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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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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기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화 이글스 등번호 25번
데이비스
(1999~2002)
<colbgcolor=#000><colcolor=#fff> 이양기
(2003)
데이비스
(2004~2006)
한화 이글스 등번호 15번
김승권
(2003.4.25.~2003)
이양기
(2004~2005)
구대성
(2006~2010)
한화 이글스 등번호 33번
김강
(2007~2008)
이양기
(2009~2010)
김재우
(2011)
한화 이글스 등번호 5번
김회성
(2009~2010)
이양기
(2011~2014)
정현석
(2015~2017)
한화 이글스 등번호 80번
전대영
(2013~2014)
이양기
(2015)
황재규
(2016)
한화 이글스 등번호 18번
허도환
(2015.4.8.~2015)
이양기
(2016~2017.6.20.)
김태연
(2017.6.21.~2017)
한화 이글스 등번호 88번
양용모
(2017)
이양기
(2018~2020)
케네디
(2021~2023)
}}} ||
파일:215738_218807_140.jpg
<colbgcolor=#e81828><colcolor=#ffffff> 동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이양기
李陽基|Lee Yang-Ki
출생 1981년 1월 31일 ([age(1981-01-31)]세)
인천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상인천초 - 동인천중 - 동산고 - 탐라대
포지션 외야수, 1루수[1]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9년 2차 12라운드 (전체 90번, 한화)[2]
소속팀 한화 이글스 (2003~2017)
지도자 한화 이글스 1군 타격보조코치 (2018~2019)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20)[3]
한화 이글스 1군 타격보조코치 (2020)[4]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20)[5]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20)[6]
스코어본 하이에나들 타격코치 (2021)
동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2~)
프런트 한화 이글스 전력분석원 (2017)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6년 11월 27일~2008년 11월 10일)
응원가 박상민 - 청바지 아가씨[7][8]

1. 개요2. 선수 경력
2.1. 한화 이글스 시절
2.1.1. 데뷔 초기2.1.2. 2011 시즌2.1.3. 2012 시즌2.1.4. 2013 시즌2.1.5. 2014 시즌2.1.6. 2015 시즌2.1.7. 2016 시즌2.1.8. 2017 시즌
3. 프런트 경력4. 지도자 경력5. 연도별 주요 성적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이자 現 동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2 시즌까지 같은 팀 선수였던 에이스 류현진과는 동산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모내기용 농기계인 이앙기와 발음이 비슷해 "농기계"라는 별명이 있다.

한때 같은 팀 코치였던 송진우의 말에 따르면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

185cm에 88kg의 준수한 체격을 바탕으로 평균 이상의 파워와 포텐셜은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긴 2군 커리어를 거쳐 30대에 1군에 데뷔한 탓에 성장에 정체가 온것과 불안정한 입지가 겹쳐 철저하게 컨택에 집중하고 있어 평균 홈런갯수는 굉장히 적으며, 수비능력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에 외야 유망주숫자가 워낙 적은데다가 나이들도 어려 2군에서 기량을 쌓고 있는 관계로 2011년부터 우타 대타로 자리를 잡아 대타전문 요원에 가깝게 기용되었던 선수.

2. 선수 경력

2.1. 한화 이글스 시절

2.1.1. 데뷔 초기

2011 시즌 전까지는 한화 이글스 팬들조차 우리 팀에 이런 선수 있었나? 싶었던 선수.

2003년 데뷔한 이후로 2군에서 나름대로 경험을 쌓으면서 두각을 드러냈고, 2005년 이후로는 잠깐 동안이지만 4할도 치기도 하면서 활약하던 전형적인 2군 본즈였다. 그러나 그가 2군에서 포텐셜을 보여 주면서 유망주로서 가치를 시기가 하필이면 신인 외야수를 키우기보단 끝물의 베테랑 외야수를 영입하면서 라인업을 채웠던 김인식의 부임 초기였다. 기본적으로 김인식이 수비능력이 안되는 야수를 기용하지 않았던 탓에 외야 수비 범위가 좁고 타구판단 능력도 떨어지는 저조한 수비능력으로는 자리를 잡기 힘들었다.

또한 무작정 감독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애매한게, 2005년 당시 중견수에는 제이 데이비스가 고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유망주들도 풍부해 당시 1살 위의 고동진, 4살 위의 김수연 등의 비슷한 연령대의 선수들이 1군에서 기회를 받고 있었고, '수비능력은 떨어지지만 공격력은 좋게 평가받는 타자'로는 데뷔 후 한달간 홈런 8개를 친 고졸의 최진행도 있었다. 이 최진행 조차도 단기간이지만 명백하게 이양기보다 나은 성적을 냈었음에도 2군성적이 안 좋았던 탓인지 이양기만큼의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겹쳐 1군에 올라올 기회를 잡을 수 없었기에 2003 시즌에 1군에서 단 1경기, 2004, 2005 시즌 1군에 각 10경기 출장했다. 2006년에는 아예 1군에 못 올라왔고, 결국 이해 말 상무에 입대, 군 복무를 하게된다. 제대 이후의 첫 시즌이었던 2009 시즌에 1군에서 15경기에 출장했고, 2010 시즌에는 팀의 무너진 타선을 틈타 1군에 시범적으로 콜업된다. 콜업 이후 처음 뛴 경기에서 홈런을 쳐내 한대화 감독의 눈도장을 찍는데 성공, 1군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한다. 그러나 2010년 9월 8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김다원의 외야 안타를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만들어주면서 '개콘 이글스'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웃음거리가 되고, 이후 별다른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대로 시즌을 마무리하게된다.

2010 시즌까지 통산 성적은 타율 0.149, 13안타 2홈런 4타점 3도루였다.

2.1.2. 2011 시즌

전 시즌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눈도장을 찍은 효과로 나름대로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시즌 초부터 1군에서 뛸 수 있었다.

시즌 전 자신의 목표는 20홈런이라고 공언했고, 시범경기에서도 홈런을 치면서 기대를 모았다. 특히 전년 공익근무요원으로 군입대한 김태완의 빈 자리를 메울 것을 기대받았다. 결과부터 보면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했는데, 이양기 본인이 1군에서 살아남기위해 부족한 컨택능력을 보충하기위해 800그램의 가벼운 배트를 사용하면서 장타력을 포기했고, 결국 단타위주의 타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시즌이 시작되고 그에게 주어진 롤은 김태완이 아닌 경찰청에 입대한 외야수 정현석의 후임이었다.

2010 시즌 정현석의 롤은 다양했는데 제 4의 외야수로 뛰면서 좌투수 상대로 높은 타율을 무기로 플래툰으로 출전하거나 대타로 나오는 역할이었다. 장타력을 포기한 만큼의 효과가 있어 (팀이 제대로 자리잡은 5월에 들어서) 대타로 자주 출전했고, 승부처에 인상적인 적시타를 만들어내면서 자기자리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9]

대타로 좋은 모습을 보여준 덕분에 선발출장의 기회도 얻었으나 선발로 나오면 별 다른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대타로 머물다가 6월, 더 나은 수비와 급이 다른 타격을 가진 카림 가르시아가 팀에 합류하면서 2군으로 돌아가게된다. 2군으로 내려가는 그 날 한대화가 인터뷰에서 이양기를 공개 디스하기도 했다. 그래도 팀의 얇은 선수층덕분에 곧 다시 올라올 수 있었고 8월 5일, LG 트윈스와 경기에서 벤자민 주키치가 8회 투 아웃까지 퍼펙트 게임하고 있을 때 좌측 안타를 뽑아내서 퍼펙트 게임을 깨트리는 놀라운 위업을 해내기도 했다. 이날 컨디션이 좋았는지 수비에서도 호수비를 한 후 세레머니를 하기도 했다.

9월 25일 롯데전에서 11회말 대타로 나서 송승준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었다. 이날 4이닝 동안 79개의 공을 던진 데니 바티스타에게 승리를 안겨서 더욱 값진 안타였다. 야갤러들은 이를 보고 추수왕 이양기, 흑인노예를 구하는 양키를 외치며 이양기의 농업혁명 정신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양기의 2011 시즌 최종 성적은 93경기 출장 147타수 41안타 타율 0.279 OPS 0.713이며 대타타율은 0.313, 득점권타율은 무려 0.333! 대타로 정말로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 대타 최대타점까지 기록하였다.[10][11]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인상적이었기에 대타로서의 놀라운 활약에서의 칭찬과, 선발경기에서의 끔찍한 수비와 기대이하의 타격능력을 비꼬는 의미를 모두 담아 대타왕이라는 별명을 얻게되었다. 이양기는 그렇게 프로 1군에서의 첫 시즌을 마친다.

2.1.3. 2012 시즌

시즌 초 간간이 1군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성적이 부진한 사이 같은 포지션 경쟁자인 김경언고동진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리를 잡아버렸고, 결국 완전히 밀려나 5, 6월 들어서는 2군에서도 가뭄에 콩나물 나듯이 올라왔다. 2012시즌이 끝날 때까지도 위키 항목이 수정되지 않을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작년처럼 대타요원으로 주로 기용됐는데, 성적이 영 시원찮아서 1군과 2군을 왔다갔다 하다가 시즌을 마쳤다. 안타도 간신히 10개를 넘어갔을 정도로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2.1.4. 2013 시즌

개막 후 4월 한 달간 퓨처스리그에서 조정기간을 거쳤다. 이 기간 동안 11타수 6안타 2홈런 9타점 3득점 타율 .545로 활약했고, 2군 코칭스태프의 추천을 받은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고 5월 1일 1군에 콜업되었다.

5월 3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 5타수 3안타 3타점으로 맹활약하며 팀의 5:1 승리를 이끌었다. 특히 4회 말에는 히트 앤드 런 사인이 나온 상황에서 어떻게든 진루타를 만들어내기 위해 개구리 타법으로 안타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이 날 활약으로 자신의 한 경기 최다 안타 기록을 세웠고,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도 가졌다.

5월 중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으나, 8월 2일 다시 1군에 올라온 뒤로 좋은 타격감을 보여 주어 계속 주전으로 기용되고 있다. 그리고 김태균이 빠지면서 1루수로도 나서고 있다. 사실 1군 말소 후 2군에도 자리가 없어 3군까지 내려갔던 상황이었고, 은퇴까지 고려했으나 이정훈 2군 감독이 만류하여 은퇴 생각을 번복, 결국 1군 기회를 다시 잡은 것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주전에 대한 욕심이 있을 법도 하지만 이양기 본인은 팀이 잘되려면 김태완, 정현석 등이 주전으로 나가고, 본인은 대타로 출전하는것이 맞다는 인터뷰를 하는 등 팀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8월 9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6타수 5안타 5타점을 기록하며 본인의 한경기 최다안타와 최다타점 기록을 갱신하였다.

8월 23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6번타자 좌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2회말 첫번째 타석에서 좌월 솔로 홈런을 날렸다. 시즌 1호 홈런이자 2010년 8월 26일 목동 넥센전 이후 1,093일만의 첫 홈런. 팀도 4:3으로 승리하여 기분좋은 홈런이 되었을 듯.

그뒤로 8월 말과 9월 초에 걸쳐 꾸준한 선발출장에도 불구하고 타격감이 점점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9월 13일 NC 다이노스전에서 김태균도 빠지고 최진행마저 빠진 팀 상황에서 3번타자로 선발출장하여 5타수 4안타 1홈런 2타점을 기록하였다. 시즌 2호 홈런. 또한 앞선 세타석에서 안타, 홈런, 2루타를 기록하여 3루타만 치면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할수 있었으나, 3루타 치는것이 쉬운것이 아니기에 결국 안타 하나만 더 추가하게 됐다.

9월 20일 SK와의 경기에서 첫 3타석은 시원하게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4번째 1사 만루 타석에서 싹슬이 3타점 3루타를 날리며 팀의 역전승에 기여했다.

전반기 추승우라면 후반기에는 이양기라 할 정도로 엄청난 불방망이를 보여주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 성적은 56경기 .308 57안타 30타점 3홈런 17볼넷 25삼진 2실책 .380 .411 .791 (득점권타율 .345)를 보여주며 차려줘도 못먹는 잉여타자들에게 일침을 가해주었다.

2.1.5. 2014 시즌

고동진플래툰으로 번갈아 가며 좌익수로 출전하고 있다. 최진행이 수비가 가능해질 때까지 꾸준히 기회를 얻을 듯.

4월 20일 LG 트윈스와의 홈경기에서 깨알같은 활약을 했는데, 타석에서 활약한 게 아니고 벤치 클리어링 상황에서 LG 선수들이 김태균을 막느라 여념없는 상황에 뒤로 슥 돌아가서 원인을 제공한 정찬헌을 밀치고 나서 이진영에게 제지당했다. 뛰쳐나간 한화 선수들 중 유일하게 정찬헌과 신체접촉을 벌이는 데 성공한 선수다.

5월 7일 LG 트윈스와의 원정경기에서 1회초부터 2루타로 선취점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10회초 6:6 동점 상황에서 2루주자 김민수를 불러들이는 적시타까지 쳐내 2안타 2타점을 기록했다. 수비면에서도 멋진 다이빙 캐치를 한 번 선보였다.

5월 17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10회 1사만루 찬스에서 어이없는 선구안과 맥없는 스윙으로 삼진당한 것을 비롯 5타수 3삼진 무안타로 부진하며 한화팬들에게 원없이 까였고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7월 24일에는 문경에서 상무를 상대로 경기를 치른 뒤 1군 콜업되어 NC 다이노스 전에서 대타로 투입된 후 8회 3루수를 봤다. 다행히 타구가 3루쪽으로 간 건 단 한 차례 뿐이었고, 이를 무리없이 송구해내긴 했지만. 아무리 대학 때 3루수를 본 적이 있었다지만 프로 데뷔 후 쭉 외야수로만 뛰었고 외야에서도 수비가 좋은 편이 아니었던 선수를 3루수로 기용한 데 대해 칰빠들은 '제발 대타낼 때 다음 수비 좀 생각하고 내라'며 감독을 맹렬히 깠다.

2.1.6. 2015 시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배번이 5번에서 80번으로 바뀌었다.

스프링 캠프를 며칠 앞둔 1월 12일에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자율훈련 티배팅을 하다 지난해 8월 12일 변진수에게 맞았던 왼쪽 손등이 부러졌다고 한다. 6주간 깁스를 해야 한다는 진단에 따라 스프링 캠프서 자연스럽게 빠지게 되었다.

8월 현재 팀의 대타 타율이 처참한 상황이라 이름이 간혹 거론되고 있는데 6~7월에 그를 본 팬들의 말에 따르면 아직도 깁스를 풀지 못했다고 한다.

손등부상이 아직 다 낫지 않았는지 시즌후 보류선수 명단서 제외되었다. 젊은 선수들과 달리 나이가 있는 편이라 복귀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는데...

2.1.7. 2016 시즌

프런트 측에서 제안한 육성선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2016년에도 한화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1월 18일 업데이트된 홈페이지 선수 명단에도 있는것이 확인되었다.

9월 13일 권용관의 웨이버 공시 요청과 함께 정식 선수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그의 697일만의 복귀전. 3:1로 뒤지는 9회 2사 만루 마지막 공격에서 심창민을 상대로 1군 콜업 하루만에 대타로 나왔는데, 한화의 희망을 지피는 싹쓸이 3타점 2루타를 날려버린다. 참고로 그의 출전은 2015년 손목골절과 재활을 거쳐,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은퇴까지 고민했던 그의 고뇌와 인내가 보답받은 순간. 697일 만의 출전, 775일 만의 타점' 이양기, 반전 드라마

그 다음날 경기에서도 좌익수로 선발 출장, 6회초 현재 3타수 3안타 1홈런으로 양기충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홈런은 5:4에서 6:5로 역전하는 홈런을 쳤는데, 이건 2013년 9월 22일 SK전 이후 1,089일만의 홈런이다. 이용규의 빈자리를 타선에서나마 완벽히 메워주는 중. 최종 성적은 5타수 4안타. 경기는 졌지만 한화에서 가장 무서운 선수가 되어버렸다.

김성근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포스트 김태균급 기대주로 꼽혔다. 참고로 이양기는 빠른 81년생이라 정성훈, 이진영, 권오준 등 80년생들과 동기기 때문에 김태균의 2년 선배다.

9월 19일 KIA전 멀티히트를 기록했으나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9월 24일 LG전 6타수 3안타 2타점 1득점으로 활약했다.

이용규와 김경언, 강경학이 빠진 가운데 꾸준히 선발 타선에 이름을 보이고 있다.

10월 3일 두산전에서 5타수 1안타 2병살타로 부진하였고 시즌 타율이 0.274까지 떨어져버렸다...

2.1.8. 2017 시즌

3월 31일 두산전에서 1번 김원석의 대타로 출전했으나 안타를 기록하진 못했으나 상대 3루수의 실책으로 출루에는 성공했다. 이후 대수비 요원 이동훈이 대주자로 나와 교체되었다.

4월 1일 9번 정근우의 대타로 나와 유희관이 내려가고 올라온 김승회에게 볼넷을 얻어 출루한 뒤 대주자 강경학으로 교체되었다.

4월 7일 4타수 3안타를 기록하며 승리를 향한 중요한 초석을 마련했으나 득점권만 되면 기적같이 윌린 로사리오가 날려먹었다.

4월 8일 5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신성현-정우람 배터리가 나온 9회말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았다.

4월 11일 3회말 최진행과 함께 실책성 플레이로 삼성의 무득점 행진을 28이닝에서 끝내주었다.

4월 14일 SK전에 지타로 출전했으나 윤희상에 틀어막혀 망했다.

5월 3일 SK전 좌익수 선발출장을 마지막으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고 2군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2015년에 은퇴를 고려하다 복귀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야말로 실제 은퇴 수순을 밟을 듯 하다.

6월 21일에 웨이버 공시되었다. 본인이 은퇴 의사를 밝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제서야 하게 된 것도 그 동안 대타 부재로 인해 구단에서 은퇴를 여러 번 만류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빈 자리에는 고졸 루키 내야수 김태연이 정식 선수로 등록되었다.

지난해 김성근의 포스트 김태균 드립으로 인해 은퇴하는 날까지 기자에게 어그로성 제목으로 고통받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22일 자신이 직접 은퇴 의사를 밝혔다.

3. 프런트 경력

은퇴하고 얼마 지나지않아 2017년 7월 2일부터 전력분석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4. 지도자 경력

파일:20180408131009383.jpg

2018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1군 타격보조코치를 맡게 되면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한화 측은 “이양기, 차일목, 정현석 코치의 훌륭한 인성과 선수들과의 원활한 소통 능력을 높이 인정했다”면서 “지도자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2020년에는 2군 타격코치로 시작했으나 시즌 초반 한화가 구단 단일 시즌 최다인 13연패 수렁에 빠지면서 코치진을 대거 교체하면서 1군에 합류했다. 보직은 지난 해까지 맡았던 1군 타격 보조코치.

하지만 바로 다음날 한용덕 감독이 자진 사퇴하게되어 그 다음날인 6월 8일 2군으로 다시 내려갔다.

한 달이 지난 7월 25일 한화가 팀 타율(0.236), 팀 득점(230점), 팀 홈런(36개) 등 타격 전 부문에 걸쳐 최하위에 그치는 등 타격을 살릴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7연패에 빠지면서 이양기 코치를 1군에 등록해 기존 정경배-정현석 코치와 함께 ‘3인 타격코치’체제로 운영하게 되면서 1군으로 다시 복귀했다. 시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한화를 떠나게 되었다.

2021년에는 새로 창단한 독립야구단 스코어본 하이에나들의 코치로 합류했으나 2021년 11월 10일 스코어본 하이에나들이 해체됐고, 후엔 모교인 동산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하였다.[12]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3 한화 1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2004 10 10 .000 0 0 0 0 0 0 0 1 .000 .091
2005 10 11 .455 5 0 0 1 1 5 0 1 .727 .500
2006 1군 기록 없음
2007 군 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8
2009 15 21 .095 2 0 0 0 0 1 0 2 .095 .174
2010 27 44 .136 6 1 0 1 3 4 3 12 .227 .321
2011 93 147 .279 41 13 0 0 17 9 3 15 .367 .346
2012 35 49 .224 11 2 0 0 6 8 0 5 .265 .296
2013 56 185 .308 57 8 1 3 30 16 0 22 .411 .380
2014 45 125 .264 33 5 0 0 6 13 1 12 .304 .326
2015 1군 기록 없음
2016 17 52 .288 15 2 0 1 9 5 0 4 .385 .333
2017 17 44 .227 10 1 0 0 3 0 0 2 .250 .261
<rowcolor=#373a3c> KBO 통산
(13시즌)
326 689 .261 180 32 1 6 75 61 7 76 .337 .333

6. 여담

7. 관련 문서


[1] 2013 시즌엔 이따금 1루수도 봤다.[2] 대학 진학으로 프로데뷔는 2003년에 했다.[3] ~6월 5일[4] 6월 6일~6월 7일[5] 6월 8일~7월 24일[6] 7월 25일~[7] 으랏차차! 이양기 날려버려~ 오오오 날려버려~~(x2) 한화 이양기! 으랏차차!![8] 넥센시절 허도환의 응원가랑 같은 곡이다[9] 그런데 우습게도 이렇게 적시타를 치면 다른 사단이 일어나서 한화가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5월 두산 베어스와의 연전에서 중요한 순간에 타점을 심어내어 팀을 구해냈으나… 한 번은 성공했는데 두번째는 계투가 불을 질렀다. 또 LG와의 3연전에서 2사 1, 2루에서 대타로 나와 적시타를 때렸는데 2루 주자였던 전현태가 홈에서 슬라이딩하다가 조인성의 블로킹에 막혀버리고 만다.[10] 2011 시즌 야왕 신드롬을 불러온 한화 이글스의 돌풍에 대해서 세이버 매트리션들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피타고리안 승률에 비해서 5푼이나 높은 실제 승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특히 득점권 상황에서) 대타성공률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는데, 그 핵심이 바로 이양기였던 것이다.[11] 실제 야왕 신드롬이 불기 시작한 것도 승부처마다 한대화 감독이 신들린 듯한 대타작전을 선보이면서부터다. 그리고 다음해인 2012년 다시 대타성공률이 평균으로 회귀하자, 한화 이글스는 폭망했다.[12] 전임 감독 이광근과 전임 투수코치 위재영이 여러가지 잡음을 일으키자 감독 및 코칭스태프를 전원 물갈이하였다.(단, 이광근 같은 경우에는 고소받은 건이 경찰 조사 결과 무혐의로 판결되어 당시 의혹 제기와 관련된 언론 보도등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해 조정 명령을 받았다.) 이양기 감독, 조현수 타격코치, 김기태 투수코치, 현천웅 배터리코치로 구성했으며 조현수 코치만 북일고 출신이고 나머지는 동산고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