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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기본 정보 | 팀 컬러 | 선수단 | 스타 플레이어 | 등번호 | 유니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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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결번 | ||||
일반 정보 | }}} | 1999 | ||
35 장종훈 | 21 송진우 | 23 정민철 | 52 김태균 | ||||
구단 역사 | 암흑기(5886899678) | 역대 트레이드 | 사건 사고 | 상대 전적 | ||||
경기장 | 1군 대전 베이스볼 드림파크 · 청주종합경기장 야구장 | 2군 서산전용연습구장 이전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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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선수의 이적 · 은퇴로 인해 사장(해체)된 통칭(콤비네이션) |
1. 개요
2010년대 초중반, 한화 이글스의 외야진을 맡았던 선수들인 김경언, 고동진, 추승우, 정현석, 이양기의 성씨를 따서 만든 단어.조원수박차를 조원수라 부르듯, 김고추정이 역시 뒷부분은 떼고 김고추(…)라 부르기도 한다.[1]
2. 상세
2000년대 중반부터 계속된 고질병이었던 한화의 노장 수집 문제[2]는 결국 독이 되어 2010년에는 1군에서 활약을 할거라 기대되는 20대 외야수가 최진행을 제외하면 없다시피했다. 그리고 노장들 역시 노쇠화가 오며 간판 타자였던 이영우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 강동우 역시 부활과 부침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화의 외야진은 최진행을 지명타자로 내릴시, 정말 애매하디 애매한 2~30대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장성호와 김태균의 포지션 문제가 있을때 최진행이 풀타임 외야수로 외야진을 구성하긴 했지만, 장성호가 나간 뒤 무릎에 부상이 생긴 최진행을 다시 지명타자로 내리게 된 후론 다시 막장 외야의 재림이었다.그리하여 생긴것이 바로 이 김고추정이 라인이다. 사실상 한화의 오래된 암흑기을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로 다른 팀 들은 보통 방화범인 불펜 투수들 모임이 암흑기의 상징처럼 나돌아다니는데, 왜 한화만 타자들이 상징되냐면, 애초에 한화의 투수진은 이미 괴물이 된 류현진과 노망주 박정진을 제외하면 가능성이라도 있는 선수들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살려조라는 투수진이 생기긴 했지만 투수들을 비하하는 목적은 아니었고. [3] 그래서 스톡킹에 출연한 김경언도 이들을 잘 쓰는 법은 그냥 컨디션 따라 돌려쓰는 게 답이라고 할 정도.
김고추정이 5명 중 1명이라도 100타석 이상을 뛴 2004-2017년 한화 외야진의 war* 순위는 445773845794AA로 매년 중-하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심지어 이 기간 동안 김고추정이가 war* 1을 넘긴 적은 딱 10번이다.[4]
3. 멤버
3.1. 김경언
경남상고의 호세 소리를 들으며 KIA 타이거즈에 2차 2라운드로 입단하였고, 외야 유망주로 지목되며 김성한 감독이 그를 꾸준히 좌익수와 6번타자로 기용을 하여 어떻게든 키워보려 했지만 결국 잠재력을 터뜨리지 못하였다. 이후 김성한 감독이 나간 뒤엔 그야말로 존재감이 사라졌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단 161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2008년부터로 범위를 좁히면 단 10경기를 나오는 침체기를 가졌다.그러던중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잡히는데, 장성호와 안영명의 트레이드 때 곁다리로 한화에 오게 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절치부심을 하고 1~2달간 1번타자와 중견수로 나서며 엄청난 활약을 하는데, 그 해부터 아름다운 일주일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언제나 2군에서 맹타를 휘두르다, 1군으로 콜업된 뒤에도 1~2주간 좋은 활약을 해주며 팬들의 응원을 받다 다시 추락하여 2군에 내려가는 게 패턴이 되며 희한한(?) 인상을 남기던 중..
갑자기 1~2주 후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한 달을 거쳐, 몇 달을 가도 3할을 유지하는 상승세를 타게 된다. 플루크 시즌으로 여겨지며 반신반의의 시선을 받으며 시작한 다음해, 마침내 그의 포텐
김고추정이 멤버 중 유일하게 주전으로 포텐을 터뜨리며 가장 늦게까지 선수생활을 한 편이고 유일하게 FA 계약에 성공하기도 했다. 또한 가장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으며, 가장 실력이 좋다는 이미지를 가졌다.[5] 다만 잦은 부상과 기복으로 아쉬운 모습도 많이 보여주었다.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지도자 생활을 하지 않고 야구계를 떠나 2020년부터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2022년에 파주 챌린저스의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3.2. 고동진
멤버들중 가장 오래 전부터 팬들의 주목을 받은 인물, 데뷔시즌 3할을 기록하며 팬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그 이후 부침을 반복하여 팬들을 답답하게 해준 선수다.이 이전 한화 팬들이 붙인 별명인 한고신유[6]의 멤버이기도 하고 몇 년 동안 꾸준히 기회를 주고 주전으로 기용했음에도 끝내 터지지 못한 인물이다.
선구안은 절망적이나, 고동진만한 컨택력을 가진 한화 외야수가 없던 실정이었고, 타구판단은 지옥이었지만 중견수를 볼수 있는 한화외야수 자체가 몇 없던 실정이었고, 도루개수 역시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마찬가지로 도루능력이 있는 한화 타자 자체가 없었던 실정이라 꾸준한 기회를 받을수 있었다.
김인식 시절 주전자리를 받다 결국 김인식의 믿음의 야구 역시 포기하여 2008년부터는 2군에서 썩었다. 그러던중 군대로 2010년까지 보이지 않게 되고, 2011년 복귀해선 난데없이 야왕의 총애를 받아 한화의 소금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이후 2012년과 2013년 2할 7푼의 괜찮은 타율을 보여주며 주장까지 얻게 되는 행운을 얻었지만 행운은 거기까지, 그 이후부터 더욱더 눈이 썩는 플레이를 하게 되고, 이용규의 가세와 드디어 젊은 외야수자원들이 생겨나며 고동진은 자리를 잃고 2016년 웨이버공시되었다.
김고추정이 중 가장 많고 꾸준하고 오랫동안 기회를 받았고, 결국 끝내 터지지 않은 인물, 많은 팬들은 그냥 기회를 준 것이 아니라 선수층이 얇디얇아 어쩔 수 없이 땜빵을 한게 1년이 가고 2년이 가다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 중이다.
3.3. 추승우
LG 트윈스에 데뷔했지만 당시 감독에게 어이없는 트레이닝을 받으며 방출되어 선수생활에 큰 위기가 닥쳤지만 김인식 감독의 영입으로 다시 한번 기회를 얻었다.2008년 1번타자로 출장하며 6월까지 3할을 치며 드디어 한화에도 발야구가 시작되는가 기대됐지만 그뿐, 쭉 내리막을 타며 시즌타율은 2할 4푼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그 이후 발빠른 외야수라는 자원이어서 많은 기회를 받았지만 받을수록 눈이 뒤틀리는 타격을 보여주며 다시 2군으로 내려가기 일쑤였다.
그렇게 잊혀지나 했지만.. 2013년 뜬금없이 3할을 치며 반짝이라 생각했던 팬들의 생각까지 되돌리며 제 2의 전성기가 시작되나 싶었던 찰나.. 주루플레이중 부상 이후 추승우는 결국 그대로 다시 내리막을 탔다.
2014년 몇경기 출장하다 시즌 막판이었기 때문에 금방 끝났고, 2015년에 지옥펑고를 받았지만 1군 출장도 못하고 신성현의 콜업을 위해 웨이버공시되었다. 그래도 그 이후 경찰청 주루코치를 맡고 한화 코치까지 맡고 있다.
다만, 김고추정이 멤버들 중 가장 노력형 선수였기에 부진한 통산 성적과는 별개로 한화 팬들은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3.4. 정현석
본래 투수출신이었지만 대학시절 타자로 전향했다. 2010년 플래툰으로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 뒤 군대를 가는데 2군을 박살내며 한화 팬들에게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한화 선수들이 그렇듯 2013년엔 터질듯 말듯하다가 그대로 그 애매한 상태로 시즌이 끝나버렸고, 2014년 정득병 사이언스를 개발하며 삼성으로 보상선수로 지명되며 김고추정이가 해체될뻔 했다. 그러나 암을 진단받아 한화와 삼성의 실랑이 끝에 삼성이 보상금으로 대신 받으며 해체가 되진 못했지만, 본인 인생 최대의 시련이 닥쳤다.하지만 잘 이겨낸 이후 2015년 복귀하여 3할의 타율을 때려 처참하게 파괴된 한화의 상태에 김경언과 로저스와 함께 어떻게든 숨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 해가 플루크였는지, 그 후 2년동안 몇 안되는 출장이었지만 그 출장에서도 안타를 단 한개도 때려내지 못했고, 결국 2년 동안 타율 .000을 기록했다. 2017년 이후 지도자 제안을 수락받아 재활군 코치부터 시작해 2023년 현재 1군 타격코치를 맡고 있다.
멤버들 중 가장 큰 우여곡절이 있었고 잠시나마 빛을 보기도 했던 선수였다.
3.5. 이양기
우타 대타 요원으로 주로 활약했던 선수. 2010년까지는 한화팬 마저도 '이런 애가 있던가'싶을 정도의 존재감이었지만, 2011년 야왕의 대타 요원으로 낙점받으며 2할 7푼의 타율을 기록했다.하지만 이후 기회를 좀처럼 얻을 수 없었다. 본인의 수비능력 자체가 헬이라 우익수는 무리였고 1루수와 좌익수, 아니면 지명타자가 가능한 자리였는데 당시 주전 1루수는 김태균이 버티고 있었고, 최진행이 좌익수를 보고 있었다. 그 나머지 한 자리는 장성호나 김태완이 차지하여 자리를 차지하기 힘들었던 것. 또한 본인 역시 부상과 부진을 반복하여 기회를 놓쳤다.
이양기의 전성기는 2013년으로 당시 롯데 자이언츠로 장성호는 이적을 하고, 김태완은 군대 제대 이후 노답의 모습을 보여주던 가운데 3할의 타율을 선보이며 꿈도 희망도 없던 시즌에서 그나마 한화팬들에게 희망이 되던 선수였다.
하지만 그 이후 2014년 다시 타율이 떨어지고 부상중이었던 이용규가 지명타자를 가며 다시 밀려났고, 다음 해엔 아예 손목쪽에 탈이 나 정식선수도 아니었다. 2016년 돌아와 기적과도 같은 3타점 2루타를 때리는등 알토란같은 활약을 해줬지만 다시 타율은 떨어졌고, 2017년 역시 한때 4할까지 쳤으나 계속 타율이 하락하여 2할 2푼으로 마무리, 시즌중 리빌딩 기조에 따라 웨이버 공시를 당한 이후 전력분석원을 맡다 타격보조코치로 승격되었다.
사실 타율 자체는 낮은 편이 아니었으나 출루율도 좋지 못했고 큰 덩치에 비해 단타 생산을 주력으로 했기 때문에 생산력은 매우 떨어졌던 선수이다. 만약 주전을 맡았다면 생산력문제로 큰 질타를 받았을것이고, 결국 우타 대타요원이 가장 천직이었던 셈이다.
잘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해당 인물들 중 제일 먼저 한화에 입단했다.
4. 창단, 해체, 그리고 그 이후
2003년 이양기가 데뷔하고 2004년 고동진이 데뷔하고 2007년 정현석이 데뷔하여 팀에 합류했다. 추승우가 2008년 방출후 영입되었고 2009년 고동진이 군대를 가고 뒤이어 2011년엔 정현석이 군대를 간다. 그 사이 2010년 김경언이 트레이드되어 팀에 합류하고, 2013년 전원제대되어 전설이 시작되었다.[7][8]각자의 장점보단 단점이 더 뚜렷하여 팬들의 한숨이 절로 나왔고, 2014년 이양기와, 추승우는 부상으로 인해 김경언, 고동진, 정현석만 남았다. 하지만 그 이후 고동진과 정현석마저 부진을 하며 살아남은 사람은 갓경언으로 승급된 김경언 하나뿐이었다. 2015년부터 신인 외야수가 나와 더이상 희망고문을 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하나하나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2015년 신성현 콜업을 위해 추승우가 방출되며 드디어 해체되었고, 그 뒤를 이어 고동진이 웨이버되었다. 그 이후 이양기가 복귀해서 맹타를 휘두를 때도 있었지만 다시 한계를 보여주며 2017 시즌 중 방출, 그리고 2017년이 끝난 뒤 리빌딩 기조에 의해 정현석과 김경언을 방출함에 따라 김고추정이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리고 해체 이후 한화는 10년간의 비밀번호를 끊고 리빌딩의 가능성을 보이며 김고추정이는 암흑기의 전유물로 취급되는 중이다.
하지만 2018년 역시 김고추정이의 자리를 잃게 만들었던 최진행이 김고추정이보다도 못한 성적으로 떨어지고, 김민하가 왔으며 오선진까지 있는 등 아직 한화의 만년 유망주들은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다. 그나마 오선진은 2019년 허벅지 부상을 안고도 센터라인에서 버틴 끝에 12년만에 억대 연봉을 찍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최진행도 고추정이처럼 지도자로 전업할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2018년 말 이후 김경언은 호주 프로야구의 한국인 팀 질롱 코리아에서 뛸 예정이었으나 여러 이유로 호주행을 포기했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는 대전에서 치킨집을 차리다가 2022년에 파주 챌린저스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고동진은 한화 1군 주루코치를 맡다가 2군으로 내려갔고 추승우는 육성군의 작전, 주루코치를 맡다가 현재는 2군에 합류했다. 정현석 역시 재활군에서 타격 코치를 맡다가 2군으로 합류했고 이양기는 2020년까지 한화에서 타격보조코치를 맡다가 2021년 스코어본 하이에나들을 거쳐 2022년에는 동산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이 되었다.
이후로도 내야수에서 역사는 반복되었는데, 이름하여 하오강이다. 세 명 다 주전으로써는 애매한 성적을 내는 만년 유망주라는 점이 한화팬들을 속 터지게 하는 주범이다. 게다가 세 명 다 내구성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고 짧은 기간 동안 버닝하다가 다시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 특징. 그러나 전멸한 한화의 중간층에서 그나마 1군 레귤러로써 가장 오래 자리잡은 선수들 역시 이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팬들의 분노를 사는 면도 있다. 팬들은 지금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인들에게 이들과는 달랐으면 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이들 중 하주석은 다음해 선구안이 개선되며 터졌으나 오선진은 트레이드로 삼성으로 갔고, 강경학은 심각한 멘탈 문제로 2군으로 사라지더니 KIA로 트레이드되면서 하주석만 남았다. 그러나 이제는 하주석도 음주운전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완전히 해체하나 했지만 하주석 대신 FA로 다시 오선진을 영입하며 이 트리오는 오선진 하나만 남고 해체되었다. 한편 하주석은 70경기 출전정지 징계가 끝나며 복귀를 노리고 있지만 팬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2021년 한화의 외야진인 정진호, 노수광, 김민하는 김고추정이 시절이 훨씬 나을 정도의 처참한 타격을 보여주었다. 내야(정노하)와 외야(정노하)의 수준 차이가 극심해 팀을 끌어내리는 주 요소가 되고 있다. 결국 한화의 외야진은 2000년대 후반 이후 현재까지 가장 큰 골칫거리로 남아있는 상황이며 이 중 정진호, 김민하는 2021 시즌 후, 노수광은 2023 시즌 후 방출되고 만다.
[1] 5명 중 김고추 3명만 좌타자이다.[2] 이는 구단에의 2군과 유망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다는데 기인한다.[3] 사실 야왕 시절때 양훈, 김혁민, 안승민등을 위시로 한 투수진이 생기고 이들 역시 하락세를 탔지만,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케이스라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4] 김경언은 12부터 15까지 꾸준히 war* 1을 넘겼고, 고동진은 04, 07, 12 때, 나머지 셋은 모두 13 때 war* 1을 기록했다. 2를 넘긴 사람은 13정현석과 15김경언이 전부.[5] 실제로 통산 wRC+과 WAR*을 보면 김경언 wRC+ 96.1 WAR* 11.12, 고동진 wRC+ 79.3 WAR* 4.59, 추승우 wRC+ 73.3 WAR* 2.41, 정현석 wRC+ 77.6 WAR* 1.74, 이양기 wRC+ 79.4 WAR* 0.91로 나머지 넷이 쌓은 WAR*을 합쳐도 김경언보다 낮다. 다만 이건 김경언이 14~15 때 많이 끌어올린 것이 크며, 13까지는 wRC+ 85.5로 고동진과 판박이 수준이었다(타석, wRC+, WAR* 모두 비슷하다). 사실 이렇게 차이가 나게 된 것은 김경언이 14-15 때의 맹활약도 있고 16-17에도 wRC+ 90 정도로 크게 깎아먹지 않은 것에 비해 고정이 3명(추승우는 원래도 낮았고 부상으로 일찍이 은퇴)이 말년에 미친 듯이 성적을 까먹어서 벌어진 것.[6] 발전이 없던 한상훈, 고동진, 신경현, 유원상을 모은 말, 한때 이 네명 때문에 우승은 고사하고 준플레이오프조차 못간다는 말까지 돌았을 정도다. 하지만 다르게 해석한다면 그만큼 대체자원을 못 키웠으니 못하는데도 주전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된다.[7] 근데 재밌게도 막상 저 5명이 다 모인 2013년을 보면, 김고추정이의 성적이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정현석, 이양기, 추승우는 2013년이 커리어하이로, 정현석은 사실 다음해에 역대급 득병의 모습을 보여서 그렇지(...) 2013년은 .287 wRC+ 104.4 WAR* 2.12로 주전으로는 괜찮은 활약을 펼쳐줬다. 추승우와 이양기는 타석은 적지만 각각 .304 wRC+ 113.6 WAR* 1.12, .308 wRC+ 120.7 WAR* 1.17로 타율 3할과 WAR 1점대를 달성했다. 김경언과 고동진은 2012년에 비하면 성적이 확실히 떨어졌으나 김경언은 .276 wRC+ 99.1 WAR* 1.09로 10-11보다는 나은 성적이었고, 고동진은 .272 wRC+ 88.8 WAR* 0.45로 좋은 성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어차피 04, 12 빼면 늘 답이 없던 타격을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기대 이상이긴 했다(...).[8] 그러나 이건 개개인으로 볼 때고, 팀은 9팀 중 7위, 그것도 8위 SK와는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외야진이 좋지 않았다. 아래로는 신생팀 NC가 끝. 사실 김고추정이가 선전했다고 해도 5명을 합쳐서 1400타석 차지하고 외야수 war* 1위인 손아섭과 겨우 비슷한 수준인 거라서 팀 성적이 좋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