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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4-05 20:24:18

호왈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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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전근대 백만대군이 어려운 이유

1. 개요

호왈백만(號曰百萬)은 백만대군이라 불렀다는 뜻이다.

현대에는 주로 비현실적 대군이 등장하는 전근대 기록을 두고 근거가 부실하다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 언급한다.

2. 특징

적군을 쳐부순 공식 문서에는 하나를 열로 계산하는 관습이 있었으나, 국연은 싸움터에서 베어 노획한 적군의 목을 상주할 때, 그 실제적인 숫자와 똑같게 했다. 태조가 그 까닭을 묻자, 국연이 말했다.

"대체로 경계 밖의 도적을 정벌하고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숫자를 실제보다 많게 보고하는 것은 무공(武功)을 크게 하여 백성들의 귀에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하간은 봉토 구역 이내인데도 전은 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우리가 크게 이겨 공을 세웠더라도 저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국연을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옮겼다.
삼국지 권11 위서11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국연전.

전근대 동북아 기록에서는 병력의 수에 대해 호왈(號曰, 그렇게 불렀다)이라고 서술한 경우가 많다. 행정 체계가 빈약해서 보고를 재검증하기 어려웠기에 부르는 그대로 쓴 것이다. 삼국지에서도 "적국을 격파한 후 장수들이 올리는 공문서에 1명을 10명으로 세서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전투 이전에는 아군의 병력을 과장하는 것이 동요를 막고 적을 위협하는데 효과적이었으며, 전투 이후에는 적군의 병력을 과장하는 것이 명성을 높이고 공적을 키우는데 효과적이었다.

후대 역사서에서도 이를 특별히 재검증할 방법이 없는 이상 기록을 그대로 썼다. 사기에서는 "항우는 40만의 병력을 100만이라 호하였고, 패공(유방)은 10만의 병력을 20만이라 호하였다."라는 기록했는데, 초한전쟁 100년 뒤의 인물인 사마천이 찾아낸 기록이 그러해서 그대로 쓴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중국 전국시대의 전쟁이나 초한전쟁의 기록에서도 50만 100만 대군이 등장하지만, 현대 연구에서는 실제 병력이 그보다 작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비수대전의 기록에서 언급되는 병력도 실제는 백만에 못 미쳤을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서양에서도 검증이 어려운 고대 전투에서 병력 과장이 발견된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페르시아군 470만 명, 가우가멜라 전투의 페르시아군 100만 명, 헤이스팅스 전투의 잉글랜드군 120만 명 등 당시 여건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록이 발견된다. 현대에 전투 유적지를 발굴해보면 병사 유골과 무기의 규모가 기록보다 훨씬 적은 경우가 허다하다.

실질적인 백만대군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들어서 가능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군이 철도를 이용해 9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는데 성공하면서 백만 단위의 전쟁이 현실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강대국 간의 총력전이 일어나면서 양측 모두 백만을 크게 넘는 병력을 동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3. 전근대 백만대군이 어려운 이유


[1] 북송에선 사회 복지적인 측면에서 극빈층을 구휼하는 제도로써 군대가 사용되었기에 서류상 병력, 상비군 규모만 컸지 이걸 실제 총전력으로 보기엔 좀 힘들긴 하다.[2]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바그다드, 장안, 개봉 같은 전근대의 대도시들도 백만 단위 인구는 전성기 때나 겨우 가능한 수치였다.[3] 곡물만 이 정도이고, 각종 부식품은 물론 현대의 기준과 같이 풍요롭지는 못했을망정 또 별도다. 백미 기준으로 100g당 열량이 약 350kcal이니, 깨끗이 도정된 건조 곡물 0.8kg이면 약 2800kcal이다. 전근대인이 현대인에 비해 체구와 대사량이 작았을 것을 감안해도, 무거운 완전 군장을 지고 하루 종일 행군하려면 못해도 일일 3000kcal 이상은 필요했다. 심지어 저 0.8kg의 곡물은 보관 문제로 인해 도정된 곡물도 아니고 겨가 제거되지 않은 통곡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급된 곡물에서 얻을 수 있는 열량은 2800kcal보다도 최소 수백 kcal 낮았을 것이다. 이러면 부식을 통해 최소 약 500kcal~1000kcal는 공급되어야 식량 부족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을 수 있다.[4] 후대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소련군에게 포위된 독일 제6군의 25만여 명 병력들을 유지하기 위해선 식량만 하루 최소 약 300톤의 공중 보급이 필요했다고 하니, 고대의 식량 보급 소요와도 얼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식량은 포위망 내부의 1달 비축분으로 버틴다 치고, 연료와 탄약이 도합 일일 최소 300톤은 필요하여 산출한 보급량이 한달 간 일일 최소 300톤, 권장 600톤이었다. 여기에 공세와 같이 연료와 탄약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작전 행동을 벌이면 당연히 보급 소요량은 더더 늘어났을 것이다.[5] 그것도 가능하면 지방 및 당류와 단백질과 알코올을 추가 공급해야 했다. 추가적 무게와 보관/운송 중 변질 위험성은 둘째 치더라도, 당연히 원가도 곡식보다 비싸다.[6] (≪鹽鐵論⋅散不足≫: “夫一馬伏櫪, 當中家六口之食, 亡丁男一人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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