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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9 18:27:04

호왈백만

호왈에서 넘어옴
사자성어
부르짖을 호 말할 왈 일백 백 일만 만

1. 개요2. 특징
2.1. 호왈백만의 이유2.2. 호왈백만의 실상2.3. 전근대에 실제 '백만대군'이 불가능한 이유
3. 여담

1. 개요

백만을 부르짖는다는 뜻의 사자성어. 실상보다 수를 과장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허장성세, 뻥튀기, 블러핑.

뜻 그대로 직역하자면 자신들에게는 백만대군이 있다며 자랑하기만 할 뿐인 것이다.

2. 특징

2.1. 호왈백만의 이유

이세환 기자: (별무반의 수가 17만이었는데,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20만이라고 이야기했었고요, 원정 끝난 기념비에는 30만이라고 적었습니다. 계속 수가 늘어나죠?
허준: 예전에 뭐 중국 원나라(의 병력)와 비교하면 ⅓에 육박하는 숫자가...
임용한 교수: 중국에 비하면 우리는 참 뻥이 작아. 중국이었으면 (17만을) 100만이라고 썼어.
이세환 기자: 제가 항상 말했죠. 중국 역사서에서 군사 수는 항상 0 하나는 더 들어간다고.
토크멘터리 전쟁사고려 vs 여진 2부 中 5분 54초부터
상당수 역사서에 적힌 당시 군대의 숫자가 보급대 등 비전투 병력까지 포함시키거나 뻥튀기한 것으로 의심받는 경우가 많다 보니 주로 비꼬는 의미로 쓰인다. 다만 이렇게만 보면 부정적인 단어 같지만, 고대 전쟁에서 병력 수를 부풀려 말하는 것은[1] 단순히 크고 아름다운 걸 좋아해서가 아니라 대병력이라는 위압감을 줘서 상대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전의를 떨어뜨리려는 목적이 있었다.[2] 그리고 무조건 백만으로만 부풀리는 것도 아니고, 실제 병력이 좀 적어서 척 봐도 백만이 아니다 싶을 땐 수십만 정도로 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정말 백만대군을 동원해냈다면 2백만, 3백만으로 뻥튀기를 해서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백만대군을 동원한 경우가 매우 흔치 않을 뿐이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근현대 이전의 역사를 보면 백만 혹은 그에 준하는 거대한 군세를 동원했다고 주장하면 되려 패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전근대의 국력으로 백만대군을 유지하기에는 부담이 심한 것도 있고, 통신수단도 발달하지 않던 시절이라 대병력을 지휘하기 어려운 것도 있는 듯하다. 군담소설 같은 데서는 더더욱 사망 플래그에 가까운 취급이다. 아무래도 단순히 병력 우위를 앞세워 밀어버리기보단 뭔가 계략을 짜거나 장수가 활약해서 적의 대병력을 박살내는 게 전개상으로 더 재미있으니까 백만 혹은 그에 준하는 대군을 동원하는 쪽은 대개 승리보다는 패배하는 쪽이 되는 것이다. 백만대군으로 다구리해서 이겼습니다는 재미 없으니까--

2.2. 호왈백만의 실상

보통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병력의 수를 "호왈(병력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삼국지에서도 "실제로 적국을 격파한 후 장수들이 올리는 공식 장계(공문서)에는 1명을 10명으로 세서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적군을 쳐부순 공식 문서에는 하나를 열로 계산하는 관습이 있었으나, 국연은 싸움터에서 베어 노획한 적군의 목을 상주할 때, 그 실제적인 숫자와 똑같게 했다. 태조가 그 까닭을 묻자, 국연이 말했다.

"대체로 경계 밖의 도적을 정벌하고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숫자를 실제보다 많게 보고하는 것은 무공(武功)을 크게 하여 백성들의 귀에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하간은 봉토 구역 이내인데도 전은 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우리가 크게 이겨 공을 세웠더라도 저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국연을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옮겼다.
삼국지 권11 위서11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국연전.
이 밖에도 중국 전국시대의 전쟁이나 초한전쟁의 경우에도 50만이니, 100만이니 하는 수가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작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표적으로 100만 대군을 동원한 기록 중 수양제고구려 침공때와 비수대전전진이 동원한 병력은 현대에는 실제 원정군이 백만은 안 되었다는 추정이 많다.[3]

흔히 중국이 이 분야에서 유명하지만, 서양에서도 0의 갯수가 바뀌는 식의 병력 과장이 종종 발견된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페르시아군 470만 명, 가우가멜라 전투의 페르시아군 100만 명, 헤이스팅스 전투의 잉글랜드군 120만 명 등이 대표적이다. 문서 상단에 언급된 고려 별무반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가장 압권인 건 미얀마의 유리궁 연대기인데, 코끼리만 3,600만 마리, 병력은 1의 뒤에 0이 42개 들어간 숫자라고...

당연히 역사서를 기술하는 편찬자들의 경우 정치적인 의도나, 의도적인 깎아내림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왜곡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기록이 그렇게 남아 있기 때문에 작성한 것이다. 사기홍문연과 관련된 기록 중 "항우는 40만의 병력을 100만이라 호하였고, 패공(유방)은 10만의 병력을 20만이라 호하였다."라는 기록도 남아있는데 이 기록의 경우에도 40만의 병력이 실제 또는 거짓이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다만, 그 시대의 기록들에 그렇게 남아 있으니 사마천도 그렇게 작성한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2.3. 전근대에 실제 '백만대군'이 불가능한 이유

3. 여담

전근대에는 이렇게 다들 호왈을 불러댔기 때문에 실제 전투 유적지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하면 병사 유골·무기 등의 유물 양이 기록보다 훨씬 적은 경우가 허다하다. 선술한 장평대전만 해도 해당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골과 무기는 기록된 병사들의 숫자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친다.

현대에는 각종 정치적 집회 관련 뉴스 보도에서 주최측 추산 참가 인원과 경찰 추산 참가 인원이 적게는 5배 정도에서 보통 10배, 심지어는 100배 이상도 차이나는 것을 호왈백만과 다를 게 없다며 비꼬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보통 경찰은 최대 인원, 주최측은 연인원으로 계산해서 산출 방식부터 다르며, 경찰 추산 방식도 부정확하다며 논란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주최측에서 자신들의 지지세가 커보이기를 원해서 최대한 추산 인원을 부풀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대방을 위축시키고 기세를 올리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라는 점에선 딱 과거의 호왈백만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1] 비단 고대뿐만 아니라 근대에도 병력의 과장은 존재했는데 나폴레옹러시아 원정 당시 병력을 충원받으며 이를 언론에 공표할 때는 두 배로 뻥튀기하였다는 사례가 있다.[2] 병력 조작으로 심리를 흔드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삼국지연의인데, 조조는 83만 대군을 100만으로 부풀렸고, 제갈량은 손권을 자극하기 위해 다시 이걸 150만까지 뻥튀기시켰으며, 주유는 손권을 안심시키기 위해 20만을 윗도는 수준이라고 줄여 말했다.[3] 다만 고수전쟁때 원정군이 백만명을 넘었다는 주장도 대립하고 있다.[4] 이 당시 명나라인들이 스스로 남긴 기록을 보면 서류상에 기록된 편제상으로는 수천에서 수만인데 실제로는 수십에서 수백명이더라는 괴담 같은 기록들과 징병이 잘 되지 않아 관리들이 한탄하는 기록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토목보의 변 당시 명나라가 호왈 50만을 불렀을때 제 3자인 조선이 외부에서 관측했을땐 '아무리봐도 황제 친정군은 실제론 8만 정도인거 같다'라는 분석이 나왔을 정도다.[5] 이런 장부상 병력과 실제 병력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은 사실 비단 중국만의 문제도 아니고 제정 로마레기온들도 전투 중 손실등의 이유로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6] 애초에 북송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북송에선 사회 복지적인 측면에서 극빈층을 구휼하는 제도로써 군대가 사용되었기에 서류상 병력, 상비군 규모만 컸지 이걸 실제 총전력으로 보기엔 좀 힘들긴 하다.[7] 전근대의 군법을 살펴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 기준으론 매우 극단적으로 엄격한데, 이는 언제 전사할지도 모르는 전쟁의 극한상황에서 극형으로 군대를 다스려야 할 정도로 병력 통제가 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8] 나폴레옹 전쟁 당시 가장 규모가 큰 전투 중 하나였던 1812년 보로디노 전투(나폴레옹 vs 러시아)조차 양측 합쳐 20~30만 명 참전이 최대 규모로, 산업화 이전에는 백만 병력 집결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음을 시사한다.[9] 로마,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 개봉 같은 전근대의 대도시들도 백만 단위 인구는 그 국가의 최성기 때나 겨우 가능한 수치였다. 더군다나 이들 지역은 거대 제국의 수도로써 도시를 지탱해 줄 수 있는 배후지들이 널려 있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당연히 지역 자체 체급만으로 이런 종류의 대도시들조차 백만 인구의 부양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는데, 이들 대도시가 제국이 몰락했을때 수만명 수준까지 인구가 주는 경우도 허다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10] 일단 현대 기준으로도 군인은 극한의 상황에서 제 때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특성상 칼로리 소모가 워낙 심한 직종이다보니 대한민국 국군 기준으로 하루 평균 3000 kcal 수준의 열량을 책정하며 전투식량도 이에 맞춰 매끼 1000 kcal을 공급하도록 맞춰놓는다. 전투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은 21세기 미군의 경우 전시에는 움직일 일은 많아지는 반면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 소화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거의 4000 kcal씩 먹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투식량에 후아바나 간식 따위를 뿌려 열량을 보충하도록 하고 있다. 장비와 기술의 발전으로 보병 한명이 감당해야 할 운동량이 어느 정도 감소된 현대 전장에서만도 이 정도이다.[11] 여기서 곡물 소모량이 이 정도인데 최소 필요한 식량이 1kg 이상인 이유는 무엇보다 사람이 곡물만 먹고 살 순 없다는 점도 감안한 것이다. 전투 중에는 급격히 전해질 손실이 일어나므로 전투력 유지를 위해 필수 염분 및 각종 미네랄, 비타민을 보충하는 류, 짠지등의 음식도 필요하다. 또한 단백질 보충을 위한 고기, 유제품 등의 부수적인 식량 소모 역시 추가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데 로마군만 해도 단백질을 보충하고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회가 되면 사냥을 나서 동물을 잡는 등 단백질의 '현지 보급'에 열을 올렸다는 기록들이 있다.[12] (≪鹽鐵論⋅散不足≫: “夫一馬伏櫪, 當中家六口之食, 亡丁男一人之事。”[13] 그나마 이것도 '곡물'을 소모한다고 봤을때의 가정이다. 현대의 경주마 한 필이 방목장에서 섭취하는 풀의 양은 생초 기준 45~50kg. 건초 기준 9~10kg. 즉 무게 대비 칼로리가 훨씬 더 비효율적이다. 그러니까 즉, 이게 '최선의 경우' 계산인 것인데 가축용 귀리건초 같은 다른 걸 쓰면 치중에서 말먹이가 차지하는 비율은 더 커진다. 비교용으로 쌀겨의 칼로리는 파운드당 1600 kcal, 킬로그램당 대략 3600kcal인데 이걸 건초와 비교하면 건초는 칼로리가 반토막 난다. 현대에 쓰이는 티모시 건초(Timothy Hay) 기준으로도 파운드당 804kcal라 치중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두 배가 된다. 위진남북조시대북위 당시의 소/말이 끄는 수레의 운송량은 540kg 정도로, 말몰이꾼 한 명과 말 한 마리를 감안하면 하루 약 7.5kg 이상의 식량(그것도 말이 인간이 먹는 곡물을 같이 먹는다는 가정)이 보급수레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만 소모된다. 편도 20일 거리에 식량을 수송하는 경우 300kg의 식량이 운송과정에서 소모되고(왕복으로 계산), 240kg만 현장에 전달된다. 요약하자면 겨우 20일을 우마로 보급하는데만 해도 이미 주어진 운송량의 절반 이상을 소모한다는 것이다.[14] 심지어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 113만의 대군을 보급하는 보급대가 200만이라는 소리도 나오는데, 상술했듯이 보급대가 200만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이 보급대 200만명도 보급을 하는 와중에 추가로 본인들도 보급을 소모한다. 이렇게 볼 경우 총합 300만이 넘는 군대가 보급을 까먹었다는 소리인데 도저히 상식적인 기록이 아니다. 마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이 고대 그리스 폴리스 상대로 400만 대군을 보냈다는 헤로도토스페르시아 전쟁 서술 급의 과장이다.[15] 당장 유명한 삼국지에서만도 이릉대전에서 8만명의 병력을 잃은 후 촉한이 멸망할때까지 삼국 중 항구적 최약체로 굴러떨어지고 민생이 완전히 파탄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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