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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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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기간 음력 ? ~ 기원전 1005년[2]
재위 기간 음력 ? ~ 기원전 1005년

1. 소개2. 상세3. 생애
3.1. 무위도식?3.2. 역성혁명3.3. 제나라를 건국하다
4. 기타5. 강상을 선조로 모시는 성씨6. 대중매체에서7. 관련 문서8.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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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제나라의 초대 국군. 대중들에겐 강태공이란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2. 상세

중국상고 시대인 기원전 11세기 전후 혁명기 시절 정치가, 전략가이자, 제나라의 초대 군주이다. 쉽게 말해 주나라 재상으로 을 도와 상나라를 뒤집어엎고, 그 포상으로 제나라 땅을 맡아 본인이 국군(國君)이 되어 일종의 제후 국군(國君)이 된 인물이다.

은 강(姜)이고, 는 여(呂), 이름은 상(尙). 는 자아(子牙), 아호는 비웅(飛熊)이다. 한국에서는 강상이란 이름보단 별명태공망(太公望), 강태공(姜太公) 등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3], 그 외에도 강자아, 여상, 여망으로도 부른다.[4] 도가에서 부르는 호칭은 비웅(飛熊)이다.[5]

태공망이란 '의 아버지 태공(太公)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望) 사람'이란 뜻이다. 정작 부친인 계력은 강태공이 누군지도 모를 시절에 사망했고 직접 등용한건 문왕 창이긴 하다만. 정계에 진출한 나이도 일반적이진 않은데, 기록에 따르면 주문왕을 따랐을 때 이미 70대의 노인이었으나, 주나라가 성립되고도 한참을 더 살았다고 한다. 이 강태공의 장수에 대하여 나온 말이 '궁팔십달팔십(窮八十達八十)'. 태어나서 여든 살이 되도록 궁하게 살았으나, 나이 팔십에 서백 창을 만나 등용되면서 주나라를 세우고 영화롭게 8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160년을 살았을 리는 없지만, 이후 반평생을 어렵게 살다가 나머지 반평생을 성공한 인생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다만 강태공이 장수하였고 오랫동안 제후 노릇을 했음은 사실로 보인다. 고본 죽서기년에 따르면 "강왕 6년에 제 태공망이 죽었다"고 하는데, 주강왕은 강태공에게는 외증손이 된다. 무왕의 비이자 성왕의 모후, 강왕의 할머니인 읍강이 바로 강태공의 이기 때문. 그러니까 사위가 죽고 외손자가 죽고 외증손자가 제위에 올라 5년 가량 천하를 통치한 뒤에야 사망한 것.[6] 사실 그래서 더 강태공이 실제 정계에 진출한건 훨씬 젊은 시절 아니냐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으나노안이라 노인으로 착각했을지도, 확실한 자료가 없으니 오리무중이다.

3. 생애

정확한 출생지는 알 수 없으나, 사기에 따르면 동해 연안 사람이라고 하며, 지금의 산둥성 르자오시 쥐현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티베트계 강족 출신이 맞다면, 가문은 중국 중서부쪽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3.1. 무위도식?

강상은 공부를 대단히 좋아했던 모양으로 70세까지[7]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공부만 했다고 한다. 이에 부인은 계속 뒷바라지하다 속 터져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였고(...), 식량이 떨어진 그는 집 근처 위수 강변에서 낚시를 했다.[8]

이때 휘어있지 않은 낚싯 바늘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하여 강태공이 사실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전해내려온다. 다만 실제로는 곧은 낚싯 바늘도 낚시용 도구로 사용했었다고 한다.[9] 또는 낚시를 하긴 하였는데, 그 낚시대가 수면에서 세치는 높은 곳에 있었다고 해서 나온 이야기가 '태공조어 이수삼촌(太公釣魚 離水三寸)'.[10]

다만 중국 역사학자 리숴의 저서에 따르면, 강태공이 전국시대부터 진한시대까지의 문헌엔 낚시꾼이 아닌 상나라 도읍인 조가(朝歌)에서 소 잡는 백정 노릇을 했거나 황하강가 맹진 혹은 극진에서 여관 종업원을 했던 것으로 나온다며, 낚시꾼 설화가 훗날 이를 감추기 위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아님 셋 다 합쳐 어업, 정육업, 숙박업 다 한걸로..

3.2. 역성혁명

사기에 따르면 일찍이 곤궁하고 나이도 많던 강상이 어느 날 낚시를 하던 중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서백(西伯) 창(昌), 즉 훗날의 주 문왕의 눈에 띄여 얘기를 나누다 등용된다. 육도에 따르면 문왕은 위수가에서 나라의 스승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사흘간 목욕재계 후에 사냥을 나갔다고 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오늘 큰 것을 낚았소' 이야기가 나왔다.

다만 사기엔 이설도 실어놨는데, 혹자는 여상이 박학다식해 주왕을 섬기다 그의 무도함에 질려 떠나 제후들에게 유세했으나 뜻이 맞는 군주를 만나지 못하다 서쪽에서 서백 창을 만나 귀의했다고 하고, 혹자는 여상이 선비로 바닷가에 은둔해 살았는데, 서백 창이 주왕에 의해 유리(羑里)에 갇히자 서백의 신하인 산의생(散宜生)과 굉요(閎夭)가 평소 여상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청했다고 한다. 사마천은 여러 설이 전해지지만 요점은 강태공이 문왕과 무왕의 스승이 되었다는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강태공은 문왕상나라주왕에 의해 유배되자, 미녀와 기물 등을 바쳐 일종의 면죄부를 받으라는 조언을 하여 유배에서 풀려나게 하고, 이후 문왕과 아들 무왕을 보좌하여 용병술과 기이한 계책으로 상나라 정벌전에 활약해 역성혁명을 달성했다. 이후 태공망은 주나라의 정치를 다듬고, 무왕에 의해 오늘날 산둥반도 지역에 위치한 의 국군(國君/왕)으로 봉해졌다. 강상의 딸 읍강이 무왕과 혼인할 정도로 신임을 받은 모양.

한편, 기록에 따르면 역성혁명에 성공하고 개선하는 그의 앞에 오래 전 가출했던 그의 아내가 폭삭 늙어서 돌아와 받아달라고 청했는데, 그는 그릇에 담긴 을 바닥에 쏟은 후 "엎어진 물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覆水不反盆)"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것이 복수불반분 고사다. 해당 일화는 약간 다른 버전도 있긴 하나, 어찌됐든 강태공은 아내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강태공 입장에서야 잘되니 다시 돌아온 아내에게 섭섭함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아내 입장에서도 평생 뒷바라지하다 한순간 피꺼솟해서 떠났더니 출세한 남편 보고 골 때리긴 했을 것이다. 다만 현존하는 가장 빠른 기록이 남송 시대 기록이라 일각에선 창작된 일화 아니냐고 보기도 하는 모양.

3.3. 제나라를 건국하다

강태공(姜太公)은 지금의 산동반도 지역에 제나라(齊國)를 건국하고, 제나라 시조(始祖)이자 무성왕(武成王)이 되었다. 제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이면서 스승국이기도 한 명성을 떨쳤고, 강태공은 바다와 인접한 제나라 자원을 잘 활용하여, 상공업을 개방하고 어업과 염업을 발전시키니 제나라로 귀의하는 백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 일화 하나로 강태공은 제나라를, 주문공의 장남 백금은 섭정직을 맡아 분주한 부친을 대신해 제나라와 이웃한 노나라를 다스리게 됐는데, 강태공은 고작 5개월 만에 대강의 업무를 마치고 봉국의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러 온 데 반해 백금은 무려 3년이 지나서야 입조한다. 한 사람은 너무 빠르고 한 사람은 너무 늦으니 상반된 결과에 의아한 주 문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강태공은 현지 사정에 맞춰 예법을 간소화했기에 금방 일을 끝낼 수 있었다고 말하고, 백금은 아예 처음부터 풍속을 완전히 뜯어고쳐 (어머니 3년 상도 치르고) 예에 합치되게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말한다. 이에 주 문공은 정치의 요체는 간단함에 있어서, 행하기 쉬워야지만 백성들이 모이고 따른다며 장남이 다스리는 노가 장차 제에게 잡혀 지낼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한다.

이후 제나라(강제/姜齊)는 600여년 이상 32대 왕좌로 이어진다. 강태공이 세상을 떠난 뒤 제나라 2대 국군은 그 아들인 급(級/伋)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제정공(齊丁公)이다. 특히 그의 후손이자 제나라 16대 임금인 제환공 강소백(姜小白)은 관이오를 중용해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霸者)가 되어 제나라의 위상을 떨치게 된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11]

4. 기타

오늘날엔 낚시꾼의 이미지(상)를 확립한 고대 인물로도 은근히 유명하다. 물에서 실제 하는 낚시 뿐만 아니라 웹상에서 네티즌들을 속이는 사람을 강태공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강상은 평범한 낚시꾼 이전에 역사적 위인이었다. 재상이 되기 전 오랫동안 유유자적 은둔 생활을 하며 낚시질한 것에서 이런 인물상이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신선 비슷하게 비유되는 경향도 있다.

저서로는 병법서인 《육도삼략》이 있다고 전해진다.[12] 사족으로, 당서 내용을 보면 전차기병 8기분의 전력이며, 기병은 보병 8명분의 전력이라고 하는 구절도 있다. 실제로 마종이 개량되고 기마 궁술이 개발되는 춘추시대 말기 이전까지는 전차가 주 병종이었고, 이후에도 한동안 전차는 기병 몇 기분의 전력을 보여줬다.[13]

유명한 전략가이자 재상이어서 중국사에서 오랜 기간 문신인 공자와 더불어 무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대에 유교적 사상에 충실한 관우가 급부상하면서 도교적 성향이 강했던[14] 태공망은 밀려나게 된다. 사실 도교적이라 보기도 그런 게 인의와 덕이 아닌 극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도 있어서 인의 중심의 이상적인 정치를 중시하는 유가 계열이 득세하는 후세엔 공자 등에게 까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네임밸류가 원체 높아서 유가, 법가, 도가, 병가 등 다수의 학파가 강태공을 선조로 모시는 관계로 '백가종사(百家宗師)'라 불리기도 한다.

5. 강상을 선조로 모시는 성씨

강태공의 자손성씨가 상당히 많은데 강(姜), 고(高), 노(盧), 여(呂), 구(丘/邱), 정(丁), 최(崔), 시(柴), 허(許), 사(謝), 하(賀), 경(慶), 왕(王), 임(林), 해령 및 발해 진씨(陳), 섭(聶), 장(張)씨(섭일(聂壹)->장료(張遼) 후손), 장(章), 제(齊), 신(申), 악(岳), 기(紀), 상(尙), 두(钭), 강(强)씨 등 총 102개의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자손으로부터 갈라져나갔다. 덕분에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15] 강태공의 후손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가 대거 참례를 온다.

현재 강태공의 후손은 분성 성씨 외에 한국진주 강씨와 중국의 천수 강씨가 있다. 한국의 강태공(姜太公) 후손 8개 성씨로는 진주 강씨(姜氏), 노씨(盧氏/광주 노씨 등), 구씨(丘氏/평해 구씨), 여씨(呂氏/함양 여씨 및 성산 여씨), 최씨(崔氏/충주 최씨), 정씨(丁氏/압해 정씨, 영광 정씨, 나주 정씨), 시씨(柴氏/태인 시씨), 장씨(章氏/거창 장씨)가 있다.

오호십육국 시기 후량을 세운 여광은 태공의 후손이 고황후 여씨와 여광 본인이며, 여광과의 계보는 경공으로부터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강상을 시조(始祖)로 추존했다. 다만 다른 유적에는 묘호가 문조(文祖)로 나온다.[16]

6. 대중매체에서

강상/대중매체 항목 참조.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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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진종 추봉.[2] 고본 죽서기년에 "강왕 6년에 제 태공망이 죽었다(康王六年齊太公望卒)."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장붕정의 논문에 따르면 주 강왕 원년이 기원전 1010년이다.[3] '태공이 기다리고 바라던 인물'이라는 뜻에서 '태공망'이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태공(太公)'은 국왕의 생부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여기선 문왕의 아버지인 계력을 칭한다. 다만 강태공이 유명하다보니, 오늘날엔 태공이라는 호칭이 그냥 강상을 가리키는 칭호 자체가 되어버린 감도 있다.[4] 사실 이 시기의 성은 족성, 즉 종족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강태공의 성인 강(姜)성 또한 그가 강(羌)족임을 나타내는 표지일 뿐이다. 실제 오늘날엔 한족처럼 여겨지지만 당시 기록엔 강족이라 나온다. 상나라 시기 청동기 명문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당대의 관습은 족성은 여자를 호칭할 때만 쓰고 남자를 호칭할 때는 씨족 이름인 씨(氏)를 썼다. 그러므로 그의 본명은 정확히는 '여상'이고, '강상'이라고 쓰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여씨는 본래는 강씨(姜氏) 성이었던 태공망의 조상이 여(呂)땅의 제후로 봉해져 여씨 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5] 때문에 주문왕이 꿈에 을 보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6] 무왕+성왕+강왕 5년 재위기간만 따지면 약 30~50년 정도 된다. 왕들의 재위기간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기 때문. 그나마 현실적으로 30여년이다 치면, 70대부터 활동했을시 거의 110세까지 살았다는 소리가 된다.[7] 사마천의 《사기》에 적힌 내용인데, 이후의 활약상이나 부인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나이에 대해선 의문을 표하는 학자도 있다.[8] 여담으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권율 장군도 40이 넘어서까지 관직을 얻을 생각은 안 하고 놀고 먹기만 했는데, 이걸 친구들이 뭐라 그러자 "그 옛날 강태공도 80대까지 놀고 먹었는데 뭘~" 이러면서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도 임진왜란이란 전시 상황에서 활약한 덕에 무려 팔도 도원수까지 달았다. 사실 강태공도 상주혁명기에 활약해서 제나라 군주까지 된거니 평시엔 백수 노름하며 지식을 쌓다가 난세가 되니 그 지식을 활용해 영웅이 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의외로 유방이나 한신도 그렇고 중국사에 이런 인물들이 제법 있다. 즉, 겉으로 보기엔 비슷하게 노는 것처럼 보여도 논답시고 본 학문의 영역 자체가 달랐던 모양. 유방은 진짜 논 것 같지만 넘어가자. 하지만 권율은 금수저 집안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이러나저러나 부자집 아니면 가족들은 고생 좀 했을듯.[9] 현산어보를 찾아서 - 학꽁치 관련 내용.[10] 이중에서 태공조어는 원자상구(願者上鉤)와 더해져서 다른 고사를 형성하기도 하고, 신조협려이막수가 무공 초식명으로 사용한 이래로 무협 소설의 초식 중 하나로 사랑받게 되니 이것도 아이러니. 하여튼 중국 고대사에서 이야깃거리 많이 남긴 양반이다.[11] 그 이후에도 꽤 강국으로 남아 진시황의 춘추전국 통일시 가장 마지막에 멸망한(기원전 221년) 국가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때의 제나라는 전제(田齊)로 기원전 391년 전씨인 제태공에 의해 제강공이 축출되면서 강씨의 대는 끊기게 된다.[12] 다만 이 서적들은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더러는 강상이 육도를 저술하고 그것을 황석공이 다시 개량하여 쓴 저서가 삼략이라고도 한다.[13] 전차가 훨씬 비쌌기 때문에 결국 전국시대 말기에 가서는 도태되지만. 전차 문서 참고.[14] 엄밀히 말하면 도교의 성립 이전 인물이지만 후대의 관점으로는 도교 사상에 가까웠다.[15] 매년 9월 12일 중국 산동성에서 제나라 문화축제가 열린다.[16]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