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월드컵 기록 | ||
20세기 | 2002~2010 | 2014~2022 |
1. 본선 진출 이전2.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3.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본선 진출 실패)4.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5.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6. 1994 FIFA 월드컵 미국7.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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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선 진출 이전
대한민국은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35년 동안 일제 강점기를 겪었다. 때문에 첫 번째 대회인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부터 3회 대회인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까지는 그 때문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광복을 맞이했으나, 1946년엔 전후 피해가 너무 심각했기에 월드컵이 중단되었다.대신 1948 런던 올림픽/축구[1]에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나라 사정이 어려웠기에 영국까지 3주 가까운 시간을 허비하며 어렵게 도착했지만, 놀랍게도 16강전에서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를 맞아 5:3 승리를 거두며 첫 1승과 첫 8강 준준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진출국 중 최약체로 꼽혔던 한국에게 일격을 당하며 탈락한 멕시코는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자국 축구팬들에게 썩은 토마토와 날계란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8강에서는 이 대회 금메달 우승팀 스웨덴을 만나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끝에 0:12로 대패하며 1948년 런던 올림픽 8강 8위로 마쳤다. 이 경기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의 역대 A매치 최다 점수 차 패배 경기로 남아있다.
하지만 1948년 런던 올림픽 축구 8강 진출은 대한민국 축구에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고, 1950 브라질 월드컵에 지역예선 부터 참가하고자 했지만 개최국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이라 너무 멀어 거기까지 갈 돈도 없었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의 발발로 인해 참여하지 못했다.[2] 그렇게 대한민국은 1회~4회 대회까지 단 한 번도 월드컵 지역 예선에 참가하지 못했다.
2.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3]
1회~4회 대회까지 내리 불참한 이후 대한민국은 5회 대회인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 처음으로 출전 신청을 했다. 당시 대회는 16개국 본선 진출이었는데[4], 이 중 1장은 개최국 스위스의 몫으로 돌아갔고 또 나머지 1장은 전 대회 우승국인 우루과이의 몫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국가들은 남은 14장을 놓고 예선을 치렀는데, 당시 피파는 아시아 국가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못했고 아시아에게는 타 대륙과의 경쟁도 없이 1장의 16개국 본선 진출권이 부여되었다.당시 아시아는 지역예선 13조에 편성되었는데, 이때 출전 신청을 한 나라는 대한민국, 일본, 대만이었다. 그런데 대만은 예선 경기를 치르기 직전에 돌연 기권을 선언했고, 결국 예선전은 한일전으로 압축되었다. 본래 예선전은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야 했으나 반일주의자였던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왜놈들이 이 땅을 밟게 할 수는 없다!라고 강경하게 맞서 결국 2경기 모두 일본에서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5] 그리하여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을 놓고 한국과 일본의 승부가 펼쳐졌다. 당시 예선 경기가 열린 때는 1954년 3월이었는데, 광복을 맞은 지 불과 8년 7개월밖에 되지 않은 터라 식민지 시절의 한을 풀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을 정도로 열기는 엄청 뜨거웠다.
그렇게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열린 예선 1차전 경기에서 한국은 정남식과 최정민이 각각 멀티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한 끝에 일본을 무려 5:1로 대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2차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6] 한국은 전반 16분에 이와타니 토시오에게 실점하며 어려운 출발을 했지만, 전반 24분에 터뜨린 정남식의 동점골과 43분에 터진 최정민의 역전골로 승부를 뒤집었다. 후반 15분에 다시 이와타니에게 실점했지만 남은 시간 동안 일본의 공세를 잘 막아내며 2:2 무승부를 거두어 1승 1무의 성적으로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때 인도네시아[7]가 15개국[8] 본선 15강 토너먼트에 진출한 이후 아시아 국가로서는 16년 만에 2번째로, 독립국을 기준으로는 최초로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처음으로 월드컵 16개국 본선 무대에 데뷔한 대한민국에 월드컵이라는 곳의 난이도는 냉혹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헝가리, 터키, 서독과 함께 2조에 속했는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사령관 김용식 전 감독은 이 조 편성을 보고 상당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3팀 모두 유럽 팀이고 한국이 속된 말로 비벼볼 만한 팀이 하나도 없었으니 대한민국은 승점자판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용식과 선수들은 1골만이라도 넣어서 전쟁에 헐벗고 굶주린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하자는 각오를 다지고 스위스로 향했고, 심지어 대회 엔트리 22인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20명의 선수만으로 출국에 나서야 했다. 이렇게 한국의 시련 어린 첫 번째 월드컵 도전이 시작되었다.
- 대표팀 최종 엔트리
- GK : 홍덕영, 함흥철
- DF : 박규정, 박재승, 민병대, 이종갑, 한창화
- MF : 강창기, 이상의, 정남식, 김지성, 주영광
- FW : 이수남, 최정민, 우상권, 성낙운, 박일갑, 최영근, 이기주, 정국진
감독 : 김용식
2.1. 16강 조별리그 헝가리전 - 0 : 9 패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2조 1차전 1954년 6월 17일 목요일 16:30 (UTC+1) | ||
하르트투름 슈타디온 (스위스, 취리히) | ||
주심: 레몽 빈센티 | ||
관중: 18,000명 | ||
9 : 0 | ||
헝가리 | 대한민국 | |
12', 89' 푸슈카시 페렌츠[9]페렌츠 푸스카스로 잘 알려진 선수이며, FIFA 푸스카스상이 바로 이 선수의 이름을 땄다.] 18' 런토시 미하이 24', 36', 50' 코치시 샨도르 59' 치보르 졸탄 75', 83' 펄로타시 페테르 | -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2.2. 16강 조별리그 터키전 - 0 : 7 패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2조 2차전 1954년 6월 20일 일요일 15:30 (UTC+1) | ||
스타드 드 샤르밀 (스위스, 제네바) | ||
주심: 에스테반 마리노 | ||
관중: 17,150명 | ||
7 : 0 | ||
터키 | 대한민국 | |
10', 30' 수아트 마마트 18' 레프테르 퀴취칸도냐디스 37', 64', 70' 부르한 사르군 76' 에롤 케스킨 | -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3.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본선 진출 실패)
피파는 1938 월드컵 인도네시아의 무혈입성 참패 탈락과 1954 월드컵 한국의 참패 탈락으로 아시아의 축구 수준이 너무 낮은 것도 고려하여 1958 월드컵부터 아시아를 타 대륙과 경쟁을 치러야 1958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게 바꿨다. 그렇게 첫 번째 월드컵 도전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던 한국은 1956 AFC 아시안컵 홍콩에서 우승을 차지해 아시안컵 초대 챔피언이라는 영예를 얻었고, 이에 자신감도 상승하여 다시 한 번 월드컵 무대에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사건으로 인해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지역 예선에는 참가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어이없는 사건은 대한축구협회 직원의 신청서 분실 사건이었다. 이 직원이 신청서를 서랍에 넣고 까맣게 잊어버리는 바람에 어이없게 월드컵에 못 나서게 된 것이다. 그만큼 1950년대의 한국은 모든 것이 후진적이었다.[10]1962 FIFA 월드컵 칠레 당시 대회도 전세계 지역예선에서 본선 월드컵에 들어 갈 자리가 단 16자리로, 유럽은 이 중 절반인 8장을 가져간 것도 모자라 플레이오프 0.5장을 2개나 얻어갔고 그 플레이오프 상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였고 나머지 티켓 중 5.5장을 남미가 가져갔다. 그리고 북중미+아시아+아프리카 3개 대륙을 통틀어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권은 달랑 1.5장이 부여되었다. 즉 유럽과 남미 단 둘이서만 즐기겠다는 심산이었던 것. 노골적인 대륙 차별이 극에 달했던 월드컵이었다. 아시아 지역예선에서는 한국이 예선 10조 B조에서 일본과 같이 있었는데, 홈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2:1 역전승[11]을 거두었고 이후 일본 원정에서도 2:0 완승을 거둔다. 이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맞대결로 압축되었는데 인도네시아가 돌연 기권하면서 한국은 부전승으로 대륙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대륙 플레이오프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였다. 플레이오프는 경기 특성상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야 했는데, 반공을 국시로 걸고 나온 군사 정권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공산권 국가라는 이유로 공산권 국가와 시합하는 것을 거부하고 월드컵 불참을 종용했으나, 대한축구협회는 박정희 정부를 설득시켰고[12] 결국 경기는 정상적으로 치러지게 된다. 그렇게 베오그라드에서 치러진 1차전 원정에서 한국은 1:5로 대패했고[13], 2차전은 서울의 효창운동장에서 치러졌는데 이 경기에서도 1:3으로 패배해 결국 지역예선에서 탈락하여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했다.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역시 피파의 노골적인 대륙 차별이 이어진 대회였는데, 전체 16개국 본선 진출 티켓 중 무려 10장을 유럽이 독식했고, 나머지 6장 중 4장을 남미가 가져갔고 북중미에게 1장이 돌아갔고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이 3개 대륙을 묶어서 1장 16개국 본선 진출 티켓을 준 것이다. 이에 분노한 아프리카 팀들은 대대적으로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런데 당시 아시아 축구에서는 북한이 신흥 강호로 급부상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정부는 북한과의 맞대결을 부담스럽게 여겨 결국 월드컵 불참을 선언하게 했고 대한축구협회는 그 대가로 피파에게 5000달러의 벌금을 납부해야 했다. 결국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지역예선은 북한과 호주의 맞대결로 압축되었고, 북한은 합산 점수 9:2로 호주를 격파하고 16개국 본선에 올랐다. 그리고 다들 잘 알다시피 그 대회에서 북한은 16강 조별리그 1차전에서 소련에게 0:3으로 패배하고 2차전에서 칠레와 1:1 무승부를 거두며 탈락 위기에 몰렸으나, 3차전에서 박두익의 결승골로 이탈리아를 1:0으로 격파하고 조 2위로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8강에서 포르투갈을 맞아 전반 22분까지 3골을 넣으며 3:0으로 리드했으나, 에우제비우에게 4골을 연달아 헌납하며 결국 3:5 역전패를 당하여 8강전 8위로 마쳤다. 이런 북한의 호성적에 한동안 박정희 정권은 배가 아팠는지 시덥잖은 사창가 루머나 퍼뜨렸다.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도 아시아+오세아니아로 오직 단 1장의 16개국 본선 진출권을 부여받았다. 한국의 1차 예선 상대는 호주와 일본이었다. 한국은 1차전에서 일본과 2:2로 비긴 뒤 호주에게 1:2로 패배하며 가시밭길을 걸었다. 다시 3차전에서 일본을 2:0으로 이기며 불씨를 살린 한국은 마지막 경기에서 반드시 호주를 이겨야만 2차 예선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호주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결국 지역예선에서 또 탈락하고 말았다. 이때 경기 막판에 호주 수비수의 반칙으로 페널티 킥을 얻었고, 이 킥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는데 키커 임국찬이 실축하며 결국 2차 예선 진출권을 호주에게 넘겨주고 말았다.[14][15] 이로 인해 임국찬은 만고의 역적으로 전락했고, 결국 그는 쫓겨나듯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16]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서도 아시아+오세아니아로 오직 단 1장의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권을 부여받았다. 이때 지역예선은 A지역과 B지역 2개로 나누어서 진행했으며, 각 지역의 우승자끼리 결선 라운드에서 승부를 가리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은 A지역에 속해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태국과 함께 2조에 속했다. 1차전에서 태국을 4:0으로 격파한 한국은 이후 말레이시아, 이스라엘과 각각 0:0으로 비기며 조 2위로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4강에서 홍콩을 3:1로 꺾고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전 상대는 이스라엘이었는데, 이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며 결선 라운드 진출에 성공했다. B지역 우승자는 호주였고, 시드니에서 열린 1차전에서 양 팀은 0:0으로 비겼고 서울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2:2로 비겼다.[17] 그래서 중립 지역인 홍콩에서 다시 한 번 플레이오프를 치렀으나, 이 경기에서 한국은 호주에게 기습적인 선제골을 허용하며 0:1로 끌려갔고 결국 또 호주의 벽을 넘지 못하며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했다.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도 아시아+오세아니아로 오직 단 1장의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권을 부여받았다. 이 대회에서의 예선 방식은 1차 예선에서 1위를 한 팀이 최종예선에 진출하여 1장의 출전권을 놓고 겨루는 방식이었다.[18] 대한민국은 이스라엘, 일본, 북한과 함께 2조에 속했다. 그런데 북한이 대회 직전에 돌연 기권을 선언하면서 이스라엘과 일본과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한국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각각 0:0 무승부, 3:1 승리를 거두었고 일본을 상대로도 각각 0:0 무승부, 1:0 승리를 거두어 2승 2무로 조 1위를 차지해 가볍게 최종예선에 올랐다. 최종예선에서는 이란, 호주, 쿠웨이트, 홍콩과 한 조에 속해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렀다. 그러나 한국은 3승 4무 1패[19]의 전적으로 조 2위를 하는 데에 그쳐 6승 2무로 조 1위를 차지한 이란에게 출전권을 헌납해야 했다.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은 편파판정 때문에 억울하게 탈락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는 본선 24강으로 확대되어서 아시아+오세아니아 두 대륙을 묶어서 2장의 진출권을 부여받았다. 1차 예선에서 한국은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태국과 함께 3조에 속했다. 대회는 전 경기 모두 쿠웨이트에서 열렸다. 한국은 1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2:1로 꺾었고 2차전에서 태국을 5:1로 이겼고, 쿠웨이트 역시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잘 살려 태국을 6:0으로 이겼고 뒤이어 말레이시아를 4:0으로 이겼다. 각 조 1위 팀만이 최종예선에 진출할 수 있었으므로 3차전 쿠웨이트와의 경기는 운명의 경기였다. 그런데 심판은 초반부터 석연찮은 판정을 남발하며 한국의 기세를 꺾었고, 결국 후반 6분 대한민국은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쿠웨이트를 상대로 공격을 퍼부었고, 마침내 이태엽이 세트피스 찬스에서 완벽한 헤딩골로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 심판은 수비수를 방해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득점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영상을 확인해 본 결과 이태엽과 쿠웨이트 수비수는 몇 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에 이태호가 나서서 항의했지만 주심은 도리어 이태호를 퇴장시켜 버렸고, 멘탈이 흔들린 한국은 끝내 종료 직전에 한 골을 더 허용했고 쿠웨이트가 2:0으로 승리해 최종예선에 올랐다.
정리하자면 1958년부터 1982년까지 한국이 아예 지역 예선 참가를 하지 않은 1958년과 1966년을 제외하고 한국이 월드컵 최종 예선도 밟지 못한 경우는 1970년과 1982년 단 2차례 뿐으로, 1962년과 1974년, 1978년은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이 눈앞에 있었지만 아쉽게 올라가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4.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20]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30년이 넘도록 본선 월드컵을 남의 나라 잔치로 보냈던 대한민국은 1983년 K리그를 출범시키면서 본격적인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고[21]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야 다시 월드컵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자그마치 32년 만의 일이었다. 물론 이때도 결코 쉽게 진출한 것은 아니었다. 1982 스페인 월드컵부터 24강 본선으로 확대되면서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아시아는 단독으로 2장의 24강 본선 진출권을 부여받았는데, 이때 아시아 축구 연맹은 내부 결정으로 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각각 한 팀씩을 본선에 보내기로 했고 따라서 한국은 서아시아 팀들과 같은 조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1차 예선에서 한국은 말레이시아, 네팔과 함께 3A조에 속했다. 그런데 1차전에서 조 최약체 네팔을 상대로 2:0 진땀승을 거둔 데다가[22] 2차전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는 0:1로 패배해 가시밭길을 걸었다. 이에 대한축구협회는 칼을 뽑아 문정식 감독을 경질하고 김정남을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다행히도 김정남 감독은 팀을 잘 추슬러 한국은 남은 2경기를 모두 이기고 조 1위를 차지해 2차예선 진출에 성공했다.2차예선(3조 결승)에서는 3B조 1위 인도네시아와 홈 앤드 어웨이로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2:0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 자카르타 원정 경기에서도 4:1 대승을 거두어 합산 점수 6:1로 가볍게 승리를 거두고 최종예선에 올랐다. 최종예선에 오른 4팀은 동아시아(3조, 4조)는 한국과 일본, 서아시아(1조, 2조)는 이라크와 시리아였다.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 결승전을 치르고 승자 두 팀이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한국은 도쿄 원정 경기에서 2:1로 이겼고, 서울 홈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해 합산 점수 3:1로 일본을 꺾고 드디어 32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 한국에는 참혹한 시련만이 마주했다. 조 추첨 결과가 지지리도 불운했기 때문이었는데,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프랑스를 2:0으로 격파하며 본선에 진출한 불가리아,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인 이탈리아와 함께 A조에 편성된 것이다. 사실상 톱시드 팀이 2개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 어쨌든 태극전사들의 두 번째 월드컵 도전은 그대로 시작되었다.
- 대회 최종 엔트리
- GK : 1. 조병득, 21. 오연교
- DF : 2. 박경훈, 3. 정종수, 5. 정용환, 8. 조영증, 12. 김평석, 13. 조민국, 14. 유병옥
- MF : 4. 조광래, 10. 박창선, 13. 노수진, 16. 김주성, 17. 허정무, 18. 김삼수, 22. 강득수
- FW : 6. 이태호, 7. 김종부, 9. 최순호, 11. 차범근, 19. 변병주, 20. 김용세
감독 : 김정남
4.1. 24강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전 - 1 : 3 패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A조 2경기 1986년 6월 2일 월요일 12:00 (UTC-6) | ||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우니베르시타리오 (멕시코, 멕시코 시티) | ||
주심: 빅토리아노 산체스 아르미니오 | ||
관중: 60,000명 | ||
3 : 1 | ||
대한민국 | ||
6', 46' 호르헤 발다노 18' 오스카 루게리 | 73' 박창선[23]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4.2. 24강 조별리그 불가리아전 - 1 : 1 무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A조 4경기 1986년 6월 5일 목요일 16:00 (UTC-6) | ||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우니베르시타리오 (멕시코, 멕시코 시티) | ||
주심: 파라지 알샤나르 | ||
관중: 45,000명 | ||
1 : 1 | ||
대한민국 | ||
70' 김종부 | 11' 플라멘 게토프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4.3. 24강 조별리그 이탈리아전 - 2 : 3 패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A조 5-1경기 1986년 6월 10일 화요일 12:00 (UTC-6) | ||
에스타디오 쿠아우테목 (멕시코, 푸에블라) | ||
주심: 데이비드 소차 | ||
관중: 20,000명 | ||
2 : 3 | ||
대한민국 | 이탈리아 | |
62' 최순호 83' 허정무 | 17', 73' 알레산드로 알토벨리 82' (OG) 조광래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5.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24]
이회택 전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은 지역 예선에서 엄청나게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 대회는 아시아 전체 풀리그로 아시아에게는 우승팀(1위)과 준우승(2위)팀의 2장의 24강 본선 진출권이 부여되었다. 한국은 1차예선에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네팔, 인도와 함께 4조에 속했다. 그런데 대회 직전에 인도가 기권을 선언하면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네팔과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대한민국은 6전 전승, 25득점 무실점이라는 후덜덜한 성적을 거두며 최종예선에 진출했다. 최종예선 상대는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북한이었다. 경기는 모두 싱가포르에서 풀리그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한국은 1차전에서 카타르와 0:0으로 비긴 뒤 2차전에서 북한을 1:0으로 이겼고, 3차전에서 중국을 1:0으로 이기며 단숨에 조 1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4차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도 2:0 승리를 거두며 일찌감치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에서 아랍에미리트와 1:1 무승부를 거두며 총 전적 9승 2무, 30득점 1실점 아시아 예선 우승 진출[25]이라는 성적으로 24강 본선에 진출하여 2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이런 아시아 예선전의 좋은 성적으로 인해 한국은 꿈에 부풀었고, 외신들의 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신들 역시 한국의 지역예선 성적과 또 지난 대회에서 유럽팀 불가리아에게 첫 승점 1점 획득과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라는 세계 최강 팀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맞선 대회 20위의 모습을 참고하여 조용히 한국의 '황색 돌풍'을 예상했다. 24강 조 편성도 지난 대회와는 다르게 수월했다. 실력 자체는 뛰어나지만 이상하게 좋은 성적을 못 거두고 있는 스페인,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 그다지 강호라고 불러줄 수 없었던 벨기에, 그리고 초대 월드컵 챔피언이지만 이젠 쇠락할 대로 쇠락한 우루과이와 함께 24강 본선 E조에 편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때 한국인들과 외신들은 이 조 편성이 달콤한 함정이었을 줄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대회 최종 엔트리
- GK : 1. 김풍주, 19. 정기동, 21. 최인영
- DF : 2. 박충균, 3. 최강희, 4. 윤덕여, 5. 정용환, 13. 정종수, 15. 조민국, 17. 구상범, 20. 홍명보
- MF : 7. 노수진, 9. 황보관, 12. 이흥실, 16. 김주성, 22. 이영진
- FW : 6. 이태호, 8. 정해원, 10. 이상윤, 11. 변병주, 14. 최순호, 18. 황선홍
감독 : 이회택
5.1. 24강 조별리그 벨기에전 - 0 : 2 패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E조 1경기 1990년 6월 12일 화요일 17:00 (UTC+1) | ||
스타디오 마르칸토니오 벤테고디 (이탈리아, 베로나) | ||
주심: 빈센트 마우로 | ||
관중: 32,790명 | ||
2 : 0 | ||
대한민국 | ||
53' 마르크 데흐리서 64' 미셸 더 볼프 | -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5.2. 24강 조별리그 스페인전 - 1 : 3 패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E조 4경기 1990년 6월 17일 일요일 21:00 (UTC+1) | ||
스타디오 프리울리 (이탈리아, 우디네) | ||
주심: 엘리아스 하코메 | ||
관중: 32,733명 | ||
1 : 3 | ||
대한민국 | 스페인 | |
43' (FK) 황보관 (A. 최순호) | 23', 61', 81' 미첼 곤살레스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5.3. 24강 조별리그 우루과이전 - 0 : 1 패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E조 5-2경기 1990년 6월 21일 목요일 17:00 (UTC+1) | ||
스타디오 프리울리 (이탈리아, 우디네) | ||
주심: 툴리오 라네세 | ||
관중: 29,039명 | ||
0 : 1 | ||
대한민국 | ||
- | 90' 다니엘 폰세카 | |
70' 윤덕여 | -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6. 1994 FIFA 월드컵 미국[26]
김호 전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 대회에서부터 대표팀 전임 감독제를 시행했다.[27] 이번 대회의 지역예선도 1차 예선 6개 조에서 1위를 차지한 팀이 최종예선에서 풀리그 형식으로 경기를 치러 우승팀(1위)과 준우승팀(2위)만이 24강 본선에 진출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최종예선은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열리도록 결정되었다. 1차예선에서 대한민국은 바레인, 레바논, 홍콩, 인도와 함께 4조에 속했고, 한국은 7승 1무, 23득점 1실점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어 조 1위로 가볍게 최종 예선에 진출했다.최종예선에 올라온 팀은 한국을 포함해 북한,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일본이었다. 카타르 도하에서 이 5팀과 풀리그 형식으로 겨루어 2위 안에 들어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한국은 1차전에서 이란을 3:0으로 격파하며 순조롭게 출발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계속 가시밭길을 걸었다. 2차전 이라크와의 경기에서는 막판에 집중력 부족으로 실점하며 2:2 무승부를 거두었고, 3차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도 또 막판 집중력 부족으로 실점하며 1:1 무승부에 그쳤다. 4차전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다. 한국은 본선에 가기 위해선 반드시 이 운명의 한일전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러나 후반 15분, 미우라 카즈요시에게 일격을 당하며 결국 0:1로 패배하고 말았다.[28]
마지막 경기를 앞둔 시점에서 최종예선에 진출한 팀들 간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1위는 2승 1무 1패(승점 5점)를 기록한 일본, 2위는 1승 3무(승점 5점)를 기록한 사우디아라비아, 3위는 1승 2무 1패(승점 4점)를 기록한 대한민국, 4위는 한국과 승점은 같으나 골득실에서 2골이 뒤진 이라크, 5위는 2승 2패(승점 4점)로 역시 승점은 같으나 골득실에서 밀린 이란, 6위는 1승 3패(승점 2점)인 북한이었다. 북한은 마지막 경기에서 대승을 거둬도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승점을 넘을 수 없기에 탈락이 확정되었고 나머지 모든 팀들은 본선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경기 대진은 한국 VS 북한, 일본 VS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VS 이란으로 정해졌다.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 모두가 본선 진출의 가능성이 있기에 사전 담합 및 승부 조작 방지를 위해 3경기 모두 다른 경기장에서 동시에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한국으로선 반드시 북한을 2점 차 이상의 점수로 꺾고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 둘 중 한 팀이 무승부 이하의 성적을 거두어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즉 진인사대천명을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이다.
전반전을 0:0으로 마치며 북한의 골문을 여는 데에 실패한 대한민국은 후반전에 심기일전하여 고정운과 황선홍, 하석주가 나란히 골을 터뜨리며 3:0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같은 시각 다른 구장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경기는 사우디아라비아의 4:3 승리로 끝나면서 결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우승으로 24강 본선에 진출하여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었다. 이제 남은 건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 결과 뿐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일본이 2:1로 리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일본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고 한국은 탈락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절망하고 있던 순간, 90분이 다 지났고 추가시간이 적용될 때 이라크의 세트피스 찬스에서 움란 자파르가 극적으로 헤더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리고 30초 후 경기가 그대로 종료되면서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다.
이로서 대한민국과 일본은 2승 2무 1패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득실에서 한국이 +5, 일본이 +3이어서 골득실에서 2골이 더 앞선 한국이 준우승 진출로 극적으로 24강 본선에 진출하여 3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 사건을 한국에서는 도하의 기적이라 부르고, 반대로 일본에서는 도하의 비극이라고 부른다. 천신만고 끝에 3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은 스페인, 볼리비아, 독일과 함께 C조에 속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이어 8년 만에 또 다시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과 한 조에 속했고, 지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이어 또 스페인과 24강 한 조에 속했다. 그러나 독일과 스페인이라는 막강한 상대와는 달리 누구보다도 확실한 1승 제물인 볼리비아가 한 조에 끼어있었기에 16강 진출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장밋빛 희망이 있었다.
- 대표팀 최종 엔트리
- GK : 1. 최인영, 21. 박철우, 22. 이운재
- DF : 3. 이종화, 4. 김판근, 5. 박정배, 7. 신홍기, 12. 최영일, 13. 안익수, 17. 구상범, 20. 홍명보
- MF : 2. 정종선, 6. 이영진, 8. 노정윤, 9. 김주성, 14. 최대식, 15. 조진호, 16. 하석주, 19. 최문식
- FW : 10. 고정운, 11. 서정원, 18. 황선홍
감독 : 김호
6.1. 24강 조별리그 스페인전 - 2 : 2 무
1994 FIFA 월드컵 미국 C조 2경기 1994년 6월 17일 금요일 18:30 (UTC-6) | ||
코튼 볼 (미국, 댈러스) | ||
주심: 페테르 미켈센 (덴마크) | ||
관중: 56,247명 | ||
| 2 : 2 | |
대한민국 | 스페인 | |
85' (FK) 홍명보 90' 서정원 | 51' 훌리오 살리나스 55' 혼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 |
- | 25' 미겔 앙헬 나달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6.2. 24강 조별리그 볼리비아전 - 0 : 0 무
1994 FIFA 월드컵 미국 C조 4경기 1994년 6월 23일 목요일 19:30 (UTC-5) | ||
폭스버러 스타디움 (미국, 폭스버러) | ||
주심: 레슬리 모트램 (스코틀랜드) | ||
관중: 54,453명 | ||
| 0 : 0 | |
대한민국 | 볼리비아 | |
- | - | |
- | 82' 루이스 크리스탈도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6.3. 24강 조별리그 독일전 - 2 : 3 패
1994 FIFA 월드컵 미국 C조 5-2경기 1994년 6월 27일 월요일 15:00 (UTC-6) | ||
코튼 볼 (미국, 댈러스) | ||
주심: 조엘 퀴니우 (프랑스) | ||
관중: 63,998명 | ||
| 2 : 3 | |
대한민국 | 독일 | |
52' 황선홍 63' 홍명보 | 12', 37' 위르겐 클린스만 20' 카를하인츠 리들레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7.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29]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스페인과 독일이라는 두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 엄청난 선전을 했던 것과 달리 그 이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심각한 부침을 겪었다.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한 박종환 전 감독과 선수들의 불화가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대표팀 내부에 파벌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그 절정이 바로 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에서 있었던 이른바 식스 투 참사였다. 이란을 상대로 알리 다에이 한 사람에게만 무려 4골이나 허용하며 2:6으로 대참패를 당했는데 이 때 대한민국 선수들이 거의 태업에 가까운 졸전을 펼쳤기에 이런 의혹이 더욱 크게 불거진 것이다. 결국 대한축구협회는 박종환 전 감독을 전격 경질하였고 후임 대표팀 감독으로 분데스리가 슈퍼스타 출신이었던 '차붐' 차범근을 선임했다.이 대회는 최초로 32개국이 본선 진출하는 대회였고 아시아의 진출권은 3.5장으로 확대되었다. 1차 예선을 치르는 36개 팀을 10개 조로 나누어 각 조 1위를 차지한 팀이 최종예선에 오른다. 그리고 최종예선은 5개 팀이 한 조를 이루어 홈 &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리하여 최종예선에서 각 조 1위를 차지한 팀이 본선에 직행한다. 그리고 2위를 한 팀끼리 대결하여 승자는 본선에 직행하고 패자는 오세아니아 1위와 대결하여 승리해야만 본선에 오를 수 있었다. 1차 예선에서 한국은 태국, 홍콩과 함께 6조에 속했다. 한국은 3승 1무, 9득점 1실점의 성적으로 조 1위를 확정해 가볍게 최종예선에 진출했다.
최종예선에선 일본, 아랍에미리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B조에 속했다. 1차전에서 한국은 카자흐스탄을 3 : 0으로 가볍게 제압했고 2차전에서도 우즈베키스탄을 2 : 1로 제압해 일찌감치 2승으로 조 1위로 치고 나섰다. 그리고 3차전 상대가 바로 숙적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은 1승 1무를 기록하여 2승 1무를 기록한 아랍에미리트, 2승을 기록한 한국에 이어 조 3위에 처져 있었다. 즉, 이 경기 결과에 따라 일본이 조 1위로 치고 나갈 수도 있고 반대로 한국이 조 3위까지 떨어질 수도 있는 분수령이나 다름 없었다. 홈 관중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은 일본은 후반 22분, 야마구치 모토히로의 선제골로 앞서 나갔다. 가모 슈 감독은 후반 35분을 넘어서자 승기를 굳히기 위해 수비를 강화하며 지키기에 돌입했는데 이것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일본이 라인을 내리자 한국의 공격력이 살아났고 결국 후반 38분, 서정원이 천금 같은 동점골을 터뜨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리고 후반 41분에 공격에 가담한 수비수 이민성의 왼발 중거리슛으로 역전골을 터뜨려 극적인 2 : 1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도쿄 대첩이다.
도쿄 대첩으로 한국은 3승을 기록해 조 1위 자리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4차전에서 2점 차이로 순위 경쟁을 하던 아랍에미리트를 3 : 0으로 대파하며 4연승으로 파죽지세를 달렸다. 그러나 5차전 카자흐스탄 원정 경기에서 1 : 1 무승부에 그치며 살짝 기세가 주춤했다. 하지만 일주일 후 6차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무려 5 : 1 대승을 거두어 5승 1무(승점 16점)의 성적으로 2경기 남은 상태에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원시원하게 치른 예선전이었다. 그런데 7차전 일본과의 홈 경기에서 0 : 2로 패해 '져주기 논란'이 일어 차범근 전 감독을 향해 일시적인 혹평이 있었다.[30] 하지만 8차전 아랍에미리트 원정 경기에서 3 : 1 승리를 거두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고 6승 1무 1패(승점 19점)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예선을 마무리 했다.
4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대한민국은 본선에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 원조 붉은 악마 벨기에와 함께 E조에 속했다. 이번 대회는 한국이 '처음으로 역대 월드컵 우승국과 한 조에 속하지 않은 월드컵\'이었다. 이전까지는 꼭 1~2팀 씩 월드컵 우승국과 한 조에 편성되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국이 아닌 팀들과만 한 조에 속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다시 16강 진출에 관한 장밋빛 희망이 이어졌다. 언론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장밋빛 보도를 뿌려대며 당시 세계 축구 정보에 대해 어두웠던 한국 축구팬들의 눈과 귀를 가리며 현혹시켰다. 이러한 장밋빛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줄은 이 때까지 그 누가 알았으리오?
- 대회 최종 엔트리
- GK : 1. 김병지, 22. 서동명
- DF : 3. 이임생, 4. 최영일, 5. 이민성, 6. 유상철, 12. 이상헌, 13. 김태영, 16. 장형석, 19. 장대일, 20. 홍명보
- MF : 2. 최성용, 7. 김도근, 8. 노정윤, 14. 고종수, 15. 이상윤, 17. 하석주
- FW : 9. 김도훈, 10. 최용수, 11. 서정원, 18. 황선홍, 21. 이동국
감독 : 차범근
7.1. 32강 조별리그 멕시코전 - 1 : 3 패
스타드 드 제를랑 (프랑스, 리옹) | ||
주심: 귄터 벤쾨 (오스트리아) | ||
관중: 39,100명 | ||
1 : 3 | ||
대한민국 | 멕시코 | |
27' (FK) 하석주 | 50' 리카르도 펠라에스 75', 84' 루이스 에르난데스 (A. 콰우테모크 블랑코) | |
30' 하석주 | -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7.2. 32강 조별리그 네덜란드전 - 0 : 5 패
오렌지 벨로드롬 (프랑스, 마르세유) | ||
주심: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 ||
관중: 55,000명 | ||
5 : 0 | ||
네덜란드 | 대한민국 | |
37' 필립 코쿠 (A. 데니스 베르캄프) 41'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A. 빔 용크) 71' 데니스 베르캄프 (A. 아론 빈터르) 80' 피에르 판호이동크 (A.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83' 로날트 더부르 (A. 빔 용크) | -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7.3. 32강 조별리그 벨기에전 - 1 : 1 무
파르크 데 프랭스 (프랑스, 파리) | ||
주심: 마르시우 헤젠지 지 프레이타스 (브라질) | ||
관중: 45,500명 | ||
1 : 1 | ||
벨기에 | 대한민국 | |
7' 뤼크 닐리스 (A. 고르단 비도비치) | 72' 유상철 (A. 하석주) |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8. 둘러보기
8.1. 나라별 국가대표팀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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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vs 네덜란드 1:0 (연장) 승 |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결승전 | |||||
(2008) vs 독일 1:0 승 | (2012) vs 이탈리아 4:0 승 | (2024) vs 잉글랜드 2:1 승 | |||
기타 경기 | |||||
(1994) vs 대한민국 2:2 무 | (2002) vs 대한민국 0:0 무 (PSO 3:5 패) | (2014) vs 네덜란드 1:5 패 | (2022) vs 일본 1:2 패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경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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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vs 헝가리 2:3 승 | (2002) vs 브라질 0:2 패 | (2014) vs 아르헨티나 1:0 (연장) 승 |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결승전 | |||||
(2008) vs 스페인 0:1 패 | |||||
기타 경기 | |||||
(1982) vs 오스트리아 1:0 승 | (1994) vs 대한민국 3:2 승 | (2002) vs 대한민국 1:0 승 | (2014) vs 브라질 7:1 승 | (2018) vs 멕시코 0:1 패 | |
(2018) vs 대한민국 0:2 패 | (2022) vs 일본 1:2 패 | ||||
※ 동독 대표팀 기록 제외 |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FIFA 월드컵 | ||||
(1998) vs 대한민국 3:1 승 | (2018) vs 독일 1:0 승 | (2018) vs 대한민국 2:1 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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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vs 스페인 0:1 (연장) 패 | |||||
기타 경기 | |||||
(1998) vs 대한민국 5:0 승 | (2006) vs 포르투갈 0:1 패 | (2014) vs 스페인 5:1 승 | (2022) vs 아르헨티나 2:2 무 (PSO 3:4 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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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vs 대한민국 1:1 무 | (2014) vs 대한민국 1:0 승 | (2018) vs 일본 3:2 승 | (2018) vs 잉글랜드 2:0 승 |
8.2. 감독별 국가대표팀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555555,#aaaaaa | 성인 1996~1998 | 전체 (1997 | 1998) |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멕시코전 · 네덜란드전 · 벨기에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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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상 마지막 A매치 세계 메이저대회 올림픽 축구 대회였다. 이 시절 올림픽 출전 세계 선수들은 준프로선수로 대우받던 선수들이었으며, 대표적인 선수가 금메달팀 스웨덴의 군나르 노르달 선수였다. 이후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뤄졌던 1950년에 월드컵이 다시 시작되면서 월드컵과 올림픽의 격차가 커지면서 올림픽 축구는 유럽과 남미팀들에게 메이저대회로 평가 받지 못한다.[2] 우연의 일치인지 1950 브라질 월드컵 개막전 킥오프가 시작된 그 시점에 지구 반대편 한반도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3] 16위(2패).[4] 객관상으로 대한민국의 첫 16강 기록은 이 대회이나, 당시는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 1라운드 16강 조별리그였으며, 당시 피파는 1938 월드컵에서 인도네시아(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무혈 입성 참패 탈락과 더불어 아시아 축구의 수준을 고려하지 못하고(1938년 인도네시아의 15개국 본선(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 무혈입성 출전이 유일했고, 1950년 인도가 자격을 얻었으나 불참했던 만큼 실력의 가늠이 어려웠을 것이다.)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경쟁 없이 아시아끼리만 지역예선을 치르게 했다. 그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대만은 기권하고 한국은 라이벌 일본하고만 1차전, 2차전까지만해서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였고,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별다른 경쟁 없이 16개국 본선에 진출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1954월드컵 16강 조별리그에서 한국이 헝가리에게 0:9, 튀르키예에게 0:7 참패를 당하며 탈락하자 피파는 아시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그 후 1958 월드컵 지역예선부터 아시아는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경쟁을 치러야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도록 바뀌었고, 그 후 한국도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했으며,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부터 24개국 본선으로 확대되었고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24개국 본선부터 16강이 2라운드로 바뀌었다.[5] 현대에 이렇게 했다가 피파는 정치가 축구에 개입하는 것을 엄금하기 때문에 제재를 받아 출전권이 박탈된다. 이러한 이유로 자국 땅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연주하기 싫었던 북한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3차 예선과 최종 예선에서 자신의 홈 경기를 포기하고 제3국에서 남북전을 치렀으며,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2차 예선에서는 철저하게 무관중 경기로 치른 바 있다. 대신 이 때는 국가 연주와 국기 게양은 허용했다.[6] 당시에는 합산 점수제가 도입되지 않아서 스코어에 관계없이 오로지 전적만 따졌다. 그래서 스코어와 상관없이 1승 1패 동률이 되면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고, 거기서도 무승부가 나면 추첨으로 결정했다. 후술한 대로 스페인이 튀르키예에게 유럽예선에서 탈락하여 16개국 본선 진출에 실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7] 당시 국명 네덜란드령 동인도[8]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어 15개국이 되었다.[9] 영어식 표기인[10] 원래는 벌금도 물어야 했으나, 선수단이 먼저 떠나버려서 주지 못하고 4년째 묵혀있던 이전 대회인 1954년 대회의 2경기 출전금을 여기다 쓴 셈 치고 넘어갔다.[11] 이때 전반전에 일본의 기습에 선취골을 허용한 데다가 한국 선수 한 명이 부상으로 이탈해서 10명으로 싸워야 했다. 이때는 선수 교체 규정도 없어서 고전했지만, 다행히 전반 말미에 연속골이 터지며 역전에 성공했다. 이때 한국과 일본은 아직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고, 정부나 국민들 사이에서도 반일 감정이 강해서 일장기를 계양해야 하는 문제로 시끄러웠지만 결국 허가되었다.[12]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장기영(당시 한국일보 사장)은 군사 정권의 일원이던 김동하 전 해병대 사령관을 찾아가 설득했고, 김동하는 이들의 뜻을 박정희에게 전달하여 사흘 후에 면담을 가졌다. 이때 장기영은 "정치적인 이유로 중요한 국제 경기에 대표팀을 출전시키지 않는다면 국제적으로 한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라고 박정희를 설득했고, 이에 박정희도 스포츠에는 이념과 사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대표팀의 유고슬라비아 원정과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한국 입국을 허락했다. 별외로 박정희는 이때 대표팀 골키퍼였던 함흥철의 팬이었고, 장기영과 함께 온 함흥철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13] 당시 선수들은 37시간의 비행을 거쳐 유고슬라비아에 도착했고 3시간 차이의 시차도 힘들어했다. 거기다가 전반전에 간판 스트라이커인 최정민이 발목 부상으로 이탈했고, 그나마 전반 42분까지는 버텼지만 결국 선제골을 허용했고 후반전에는 수적 열세와 피지컬, 개인기에 밀리며 4골을 더 내주었다. 한국은 후반 정순천이 한 골을 만회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14] 만일 이 골이 들어가서 역전에 성공해 2:1 한국의 승리로 끝났다면 한국은 호주와 승점과 골득실 및 다득점에서 모두 같아지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당시의 룰을 적용할 시 한국은 호주와 플레이오프를 치러 한 번 더 2차 예선 진출권을 노려볼 수 있었다.[15] 결과적으로 호주는 2차 예선에서 지금의 짐바브웨의 전신인 로디지아를 격파하고 최종예선까지 올라갔지만, 최종예선에서 이스라엘에게 패하며 결국 이 대회의 유일한 월드컵 본선행 티켓은 이스라엘에게 넘어갔다.[16] 위키백과에는 1974 월드컵 지역예선에서의 일로 적혀있지만 1970 멕시코 월드컵 지역예선에서의 일이 맞다.[17] 만약 현재처럼 원정 다득점 원칙을 적용한다고 해도, 한국은 이미 원정 다득점 원칙에서 호주에게 밀렸기 때문에 월드컵 본선에 갈 수 없었다.[18] 다만 1조는 6팀이 한 조에 속했기 때문에 예외로 2위까지 최종예선에 올라갈 수 있었다.[19] 그 와중에 호주를 상대로는 또 1무 1패로 열세를 보였다. 나머지 국가들 상대로는 홍콩 상대로 2승, 이란 상대로 2무, 쿠웨이트 상대로 1승 1무를 기록했다. 1970년대에 한국의 가장 큰 천적은 확실하게 호주였던 것.[20] 20위(승점 1점 1무 2패).[21] 물론 K리그의 탄생은 대학야구에서 출발한 KBO 리그와 다르게 당시 정치권 인사들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출범한진지라 연고지 의식이 미약하다는 고질병을 낳기도 했다.[22] 물론 경기가 열린 곳이 해발 1400m의 고지대인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였다는 것도 부진의 원인이었다. 볼리비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고지대가 홈 구장인 팀을 이기는 건 쉽지 않다. 이후 네팔은 홈에서 말레이시아와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이것은 한국이 말레이시아를 누르고 1차예선을 통과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23]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첫 본선 득점.[24] 22위(3패).[25] 준우승 진출은 UAE.[26] 20위(승점 2점 2무 1패).[27] 그 전까지는 프로축구 팀 감독이 겸임하는 시스템이었다.[28] 당시 일본 킬러로 정평이 난 황선홍은 경고 누적으로 경기에 나설 수 없었고, 대신 선발 출장한 노정윤이 전반전에 일본 골키퍼와 충돌해서 부상을 입고 나가면서 공격력이 약화되었다.[29] 30위(승점 1점 1무 2패).[30] 져주기 논란이 있었던 것은 차기 대회 공동 개최국인 일본의 본선 진출을 위해 일부러 져준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당시 태극전사들의 플레이가 눈에 띄게 무기력했기에 더더욱 그런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차 감독은 당시 한국은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지만 일본은 이 경기마저 지면 탈락이었기에 사생결단으로 나왔고 그 때문에 진 것이라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