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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트(실업시절) | ||||
프런트 | 선수단 | ||||
경기장 | 1군 메인 사직 야구장(재건축) 과거 | |||
1군 보조 울산 문수 야구장 과거 마산 야구장 | ||||
2군 상동 야구장 | ||||
현재 시즌 | 2025 시즌(시범경기) | |||
구단 역사 정보 | ||||
통합 역사 | 역사 | |||
우승 | ||||
암흑기 | 암흑기(8888577, 5788, 7A78877) | |||
선수단 | 역대 선수 | 프랜차이즈 스타 | 역대 등번호 | 역대 필승조 | |||
영구 결번 | 11 최동원 | 10 이대호 | |||
기타 | 역대 기록 | 역대 신인드래프트 | |||
구단 세부 정보 | 특징 | 팀 컬러 | 유니폼(얼터너티브) | ||
라이벌리 | 상대 전적 | |||
vs vs vs vs vs v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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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 주역으로 꼽히는 5명의 3할 타자 전준호, 이종운, 박정태, 김민호, 김응국을 합쳐 부른 별명이다. 명칭은 북두칠성에서 따온 것으로, 롯데가 남쪽 부산 연고인 것을 빗대어 북쪽이 남쪽으로, 5명이어서 칠성은 오성으로 각각 바뀌었다.[1]
우투우타인 박정태 1명을 뺀 나머지 4명이 좌투좌타였고, 모두 장타력 중심의 거포보다는 중/단거리형 교타자라는 점에서 NPB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1990년대 중후반 기관총 타선에 비견할만한 라인업이다.[2]
2. 행보
2.1. 1992시즌 이전
가장 먼저 롯데에 합류한 선수는 '자갈치' 김민호였다. 부산고를 거쳐 1984년 롯데에 입단했지만, 이미 김용철이라는 부동의 주전 1루수가 버티고 있던 만큼 한동안 백업으로 뛰었다. 이후 어우홍 신임 감독이 부임한 1987시즌부터 김용철을 외야수로 밀어내고 주전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고, 이어진 1988시즌에 이른바 '도끼 타법'을 익히며 타출장 .323/.412/.489 OPS .901 14홈런 64타점이라는 빼어난 활약을 펼쳐 롯데의 주축 타자로 성장했다. 이후로도 매 시즌 3할 전후의 타율을 기록하며 활약했고, 당시에는 크게 조명받지 않았으나 출루율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1991시즌에는 데뷔 후 가장 많은 20개의 홈런을 쳐내기도 했다.한편 1988시즌을 앞두고는 김응국이 롯데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 투수였던 김응국은 2군에서 타자로서의 재능을 보이면서 이듬해인 1989시즌에 완전히 타자 전향을 택했다. 같은 해에는 경남고 출신 로컬 보이 이종운이 입단했고, 둘은 나란히 1989시즌에 1군 데뷔에 성공했다. 김응국은 이어진 1990시즌에 완전히 주전으로 도약하며 재능을 개화하기 시작했고, 1991시즌에는 데뷔 첫 3할 타율을 달성하는 등 타출장 .300/.388/.443 OPS .831 9홈런 50타점 25도루(9실패)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반면 이종운은 1990시즌 1군 4경기 출전에 그쳤고, 1991시즌에도 완전한 주전으로는 안착하지 못한 가운데 성적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남두오성의 마지막 퍼즐은 1991년 드래프트 입단 동기인 박정태와 전준호로, 박정태는 1차 지명으로, 전준호는 2차 2라운드 지명으로 롯데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부터 큰 기대를 모았던 박정태는 첫 해부터 122경기 타출장 .285/.346/.464 OPS .810 14홈런 75타점이라는 신인답지 않은 활약으로 박영태를 밀어내고 주전 2루수로 안착, 2루수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전준호는 이에 비하면 평범하긴 했어도 122경기 타출장 .263/.360/.347 2홈런 48타점 18도루(12실패)로 신인임을 고려하면 기대할 만한 성과를 내며 주전 중견수 자리를 꿰찼다.
2.2. 1992시즌
남두오성 1992시즌 타격 성적 | ||||||||||||||
<rowcolor=#fff> 선수명 | 경기 | 타석 | 안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전준호 | 120 | 537(3) | 140(T-3) | 5 | 49 | 90(5) | 33(3) | 51 | 49 | .300 | .376 | .408 | .784 | 118.1 |
이종운 | 108 | 444 | 126 | 3 | 57 | 66 | 21(T-7) | 23 | 47 | .314(8) | .354 | .444 | .798 | 117.2 |
박정태 | 124(8) | 529(T-4) | 149(2) | 14 | 79(T-5) | 91(4) | 7 | 69(7) | 42 | .335(2) | .424(6) | .539(5) | .963(5) | 167.9(5) |
김민호 | 118 | 495 | 133(T-7) | 16 | 88(4) | 69 | 5 | 68(8) | 76 | .322(4) | .418(7) | .525(7) | .943(6) | 157.8(6) |
김응국 | 119 | 486 | 128 | 10 | 79(T-5) | 76(10) | 29(4) | 58 | 50 | .319(6) | .399(8) | .504(10) | .903(T-8) | 143.0(9) |
괄호 안은 리그 내 순위. 10위 이내일 때만 기재. |
그리고 1992시즌, 이 5명은 나란히 3할 타율을 기록하는 등 맹타를 휘두르며 롯데의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큰 힘을 보탰다. 20홈런 타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파워가 그렇게 강한 타선은 아니었으나[3] 높은 타율과 출루율, 많은 2루타와 3루타 생산[4]을 앞세운 중장거리 갭 파워는 엄지를 치켜 세우게 했다. 실제로 팀 홈런이 리그 최하위임에도 이 해 롯데의 팀 OPS는 .783으로 1위 해태 타이거즈(.790)에 단 7리 모자랄 뿐이었고, 팀 장타율도 .417로 3위에 해당했다. 심지어 무등 야구장보다 사직 야구장이 타자에게 더 불리함을 고려하면 팀 홈런 최하위 팀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경이적인 생산성이다.
선수 별 활약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전준호
리드오프로 나서면서 3할 타율에 리그에서 3번째로 많은 33도루를 기록하며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롯데 시절 중 95년을 제외하고 가장 좋은 타격 성적을 기록한 해였으며, 시즌 5홈런은 그의 통산 19시즌 중 가장 많이 홈런을 때린 해이다. 특히나 스탯을 좀 더 깊게 파보면 가치는 더 올라가는데 볼넷/삼진이 51개/49개에 출루율도 .376이라 중견수임에도 wRC+가 113.8로 공수주가 다 되는 가치있는 중견수였다.[5] 도루 실패도 단 6개에 불과해 도루 성공률도 84.6%에 달했다. 출루 능력 좋고 주자로서도 가치가 높은, 2020년대 기준으로도 훌륭한 리드오프다.
- 이종운
직전 시즌까지 아직 미묘한 성과를 내던 것과 달리, 본격적으로 잠재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롯데의 2번 타자로 발돋움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2번 타자 자리에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선수를 배치하던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종운이 2번에 배치된 점도 있지만[6], 이종운의 타격 성적도 타출장 슬래시라인 .314/.354/.444 OPS .790으로 준수했다. 21개의 도루와 도루 성공률 72%에서 보이듯 주자로서도 강점이 있어 전준호와 함께 속도감 있는 1-2번 테이블 세터진을 구축했다. 특히나 이 시즌 이종운이 만든 가장 눈에 띄는 기록은 14개의 3루타로, 당시 기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한 시즌 최다 3루타 신기록이었다.[7]
- 박정태
롯데의 3번 타자로 주로 나서며 KBO 2루수 역사에 남을 시즌을 보냈다. 단 2년 차 시즌임에도 타출장 .335/.424/.539 OPS .963 14홈런 79타점이라는 훌륭한 기록을 남겨 남두오성 가운데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했고,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2연패에 성공했다. 특히나 센터라인 선수가 이러한 타격 성과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높다. 특히나 이 해 박정태가 쳐낸 43개의 2루타는 2016년 최형우가 46개로 경신하기 전까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한 시즌 최다 2루타 기록이었다.[8] 참고로 2024시즌 종료 시점에서도 단일시즌 2루수 중에 박정태보다 wRC+기준 더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했던 선수는 1987~88년과 1993년 김성래와 1992년 홍현우밖에 없다. 박정태가 얼마나 KBO 역사에 남을 시즌을 보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 김민호
4번 타자다운 모습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322/.418/.525 OPS .943이라는 비율 스탯도 훌륭했고, 장타력이 부족했던 롯데에서 16개의 홈런으로 팀 내 최다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남두오성 가운데 유일한 30대 고참 선수였던 그답게 결정적인 상황에서의 집중력과 클러치 능력은 남두오성 안에서 최고였는데, 해태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1회초 상대선발 문희수로부터 기록한 3점짜리 결승 선제홈런, 빙그레 이글스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 1회에 기선을 제압했던 선제 2타점 적시타등 을 보면 그의 클러치 능력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반영하듯 타점도 남두오성 가운데 최다.
- 김응국
주로 5번 타순으로 나섰으나 상황에 따라 3, 4번으로도 나섰으며, 그 타순이 충분히 어울릴 만한 성과를 남겼다. 타출장 슬래시라인 .319/.399/.504 OPS .903 10혼런 79타점을 기록했는데, 장타율과 OPS, 홈런, 타점은 모두 김응국의 야구 인생을 통틀어서 커리어 하이다. 특히 홈런은 이 이후로 단 한 번도 두 자릿수를 기록한 적이 없었을 정도. 사실 그렇다 쳐도 10개라는 홈런의 절댓값 자체가 적은 편인데, 그럼에도 5할대 장타율을 기록할 수 있던 것은 무려 12개나 쳐낸 3루타 덕도 있었다. 같은 해 이종운이 14개를 쳐서 2위로 밀렸지만, 사실 이종운이 아니었다면 1991년 이정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다 3루타 타이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많은 3루타에서 보이듯 발도 빨라서 29개의 도루로 전준호에 이어 4위에 올랐으며, 도루 성공률도 78%로 훌륭했다. 안정적인 수비력은 덤.
2.3. V2 이후
롯데 타선의 중심으로서 팀의 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김민호와 김응국을 제외하면 선수로서의 말년이 비교적 좋지 못했다.5명 중 가장 선배인 김민호는 1995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선수단 정리 과정에서 전력외로 분류됐고 1996년 시즌이 끝난 뒤 남두오성 멤버 중 가장 먼저 은퇴했다. 물론 1996년 말 당시로서는 김민호의 나이(세는나이 36세)가 은퇴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장의 수준이기는 했다.[9] 같은 해 은퇴를 결정한 한영준과 함께 롯데 유니폼을 입고 사상 첫 은퇴 경기를 치르며 그래도 순탄하게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10]
김응국은 1992시즌과 같은 파괴력 있는 타격 성적은 다시 보여주지 못했으나 꾸준한 모습을 오랜 기간 이어갔고, 롯데의 원 클럽 맨으로 남다가 2003년 은퇴했다. 은퇴 당시만 하더라도 롯데 프랜차이즈 야수진의 통산 기록 항목에서 상위권을 여럿 점유할 정도로 팀의 레전드라 불리기에 손색 없는 족적을 남겼다.[11]
이종운은 1992시즌 이후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했고, 1996시즌에는 초반에 맹타를 휘두르는 듯하더니 단 6경기만에 다리 골절상으로 시즌 아웃당하는 불운까지 겹쳤다. 결국 1997년 10월에 한화 이글스[12] 로 트레이드됐고, 1998시즌을 마치고 은퇴했다. 다른 남두오성 선수들이 KBO 레전드, 혹은 롯데 구단 레전드로 불릴 만한 커리어를 쌓은 것에 비하면 이종운의 선수 커리어는 비교적 소박한 편.
박정태는 이후로도 롯데 타자 가운데 가장 열광적인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이자 롯데의 아이콘으로 활약을 이어 갔다. 골든글러브도 3번이나 더 받았고, 1999시즌에는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30대에 접어들며 기량이 조금씩 꺾이기 시작한 가운데, 2004년에 부임한 양상문 감독이 젊은 선수 위주의 리빌딩을 선언하며 박정태는 완전히 찬밥 대우를 받게 됐다. 결국 2004시즌 이후 은퇴를 선언하며 다소 쓸쓸하게 은퇴를 맞이해야 했다.[13] 그나마 은퇴 경기는 없었어도 2005시즌 개막전에서 나름대로 성대하게 은퇴식을 치르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전준호는 1993년과 1995년 도루왕을 차지하며 롯데의 리드오프로 맹활약했으나 1997년 초 갑작스럽게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되며 부산을 떠났다. 이후 현대가 달성한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1998년, 2000년, 2003년, 2004년)에 혁혁한 공적을 세우는 등, 현대의 레전드이자 현대 왕조의 굳건한 일원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롯데 시절 활약상을 잘 모르는 젊은 팬들은 전준호가 현대-히어로즈에서만 활동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14] 현대가 히어로즈로 바뀐 후로도 리드오프로 활약하며 통산 549개의 도루로 개인 통산 도루 1위에 올랐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2009시즌에 커리어 로우 수준의 부진에 빠졌고 시즌 후 선수단 정리 과정에서 구단의 연봉 총액 감축을 이유로 방출됐다. 현대와 히어로즈의 미묘한 관계 때문인지 KBO 역사에 남을 레전드라는 입지와는 다르게 구단 차원의 은퇴식도 없이 쓸쓸하게 은퇴했으며, 이를 보다 못한 팬들이 직접 은퇴식을 열어주면서 팬 주체 은퇴식이 열린 최초의 선수로 기록됐다.
지도자로는 전준호를 제외하면 모두 평가가 좋지 않아서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사례도 더하고 있다.[15] 김민호는 동의대 감독을 맡았다가 2004년 롯데 감독이 된 고교 1년 선배 양상문의 부름을 받아[16] 2군 타격코치를 맡았으나 2006년 강병철 감독이 부임하면서 롯데를 떠나게 됐다. 이후 모교인 부산고 감독을 맡았으나 여기서도 성과가 신통치 않았고[17], 이후 다시 친정팀 롯데로 돌아와 2군 타격코치와 1군 수석코치를 역임했으나 남두오성 동료였던 이종운 감독과 함께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2016년 시즌 후 롯데를 또다시 떠났다. 2017년에는 옆동네 연고팀 NC 다이노스의 2군 타격코치로 부임한 뒤 2018년 이도형과 함께 1군 타격코치를 맡았으나 평가는 좋지 않았고, 얼마 안 가서 다시 2군으로 밀려난 후로는 한동안 2군과 잔류군에서만 활동했다. 2021시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아 NC를 떠난 뒤 2025시즌을 앞두고 한화 이글스의 1군 타격코치로 부임해 현장으로 복귀했지만, 그간의 행보 때문에 팬들은 우려가 더 크다.
김응국은 은퇴 직후 양상문 감독 체제 롯데에서 1군 타격코치를 맡았다가 2005시즌을 끝으로 양상문과 함께 팀을 떠났고, 이후 현대 유니콘스와 우리 히어로즈에서 2군 타격코치직을 역임했다. 2010년부터는 부산고와 김해고에서 지도자 활동을 하다가 2013년 다시 롯데로 돌아왔고, 주루코치와 외야수비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주루코치로서의 평가는 좋지 않았으며, 특히 3루 주루코치를 전담한 2015년에는 뇌주루 때문에 욕을 왕창 얻어먹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같은 남두오성 동료인 이종운과 함께 롯데를 떠나게 됐다. 그 후 한화 이글스에서 2년간 2군 타격코치로 일했다가 물러났고, 2019년부터는 부경고 코치로 2년간 활동을 했다. 부경고 코치 이후로는 야인 상태.
이종운은 은퇴 후 코치 연수를 거쳐 롯데의 1군 주루코치로 3년 간 활동했으며, 2003년부터는 경남고에서 무려 10년간 감독을 맡으며 아마야구계에서는 꽤 인정 받는 지도자가 됐다. 이에 2014년 롯데의 부름을 받아 코치로 활동했고 이듬해인 2015년 감독으로 선임됐지만, 부임 초기부터 입시비리 관련 루머나 장종훈 타격코치 영입, 보상 선수 정재훈 영입 등으로 팬들 사이에서 설왕설래가 오갔다. 결국 정규시즌에 들어서자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제2의 백골프'라는 악평을 들은 끝에 1년 만에 경질당했다. 그래도 젊은 선수를 보는 안목이나 육성 능력은 나름대로 인정받아 왔기에 이후 SK 와이번스 2군 감독을 거쳐 2023시즌 롯데 2군 감독으로 팀에 돌아왔다. 다만 시즌 중간에 래리 서튼 감독의 사퇴로 감독대행을 맡은 이후로는 그래도 여전히 1군 감독감은 못 된다는 평가. 2024년부터는 LG 트윈스의 잔류군 육성 총괄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박정태는 해외 지도자 연수를 거쳐 2006년부터 롯데 타격코치를 맡았고 2010년부터 2년간 롯데 2군 감독을 맡았으며 2012년에는 롯데 1군 타격코치로 팀 타격 지도를 총괄했다. 그러나 팀의 타격 성적이 폭망하면서 박정태에 대한 평가도 엄청 나빠졌고, 결국 시즌을 마치고 코치직에서 사임했다. 이후로는 KBO 육성위원직을 역임하면서 아마야구나 사회인야구 등을 지원하는 활동에 집중했으며, 2018년에는 NC 다이노스 감독 부임설이 보도됐으나 오보로 판명됐다.[18] 2019년에는 음주운전과 버스 운전 방해로 입건되는 사고를 쳤고, 이 과정에서 이미 전에도 2번이나 음주운전으로 처벌받은 사실이 알려져 그간 쌓아올린 명성에 상당한 상처가 가해졌다. 이런 탓에 2025시즌을 앞두고 SSG 랜더스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됐음에도 팬들의 강력한 반발과 KBO의 등록 불허 가능성이 제기된 끝에 본인이 자진 사임해 현장 복귀도 물 건너갔다.
전준호는 남두오성 가운데서는 사실상 유일하게 지도자로서의 평가가 좋은 편이다. SK 와이번스에서 잠시 코치직을 역임한 뒤 미국에서 코치 연수를 진행하며 마이너 순회 코치로 활동했고, 2012시즌부터는 고향팀 NC 다이노스에서 주루코치를 맡게 됐다. 첫 시즌부터 김종호를 50도루 도루왕으로 만드는 등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았고, 2018년에는 구단 내홍에 연루되기도 했으나 어찌저찌 잘 풀고 2021년까지 1~2군을 오가며 활동했다. 2022시즌을 앞두고는 지도자로서 24년 만에 친정팀 롯데로 돌아오게 됐으나 NC 시절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평가를 받다가 2023시즌 후 코치진 개편 과정에서 다시 팀을 떠났고, 이후 동의과학대 코치와 KBSN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3. 여담
- 아직도 많은 부산 갈매기들은 남두오성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그래서 롯데가 타선의 힘으로 상위권에 위치하면 남두오성이 종종 소환되기도 한다. 특히 2010 시즌에는 1992년의 타선에 파워까지 더해진 막강한 타선을 구축했는데, 컨택과 중장거리 갭 파워가 좋은 손아섭, 조성환에 중심 타선에서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이대호와 카림 가르시아, 강민호, 홍성흔, 하위 타선에서 한 방을 보여준 전준우와 황재균에 주력 하나는 일품이던 김주찬까지 가히 파괴적인 타선이었다. 덕문에 팀 타율(.288), OPS(.813), 홈런(185개) 모두 리그 1위에 올랐다.[19] 문제는 마운드. 비교적 타고투저였던 상황을 고려하면 사도스키-송승준-장원준이 버티고 이재곤과 김수완이 혜성처럼 등장한 선발진은 나쁘지 않았는데, 불펜진이 진짜 믿을 놈 하나 없는 수준으로 처참했던지라[20] 빛이 바라며 우승에는 실패했다.[21] 2024년에는 윤나고황이 롯데의 차기 타선을 이끌 영건 야수들로 기대를 모으며 다시금 남두오성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마침 남두오성과 비슷하게 전부 컨택과 중장거리 갭파워에 강점이 있는 선수들이기도 하다.[22]
- 온라인 야구게임 마구마구에서 92년 롯데덱은 우승덱과 더불어 기본 컨택을 10개나 주는 타선으로 대부분의 타자들이 컨택 최상을 찍어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재평가와 새로운 패치로 이제는 인기가 별로 없다. 그래도 좋은 팀 보너스 때문에 간혹 보이기는 한다. 2010년 롯데 자이언츠의 팀 타율은 정확히 1992년과 똑같고 홈런수는 3배나 차이가 났지만 파워가 2개밖에 차이가 안 나는 반면 기본 컨택이 3개만 주어지는 상황이 벌어져 유저들의 불만을 샀다. 재평가된 이후 이러한 불만은 사그러들었다.[23]
4. 관련 문서
[1] 남두육성을 유래로 둘 수도 있으나 북두칠성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2] 이 때의 요코하마 타선은 특별히 거포라고 할 만한 선수는 없어서 단타, 2루타 위주로 득점을 내기는 했지만 타선이 마치 기관총을 난사하듯, 1번부터 8번까지 쉴틈없는 연타로 상대팀 마운드를 KO시키는 게 주특기였다.[3] 이 영향으로 롯데는 이 해 팀 홈런도 68개에 그쳐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다. 7위 태평양 돌핀스(87개)와는 19개나 차이가 났으며, 1위 빙그레 이글스(146개)와 2위 해태 타이거즈(138개)에 비하면 절반도 못 미쳤다.[4] 실제로 롯데는 이 해 팀 2루타가 211개로 리그 1위에 해당했으며, 심지어 3루타는 무려 62개나 쳐내 2024시즌이 끝난 지금까지도 팀 한 시즌 최다 3루타 기록을 가지고 있다.[5] 다만 1992년은 이상하게 중견수들이 미쳐 날뛰던 시즌이라, 수비부담이 큰 센터라인임에도 리그 wRC+ 10위안에 중견수가 무려 3명이나 있었으며, 이정훈(1963)과 이순철, 동봉철이 그 주인공이다. 물론 앞의 세 명이 너무 완벽해서 그렇지 1992년의 전준호 정도 스탯이면 2020년대 기준으로도 한 팀의 주전 중견수로 절대 손색이 없다.[6] 실제로 이 해 이종운의 희생번트 갯수는 15개로 리그에서 7번째로 많았다.[7] 이는 20년 넘게 깨지지 않다가 2014년 서건창이 17개의 3루타를 쳐내며 기록을 경신했다.[8] 2016년 최형우 이후 2018년 호잉이 47개로, 2020년 이정후가 49개로 다시 경신해서 현재 최다 기록 보유자는 이정후다.[9] 1990년대 후반까지는 고작 33세가 넘어가도 '노장' 수식어를 붙이던 시절이었다. 선수들의 영양 관리나 운동 시스템이 달라지면서 요즘은 30대 중반이면 '고참'이라고 부르며, 30대 후반이나 40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노장' 소리를 듣는다.[10] 2020년까지 롯데의 40년 역사를 통틀어도 롯데 구단 주최의 은퇴 경기를 치른 선수는 김민호와 한영준 뿐이었다. 이후 2022년에 여기에 한 명이 더 늘어났다.[11] 과거에는 통산 출장경기, 최다안타, 타석, 득점, 볼넷 등 여러 항목에서 롯데 타자 1위 기록을 갖고 있었으나 조선의 4번타자와 근성의 오빠가 훗날 등장하면서 1위 기록을 내주게 된다. 그래도 통산 61개의 3루타 기록은 지금도 김응국이 팀내 최고 기록을 유지하는 중이다.[12] 훗날 이종운이 롯데 감독을 맡던 시절에 타격코치로 한화의 레전드인 장종훈이 뜬금없이 부임하게 되는데, 이종운이 한화로 이적한 후 친해진 후배라서 데려왔다고 했다.[13] 같은 해 은퇴를 선언한 LG 내야수 유지현은 정규시즌 막판에 잠실 롯데전에서 은퇴식을 치렀는데, 식 도중에 예고 없이 박정태에게 다가와 꽃다발을 건네며 포옹을 해 박정태가 눈물을 펑펑 흘렸다. 류지현처럼 본인도 선수단에서 외곽으로 밀려난 처지였기에 머지않은 앞날을 전망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14] 사실 비교적 젊은 시절에 트레이드된지라 선수로서 뛴 2,091경기 중 70%에 육박하는 1,423경기를 현대와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고 뛰기도 했다.[15] 물론 1992시즌 외에는 성공적인 시즌이 거의 없는 이종운은 애초에 명선수로 분류하기도 애매하니 제외하더라도, 다른 3명은 그래도 명선수 반열에 오를 만한 커리어를 보냈으나 지도자로서의 평판이 영 좋지 않다.[16] 양상문과 김민호 모두 1961년생이지만 음력 3월생인 양상문이 1년 먼저 학교를 들어가서 선배가 됐다.[17] 2010년 청룡기 4강에 진출한 것이 전국대회 상위권 성적의 전부였다. 특출난 선수들도 키워내지 못했는데 이민호나 정현, 송주은 정도만이 김민호의 부산고 감독 재임 당시 각광을 받았던 부산고 선수의 전부다.[18] NC 프런트가 '동래고 출신 내야수'라는 힌트를 준 것을 들은 기자가 박정태로 지레짐작하고 기사를 냈는데, 실제로 선임된 것은 박정태와 마찬가지로 동래고 출신 내야수였던 이동욱 잔류군 수비코치였다.[19] 물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라, 남두오성 당시와 달리 기동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물론 1990년대에 비해 도루의 중요성이 비교적 줄어들기도 했고, 김주찬과 전준우가 나름대로 열심히 뛰면서 부족함을 채우긴 했다.[20] 오죽하면 팀에 두 자릿 수 홀드나 두 자릿 수 세이브를 기록한 선수가 아예 없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남두오성이 활약한 1992년도 괜찮은 선발진에 비해 불펜진은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시대상 자체가 선발진을 막 불펜으로 돌려서 중무리 투수로도 기용하던 시대라서 어찌저찌 커버가 가능했다. 그런데 투수 분업화가 진행된 2010년대에 불펜진 상태가 저렇다는 건...[21] 아이러니하게도 딱 2년 뒤인 2012 시즌에서는 확실한 클로저 김사율, 그 앞을 막아 줄 김성배와 최대성, 일단 건강만 하면 잘 던지는 정대현까지 불펜의 짜임새가 드디어 갖춰졌는데, 반대로 타선이 리그 최약체 수준으로 망가지면서 투타의 밸런스가 역으로 망한 탓에 또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참고로 위에도 나와 있듯 이 해 롯데의 타격 코치는 다름아닌 박정태였다.[22] 일부는 윤나고황에 손호영까지 끼어서 '윤나고황손'으로 5명을 묶어 칭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20대 영건 야수 4명에 30대 초반 중고참 1명이 들어가 있던 남두오성과 더 비슷해진다. 다만 1992년 전에도 주전으로 수 년 간 맹활약한 김민호와 달리, 손호영은 LG 시절에는 부상에 신음하며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다가 20대의 마지막 시즌인 2024년에 롯데로 트레이드 된 후에야 잠재력을 터뜨릴 수 있었다.[23] 2010년 롯데 자이언츠는 홍대갈타선이라 불리는 홍성흔, 이대호, 가르시아의 중심타선과 조성환, 강민호, 손아섭, 전준우 등의 강타선을 지녔지만 열악한 마운드 사정으로 정규시즌을 4위로 마친데 이어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베어스에게 2승3패로 탈락하여 마구마구의 포스트시즌 덱 보너스를 1밖에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