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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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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1996~1998
전체 (1997 | 1998)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멕시코전 · 네덜란드전 · 벨기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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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대 감독
차범근
<colbgcolor=#0073E5><colcolor=white>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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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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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정성진 (골키퍼 코치)
주장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최영일
계약 기간 1997년 1월 8일 ~ 1998년 6월 21일[1] #
(1년 6개월 / 530일)
계약 종료 (성적 부진에 따른 경질)
연봉 1억 2000만 원 (감독) #
전술 스타일 롱볼 축구
3-4-3 또는 3-5-2 포메이션
성적 A매치 48전 25승 12무 11패 (승률 52%)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30위 / 조별리그)[2]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60대 감독 차범근의 대표팀에 대해 정리한 문서.

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에서 이란 쇼크로 인해 박종환 전 감독은 경질되었다. 그리고 당시 야인이었던 차범근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차범근호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압도적으로 통과했다. 최종 예선 성적이 무려 6승 1무 1패. 바로 전 대회인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였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차범근호를 향한 기대는 하늘을 찔렀다. 삼성 연구소에서는 '차범근 리더십'을 연구한다는 기사가 일간지 기사로 실렸고, 심지어 대통령으로 뽑자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만큼 월드컵 32강 본선에서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32강 본선 조별리그에서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 등 강호를 상대로 본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1무 2패 승점 1점 1998년 프랑스 월드컵 30위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3] 특히, 네덜란드전에서 나온 0:5라는 충격적인 대패 때문에 차범근은 월드컵 도중 경질되고 말았다.

2. 전술

차범근 전 감독은 '템포 축구'를 강조했다. 그의 전술은 전적으로 측면 돌파를 중시했는데 선수 개개인이 공을 가진 시간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의 빈틈을 공략, 발 빠른 윙어(서정원, 고정운, 이상윤 등)를 활용하여 측면을 무너뜨리고 결정력을 가진 스트라이커(최용수)가 골망을 흔든다. 한마디로 타겟 박아놓고 양 사이드 윙어 무한 크로스 당시 차범근이 사용한 3-5-2 전술은 현재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실상 5-3-2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4 윙어 전술'로 미드의 3명 중 2명이 윙어(...). 즉 중앙은 유상철이나 김도근이 혼자 버티는 전술이었다. 쉽게 말하면 중원삭제. 당시 유행에 가까웠던 사령탑 축구[4][5] 덕에 대한민국 언론은 계속 '플레이 메이커'를 찾았고 그냥 중앙에 선다는 이유로 유상철을 '플레이 메이커'나 '게임 메이커'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게임이 안 풀리면 유상철에게 욕 몰빵 또한 그 때는 왼편의 하석주와 오른쪽의 최성용이 최전성기이기도 하여 이들의 활동량으로 중앙에서의 빈 공간을 커버하였다.[6]

딱 생각해 봐도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전술이지만 당시 아시아 축구 수준이 워낙 후졌기 때문에,[7] 지역 예선에선 가슴이 뻥뚫리는 시원한 공격 축구를 보여주면서 6승 1무 1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올렸다. 거기에 홍명보가 컨트롤하는 3백이 아시아에서는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실점도 거의 없었다. 최종예선 1패도 본선 진출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1패 뿐이다. 다만 그 1패가 하필 한일전이라 범국민적인 인기도 조금 식었다.[8]

하지만 유상철김남일이나 박지성에 비해 건장하고 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코 이들처럼 재빠른 타입의 선수는 아니다. 느리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효과적으로 중원에서 커버하기는 쉽지 않다. 즉 딱 아시아권에서나 통할만하지 세계구급에는 전혀 통하지 않을 전술이었다는 것. 다만 차범근 전 감독의 실전 경험 부족만을 탓하기에는 당시 한국 축구대표팀의 전술은 감독이 누구든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 뿐 미드필더에 중앙 1명, 측면 4명을 두는 것은 대부분 비슷했다. 단지 강팀과의 경기에선 중앙을 2명으로 늘리고 원톱을 두는 3-6-1에 가까운 전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감독 성향에 따라 무엇을 더 많이 쓰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차범근 역시 월드컵 본선에선 위와 같은 극단적 전술이 아닌 중앙 미드필더 2명에 원톱을 내세우며 중원 싸움에 힘을 보탰다. 중앙 미드필더 1명에 투톱으로 경기한 것은 최용수, 김도훈 투톱을 내세웠다가 0:5로 대패한 네덜란드전 초반뿐이다. 그냥 당시 대한민국 축구가 모든 면에서 세계 수준에 못 미쳤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또한 지적할만한 점으로, 프랑스 월드컵 당시 참가국 32개국 중 독일[9]과 더불어 유이하게 상당히 고전적이었던 전술인 스위퍼식 맨투맨 수비를 택했던 것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었다. 스위퍼인 홍명보를 수비의 축으로 두고, 최영일, 장형석, 김태영, 유상철, 이민성 등의 수비수를 상대 공격수와 1:1로 마크하게 하는 것이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된 수비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모두가 알다시피 본선에서는 상대 공격수와 미드필더들의 기량에 압도적으로 밀려버린 대한민국 수비수들이 고전하면서 완벽하게 실패하게 된다.

3. 활동

3.1. 1997년

아시아 지역 예선이 시작되는 1997년 초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에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1996 아시안컵 8강전 이란과의 경기에서 전반전을 2-1로 앞서고도 후반전 알리 다에이에게 완전히 농락당하며 4골을 허용해 일명 '씩스투 참사', 2:6 역전패라는 최악의 패배를 당한 뒤 박종환 전 감독이 경질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대표팀 일부 선수들이 박종환 전 감독을 쫓아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태업을 해서 대패했다는 설이 있고 심지어는 사실상 정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차범근 전 감독으로서는 이 난관을 뛰어넘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1997년 1월 호주 4개국 친선대회에서 데뷔전을 가진 차범근 감독은, 주전 선수가 대거 포함된 노르웨이에게 1-0 승리를 거두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이후 호주에게 1-2, 뉴질랜드에게 3-1로 승리하며 2승 1패로 대회를 마무리한다. 우려 속에서 출범한 차범근호는 초반 좋은 분위기와 함께, 태국, 홍콩과 함께 속했던 1차 예선 6조를 3승 1무 9득점 1실점으로 무난하게 뚫었다.[10]

5월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2-0 승리, 일본 원정에선 1-1 무승부를 거뒀고, 6월 월드컵 1차예선을 마무리한 직후 곧바로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에 출전했다. 이번 대회부터 각국의 국가대표팀만 참여하는 풀리그 방식의 대회가 되면서 대표팀은 이집트, 가나, 유고슬라비아와 3연전을 가졌고 2승 1무라는 좋은 성적으로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8월에는 브라질과의 A매치에서 1-2로 아깝게 패했고, 타지키스탄에겐 4-1, 중국과의 2차 정기전에선 0-0으로 무승부를 거두었다.

9월부터 11월까지 집중적으로 치르게 된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차범근호는 그야말로 쾌속 질주를 한다. 8경기 6승 1무 1패, 19득점 7실점으로 공수 모두 안정된 축구를 선보여 큰 호평을 얻고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간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월드컵 4회 연속 본선진출에 성공한다.

3.1.1. 월드컵 2차 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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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월드컵 최종 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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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1998년

본선 진출 확정 이후, 차범근호는 유럽 강호와의 맞대결을 추진하기 시작했지만 섭외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유럽팀과의 경기를 위해 한동안 참가하지 않았던 태국 킹스컵에도 참가했고, 덴마크 국내리그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1-2로 졌다. 그래도 남은 이집트, 태국과의 경기를 잘 치러 대회 우승을 한다.

2월에는 호주, 뉴질랜드 전지훈련을 가서 뉴질랜드에게 1-0, 호주에겐 0-1로 졌다. 또한 호주 현지 클럽팀들과 3차례 경기를 치러 2승 1패를 기록하고 돌아왔다. 3월 다이너스티컵에선 2승 1패로 표면적으론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으나 일본에게 1-2로 패했고, 최약체 홍콩에게도 1-0 신승을 거두는 등 내용은 좋지 못했다.

4월, 차범근호는 회심의 유럽 원정 전지훈련을 다녀온다. 본선 개최지 프랑스를 시작으로 슬로바키아, 마케도니아, 유고슬라비아를 돌며 5경기를 치렀고, 승리는 FC 메스에게 거둔 1승이 유일했다. 유럽 중하위권 팀이라 여겼던 슬로바키아, 마케도니아에겐 무승부, 월드컵 진출팀인 유고슬라비아에게 1-3 완패를 당했다.

전지훈련 이후 본선진출팀인 자메이카와의 2연전, 월드컵 본선 진출은 좌절되었으나 UEFA 유로 1996 준우승팀으로 만만치 않았던 체코, 그리고 중국을 최종 평가전 상대로 잡으며 마지막 담금질을 시작했다. 자메이카와는 1승 1무, 체코에게도 경기력은 밀렸지만 2-2 무승부를 만들어내며 분위기를 좋게 가져갔으나 중국과의 최종 평가전에서 황선홍을 잃으며 본선 전망은 매우 암울해지고 만다.

결국 황선홍이라는 핵심 공격수를 잃은 대표팀은, 멕시코에게 1-3 역전패, 승리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상대한 네덜란드에게 0-5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차범근 감독은 대회를 채 끝마치지도 못한 채 중도 경질되고 말았다.

3.2.1. 평가전 및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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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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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적

경기 수 득점 실점 승률[11]
48 25 12 11 79 49 52%
일시 / 장소 상대국 결과 대회 득점 비고
1997년
1997년 1월 18일
(호주, 멜버른)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1:0
친선 경기 김도훈 [b]
1997년 1월 22일
(호주, 브리즈번)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1:2
하석주
1997년 1월 25일
(호주, 시드니)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뉴질랜드
3:1
박건하, 고종수
유상철
1997년 2월 22일
(홍콩, 홍콩)
파일:영국령 홍콩 기.svg
홍콩
2:0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지역 예선 1차 예선
서정원, 최문식
1997년 3월 2일
(태국, 방콕)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3:1
노상래, 하석주
최문식
1997년 4월 23일
(중국, 베이징)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2:0
친선 경기 박건하(2골)
1997년 5월 21일
(일본, 도쿄)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1:1
유상철 [b]
1997년 5월 28일
(대전)
파일:영국령 홍콩 기.svg
홍콩
4:0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지역 예선 1차 예선
최용수(2골)
유상철, 박건하
1997년 6월 1일
(서울)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0:0
1997년 6월 12일
(서울)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3:1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박건하, 유상철
최문식
1997년 6월 14일
(수원)
파일:가나 국기.svg
가나
3:0
서정원, 최문식
최용수
1997년 6월 16일
(서울)
파일: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1:1
서정원 [b]
1997년 8월 10일
(서울)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1:2
친선 경기 김도근 [b]
1997년 8월 24일
(대구)
파일:타지키스탄 국기.svg
타지키스탄
4:1
김도훈(2골)
최용수, 유상철
1997년 8월 30일
(서울)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0:0
1997년 9월 6일
(서울)
파일:카자흐스탄 국기.svg
카자흐스탄
3:0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지역 예선 최종예선
최용수(3골)
1997년 9월 12일
(서울)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우즈베키스탄
2:1
최용수, 이상윤
1997년 9월 28일
(일본, 도쿄)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2:1
서정원, 이민성 도쿄 대첩[b]
1997년 10월 4일
(서울)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아랍에미리트
3:0
하석주, 유상철
이상윤
1997년 10월 11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파일:카자흐스탄 국기.svg
카자흐스탄
1:1
최용수
1997년 10월 18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우즈베키스탄
5:1
최용수(2골)
유상철, 고정운
김도훈
1997년 11월 1일
(서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0:2
[b]
1997년 11월 9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아랍에미리트
3:1
김도훈(2골)
이상윤
1998년
<rowcolor=#000000> 1998년 1월 25일
(태국, 방콕)
파일:덴마크 국기.svg
덴마크
1:2
킹스컵 신병호 [A][b]
1998년 1월 27일
(태국, 방콕)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2:0
킹스컵 최용수, 이상윤
1998년 1월 29일
(태국, 방콕)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2:0
고종수, 최용수
1998년 1월 31일
(태국, 방콕)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1:1
(PSO 5:4)
최용수 대회 우승
1998년 2월 7일
(뉴질랜드, 오클랜드)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뉴질랜드
1:0
친선 경기 최용수
1998년 2월 11일
(호주, 시드니)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0:1
<rowcolor=#000000> 1998년 2월 13일
(호주, 울런공)
울런공 울브스 1:2
친선 경기 양현정 [A]
<rowcolor=#000000> 1998년 2월 11일
(호주, 시드니)
시드니 유나이티드 1:0
최용수 [A]
<rowcolor=#000000> 1998년 2월 11일
(호주, 시드니)
마르코니 3:1
최용수(2골)
유상철
[A]
1998년 3월 1일
(일본, 요코하마)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1:2
다이너스티컵 이상윤 [b]
1998년 3월 4일
(일본, 요코하마)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2:1
최성용, 이상윤
1998년 3월 7일
(일본, 도쿄)
파일:홍콩 특별행정구기.svg
홍콩
1:0
최용수 2승 1패
대회 3위[A]
1998년 4월 1일
(서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2:1
친선 경기 이상윤, 황선홍 [b]
<rowcolor=#000000> 1998년 4월 6일
(프랑스, 생드니)
생드니 FC 1:2
친선 경기 진순진 [A]
<rowcolor=#000000> 1998년 4월 11일
(프랑스, 메츠)
파일:FC 메스 로고.svg
FC 메츠
2:1
김도근, 최용수 [A]
1998년 4월 15일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파일:슬로바키아 국기.svg
슬로바키아
0:0
친선 경기
1998년 4월 18일
(마케도니아, 스코페)
파일:북마케도니아 국기.svg
마케도니아
2:2
장형석, 최용수
1998년 4월 22일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파일: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1:3
황선홍 [b]
1998년 5월 16일
(서울)
파일:자메이카 국기.svg
자메이카
2:1
이상윤(2골) [b]
1998년 5월 19일
(서울)
0:0
1998년 5월 27일
(서울)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
2:2
황선홍, 최용수
1998년 6월 4일
(서울)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1:1
이상윤
1998년 6월 13일
(프랑스, 리옹)
파일:멕시코 국기.svg
멕시코
1:3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하석주 [b]
1998년 6월 20일
(프랑스, 마르세유)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0:5
[b]마르세유의 치욕
1998년 6월 25일
(프랑스, 파리)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
1:1
유상철 [b][33]

5. 평가 및 후일담

차범근호의 실패는 4년 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완벽히 극복되기 전까지, 차범근 본인은 물론 한국축구계에 큰 상처로 남았다. 당시에도 32개팀 본선 같은 조에 속했던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가 세 팀 모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축구계는 물론 언론과 (축구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국민들이라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범근호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월드컵 최종 예선의 결과가 매우 좋았다(6승 1무 1패).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9회의 지역 예선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이었고, 특히 골잡이 최용수황선홍, 수비의 지휘자였던 홍명보, 미드필더 유상철, 하석주 등의 활약이 대단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기대가 큰 상황이었다.

둘째, 감독이 차범근이었다. 후일 박지성손흥민이 차례로 등장하기 전까지 차범근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축구 선수로서 인기와 존중을 받는 대상이었으며, 본토 축구를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에 독일 리그에서 뛰었기 때문에 차범근의 훈련과 코칭방식은 선진 축구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최종 예선 당시 차범근이 랩탑 컴퓨터를 그라운드에서 수시로 사용하는 것이 큰 화제가 되었을 정도이다.[34]

셋째,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의 선전으로 대표팀의 본선 성적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스페인, 남미 볼리비아에게 무승부로 총 승점 2점을 얻고, 독일과도 좋은 승부를 펼쳤으니 벨기에나 멕시코는 물론 네덜란드와도 해 볼 만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게다가 그 미국 월드컵은 무려 도하의 기적이라 불리는 막판 뒤집기 턱걸이로 간신히 진출했음에도 그런 성적이었으니 아시아 예선을 씹어먹은 시점에서는 미국 월드컵 이상의 성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물론 세월이 흐른 후 돌이켜보면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선전한 것이고, 그에 반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다소 불운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근거가 부족한) 기대를 가졌다.[35]

넷째, 1997년 외환 위기의 영향이 컸다. 1997년 12월~1998년 6월은 많은 국민들이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시대였고, 박찬호, 박세리 등 운동선수 개인의 활약에서까지 위안을 얻는 상황이었다. 2020년대보다 민족주의, 국가의 위신에 대한 기대와 가치 부여 정도가 훨씬 높던 시절이었으므로, 차범근호의 활약을 그만큼 많은 국민들이 바라고 있던 상황이었으며, 언론 또한 이에 편승했던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겉으로는 16강 진출에 대해 해 볼 만 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했으나, 해당 기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시 월드컵을 취재하는 기자들 중 아무도 본선 조별 리그 이후의 숙박 예약을 잡아 놓지 않고 전부 본선 조별 리그 후 귀국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는 말이 있었다.

월드컵 직전에 있었던 중국과의 친선 경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벤치에 앉아 있다가 돌아온 황선홍은 '또 실수할까봐 겁먹고 일부러 안 나온 거 아니냐?' 라는 비난까지 받자 '한국에서는 도저히 축구를 할 수 없겠다'라고 판단해 J리그로 진출한다. 이후 2010년 6월 방송한 무릎팍 도사에서 털어놓은 바로는 동네 수퍼마켓에 갈 수조차 없었다고... 그리하여 일본에서의 영입 제의가 없었음에도 본인이 건너가 적극적으로 알아봤다고 한다.

32강 E조의 조별 리그 6경기 중, 승패가 갈린 건 한국이 패한 2경기 뿐이었다. 나머지 4경기는 전부 다 무승부. 결국 한국을 더 큰 점수 차로 바른 네덜란드가 조 1위, 한국을 적당히 발라먹은 멕시코가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고, 한국과 비긴 벨기에는 조별 리그 탈락했다. 사실 지금까지의 대회에서 한국을 이긴 팀은 단 두 번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2라운드에 진출했다. 예외는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서 9위로 2라운드 진출에 실패한 튀르키예와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 H조 최하위로 탈락한 가나뿐.[36] 여담으로,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의 경우 한국은 3패를 기록했는데, 이 때 한국과 같은 조의 3위를 기록한 우루과이는 1승 1무 1패로 3위 6개국 중 상위 4개팀의 자격으로 16강에 진출.

같은 조에서 16강에 진출한 네덜란드와 멕시코의 운명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는 16강에서 완전히 녹슨 전차가 된 독일을 상대로 난투극 끝에 1:2로 털리고 떨어진다. 만년 16강 멕시코.[37] 반면 네덜란드는 16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2:1로 이기고 8강에 진출한 뒤 8강에서 거함 아르헨티나를 난투극 끝에 2:1로 간신히 쓰러뜨렸으나 힘이 다 소진되어서인지 4강에서는 브라질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패하고 3위·4위전으로 가고 말았다. 거기서는 8강에서 독일을 3:0으로 완승해버리고 4강에 왔지만 프랑스에게 막혀 3위·4위전으로 온 크로아티아에게 1:2로 패하면서 4위로 마감했다.

차범근 본인에게도 이 당시 월드컵은 가장 뼈아프게 남아있다. 이제 그렇게 아플 일도 없을 텐데... 그래도 2014년 거스 히딩크를 만나 "그때 저를 정말 힘들게 하셨어요."라고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조금은 털어낸 모양. 그러자 히딩크는 화들짝 놀라면서 "정말 미안하다. 이 부분은 편집해 주세요."라면서 농담까지 했다.

반면,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시점. 전술한대로 98년 월드컵 차범근이 불명예 퇴진당하고 모든 미디어들이 차범근에 대해 없는 사실까지 얹어가면서 융단폭격을 가할 때, 언론사에서는 중앙일보 손장환 기자와 김어준의 딴지일보가 가장 중립적으로 차범근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며 기사를 냈다. 한참 PC통신과 인터넷 초창기 냄비처럼 들끓던 여론 사이에서 딴지일보가 차범근 감독에 대해 중립적인 내용의 칼럼을 썼던 것을 보면서 세상이 나에게 등을 보일 때 유일하게 울부짖은 사람[38]이라고 감사했었고 그 후로 친해졌다고 한다.

차범근과 함께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했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가 월드컵 도중 차범근이 경질되자 "축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차범근 같은 인물을 경질시킨 것은 한국 축구가 아직 개발도상국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맹비난하기도 했다. #

차범근은 2010년 6월경 기사에서 무릎팍도사 출연 제의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자신과 가족들에게 큰 상처[39]였음을 말하며 아직 출연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무릎팍도사는 끝끝내 차범근을 출연시키지 못한 채 종방했지만, 차범근과 가족들이 받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차범근은 이후 한국 축구의 승부조작과 여러 어두운 면을 폭로했고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축구협회는 5년 동안 국내 축구계 활동을 금지한다는 중징계에 처하려다가 AFC에게 아시아 축구 영웅을 지나치게 박대한다는 비난을 듣고 3년으로 줄인다. 결국 차범근은 중국 슈퍼리그에서 활동하며 지내며 한동안 국내 축구계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MBC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 명성을 약간이나마 회복한다. 지금은 1998년 당시 언론의 '차범근 죽이기'가 과도했다는 것이 축구 팬들의 중론이지만 이미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며 좀처럼 언급조차 되지 않는, 아니 하여서는 안 되는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16년 뒤 또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똑같이 1무 2패로 탈락하여[40] 당시 감독이던 홍명보를 유임시킨다는 반응에 차두리그럼 16년 전은 왜...?라고 하면서 무척이나 섭섭한 감정을 SNS으로 쓸 정도였다. 그러자 차범근은 그 입 다물라!라고 엄중하게 자제시켰다고 한다. 물론 알다시피 홍명보도 비난 여론 속에 똑같이 모가지당했다.[41]

이 대회 네덜란드전에서 고군분투하며 축구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신예 선수였던 이동국[42]이 2020년 10월 26일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이 대회에서 선수로 뛰었던 대한민국 선수는 모두 은퇴했다.

[1] 계약 기간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까지 1년 6개월 동안이었다. 기사(연합뉴스) 하지만 본선 조별 리그 E조 네덜란드전에서 훗날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 되는 거스 히딩크에게 0:5라는 치욕적인 참패를 당하고 광탈하자 경질됐다. 김평석 전 수석코치가 남은 벨기에전을 소화했다.[2] 32개 진출팀 중 30위 기록.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월드컵 최하위 기록.[3] 멕시코전 1:3 패, 네덜란드전 0:5 패, 벨기에전 1:1 무.[4] 당시 어지간한 강팀들은 미드필드 공수를 조율해 주는 사령탑이 하나씩은 있었는데 지네딘 지단(프랑스), 데이비드 베컴(잉글랜드), 루이스 피구(포르투갈), 후안 베론(아르헨티나), 나카타 히데토시(일본) 등이 대표적.[5] 당시의 한국 국대에서 그나마 이러한 중원의 사령탑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는 선수는 홍명보였는데 문제는 홍명보가 미드필드로 올라가면 수비가 흔들린다는 점. 이는 홍명보가 미드필더로 뛰었던 프랑스 월드컵 예선 한일전 2차전 홈경기에서 0:2로 털리면서 드러났다.[6] 사실 3-5-2 전술은 전술이 발전한 현대에도 쓰이는 포메이션 중 하나기에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현대의 3-5-2는 활동량이 좋거나 공격적인 재능이 있는 중미들을 양쪽에 배치해서 하프윙으로 써서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를 유지하지만 차범근은 진짜 공격만 보고 윙어를 기용했던 점이었다. 물론 이 시절에는 점유율의 중요성과 이를 위한 최적화 전술들과 공격적인 메짤라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이고 현대의 3-5-2 또한 이런 점유율 축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과도기적인 전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7] 공격적인 3-5-2 전술은 웬만한 강팀도 함부로 사용하기 힘들다. 그러나 약팀이 이 전술에 제대로 걸려들면 손도 못쓰고 대량 실점 당하기 때문에 두 팀의 전력 차가 심하게 나는 경우 강한 쪽에서 가끔 시도하는 편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역습 얻어맞고 플레이가 꼬여 실패한다. 한국팀의 경우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이 전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2019년 9월 5일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한 조지아에게 시전했다. 물론 실패하고 망신만 당했다.[8] 다만 이 경기에서 우리나라 수비의 핵인 홍명보는 경고 누적으로 결장했다.[9] 1990년대의 독일 대표팀은 마티아스 자머로타어 마테우스라는 두 걸출한 스위퍼들 때문에 포백 전술로의 전환이 상당히 늦었고, 이는 독일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유로 1996 우승을 제외하고는 긴 암흑기를 걷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10] 말이 좋아 무난이지, 예전에 큰 점수 차로 쉽게 이기며 올라가던 1차 예선이 아니라서 언론의 우려가 컸다. 홍콩과의 첫 원정 경기에서 전반 무득점에 2:0 신승, 태국 원정에서 피아퐁에게 동점골 맞으며 고전하다 3:1로 승리하고 홍콩을 홈에서 4:0으로 이기며 분위기를 좀 탔으나 홈에서 태국과 득점 없이 비기는 등 분명 이전보다는 고전을 했다. 결국 훗날 시간이 흘러 아시아 축구의 상향 평준화가 지속되면서 이 때의 결과는 현 시점에서 재평가를 받았다.[11] 축구야구와 달리 무승부를 분모에 산입 계산해서, 무승부는 승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승률 문서 참조 바람.[b]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진출팀.[b] [b] [b] [b] [b] [A] 비공식 경기[b] [A] [A] [A] [b] [A] [b] [A] [A] [b] [b] [b] [b] [b] [33] 이 경기는 차범근 감독의 대회 중도 경질로 인해 김평석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 자격으로 치렀으며,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상대팀을 탈락시킨 경기가 되었다.[34] 당시 한국축구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상황이다. 데이터와 영상을 통한 분석은 코칭스태프와 전력분석팀을 거쳐 감독에게 전달되는 것이 보통인데, 이걸 감독이 직접 하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나중에 컴퓨터 안에 실제로는 별 거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35]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크로아티아, 멕시코 등 세계 강호들도 그동안 98월드컵부터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을 할 정도로 월드컵 본선 무대는 죽음의 조가 많은 만큼 쉬운 대회가 아니다.[36] 비슷하게 한국이 토너먼트에 가든 못가든 상관없이 한국을 이긴 팀은 우승을 못하는 징크스가 있는데,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당시의 아르헨티나를 제외하면 모두 우승에 실패했다. 한국이 4위 신화를 쓴 2002년에도 4강전에서 한국의 돌풍을 저지했던 독일은 브라질에 져서 준우승을 했으며, 그 뒤 한국을 이긴 터키도 그때 단계가 3·4위전이였기 때문에 징크스가 이때도 안 깨졌으며, 한국이 16강(15위)를 기록했던 2010년에도 조별 리그 2차전에서 승리했던 아르헨티나는 8강 5위, 16강에서 승리했던 우루과이는 4위에 그쳤다.[37] 그러나 20년 뒤의 월드컵에서 멕시코는 독일을 다시 만나 결국 1:0으로 꺾음으로써 지난 그 패배를 설욕하는 데 성공한다.[38] 해당 기사에 언급된 "그래, 차범근을 사형시켜라!" 딴지 기고문의 내용은, 단순히 월드컵의 불명예 경질 외에도 그후 이어진 K리그 승부 조작 발언 이후 더 가혹해진 언론의 흑색선전에 대한 반박도 포함되어 있다.[39] 장남 차두리는 축구 선수로 활동했지만 고려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전공하며 축구 기자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아버지가 겪은 일을 보고 나서 정나미가 떨어져 계속 축구 선수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차두리 문서의 기타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40]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대한민국 27등이었다.[41]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을 마치고 유임 결정이 났지만 비난 여론으로 인해 자진 사퇴 하였으며, 중국리그 항저우 뤼청으로 부임하여 국내를 떠났다. 중국에서도 성적이 좋지 못해 사퇴하였으며 이후 울산 현대의 감독을 맡기 전까지 대한축구협회에서 축구 행정가로 지내면서 지도자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게 되었다.[42] 이동국(1979년생)과 차두리(1980년생)는 1살 터울로 차두리가 트위터에 동궈 형님이라고 언급하며 이동국의 K리그 최다골 경신을 축하하는 글을 올릴 정도로 친한 듯하다. 본프레레호에서 이동국은 최전방 공격수로 차두리는 윙어로 함께 뛰기도 했으며, 허정무호에서 함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본선에 출전하였고 신태용호에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아시아 최종 예선을 치르면서 이동국은 선수로 차두리는 코치로 잠시 연을 맺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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