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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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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로고[2]
열린우리당
<colcolor=#40B93C,#40B93C> 영문 명칭 <colbgcolor=#fff,#010101>Open Our Party (Uri Party)[3]
한문 명칭 열린우리黨[4]
등록 약칭 우리당
등록번호 제105호[5]
등록일 2003년 11월 17일[6]
해산일 2007년 8월 21일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합당)
선행 조직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 (새천년민주당 분당)

[[한나라당|
한나라당
]] (개혁성향 의원들 합류)


(개별 합류)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101 (여의도동, 국민일보빌딩 4층)
(창준위~2004.3.)[7]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신로 162 (영등포동6가)[8]
(2004.3.~해산)
의장[9] 정세균 / 3선 (15-17대)
원내대표 장영달 / 4선 (14-17대)
사무총장 김영춘 / 재선 (16·17대)
정책위의장 김진표 / 초선 (17대)
대통령 노무현[10] / 제16대 (2004.5.20.~2007.2.28.)
국회의원
58석 / 299석
광역단체장
1석 / 16석
기초단체장
19석 / 227석
당 색[* 이전 당 색:
노란색 (#FCD31D)

청록색 (#00ABBF)

남색 (#13366D)
]
노란색 (#FFD918)
초록색 (#40B93C)
정책연구소 열린정책연구원
당원 수 1,218,297명[11]
사이트 eparty.or.kr/
2007년 8월 20일 기준
1. 개요2. 당명3. 역사
3.1. 2003년3.2. 2004년3.3. 2005년3.4. 2006년3.5. 2007년
4. 정강정책
4.1. 발기취지문4.2. 강령전문4.3. 강령조문4.4. 기본 정책
5. 역대 지도부6. 출신 인물
6.1. 대통령6.2. 국회의원6.3. 광역자치단체장6.4. 기초자치단체장
7. 역대 선거 결과
7.1. 국회의원 선거7.2. 전국동시지방선거7.3. 재보궐선거
8. 평가
8.1. 지역주의 타파, 취약한 지역기반8.2. 정치개혁·정당개혁8.3. 당내의 파벌과 계파 갈등
8.3.1. 지도부의 단명8.3.2. 넓어진 당내 스펙트럼
9. 당가10. 기타11. 관련 문서12. 둘러보기

1. 개요

파일:OpenUriParty.jpg
열린우리당은 2003년 11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이다.

'열린'이란 명칭에서 보이듯 당시엔 지역주의를 타파해 나가자며 출발해 '100년 정당'을 자임했으나, 결국 3년 9개월 만에 간판을 내린 짧은 역사의 여당으로 남게 되었다.

2. 당명

초기에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여 만든 교섭단체의 이름은 '국민참여통합신당'이었다.[12] #

민주당계 정당으로는 최초로 순우리말 명칭이었다.[13] 당명은 이해찬 의원이 작명했다. 이후의 민주당계 정당들은 한자로 회귀했다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이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변경하면서 반은 순우리말에 나머지 반은 한자어로 된 혼합 당명이 등장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측은 약칭으로 '우리당\'을 선호하였으나, '우리 당(our party)'과 혼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언론 등에서는 '열린당'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어명인 "Open Our Party"도 선호되지 않아 대부분의 영자 신문에서는 'Uri party'라는 표현을 썼고, 프랑스어권 등에서도 이를 그대로 옮겨 썼다.

한편 여당에 반감을 가진 보수 진영에선 조롱적 의미가 담긴 '열우당\'[14]을 일상적으로 즐겨썼다. 극단적이지 않으면서도 반감을 은연중에 표현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어서, 다른 멸칭들과는 달리 전혀 비판 목적으로 당명을 언급하는 상황이 아닐 때에도 공식 약칭 '우리당' 대신 일부러 '열우당'을 썼다. 단순 약칭이 보편적 멸칭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이름이다. 또한 공식 약칭인 '우리당'(Uri Party)은 일반 명사 '우리 당'(our party)과 혼돈이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15]

이로부터 10여 년 후에는 개혁입법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따로국밥처럼 놀았다는 의미에서 민주당계 지지층조차 자조적 의미로 '열우당'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16][17]

3. 역사

민주당계 정당
국민의 정부 ~ 참여정부
(1998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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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이전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개혁국민정당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중도개혁통합신당
중도통합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대통합민주신당 민주당
참주인연합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참여정부 이후
동일시기 타정당: 진보정당 보수정당(국민) 보수정당(참여)
}}}}}}}}} ||

3.1. 2003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새천년민주당 분당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새천년민주당 분당#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새천년민주당 분당#|]]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민주당의 영남 세력과 소장파, 천정배 - 신기남 - 정동영(이른바 천신정)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신주류 세력들은 새천년민주당의 쇄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낡고 부패한 인상에[18] 호남색이 강해 보이는 당시의 민주당으로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물론 새천년민주당 역시 김대중 대통령새정치국민회의의 외연확대와 전국정당화를 위해서 2000년 창당한 정당이긴 했지만, 후단협을 위시로 한 당 내의 반발세력으로 인한 대선 때의 혼란과 기득권에 안주하는 듯한 모습으로 인해 호남색을 제외하면 보수 야당인 한나라당과의 구분점이 많이 희미해진 상황이었다.[19]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1년차는 이 쇄신론을 가지고 쇄신을 하냐 마냐로 여당 내에서 입씨름을 벌이던 시절이었다고 해도 크게 과언은 아닐 정도였다.[20] 쇄신을 주장하는 천신정(천정배 - 신기남 - 정동영)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신주류와 친노측은 총선 승리를 위해 과감한 재창당을 주장한 반면,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 구주류는 이런 재창당 주장이 호남 세력을 비토하기 위한 음모라고 보아[21] 합의점이 도통 나오지 않았다. 송영길, 우상호, 임종석이 합의를 요구했으나, 결국 타결 직전 단계에서 박상천/권노갑 등의 보수파들이 "이념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기에 함께 갈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합의는 무산되었다. 특히 구 민주당[22] 전국구 의원 출신인 이미경 의원이 신당파였는데, 강경 잔류파였던 문팔괘 전 서울특별시의원에게[23] 머리를 휘어잡히는 사건이 터지며 감정 대립이 더욱 커진다.[24] 중진 의원인 정대철이 다시 한번 타협안을 마련해보지만 권노갑, 김옥두정동영, 천정배간 당권 협상이 깨지면서 돌이킬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그렇게 결국 갈라서서 분당을 하려고 했는데, 막상 떠나려고 보니 과거 대선 국면에서 노무현 후보를 적극 지지했던 개혁파 조순형, 추미애[25] 등조차 대북송금특검 과정 등에서의 문제로 잔류를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신당 창당론자들은 "준비 다 되었으니 당신들만 떠나면 된다."라고 두 사람을 설득했으나 결국 통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잔류자가 70여명으로 훨씬 더 많다는 것이 드러났다. 오히려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김명섭, 송석찬, 설송웅 의원과 후단협 세력 일부가 신당 참여를 선언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어찌어찌해서 이른바 "개혁신당파"들이 갈라져 나오게 되면서, 대통령 측이 (그것도 집권 초기에) 분당에 가담해서 나가는 사실상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26] 그리고 떨어져 나온 쪽은 집권 여당으로서 다음 총선을 앞두고 당세를 키우는데 박차를 가하게 되고, 새천년민주당에 남은 쪽은 민주당의 간판을 고수하며 정통 야당임을 선언했다. 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여당이 교체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임기 도중에 기존 여당에서 분당된 당으로 이동함으로써 여당이 교체되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한편, 한나라당에서도 당의 보수성을 비판하면서 개혁성향 5명의 의원(이른바 독수리 오형제)들이 탈당해 신당에 합류했고[27][28], 김원웅[29], 유시민을 주축으로 한 개혁국민정당도 신당과의 합당을 선언하면서 합류했다.

2003년 5월 16일, 새천년민주당의 신주류 의원 67명은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약창 신당추진모임)을 발족시켰다. 9월에는 본격적인 창당을 위한 집단 탈당을 시작했으며, 이들은 무소속 상태에서 교섭단체이자 창당주비위원회인 국민참여통합신당(약칭 통합신당)을 결성하였다. 10월 13일에는 전국적 발기인 모집 운동을 전개했으며, 22일에는 당명으로 열린우리당을 선정했다. 10월 27일에는 창당발기인 대회를 열어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고, 10월 30일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여 11월 8일에 공고되었다. # 11월 11일에는 창당대회를 열어서 공식 출범을 선언했다. # 11월 17일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식 등록되었고, 11월 24일에 공고되었다. # 이렇게 해서 열린우리당은 47석(민주당 탈당파 40 + 한나라당 5 + 개혁국민 2)의 소수 여당으로 창당하게 된다.[30]

김원기 의원이 창당을 주도했는데, 2003년 5월부터 신당추진모임 의장을 맡아 9월에는 통합신당 창당주비위원장을 맡았다. 10월에는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이태일, 이경숙과 함께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고, 창당 후에 공동의장으로 계승되어, 전당대회로 인해 의장이 정동영으로 교체되기 전까지 계속 중책을 맡았다.[31] 한편 교섭단체 시절이던 2003년 9월에 원내대표로 김근태 의원이 선출되었고, 정책위의장은 정세균이 선출되었다.

한편 새천년민주당의 전국 조직력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 새천년민주당은 분당 이후 당원 수가 2003~2004년 150만 명에서 7~8만 명으로 급감한 반면, 열린우리당은 새천년민주당의 비호남 조직의 입당을 받아 2005년에는 100만 당원을 돌파했다.

3.2. 2004년

사상 초유의 초미니 여당(제3당)으로 출범한 열린우리당은 1인 대표체제(총재 제도) 대신 여러 명의 상임중앙위원을 선출하고 상임중앙위원 중에 최다득표를 한 사람을 "의장"으로 뽑는 집단지도체제를 수립했다. 그리고 이 집단 지도체제 속에 2004년 1월 전당대회를 통해서 초대 의장으로 정동영 의원이 선출되었는데, 열린우리당은 의석 수의 한계 속에서도 개혁을 바라던 국민들의 기대감이 꽤 크게 작용했는지 빠른 속도로 지지율을 상승시킨다. 특히 당시엔 대북송금특검, 차떼기 사건을 포함한 굵직한 비리 사건들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정치권 전반이 불신론에 휩싸여있었는데, 열린우리당은 이를 비교적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호평을 받았다.

실제로 총선 3개월 전 여론조사 결과 열린우리당은 과반은 어려워도 제1당을 차지할 가능성은 매우 높게 나타났으며, 그 뒤를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이 뒤쫓는 형국이었다. 만약 이대로 총선이 치러졌다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양당 구도에 새천년민주당이 제3세력으로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었겠지만...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간다.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이 선거법 위반이라면서 새천년민주당을 중심으로 한나라당, 자민련까지 3당이 총 연합하여 대통령 탄핵안을 밀어붙인 것. 사실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을 주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16대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이 대선 비용으로 44억원을 사용하였는데, 노무현과 친노는 44억원에 대한 책임은 새천년민주당에 맡기면서 당을 나가 버렸고, 당연히 먹튀 논란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32]

하지만 50여명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눈물 흘리며 대통령 탄핵에 맞서는 장면이 국민들 앞에 생생히 중계되면서, 나머지 3당들이 지지층 결집을 노리고 시도했던 탄핵안은 반대로 거센 국민의 저항을 받아 역풍만 불러오게 된다.

이에 대해 앞서 말했다시피 애당초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이미 탄핵 전에 상승세를 탔었기 때문에, 도리어 탄핵이 그런 불안감을 뒤집으려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중심의 "맞불" 전략, "판엎기" 전략이었다는 말도 있다.[33] 그러나 결국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 이에 편승한 한나라당, 그리고 막판 도박에 합류한 자민련은 "누가 우리가 뽑은 대통령 멋대로 쫓아내냐?"라는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17대 총선 후보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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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구 || 후보 || 당시 경력 || 기타 ||
종로구 김홍신 전 국회의원
중구 정호준 전 삼성전자 근무 [34]
용산구 김진애 건축가 [35]
성동구 갑 최재천 변호사 당선
성동구 을 임종석 현 국회의원 당선
광진구 갑 김영춘 현 국회의원 당선
광진구 을 김형주 전 한국청년연합회장 당선
동대문구 갑 김희선 현 국회의원 당선
동대문구 을 허인회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중랑구 갑 이화영 전 국회의원 보좌관 당선
중랑구 을 김덕규 현 국회의원 당선
성북구 갑 유재건 현 국회의원 당선
성북구 을 신계륜 현 국회의원 당선
강북구 갑 오영식 전 국회의원 당선
강북구 을 최규식 전 한국일보 정치부장 당선
도봉구 갑 김근태 현 국회의원 당선
도봉구 을 유인태 전 국회의원 당선
노원구 갑 정봉주 외대어학원 대표 당선
노원구 을 우원식 전 서울시의원 당선
노원구 병 임채정 현 국회의원 당선
은평구 갑 이미경 전 국회의원 당선
은평구 을 송미화 전 서울시의원
서대문구 갑 우상호 전 연세대 총학생회장 당선
서대문구 을 박상철 경기대 교수
마포구 갑 노웅래 전 MBC노조위원장 당선
마포구 을 정청래 전 마포참여개혁포럼 대표 당선
양천구 갑 김희갑 전 서울시의원
양천구 을 김낙순 전 서울시의원 당선
강서구 갑 신기남 현 국회의원 당선
강서구 을 노현송 전 강서구청장 당선
구로구 갑 이인영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당선
구로구 을 김한길 전 국회의원 당선
금천구 이목희 전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 당선
영등포구 갑 김명섭 현 국회의원
영등포구 을 김종구 전 서울시의원
동작구 갑 전병헌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당선
동작구 을 이계안 전 현대자동차 사장 당선
관악구 갑 유기홍 전 청와대 정책기획실 국장 당선
관악구 을 이해찬 현 국회의원 당선
서초구 갑 함종길 변호사
서초구 을 김선배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장
강남구 갑 박철용 공인회계사
강남구 을 이환식 파리8대학교 한국연구원장
송파구 갑 조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송파구 을 김영술 변호사
송파구 병 이근식 전 행정자치부 장관 당선
강동구 갑 이부영 현 국회의원
강동구 을 이상경 전 인천지방법원 판사 당선
중구 동구 이해성 전 청와대 홍보수석
서구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
영도구 김정길 전 국회의원
부산진구 갑 조영동 전 국정홍보처장
부산진구 을 박재율 신라대 겸임교수
동래구 노재철 전 노동법률상담소 실장
남구 갑 김용철 전 청와대 공보행정관
남구 을 박재호 전 청와대 정무2비서관 [36]
북구 강서구 갑 이철 전 국회의원
북구 강서구 을 정진우 전 국회정책연구위원
해운대구 기장군 갑 최인호 전 부산대 총학생회장 [37]
해운대구 기장군 을 최택용 열린신문 창간발행인
사하구 갑 이헌만 전 경찰대학장
사하구 을 조경태 전 부경대 강사 당선
금정구 박원훈 전 KBS부산방송총국장
연제구 노혜경 부산외국어대 겸임교수
수영구 허진호 부산지방변호사회 회장
사상구 정윤재 전 부산대 총학생회장
중구 남구 이재용 전 남구청장
동구 갑 이강철 대구경북경제살리기운동본부 본부장
동구 을 김정호 전 농림부 차관
서구 서중현 전 경상여자중학교 교사 [38]
북구 갑 조인호 변호사
북구 을 배기찬 전 청와대 행정관
수성구 갑 김태일 영남대 교수
수성구 을 윤덕홍 전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달서구 갑 김준곤 변호사
달서구 을 권형우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중앙이사
달서구 병 박선아 변호사
달성군 윤용희 경북대 교수
중구 동구 옹진군 한광원 전 인천시의원 당선
남구 갑 유필우 전 인천광역시 정무부시장 당선
남구 을 안영근 현 국회의원 당선
연수구 고남석 전 인천시의원 [39]
남동구 갑 이강일 나사렛한방병원장
남동구 을 이호웅 현 국회의원 당선
부평구 갑 문병호 변호사 당선
부평구 을 최용규 현 국회의원 당선
계양구 갑 신학용 법무사 당선
계양구 을 송영길 현 국회의원 당선
서구 강화군 갑 김교흥 중소기업연구원 원장 당선
서구 강화군 을 신동근 치과의사 [40]
동구 양형일 전 조선대학교 총장 당선
서구 갑 염동연 전 한국JC중앙회 부회장 당선
서구 을 정동채 현 국회의원 당선
남구 지병문 전남대 교수 당선
북구 갑 강기정 전 한국청년연합회 대표 당선
북구 을 김태홍 현 국회의원 당선
광산구 김동철 전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 당선
동구 선병렬 대전미래발전연구소 소장 당선
중구 권선택 전 대전광역시 행정부시장 당선
서구 갑 박병석 현 국회의원 당선
서구 을 구논회 대전대학학원 이사장 당선
유성구 이상민 변호사 당선
대덕구 김원웅 현 국회의원 당선
중구 이정환 전 청와대 농수산비서관
남구 갑 정병문 울산개혁전략연구소 소장
남구 을 도광록 전 울산시의원
동구 김원배 자치분권연구소 이사 [41]
북구 이수동 전 울산여성신문 논설위원
울주군 강길부 전 건설교통부 차관 당선
수원시 장안구 심재덕 전 수원시장 당선
수원시 권선구 이기우 전 경기도의원 당선
수원시 팔달구 박공우 변호사
수원시 영통구 김진표 전 재정경제부 장관 당선
성남시 수정구 김태년 전 경희대 총학생회장 당선
성남시 중원구 이상락 전 경기도의원 당선
성남시 분당구 갑 허운나 전 국회의원
성남시 분당구 을 김재일 전 시사저널 워싱턴 특파원
의정부시 갑 문희상 전 국회의원 당선
의정부시 을 강성종 신흥학원 이사장 당선
안양시 만안구 이종걸 현 국회의원 당선
안양시 동안구 갑 이석현 전 국회의원 당선
안양시 동안구 을 이정국 감정평가사
부천시 원미구 갑 김기석 전 대한주택보증 상임감사 당선
부천시 원미구 을 배기선 현 국회의원 당선
부천시 소사구 김만수 전 부천시의원 [42]
부천시 오정구 원혜영 전 국회의원 당선
광명시 갑 이원영 변호사 당선
광명시 을 양기대 전 동아일보 사회부차장 [43]
평택시 갑 우제항 전 평택경찰서장 당선
평택시 을 정장선 현 국회의원 당선
양주시 동두천시 정성호 변호사 당선
안산시 상록구 갑 장경수 전 안산 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 당선
안산시 상록구 을 임종인 변호사 당선
안산시 단원구 갑 천정배 현 국회의원 당선
안산시 단원구 을 제종길 한국해양연구원 책임연구원 당선
고양시 덕양구 갑 유시민 현 국회의원 당선
고양시 덕양구 을 최성 전 청와대 행정관 당선
고양시 일산구 갑 한명숙 전 환경부장관 당선
고양시 일산구 을 김두수 동북아비전연구소 소장
의왕시 과천시 신창현 전 의왕시장 [44]
구리시 윤호중 전 청와대 행정관 당선
남양주시 갑 최재성 전 동국대 총학생회장 당선
남양주시 을 박기춘 전 경기도의원 당선
오산시 안민석 중앙대 교수 당선
화성시 안병엽 전 정보통신부 장관 당선
시흥시 갑 백원우 전 청와대 행정관 당선
시흥시 을 조정식 전 국회의원 보좌관 당선
군포시 김부겸 현 국회의원 당선
하남시 문학진 전 청와대 정무1비서관 당선
파주시 박정 안양대 교수 [45]
이천시 여주군 최홍건 전 산업자원부 차관
용인시 갑 우제창 연세대 대학원 교수 당선
용인시 을 김종희 SOC건설경제연구원 대표이사
안성시 김선미 약사 당선
김포시 유영록 전 경기도의원 [46]
광주시 이종상 전 청와대 정책기획비서실 국장
포천시 연천군 이철우 전 포천문인협회 사무국장 당선
양평군 가평군 민병채 전 양평군수
춘천시 변지량 전 춘천경실련 사무국장
원주시 이재만 전 대전지방국세청장
강릉시 신건승 한솔교육사 대표이사
동해시 삼척시 안호성 전 감사원장 비서관
속초시 고성군 양양군 이동기 반부패국민연대 사무국장
홍천군 횡성군 조일현 전 국회의원 당선
태백시 영월군 평창군 정선군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당선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박병용 전 강원도의원
청주시 상당구 홍재형 현 국회의원 당선
청주시 흥덕구 갑 오제세 전 인천광역시 행정부시장 당선
청주시 흥덕구 을 노영민 전 청주환경운동연합 이사 당선
충주시 이시종 전 충주시장 당선
제천시 단양군 서재관 전 해양경찰청장 당선
청원군 변재일 전 정보통신부 차관 당선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이용희 전 국회의원 당선
증평군 진천군 괴산군 음성군 김종률 변호사 당선
천안시 갑 양승조 변호사 당선
천안시 을 박상돈 전 충청남도청 기획정보실장 당선
공주시 연기군 오시덕 전 대한주택공사 사장 당선
보령시 서천군 김명수 전 서울사이버대학교 총장
아산시 복기왕 전 명지대 총학생회장 당선
서산시 태안군 문석호 현 국회의원 당선
논산시 계룡시 금산군 양승숙 전 국군간호사관학교 교장
부여군 청양군 유병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홍성군 예산군 임종린 민주평통자문위원
당진군 박기억 변호사
전주시 완산구 갑 장영달 현 국회의원 당선
전주시 완산구 을 이광철 전 한겨례신문 편집국장 당선
전주시 덕진구 채수찬 미국 라이스대학교 교수 당선
군산시 강봉균 현 국회의원 당선
익산시 갑 한병도 전 원광대 총학생회장 당선
익산시 을 조배숙 전 국회의원 당선
정읍시 김원기 현 국회의원 당선
남원시 순창군 이강래 현 국회의원 당선
김제시 완주군 최규성 국민정치연구회 사무총장 당선
진안군 무주군 장수군 임실군 정세균 현 국회의원 당선
고창군 부안군 김춘진 대한보건협회 부회장 당선
목포시 김대중 전 목포시의원 [47]
여수시 갑 김성곤 전 국회의원 당선
여수시 을 주승용 전 여수시장 당선
순천시 서갑원 전 청와대 정무1비서관 당선
나주시 화순군 문두식 전 국군기무사령관
광양시 구례군 우윤근 변호사 당선
담양군 곡성군 장성군 김정범 변호사
고흥군 보성군 신중식 전 국정홍보처장 당선
장흥군 영암군 유선호 전 국회의원 당선
강진군 완도군 이영호 전남대 교수 당선
해남군 진도군 민병초 전 국회의원
무안군 신안군 김성철 전 국민은행 부행장
함평군 영광군 장현 호남대 교수
포항시 북구 배용재 전 대구지검 영덕지청장
포항시 남구 울릉군 박기환 전 포항시장
경주시 김도현 경북지구청년회의소 회장
김천시 배태호 전 한국감정원 노조위원장
안동시 김승년 전 서울동부지검 차장검사
구미시 갑 조현국 변호사
구미시 을 추병직 전 건설교통부 차관
영주시 이영탁 전 국무조정실장
영천시 최상용 전 국회의원
상주시 성백영 전 부산고등검찰청 사무국장 [48]
문경시 예천군 황성재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경산시 청도군 권기홍 전 노동부장관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조창래 전 대구지방경찰청장
군위군 의성군 청송군 김현권 전 의성농민회 사무국장 [49]
영양군 영덕군 봉화군 울진군 박영무 아주대 교수
창원시 갑 공민배 전 창원시장
창원시 을 박무용 전 경상남도약사회 회장
마산시 갑 이만기 인제대 조교수
마산시 을 하귀남 변호사
진주시 갑 이기동 자치분권전국연대 상임운영위원장
진주시 을 김헌규 변호사
진해시 최충옥 경기대 교수
통영시 고성군 정해주 전 통상산업부 장관
사천시 한영성 전 과학기술부 차관
김해시 갑 김맹곤 전 경남개발공사 사장 당선
김해시 을 최철국 전 경상남도청 문화관광국장 당선
밀양시 창녕군 김용문 전 보건복지부 차관
거제시 장상훈 전 거제시의원
의령군 함안군 합천군 권욱 전 행정자치부 민방위재난통제본부장
양산시 송인배 전 해양수산부장관 비서관
남해군 하동군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산청군 함양군 거창군 변범식 변호사
제주시 북제주군 갑 강창일 배재대 교수 당선
제주시 북제주군 을 김우남 전 제주도의원 당선
서귀포시 남제주군 김재윤 탐라대 교수 당선

그렇게 탄핵 역풍의 바람을 타고 영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승리하면서, 열린우리당은 2004년 4월 15일 열린 17대 총선에서 초기 예상 의석인 70석, 100석을 훌쩍 넘은 152석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50][51] 총선 결과만으로 한 당이 과반을 차지한 건 1985년 12대 총선 이후로는 17대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민주화 이후, 즉 제6공화국 최초로 총선을 통해 여대야소가 된 시기다.

그러나 이런 갑작스러운 성공은 결과적으로 보면 열린우리당에게 보약이 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미니 정당에서 거대 정당이 돼버리는 바람에 머리는 그대로인데 몸만 갑자기 커진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으며 더욱이 108명에 달하는 초선의원들은 국회에서 제각기 다른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108번뇌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고, 당의 이념적 노선을 가지고서도 실용이냐 개혁이냐를 놓고 갈등이 빚어지는 등 당 내부에서 불협화음이 이어졌다.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노인 폄하 발언으로 입지가 약해진 정동영 의장은 통일부장관으로 임명됨에 따라 총선 직후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임명된 김근태 원내대표와 함께 내각으로 들어갔으며, 상임중앙위원 중 서열 제2위인 신기남 의원이 승계받아서 2대 의장이 되었다(2004년 5월 17일). 신기남 의원은 "천신정" 가운데 하나인 당내 주류 개혁파 의원으로 손꼽혔으나, 부친의 일제 경찰 경력이 드러나는 바람에 의장에서 물러나야 했고(2004년 8월), 그 뒤를 한나라당 부총재 출신 이부영 전 의원(17대 총선에서 낙선)이 이어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 문제가 마무리된 2004년 5월 20일, 열린우리당에 정식으로 입당했고, 이때부터 열린우리당은 명실상부한 공식 여당이 되었다. 노무현은 원래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 바로 입당할 계획이었지만[52], 대선 자금 수사와 탄핵 등 여러 정치적 이슈가 생기면서 입당을 미루었다가 탄핵 사건 기각이 되며 어느 정도 이슈가 정리되어 입당하였다.

총선 승리 이후 약 2개월 만에 치려진 2004년 6월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했다.

10월 21일에는 헌법재판소에서 "신행정수도법 위헌 확인 결정"#으로 행정수도 이전 계획이 좌절되었다.[53] 결국 여당은 다음해 3월 2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의결한다.

한편 내각으로 들어간 김근태 전 원내대표를 대신하여 선출된 천정배 원내대표의 주도로 소위 '4대 개혁 입법'[54]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에 대해선 국민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이를 기회로 한나라당은 나머지 몇몇 입법들마저 강력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고, 당내 갈등까지 겹치면서 원래 합의를 본 수정안까지도 2004년 통과되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그리고 이부영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는 개혁입법 통과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이후부턴 당세가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한다. 사실 행정수도 이전과 4대 개혁 입법이 무산되고 김이 빠진 이 시기가 열린우리당의 피크였다. 게다가 그 해 12월 노무현 대통령은 본인도 오히려 자신이 지지층을 설득시켜야 할 문제라고 인정했던 말많은 과제인 한미 FTA를 진행시키기로 결정한다.

3.3. 2005년

이부영 의장의 뒤를 이은 임채정 비상대책의장[55]의 과도기를 거쳐, 정기 전당대회를 통해 문희상 의원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2005년 4월 2일). 그러나 문희상 의장 체제에서도 열린우리당의 난맥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국민들은 우왕좌왕하는 열린우리당에 점점 실망하기 시작했다. 결국 146석으로 과반을 상실한 상태에서 치러진 4월 재보궐선거에서 6석 중 단 1석도 건지지 못하는 참패로 과반 탈환에 실패했고, 당내에서 갈등이 빚어지면서 문희상 퇴진론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역시 7월, 8월부터 거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연정 카드는 대통령의 표현대로 한나라당에 던졌는데 우리한테 폭탄이 터진 결과를 초래하였고, 열린우리당은 더더욱 극심한 혼란과 분열로 빠져들었다.

이어 10월 재보궐선거에서도 단 한 석도 얻지 못한 채 참패하자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청와대의 정치 방식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고(열린우리당 “대통령이 신이냐?”…청와대는 침묵, 與 의원·중앙위원 회의 ‘수위넘은 성토 봇물’), 문희상 의장은 결국 사퇴하였다. 그리고 다시 열린우리당은 비상대책위원회까지 구성하면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결국 의원들의 토의 끝에 원만한 조정자 타입[56]정세균 원내대표에게 당 의장을 겸하게 하여 위기를 돌파하려 하였다(2005년 11월). 정세균 비상대책의장은 개혁입법 중 하나인 사립학교법이라도 통과시키자는 생각에서 사립학교법을 강행처리했지만 열린우리당의 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기득권 사학재단들의 격렬한 반대와, "다수당 강행처리시 지지율 하락"의 공식만이 작동했다.[57] 그리고 2006년이 다가오는데...

3.4. 2006년

해를 넘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개각을 통해 정세균 의장(원내대표직 겸임)을 내각(산업자원부장관)으로 불러들였다(2006년 1월 6일). 그리고 유시민보건복지부장관으로 지명되었는데, 야당들은 물론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도 반발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한편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출신 유재건 의원이 전당대회까지 임시 당의장을 맡았고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로 새로 선출되었다.

2006년 지방선거 광역,기초자치단체장 후보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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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th=68> 후보 ||<width=115> 선거구 || 경력 || 비고 ||
강금실 서울시장 법무부장관
오거돈 부산시장 해양수산부장관 [58]
이재용 대구시장 환경부장관
최기선 인천시장 전 인천시장
조영택 광주시장 전 국무조정실장 [59]
염홍철 대전시장 대전시장 [60]
심규명 울산시장 변호사
진대제 경기도지사 전 정보통신부 장관
이창복 강원도지사 전 국회의원
한범덕 충북도지사 전 충청북도 정무부지사 [61]
오영교 충남도지사 전 행정자치부 장관
김완주 전북도지사 전주시장 당선
서범석 전남도지사 전 교육인적자원부 차관
박명재 경북도지사 전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62]
김두관 경남도지사 전 행정자치부 장관 [63]
진철훈 제주도지사 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이사장
김영종 종로구청장 한국수자원공사 비상임이사 [64]
전장하 중구청장 전 중구 부구청장
정남길 용산구청장 용산구의원
오성욱 성동구청장 변호사
김태윤 광진구청장 전 서울시의원
유준상 동대문구청장 전 서울시의원
김준명 중랑구청장 전 서울시의원
진영호 성북구청장 전 성북구청장
강영조 강북구청장 전 강북구의원
이동진 도봉구청장 전 서울시의원 [65]
서종화 노원구청장 전 서울시의원
고연호 은평구청장 전 여성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문석진 서대문구청장 전 서울시의원 [66]
김충현 마포구청장 전 국회의원
유선목 양천구청장 전 서울시의원
이창섭 강서구청장 강서구의원 [67]
남승우 구로구청장 전 구로구의원
최병순 금천구청장 전 금천구의회 의장
정경환 영등포구청장 전 청와대 정책조정국장
서승제 동작구청장 전 서울시의원
진진형 관악구청장 전 관악구청장
서병찬 서초구청장 신우이엔씨 대표이사
이판국 강남구청장 아주대 겸임교수
이유택 송파구청장 송파구청장
손석기 강동구청장 전 서울시의원
김희겸 영도구청장 전 당협위원장
김영재 부산진구청장 전 부산시의원
김은호 동래구청장 전 청와대 행정관
박기욱 남구청장 전 부산시의원
전재수 북구청장 전 청와대 행정관 [68]
홍순헌 해운대구청장 부산대 교수 [69]
손현경 기장군수 경성대 외래교수
이해수 사하구청장 전 부산시의원
박춘길 금정구청장 금정구의원
구대언 강서구청장 전 부산시의원
이창용 연제구청장 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이남중 수영구청장 부산대 총동문회장
윤경태 사상구청장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
김정태 중구청장 전 환경부장관 특보
이승천 동구청장 대구미래대 교수
이철우 북구청장 북구치과의사 회장
정판규 달서구청장 달서신문 발행인
이상용 중구청장 인천복합운송협의회장
허인환 동구청장 국회의원 비서관 [70]
박우섭 남구청장 남구청장 [71]
안귀옥 연수구청장 변호사
박순환 남동구청장 동북아시대위원회 자문위원
노재철 부평구청장 대한노인회 부평구지회장
박형우 계양구청장 전 인천시의원 [72]
박균열 서구청장 전 인천시의원
김철호 옹진군수 옹진군의원
임택 동구청장 동구의원 [73]
김종식 서구청장 서구청장 [74]
김화진 남구청장 전 남구의원
이형석 북구청장 전 광주시의원 [75]
이상갑 광산구청장 변호사
권득용 동구청장 도시정책포럼 공동대표
전종구 중구청장 대전대 겸임교수
김용분 서구청장 전 서구의원
노중호 유성구청장 유성민주자치시민연합 상임대표
박영순 대덕구청장 전 청와대 행정관 [76]
임동호 남구청장 울산시당위원장
김원배 동구청장 국가균형발전위 자문위원 [77]
박진구 울주군수 전 국회의원
염태영 수원시장 전 청와대 비서관 [78]
이재명 성남시장 변호사 [79]
박영하 의정부시장 변호사
이승민 안양시장 변호사
방비석 부천시장 전 부천시 부시장
김경표 광명시장 전 광명시의원 [80]
유성 평택시장 지속가능발전위 에너지산업 팀장
이흥규 양주시장 전 경기도의원
오세창 동두천시장 전 경기도의원 [81]
부좌현 안산시장 전 경기도의원 [82]
김유임 고양시장 고양시의원 [83]
김진숙 과천시장 전 과천시의원
이수영 의왕시장 전 민주평통 의왕협의회장
박영순 구리시장 전 구리시장 당선
이해일 남양주시장 민주평통자문위원
곽상욱 오산시장 오산자치시민연대 운영위원장 [84]
박광직 화성시장 변호사
김윤식 시흥시장 전 경기도의원 [85]
김윤주 군포시장 군포시장
유병직 하남시장 한국사회여론연구소 기획위원
윤건 파주시장 전 농업기반공사 파주지부장
권재국 여주군수 전 경기도의원
이완우 이천시장 이천시 체육회 상임부회장
이우현 용인시장 용인시의원 [86]
한영식 안성시장 전 안성시장
유영록 김포시장 전 경기도의원 [87]
신동헌 광주시장 전 전국농민단체협위회 사무총장 [88]
서장원 포천시장 전 포천군의원 [89]
이운구 연천군수 전 경기도의원
황석희 춘천시장 전 평화은행장
원창묵 원주시장 전 원주시의원 [90]
정부교 강릉시장 전 강릉시의원
최경순 동해시장 동해상공회의소장
안호성 삼척시장 전 감사원장 비서관
김동욱 태백시장 대한석탄공사 노조위원장
신선웅 정선군수 전 정선군 부군수
황돈태 속초시장 전 속초시 부시장
김성진 고성군수 전 한라그룹 유럽지사대표
김남웅 양양군수 전 인제군 부군수
김장준 인제군수 인제군수
최기석 홍천군수 홍천군의원
고석용 횡성군수 전 공근면장 [91]
엄민현 영월군수 전 강원도의원
이석래 평창군수 전 농협중앙회 이사 [92]
이현대 화천군수 전 화천군의원
최형지 양구군수 전 강원도의원
문경현 철원군수 철원군수
오효진 청주시장 청원군수
권영관 충주시장 전 충북도의회 의장
권기수 제천시장 전 단양군 부군수 [93]
변장섭 청원군수 청원군의원
정구복 영동군수 전 영동군의회 의장 당선
이향래 보은군수 전 충북도의원 당선
한용택 옥천군수 전 농협 옥천군지부장 당선
이원배 음성군수 음성문화원장
유영훈 진천군수 전 충북도의원 당선
구본영 천안시장 전 국무총리실 농수산건설심의관 [94]
남상균 공주시장 전 국회의원 비서관
이병준 보령시장 전 아산군수(관선)
곽용구 아산시장 정보통신기술사협회 부회장
조규선 서산시장 서산시장 당선
김세호 태안군수 전 충남도의원 [95]
최영준 금산군수 충남도당 정책부위원장
최준섭 연기군수 전 새마을운동 연기군지회장 [96]
황명선 논산시장 전 서울시의원 [97]
나소열 서천군수 서천군수 당선
이두원 홍성군수 대전충남한우협동조합장 [98]
안세용 예산군수 농협중앙회 예산군지부장
민종기 당진군수 당진군수 당선
송하진 전주시장 전 전라북도 기획관리실장 당선[99]
함운경 군산시장 전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이한수 익산시장 전북도의원 당선
김생기 정읍시장 전 국회의장 정무수석비서관 [100]
윤승호 남원시장 전 전북도의원 [101]
황호방 김제시장 전 전북도의원
최충일 완주군수 완주군수
송영선 진안군수 전 전북도의원 당선
윤완병 무주군수 전 전북도의원
최용득 장수군수 전 장수군수 [102]
강완묵 임실군수 전 전국농민총연맹 사무총장 [103]
강인형 순창군수 순창군수 당선
정길진 고창군수 전 전북도의회 의장
강수원 부안군수 전 부안군수
김정민 목포시장 목포대교수
김강식 여수시장 남해안발전연구소장
이은 순천시장 전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
서종식 광양시장 한국도로공사 고문변호사
최형식 담양군수 담양군수 [104]
고일갑 장성군수 조선대 초빙교수
고현석 곡성군수 곡성군수
서기동 구례군수 전 구례읍장 당선
진종근 고흥군수 고흥군수
김점중 장흥군수 전남 가축인공수정사협회장
윤옥윤 강진군수 전 강진군의원
김종식 완도군수 완도군수 당선[105]
박연수 진도군수 전 진도군 부군수 당선
김일태 영암군수 전 전라남도 교육위원회 의장 당선
서삼석 무안군수 무안군수 당선[106]
김수용 신안군수 전 국회의장 비서관
황기석 포항시장 전 포항지역사회연구소장
이석준 울릉군수 고려대 외래교수
이상두 경주시장 전 국회의원
김명호 안동시장 경북도당 부위원장 [107]
우인회 성주군수 멀티테크 대표이사
남정태 영양군수 전 포항시 재무국장
신정 울진군수 전 울진군수
진광현 창원시장 경남정보사회연구소 소장
양운진 마산시장 경남대 교수
강주열 진주시장 진주시의원
박청정 통영시장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
백두현 고성군수 전 보건복지부장관 특보 [108]
이봉수 김해시장 전 한국마사회 부회장
엄용수 밀양시장 회계사 당선[109]
변광용 거제시장 월간거제편집장 [110]
정병문 양산시장 양산시의원
정현태 남해군수 전 청와대 행정관
천사령 함양군수 함양군수 당선
정막선 산청군수 전 경남도의원
최용환 거창군수 거창군의원
김기태 합천군수 전 합천군의원

2006년은 대한민국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는 해였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전당대회에서 통일부장관을 사퇴하고 내각에서 복귀한 정동영 전 의장을 다시 의장으로 선출했다(2006년 2월 18일). 그러나 정동영의 당의장 컴백과 강금실법무부장관, 진대제정보통신부장관 등 각료 출신들이 선거에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의 몰락은 막을 수 없었다. 정동영은 선거 유세 막판에 국민들에게 '한나라당의 싹쓸이를 막아달라'는 읍소를 하며 표를 달라고 하는 등 온갖 방법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열린우리당이 전라북도지사 1곳을 빼고 광역자치단체장의 대부분을 털렸고[111][112],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은 선거 직후 20%대로 급추락하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민주당계 정당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전까지 사실상 암흑기를 맞게 되었다.

얼마나 암흑기였냐 하면, 비슷한 시기 부산광역시에서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열린우리당을 초월했을 정도였다.[113] 5월 17.1%로 15%인 열린우리당을 넘어선 것. # 그 해 7월 재보궐선거에서는 민주당보다도 낮은 4위로 추락했다. # 민주노동당은 이후 2007년 3월, 열린우리당의 붕괴에 따라 10% 초반대로 추락한 여당을 제치고 지지율 제2당이 된다. #[114]

선거 결과 참패로 인해 정동영 의장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뒤를 이어 전당대회에서 2위를 했던 김근태 의원이 비상대책위원회 의장에 올랐다. 김근태 의장은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라는 거창한 위원회를 만들고 경제회복과 재벌과의 사회적 대협약 등을 추진했지만, 별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이 재보궐선거에서도 참패하자[115], 열린우리당의 간판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위기감이 확산되었고, 한나라당의 대권주자들인 이명박, 박근혜 후보들의 기세가 갈수록 오르자[116][117]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연합해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뛰쳐나온 구(舊) 민주당과의 재통합 및 反한나라당 세력들과의 연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3.5.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월 9일 신년을 맞아 4년 중임 개헌을 제안하였으나, 이는 한나라당에게 대연정 때처럼 그대로 무시되었다.[118]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 통과와 2007 남북정상회담으로 레임덕 속에서도 1차 북핵실험으로 추락했던 2006년에 비해 오히려 지지율이 상승하였으나, 2~30%대의 지지율로는 여전히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3.5.1. 열린우리당 분당 ~ 대통합민주신당 합류

이런 상황들이 겹쳐 열린우리당은 최악의 분당 사태까지 치닫게 되고, 결국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합당되는 것으로 역사가 마무리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열린우리당 분당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열린우리당 분당#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열린우리당 분당#|]]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정강정책

출처: 열린우리당 홈페이지 아카이브, 대한민국정당사 제7집
[ 2003년 11월 11일 제정 ]

4.1. 발기취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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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대선에서 구태의연한 낡은 정치를 바꾸고 국민참여, 국민통합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국민들의 염원인 정치개혁은 모든 기득권과 위선, 부패와 지역주의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새로운 정치는 정당 민주화가 실현된 정치입니다.

계파 중심의 제왕적 정당 질서로는 선진 정치를 이룩할 수 없습니다. 모든 당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참된 정당 민주화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부패의 온상이 되어있는 정치자금을 투명화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정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정치 자금 투명화는 선진한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새로운 정치는 지역주의에 기생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와 갈망은 모두에게 꿈과 기회가 열려있는 공정한 사회, 부의 가치가 국민의 손에 돌려진 깨끗한 선진한국 창조의 미래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오늘 새로운 정치의 실현과 선진 한국으로의 도약을 위하여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하며 굴곡의 50년 한국정치사를 바로잡고 국민과 함께할 새로운 정치시대를 약속드립니다.

"열린우리당"은 지역주의에 기반한 모든 기득권을 거부하고 계층, 세대와 종교, 문화, 이념의 차이를 넘어 연대와 협력을 추구하는 명실상부한 국민통합정당입니다. "열린우리당"은 뿌리 깊은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고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실천하는 깨끗한 정당, 국민과 당원이 주인 되는 참여민주정당,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국정책임정당, 경제우선정당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열린우리당"은 동북아의 평화와 세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생산적 세계화를 이룩하고 미래의 동량인 젊은 일꾼을 발굴하는 미래형 정당입니다. "열린우리당"은 성차별을 철폐하고, 여성들의 사회적 기회와 권익 확대를 통해 양성 평등을 지향하는 조화로운 정당이고자 합니다.

"열린우리당"은 겨레의 가장 큰 염원인 민족통일을 이루기 위해 한반도 평화정착과 분단극복을 선도하는 평화정당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또한 당권을 잡은 사람이 독식했던 공천권을 당원과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명실상부한 국민공천권 시대를 열어나갈 것이며, 더불어 모두가 잘사는 복지국가, 선진경제를 이룩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열린우리당"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정보통신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국민적 참여를 더욱 높일 수 있는 전자정당의 모범을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2004 총선에서 명실상부한 원내 제1당의 전국정당으로, 국정을 책임지는 다수당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 국민은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노후한 정당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당의 민주적 의사결정을 스스로 포기하고 공당으로서의 기능을 모두 상실한 정당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정치의 미래를 제시하지 못하고 눈앞의 이득만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정당을 지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참여정부와 함께 국정을 책임지는 정책정당임을 자임하며, 향후 참여정부의 국정 안정화와 국정 쇄신을 위해 건강한 비판과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에 깊이 감사를 드리며, 다시 한번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참여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003년 10월 27일 "열린우리당" 창당 발기인 일동}}}

4.2. 강령전문

순국선열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희생정신, 4.19 민주이념,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10 민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한 정통 민주개혁세력인 『열린우리당』은 모든 국민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을 모아, 우리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새로운 나라를 창조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모든 국민이 열망하는 새롭고 깨끗한 정치의 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의 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의 건설, 한반도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

우리는 민주발전의 주체로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깨끗한 정치·정정당당한 정치를 구현하고, 정치가 비판이나 이론이 아닌 실천의 대상임을 자각하며, IT 강국에 걸맞은 전자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국민과 함께 노력하고 만들어가는 진정한 ‘열린 정치’의 길을 열고자 한다.

우리는 불신의 벽을 허물고 모두가 ‘우리’가 되는 참된 정치공동체를 지향하며, 민의의 수렴을 통해 국민을 대변하고, 정치발전과 개혁의 중심에 서서 국민과의 약속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실천해 가고자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안정과 발전, 번영의 21세기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국민 모두가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구현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전쟁과 빈곤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 사랑과 화해가 가득한 세상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천명하면서 이 강령과 기본정책을 밝힌다.

4.3. 강령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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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조 (새로운 정치)
우리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존중하고 의회민주주의를 굳건히 정착시키는 한편, 전자민주주의를 활성화하여 모든 영역에서 국민의 참여기회를 확대하고 국민통합을 이룩하며, 정치개혁과 부패척결에 앞장섬으로써 바른 정치를 실현한다.
정부개혁과 지방분권을 적극 추진하고, 주민자치·생활자치를 실현하며, 국민의 안전을 확고히 함으로써 국민에게 봉사하는 능동적인 고품질 정부를 구현한다.
제2조 (잘사는 나라)
우리는 모든 경제주체들에게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되 공정한 경쟁질서를 확립하고,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루는 시장경제질서를 형성하여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일 할 맛 나는 세상을 만든다.
조세 부담의 형평성 제고를 통해 소득 재분배를 이룩하며, 부의 부당한 대물림을 방지한다. 또한, 국가예산의 낭비요인을 지속적으로 제거하고, 국가채무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IT, 지식기반 서비스산업 등 차세대 성장동력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전통산업과 신기술의 접목을 촉진하며, 과학기술인력을 적극적으로 양성함으로써 미래의 성장잠재력을 배양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물류와 금융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의 복합체인 동북아경제중심을 건설하는 동시에, 지방을 혁신하여 발전의 주체로 세워 국가균형발전을 이룩한다.
또한 농어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공익적 가치를 확대하며, 소득안정 및 농어촌복지 정책 등을 통하여 개방화의 파고를 극복하고, 도시와 균형을 이루는 잘사는 농어촌을 건설한다.
제3조 (따뜻한 나라)
우리는 저소득층에 대한 완전한 기초생활보장, 사회보험의 내실화, 근로자에 대한 일자리 제공 및 공정한 대우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절대빈곤의 위험 없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모든 국민이 깨끗한 공기와 물, 아름다운 국토와 선진화된 의료시스템 속에서 평생 건강하게 살아 갈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모든 국민이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제도와 여건을 보장하고, 우리 민족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양질의 인적 자원을 개발하며, 창조적 문화역량의 강화를 통해 문화적 가치가 사회 전반에 살아 숨쉬는 지식문화강국을 건설한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실질적인 양성평등 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여성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여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며, 남녀의 조화로운 동반자 관계를 구축한다.
제4조 (한반도 평화)
우리는 남북한 실질협력의 증진과 군사적 신뢰구축을 실현하고 주변 국가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와 남북 공동번영을 추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고 자주적 방위역량의 확보와 적극적인 다자외교 및 경제·통상외교를 통해 국가위상을 제고시키고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한다.}}}

4.4. 기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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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참여와 통합의 바른 정치 구현
1.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확립)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존중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시켜 인권침해와 차별이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고, 모든 국민이 균등한 기회를 보장받으면서 행복을 추구하고 자아를 실현시킬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건설한다.
2. (의회 중심의 생산적 대의정치 구현)의회와 행정부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의회의 실질적인 독립성을 확보하고, 국민여론 수렴과 행정부 견제라는 의회 본연의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의회 중심의 생산적 대의정치를 구현한다.
3. (전자민주주의의 활성화 등을 통한 참여민주주의 실현)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를 맞아 전자민주주의의 활성화 등을 통해 정책결정과정에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참된 참여민주주의를 구현한다.
4. (국민통합의 정치 실현) 중도 · 건전 보수 · 합리적 개혁세력을 포괄하여 국민 다수를 대표하는 정치를 구현한다. 특권과 차별을 철폐하고, 계층간·세대간·성별간 대립과 갈등 구조를 해소하여 공동체적 연대를 회복함으로써 국민통합의 정치를 실현한다.
5. (정치개혁의 지속적 추진) 당론결정과정과 공직후보 선출과정에 있어서 투명성과 국민 참여도를 제고하고 정당의 정책기능을 강화함으로써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정당구조를 확립한다. 권역별 정당명부제의 도입 등 선거제도 개선을 통해 모든 정당의 전국정당화를 실현하며, 선거공영제를 확대·강화하여 깨끗한 선거문화를 정착시킨다.
6.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사회 건설)권력형 비리, 공직자 비리 등을 엄단하고,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함으로써 부정한 정치자금 수수관행을 근절하며, 반부패 5개년계획 추진 등 강력한 반부패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깨끗하고 정의로운 부정부패 없는 사회를 실현한다.

Ⅱ. 정부개혁과 지방분권 추진을 통한 고품질 정부 구현
7. (정부 개혁을 통한 21세기형 정부 실현)정부조직의 효율화, 지방화, 분권화, 전문화, 경쟁력 강화 등 지속적인 정부개혁을 통해 행정의 민주성·투명성·책임성을 강화하며 21세기에 적합한 능동적이고 효율적인 고품질 정부를 구현한다.
8. (국제경쟁시대와 지식기반사회를 선도하는 정부 역할 강화)낡은 법제와 관행을 개선하여 무한경쟁의 국제경쟁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지식기반사회로의 이행을 선도하는 방향으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 나간다.
9. (지방분권을 통한 지방의 경쟁력 강화)지방분권을 강화하고 주민참여를 확대하여 명실상부한 주민자치·생활자치를 구현함으로써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한편, 지방정부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지방의 성장 잠재력을 극대화한다.
10. (국민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체계 구축) 민생치안을 확립하고 국가재난관리체계를 강화하여 국민 모두가 안심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한다.
11. (법치주의 실현과 국민의 인권보장 강화)만인이 평등하게 법의 적용을 받게 함으로써 법과 원칙이 지배하는 법치주의를 실현하며,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강화하고 사법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국민의 인권보장을 강화한다.

Ⅲ.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질서 확립
12. (경제의 안정적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 정착) 탄력적인 통화정책과 유통구조의 혁신을 통해 물가안정을 정착시켜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공평과세 실현을 통해 분배구조를 개선하고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킨다.
13. (투명하고 공정한 경제시스템 구축)상호지급보증 및 부당 내부거래의 방지,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성 강화, 사외이사제도 개선 등을 통해 국제 수준에 맞는 기업지배소유시스템을 확립한다. 또한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에 따른 폐해를 차단하는 등 시장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제고하며, 경쟁적 시장 환경을 조성하고, 사회 통합적 노사관계를 구축한다.
14. (금융산업의 경쟁력 강화) 금융 인프라 확충과 금융 산업의 상시적 구조조정 등을 통해 금융 산업의 안정성과 경쟁력을 제고시켜 나간다. 금융시장의 공정경쟁 여건을 조성하며, 금융기관의 경영 효율성을 제고한다.
15. (증권시장의 투명성 및 신뢰성 제고) 기업회계기준을 국제기준에 맞추고, 회계법인에 대한 감독 기준을 강화하며,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를 도입하여 증권시장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제고시켜 나간다.
16. (중앙은행의 독립 보장) 한국은행의 독립적 통화정책을 보장하고,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한 최종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17. (동태적 산업구조조정 추진) 과잉설비 보유업종, 경쟁력 약화 부문 등에 대한 업종단체별 자율 구조조정환경을 조성하고, 산업발전 전망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동태적 구조조정을 추진한다.
18. (기업간 공정경쟁 기반 조성) 하도급 관리 강화, B2B에 의한 대금결제방식 의무화 등 대·중소기업간 공정거래 질서를 확립하고, 공정한 물량배정장치를 통하여 중소기업간 경쟁을 촉진시킨다.
19. (중소기업의 경영안정과 자생력 제고) 신용사회에 적합한 중소기업 신용평가기법 개발과 신용보험제도의 활성화를 통하여 중소기업의 자금애로를 지속적으로 해소하고, 중소기업 인력수요에 부응하는 인적자원 개발, 중소기업제품 유통기반 확대, 중소기업간 유휴설비거래 활성화 등 중소기업의 구조조정과 경영안정을 도모한다.
20. (부동산 투기 없는 사회의 실현)부동산 통합전산망을 구축하여 부동산의 실거래가 과세 제도를 정착시키고, 1가구 다주택 보유자에 대한 누진과세 강화 등을 통해 부동산 투기 없는 사회를 실현한다. 동시에 부동산 투자에 유입되는 부동자금을 생산적 투자분야로 유도하여 자금순환의 가속화와 생산성 향상이 병행·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강화한다.
21. (소비생활의 질적 향상) 공공요금 결정과정에 소비자의 참여를 활성화하고, 소비자 안전관리기능을 국제적 기준으로 향상시키며, 소비의 내실화 및 합리화 등을 통해 선진 소비문화를 확립한다. 중장기적으로 소비자 집단소송제도의 도입을 추진한다.
22. (지식정보사회의 전면화) 모든 국민이 보편적으로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지식정보 활용능력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한다. 각종 정보화 역기능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예방하도록 지원함으로써 지식정보사회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한다.
23. (대외 및 남북경제협력 강화) 우리나라 위상에 맞게 주요 국가들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여 안정적으로 수출시장을 확보하고, 우리의 경제구조를 선진화함과 동시에 주요 교역 상대국과의 정치경제적 연대를 강화해서 선진 경제국가로 진입할 기틀을 마련한다. 또한, 남북간 산업·물류·정보통신축을 형성하여 남북간 경제교류를 촉진한다.

Ⅳ. 공평과세 실현과 건전한 재정 도모
24. (과세형평성 제고) 각종 과세 대상간의 세 부담의 형평성을 제고시키고 포괄적 소득 세제를 확립한다. 세정의 과학화 및 누진과세의 구조를 확충함으로써 조세부담의 형평성을 도모한다.
25. (과세기반 확충) 음성·탈루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고, 과세자료의 철저한 확보 및 새로운 세원 발굴과 불요불급한 조세감면 축소 등으로 안정적인 세입기반을 확보한다.
26. (부당한 부의 대물림 근절) 상속·증여세의 완전포괄주의를 도입하여 변칙적인 상속과 증여 등으로 부를 부당하게 대물림하는 것을 방지한다.
27. (건전재정 도모) 세입기반을 확충하는 한편, 재정지출의 우선순위 조정 및 효율적인 관리를 통한 예산 낭비 요인을 제거함으로써 재정의 건전성을 실현한다.
28. (국가채무의 효율적 관리) 공적연금체계를 개선하고 자산운용기법을 선진화하는 등 국가채무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V. 경제성장 잠재력의 지속적 확충
29. (동북아 경제중심 건설) 동북아 R&D허브를 구축하여 세계 주요 기술혁신 중심지로 부상한다. 자동차·조선 등 기존 주력산업에 IT를 접목시켜 생산성 증대와 부가가치를 극대화시키고, 디지털 콘텐츠·지능형 로봇 등 신산업을 발굴하여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하며, 물류와 금융을 결합함으로써 동북아 경제중심국가로 도약한다.
30. (지역간 균형발전으로 성장 잠재력 확충) 수도권과 지방의 상생발전전략, 지역혁신체계 구축·지역전략산업 육성 등 소프트웨어적 인프라 확충 등을 통하여 지방의 혁신능력과 특성화 역량을 제고한다. 특히, 신행정수도 건설에 맞추어 수도권을 국제·금융·서비스·물류·IT중심의 경제수도로 특화하고, 낙후지역 및 농산어촌 개발 지원 병행 추진을 통하여 통합적 지역균형발전을 달성한다.
31. (과학기술투자 확대와 과학기술문화 확산) 지속가능한 국가 발전과 사회진보의 원천으로서 기초과학과 이공계에 대한 지원 등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지방의 과학기술 잠재력과 핵심역량을 획기적으로 제고한다. 또한, 지역단위의 과학관, 과학기술 문화센터 등 과학과 지역사회간 대화채널을 확충하여 과학기술의 대중화와 과학기술문화를 확산한다.
32. (수출확대를 통한 국제경쟁력 강화) 10대 주력품목에 대한 수출 진흥 네트워크 구축, 기계류·부품소재, 플랜트·지식서비스 등 새로운 수출동력을 가동하고, 전자무역을 비롯한 신무역인프라를 확충하며, 장기적으로 세계일류 국가이미지 제고 등을 통해 수출을 확대해 나간다.
33. (국내외 투자 활성화로 일류 실물경제로의 도약) 규제, 준조세, 중복조사 등 기업불편사항을 지속적으로 재점검·해결하고, 생산성 제고와 신기술 위주의 투자를 촉진한다. 또한, 산업의 일류화에 기여하는 외국인 투자를 중점적으로 유치하고,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사안정화, 지방의 외국인 생활여건 개선 등 매력 있는 투자환경을 조성하여 세계 일류 실물경제로 도약한다.
34. (지식재산권의 보호·강화로 산업경쟁력 제고)지식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는 지식재산권 기반의 확충을 통해 지식재산의 지속적인 창출여건을 조성하고, 조기 권리화 및 사업화를 촉진하여 산업경쟁력을 강화해 나간다.
35. (고기술·고생산성·고부가가치화에 의한 기업경쟁력 강화)산업별 일등기술 혁신 전략을 수립하여 집중 투자하고, 기업의 합리화 시설에 대한 투자 및 품질혁신 지원으로 생산성을 제고해 나가며, 중소·벤처기업의 부품·소재, 디자인·브랜드개발 등의 고부가가치화로 기업경쟁력을 강화해 나간다.
36. (세계 최고수준의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과 정보통신산업의 국가기간산업화) 유·무선 정보통신망의 초고속화·고도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차세대 인터넷 기반을 확충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 경쟁력을 유지한다. 또한, 정보·통신·방송, 유·무선 통신융합 등 급변하는 정보통신 시장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여 인력 양성, 기술 개발, 시장기반 조성, 법·제도 정비 등을 차질없이 추진한다.
37. (에너지산업의 경쟁체제 강화와 지속적인 에너지 수급 안정) 전력, 가스산업 등의 구조개편을 통해 에너지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고, 폐광지역에 대한 경제 활성화를 지속적으로 지원한다. 에너지수요를 안정화시키고, 국내외 에너지 개발을 활성화하여 자원의 자급기반을 확대하며, 환경친화적 대체에너지의 개발·보급을 확대하여 온실가스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여 나간다.
38. (21세기 ET강국으로의 도약)2010년 세계 5위권 환경산업강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환경수요에 대응한 환경기술개발과 실용화를 촉진하여 환경기술의 혁신을 이루고, 환경산업의 해외진출을 촉진시킨다.
39. (해양을 통한 국부창출) 해양영토의 개척, 해운·항만의 경쟁력 강화, 해양과학기술 및 해양산업의 육성, 깨끗한 해양환경 조성 등 적극적인 해양경영을 통해 미래의 국부를 창출한다.
40. (철의 실크로드 기반조성을 위한 고속철도망 구축) 기존 철도의 신설, 직선화 및 전철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충하고, 경부고속철도와 호남고속철도 건설사업을 조기에 완공하여, 장기적으로 시베리아 및 중국관통 고속철도와 연계하는 철의 실크로드 기반을 조성한다.
41. (도시별 특성에 맞는 교통체계 구축과 물류비 절감) 대중교통산업의 체계적 육성과 도시별 특성에 맞는 교통체계의 구축을 통해 편리한 대중교통체계를 완비하고, 화물운송제도를 포함한 국가물류체계를 선진국 수준으로 개선하여 국가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 나간다.
42. (수자원의 친환경적인 관리와 수해방지 체계 구축) 수자원을 친환경적으로 관리하고, 이상기후에 대비하여 수해방지종합대책에 만전을 기함으로써 홍수에 강한 국토기반을 구축한다. 나아가 임진강과 북한강 등 남북 공유하천에 대해서는 남북이 협력하여 항구적인 홍수대책을 마련하는 등 수자원의 남북한 공동이용 및 관리를 추진한다.

Ⅵ. 잘사는 농어촌 건설
43. (선대책 후개방의 원칙) ‘선대책 후개방’의 원칙 아래 WTO /DDA 협상, FTA 체결, 쌀 재협상 등 농어업 분야가 직면하고 있는 개방화 시대의 파고를 국민적 공감대 속에서 슬기롭게 극복해 나간다.
44. (농어업의 경쟁력 강화) 고품질 안전 농수축산물의 생산 및 유통 강화, 수출 농어업의 육성, 규모화 및 조직화를 지향하는 구조조정, 협동조합과 농지제도의 개혁 등을 통해 농어업의 경쟁력을 강화한다.
45. (농어업의 공익적 가치 확대)식량안보 차원의 자급률 설정, 농어업의 환경·생태 보전효과 제고, 전통문화 지킴이로서의 기능 증대 등을 통해 농어업의 공익적 가치를 극대화한다.
46. (농어촌의 소득증대 및 복지강화)직불제 확대, 합리적인 부채대책, 농어촌관광 활성화, 향토산업 육성 등을 통해 농어촌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교육환경 및 의료서비스 개선, 연금 및 재해보험의 확대 등을 통해 농어촌의 복지와 사회안전망을 강화한다.
47. (적극적인 어업자원의 관리 및 조성) 자율관리 어업체제의 강화, 자원수준에 맞는 연근해 어업구조로의 개편, 바다목장사업의 확대 등 수산자원의 효율적 관리·조성 등을 통해 풍요롭고 지속가능한 어업기반을 구축한다.

Ⅶ. 참여복지의 실현으로 따뜻하고 차별 없는 사회 구현
48. (참여복지 실현)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적정수준의 복지혜택을 제공하며, 복지정책의 수립과 집행과정에 국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참여복지를 실현한다.
49. (탈빈곤 지원 등 사회안전망 강화)저소득 국민에 대한 완전한 기초생활 보장, 근로능력이 있는 차상위 저소득 국민에 대한 탈빈곤 지원,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의 내실화, 최저주거기준 미달가구에 대한 지원 강화 등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한다.
50. (고용불안 해소) 취업 고용촉진기반 확대, 종합적인 고용서비스 제공기반 구축, 창업지원, 교육과 노동시장과의 원활한 연계 등 적극적 고용정책과 평생직업능력개발체제를 구축하여 고용불안을 해소한다.
51. (비정규직 근로자 등 취약근로계층 보호)차별 금지와 남용 방지 등 근로조건 보호문제와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문제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보호방안을 마련하고, 비정규직 근로자 등 취약한 근로계층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강화한다.
52. (안전한 일자리 환경조성) 산업재해 취약 부문의 안전관리와 보호를 강화하고, 쾌적한 일터 조성 등 작업환경을 개선하여 산업재해를 감소시키며 근로자의 건강보호를 위한 체제를 강화한다.
53. (고령사회의 대비와 활기차고 건강한 노후 보장) 다가오는 고령사회에 국가가 능동적으로 대처토록 하며, 노인의 경제·사회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소득보장 및 공적 요양제도 등을 강화하여 활기차고 건강한 노후생활을 보장한다.
54.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 실현)장애인에 대한 차별금지 및 고용증진, 장애수당 지급 및 직업재활사업의 확충, 이동권 확보 및 정보격차 해소 등을 통해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를 실현한다.
55.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과 발달)유해환경으로부터의 보호, 폭력 및 학대방지, 자유와 창조 중심의 청소년 문화 진흥, 사회적 능력개발을 통한 직업세계로의 원활한 이행 지원 등의 정책으로 청소년이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56. (아동의 건전한 육성을 위한 제도 강화)가족해체 등에 의한 요보호 아동의 발생 방지, 아동학대 예방, 소년·소녀가정 아동보호, 학교존의 교통안전시설 보완 등 아동에 대한 보호대책을 강화하여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57. (신인구정책의 추진) 저출산 고령화에 대응하는 인구정책의 전환을 추진하고, 인구의 질적향상 및 생산성 제고를 위한 인적자원의 지속적 개발 체계를 구축하는 신인구정책을 추진한다.

Ⅷ. 건강한 환경, 건강한 국민
58. (쾌적한 생활환경 조성) 사전오염예방정책을 통해 맑고 깨끗한 공기와 물, 폐기물의 원천적 감량을 통해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하고, 경제적 인센티브에 기초한 환경규제정책을 강화하며 자원 순환형 시스템을 구축한다.
59. (아름다운 자연환경 보전) 전략환경영향평가제도의 도입, 선계획·후개발의 국토환경관리원칙 준수, 생태 네트워크의 구축 및 야생 동·식물의 보호 등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전한다.
60. (환경정책의 선진화) 사회의 각 주체들과의 파트너십과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환경·경제·사회의 통합시스템을 구축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등 국제조류에 맞는 환경정책을 수립한다.
61. (지역공동체의 활성화로 지역환경문제 해결)지방분권화시대에 발맞추어 지방자치단체가 지역환경행정의 중심이 되도록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고 시민, 기업,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아름다운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62. (새로운 국제환경질서 형성에 능동적 대응)기후변화협약, 도하개발 아젠다 등 새로운 지구환경질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동북아·국제 환경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환경선도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한다.
63. (전 국민의 평생건강 보장) 암, 당뇨, 치매 등 주요 질병에 대한 국가관리체계의 구축, 금연·절주 등 건강생활의 실천운동, 생애주기에 따른 효과적인 건강증진서비스 제공 등을 통하여 국민의 건강수명을 연장하고 평생건강을 책임진다.
64.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 적정부담-적정급여 체계의 구축, 의료수가의 적정화 등을 통해 건강보험재정의 안정화를 달성하고, 진료비의 본인부담 상한제 도입으로 위험을 분산시킴으로써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한다.
65. (선진 보건의료 시스템 구축)의원·병원·종합병원의 기능 재정립, 적정한 보건의료 인력·장비의 확보, 의약품 사용 및 유통의 선진화, 공공보건의료 및 응급의료 체계의 강화 등 선진적인 보건의료 시스템을 구축한다.
66. (보건산업 및 한방의료의 진흥)첨단보건의료기술 연구개발 지원, 보건산업 발전을 위한 인프라 구축, 보건의료기술의 산업화 및 해외진출 확대, 한방치료기술 및 한의약산업의 세계화 지원 등을 통하여 우리의 보건·한방 의료산업을 진흥시킨다.
67. (식품·의약품 등의 안전성 보장)다양한 신종 식·의약품과 유해 화학물질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효과적인 식·의약품 및 유해화학물질 안전관리체계를 구축한다.

Ⅸ. 교육개혁과 지식문화강국의 건설
68. (분권·자율·참여의 교육혁신) 중앙집권적 교육업무의 과감한 이양과 위임을 통하여 교육행정구조를 분권화시키고, 단위학교 중심의 교육을 위해 개별 기관에 자율성을 부여하며, 교육주체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학교자치의 확대와 민주성을 강화해 나간다.
69. (교육의 공공성 강화와 교육복지 확대)빈곤층이나 유아, 장애인, 노인 등의 교육적 취약계층에게 더 많은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교육복지 정책을 강화하며, 농어촌·도서벽지 학교에 대한 지원 확대를 통하여 도·농간 교육격차를 해소한다.
70. (공교육의 내실화로 사교육비 부담 완화) 공교육과 사교육의 역할을 재정립해 나가며, 공교육 내실화로 학교교육의 신뢰를 회복시키고, 장·단기적인 사교육비 경감방안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71. (학벌중심사회에서 능력중심사회로의 전환)학력차별 금지제도 도입과 지방대학 집중육성으로 학벌타파 및 대학서열을 완화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의 창출 및 산업수요에 부응하는 인적자원 활용체제를 구축하며, 여성·취약계층의 능력개발 지원으로 사회적 통합과 신뢰에 기반한 인적자원을 양성한다.
72. (교원의 전문성 신장과 사기진작)교원의 전문성 신장 기반을 조성하며, 능력위주의 승진이 이뤄지도록 승진제도를 개편하고, 교원양성·임용체제 개선 및 교원의 복지제도를 확대한다.73. (교육의 질 제고를 위한 투자 확대) 교육정책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여 집중투자 방식으로 교육예산 집행의 효율성을 높이고, 교육재정의 확대를 통해 지속적인 교육혁신의 기반을 마련하여, OECD 국가 수준의 교육환경을 조성한다.
74. (참여와 자치를 통한 문화민주주의 구현과 지방문화 육성)문화예술현장에 대한 참여와 자치, 자율성과 다양성을 통해 문화민주주의를 구현한다. 지방 문화의 육성을 통해 지역간의 문화 불균형을 해소하고, 지방문화의 계승을 통한 특성화된 지역문화 육성 및 지역주민의 문화복지를 구현한다.
75. (우리 문화의 정체성 보존과 다양성 유지)문화재 보호와 전통문화유산을 계승하고, 민족의 문화주체성과 동질성 회복을 위한 남북문화교류를 확대하여 문화의 주체성과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정책을 전개한다.
76. (문화국가의 기틀 마련과 문화산업 육성) 문화예술인들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 조성 및 문화기반 시설을 확충하고, 창의적인 전문인력 양성과 기술개발을 확대한다. 또한 문화컨텐츠 생산지원을 위한 인프라 확충, 문화산업 유통 합리화 및 시장구조 개선을 통해 민족문화의 전통과 창의성이 산업적으로 연계되는 문화산업을 적극 육성한다.
77. (영상산업 육성과 국제경쟁력 확보) 영상산업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지원을 확대하며, 문화의 다양성을 중시하고 국내영화산업의 안정적인 국제경쟁력 확보를 위해 노력한다.78. (언론의 자유 창달과 공익성 강화)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철저히 보장하며, 경영의 투명성 강화를 통해 언론산업 선진화를 이룩하고, 언론의 공익성을 강화함으로써 성숙한 민주주의사회를 구현한다.
79. (생활관광 정착과 관광산업 육성)다양한 관광상품을 개발하여 주5일 근무제·휴가분산제와 연계한 생활관광을 정착시키고, 관광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지원을 확대하여 외국인 관광객의 유치를 증대시킴으로써 동아시아의 관광허브로 육성한다.
80. (모두가 참여하고 즐기는 체육) 학교체육·생활체육·엘리트체육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모두가 참여하고 즐기는 체육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건강하고 활기찬 레저문화를 육성한다.

X. 양성평등 실현으로 여성이 행복한 나라
81. (양성평등관점 도입)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 여성정책 전담기구의 기능을 강화하고, 성 인지적 예산정책을 추진하며, 주요정책의 기획과 집행에 대한 「성별분석」을 체계화한다.
82. (정책결정 과정에 여성 참여 확대 및 여성의 대표성 제고) 국회의원 및 시·도의회 의원 비례대표에 여성을 50% 이상 홀수 순번 할당을 의무화하고, 공공 부문의 관리직 및 전문기술직에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제도를 구축하며, 민간기업의 여성고용에 대한 지원을 통해 기업 내 여성관리직 진출을 확대한다.
83. (여성의 경제활동 지원 확대 및 남녀 고용평등 실현) 보육에 대한 국가차원의 지원을 대폭 확대하여 여성의 경제활동 지원을 강화하고, 모성보호제도의 확립을 통해 가정과 직장의 양립을 실질적으로 보장한다. 여성친화적 일자리 창출 및 공공부문의 여성취업을 확대하며, 남녀차별 관행을 개선하여 고용·승진·직업훈련 등에서 동등한 기회를 보장한다.
84. (가족가치의 존중과 양성평등의 가족문화 조성)다양한 가족형태의 가치를 반영하도록 가족관련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양성평등의 가족문화를 조성하며, 가족가치의 존중과 가족문화의 전승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화한다.
85. (여성폭력 예방 및 인권보호를 위한 통합적 지원체계 구축)성매매방지법 제정 등을 통해 성산업의 억제와 종사자의 사회복귀를 지원하며, 성폭력·가정폭력 관련 제도의 정비를 통해 예방체계를 구축하고, 피해자에 대한 신속하고 질 높은 통합적 지원체계를 구축한다.
86. (평화·통일·국제협력 분야의 여성 참여 확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여성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여성관련 국제교류와 유엔의 여성 관련 활동 및 이행에 적극 동참한다. 또한 전문 여성인력의 국제기구 진출 여건을 제공하고, 국가간·지역간 유기적인 협력체계를 마련한다.

XI. 한반도 평화 통일과 남북 공동번영의 추구
87. (대화를 통한 남북문제 해결) 남북정상회담 등 각종 남북회담을 정례화·제도화하고, 남북간 모든 현안은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88. (남북교류협력의 심화·발전) 남북 경협사업의 확대·발전을 통해 경제공동체의 토대를 마련하고, 사회문화교류협력 확대를 통해 민족 동질성 회복을 추진함으로서 평화통일의 실질적 기반을 조성한다.
89.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국제환경 조성)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 지원 등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국제환경을 조성한다. 남북한이 당사자로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유관국이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90. (동북아 평화협력체 창설 추진) 동북아 평화 안보문제의 포괄적 협의를 위해 남·북한, 미·일·중·러시아가 참여하는 다자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고, 역내 정치·안보 환경을 개선해 한반도 평화정착 및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에 기여한다.91. (이산가족 문제의 획기적 해결) 고령화되어가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생사 및 주소 확인 등 시급한 사안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고, 이산가족 교류의 정례화와 교류방식의 다변화를 통해 이산가족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한다. 납북자·국군포로문제 등의 해결을 위해 지속적으로 북한을 설득해 나간다.

XⅡ. 자주적 방위역량의 기반 구축과 지역안보협력 주도
92. (한국적 여건에 맞는 자주적 방위 역량 기반 구축) 국군의 구조를 미래전 수행에 적합한 21세기형 첨단 정보·기술집약형으로 발전시키고, 육·해·공 3군을 균형적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안보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자주적 방위역량 기반을 구축한다.
93. (미래 지향적 한·미 동맹관계 확립으로 지역안보협력 주도)미래 한·미 동맹 및 주한 미군의 역할에 대한 공동 협의를 통하여 수평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한·미 동맹관계를 발전시키고, 주변국과의 군사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여 동북아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한다.
94. (남북의 군사적 신뢰구축을 통한 한반도 평화 정착)군사회담의 정례화를 통해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신뢰구축을 점진적으로 실현하고, 남북교류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지원을 지속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한다.
95. (군복무 여건 개선) 군 간부의 근무여건 개선을 통해 직업군인의 근무 의욕과 사기를 앙양시키고, 쾌적한 병영시설 건설과 군 의료체계 및 보험제도의 개선으로 사병들의 삶의 질 향상에 노력한다.

XⅢ. 국가위상제고와 경제발전을 위한 외교적 노력 지속
96. (다자외교 적극 참여를 통한 국가위상 제고)국제기구 및 다자외교에 적극 참가하여 테러·군축·비확산·환경 등 범세계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국제사회의 공동 관심사에 대한 협력에 동참한다.
97. (능동적 경제·통상외교로 새로운 세계경제질서 주도)WTO, FTA 등 세계적인 다자간·양자간 협상의 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주요국가와의 통상협력관계를 발전시킴으로서 새로운 세계경제질서를 주도적으로 형성해 나간다.
98. (대개도국 개발협력 강화)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에 맞추어 개발도상국의 빈곤퇴치 및 경제성장 지원을 확대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 등의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한다.
99. (문화·예술 및 학술 교류협력의 활성화) 국가간 문화, 예술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외국과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시키고, 민간차원의 다양한 문화교류활동 지원을 확대하여 우리 문화의 대외경쟁력 향상 및 국제화를 위해 노력한다.
100. (재외국민 보호 및 재외동포 지원)재외동포들이 한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거주국 사회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존경받는 구성원으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며, 한상네트워크 등 능력 있는 재외동포의 역량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5. 역대 지도부

파일:열린우리당 흰색 2차 로고.svg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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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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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위원장
김원기
이태일
이경숙
초대
정동영
제2대
신기남
제3대
이부영
임시집행위
임채정
제4대
문희상
임시집행위
정세균
임시집행위
유재건
제5대
정동영
비대위
김근태
제6대
정세균
}}}}}}}}}}}}

파일:열린우리당 흰색 2차 로고.svg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원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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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근태
제2대
천정배
직무대행
홍재형
제3대
정세균
제4대
김한길
제5대
장영달
}}}}}}}}}}}}

파일:열린우리당 흰색 2차 로고.svg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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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처장
초대
박양수
제2대
남궁석
제3대
최규성
제4대
박기춘
제5대
배기선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사무총장
제5대
배기선
직무대행
박기춘
제6대
염동연
제7대
원혜영
직무대행
우원식
제8대
송영길
제9대
김영춘
}}}}}}}}}}}}}}}

파일:열린우리당 흰색 2차 로고.svg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정책위원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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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정세균
제2대
홍재형
제3대
원혜영
제4대
강봉균
제5대
김진표
}}}}}}}}}}}}}}}

파일:열린우리당 흰색 2차 로고.svg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원내수석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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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김근태 지도부
김덕배
천정배 지도부
이종걸, 김영춘
정세균 지도부
김부겸
김한길 지도부
조일현, 최용규
장영달 지도부
문석호
}}}}}}}}}}}}}}}

===# 창당준비위원회 #===
2003년 10월 27일 ~ 2003년 11월 11일

===# 임시 지도부 #===
2003년 11월 11일 ~ 2004년 1월 11일

===# 정동영 체제 #===
2004년 1월 11일 ~ 2004년 5월 17일

===# 신기남 체제 #===
2004년 5월 17일 ~ 2004년 8월 19일

===# 이부영 체제 #===
2004년 8월 19일 ~ 2005년 1월 3일

===# 임채정 임시집행위원회 #===
2005년 1월 5일 ~ 2005년 4월 2일

===# 문희상 체제 #===
2005년 4월 2일 ~ 2005년 10월 28일

===# 정세균 임시집행위원회 #===
2005년 10월 30일 ~ 2006년 1월 6일

===# 유재건 임시집행위원회 #===
2006년 1월 6일 ~ 2006년 2월 18일

===# 정동영 체제 #===
2006년 2월 18일 ~ 2006년 6월 1일

===# 김근태 비상대책위원회 #===
2006년 6월 9일 ~ 2007년 2월 14일

===# 정세균 체제 #===
2007년 2월 14일 ~ 2007년 8월 21일

6. 출신 인물

6.1.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파일:대한민국 대통령 문장.svg
이름 임기 선출 방식 정당
취임일 퇴임일
16 파일:노무현_대통령.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노무현
(1946 ~ 2009)
2003년 2월 25일 2008년 2월 24일 제16대 대통령 선거
직선 48.91%
새천년민주당 (2003)
무소속 (2003 ~ 2004)
열린우리당 (2004 ~ 2007)
무소속 (2007 ~ 2008)

6.2.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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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균 김근태 김덕규 김덕배 김명섭
김부겸 김성호 김영춘 김원기 김원웅
김태홍 김택기 김희선 남궁석 문석호
박병석 박승국 배기선 설송웅 송석찬
송영길 신계륜 신기남 안영근 유시민
유재건 이강래 이부영 이상수 이우재
이원성 이종걸 이창복 이해찬 이호웅
임종석 임채정 정대철 정동영 정동채
정세균 장영달 정장선 조성준 천용택
천정배 최용규 홍재형 }}}
}}}}}}

6.3. 광역자치단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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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0px -1px; display: inline-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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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열린우리당 흰색 2차 로고.svg
}}} {{{#!wiki style="margin: -5px -2px; display: inline-table;"<tablebordercolor=#ffd918,#ffd918><tablebgcolor=#ffd918,#ffd918>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강현욱 염홍철 }}}
}}}}}}

6.4. 기초자치단체장

{{{#!wiki style="margin: -7px -10px -10px;"
{{{#!wiki style="margin: -6px 0px -1px; display: inline-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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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이유택 박우섭 백재현 김윤주 김장준
문경현 류봉렬 민종기 조규선 나소열
김재균 김종식 강인형 최충일 진종근
고현석 최형식 서삼석 김종식 김병로
천사령 강기권 }}}
}}}}}}

7. 역대 선거 결과

7.1. 국회의원 선거

<rowcolor=#000,#000>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17대 129 / 243
(53.1%)
23 / 56
(38.26%)
152 / 299
(50.8%)
<nopad> 단독 과반
파일:17대 비례 열우당.jpg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선거포스터

7.2. 전국동시지방선거

<rowcolor=#000,#000> 선거명 광역단체장
(비율)
기초단체장
(비율)
광역의원
(비율)
기초의원
(비율)
4회 1 / 16
(6.25%)
19 / 230
(8.26%)
52 / 733
(7.09%)
630 / 2,888
(21.81%)

7.3. 재보궐선거

<rowcolor=#000,#000> 연도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2004년 6월 0 / 4 3 / 19 6 / 38 0 / 53[151]
2004년 10월 1 / 5 0 / 7 0 / 35[152]
2005년 4월 0 / 6 0 / 7 0 / 10 0 / 21[153]
2005년 10월 0 / 4
2006년 7월 0 / 4
2006년 10월 0 / 2 0 / 4 0 / 1 0 / 2
2007년 4월 0 / 3 0 / 6 0 / 6 1 / 38

8. 평가

참여정부 시절,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 내에서 분당하는 것으로 출발하였다. 국민통합과 정치개혁, 지역주의 타파 등을 내세웠고, 노무현 탄핵 역풍 바람을 타고 17대 총선에서 과반을 거두어 여대야소로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행정수도 이전4대 개혁 입법에 실패하면서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고, 참여정부의 레임덕과 더불어 이후의 선거를 연속으로 참패하였으며, 소속 의원들의 대규모 탈당을 겪고 결국 주도권을 잃은 채로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8.1. 지역주의 타파, 취약한 지역기반

열린우리당은 지역주의를 뛰어넘은 전국 정당화를 창당의 명분으로 내세웠다.[154] 이것은 17대 총선에서 152석이라는 결과를 얻으며 달성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탄핵 역풍에 힘입은 것이라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확보한 결정적 요인은 탄핵 사태였지만 탄핵 역풍의 약발이 끝날 때쯤이 되어서는 결국 스스로의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했다.

문제는 과연 열린우리당이 그렇게 이루고자 했던 지역감정을 뛰어넘었느냐는 점인데, 이에 관해선 최소한 자신들의 집권기간 내에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도리어 영남(특히 PK)이나 신경쓰다 집토끼인 호남과 수도권을 잃었다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였다. 열린우리당은 창당 과정에서 새천년민주당을 분당시켜서 민주당계 정당의 절대적 기반인 호남 출신 정계 인사(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인 동교동계)들과 반목했다는 핸디캡을 안고 출발했기 때문에 지지 기반이 굉장히 취약했다. 의외로 새천년민주당은 분당 이후에도 호남 기반(특히 광주전남권)이 너무 강고했다. 그래서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 승리 이후의 모든 선거에서 전국적인 패배를 기록했다. 하지만 PK의 경우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때 들인 노력이 어느 정도 통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155] 세종시로 대표되는 충청권(특히 충북) 공들이기의 경우도 2008년 총선에선 통합민주당이 8석 중 6석, 열린우리당 탈당파 1명으로 충북 지역을 석권하며 효과를 발휘했다는 평이다.

사실 새천년민주당이 과반수를 못해서 그렇지 전국적으로 보면 영남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한나라당과 비슷하거나 압도하고 있었기에, 선거공학적으로는 굳이 기존 구도를 부술 필요가 없었다. 창당 과정에서 호남 기반이 강했던 새천년민주당을 분당시켰다는 태생적 한계는 열린우리당이 끝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열린우리당 창당은 명분도 실리도 없는 인위적인 호남색 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지지받을 수 있는 지역기반이 사실상 사라진 것이다.[156] 새천년민주당의 잔류 세력이 끝내 살아남아 열린우리당의 최후를 지켜봤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역기반이 중요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민주당이 호남색이 강한 정당이라서 전국정당이 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반대쪽에서 보기엔 지역주의 극복과 전국정당화의 명분으로 호남색을 인위적으로 빼는 것이야말로 신(新)지역주의이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좋든 싫든 노무현이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이 호남이었는데, 그 호남과 결별하고 집권당의 인위적인 분열을 택하는 것이 상식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정당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을 배출한 당이 그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야당이 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또한 처음에는 신당 창당을 반대했으나, 민주당 내분이 격렬하고 개혁세력의 여론이 신당 쪽으로 모이자 입장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무현이 정말로 신당을 원치 않았다면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지 않았거나 아예 무산되었을 것이다. 신당파가 당을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대통령이 따라올 것이라는 믿음[157]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지, 정권 초의 여당에서 신생 미니정당으로 갈 정치인은 없다.

열린우리당을 구성한 세력은 천신정(천정배 - 신기남 - 정동영)을 중심으로 한 호남 신주류[158]+영남 위주의 친노+신진 개혁세력이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주류였던 동교동계 중심의 기존 호남계 세력로부터는 신당을 창당하는 건 자신들을 밀어내고자 하는 것이냐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159][160] 이 과정에서 강준만 등의 정치평론가들의 "안티조선" 움직임이 개입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런 특성이 친 개혁적 의원들(조순형, 추미애, 설훈)을 분당 과정에서 낙오시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분당 찬성 측의 견해를 다룬 글. 대표적인 케이스가 열린우리당에 안 가고 새천년민주당에 남았던 추미애 의원이었다.[161]

호남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대해서 복잡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대북송금특검 논란 당시에 병원에 입원하는 모습으로 사실상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으며, 11월 28일 새천년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지도부의 문안인사를 받고 덕담을 건네는 모습이 9시 뉴스에도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2004년 총선새천년민주당 측은 DJ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DJ는 '대통령 탄핵은 잘못'이라며 새천년민주당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다. 호남 유권자들도 탄핵에 분노해 열린우리당의 손을 들어줬다. 2005년에는 '열린우리당은 내 정치적 계승집단'이라는 덕담을 남기는등 # 열린우리당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였으나, 참여정부레임덕을 보이자 열린우리당 창당을 '민주 진영 비극의 시작'이라고도 이야기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

8.2. 정치개혁·정당개혁

전술했듯이 열린우리당은 새천년민주당을 구태·보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탄생하였고, 정치개혁, 정당개혁, 지역주의 타파 등을 내세웠다. 4대 개혁 입법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언론관계법 개정, 과거사 진상 규명법 제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다만 진보정당과는 분명 다른 노선이었으며, 정치적 스펙트럼은 중도진보나 중도개혁·중도자유주의 정도로 평가된다.

열린우리당은 정당제도의 민주화를 중시하여 정당개혁을 내세웠다.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임할 수 없도록 당정을 분리하였고, 국민참여경선과 기간당원제(진성당원제)를 도입하였다.[162] 그러나 기간당원제에 대한 부작용이 많아서 2006년 말에 폐지하였고#, 민주당계 정당은 한동안 대의원 중심으로 돌아갔다. 열린우리당이 시도했던 진성당원제는 훗날 더불어민주당이 모바일, 인터넷을 통해 당원 가입을 할 수 있도록 문호를 열고, 당내 주요 이슈와 관련하여 책임당원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하면서 상당 부분 실현되었다.

8.3. 당내의 파벌과 계파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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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친노 실용
김근태계
(민주평화국민연대)

김근태
장영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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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식
신기남계
(신진보연대)

신기남
노현송
이원영
친노 금강파
(의정연구센터)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정동영계
정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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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배계
천정배
임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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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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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정세균
한명숙
독수리 오형제
김부겸
이부영
김영춘
계파 역사 (민주당계 · 보수정당) }}}}}}}}}}}}

17대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열린우리당의 난맥상은 심해졌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문제는 152명에 달하는 거대한 여당을 이끌어 나갈 역량을 가진 리더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런 탓에 어떤 정책을 추진하려고 해도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갈등이 빚어질 정도였다.

큰 틀에서는 천정배계, 김근태계 등의 재야계("민주평화국민연대")와 신기남계의 "신진보연대"가 당내 개혁세력으로 한편이 되고, 정동영계의 (구)당권파가 김한길계("바른정치모임")나 "안개모(안정적 개혁을 위한 모임)" 등의 온건/보수세력과 손을 잡고 당내 중도 우파 세력으로 한편이 되어 서로 대립하였다. 이 사이에 친노도 직계 우파 집단(의정연구센터), 개혁당 세력(참여정치연구회), 중진파(이해찬, 정세균, 문희상) 등으로 나뉘었고, 기타 386세대 개혁의원(우상호, 임종석) 등도 나름대로 정치적 지분을 주장하는 형국이었다.

의원모임으로 존재했던 계파만 12계파를 넘고, 위의 분류로만 쳐도 큰 계파만 6~7계파였다. 물론 이런 계파 정치는 의원내각제 국가에선 흔히 보이는 형태이긴 하나, 대통령제에선 아무래도 분열하는 양상으로 보이기 십상이었으며[163] 결국 역량있는 대표의 부재는 당 지도부의 불안정성과 당의 혼란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한나라당박근혜 당시 대표 체제 속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차기 대권을 가동시킨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몸집을 불리기 위해 정체성을 희석했다는 것이다. 당장 영남과 충청의 보수 성향 인사들을 영입한 것만 해도 그렇다. 당장 당헌당규만 놓고 보면 무늬만 민주계 정당이라던 과거의 민주당보다 더 보수적으로 후퇴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특히 후기 "행복 주식회사"라는 비유는, 어디까지나 전략이더라도 정치를 소비자화 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커진 당세도 계파갈등 등이 겹치면서 당 혼란이 가중되어 빛이 바라고 말았다.

8.3.1. 지도부의 단명

열린우리당은 존속기간 동안 당의장이 자주 교체되는 불안정성을 계속 보여왔다. 실제로 열린우리당 역대 당의장들과 그 재임기간은 45개월 동안 11명으로 평균 4개월이다. 당의장을 두 번씩 지낸 정동영정세균을 고려하여 9명으로 계산해도 평균 5개월에 불과하다. 임시 의장들을 제외하고 전당대회로 선출된 의장은 평균 5개월보다 조금 더 재임한 정도다.

가장 길게 당의장에 재임한 인물은 8개월 5일을 재임한 김근태이다. 중복 재임 포함시 8개월 1주일한 정세균(2개월 + 6개월 1주일)과 8개월 한 정동영(4개월 1주일 + 3개월 3주일) 의장 순이다. 정동영은 두 번이나 공식 전당대회(각각 2004년, 2006년)를 통해 선출되었지만, 두 번 다 4개월밖에 가지 못하였다. 도리어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긴급 선출한 김근태 의장이 역대 열린우리당 의장들 중에서 최장 재임했다. 그래봐야 도토리 키재기지만...

거의 대부분의 인물이 재보궐선거 등 선거에 책임을 지고 (그것도 지도부 전체가) 사퇴했는데, 그만큼 당시엔 선거에 나가는 족족 패배할 정도로 암흑기였다. 지도부가 자주 교체되는 만큼 당내 권력기반도 더욱 취약해졌다. 지도부의 불안정성과 혼란은 거의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통일신라 하대 왕위 쟁탈전 과정에서 몇 개월, 몇 년 만에 죽어나간 왕들을 연상시킬 지경이다. 보통은 2년마다 한 번씩 하는[164] 공식 전당대회만 4회를 했다.

개혁이냐 실용이냐를 놓고 당내 싸움만 하는 열린우리당에 실망한 국민들은 등을 돌렸다.[165] 그리고 등을 돌려보니 다른 대안 정당은 하나도 없었고[166][167] 그 결과 1997년 외환 위기를 불러와 정권을 내줬던 보수정당 한나라당이 다시 정권을 되찾는 원동력을 얻게 되었다. 반면 민주당 계열 정당은 2006~2009년과 2012~2015년까지 암흑기를 보냈다.

8.3.2. 넓어진 당내 스펙트럼

'새로운 정치, 잘사는 나라, 따뜻한 나라, 한반도 평화'
- 창당 직후의 열린우리당 4대 기조
"60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주도해온 발전적 보수와 합리적 개혁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한다"
- 2006년, 좀더 중도방향으로 개정한 열린우리당 강령 중

2003년 창당해 2005년 12월 중도 방향으로 한번 더 개정한 열린우리당 강령은 역대 민주당계 정당의 강령 중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포괄적인 강령으로 손꼽힌다. 특히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로 요약되는 후기 강령이 그런 성격이 강했다.[168] 꾸준히 중도화를 지향한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때는 민주질서기본법으로의 개정, 여성부 설치 등 명확한 정책의 언급이 있었지만, 열린우리당 강령의 경우엔 흔한 '지역균형발전'조차도 언급되지 못했다. 차별화가 어려워 창당 기획가들도 고충을 토로했던 열린우리당의 차별성 부족은 정책의 철학적 토대가 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열린우리당은 급격하게 세력이 커지면서 정치적 스펙트럼이 기존 민주당계에 비해서 매우 넓어졌으며[169] 그에 따라 제대로 된 정책적 스탠스를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한 것도 호평받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탄핵정국 이후 의원은 많아졌지만 대부분이 초선의원으로, 출신들을 살펴보면 과거 기업가, 시민사회단체 운동가, 보수정당에 몸을 담었던 사람들 일부, 과거 민주당 계열 등 공통분모를 쉽게 가질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바로 보수정당에 갖다놔도 크게 위화감 없을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는 말이다.[170] 그것이 앞에서 서술했던 열린우리당 와해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386 세력들이 처음 정권을 잡고 뭔가를 해보려 한 시기라 그런지 정책 노선도 왔다갔다하는 경향이 있었고, 일부 동교동계와도 갈등을 겪으며 갈피를 못잡아 당의 와해를 촉진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의 집권을 불러왔다. 길게는 2010년 지방선거[171], 짧게 잡아도 2008년 촛불집회 직전까지 한나라당 압도적 우위의 보수정국이 조성된 것은 열린우리당의 참담한 실패가 불러일으킨 결과인 셈이었다.

9. 당가

윤민석 작곡가가 작곡하였으며 제목은 '행복한 대한민국'이다.
파일:열린우리당당가악보.jpg
마음과 마음 열고 우리 함께 뭉쳐 새 희망을 노래 부르자
믿음과 믿음으로 우리 함께 뭉쳐 새 세상을 열어나가자
국민의 뜨거운 힘을 모아 우리 함께 외치자
국민의 소중한 뜻을 모아 우리 함께 달리자
열린다 우리 세상 행복한 대한민국
웃음꽃 피어나는 행복한 대한민국
(대한민국 열린우리당! 대한민국 새로운 정치! 대한민국 열린우리당! 대한민국 잘사는 나라!)
국민의 뜨거운 힘을 모아 우리 함께 외치자
국민의 소중한 뜻을 모아 우리 함께 달리자
열린다 우리 세상 행복한 대한민국
웃음꽃 피어나는 행복한 대한민국
열린다 평화 세상 행복한 대한민국
통일로 달려가는 행복한 대한민국
행복한 대한민국

10. 기타

11.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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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 (1948.7.~1949.2.)
민주국민당 (1949.2.~1949.11.)
대한국민당 (1949.11.~1951.12.)
장면 내각 민주당 (1960.8.~1961.5.)
박정희 정부 민주공화당 (1963.12.~1979.10.)
유신정우회^[1]^ (1973.3.~1979.10.)
전두환 정부 민주정의당 (1981.1.~1988.2.)
노태우 정부 민주정의당 (1988.2.~1990.2.)민주자유당 (1990.2.~1992.10.)
문민정부 민주자유당 (1993.2.~1996.2.)신한국당 (1996.2.~1997.11.)
국민의 정부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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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미래^[A]^ (2024.2.~2024.4.)
이재명 정부 더불어민주당 (2025.6.~현재)
[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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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003년 재보궐선거 · 불법 대북송금 사건 · 부안사태 · 2003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 행정수도 이전 추진 · 사스 국내 유입 · 이라크 전쟁 파견 동의안 통과 · e지원 도입 · 교육행정정보시스템 도입 · 법학전문대학원 도입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 고건 권한대행 체제 ·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 · 한칠레 FTA · 경부고속철도 1단계 개통 · KTX 운행 시작 · 광주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일본 문화 개방 · 환생경제 · 주 5일 근무 제도 시행 · 수능 9등급제 발표 · 4대 개혁 입법 · 질병관리본부 설립 ·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 파견 · 김선일 피랍 사건
2005년 한국철도공사 발족 ·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 2005년 재보궐선거 · 대연정 파동 · 호주제 민법 개정안 통과 · 530GP 사건 · 삼성 X파일 사건 · 8·31 종합부동산 대책 · 농민시위 · 2005년 APEC 대한민국 부산 정상회의 · 황우석 배아줄기세포 논문
2006년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 · 한일관계에 대한 특별 담화문 · 대포동 2호 발사 사건 · 2006년 재보궐선거 ·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 · 헌재소장 공석 사태 · 남북출입사무소 설립 · 대전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북한 1차 핵실험 · 방위사업청 개청 · 대추리 사태 · 11.15 부동산 대책 · 사학법 재개정 논란
2007년 한미 FTA 타결 · 2007년 재보궐선거 · 행정중심복합도시 착공 · 남북열차 시험운행 · 참여정부 청와대 기자실 통폐합 논란 ·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 2007 FIFA U-17 월드컵 대한민국 · 참여정부 평가포럼 · 10.4 남북공동선언 · 신정아 게이트 · 수능 등급제 시행 · 삼성 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 · 제17대 대통령 선거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 호주제 폐지 ·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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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3년 11월 6일 온라인 투표를 통해 당 로고가 정해졌다. #[2] 2006년 4월부터 해산 전까지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한해 사용할 방침이었지만, 당이 해산될 때까지 위의 로고와 병행하여 쓰이게 되었다. #[3] 정식 명칭은 Open Our Party이나, 영미권에서는 혼동 방지를 위해 Uri Party라는 표기를 자주 사용하였다.[4] "열린"과 "우리"가 순우리말이라서 이름에 한자는 '당'밖에 없다. 중국에서는 "开放国民党", 일본에서는 "開かれたウリ党" 등으로 표기한다.[5] 창당준비위원회 신고번호는 제292호.[6] 2003년 5월 16일 신당추진모임 발족
9월 4일 통합신당 창당주비위 결성
10월 22일 당명 열린우리당 선정
10월 27일 창당발기인 대회, 창준위 결성
10월 30일 선관위에 창준위 신고
11월 8일 열린우리당 창준위 공고
11월 11일 창당대회를 열고 공식 출범 선언
11월 17일 선관위에 정당 등록
11월 24일 공고.
[7] 창당과정에서 불법자금이 유입된 일 때문에 당사를 이전했다. # 이 시기는 노무현 탄핵 사건 정국이며, 얼마 후 한나라당도 천막 당사로 옮긴다.[8] 열린우리당의 후신격인 더불어민주당 서울특별시 당사가 여기에 있었으나, 현재는 이 건물이 철거되어 없어졌다. 그 후 이 자리에 2023년에 영등포반도아이비밸리가 들어섰다.[9] 국회의장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정당 대표로서의 의장을 의미한다. 다만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냈던 김원기제17대 국회 전반기 때, 그리고 정세균문희상도 훗날 제20대 국회에 각각 전·후반기 때 진짜 국회의장이 되긴 했다. 비대위원장(임시 의장) 시절까지 넓혀보면 제17대 국회 후반기 때 역시 국회의장을 역임한 임채정이 있다.[10] 탄핵 사태가 마무리된 후 '수석 당원' 자격으로 입당했다. 당 의장직을 겸임하지는 않았는데, 대한민국 제6공화국 이래 최초로 여당 총재직을 현직 대통령이 당연직으로 겸임하지 아니한 사례이다. 이후 임기 도중에 탈당했다.[11] 등록 당시 당원 수는 32,346명이었다.[12] 훗날 유시민이 만든 국민참여당과 유사하다.[13] 맨 끝 글자인 '정당'을 뜻하는 '당(黨)은 제외.[14] 劣友黨 : 열등한 친구들의 무리, 또는 劣愚黨 : 못나고 어리석은 이들의 무리를 뜻한다.[15] 비슷한 예로, 우리은행이 아닌 다른 은행 내부에서 우리은행(Woori Bank)을 일컫을 때는 '우리 은행'(our bank)과의 혼돈 때문에 '유리은행' 등으로 변형해서 일컫기도 한다.[16] 민주당을 '만주당'이라고 자조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17] 그리고 약 10여년 뒤에는, 반대로 민주당계 지지층이 그 당시 보수 정당이 사용했던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이라는 명칭의 공식 약칭인 한국당, 통합당 대신 자한당, 자유당, 미통당이라는 비공식 약칭으로 극단적이지 않으면서도 멸칭으로 느껴지게 하는 약칭을 사용하는 식으로 그대로 돌려주게 됐다. 특히 미통당은 21대 총선 참패로 지지층조차 자조적으로 썼다는 점까지 유사하기에 결국 당명을 국민의힘으로 바꾸고 나서야 이런 식의 멸칭 조롱이 줄어들었다. 그리고는 국민의 짐, 내란의 힘이라는 멸칭이 다시 생겨버렸다.[18] 특히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터진 홍삼게이트, 권노갑 상임고문이 김근태 대선 경선 후보에게 뒷돈을 찔러준 사건 등은 이런 이미지를 더해주었다.[19] 사실 열린우리당 창당 이전만 해도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은 대북 문제 등을 제외하면 정책적인 성향이 비슷했다. 삼김이 한국 정치판을 꽉 쥐고 있던 시기라, 아예 출신 지역에 따라 정당을 선택해 가는 경우도 많았다.[20] 여기에 한 가지 떡밥이 더 있다면 이라크 전쟁 파병 문제. 처음엔 유시민을 위시한 파병 반대 목소리가 컸지만, 끝에 가서 친노 그룹은 파병 찬성으로 선회한다.[21] 호남 신주류(천신정)의 거점은 호남 구주류(동교동계)가 장악하고 있던 광주광역시전라남도가 아닌 전북특별자치도수도권 지역이었다. 하지만 호남 구주류는 호남 신주류가 여기서 더 나아가 민주당의 당 내 패권이 걸려 있는 호남지역을 모조리 차지하려 한다고 의심했고, 이는 어느 정도 팩트이기도 했다. 결국 이 쇄신갈등의 핵심은 호남패권을 둘러싼 호남 구주류와 호남 신주류의 갈등이 메인이었고, 여기에 지난 대선에서 후단협 사태 등으로 호남 구주류에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진 친노 그룹이 가담한 형국이었다.[22] 1995년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뒤 기존의 민주당 잔류파가 개혁신당과 합당하여 만든 정당으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된다.[23] 한때 한나라당 소속이었는데, 이는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비례대표로 서울시의원에 당선된 뒤 1997년 신한국당-민주당 합당이 일어나 소속 정당이 한나라당으로 바뀌었기 때문. 당시나 지금이나 비례대표는 탈당하면 직을 잃기 때문에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무렵까지 한나라당에 잔류했다가 나중에 새정치국민회의로 넘어간 것이다.[24] 그로부터 약 5년 후 다시 한 배를 타게 된 두 사람은 화해했다. #[25] 1차 신당 결의엔 참여하나 노무현의 만류로 신당파의 결의가 무산되고, 그 후 천신정의 당권 협상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며 이탈한다.[26] 굳이 꼽자면 제2공화국민주당신구파 갈등으로 인해 신민당이 탄생했던 적이 있긴 한데, 당시엔 의원내각제라서 대통령 윤보선이 내각 구성 권한이 없는 사실상 허수아비 대통령이었고, 실세는 장면 국무총리였다는 차이는 있다.[27] 이들 외에도 김홍신 전국구 의원, 김혁규 경상남도지사 등이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였다.[28] 꼬마민주당 출신이 대부분으로, 김부겸, 김영춘(민주당 유일의 상도동 직계이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5명의 의원들을 말한다. 사실 "독수리 5형제"라는 별명은 철새를 완곡하게 표현한 단어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기존의 한나라당과 줄곧 충돌했었다.[29] 이쪽도 독수리 오형제와 마찬가지로 원래 한나라당 출신이었다.[30] 지역구 한정으로 새천년민주당보다 의석 수가 약간 더 많았다. 이때 비례대표 의원 몇몇도 탈당했는데, 비례대표의 경우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하기 때문에 당초보다 의석 수가 적게 나온 것.[31] 김원기는 이후 제17대 국회의 전반기 국회의장이 된다.[32] 민주당은 탄핵이 기각된 후에도 집요하게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대선빚 변제를 요구했으나,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모두 계속 무시로 일관하면서 끝내 저 44억을 변제하지 않았다.[33] 손석희 문서에 (흔히 "알면서 왜 하셨습니까?"로 알려진) "그렇다면 안하면 될거 아닙니까?" 참조. 막판에 자유민주연합이 합류한 것을 두고 내각제 개헌 가능성도 제기된 상황이었다. 안그래도 개헌 역시 탄핵만큼 전체 의석의 2/3가 필요했다.[34] 이후 19대 국회의원 당선[35] 이후 18,21대 국회의원 당선[36] 이후 20,21대 국회의원 당선[37] 이후 20,21대 국회의원 당선[38] 이후 서구청장 당선[39] 이후 연수구청장 당선[40] 이후 20,21대 국회의원 당선[41] 이후 동구의원 당선[42] 이후 부천시장 당선[43] 이후 21대 국회의원 당선[44] 이후 20대 국회의원 당선[45] 이후 20,21,22대 국회의원 당선[46] 이후 김포시장 당선[47] 이후 전남교육감 당선[48] 이후 상주시장 당선[49] 이후 20대 국회의원 당선[50] 정동영"60대 이상은 투표 안 해도 된다"만 아니었다면 180석도 가능했다는 분석도 있다. 초반 여론조사는 한나라당 50석 초반, 열린우리당 200석 예상도 있었다. 문제는 충청도를 거의 석권한 상황에서 당시 열린우리당의 압도적 승리에 중요한 승부처가 바로 영남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이 영남 지역 역시 탄핵 역풍이 강하게 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한나라당이 너무 쪼그라들면 안되는데"라는 여론이 뒤엉킨 상황이었다. 이때 흔들리는 표심을 말끔히 정리해준 게 정동영의 노인 폄하발언이라는 견해가 많다. 다만, 당시 영남의 지역주의가 만만찮게 견고했던 만큼, 이 발언이 없었어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나라당으로의 영남 표심 결집은 예견된 일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51] 참고로 열린우리당의 후신 민주통합당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도 선거 직전 노원구 갑에 출마한 나꼼수 출신의 김용민 후보의 8년 전 성인 인터넷방송에서의 여성, 노인 폄하성 발언이 발굴된 것이 큰 악재 중 하나로 작용하면서 단독 과반도 가능하다던 선거 초반의 예상에서 크게 물러선 127석 획득에 그쳤다. 물론 김용민의 이 발언이 발굴되자 이 선거 강남구 을에서 고군분투하던 정동영 후보에게 완벽하게 불똥이 튀어 직전 대선후보였던 정동영은 한낱 정치신인이던 김종훈 후보에게 완패했다. 그 김종훈이 4년 후 같은 지역구에서 정동영보다 체급이 훨씬 낮은 전현희 후보에게 완패한 것을 생각하면, 정동영의 노인 발언이 그의 정치인생에 얼마나 커다란 주홍글씨로 남아 있는지 알 수 있다.[52] 열린우리당이 창당했을 시기 노무현이 야3당 대표를 불러 회담을 가진 적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김종필이 빨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53]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행정수도법이 열린우리당이 소수당이던 시절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2003년 12월 29일, 해를 넘기기 전에 신행정수도특별조치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었다. (여야합의. 찬성167, 반대13, 기권14.)[54] 1. 국가보안법 폐지 및 대체, 2. 과거사 진상규명 법안(과거사법), 3. 사립학교법(사학법), 4. 언론개혁법.[55] 임채정은 이후 제17대 국회 하반기 의장이 된다.[56] 이런 정세균의 성향은 이후 민주당 대표와 국회의장이 되는데 큰 자산이 된다. 당장 옛 열린우리당 인사 중에서 정동영을 빼면 원수진 사람이 없을 정도.[57] 이는 사실 집권여당들 모두가 겪고 있는 징크스이기도 하다.[58] 이후 부산광역시장 당선[59] 이후 국회의원 당선[60] 이후 대전시장 당선[61] 이후 청주시장 당선[62] 이후 국회의원 당선[63] 이후 경남도지사,국회의원 당선[64] 이후 종로구청장 당선[65] 이후 도봉구청장 당선[66] 이후 서대문구청장 당선[67] 이후 서울시의원 당선[68] 이후 국회의원 당선[69] 이후 해운대구청장 당선[70] 이후 인천시의원, 동구청장 당선[71] 이후 남구청장 당선[72] 이후 계양구청장 당선[73] 이후 광주시의원,동구청장 당선[74] 이후 서구청장 당선[75] 이후 국회의원 당선[76] 이후 국회의원 당선[77] 이후 동구의원 당선[78] 이후 수원시장,국회의원 당선[79] 이후 성남시장,경기도지사,국회의원,대통령 당선[80] 이후 경기도의원 당선[81] 이후 동두천시장 당선[82] 이후 국회의원 당선[83] 이후 경기도의원 당선[84] 이후 오산시장 당선[85] 이후 시흥시장 당선[86] 이후 국회의원 당선[87] 이후 김포시장 당선[88] 이후 광주시장 당선[89] 이후 포천시장 당선[90] 이후 원주시장 당선[91] 이후 횡성군수 당선[92] 이후 평창군수 당선[93] 이후 충북도의원 당선[94] 이후 천안시장 당선[95] 이후 태안군수 당선[96] 이후 연기군수 당선[97] 이후 논산시장,국회의원 당선[98] 이후 홍성군의원 당선[99] 이후 전북도지사 당선[100] 이후 정읍시장 당선[101] 이후 남원시장 당선[102] 이후 장수군수 당선[103] 이후 임실군수 당선[104] 이후 담양군수 당선[105] 이후 목포시장 당선[106] 이후 국회의원 당선[107] 이후 경북도의원 당선[108] 이후 고성군수 당선[109] 이후 국회의원 당선[110] 이후 거제시장 당선[111] 열린우리당의 광역단체장 당선인은 전북지사 김완주가 전부였다. 민주당은 전라남도지사박준영, 광주광역시장박광태를 건지는 데에 그쳤고, 나머지는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다.[112] 그나마 대전광역시장의 경우는 한나라당 출신의 염홍철의 인기가 좋았기에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둔 상황에서 부시장직을 사퇴하고 한나라당 후보로 나선 박성효에게 근소하게 앞서는 편이라 대전광역시만큼은 그래도 건질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막판에 박근혜피습을 당하면서 "대전은요" 발언을 통해서 보수층이 결집해 결국 떨어진다.[113] 부산광역시친노의 사실상 정치적 고향으로, APEC 회담도 개최하는 등 참여정부가 상당히 공을 들인 지역이었다.[114] 민주노동당이란 정당 자체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2006년 지방선거 광역의회 정당 비례(12.06%)에서도 거의 유지되었다. 심지어 2004년 여름에는 25%까지 육박하는 여론조사도 있었다니 열린우리당을 대체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제17대 대통령 선거 이후 국가보안법 폐지와 통일론이라는 NL적인 이슈에만 몰입했고, 이로 인해 PD계 진보 세력(노회찬, 심상정, 조승수)이 반발,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당연히 국민 여론은 민노당에 등을 돌리고, 서서히 진보신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후 민주노동당은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에서 탈당한 PD계와 함께 통합진보당으로 통합됨에도 불구하고,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으로 몰락한다. 이후 심상정, 노회찬 등의 PD계는 다시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으로 분당했고, 이정희 등 그나마 남은 NL계들은 이후 통진당이 해산당하며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은퇴한다.[115] 노무현 탄핵의 선봉에 선 조순형이 의원직을 상실한 친노신계륜의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재기에 성공했다.[116] 두 후보가 지지율 1, 2위였고, 범여권에선 고건 전 총리가 3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고건 전 총리는 2007년 1월 16일, 불출마를 선언한다.[117] 고건 총리는 전라도 출신이어서 대권을 노리기 힘들다고 판단해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로 유명한 민주평통 연설에서 고건 前 총리를 저격한 것도 있었다.[118] 이후 박근혜가 개헌을 제안한 예를 보면 알다시피, 대통령이 주도하는 개헌 제안은 사실 찬성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 임기 마칠 때쯤이면 유력한 대선주자들이 존재하고, 대권이 눈앞에 있는 그들로서는 판깨기가 달갑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반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약을 내걸고 당선되더라도 현직 대통령의 개헌 제안은 무난히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운 구조이다. 후일 박근혜 정부에서 깜짝 국무총리로 지명되었다 '식민지배는 하늘의 뜻' 망언으로 낙마한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창극이명박근혜 분열을 획책하려는 노무현의 기획이라고 비난했는데, 정작 박근혜가 발언한 개헌의 경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는 바람에 하루만에 묻혔다.[119]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 의장(2003.05.16. ~ 2003.09.04.)
'국민참여통합신당' 창당주비위원장(2003.09.04. ~ 2003.10.27.)
'열린우리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2003.10.27. ~ 2003.11.11.)
'열린우리당' 공동의장(2003.11.11. ~ 2004.1.29.)
[120] 원내교섭단체(국민참여통합신당) 시절 선출.[121]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 의장(2003.05.16.~2003.09.04.)
'국민참여통합신당' 창당주비위원장(2003.09.04.~2003.10.27)
'열린우리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2003.10.27~2004.01.29)
[122] 2004년 1월 11일, 전당대회 1위로 인한 의장 선출. 통일부장관 임명으로 인한 사퇴.[123] 2004년 6월 8일 사퇴[124] 2005년 1월 3일 사퇴[125] 2005년 1월 3일 사퇴[126] 2005년 1월 3일 사퇴[127] 경선 승리, 4대 개혁 입법 실패로 인한 사퇴.[128] 전당대회 2위 상임중앙위원, 정동영의 사퇴로 인한 승계. 아버지 신상묵의 친일파 논란으로 인한 사퇴.[129] 전당대회 3위 상임중앙위원, 신기남의 사퇴로 인한 승계. 4대 개혁 입법 실패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인한 사퇴.[130] 정책위의장 상태에서 천정배 원내대표의 사퇴로 인한 직무대행.[131] 이부영의 사퇴로 인한 임시집행위원장 선출.[132] 단독 입후보로 인한 추대, 산업자원부장관 임명으로 인한 사퇴.[133] 전당대회 1위로 인한 의장 선출, 열린우리당의 2005년 하반기 재선거 참패로 인한 사퇴.[134] 2005년 6월 8일 사퇴[135] 2005년 10월 28일 사퇴[136] 2005년 10월 28일 사퇴[137] 2005년 10월 28일 사퇴[138] 2005년 10월 28일 사퇴[139] 2005년 10월 28일 사퇴[140] 문희상의 사퇴로 인한 임시집행위원장 선출(직무대행), 산업지원부장관 임명으로 인한 사퇴.[141] 2006년 1월 6일 사퇴[142] 2006년 1월 6일 사퇴[143] 정세균의 사퇴로 인한 임시집행위원장 선출(권한대행).[144] 경선 승리, 임기를 마친 후 탈당.[145] 전당대회 1위로 인한 의장 선출,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참패로 인한 사퇴.[146] 2006년 6월 4일 사퇴[147] 2006년 6월 4일 사퇴[148] 전당대회 2위, 정동영의 사퇴로 인한 비상대책위원장 임명.[149] 경선 승리.[150] 전당대회로 인한 선출(합의추대).[151]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152]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153]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154]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주의를 타파하는 것을 평생의 정치적 숙원으로 삼았다. 대통령이 되기 전 민주당 입장에서 거의 험지가 다름없는 부산광역시에 출마를 꾸준히 했고, 집권 기간 중 대연정 제안을 통해 한나라당에 내각 일부를 양보하는 조건으로 선거법 개정을 통한 특정 정당의 지역 독점화를 막으려고 했다. 열린우리당 창당 역시 호남에서 지지세가 갇혀 지역주의색이 강한 새천년민주당의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창당했다.[155] 2012년 18대 대선 기점으로 PK와 TK의 표심 차이가 현격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156] 그나마 시군구별로 봤을땐 살릴만한 곳이 극소수로 있긴 했다. 대표적으로 이용희 지역구였던 충청북도 남부권인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지역. 17대 총선 이후론 당시 충북 남부3군은 이용희의 인물론이 막강한 때였다.[157] 그보다는 대통령이 배후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당시 신당파 세력의 관록만으로는 창당이 불가능했다. 삼김시대 이후엔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신당을 만들어서 이득을 보는 능력자가 많지 않다. 그나마 현직 대통령을 끼고 창당했기에 어느정도 가능한 일이었다.[158] 그러나 친노와 손을 잡았던 호남 신주류 정동영, 천정배 등은 이후 2016년에 안철수, 동교동계와 손잡고 국민의당으로 이적했으니 참으로 역사란 아이러니하다. 20대 총선 당시에는 꽤나 선방했으나, 분당과 합당을 거치며 점점 세를 잃더니, 21대 총선에서 민생당이 참패하면서 모두 낙선한다. 이후 20대 대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다.[159]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송금특검법 수용은 당시 구주류측에서 사실상 DJ+동교동계와의 결별 선언이나 마찬가지라는 평을 받았다. 적어도 당대에는 그러했고, 실제 DJ는 당시 병원에 입원했는데, 세간엔 화병 때문 아니냐는 소리도 나돌 정도였다.[160] 사실 대북송금특검의 경우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통치행위의 일환이었다고 표명만 했다면 자신은 수용 안했을텐데, 김대중 대통령 본인이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제안을 수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게, 인수위 시절부터 대북송금문제는 털고 가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건 어찌보면 정권 초기에 전 정권과의 결별과 차별화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후단협으로 인한 DJ계와의 앙금이 원인이었다고 보는 측면도 있다.[161] 21대 총선 불출마 선언 후 본인의 지역구였던 광진구 을고민정에게 넘겨줬고,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법무부장관을 역임했으며 22대 총선에서 경기 하남시 갑에 당선되어 원내 복귀에 성공했다.[162] 진성당원제를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건 2000년 창당된 민주노동당이다. 이후 2002년에는 개혁국민정당에서도 기간당원제를 도입하며, 2005년에는 한나라당에서 책임당원제를 도입하여 국민의힘 책임당원제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은 권리당원제를 운영중이다.[163] 이런 계파 분열 양상과 관련해 여당 내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점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한 100분 토론 대담에서, 자신도 군부독재3김 권위주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 타성에 젖어 때때론 '당이 일사불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다음에 바로 '아니지, 세상이 바뀌었지'라는 생각이 든다며 이게 좀 더 나은 정치문화로 나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라는 뉘앙스의 회한을 털어놓기도 했다.[164] 다만 다른 당도 2년 꽉 채우는 경우는 많진 않다.[165] 특히 해산 직전인 2007년 8월에는 (이하 리얼미터 조사 기준) 정당 지지율이 한자릿수였고, 8월 2주차에는 5.6%, 8월 3주에는 무려 4.8%였다.[166] 민주노동당은 2006년 일심회 사건으로 종북논란이 일었으며, 자유민주연합새천년민주당은 지역 조직은 있지만 대중성이 너무 약했으며, 충남과 전남을 넘어서지 못했었고, 열린우리당이 씌워놓은 구태정당 이미지가 여전히 강했다. 거기다 노무현 탄핵 역풍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맞아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으며, 텃밭 사수도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결국 그 정당들을 다 빼고 나니 지지할 만한 정당이 한나라당밖에 없었던 상황이다.[167] 물론 당시 제3 정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이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여서 홈그라운드인 호남을 넘어서서 수도권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박주선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고, 이후 7월 말 서울 성북구 을 재보궐선거에 조순형을 내보내 당선시키는 등 많은 노력을 했으나 대선에서 말아먹는다.[168] 포괄적이란 표현은 긍정적인 언급만은 아닌데, 스펙트럼이 넓어 정당의 지향점이 모호했다는 의미에 가깝다.[169] 이는 민주당계의 또 다른 암흑기 2013~2015년의 부진 원인이기도 했다. 대규모 당 파탄 사건 중 하나인 2015년 말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사건이 역설적으로 민주당계 정당의 계파 갈등 해소에 기여했고, 2016년 총선에서 갈라진 민주당계 정당들(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은 둘 다 선전을 한다.[170] 반대로 공천만 받을 수 있으면 민주노동당 당적으로 출마하고 싶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상당수의 열린우리당 소속 정치인들이 대학교 학생운동 출신에서 충원되었다는 점에 원인이 있을 듯 하다.[171] 재보궐까지 합치면 좀 더 앞당겨졌다.[172] 예전에 존재했던 정당의 이름을 갖다썼지만 그 정당의 정통성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정당은 많다. 그 예로 신민주당(1985년), 신민주당(1993년), 한나라당(2012년), 민주당(2014년), 한나라당(2014년), 통합민주당(2016년), 새누리당(2017년) 등이 있다.[173] 친노, 천신정 등.[174] 권선택, 박승국, 이명수 등.[175] 유시민, 김원웅 등.[176] 김한길계 등.[177] 김영춘, 안영근, 이우재, 이부영, 김부겸 등.[178] 비노 인사.[179] 허경영 등.[180] 허경영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