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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크 닐리스

뤼크 닐리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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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에레디비시 로고.svg
1995-96 · 19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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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축구감독
파일:Luk Nilis 1967.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뤼크 닐리스
Luc Nilis
본명 뤼크 힐베르 시릴 닐리스
Luc Gilbert Cyrille Nilis
출생 1967년 5월 25일 ([age(1967-05-25)]세)
벨기에 하셀트
국적
[[벨기에|]][[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 체중 76kg
주발 양발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세컨드 스트라이커[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KFC 빈터슐라그 (1984~1986)
RSC 안데를레흐트 (1986~1994)
PSV 에인트호번 (1994~2000)
아스톤 빌라 FC (2000~2001)
감독 헤우스덴 졸더 (2005~2006 / 기술 이사)
PSV 에인트호번 (2006~2011 / 스카우터)
PSV 에인트호번 (2007~2010 / 코치)
카슴파샤 SK (2011 / 코치)
겐츨레르비를리이 SK (2011~2013 / 코치)
PSV 에인트호번 (2015~2018 / 스트라이커 코치)
VVV 펜로 (2018~2020 / 코치)
MKE 앙카라귀쥐 (2020 / 스트라이커 코치)
요르단 대표팀 (2021 / 코치)
벨리시아 빌젠 SV (2021~ )
국가대표 파일: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56경기 10골 (벨기에 / 1988~2000)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벨기에 리그 시절2.1.2. PSV 에인트호번2.1.3. 이후
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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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피구, 호마리우, 지단, 히바우두, 조르카에프, 그리고 라울과 같은 선수들과 함께 뛰었지만 PSV에서 함께 뛰었던 뤼크 닐리스와 가장 호흡이 잘 맞았다. 그는 정말 환상적이었고,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내가 함께 했던 최고의 파트너였다.
호나우두 #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에게 빚지고 있다. 내가 뤼크만큼 존경하는 선수는 없고, 우리만큼 가까운 선수가 또 있을까 의문이다.
뤼트 판니스텔로이[2]

벨기에의 축구선수 출신 축구감독이다.

선수 시절, PSV 에인트호번 소속으로 호나우두, 뤼트 판니스텔로이와 함께 투톱 듀오를 이뤄 네덜란드 리그유러피언컵, UEFA컵 등 다수의 유럽 대항전 대회들을 폭격하며 이름을 날렸고, 한국에서는 1998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선수로 인지도가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벨기에 리그 시절

1984년, KRC 헹크의 전신인 KFC 빈터슐라그에서 데뷔한 닐리스는 16세의 어린 선수였지만 그곳에서 어린 나이답지 않은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2시즌 간 47경 16골을 기록했고, 그 가능성을 인정 받아 1986년 벨기에 리그 최고의 클럽인 RSC 안데를레흐트로 이적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포텐이 터지기 시작한 1990-91시즌에는 리그 21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넣어 리그 득점 2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팀을 리그 정상에 올려놓았고, 1991-92시즌에도 팀의 주포로 활약하며 리그 27경기에 나서 16골을 기록, 팀을 리그 2위에 안착시켰다. 또한 유러피언컵에서 9경기 6골이라는 괄목할 만한 활약을 펼치며 세르게이 유란(7골), 장 피에르 파팽(7골)에 이어 잔루카 비알리와 함께 득점 공동 3위에 이름을 올렸다.

1992-93시즌에도 리그 28경기에 출전해 19골을 넣으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1993-94시즌에는 기량이 만개하며 리그에서 30경기 25골을 기록, 리그 득점 순위 2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9경기 7골을 기록하며 윈턴 루퍼(8골), 로날트 쿠만(8골)에 이어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와 함께 득점 공동 3위에 랭크되었다.어째 계속 1골 차이로 득점왕을 놓치고 있다... 또한 리그컵까지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 더블을 달성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폼이 절정에 달한 닐리스에게 유수의 세리에 A, 프리미어 리그 클럽들이 러브콜을 보냈지만, 닐리스는 은사인 아드 더 모스 감독이 이끄는 PSV 에인트호번과 250만 파운드에 계약을 맺는다.

안데를레흐트에서 통산 231경기 135골을 기록했다.

2.1.2. PSV 에인트호번

첫 시즌인 1994-95시즌에는 크루제이루 EC에서 영입한 브라질의 초신성 호나우두와 투톱 듀오로 호흡을 맞췄고, 환상적인 연계 플레이로 에레디비시의 수비들을 파괴하며 30경기 12골 4도움을 기록, 30골을 득점하여 리그 득점왕에 오른 호나우두와 함께 팀을 3위에 안착시켜 UEFA컵 티켓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 시즌인 1995-96시즌에도 딕 아드보카트 감독 지휘 하에 호나우두와 투톱을 이뤘지만 호나우두가 무릎 부상으로 시즌 절반 이상을 날려버리면서 그 둘의 환상적인 호흡은 장기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닐리스는 혈혈단신으로 리그에서 31경기 21골 13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고, 드디어 커리어 첫 리그 득점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리그 도움 부문 2위에 이름을 올리는 위엄을 보였다.
또한 UEFA컵에서도 5골 5도움을 기록하며 위르겐 클린스만(15골), 호나우두(6골)에 이어 득점 공동 3위, 게오르게 하지, 빔 용크와 함께 도움 공동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95-96시즌 리그와 모든 대회를 통틀어 총 44경기 31골 18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공격 포인트 1을 넘어서는 맹위를 떨쳤다.[3]

세 번째 시즌인 1996-97시즌을 앞두고 호나우두가 팀을 떠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 팀의 공격과 득점을 책임지게 되었다. 새로운 파트너인 마르셀루 라모스와 투톱을 이뤄 리그 26경기에 출전하여 21골 6도움을 기록, 욘 보스만, 로이 마카이, 욘 달 토마손 등을 제치고 2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팀이 5시즌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네 번째 시즌인 1997-98시즌에는 폼이 살짝 주춤하며 리그 24경기 13골 8도움에 그쳤고, 팀도 부진하면서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쳤다.
이에 책임을 지고 아드보카트 감독이 물러났고 바비 롭슨 감독이 새로운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다섯 번째 시즌인 1998-99시즌을 앞둔 시점에 뤼트 판니스텔로이가 닐리스의 새로운 투톱 파트너로 영입되었고 둘은 환상적인 호흡을 선보이며 다시 팀을 반등시켰다. 결국 둘은 나란히 사이좋게 리그 득점 1위와 2위를 차지하는 활약을 펼쳤고[4] 팀도 이전 시즌보다 호성적을 거뒀다. 이 시기 롭슨 감독은 판니스텔로이와 닐리스를 빗대어 "그 둘은 마치 베이컨달걀처럼 잘 어울린다." 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판니스텔로이와 닐리스의 활약에 비해 성적이 아쉬웠고 결국 롭슨 감독도 경질되었다.

마지막 시즌인 1999-2000시즌에는 닐리스의 대선배격인 벨기에와 에인트호번의 레전드 출신 에릭 헤러츠 감독이 부임했다. 역시 이전 시즌과 마찬가지로 판니스텔로이와 좋은 활약을 이어갔고 23경기 19골 11도움을 기록하며 29골 8도움을 기록한 판니스텔로이와 함께 마침내 팀을 리그 정상에 올려놓으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닐리스와 판니스텔로이는 일명 '골든 듀오'로 불리며 2시즌 동안 무려 103골을 합작했다.

이 시즌을 끝으로 PSV와의 계약이 만료되었고 33세의 닐리스는 더 늦기 전에 빅리그에서 자신의 기량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계약 연장 없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아스톤 빌라 FC로 FA 이적한다. 이 시기 리버풀 FC를 비롯한 여러 명문 구단들이 닐리스를 노렸지만 닐리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대적으로 약팀에 속하는 아스톤 빌라를 택했고 이는 당시 화제가 되었다.
통산 212경기 133골 61도움

2.1.3. 이후

첼시 FC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으며 그 경기에서 데뷔골을 넣으며 클래스를 입증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프리미어 리그 세 번째 경기인 입스위치 타운 FC전에서 문전으로 날아오는 크로스를 잡으려다 리처드 라이트 골키퍼와 충돌했고,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로 뼈가 산산조각이 나 최악의 경우엔 다리를 절단해야 될 지도 모를 정도의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리를 절단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결국 이 사건 이후 4개월 뒤 닐리스는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2.2. 국가대표 경력

각급 연령별 대표팀을 거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1988년 3월 26일 헝가리전에서 후반 시작과 동시에 교체 투입되면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이 시기 닐리스는 벨기에의 간판 스타 플레이어인 얀 쾰레만스의 백업 내지 벨기에 대표팀의 준주전 정도 위치였으며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는 유럽 지역예선 최다 득점자인 마르크 판데르 린덴과 마르크 드그리스 등에 밀려 참가하지 못했다.

1994년 6월 4일 잠비아와의 친선전에서 데뷔 6년 만에 A매치 데뷔골을 기록했고 나흘 뒤 치러진 헝가리전에서 2경기 연속 득점포를 가동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결국 폴 반 힘스트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94 FIFA 월드컵 미국 최종 명단에 포함되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24강 조별리그 1차전 모로코전에서 크로스로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24강 조별리그 2차전 네덜란드전에서는 벤치를 지켰고, 24강 조별리그 3차전 사우디아라비아전과 16강 독일전에는 출전했으나 이렇다 할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고 팀도 16강 11위로 탈락했다.

UEFA 유로 1996 지역예선에서는 5경기 2골 2도움을 기록했지만 유로 16개국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고,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유럽 지역예선 6경기에서 4골 1도움을 기록하며 벨기에의 월드컵 32강 본선 진출에 일조했다.

1998 월드컵 32강 본선 조별리그 1차전 네덜란드전에서 최전방 원톱으로 선발 출전하였고, 2차전 멕시코전에서는 루이스 올리베이라와 투톱으로 선발 출격했으나 득점은 하지 못했다. 32강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한국과의 경기에서 킥오프 7분 만에 득점에 성공하면서 마침내 월드컵 첫 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의 유상철이 동점골을 터뜨리면서 경기를 1:1로 무승부 탈락 당하는 고배를 마셨다.[5]

이 경기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 선언을 했지만 2년 뒤 UEFA 유로 2000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복귀해 유로 2000에도 참가했다. 16강 조별리그 1, 2차전에서는 주전 공격수인 브랑코 스트루파르의 백업 역할로 후반 중후반쯤 교체되어 들어갔으나 16강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튀르키예전에서는 에밀 음펜자와 투톱으로 선발 출전하였다. 대회를 무득점으로 마쳤고, 벨기에도 16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여 최종 12등으로 8강 진출 실패했다.

이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 선언을 했다. 결국 98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넣은 골이 대표팀 커리어 마지막 골이 되었다.

A매치 통산 56경기 10골에 그치며 화려한 클럽 커리어에 비하면 매우 아쉬운 대표팀 커리어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9번 유형의 스트라이커와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활약한 닐리스는 양발잡이였으며 뛰어난 개인기술과 빠른 스피드, 지능적인 플레이 메이킹과 연계 플레이로 그의 스트라이커 파트너들에게 수 많은 기회들을 만들어냈다. 또한 우아한 드리블 능력과 스나이퍼 같은 슈팅 정확성, 원샷원킬의 골 결정력으로 본인 역시도 수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유럽에서는 데니스 베르캄프와 유사하다는 의견도 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여담



[1] 모든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선수들이 그러하듯 공격형 미드필더도 소화했다.[2] 판니스텔로이는 호나우두처럼 최고의 파트너로 닐리스를 콕 집어서 꼽지는 않지만, 항상 최고의 파트너 중 하나로 언급한다.[3] 결국 이 시즌이 닐리스의 커리어 하이라고 볼 수 있다.[4] 판니스텔로이(31골 8도움), 닐리스(24골 7도움)[5] 벨기에는 조 3위 대회 19위로 16강 실패했다.[6] 2위는 야리 리트마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