라 호하였고, 패공(유방)은 10만의 병력을 20만이라 호하였다."라는 기록도 남아있는데 이 기록의 경우에도 40만의 병력이 실제 또는 거짓이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다만, 그 시대의 기록들에 그렇게 남아 있으니 사마천도 그렇게 작성한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2.3. 전근대에 실제 '백만대군'이 불가능한 이유
- 인구 및 자원 한계: 당연한 얘기로 백만 명의 군대를 유지하려면 최소 1,0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필요하지만 현대전만 해도 전 인구의 몇%만 병력으로 동원해도 나라의 근간이 휘청이는데, 당시 농업 생산력과 인구 구조를 고려할 때, 수천만 인구를 가진 제국이라도 전체 인구의 10% 이상을 군대로 동원하는 것은 경제와 사회 구조를 붕괴시킬 만큼 과도한 부담이다. 예를 들어, 중국 전국시대 장평대전에서 진나라와 조나라가 동원한 병력의 합산인 110만 이상의 병력은 실제 양측 합쳐 아무리 많아 봐야 20~30만 이하로 추정된다. 당시(기원전 3세기) 중국 인구는 약 2,000만 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국 전체로 봤을때 백만 병력은 전체 인구의 5%로, 이 정도만 되어도 그냥 당시 산업구조 상 물리적으로 동원 자체가 불가능했다. 또 당나라(당시 인구 약 5,000만 명 추정)가 고구려 원정 시 동원했다고 기록된 30만 병력조차도 실제론 10~15만 명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백만대군"은 상징적 수치로, 실제 전투 가능 병력은 기록의 10~30%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 '편제'와 '현장 동원'은 완전히 별개 문제: 당시에는 상술한 것처럼 단순 과장 말고도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치중대, 취사병 등 비전투 병력까지 합산됐다는 점 역시 감안해야 한다. 전근대 군대는 전투병 외에 민간인(군속 민간인·노예·잡상인 등등)이 포함되거나, "군적"에 등록된 이론적 수치를 기록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전기에 이론상 동원이 가능하리라 여겨지는 20만 정군 군역도 실제 전투병은 그 절반 미만이었고 실제로 유효한 정예병력(갑사)은 전성기에도 수만명 수준이었다. 묵자에는 "만일 군사를 일으킨다면 군자가 수백이요, 서민이 반드시 또 수천이며 인부가 십만의 곱절이 된 뒤에야 충분히 출병할 수 있으리라"는 구절이 있고, 사기에 따르면 장의는 한선혜왕에게 "대왕의 군대는 모두 모아도 30만이 안 되며 그 중에는 잡부와 짐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방의 역참과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20만 명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했으며, 심괄의 몽계필담에는 군사 10만을 출정시킬 때 30만의 군량 수송자가 필요하다는 기록이 전한다. # # 당장 기록 상 '국가에서 뽑아낼 수 있는 장정 군사 인력이 이 정도요' 하고 '전선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은 지금도 그렇지만 완전히 별개 얘기란 것이다.
- 애초에 편제 서류 자체가 뻥튀기: 중국 명나라 초기 군사제도인 위소제가 붕괴되었을 당시 말기 상황도 그렇고[4] 위에서 나온 후한 말 관리 국연의 사례도 그렇고 국가의 행정능력이 마비되거나 관리들의 실적 챙기기 등의 문제로 인해 이런 장부상 병력들이 정확하진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의외로 군대 규모가 큰 경우, 장부상 병력을 다 채우지 못한 사례가 많다.[5] 중국 전근대 경제력의 황금기라고 평가받는 송나라 시기에 전시에 가용할 수 있는 규모의 병력이 서류상으로는 100만 명이 넘었으나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복무중 상비군은 50만 명이 넘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워낙 송나라 정부가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감당해야하는 재정 부담 규모가 압도적이라 실제 전선에 보내는 병력은 이보다 소수의 정예만 꾸려서 보냈으며[6], 몽골 제국도 리즈 시절 때 장부상으로는 대략 160만 명의 대군이 있었으나 실제 병력은 그보다 적었고, 아는 게 좀 있는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 통신 수단의 한계: 백만 명의 군대를 통제하려면 계층적 조직과 신속한 명령 전달 체계가 필수적이지만, 당시에는 깃발·봉화·전령·전서구·군악대 등 제한된 통신 수단만 존재했다. 여러 대규모 부대의 실시간 협동은 사실상 불가능 했을 것이다. 무전기는 커녕 장거리 유선 통신 장치조차 없는 시절이기 때문에 병력을 현장 투입할 때 19세기 말 이후 시기마냥 국경 전선 단위로 넓게 포진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통신도 안 되는데 병력을 그렇게 넓게 흩뿌리면 통제 불가능이라 병력 와해되기 쉽상인 것이다. 병력의 수가 늘면 늘 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병력 통제의 난이도 역시 증가한다.[7] 결국 백만 전체 병력을 한덩어리로 굴리거나 대군을 수십만 덩어리로 나눠서 서너개 정도 개별군 덩어리로 굴려야 한다는 얘기인데, 무전기도 유선 통신 장치도 없는 시기에 지휘관들이 '수십만~수백만 이상'이 뭉탱이로 뭉쳐진 덩어리를 통제한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자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20만명은 식사 준비를 해야 하니 땔감을 캐오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20만명은 식수를 떠오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20만명은 식사하기 전에 용변을 미리 봐두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20만명은 취사병하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20만명은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보초를 서거라~' 당장 대한민국 국군에 복무하며 여러 훈련에 참가해 본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성이라면 현대의 훈련 수백~수천명 단위에서조차, 통신수단이 전근대보다 훨씬 양호함에도 이런 세부 전달사항이 제대로 전달 안 되어서 골머리를 앓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을것이다. 하물며 이런 통신 수단도 열악한 전근대에 수만~수백만 단위에서 상식적으로 지휘관이 통제가 가능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수십만, 백만이 한덩어리로 뭉쳐진 지역 현장 통제는 유선 통신 장치는 물론스마트폰무전기 PRC-96K 들고 다니는 21세기 대한민국 국군 지휘관들도 못한다. 이렇게 전선에 처음 수십만~수백만 대군을 동원한 제1차 세계대전 때만해도 통신 수단의 한계로 전선 통제가 제대로 안되어 작전이 엉망이 된 때가 허다하다.
- 병참, 보급의 문제: 현장 통제 문제에서부터가 현실적 불가능의 장벽인데 더해 여기에 보급도 문제다. 전근대 보급은 현장 징발(약탈, 외상 구매 등)이 담당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보급에서 현장 징발이 더 이상 불필요해진 시점은 19세기 말 철도, 트럭 등이 서구에서 보편화된 이후의 얘기이고. 당장 제도적으로 보급 기술의 진일보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 제국군도 막상 보급로 개발과 유지에 열을 올렸음에도 장기 원정에선 한계가 분명했으며[8], 보급에서 담당하는 비중에서 현장 징발이 상당히 컸다. 이 말은, 전근대에는 '현장에서 얼마만큼 징발할 수 있느냐'로 '해당 현장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 규모가 결정된다'는 말이고 갑자기 외지에서 새로 유입된 백만 단위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곳은 전근대의 가장 부유한 지역들 중에서도 극소수 내지는 사실상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9] 전근대 군대는 일종의 황충 같은 것이어서 한 지역에 집중된 병력은 지역 자원을 순식간에 고갈시키곤 했다.
일단 당장 소모되는 식량만 하더라도 병사 1명은 하루에 약 1kg의 식량이 필요하다. 백만 명이면 1,000톤/일의 식량이 필요하나, 당시 운송 수단(마차·가축)으로는 도로 정체와 식량 소비로 장거리 보급이 불가능했다. 몽골군도 기동성을 위해 10~20만 명 내외로 운영했다. 이렇게 병사 1인당 하루 1kg의 식량으로만 계산해도 백만 명은 연간 36만 톤 이상이 필요하다. 당연히 당시 운송 수단(마차, 선박)과 저장 기술로는 대량의 식량을 원거리에서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전쟁터는 인간에게 막대한 칼로리 요구량을 강요하는 극한 환경이다. 보병 한명은 하루에 최소 3000 kcal 이상을 소모하는데[10] 한서 조충국전(趙充國傳)에 나온 배급량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일단 보병이 전투를 하지 않고 평상적으로 움직이는데만도 하루 곡물 소모량은 최소 0.834kg 정도이다. 여기서 전투라도 벌이거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각종 토목공사라도 벌어지는 날이면 군량 소모량은 더욱 증가한다.[11]
여기다가 전근대 전쟁에서 당시의 차량 역할을 하는 우마의 식량 소모량도 계산하에 넣어야 한다. 과거의 기록에 따르면 말 1필의 식량 소모량은 6인 가정의 평상시 식량 소모량과 같다고 한다.[12] 전근대 6인 가정의 1인당 1일 칼로리 소모량을 2350 kcal로 평균해서 계산한다고 치면 14000 kcal 이고, 현대 경주마(380kg)의 필요 칼로리와 거의 일치한다. 이를 다시 노동할 때의 칼로리 기준으로 계산하면 1만 kcal가 더 추가되니 24000 kcal이다. 이렇게 보면 말 1필이 소모하는 하루 곡물 소모량은 6.67kg 이상이다. 즉 말 한필당 보병 1인의 약 8배를 소모한다. 예비마를 한 필 둔다고 가정할 경우, 기병 1인은 보병 17인의 군량을 소모하고 예비마를 두 필 둔다고 가정할 경우 기병 1인은 보병 25인의 군량을 소모한다.[13] 여기서 부수적인 의복, 장구류의 문제도 마찬가지인데 전근대 기술로는 백만 명에게 무기와 갑옷을 제작·유지하는 데 막대한 시간과 자원이 소요되고 전장에서 소모도 되니 이것도 끊임없이 보충해 줘야 한다. 이런 저런 물자만 계산해도 전쟁에는 하루에 천금이 든다는 손자병법의 말이 과연 틀리지 않은데 이런 상황에서 무려 백만을 동원하고 보급하는 문제는 전근대의 기술적, 행정적 능력으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예컨데 고수전쟁에서 백만이 현장 동원된다고 치면 당시 개발이 하나도 안된 늪지였던 요서의 도로망이 제공해줄 수 없는 열악한 보급로의 상황, 요서 자체의 인구와 생산력을 감안했을때 그 백만명의 보급, 현장 징발을 감당할 수 있을지 매우 회의적인 노릇이다. 당장 무려 20세기에, 이미 중국에서도 철도 재벌들인 교통계가 전국에 철도 인프라 깔아놓은 이후인 제2차 국공내전 시기에조차, 철도와 트럭을 통해 60만 병력으로 만주로 진공하던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결국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보급 말아먹고 공세종말점 와서 순식간에 역공 당해 전세역전으로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에 밀려 국부천대의 수모를 당해야 했는데, 철도와 트럭이 보편화된 시기에도 이 모양인 상황에서 왠 우마차 따위나 끌고 다닐 6~7세기 고대인 따위가 백만을 만주 공세에 동원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백만을 동원해서 보급이 안 되어 원정이 실패했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요서 지역에 백만을 실제로 집결시키고 전투를 펼치는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14]
- 실제론 수만 대군만 잃어도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 이렇게 군대에 드는 비용이 워낙 크다보니, 실제론 '백만대군을 잃었으니 나라가 망한다'는 문제가 아니라 인구의 단 몇% 수준인 수만명의 군대를 잃어도 중화제국 수준의 대국들조차 당대엔 나라가 망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전근대 국가들은 세금이 군대에 투입되는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그럼에도 수만명의 정예병력을 유지하고 육성하는데 만도 허리가 휘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 인구 1억 명나라가 병력 9만 말아먹었다고 다시 그 정도 수준의 병력을 재건하지 못해 나라 망하네 얘기 나오고, 인구 3억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그거 병력 좀 털렸다고 나라 망했다 소리 나오는 거 감안하면, 백만이 아니라 10만을 말아먹어도 송나라 이전 수백만~수천만 따리 체급의 일반적인 중국 분열기~통일 중화제국 수준에선 그거 자체가 이미 나라가 휘청거리기에는 충분한 병력이다.[15]
- 지리적 제약: 토탈 워 시리즈 같은 전근대 전장을 구현한 전략 게임을 해봤거나 각종 집회, 공연, 프로스포츠가 열리는 경기장 및 광장, 문화시설에 자주 드나들어 본 사람들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얘기인데 일단 몇천~몇만명 수준을 수용하려고 해도 상당히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심지어 공간이 넓어도 군중에 휩쓸리다보면 사람들의 움직임이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경험들은 많이 해봤을 것이다. 하물며 진짜 백만 명이 전장에 배치되려면 수십 ㎢의 면적이 필요하며, 전장은 도시의 광장이나 각종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편의시설들과는 달리 지형적 복잡성(산, 강, 숲)으로 인해 인간에게 전혀 제대로 된 편의공간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었기에 실제 작전 공간은 훨씬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것이다. 이런 상황을 맞이한 백만명이라는 덩어리가 진짜로 제한된 지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할지 부터 일단 생각해 봐야 한다.
3. 여담
전근대에는 이렇게 다들 호왈을 불러댔기 때문에 실제 전투 유적지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하면 병사 유골·무기 등의 유물 양이 기록보다 훨씬 적은 경우가 허다하다. 선술한 장평대전만 해도 해당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골과 무기는 기록된 병사들의 숫자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친다.현대에는 각종 정치적 집회 관련 뉴스 보도에서 주최측 추산 참가 인원과 경찰 추산 참가 인원이 적게는 5배 정도에서 보통 10배, 심지어는 100배 이상도 차이나는 것을 호왈백만과 다를 게 없다며 비꼬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보통 경찰은 최대 인원, 주최측은 연인원으로 계산해서 산출 방식부터 다르며, 경찰 추산 방식도 부정확하다며 논란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주최측에서 자신들의 지지세가 커보이기를 원해서 최대한 추산 인원을 부풀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대방을 위축시키고 기세를 올리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라는 점에선 딱 과거의 호왈백만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1] 비단 고대뿐만 아니라 근대에도 병력의 과장은 존재했는데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당시 병력을 충원받으며 이를 언론에 공표할 때는 두 배로 뻥튀기하였다는 사례가 있다.[2] 병력 조작으로 심리를 흔드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삼국지연의인데, 조조는 83만 대군을 100만으로 부풀렸고, 제갈량은 손권을 자극하기 위해 다시 이걸 150만까지 뻥튀기시켰으며, 주유는 손권을 안심시키기 위해 20만을 윗도는 수준이라고 줄여 말했다.[3] 다만 고수전쟁때 원정군이 백만명을 넘었다는 주장도 대립하고 있다.[4] 이 당시 명나라인들이 스스로 남긴 기록을 보면 서류상에 기록된 편제상으로는 수천에서 수만인데 실제로는 수십에서 수백명이더라는 괴담 같은 기록들과 징병이 잘 되지 않아 관리들이 한탄하는 기록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토목보의 변 당시 명나라가 호왈 50만을 불렀을때 제 3자인 조선이 외부에서 관측했을땐 '아무리봐도 황제 친정군은 실제론 8만 정도인거 같다'라는 분석이 나왔을 정도다.[5] 이런 장부상 병력과 실제 병력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은 사실 비단 중국만의 문제도 아니고 제정 로마의 레기온들도 전투 중 손실등의 이유로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6] 애초에 북송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북송에선 사회 복지적인 측면에서 극빈층을 구휼하는 제도로써 군대가 사용되었기에 서류상 병력, 상비군 규모만 컸지 이걸 실제 총전력으로 보기엔 좀 힘들긴 하다.[7] 전근대의 군법을 살펴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 기준으론 매우 극단적으로 엄격한데, 이는 언제 전사할지도 모르는 전쟁의 극한상황에서 극형으로 군대를 다스려야 할 정도로 병력 통제가 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8] 나폴레옹 전쟁 당시 가장 규모가 큰 전투 중 하나였던 1812년 보로디노 전투(나폴레옹 vs 러시아)조차 양측 합쳐 20~30만 명 참전이 최대 규모로, 산업화 이전에는 백만 병력 집결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음을 시사한다.[9] 로마,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 개봉 같은 전근대의 대도시들도 백만 단위 인구는 그 국가의 최성기 때나 겨우 가능한 수치였다. 더군다나 이들 지역은 거대 제국의 수도로써 도시를 지탱해 줄 수 있는 배후지들이 널려 있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당연히 지역 자체 체급만으로 이런 종류의 대도시들조차 백만 인구의 부양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는데, 이들 대도시가 제국이 몰락했을때 수만명 수준까지 인구가 주는 경우도 허다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10] 일단 현대 기준으로도 군인은 극한의 상황에서 제 때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특성상 칼로리 소모가 워낙 심한 직종이다보니 대한민국 국군 기준으로 하루 평균 3000 kcal 수준의 열량을 책정하며 전투식량도 이에 맞춰 매끼 1000 kcal을 공급하도록 맞춰놓는다. 전투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은 21세기 미군의 경우 전시에는 움직일 일은 많아지는 반면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 소화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거의 4000 kcal씩 먹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투식량에 후아바나 간식 따위를 뿌려 열량을 보충하도록 하고 있다. 장비와 기술의 발전으로 보병 한명이 감당해야 할 운동량이 어느 정도 감소된 현대 전장에서만도 이 정도이다.[11] 여기서 곡물 소모량이 이 정도인데 최소 필요한 식량이 1kg 이상인 이유는 무엇보다 사람이 곡물만 먹고 살 순 없다는 점도 감안한 것이다. 전투 중에는 급격히 전해질 손실이 일어나므로 전투력 유지를 위해 필수 염분 및 각종 미네랄, 비타민을 보충하는 장류, 짠지등의 음식도 필요하다. 또한 단백질 보충을 위한 고기, 유제품 등의 부수적인 식량 소모 역시 추가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데 로마군만 해도 단백질을 보충하고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회가 되면 사냥을 나서 동물을 잡는 등 단백질의 '현지 보급'에 열을 올렸다는 기록들이 있다.[12] (≪鹽鐵論⋅散不足≫: “夫一馬伏櫪, 當中家六口之食, 亡丁男一人之事。”[13] 그나마 이것도 '곡물'을 소모한다고 봤을때의 가정이다. 현대의 경주마 한 필이 방목장에서 섭취하는 풀의 양은 생초 기준 45~50kg. 건초 기준 9~10kg. 즉 무게 대비 칼로리가 훨씬 더 비효율적이다. 그러니까 즉, 이게 '최선의 경우' 계산인 것인데 가축용 귀리나 건초 같은 다른 걸 쓰면 치중에서 말먹이가 차지하는 비율은 더 커진다. 비교용으로 쌀겨의 칼로리는 파운드당 1600 kcal, 킬로그램당 대략 3600kcal인데 이걸 건초와 비교하면 건초는 칼로리가 반토막 난다. 현대에 쓰이는 티모시 건초(Timothy Hay) 기준으로도 파운드당 804kcal라 치중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두 배가 된다. 위진남북조시대인 북위 당시의 소/말이 끄는 수레의 운송량은 540kg 정도로, 말몰이꾼 한 명과 말 한 마리를 감안하면 하루 약 7.5kg 이상의 식량(그것도 말이 인간이 먹는 곡물을 같이 먹는다는 가정)이 보급수레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만 소모된다. 편도 20일 거리에 식량을 수송하는 경우 300kg의 식량이 운송과정에서 소모되고(왕복으로 계산), 240kg만 현장에 전달된다. 요약하자면 겨우 20일을 우마로 보급하는데만 해도 이미 주어진 운송량의 절반 이상을 소모한다는 것이다.[14] 심지어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 113만의 대군을 보급하는 보급대가 200만이라는 소리도 나오는데, 상술했듯이 보급대가 200만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이 보급대 200만명도 보급을 하는 와중에 추가로 본인들도 보급을 소모한다. 이렇게 볼 경우 총합 300만이 넘는 군대가 보급을 까먹었다는 소리인데 도저히 상식적인 기록이 아니다. 마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이 고대 그리스 폴리스 상대로 400만 대군을 보냈다는 헤로도토스의 페르시아 전쟁 서술 급의 과장이다.[15] 당장 유명한 삼국지에서만도 이릉대전에서 8만명의 병력을 잃은 후 촉한이 멸망할때까지 삼국 중 항구적 최약체로 굴러떨어지고 민생이 완전히 파탄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