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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05:27:38

탄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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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추후 행보3. 목록4. 낙선자5. 관련 문서

1. 개요

핵 + 돌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탄핵 역풍을 타고 얼떨결에 당선된 열린우리당 초선 정치신인 국회의원들을 가리켜 (주로 낮추어) 부르던 별칭. 당시 탄핵 역풍으로 인한 국민들의 반 한나라당 정서는 고정 지지층이던 중장년층까지 흔들릴 정도로 심대한 정치적 타격을 한나라당에 입혔고 이로 인해 스윙보트 지역은 한나라당 후보들이 거의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당시 열린우리당은 국민들의 강한 지지를 받았고 난닝구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시기에는 분당으로 인한 구 민주계+호남계 중진들의 대거 이탈로 세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국회의원 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공천 문턱을 어느 정도 낮췄고 이로 인해 예전 같으면 당내경선에서 탈락할 비주류계 혹은 정치 신인들이 대거 공천을 받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중에는 계파색이 없던 86세대 학생 운동권 이력을 지닌 정치신인들이 많았고[1] 17대 총선을 시작으로 86세대 정치인들이 대거 입문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명의 당선자를 배출했는데 이 중 초선의원의 수가 정확히 108명이라 108번뇌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노회찬 국회의원은 탄돌이를 빗대 모 TV토론에서 "열린우리당은 길 가다가 지갑 주웠다"고 복권 당첨된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사실 열린우리당 안티 측에서 멸칭으로 쓰이던 표현이었지만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봉주 전 국회의원 같은 경우는 본인의 저서에서 스스로를 "탄돌이"라 지칭했고 그 표현을 꺼리지 않고 즐긴다고 썼다. 고로 일부에선 애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한편으론 참여정부를 말아먹은 주역이다. 이들이 당론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놀아나는 통에 열린우리당은 121석밖에 없던 한나라당에게 휘말리면서 법안 통과에 번번히 실패해 국정동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대에는 국회선진화법도 없어 여당 과반이면 문재인 정부 말기 21대 국회처럼 뭐든지 할수 있는 상태였다.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도 비슷한 비칭이 존재하는데 다음 선거인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도권 지역구의 한나라당 후보들이 뉴타운 공약을 내걸었고 이 열풍을 타고 당선된 수도권의 한나라당 초선 의원을 가리켜 타운돌이라는 비칭이 생겼다.[2] 다만 이 명칭은 그리 오래 쓰이지 못했다. 부동산 시장 침체로 인해 뉴타운 대다수가 백지화된 데다가 용산 참사가 일어나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의 지방의회와 지방자치장 자리들이 대거 민주당으로 넘어가면서 뉴타운 사업의 추진 동력이 약해지는 바람에 이들의 인기는 서서히 가라앉았으며 결국 이들 중 대부분은 19대 총선에서 낙선했고[3] 한술 더 떠 뉴타운으로 입주한 젊은 유권자들이 이후 민주당의 핵심 지지기반이 되어 주면서(...) 대부분 이후 국회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4] 이들 중 22대 국회에서도 현역인 이들은 윤상현, 강승규, 권영진 이 3명뿐이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종인 미래통합당 선대위원장에 의해 코돌이라는 말이 생겼즌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더불어민주당이 결집해 여당연합이 단독 180석을 차지하는 쾌거를 누렸기 때문이다. 다만 이낙연 대표가 무능한 모습을 보이면서 이들이 거대여당의 힘을 발휘하기는 커녕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여 이재명이 당권을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탄돌이 출신들 중에서 17대 총선부터 22대 총선까지 단 1번의 낙선도 없이 내리 6선을 한 인물은 조정식, 조경태 둘뿐이다.

미국에도 이와 비슷한 "워터게이트 아기들(Watergate Babies)"라는 말이 있는데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사임한 직후 열린 1974년 중간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민주당 의원들을 일컫는 말이다.[5]

2. 추후 행보

17대 임기 종료 후 탄돌이들의 행보는 여러 갈래로 나뉜다.

3. 목록

4. 낙선자

물론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고도 낙선했으나 이후 국회 등원에 성공한 후보들도 있다.

이 중 최인호와 김두관은 지역구를 변경했으며, 정호준, 신동근, 박정은 같은 지역이나 지역구가 개편되었다. 김진애, 김현권은 지역구 대신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낙선자 중 기초자치단체장으로 당선된 후보도 있다

그외 나무위키에 문서가 존재하는 낙선자

5. 관련 문서


[1] 당시 열린우리당의 세력규합 축은 친노정동영계, 손학규계, 정세균계 등이 중심이었고 일부 김근태계 정도가 추가된다. 다만 탄돌이들은 당선 후 당직 활동에 끌려다니면서 이들 계보에 분류상 등어 있을 뿐 이들을 통해 정계에 데뷔한 정치 신인이 다수로 계파색은 정동영, 손학규, 정세균의 당내 위상 하락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탄돌이들의 절대 다수는 박스떼기로 알려진 2007년 경선 등 당내 주요 계파갈등에 마치 조폭 말단처럼 강제 동원되어 계파 수장의 지시에 따라 끌려다닌 흑역사가 각자 다 있다.[2] 타운돌이의 원조는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재직 당시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북가좌동 일대에 가재울뉴타운을 유치하여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랜기간 보수정당의 험지였던 서대문구 을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던 정두언이다.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비토 정서가 강했던 이 선거에서 탄핵 역풍을 뚫고 보수정당의 험지 서대문구 을에서 그가 당선된 것은 그 당시만 해도 한나라당의 아성이던 부산 사하구 을에서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당선된 조경태 못지않게 화제가 되었다.[3] 다만 영남 지역 새누리당 의원들을 합치면 여전히 18대에서 초선으로 당선된 사람들은 19대 총선에서도 당선된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으며 일부 인사들은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잠깐 국회로 돌아오게 된다.[4] 특히 정두언은 정권심판론이 강했던 2012년 19대 총선 때도 자신의 지역구를 사수했지만 자신이 밀어붙였던 가재울뉴타운에 이 무렵부터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30, 40대가 무더기로 입주하기 시작하면서 2016년 20대 총선에서 김영호에게 처음으로 패했고 이로 인한 우울장애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3년 후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5] 당시 상원에서 4석, 하원에서 49석을 늘렸는데 얼핏 보기엔 그리 대단할 것 없어 보이지만 당시 선거이전부터 양원 모두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한 상태였기에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대승이었다. 하원에서는 민주당 의원 수가 공화당 의원의 2배가 넘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6] 18대에선 돌아온 터줏대감에 밀려서 공천심사에서 탈락했고 박원순의 권유로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맡았다가 2014년에 알선수뢰를 저지른 것이 밝혀지며 구속당했다. 실형이 끝난 지금은 야인이다. 자세한 건 이 링크를 참조.[7] 19대에선 김미희에게 밀려 탈락했고 이후 경기도 사회통합부지사에 도전했으나 역시 탈락했다.[8] 학력을 초졸에서 고졸로 위조하여 17대 국회의원 중 가장 먼저 의원직을 상실하였다.[9] 18대에서 원유철에게 밀려 낙선했고 이후 알선수재,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2013년 사면, 복권되고 2014년 6회 지방선거에서 당시 현직 평택시장이던 김선기에게 공천에서 밀리며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가 선거 4일전 김선기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직에서 사퇴하였다.[10] 19대에서 공천심사에서 탈락한 뒤 안철수와 계속 뜻을 같이하며 활동해 왔다. 20대에선 국민의당 후보로 야권 단일화까지 파토내며(...) 재선에 도전했으나 장렬하게 낙선했다.[11] 18대 불출마 후 19대에서 다시 출마했으나 큰 차이로 낙선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12] 이 부류에 속한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18대 총선에서도 생환했다. 그러나 19대 총선에서 한때 자신의 수족이었던 새누리당 이우현에 밀려 낙선. 이후 시의원 선거와 관련된 비리 혐의로 인해 징역형을 선고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발을 떼고 형기가 끝난 후 사업가로 직업을 바꿨었다. 이후 2024년 22대 총선에서 다시 용인시 갑에 무소속 출마했지만 4위로 또 낙선했다...[13] 여성 장애인 비례대표로 화제가 된 그 인물 맞다. 하지만 이 분은 19대에서 부산 금정구에 출마했으나 금정구의 터줏대감인 김세연에게 더블스코어 차이로 낙선했고, 이루 공천로비에 연루되며 징역형을 선고 받음으로써 사실상 정계에서 아웃되었다.[14] 4년 후 제7회 지방선거에도 자유한국당 공주시장 후보로 출마하나 이때는 더불어민주당 김정섭 후보에게 패배해 낙선했다.[15] 국정농단 사태 당시 탈당 후 바른정당으로 갔다가 1년만에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으며,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한지 반년 후에 지방선거 공천권 문제로 당 지도부와 다투다가 다시 탈당했다. 이후 10년만에 더불어민주당 복귀을 추진하다가 친문 세력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했고, 결국 당적을 갖지 못한 채 무소속으로 있다가 20대 국회의원 임기 종료 후 사실상 정계 은퇴 상태다. 다만 은퇴 당시 나이가 80이 다되가는 고령이긴 했다.[16] 단, 권선택은 18대에도 자유선진당 공천을 받아서 당선됐다. 19대 때 자유선진당 후보로 출마하나 새누리당강창희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고 이후 민주당에 돌아온 뒤 2014년에 대전시장이 되었다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2017년 11월에 시장직을 상실했다. 그리고 제종길은 2014년에 안산시장이 됐다.[17] 이시종, 이광재는 2008년에 통합민주당 공천 받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도지사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18] 아무래도 같은 기초단체장 일지라도, 도 산하 시에 비해 특별시/광역시 산하 자치구의 경우 자치권이 약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긴 하다. 이 경우는 과거에 구청장을 했었기 때문.[19] 단, 20대 때는 잔류한 3선 의원들의 경우 국민의당 돌풍, 컷오프 등으로 인해 대거 낙천, 낙선했으며 국민의당으로 넘어간 의원들은 4선 고지를 밟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2017년 국민의당 원내대표인 광주 광산 갑의 김동철 의원, 전남 여수 을의 주승용 의원이 있다.[20] 원래 지역구는 경기 수원 영통(이후 수원 정으로 개편)이나, 2014년 지선 당시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도지사 선거에 낙선해 정치 생명이 불투명해졌으나, 본인의 지역구인 수원 정에 박광온 전 MBC 기자가 당선되었고, 이후 2016년 영통구 일부(영통2동, 태장동)와 권선구 일부(세류1동, 세류2동, 세류3동, 권선1동, 권선2동, 곡선동)로 구성된 신설 지역구 수원시 무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부활한다.[21] 단, 우상호와 윤호중, 정성호는 탄돌이라고 보기 미묘하다는 지적도 있다. 우상호는 이미 16대때 새천년민주당 중진 김상현을 제치고 서대문 갑에 공천된 경력자기 때문. 윤호중, 정성호도 마찬가지. 16대 총선 때는 낙선했고, 17대 탄핵 역풍을 타고 들어온 초선의원들인지라 시각에 따라 탄돌이로 분류될 수도 안될 수도 있다.[22] 이인영 역시 16대 때 첫 공천을 받고 낙선 했다가 17대에 당선된 케이스. 사실 우상호, 이인영은 원래 6월항쟁 당시 연세대-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이름을 날린 386의 대표 주자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23] 다만 우상호는 원내대표 당시 탄핵 정국 시기라 야당 원내대표였다.[24] 우상호-우원식과 이인영 사이에는 역시 3선인(18~20대) 홍영표가 원내대표를 맡았다.[25] 애초에 김형주는 광진구 을이 아닌 광진구 갑에 지원했다.[26] 오히려 당이 총선 국면 때 정 의원의 컷오프 하나로 지지도가 5%나 하락하는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27] 출구조사에서는 1위로 당선이 예측되었지만, 개표 결과 한나라당 이범래 후보에 역전 당하면서 패배했다.[28] 출구조사에서는 1위로 당선이 예측되었지만, 개표 결과 한나라당 안형환 후보에 역전당하면서 패배했다.[29] 출구조사에서는 1위로 당선이 예측되었지만, 개표 결과 한나라당 신영수 후보에 역전당하면서 패배했다.[30] 출구조사에서는 1위로 당선이 예측되었지만, 개표 결과 한나라당 원유철 후보에 역전당하면서 패배했다.[31] 출구조사에서는 1위로 당선이 예측되었지만, 개표 결과 한나라당 주광덕 후보에 역전당하면서 패배했다.[32] 여담으로 둘 다 시흥-군포 지역에서 의원을 역임한 고 제정구 의원의 보좌진 출신이라 사적으로도 친하다. 탄돌이는 아니지만 20대 총선에서 당의 사지인 대구 수성 갑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당선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김부겸 전 의원도 제 의원의 보좌관을 지냈고 군포시에서 3선(16대~18대, 19대부터 대구 수성 갑에 출마하나 첫 선거는 낙선)을 지냈다.[33] 국민의힘 입당 이후에는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다.[34] 다만 우상호, 이인영 등과 마찬가지로 첫 출마는 16대부터 했다.(당시에는 흥덕구 단독 선거구였다)[35] 컷오프에 반발해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더불어민주당 장경태 후보와 단일화를 하면서 사퇴했다.[36] 다만 정호준은 19대에 당선되었다가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으로 당을 옮겼고, 같은 선거구에 출마한 지상욱에 패해 낙선했다.[37] 경남도지사에도 당선된 적 있다.[38] 민선 5, 6기 광명시장도 지냈다.[a] 21대총선 출마[b] 20대총선 출마[c] 19대총선 출마[42] 근데 이분은 놀랍게도 미래연합 소속으로 당선 되었다[d] 18대총선 출마[a] 21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46] 2011년 재보궐 출마[a] 21대총선 출마[b] 20대총선 출마[c] 19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b] 20대총선 출마[c] 19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b] 20대총선 출마[c] 19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a] 21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b] 20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a] 21대총선 출마[c] 19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c] 19대총선 출마[c] 19대총선 출마[b] 20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a] 21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b] 20대총선 출마[a] 21대총선 출마[b] 20대총선 출마[c] 19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b] 20대총선 출마[c] 19대총선 출마[d] 18대총선 출마[a] 21대총선 출마[b] 20대총선 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