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오프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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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23대 |
네덜란드의 축구인 |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이름 | 한스 오프트 Hans Ooft | |
본명 | 마리우스 요한 오프트 Marius Johan Ooft | |
출생 | 1947년 6월 27일 ([age(1947-06-27)]세) | |
자위트홀란트주 로테르담 | ||
국적 | [[네덜란드|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 선수 (레프트윙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 |
소속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선수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64~1967 / 유스) SC 펜담 (1967~1970) SC 캄뷔르 (1970~1974) SC 헤이렌베인 (1974~1975) |
코치 | 네덜란드 U-17 (1976~1977 / 전임코치) 야마하발동기 축구부 (1982) 마쓰다 SC (1984~1987) | |
감독 | 마쓰다 SC (1987~1988) 일본 대표팀 (1992~1993) 주빌로 이와타 (1994~1996) 교토 퍼플 상가 (1998)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2002~2003) 주빌로 이와타 (2008) | |
기타 | FC 위트레흐트 (1988~1992 / 디렉터) | |
국가대표 |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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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 축구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으며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더불어 일본 대표팀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
1947년 6월 27일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1960년대부터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유소년 팀에 들어가 축구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예노르트 1군 데뷔는 실패했고, 당시 징병제였던 네덜란드였기 때문에 19세에 군에 입대해 1년 반 동안 군 복무를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네덜란드 21세 이하 대표팀에 뽑혔던 경력이 있으니 선수로써의 재능이 없진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실질적 프로 선수 데뷔는 3부리그인 트베이더 디비시 소속의 SC 펜담에서 했다.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포워드와 레프트윙이었다. 1967-68 시즌부터 3시즌동안 활약하며 리그 95경기 32골을 넣는 등 활약했으며 팀의 2부리그 승격에도 기여했다. 이후 2부리그에서 조금 더 큰 규모의 클럽이었던 SC 캄뷔르로 이적해 4시즌 동안 92경기 16골을 기록했고 1974년 다시 같은 2부리그의 SC 헤이렌베인으로 옮겨가 1시즌 동안 23경기 5골을 기록하고 28살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부상 때문이었지만 이미 캄뷔르 시절부터 코칭 수업을 시작하며 일찌감치 지도자를 준비하고 있던 이유도 있었다.
3.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네덜란드 U-17 대표팀 전임 지도자를 맡았다. 이 때 일본 고교 축구팀이 유럽 원정을 왔었고 그가 이들을 맞이하는 업무를 하며 처음 일본과 인연을 맺게 된다. 시간이 흘러 1982년 일본 사커 리그의 야마하발동기 축구단에 코치로 영입되어 처음 일본 땅을 밟았고, 이후 쭉 지도자 생활을 일본에서 하게 된다. 1985년부터는 마쓰다 SC의 코치로 팀의 1부리그 승격에 기여했으며 1987년부터는 전임 감독으로 승격해 일왕배 결승전 진출까지 시켰음에도 2부리그 강등을 막지 못해 1시즌만에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네덜란드로 귀국해 FC 위트레흐트의 디렉터를 맡았다.1992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전임 감독으로 계약해 일본에 돌아왔다. 1992년 자국에서 열린 아시안컵 우승을 이뤄냈고 1993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도 순항하며 일본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끄는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막판 뒤집기를 허용하고 1994 미국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며 감독직을 수행했다. 과거 일본 사커 리그 시절 인연을 맺었던 주빌로 이와타 감독직을 맡아 팀을 우승권 강호로 만들었고, 1998년 교토 퍼플 상가, 2002년 우라와 레즈 등 다양한 J리그 구단의 감독을 역임했다. 우라와 레즈에서는 2003년 J리그컵 우승을 이끌었음에도 구단 수뇌부와의 불화 때문에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아예 감독직을 은퇴하는가 싶었지만 2008년 J2리그 강등 위기에 빠졌던 주빌로 이와타의 소방수로 깜짝 복귀하여 팀의 극적인 1부리그 잔류를 이끌어냈다. 이후 주빌로 이와타 정식 감독 제안도 받았지만 이 팀은 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로는 쭉 현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래저래 일본 축구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기 때문에 2013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4. 전술 스타일
심플한 축구를 구사했다. 선수들에게 과한 역할 배분을 시키지 않고 포지션마다 역할을 분명하게 나누는 것을 지향했다. 좋게 말하면 심플한 축구였지만 이는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땐 소극적인 축구로 보일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라인 간격을 컴팩트하게 유지하는 것과 패스를 구사할 때 트라이앵글을 만드는 것, 측면을 적극 활용하는 것 등에서 전형적인 네덜란드 스타일의 축구를 엿볼 수도 있었다.또한 주전 멤버에 굉장히 의존을 많이 하는 감독이기도 했다. 특히 일본 대표팀 감독 시절 왼쪽 풀백 주전으로 낙점했던 미나미 토미토시가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결장하게 되자 이 자리를 제대로 메꿀 후보군이 부족했고, 이것이 도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일만큼 선수층이 얇은 감독이었다. J리그 감독 시절에도 비슷해서, 우라와 레즈 감독 시절에는 우라와가 교체 카드를 다 쓰지 않고 경기를 끝마치는 경기가 눈에 띄게 많아졌었다. 즉 교체 카드를 통해 반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부족한 감독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대교체의 조건이 충분할 때에도 저런 것은 아니었다. 일단 90년대 일본 대표팀의 주축 세대를 오프트가 대부분 발굴한 점, 주빌로 이와타 감독 시절 젊은 선수를 적극 기용하여 팀의 강등 탈출을 이끈 점이 이를 반증한다.
5. 여담
- J리그 통산 외국인 감독 최다승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록은 2012년 네우시뉴 바프치스타 감독이 경신하면서 깨졌다.
- 여러모로 거스 히딩크가 한국 축구를 변화시킨 것 같은 업적을 일본에서 해냈다. 앞서 말한 대표팀 세대교체나 컴팩트한 축구의 도입 등 단기간에 일본 축구 대표팀을 아시아 강팀의 위치로 올려놓은 감독이었고 취임 일성에서 나는 일본 축구를 월드컵에 올려놓기 위해 왔다라는 패기 있는 인터뷰로 당시 일본 축구 기자들의 비웃음을 얻었지만 결국 본선 진출 직전까지 팀을 성장시켰다.
- 당시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이자 브라질 귀화선수였던 라모스 루이와는 애증의 관계로 유명하다. 트레이닝 기간때부터 사사건건 마찰이 있었다고 하며 남미식 자유로운 플레이메이킹을 선호하던 라모스 루이와 유럽식 컴팩트 축구를 추구하던 한스 오프트간의 축구 스타일 또한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오프트가 라모스를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라모스 루이는 그를 존경하는 감독으로 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