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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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42대, 45대, 50대 | ||||
클럽 | ||||
2대 | 6대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
정병탁 (1970) | ▶ | 김정남 (1970~1971) | ▶ | 박이천 (1972) |
김정남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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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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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 1969 · 1970 · 1971 |
김정남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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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김정남 金正男 | Kim Jung-Nam | |
출생 | 1943년 1월 28일[조기입학] ([age(1943-01-28)]세) | |
평안북도 자성군 (現 자강도 자성군)[2]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한양공업고등학교 (기계 / 15회 / 졸업)[3]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61 / 학사) | |
신체 | 신장 170cm | |
직업 | 축구 선수 (수비수[4]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양지 축구단 (1967~1970) 한국외환은행 축구단 (1971~1974) |
감독 | 한일은행 축구단 (1974~1976 / 코치) 대한민국 U-20 대표팀 (1974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74~1979 / 코치) 포항제철 축구단 (1976~1980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77 / 감독 대행) 대한민국 대표팀 (1980~1982 / 감독대행) 유공 코끼리 (1982~1985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85~1986) 유공 코끼리 (1985~1992) 대한민국 대표팀 (1988) 산둥 루넝 타이산 (1998) 칭다오 하이뉴 (1999) 울산 현대 호랑이 (2000~2008) | |
행정가 | 대한축구협회 (1993~1998 / 전무이사) 산둥 루넝 타이산 (1998 / 기술고문) 대한축구협회 (1999~2000 / 기술고문) 울산 현대 (2009 / 기술고문) 한국프로축구연맹 (2010~2013 / 부회장) 한국 OB축구회 (2014~2018 / 회장) | |
국가대표 | 66경기[5] (대한민국 / 1964~1973) | |
병역 | 대한민국 해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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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1960년대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 김호와 함께 한국 국가대표 센터백 듀오. 감독으로서는 한국을 32년만에 다시 월드컵 본선[6]으로 이끌며, 대한민국 월드컵 본선 첫 승점을 기록한 명장이다.[7]前 축구 선수, 前 축구 감독. 前 프로축구연맹 부총재. 現 한국OB축구회 회장.
2. 선수 경력
2.1. 유소년 시절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으며, 당시 좁은 골목에서 공놀이를 하고 연습하곤 했다. 이 덕택에 키핑과 기술이 좋아서 두각을 드러내 중학교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학원축구는 1부, 2부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김정남은 동아리 느낌인 2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고 싶었던 김정남은 축구 명문 한양공고로 진학하게 된다. 원래는 공격수였으나, 경쟁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하게 되었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게다가 한양공고가 운동장도 좁은 편이라 3:3, 4:4 등 소규모 인원의 보충훈련을 즐겨하며 계속 수비력과 기술이 발달했는데, 어느 날 주전선수가 아파서 대신 경기에 출장하게 된 이후 주전을 꿰차게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게 된다. 봄에 먼저 19세 대표팀에 선발됐고, 이어 그 해 여름에 성인 대표팀에도 선발된다.2.2. 성인 시절
원래는 풀백 출신이었으나 스토퍼와 스위퍼 시스템이 유행하자 김정남은 스위퍼의 역할을 맡았고, 김호는 스토퍼의 역할을 맡아 대단히 성공적인 국가대표 경력을 꾸리게 된다.열정적인 김호와 달리 냉정하고 침착하게 플레이했다고. 부상으로 고생하다 71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는데, 축협 회장의 권유로 호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으나 알고 보니 플레잉 코치였다. 이렇게 선수생활을 연장한 김정남은 1974년 외환은행에서 은퇴한다.
2.3. 플레이 스타일
1960~1970년대 한국 최고 수비수였다.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수비를 했으며 원래 공격수였는데 경쟁자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했다고 하며 풀백보다 센터백이었을 때 더 뛰어났다. 스토퍼와 스위퍼 시스템으로 인해 김정남 본인이 스위퍼, 센터백 듀오였던 김호가 스토퍼 역할을 했으며 당시 최고의 센터백 듀오였다. 뛰어난 수비력과 좋은 키핑력,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3. 지도자 경력
3.1. 코치 시절
선수 은퇴 후 실업팀 한일은행 축구단 코치로 있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활약했다. 1977년 최정민 감독이 건강 악화로 사퇴하자 34살의 나이에 대표팀 감독이 됐다. 당시 최고참 선수였던 김재한과 불과 네 살차였다. 이는 2024년 여전히 역대 최연소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기록이다.이후 1970년대 후반, 함흥철, 장경환 감독을 보좌하며 국가대표팀 코치직을 수행했다. 이 때 이미 전술적인 부분은 김정남이 담당했다고 한다. 또한 포항제철 축구단에서도 코치로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80년대 초 대표팀에서 임시 감독직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3.2. 유공 코끼리 시절
1982년 12월 이종환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서 유공의 창단 초대 코치로 부임했다.1985년 7월, 유공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한다. 이후 88년까지 5위부터 3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특히 이 시절 노수진, 조윤환, 최윤겸, 정종수, 이광종, 김봉길 등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1989시즌 초 약체로 꼽히던 유공을 강팀으로 변모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그토록 갈망하던 유공의 창단 첫 우승을 거머쥐었고, 리그 감독상을 수상했다.[8]
그러나 1992시즌 개막 후 7경기에서 1승 6패로 최하위로 추락한 유공은 김정남 감독을 총감독으로 승격시켜 벤치에서 물러나게 하는 한편 함흥철 고문과 박성화 코치를 중심으로 팀을 새롭게 재편되며 그대로 팀을 떠났다.
3.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한편 유공에서 지도자 생활과 별개로 대표팀 생활을 꾸준히했고, 1985년 수석코치로 문정식 감독을 보좌하다가 지역예선 도중 문정식 감독이 말레이시아전 패배로 경질되면서 초반에는 감독 대행으로서 그 자리를 승계했다. 하지만 사령탑 교체 후 네팔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이어 일본을 꺾으며 마침내 월드컵 본선 진출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룬 쾌거이자, 8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대기록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순간이었다.그렇게 국가적 영웅으로 발돋움한 김정남은 결국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1954스위스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 이후 32년 만에 24강 본선을 직접 지휘하는 감독이 됐다.
24강 본선에서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한 조가 되는 어려운 조에 속했다. 사실 당시 월드컵은 32강이 아닌 24강 본선 진출이기 때문에 아시아는 월드컵 진출 티켓이 단 2장이었고, 24강 조별리그 체제까지는 북중미,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 팀들이 서로 같은 조에 편성되기가 어려웠던 만큼 지금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디펜딩챔피언, 아르헨티나는 이 대회 우승팀, 불가리아는[9] 이 대회 16강 15위팀이라서 운이 없었다.
첫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 김정남은 일단 적응하기 위해 30분간 수비적으로 운영하라는 지시를 했으나, 선수들이 긴장한 나머지 수비적으로 운영을 하지 않고 지나치게 수비에만 일관하고 몰려다니며 포메이션을 붕괴시키는 등 전혀 경기 운영을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2실점을 했다. 이후 후반전에는 오히려 이판사판으로 하자면서 경기력이 좋아졌졌고, 주장 박창선의 대한민국 월드컵 첫 골을 기록했다.
불가리아전에서는 수중전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대한민국 월드컵 첫 승점을 획득했다.
이탈리아전에서는 멕시코 언론마저 심판이 도와줬다고 할 정도로 불리한 판정 아래 3:2 패배를 했지만 대한민국 첫 다득점을 기록하며, 월드컵 24강 최종순위에서 EPL멤버 북아일랜드를 제치고 승점 1점 1무 2패 월드컵 20위를 기록하였다. 이 때 조 3위도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김정남은 이탈리아전의 1골만 더 기록했으면 다득점에 앞서서 진출 할 수 있었던 패배를 많이 아쉬워한다.
그리고 그 해 당시 A대표팀 대회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강팀 사우디를 2:0으로 격파하며, 금메달 우승을 차지한다.[10]
그리고 마지막 A대표팀 대회였던, 1988 서울 올림픽 축구 16개국 본선에서도 다시 감독을 하였고, 비록 8강에는 실패했지만, 이 대회 금메달팀 소련에 0:0 클린시트 승점 1점 획득, 미국전 0:0 무승부 승점 1점도 기록하였으나, 아르헨티나에 1:2로 아쉽게 패하여 대회 11위로 선전하였다.
올림픽을 끝으로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났고 이후 유공 감독직에 올인했다.
2000년대 K리그에서의 김정남 감독을 본 축구팬들은 거의 인자하고 부드러운 모습만 봤기에 상상이 가기 힘들지만, 2013년 방송된 '태극전사의 탄생'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1986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정남 감독이 선수들을 강하게 다그치는 모습과 함께 그 당시 선수였던 축구인들이 별명이 '광기'였다고 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울산 현대 감독을 맡았던 2001년에는 선수단에게, 외국인 선수도 예외 없이 포함해서 해병대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 그렇긴 해도 본래 축구계에서 부드러운 성격이었긴 한 것 같다.[11]
3.4. 중국 리그 감독 시절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를 역임하던 1998년 1월, 산둥 루넝 타이산 감독으로 선임되며 현장으로 복귀했고 첫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이로써 최은택 감독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중국 리그로 진출한 한국 감독이 됐다. 또한 산둥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됐다.하지만 성적 부진으로 8월부터 고문으로 직책이 변경되었다.
1999시즌을 앞두고 칭다오 하이뉴와 계약하며 또 다시 중국 리그에 잔류했고 차범근을 넘어 한국인 지도자 최고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역시 부진했고 리그 11라운드 경기 이후 성적 부진으로 사임했었다.
3.5. 울산 현대 호랑이 감독 시절
2000년 8월, 대한축구협회 기술고문직을 사임하고 고재욱 감독의 후임으로 울산 현대 호랑이의 6대 감독으로 선임되며 약 8년 만에 K-리그로 돌아왔다. 기존 정종수 수석코치, 최인영 GK코치와 함께한다.부임 첫 해에는 손쓸 틈없이 그대로 꼴찌로 시즌을 끝냈지만 2001시즌에는 팀을 6위까지 반등시키는 데 성공했고, 2002, 2003시즌에는 제대로 된 도약을 이끌어내며 2년 연속 리그 준우승을 거두며 만년 중하위권이던 울산을 변모시킨다. 또한 2001시즌부터 매년 1년 단위의 재계약을 채결하면서도 장기 집권을 해나가고 있다.
한편 2003년 9월 수원 원정에서 관중과 실랑이를 벌이며 8경기 출장정지 및 벌금 800만원을 냈다.
2004년에는 리그 통합 1위를 차지했으나 당시 포스트 시즌으로 돌아간 첫 시즌이라 플레이오프를 치렀는데, 동해안 더비에서 1:0으로 패배하며 정규리그 1위를 하고도 리그 우승 타이틀을 갖지 못했다.
그리고 대망의 2005년, 9년 만에 울산의 창단 두 번째 K-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유상철, 마차도, 현영민, 유경렬, 서동명, 김지혁 등 기존 전력에다가 여름에 합류한 이천수와 최성국 콤비로 공격력을 극대화했고 결국 인천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 원정에서 무려 5:1 대승을 거두는 공격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감독상은 준우승을 차지한 장외룡 감독에게 넘어갔다.
2006년 개막을 앞두고 K리그 수퍼컵에서 전북을 누르고 우승 타이틀을 추가했고, 여름에 열리는 한중일 챔피언 대결이었던 A3 챔피언스컵에서 전년도 리그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했고 도쿄에서 J리그 우승팀으로 올라온 감바 오사카를 이천수의 해트트릭으로 6:0으로 격파하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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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국 슈퍼 리그 챔프인 다롄 스더를 4:0으로 각각 떡실신 시키며 우승을 차지하는가 하면, 사우디 챔피언 알 샤밥을 2006년 AFC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에서 또 한번 6:0으로 발라버리며 아시아의 깡패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2007년에는 K리그 리그컵 결승에서 서울을 상대로 2:1 승리하며 리그컵 우승 타이틀도 추가했다.
2008년에는 최고령 감독으로서 김호에 이어 516경기 만에 통산 2번째 감독 200승 고지에 올랐다. 이때 포항과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 김풍주 GK코치의 말을 믿고 당시 고등학생 나이이던 김승규를 승부차기에 전격 기용하며 스타 탄생도 시키고 결과도 챙기는 전략가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2008시즌 종료 후 울산의 기술 고문직으로 자리를 옮기며 울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울산의 짱짱한 스쿼드를 가지고 수비 축구를 한다는 비아냥을 사곤 했지만, 언제나 팀을 상위권에 올리곤 했기 때문에 울산현대의 팬들 입장에서는 단어 그대로 "시원섭섭" 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한창 이름을 날리 시절에는 허정무와 함께 재미없는 축구의 대명사로 군림했었는데, "그래도 김정남은 재미없어도 결과보면 이겨있잖아, 근데 허정무는 아니잖아(...)"라며 무승부에 취한 전남 팬들이 울산 팬들을 부러워하는 기현상이 발생하였다.
K리그가 뻥축구에 수비축구라는 편견을 일반인들이 가지는데 한몫한 감독 중 하나. 이후 울산은 어떻게 된 건지 감독이 바뀌어도 팀컬러가 수비지향이 되어 버렸다.
2010년 11월, AFC 황금공로상을 수상했다.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 38인을 선정해 해당 상을 시상했고, 국내 지도자는 김정남을 비롯해 10명의 지도자가 수상했다.
2023년 K리그 출범 40주년을 맞아 탄생한 K리그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 6인[13] 중 유일한 지도자 부문으로 선정됐다. 다만 최근에는 고령으로 건강이 나빠진 탓인지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는 본인이 참석하지 못하고 손자를 대신 보냈다.
4. 행정가 경력
유공 감독에서 내려온 93년부터 98년 초까지 대한축구협회에서 전무로 일하며 두 번의 월드컵 진출에 기여했다. 이후 중국에서 돌아온 뒤 1999년 중반부터 2000년 중반까지 기술 고문직을 역임했다.2008년 12월, 울산 감독직을 사임한 후 울산 현대 기술고문, 프로축구연맹 기술고문 등을 거쳤다.
2010년 2월, 박규남의 후임으로 프로축구연맹 부회장으로 선임돼 곽정환 회장을 보좌했고, 이후 부총재직으로 직책이 변경된 뒤 정몽규 총재와 함께 일했다. 임기 동안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며 승강제를 도입했고 광주를 비롯해 안양, 수원FC, 부천 등 수많은 시도민 구단의 창단을 유도해 현재까지의 K리그 기틀을 닦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한국OB축구회 회장직 출마를 위해 2013년 12월 31일 부로 사임했고 2014년 1월 16일, 유효표 21표 중 12표를 획득해 한국OB축구회 13대 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2016년 재선임돼 14대 회장도 역임했다.
5. 여담
- 집안이 그야말로 축구 집안이다. 5형제의 맏이인데, 동생인 김강남, 김성남, 김형남 모두 축구선수였다. 이 중에서 둘째와 셋째는 쌍둥이인데 김강남과 김성남은 동시에 국가대표를 뛰면서 쌍둥이 국가대표로 유명했다.[14]
- 축구계는 영어구사가 가능한 축구인들이 많은데, 이 김정남은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영어를 잘 하는 축구인으로 이름이 나 있다.
- 인터뷰나 언행을 보면 상당히 부드럽고 겸손하고 신사적인 언행을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냉철하고 분석적으로 축구를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호와의 라이벌 관계는 크게 신경 쓰이는 부분인지 2000년대에 접어들고도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납득이 안 가는 판정에 거세게 항의를 하다 퇴장을 당하고 벌금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사실 젊었을 때는 엄청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 시대를 대표하는 축구인이라면서 국가대표 경기수가 의외로 60~70경기밖에 되지 않는데, 사실 외국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는 축구팬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늘어난 것이다. 아마도 자료 미비로 인해 상당수 경기의 존재가 묻혀 있어서 피파에 의해 A매치로 인정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 당시는 외국의 클럽팀이나 브라질 무슨무슨 주의 대표팀, 혹은 대표팀 2진을 상대로 경기를 자주 치르다 보니 A매치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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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입학] [2] 링크[3] 참고 자료.[4] 센터백(스위퍼)[5] (1964년 올림픽 예선, 본선 3경기. 1967년, 1971년 올림픽 예선 7경기 포함)[6] 54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 이후[7] 본선 24강 조별리그에서 우승팀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월드컵 첫 골, 대회 15위팀 유럽 불가리아에게 월드컵 첫 승점, 디펜딩챔피언 이탈리아에게 월드컵 첫 다득점을 기록하며 86월드컵 20위를 기록[8] 유공-부천 SK-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의 K리그 우승 기록이다.[9] 유럽예선에서 프랑스를 2:0으로 승리하였고 유고, 동독을 제치고 1986년 월드컵 24강 본선에 진출하였고, 1차전에서 디펜딩챔피언 이탈리아와 1:1 무승부 승점 1점을 기록하며 이 대회 16강 15위를 기록했다.[10] 사우디 아라비아는 당시 명실공히 아시아 최고의 팀이었다. 1984년 올림픽 본선 진출, 1984년 아시안컵 우승, 1988년 아시안컵 우승, 1992년 아시안컵 준우승, 1994년 월드컵 16강 12위, 1996년 아시안컵 우승이라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아시안 게임은 성인 대표팀 출장 무대였는데, 이런 아시아 최고의 팀을 상대로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홈경기에서 우승한 것이다.[11] 김호 김정남과 동세대인 이세연이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해 펀칭을 하면서 주먹으로 동시에 공격수의 얼굴을 쳐서 치아를 날렸다는 시대였다.[12] 한일전 모든 축구 매치 최다점수차 경기이며, 당시 감바 오사카 감독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 일본 대표팀을 이끈 니시노 아키라 감독이었다.[13] 최순호, 홍명보, 신태용, 이동국, 김정남, 박태준[14] 배구에도 비슷한 사례로 이재영, 이다영이 있다. 이 두 사람 모두 국가대표를 동시에 뛴 바 있고, 이 두 선수의 어머니는 88 올림픽 배구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김경희다. 다만 이들은 배구계를 넘어 대한민국 예체능계 전체를 흔든 대형 사건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