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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쇼베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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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대 감독
아나톨리 비쇼베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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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김성남 (수석 코치 / 1994~1995)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조병득 (트레이너 겸 골키퍼 코치 / 1994~1996)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박항서 (코치 / 1994)

[[러시아|]][[틀:국기|]][[틀:국기|]] 세멘 알트만 (골키퍼 코치 / 1995~1996)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김학범 (트레이너 / 1995~1996)
주장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이영진 (1994)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김판근 (1995~1996)
계약 기간 1994년 7월 24일 ~ 1996년 7월 31일[1]
(2년 / 739일)
계약 종료 (계약 기간 만료)
연봉 1억 2000만 원[2] (감독)
전술 스타일 롱볼 및 역습 축구
┗ 3-6-1 또는 5-3-2 포메이션
성적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축구 (4위)[3]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11위 / 조별리그)[4]
1. 개요2. 선임 과정3. 활동
3.1. 1994년
3.1.1.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3.1.2. 18강 조별 리그 C조
3.1.2.1. vs 네팔 (1차전) - 11:0 승3.1.2.2. vs 오만 (2차전) - 2:1 승3.1.2.3. vs 쿠웨이트 (3차전) - 0:1 패
3.1.3. 토너먼트
3.1.3.1. vs 일본 (8강) - 3:2 승3.1.3.2. vs 우즈베키스탄 (4강) - 0:1 패3.1.3.3. vs 쿠웨이트 (3·4위전) - 1:2 패
3.2. 1995년
3.2.1. A대표팀3.2.2. U-23 대표팀
3.3. 1996년
3.3.1. 1996 애틀랜타 올림픽3.3.2. 16강 조별리그 C조
3.3.2.1. vs 가나 (1차전) - 1:0 승3.3.2.2. vs 멕시코 (2차전) 0:0 무3.3.2.3. vs 이탈리아 (3차전) 1:2 패
4. 퇴임 및 평가5. 여담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A대표팀과 U-23 대표팀의 감독을 겸직한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한국 지도자 경력 및 국가대표팀 행적을 정리한 문서.

성인 대표팀과 U-23 대표팀을 겸임한 첫 외국인 감독으로,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나 데이터 분석에 기초한 체계적 선수 선발과 훈련 방식을 적극 활용한 감독으로 한국 축구계에 많은 유산을 남기고 떠난 감독이다.

2. 선임 과정

대한민국 A대표팀은 1993년에 열린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숙적 일본에게 0:1로 패배한 후, 도하의 기적으로 간신히 1994년 미국 월드컵 24강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 당시 완전히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일본이 네덜란드 출신의 한스 오프트 전 감독을 영입해 대한민국을 이기고 1994년 미국 월드컵 24강 본선 진출에 거의 성공할 뻔한 것[5] 자극을 받아, 축구 선진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다시 한 번 국내에 형성된다. 당시 구소련 공산권이 붕괴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동유럽권 축구 지도자 영입이 가능했던 점도 작용했다. 지금까지도 축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발레리 니폼니시 전 감독이 유공 코끼리에 부임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니포 전 감독도 역시 러시아 출신이다.

그런 배경속에, 1988 서울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 소련이 우승할 당시 감독으로서 한국과도 이미 인연이 있었던 아나톨리 비쇼베츠가, 1994년 2월에 일단은 대한민국 월드컵 축구 대표팀 기술고문으로 선임되어서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된다. 이후 6월에 1994년 미국 월드컵이 종료된 후 김호 전 감독이 사퇴하고, 7월부터 올림픽 팀 및 A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3. 활동

3.1. 1994년

1994년 7월, 대표팀의 기술고문이었던 비쇼베츠가 김호 전 감독을 이을 차기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9월 11일과 13일, 두 차례 국내에서 치러진 당시 신생국 우크라이나와의 평가전을 통해 대표팀 감독으로써 첫 데뷔를 하게 된다. 비쇼베츠호는 1차전에서 홍명보의 결승골로 1:0, 2차전에선 지금도 회자되는 원더골인 김도훈의 바이시클킥 골을 포함해 2:0 완승을 거두고 산뜻하게 출범했다.

3.1.1.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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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종호 말레이시아 · 사우디아라비아 · 라오스 · 홍콩 · 일본 · 태국 · 북한[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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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folding
[1] U-23 규정 신설.[2]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대회가 2023년 9월 23일로 1년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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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A대표팀 감독 공식 대회 데뷔는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이뤄졌다. 당시에는 연령 제한이 없어서, A대표팀 최정예 멤버가 출전했는데 8강전에서 홈팀이자 숙적인 일본을 3:2로 격파하고 4강에 진출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4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에 0:1로 덜미를 잡히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경기 내용은 일방적인 한국의 우세였는데, 아쉽게도 골키퍼 차상광이 볼을 어이없이 놓치는 바람에... 뒤이은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쿠웨이트에 패해 동메달 획득에도 실패했다.

3.1.2. 18강[6] 조별 리그 C조

3.1.2.1. vs 네팔 (1차전) - 11:0 승
3.1.2.2. vs 오만 (2차전) - 2:1 승
3.1.2.3. vs 쿠웨이트 (3차전) - 0:1 패

3.1.3. 토너먼트

3.1.3.1. vs 일본 (8강) - 3:2 승
3.1.3.2. vs 우즈베키스탄 (4강) - 0:1 패
3.1.3.3. vs 쿠웨이트 (3·4위전) - 1:2 패

3.2. 1995년

3.2.1. A대표팀

아시안 게임에서의 메달 획득 실패 이후에도 한동안 비쇼베츠는 A대표팀 감독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표팀의 멤버 구성은 크게 변화를 가져갔고, U-23 대표팀에 해당되는 어린 연령대 선수들을 대거 A대표팀에 소집하며 대표팀 세대 교체와 1996년에 있을 애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대표팀을 운영했다. 또한 U-23 대표팀 지휘봉도 동시에 잡았다.

1995년 1월 열린 홍콩 구정컵에 젊은 대표팀을 이끌고 나가 콜롬비아를 1-0으로 잡고, 유고슬라비아에게 결승전에서 0-1로 석패하는 등 좋은 내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열린 2월 다이너스티컵에선 중국, 일본과 무득점으로 비기고, 홍콩에게는 3-2로 겨우 승리하며 비판을 받았다. 겨우 결승에 진출해서도 일본에게 2-2, 승부차기 3-5 패배를 당하며 욕을 더 먹었다. 결국 그는 이 대회를 끝으로 A대표팀의 지휘봉은 내려놓게 되고 U-23 대표팀 감독에만 전념하며 올림픽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A대표팀 지휘봉은 이후 박종환 전 감독이 잡게 된다.

3.2.2. U-23 대표팀

U-23 대표팀을 1995년 1월부터 지휘하면서 호주 4개국 대회에서 준우승, 스위스 4개국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좋은 출발을 했다. 특히 3월 스위스 친선대회와 함께 진행한 유럽 전지훈련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현지 팀들과 연습 경기를 하는 등 오랜 기간 담금질을 했다. 비록 AS 칸에게 0-4 대패를 당하기도 했지만, 1주일 뒤 튀니지 원정 경기에서 튀니지 U-23 대표팀에게 5-1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5월, 올림픽 예선을 앞두고서부턴 국내에서 다수의 친선전을 소화한다. 보타포구 FR과의 2연전에서 1무 1패, 가나 U-23과의 2연전에서 1승 1무를 거뒀다. 그리고 5월 21일 홍콩 원정경기에서 5-0 승리, 25일 인도네시아와의 원정경기에서 2-1 승리를 거두고 첫 스타트를 잘 끊었다. 6월에도 프랑스 툴롱컵에 출전해 프랑스 U-21, 멕시코 U-21, 스코틀랜드 U-21과 붙어 3연패를 기록했지만 경험을 쌓았고, 7월 메르데카컵에선 이라크 국가대표, 말레이사아 국가대표와 붙어 이라크와 2-2로 비기고 말레이시아에겐 1-2로 지면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8월 코스타리카 프로팀 CS 에레디아노와 2연전에서 1승 1무를 기록한 대표팀은 사실상 통과가 확정된 올림픽 1차예선 잔여 홈경기를 모두 승리로 장식해 4전 전승으로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한다.

이후에도 비쇼베츠호는 연달아 본선급 팀들과 친선경기를 가졌다. 10월 멕시코와 2연전에서 1승 1무, 트리니다드토바고와의 2연전에서도 1승 1무를 기록했고, 11월 스칸디나비아 원정에서 노르웨이와 0-0, 스웨덴에겐 0-3으로 졌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러시아 U-23 대표팀에게 1승 1패를 기록하고 IFK 예테보리와의 최종예선 전 마지막 평가전에서 2-1 승리를 거두며 1995년을 마무리했다.

3.3. 1996년

3월 최종예선 대회를 앞두고 올림픽 대표팀은 본선 대회가 열릴 미국에서 전지훈련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덴마크, 미국, 멕시코, 캐나다와의 4연전을 가지며 3무 1패의 성적을 거뒀다. 이후 3월 국내로 돌아와 덴마크 프로팀 륑뷔 BK와의 2연전에서 2무승부를 거뒀고, 올림픽 최종예선 장소인 말레이시아로 건너간다.

최종예선은 1차예선 통과국 8개국이 4개국씩 2개조로 조를 나눠 각 조 2위까지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단기 대회 방식으로 치러졌다. 해당 대회 3위까지 올림픽 출전 티켓이 부여되는 만큼, 결승 진출과 우승이 제일 속 편한 올림픽 진출 방법이었다. 비쇼베츠호는 B조에 속해 사우디아라비아, 카자흐스탄, 중국과 조별리그를 치르게 되었다. 1차전 사우디와의 경기에서 1-1로 비긴 대표팀은 이후 복병 카자흐에게 2-1 승리, 3차전 중국에게 3-0 대승을 거두고 조 1위로 준결승에 진출한다. 준결승에서 이라크에게 2-1 승리를 거두고 올림픽 본선 티켓을 확보한 대표팀은 기세를 몰아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후반전 최용수의 페널티킥 결승골로 2-1 승리를 거두며 아시아대회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이 대회 우승은 비쇼베츠의 입지도 한층 더 넓혀주게 된다.

4월 박종환호 국가대표팀과의 친선 경기에서도 1-2 석패를 당했지만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5월 CS 에레디아노전 4-0 승리, VfB 슈투트가르트전 0-0 무승부를 기록한다. 7월 콜롬비아 U-23 대표팀과의 출정식 겸 2연전에서 1무 1패를 기록하는 아쉬움 속에 대표팀은 결전지 애틀랜타로 떠난다.

3.3.1. 1996 애틀랜타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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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락호[1] 모로코 · 파라과이 · 스웨덴[조별리그]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가나 · 멕시코 · 이탈리아[조별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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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화호 카메룬 · 이탈리아 · 온두라스[조별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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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범호[2] 뉴질랜드 · 루마니아 · 온두라스 · 멕시코[8강]
본선 진출 실패[16개국]
{{{-2 {{{#!folding
[1] U-23 규정 신설.[2] 코로나19로 인해 대회가 2021년 7월 23일로 1년 연기되었다.[16개국] 본선 올림픽 진출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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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첫 경기에서 윤정환의 페널티킥 결승골로 1-0으로 가나를 잡고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은 이후 48년만에 올림픽 축구에서 첫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2차전에서 멕시코와 0-0 무재배를 하면서 승점 4점, 멕시코와 함께 조 공동 선두에 나서며 8강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하지만 최종전에서 이탈리아에 1-2로 패하면서 사상 첫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2패로 탈락 확정이었고, 한국은 비기기만 하면 토너먼트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종료 직전 한골을 먹는 바람[7][8]에 대회 11위로 8강 진출에 아깝게 실패했다.

올림픽 축구 11위로 탈락한 후 대한민국으로 오지 않고, 미국 현지에서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래도 계약 기간은 다 채웠기에 움베르투 코엘류조 본프레레, 핌 베어벡, 울리 슈틸리케, 위르겐 클린스만처럼 중간에 잘린 감독은 아니다.

3.3.2. 16강 조별리그 C조

3.3.2.1. vs 가나 (1차전) - 1:0 승
파일:1996 애틀랜타 올림픽 로고.svg
남자 축구[9] 조별 리그 C조 1차전
1996. 07. 21.(일) 12:00(UTC-4)
RFK 스타디움[10] (워싱턴 D.C.)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 : 0 파일:가나 국기.svg
대한민국 가나
윤정환 (PK 41') 파일:득점 아이콘.svg -
3.3.2.2. vs 멕시코 (2차전) 0:0 무
파일:1996 애틀랜타 올림픽 로고.svg
남자 축구 조별 리그 C조 2차전
1996. 07. 23.(화) 12:00(UTC-6)
리전 필드 (앨라배마주, 버밍햄시)
파일:멕시코 국기.svg 0 : 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멕시코 대한민국
- 파일:득점 아이콘.svg -
3.3.2.3. vs 이탈리아 (3차전) 1:2 패
파일:1996 애틀랜타 올림픽 로고.svg
남자 축구 조별 리그 C조 2차전
1996. 07. 25.(목) 12:00(UTC-6)
리전 필드 (앨라배마주, 버밍햄시)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2 : 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탈리아 대한민국
브랑카 (24', 82') 파일:득점 아이콘.svg 이기형 (62')

4. 퇴임 및 평가

겨우 2년간 한국 대표팀을 맡았지만, 축구팬들 사이에서 평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폐쇄적이던 한국 축구 지도자들은 첫 외국인 대표팀 감독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는데, 대표적으로 박종환은 비쇼베츠를 두고 "동유럽은 축구 선진국이 아니다"라면서 대놓고 디스했다. 1991년에 독일 출신의 명장 데트마어 크라머가 23세이하 대표팀 기술고문을 맡아서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끌었지만, 국내 지도자들의 냉대 속에 정작 본선은 지휘하지 못하고 1년 만에 퇴임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 2001년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부임했을 때도 국내 지도자들은 거스 히딩크를 퇴물 사기꾼 취급하면서 하루빨리 짤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흑역사가 있다.[11] 이때도 박종환, 차경복, 허정무 등등 차범근을 제외한 국내지도자들 대다수가 저랬다.

선수단 장악 문제로 일부 선수들과 충돌하기도 했으며, 한국 축구의 전설 홍명보도 당시 비쇼베츠의 교체 선수 출전을 거부하는 항명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축구협회 간부로 동행한 조중연홍명보를 두고 선수가 저러면 안된다는 충고를 공개적으로 했을 정도. 다만 이와는 별개로 홍명보를 원래 포지션이었던 미드필더로 다시 끌어올려 45분 동안 전술 운용을 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으며, 후반전 홍명보의 체력 문제가 대두되자 다시 수비수 위치로 끌어내린 적이 있다. 하지만 "(홍명보는)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다"라 찬사를 보냈을만큼 미드필더 홍명보의 모습을 곧잘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12]

그외에도 영어를 못 하는데[13], 러시아어 통역은 한국어를 잘 몰라 선수 지도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14]. 이 때문에 축구협회는 이후부터 외국인 감독 선임에 영어 구사를 중요한 조건으로 내세웠다. 거스 히딩크를 비롯해 네덜란드 출신 감독을 많이 썼던 것도 네덜란드어와 영어가 계통이 가깝고 비슷해서 네덜란드인들은 대부분 영어도 잘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언어가 외국인 감독을 정하는 데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서, 약 30여년 후 선임한 파울루 벤투 감독은 거의 모국어 포르투갈어만 사용하고 영어 회화는 약한 편이라 비쇼베츠 감독과 비슷한 편이다.[15]

이런 저런 문제들 때문에 축협과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한국 생활에 그다지 애착을 보이지 않아 재계약에도 관심이 없었고, 올림픽 결과에 상관없이 임기가 종료되면 떠나겠다고 협회측에 미리 밝혔다. 또한 기자들의 적(?)이기도 했다. #

그러나 선수 개개인에 대한 특징을 잘 파악하고, 공정하게 선수를 선발하는 모습은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특히 선수들을 지도할 때나 관전하면서 항상 메모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 데이터나 기록을 중시하는 모습은 한국의 그 어떤 지도자에게서도 볼 수 없었다. 사실 아나톨리 비쇼베츠는 데이터 축구를 창시했던 소련의 명감독 발레리 로바노브스키의 동료 선수이자 제자였으며,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 축구에 유럽식 전술을 제대로 심으려고 노력했던 것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거스 히딩크처럼 피지컬을 중시하긴 했지만, 거스 히딩크와 달리 윤정환을 총애했다. 또한 유상철을 발탁하여 전방위로 사용하여 이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포메이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 미드필더진은 윤정환의 보디가드로 피지컬 좋은 선수들로 꾸렸다.[16] 이 전술은 후에 윤정환이 감독이 되었을 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5. 여담

6. 둘러보기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김삼락호 비쇼베츠호 허정무호


[1] 계약 기간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까지 2년이었으며, 메달 확보에 실패한 후 물러났다.[2] 비쇼베츠 축구'기대크다' (1994년 7월 25일자 / 한겨레) 기사 참조. # 계약금은 1억 원, 월봉 1000만 원 이상의 규모로 보도되었다. 연봉으로 환산 시 1억 2천만원 수준.[3] 18개 참가팀 중 4위 기록.[4] 16개 진출팀 중 11위 기록.[5] 즉, 최종 기록은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 탈락이다. 이라크를 상대로 2:1로 이기고 있었으나 최종전 경기 종료 1분 전에 이라크의 동점골을 허용하여 대한민국에게 골 득실차로 밀려 아시아 3위로 탈락했다.[6] 당시 18개국이었다.[7] 상대팀에게 허용한 2골은 모두 베테랑 선수였던 마리오 브랑카에게 허용했다. 브랑카는 이전 가나와의 경기에서도 2골을 터뜨리며 감각이 살아있던 공격수였다. 와일드카드로 선발한 황선홍과 이임생이 모두 부상을 당해 3차전에 결장했고 급히 한국에서 건너온 이경춘은 경기에서 실수를 연발했다.[8] 당시 이탈리아 U-23 대표팀에는 알레산드로 네스타, 파비오 칸나바로, 다미아노 토마시, 마르코 델베키오 등 훗날 이탈리아 A대표팀 주축 선수로 성장하는 유망주들이 대거 출전했었다. 또한 골키퍼가 와일드카드 선수인 베테랑 잔루카 팔리우카였다.[9] 1996년 올림픽부터 여자 축구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10] 당시 DC 유나이티드 홈구장[11] 한국에 오기 전 레알 마드리드에서 1년 만에 불명예스럽게 경질당했던 걸 문제삼았다. 불과 몇 년 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이끌며 월드컵 4위를 기록하고 32강 조별리그에서 만난 한국에 마르세유의 참사를 선사한 감독이었음에도 그 누구도 이를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덤.[12] 2006년 이후, 홍명보의 플레이 스타일을 가지면서 미드필더가 가능한 기성용이 등장했는데 그의 활약을 보면 비쇼베츠는 기성용처럼 써먹어 보려 했던 듯하다.[13] 소련은 영국, 미국이 적성국이여서 스파이나 고위층을 제외하면 영어는 그냥 잘 못하거나 기초밖에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14] 냉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절이라, 서울대학교 같은 명문대에도 러시아어를 책으로 배웠을 뿐 러시아 현지에서 러시아어를 써 본 교수가 한동안 없었을 정도로 러시아어 통역 공급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수외국어 전문 통/번역가들은 대개 인건비 문제 탓에 계약 성사가 힘들어서 현지 교민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외국어는 당연히 유창하게 잘 하긴 하지만 우리말로 원활하게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직업적인 통역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훈련을 요한다.[15] 다만 30년동안 국내의 외국어 통역 관련 공급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발전하긴 했다. 또 벤투 감독이 스페인어, 영어 등 외국어를 포르투갈 억양이 세지만 자신의 의견을 무리없이 말하는 수준이기도 했다.[16] 그래서 단신 선수들은 외면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진호 정작 자신은 조진호가 욕심이 많아서 버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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