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용산 참사 | ||
<colbgcolor=#bc002d> 발생일 | 2009년 1월 20일 07시 10분경 (UTC+9) | |
발생 위치 |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 건물 옥상 | ||
유형 | 화재(방화) | |
인명피해 |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 6명[1] |
부상 | 23명[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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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당시 철거민들과 전국철거민연합 회원들이 재개발 보상 문제와 관련하여 해당 건물에서 농성 중이었고 경찰의 진압에 철거민과 전철연 회원들이 화염병과 새총형 투석기 등 각종 무기로 저항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6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이 참사의 책임소재와 관련하여 '불법 과격시위에 대한 적법한 대응'이라는 주장과 '과잉진압'이라는 주장이 부딪히면서 논란이 일어났는데 국가인권위원회는 공권력이 과잉진압을 했음을 인정했다. 또 대한민국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와 대한민국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당시 수사기관의 무리한 진압과 편파 수사, 여론 조사 시도 등을 지적하면서 철거민과 유족 등에게 사과할 것을 공식적으로 권고하였다.
2. 배경 및 전개
2006년 용산 4구역[3]에서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었다.
2007년 주거세입자나 임차상인에 대한 보상문제[4]가 불거졌고 생존권 보장과 관련한 시위가 벌어졌다.[5]
2008년 용산 제4구역 도심 재개발 사업과 관련하여 보상 내용에 반발하는 상가 세입자 26세대가 남아 2008년 4월 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겨울부터 강제철거가 시작되었고 아직 각종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철거민들은 농성에 돌입했다. 서울시는 '동절기 철거 금지' 원칙을 밝혔지만 법원과 경찰은 응하지 않았고 2009년 2월 착공을 목표로 강제철거가 시작됐다.
이미지 출처
2009년 1월 16일 경 철거대책위원회 회원 40여 명은 5층에 망루를 설치하고 농성 장소로 정한 뒤 점거 농성 기간 중 경찰 및 용역직원들에게 화염병 투척 등의 행위를 할 때 경찰이 폭력 행위자를 특정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참석자 전원에게 얼굴 전체를 가리는 복면을 나누어 주고 미리 구입해 둔 철판, 합판, 쇠파이프 등 망루 설치용 각종 도구와 미리 제작한 화염병, 염산병 및 화염병 제작에 필요한 세녹스, 빈 소주병, 등유, 가스통 등을 트럭에 싣고 여러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탄 뒤 위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크레인 고장으로 실패한 채 각자 귀가하였다.
2.1. 사건 당일
2009년 철거대책위원회 회원들은 투쟁 비용을 마련하고 화염병·염산병을 제조한 뒤 전국철거민연합회 소속 회원들과 함께 2009년 1월 19일 새벽 3시경 용산 남일당 건물을 불법으로 점거하였다.농성자들은 건물 계단, 건물 4층, 옥상 등 곳곳에 배치되어 용역직원이나 경찰의 진입에 대비하여 교대로 경비를 서게 했다. 일부 농성자들은 옥상의 벽을 해머로 깨뜨려 벽돌조각을 만들었고 깨뜨린 벽돌 조각을 건물 4층과 옥상에 분산 배치했다. 미리 준비한 골프공과 화염병, 염산병도 건물 곳곳에 분산 배치해 두는 방법으로 용역 직원 및 경찰의 진압 작전에 대비하였으며 건물 3층 계단과 4층 계단 사이에 용역 직원과 경찰의 진입을 막기 위해 쇠파이프를 바둑판 모양으로 용접하여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도록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농성자들은 화염병 400개, 염산병 40여 개, 쇠파이프 250여 개, 골프공 1만 개, 새총 20개, 1톤이 넘는 시너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새총은 경찰의 실험에서 방석모의 철망이 우그러지거나 플라스틱 마스크가 깨질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있었다고 한다. 기사
2009년 1월 19일 오전 5시 33분경 용산 4구역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 등 약 30여 명이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5층짜리 상가 건물 옥상을 점거하였고 이에 맞서 경찰은 경비 병력으로 3개 중대 300여 명을 투입하였다. 용산경찰서장은 농성자들에게 화염병과 벽돌 투척, 새총 발사 행위의 중단 및 농성 자진해산을 권유하고 10분 단위로 3회에 걸쳐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농성자들은 "끝까지 사수하여 투쟁하자" 고 독려하면서 각자 지정된 자리에서 경찰을 향해 화염병, 벽돌을 투척하고 새총 모양의 발사기를 이용하여 골프공을 발사하였으며 살수차를 향해 화염병 5개를 투척하였다.
1월 19일 오전 10시 50분경 시위대가 화염병 20여 개를 인근 건물과 도로에 던져 인근 가정집과 약국에 화재가 발생해 소방차가 출동하기도 했다. # 지나가는 시내버스 바로 옆으로 화염병이 터지기도 했다.
침입 초기에는 경찰과 이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고 경찰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침입 목적이나 요구사항 등을 주변 정황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농성자들은 같은 날 오전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직접 또는 건물에 설치한 새총을 이용하여 건물 옥상에서 건물 외부로 불이 붙은 화염병, 돌, 골프공, 쇠구슬, 유리구슬 등을 수차례 던지거나 쏘았고 이로 인해 이웃과 행인들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철거민과 전철연 회원들은 옥상 건물 위에 망루를 짓고 상당량의 시너를 옥상에 준비하는 동시에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철거반에 저항해 경찰은 물대포를 쏘면서 대치하게 되었다. 1월 20일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농성장 옆 상가 건물 가림막에 화재가 발생하여 40분만에 진화되었고 오전 6시 12분에 경찰은 철거민들에게 물대포 살수를 개시하였다. 농성자들의 화염병 투척이 보고되면서 19일 12시 10분부터 남일당 건물의 단전과 단수 명령이 내려졌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 1시 이후까지 농성장 인근의 한강로 지구대에서 서울경찰청 차장 주재로 현장대책회의가 열렸다.
오전 11시 경부터 12시 사이에 대치가 과열되면서 농성자들은 화염병, 벽돌을 투척했고 경찰은 오전 11시 23분경부터 12시 18분경까지 남일당변 한강로의 서울역 방향 편도 전 차로를 통제하였다.
2009년 1월 20일 6시 25분 경 경찰특공대가 농성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경찰특공대 지상조를 계단을 통하여 건물 안으로 진입시킴과 동시에 BK 건물 외부에서 경찰특공대 옥상조를 컨테이너에 태워 크레인을 이용하여 망루가 설치되지 않은 반대편 옥상 공간에 올리는 방법으로 위 건물 옥상 진입을 시도하였다.
경찰특공대 지상조가 계단을 이용하여 건물 위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 3, 4층 사이에 설치된 장애물을 절단기로 해체하려고 하자 건물 4층에 있던 농성자들은 경찰특공대원들을 향해 화염병, 염산병을 투척하면서 극렬히 저항했고 경찰관 2인에게 각각 기도화상과 화상을 입게 하였다.
한편 특공대원 옥상조 13명을 태운 컨테이너가 크레인에 의해 건물 옥상으로 올라오자 망루 4층 창문에 있던 농성자들 중 1명이 컨테이너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다. 경찰특공대원들은 계단 3, 4층 사이에 농성자들이 설치한 쇠파이프 장애물을 제거하고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진입하면서 점거농성 중인 농성자들에 대한 검거에 나섰고 농성자들은 진입하는 경찰을 향해 화염병, 골프공, 벽돌 등을 투척하며 옥상과 망루로 이동하였다.
망루 안에서 창문을 통해 재차 불이 붙은 화염병을 컨테이너를 향해 던져 적중하여 불꽃이 튀어올랐고 망루 안에 있던 농성자들은 3회에 걸쳐 추가로 불이 붙은 화염병을 특공대원들을 태운 컨테이너 안으로 던졌다.
특공대원을 태운 2번째 컨테이너가 옥상에 도착하자 농성자 중 1명이 망루 전면에서 특공대원들이 타고 있었던 컨테이너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농성자들이 망루 전면에서 컨테이너 안으로 화염병을 던져 컨테이너 안에 있던 특공대 2제대 소속 경사 CE의 몸에 맞혀 약 30~40초간 불이 붙게 했다. 계속해서 농성자들이 망루 창문을 통해 컨테이너로 던진 화염병이 컨테이너에 부딪치면서 여러 개의 불똥이 아래로 떨어져 망루 입구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6시 52분 경 망루 반대편 옥상 공간과 건물 중앙 계단 부분을 장악한 경찰특공대원들이 망루에 있는 농성자들을 검거하기 위하여 망루쪽으로 접근하자, 망루 1층에 있던 농성자들은 진입하려던 경찰특공대원들을 향해 쇠파이프와 삼지창을 휘두르고 망루 위쪽에서는 세녹스와 함께 불이 붙은 화염병을 계속 던졌다.
경찰특공대원들은 옷에 불이 붙은 채 중앙 계단 쪽으로 퇴각하기를 수차례 반복한 끝에 망루 1층 입구에서 저항하는 피고인들을 비롯한 농성자들을 제압하고 망루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여 망루 1층에서 3인을 검거하였고 농성자들은 경찰특공대원들을 향하여 쇠파이프 등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쇠파이프로 경찰관을 내려쳐 부상을 입혔다.
망루 1층 진입에 성공한 경찰 중 10여 명이 망루 위층으로 올라간 농성자들을 검거하기 위하여 망루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망루 2층에 있던 농성자들은 아래층에 있는 경찰특공대원들을 향하여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불을 붙인 화염병을 던졌다. 경찰특공대원들은 소지하고 있던 소화기를 이용하여 불을 끄면서 망루 2층에 진입하여 추가로 위 AG을 검거하고 계속하여 망루 3층까지 올라가 6인을 검거하였다. 망루 3층까지 장악한 경찰특공대원들은 망루 4층까지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망루 1~3층에서 검거한 농성자들을 망루 밖으로 인계하기 위해 많은 인원이 이탈한 상태에서 남아있던 4명의 경찰특공대원들만으로는 망루 4층의 농성자들의 쇠파이프와 화염병 공격을 감당하기 어려워 부득이 망루 1층으로 내려와 중앙계단 공간으로 일시 퇴각하였다.
망루 4층에 남아 있던 농성자 중 1인은 7시 15분 경 망루 창문에서 인화물질[6]을 망루 밖으로 뿌리고 그 중 또 다른 농성자는 망루 해체 작업을 하는 경찰특공대원을 향해 망루 4층에서 약 30초간 다량의 인화물질을 쏟아부었다. 경찰관이 망루 3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 망루 4층에 있던 농성자 중 1인이 화염병에 불을 붙인 뒤 특공대원들을 향해 불붙은 화염병을 투척, 망루 3층 계단 부근에 순식간에 불길이 번졌고 그 불똥들이 구멍 뚫린 철제 계단을 통해 망루 아래쪽으로 떨어져 망루 1층 바닥과 옥상에 산재해 있던 세녹스에 옮겨 붙어 불길이 망루 전체로 번졌다.
망루 4층에 남아 있던 농성자들은 7시 20분 경 세녹스통 9개를 망루 밖으로 던졌으나 그 중 8개가 옥상 바닥으로 떨어져 화염에 폭발하자 농성자들은 창문을 통해 도망치고 그 직후 세녹스의 유증으로 급속히 확산된 화염은 망루 2~4층에 남아 있던 세녹스 50여 통과 망루 1층에 있던 LPG 가스통으로 옮겨붙어 망루를 전소시켰다.
대법, 용산참사 철거민 등 9명 유죄 확정 재판부는 화재 원인에 대해서 "피고인 등이 불붙은 화염병을 던져 3층 계단 부근에 뿌려져 있던 세녹스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다고 인정한 원심에 대해서도 위법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경찰관 1명을 포함해 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으며 진압작전을 지휘한 경찰관이 망루에 1차 진입해 대부분의 농성자들을 검거한 다음 곧바로 2차 진입을 지시한 것은 당시 현장 상황을 고려한 결정으로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으며 "시기나 방법에 관해 다소 아쉬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경찰이 진행한 진압작전을 위법한 직무집행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2.2. 사건 이후
1월 20일 오후 용산역 앞과 용산참사 현장 앞 도로에서 용산 참사에 대한 항의를 목적으로 한 촛불집회가 벌어졌는데 전국철거민연합 회원 및 시민 등 1,000여명이 몰렸다. 경찰은 물대포 등으로 진압하였고 일부 시위대의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위대는 다음날 새벽에 자진해산했다. 추모제 및 촛불집회는 서울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1월 22일, '용산참사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MBC 100분 토론이 진행되었다.
1월 28일, 100분 토론 시청자투표와 관련해서 경찰청에서 경찰들을 대상으로 투표 참가를 독려하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벌어졌다. #
1월 31일, 철거대책위원회 회원 등 700명은 14시부터 서울역 광장에서 사전 집회를 마치고 영정 차량 5대를 앞세우면서 청계광장으로 진출하려고 했고 경찰은 남측광장 끝에서 차벽으로 이를 제지하였다. 저녁이 되자 집회 참가자는 1,500명으로 늘었고 예금보험공사 앞에서 열린 '제2차 범국민 추모대회'에 참석한 후 전 차로를 점거한 채 명동 방향으로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 버스 타이어와 유리창이 파손되었고 차로점거 차단 근무를 하던 경찰 부대원을 폭행한 시위대 5명이 검거되었다.
2월 1일, 청계천에서 열린 용산참사 추모집회에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의 대표 인사들이 참가하여 경찰의 강제진압을 규탄했다. 이에 대하여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연초의 국회 폭력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위라면서 야당을 비난했다.
2월 2일, 임시국회가 개회했다. 야당은 이를 '용산국회'를 규정하여 '용산참사 진상 규명' 에 초점을 맞추었고 여당은 '경제국회'로 규정하여 이에 반발하였으며 검찰은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해 무혐의로 보고 '시위대의 화염병'이 화재의 원인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2월 3일, 오전 희생자 유가족들은 검찰 수사와 관련하여 검찰청을 항의 방문해 검찰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관련 기사 이 날 MBC PD수첩에서 '용산 참사,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성기연, 오행운 취재)'라는 제목의 방송을 내보내면서 용산 참사의 원인을 조망했다.
2월 8일, 용산참사 변호인단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2월 9일, 검찰의 최종 수사결과가 발표되었다. 원래는 5일에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보강수사를 위해 연기되었다. 최종 수사결과 경찰 진압은 무혐의로 결론내려졌으며 용역업체 및 철거민 20여명이 기소되었다.
2월 11일, 청와대가 용산참사를 무마하기 위하여 연쇄 살인 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의혹이었으나 이 날 이를 지시하는 해당 이메일이 공개되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그러한 지침을 내린 바 없다고 부인하다가 홍보관 개인이 저지른 일이라고 밝혔다.
2월 20일, 용산참사 변호인단이 검찰에게 수사기록 열람을 요청했지만 검찰이 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사건 은폐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검찰은 아직 공범의 기소 절차가 남았기 때문에 수사기록 공개를 미룬 것이라고 해명했다.
3월 2일, 검찰은 국민참여재판 신청에 대해 재판 절차가 이중으로 이루어지는 등의 문제로 부적절하다며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관련 기사
3월 26일, 법원은 용산참사 재판을 국민참여재판으로 하지 않겠다고 결정내렸다. 증인이 너무 많아 재판이 장기간 소요되는 등의 문제로 국민참여재판이 부적절하다는 것.
10월 28일, 서울중앙지법은 기소된 농성자 9명 중 7명에게는 징역 5~6년을, 2명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
11월 22일, 국제엠네스티의 아이린 칸 사무총장이 용산참사현장과 유족들을 방문하였으며 24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이 우려된다고 언급했다.
12월 30일, 용산참사 관련 합의안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한편 상기했던 대로 피고측에서 수사기록을 요구했지만 검찰 측에서 공개를 거부하자 피고측은 법원에 관련 서류의 열람과 등사를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법원은 수사기록 확인을 허가했지만 검찰측은 법원의 허가마저도 무시했다. 검찰의 피고측에 대한 방어권 침해 및 법원 명령에 대한 무시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되었으며, 2010년 헌법재판소는 피고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기사헌법재판소 2009헌마257
2.3. 관련 논쟁
2.3.1. 화재관련 논쟁
당시 가장 큰 논쟁은 화재의 원인이었다. 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건물 옥상에 설치된 망루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07:15경 망루 창문에서 인화물질('세녹스'로 추정)을 망루 밖으로 뿌리고, 그 중 또 다른 농성자는 망루 해체작업을 하는 경찰특공대원을 향해 망루 4층에서 07:19경부터 약 30초간 다량의 인화물질('세녹스'로 추정)을 쏟아 붓고, 곧이어 특공대 1제대 소속 피해자 경장 CG(32세)이 망루 3층으로 가기 위하여 계단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망루 4층에 있던 피고인들을 비롯한 농성자 중 1인이 화염병에 불을 붙인 뒤, 위 CG, 피해자 CH(35세) 등 특공대원들을 향해 불붙은 화염병을 아래로 던져 망루 3층 계단 부근에 떨어지면서 위와 같이 다량으로 뿌려진 세녹스로 인해 순식간에 계단으로 불길이 번지고, 그 불똥들이 구멍 뚫린 철제 계단을 통해 망루 아래쪽으로 떨어져 망루 1층 바닥과 옥상에 산재해 있던 세녹스에 옮겨 붙어 불길이 망루 전체로 번지게 되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09. 10. 28. 선고 2009고합153
법원은 망루의 3-4층 사이의 계단 발판이나 다른 층의 계단 발판에서 화염병과 같은 색의 용융된 유리 조각과 유리 파편이 발견되었고 이는 농성자들이 망루 계단으로 올라오는 경찰특공대를 향하여 던진 화염병의 흔적임이 분명하다고 봤다.[서울고등법원]
이에 따라 경찰 측은 사건 직후부터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의해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부상을 당한 특공대원도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화재 원인 및 과잉 진압에 대한 논란이 일자 서울경찰청은 '철거민들의 불법농성에 대한 동영상'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철거민들은 '경찰이 망루 진입을 위해 철판을 전기톱으로 뜯던 중 튄 불꽃'이 바닥에 뿌려진 신나와 만나 화재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철거민들은 경찰의 물대포로 인하여 화염병의 심지가 물에 젖어 불을 붙일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발화 시점'과 ' 실제 화재가 발생한 시점'간의 시차를 설명하지 못한다. 화재는 이후 진압작전이 한창 벌어지던 가운데 발생했으며 만약 발화의 원인이 전기톱의 불꽃이었다면, 화재는 진압작전 이전에 발생했어야 했다. 화재 발생 시점과 경찰 진입 시점을 비교해 보면 전기톱에 의한 화재는 시간상 존재할 수 없다.
이후 화재의 원인이 '화염병'으로 결론이 난 가운데 책임소재에 대한 논란이 빚어졌다.[8]
-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투척한 화염병이 화재의 원인이다.
- 경찰을 피해 시위대가 망루 위로 도망치던 가운데 '화염병'이 떨어졌다.
물론 화염병이 원인이 아닌 정전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나 법원은 당시에는 1월 하순으로 매우 추운 날씨였고 망루 1층에는 상당정도의 물이 고여 있기도 하였으므로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정전기가 발생하기 대단히 어려우며 망루 내부에서 정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는 사람은 농성자들과 진압경찰관들인데 농성자들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고 했고 진압경찰관들은 물이 고여 있는 망루 1층을 지나서 선두가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있었을 무렵 화재를 예상하고 탈출을 시작했다는 것인데 본격적인 화재는 망루 3층에서 시작되었던 점과 이 사건 화재가 진행된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정전기에 의해 이 사건 화재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09년 1월 20일 7시 20분경 망루에 화재가 발생할 당시 농성자들이 있던 망루 4층 또는 3층에서 경찰특공대원들이 있던 망루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부근으로 화염병이 던져져 망루 3층 부근에서 불이 났고 망루 내부에 있던 인화물질과 그로 인한 유증기에 불이 옮겨 붙으면서 망루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9]
최종적으로 검찰은 농성자들이 진입을 시도하는 경찰특공대를 향해 시너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진 것을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았으며 ‘용산참사’ 농성자들 징역 8~5년 구형 1심 재판부는 화재 원인에 대해 "농성자들이 망루 내부로 진입한 경찰특공대들에게 불이 붙은 화염병을 투척해 망루 내부 3층 계단 부근에 불을 내 망루 안의 세녹스의 유증기에 불이 옮겨 붙어 망루 전체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변호인은 경찰특공대가 사용한 전동그라인더가 화재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으나 불꽃이 세녹스의 유증기(기름증기)로 튀었다면 새로운 발화 가능성이 된다. 그동안 증인으로 나왔던 특공대원들은 함석판을 자르는 데는 전동그라인더를 쓰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발화지점은 망루 1층이 아니라 망루 내부 3층 부근이고 당시 촬영된 동영상에 경찰의 살수로 인하여 물이 망루 외벽에 닿는 소리가 녹음될 정도인데도 전동그라인더의 작동소리가 녹음되어 있지 않았으며 농성자들 조차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변호인이 주장하는 함석판의 전동그라인더 흔적은 이 사건 화재 진압 후 소방관들이 사체발굴 등을 위하여 전동그라인더로 망루의 외벽 함석판을 해체하는 작업을 한 것으로 보여 본 건 화재와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하였다.용산참사 이충연 위원장 등 7명 징역 5년~6년 실형 이는 항소심과 상고심에서도 그대로 인정되었다.
사실 경찰은 사전에 소방서와 협조를 받으려고 했으나 화학소방차의 경우 폐쇄된 공간에 유류화재 진압용 소화액을 사용할 경우 인명피해가 염려되어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지원이 거절되었다. 실제 진압 과정에서 농성자들이 경찰이 탄 컨테이너에 화염병을 던져 화재가 발생하였던 점, 소방서의 진화작전도 화학분말이 아닌 수성막포 등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던 점 등을 고려하면 소방서 측의 거절사유는 합리적 근거가 있어 보이고 위 장비들을 진압작전의 안전한 수행을 위한 필수적 장비라 할 수 없다.
또 소방고가사다리차, 바스켓차, 화학소방차 등은 소방서의 협조를 통해 지원받으려고 했지만 소방고가사다리차나 바스켓차를 고공진압작전에 동원할 경우 오히려 더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지원을 받지 못했다.
2.3.2. 외부세력 개입 문제
이외에도 참사 당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논쟁으로는 진짜 철거민이 아닌 외부세력의 개입 문제였는데 시위대측과 경찰 측 둘 다 외부세력이 개입하였다는 점에서 파장이 커졌다.시위대 측에선 당시 사망한 농성자 5명 가운데 3명이 진짜 용산4구역 철거민과는 무관한 전국철거민연합 회원이였으며 기소된 2인도 용산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발생했다. 심지어 농성자 28명을 현장에서 연행했는데 용산 세입자는 겨우 7명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용산 철거민들의 시위가 과격화된 것이 이들이 뒤에서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당시 경찰과 여당 측에서는 이들 '범죄단체'의 영향으로 시위가 '도심테러' 성격이 되었고 이에 따라 정당하게 진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야당 측에서는 사태 본질을 외면하고 과잉진압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고 전철연 측은 "우리는 소외당한 도시빈민을 대표하는 단체"라며 "시위 참가자 전원이 지역 철거민"이라고 주장했다.
진압작전에 철거용역을 투입한 것에 대하여 논란이 일었다. 당시 경찰 측에서는 "용역이 투입됐더라도 처벌 근거가 없고, 중요한 사안으로 보지 않는다"고 밝혔으나 2009년 2월 3일자 PD수첩에서 진압작전 당시 철거용역과 경찰이 합동작전을 벌인 정황과 철거용역이 철거민들에게 물대포를 발사했다는 동영상이 공개되었다.
법원은 경찰이 철거용역들을 이용하려고 했던 정황이 일부 있으나 이런 부분은 경찰특공대의 진압작전이 시작되면서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또 경찰관이 아닌 철거 회사 직원이 농성자들을 향하여 소방호스를 이용하여 물을 뿌렸던 사실이 인정되는 바 이는 매우 부적절하기는 하지만 당시의 현장상황에 비추어 보면 경찰이 철거회사 직원인 줄 알면서도 그에게 살수를 지시하였다거나 그와 같은 행위를 묵인하였다고 할 수는 없고 단순히 철거회사 직원의 살수를 방치하는 잘못을 한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용역의 살수장면은 진압과 시간차가 해가 뜬 낮 시간대에 찍혔으므로 멀어 보인다.
2.3.3. 진압관련 논란
우선 경찰특공대 투입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사실 경찰특공대 하면 생각하는 이미지 자체가 대테러작전 등 준군사활동에 가까운 활동을 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생긴 논란이다. 실제로는 2000년 롯데호텔 농성, 2005년경 오산세교 망루농성, 홈에버 서울 상암점 농성, 2008년 11월경 서울 강서구 콜텍 본사 농성점거파업 외 시청 앞 조명탑 고공시위, 농협중앙회 옥상시위, 포스코 비정규직 농성 등에 투입되어 시위를 진압해 왔다. 당시가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고공시위인 만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특공대가 더 적합한 임무이기는 했다. 또 법원의 판결에서도 나오듯 당시 철거민들이 당시 점거 및 시위이상의 위험시위장구들을 보유하고 있었음으로 오히려 일반적인 순경이나 경찰을 투입했다간 경찰측의 피해규모도 커졌을 것이다.경찰이 진압을 서두른 또다른 이유는 외부 세력의 개입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망 사건 현장에서 경찰은 28명을 검거했는데 이 중 용산 4구역 세입자는 7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외지인이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부상자도 대부분 전철연 소속이었다. 단시간에 망루를 설치하며 방어 태세를 만든 것, 화염병을 제조해 무차별적으로 던진 것 모두 '프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농상장소가 위치한 한강로변은 한강대교와 연결돼 있어 교통량이 많으며 특히 한강대교에서 용산 방향 도로는 평소에도 극심한 출근 정체 현상을 보이는 곳이다.
농성자들 은 1톤 규모의 세녹스, 염산, 화염병, 골프공, 유리구슬 및 쇠구슬 등을 휴대한 채 BK 건물 내부로 침입하였고, 화염병, 골프공을 100m가 넘는 거리를 날려 보낼 수 있는 대형 새총 등을 건물에 설치하였으며, 2009. 1. 19. 오전부터 계속하여 깨어진 벽돌, 골프공, 유리구슬 및 쇠구슬, 불이 붙은 화염병 등을 대형 새총 등을 이용하여 한강대로 및 CB빌딩 등 방면으로 계속하여 던졌고, 그로 인하여 실제로 인근 주민과 행인에게 피해를 입혔는바, 피고인들을 비롯한 농성자들은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집단·흉기등주거침입)죄,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집단·흉기 등재물손괴 등)죄, 화염병사용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죄 등의 현행범이었던 점, ② 한강대로는 왕복 8차선으로 된 한강대교와 서울역을 잇는 서울 시내 중심도로 중의 하나로서 BK 건물은 한강대로에 접해 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다량의 위험한 시위용품을 가지고 위법행위를 하는 농성자들을 신속하게 진압할 필요가 있었던 점, ③ 다량의 위험물을 소지한 채 서울 시내 간선도로변에 위치한 건물을 점거하고 망루를 세우며, 화염병이나 골프공 등을 투척하는 행위는 경찰특공대의 분장사무 중 하나인 중요범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고, 건물 옥상에 견고한 망루를 짓고 많은 양의 위험물질을 소지하고 있는 농성자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유사한 범죄의 진압에 투입된 경험이 많고 고도로 숙련된 경찰특공대를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이는 점, ④ 경찰특공대는 그 진압과정에서 농성자들을 체포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만을 가지고 진압작전을 한 것으로 보이고 체포과정에서도 필요한 정도 이상의 물리력을 행사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 점, ⑤ 경찰측은 경찰특공대의 투입을 검토하고 실제 작전계획을 세우면서도 계속하여 농성자들과 협상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반면에, 농성자들은 '경찰의 선 철수'라는 실현되기 어려운 전제조건을 내 세우면서 협상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결국 경찰측에서는 진압을 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농성자들의 위와 같은 위법행위를 제지하기 위하여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어 농성자를 체포한 것은 Q상공철대위 등 세입자들과 이 사건 조합 사이의 민사문제에 경찰이 위법하게 개입하였다고 볼 수 없고, 정당한 목적을 위한 상당한 조치였다.
또 아래 판결문에서 나오듯이 시위가 도심 테러 성격을 보였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물론 노동자, 철거민 시위가 사람의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임은 틀림없으며 배경 및 전개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세입자와 임차인에 대한 보상이 매끄럽지 않았던 것과 생존권에 큰 영향을 주는 겨울에 무리하게 철거를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사건의 농성자들은 행인과 차량들이 지나다니는 도심 한복판에서 화염병을 무분별하게 투척하였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타인이 관리 중인 건물을 점거하고 망루를 설치하여 농성을 하면서 방패와 진압봉, 소화기 등 최소한의 진압장비만을 갖춘 채 공무를 집행하는 경찰관들을 향하여 치명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는 위험물질[10]을 쏟아붓고 화염병을 투척하다가 결국 공무집행 중이던 경찰관 1명을 사망하게 만들고 많은 경찰관을 다치게 한 행위는 국가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동으로 법치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중략)...그리고 피고인들의 위법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경찰이 조기에 농성자들을 진압하였다고 하더라도, 피고인들을 비롯한 농성자들이 보유한 위험한 시위용품의 양이 많았고, 망루농성이 장기화될 것이 예상되었으며, 실제 농성자들의 행위로 인하여 피해가 발생하는 등 경찰로서는 서울 시내 간선도로에 접해 있는 건물 위의 불법 점거 농성을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보이므로, 경찰의 조기진압 결정이 위법하거나 적절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없으며 사정이 이러함에도 피고인들은 수사기관 이래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경찰과 조합, 철거용역들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려만 하고 있고 자신들의 행동에 의하여 발생한 참혹한 결과에 대하여는 잘못을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경찰특공대원들이나 그 유족, 인근 주민 등 이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하여 아무런 사과나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하지 않고 있고, 엄숙한 이 법정에서 계획적으로 재판의 진행을 방해하고이 법정을 자신들의 정치적인 의사표현의 장으로 변질시키려 하는 등 범죄 후의 정황도 매우 좋지 않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09. 10. 28. 선고 2009고합153
2.3.4. 경찰의 책임
그러나 모든 책임을 농성자들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결코 온당한 것이 못 된다. 이 사건 당시 경찰의 진압 작전은 너무나도 허술하고 위험하게 진행되었다.물론 과거에도 경찰은 기중기를 동원해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특공대원 13명을 실은 컨테이너를 농성중인 망루에 투입하는 방식으로 작전했으며 이런 방식을 통해 성공적으로 진압했으며 작전에 투입된 경찰특공대원들 중에는 유사한 오산 세교 망루 농성 진압에 참가하여 직접 고공침투를 통한 농성진압을 경험한 대원도 있었으니 위험하긴 해도 어느 정도 검증된 방법이었다.
문제는 크레인이 1대만 있었다는 점인데 지상에서 별도로 올라오는 진압조와 충분히 연계해서 투입하여야 하는 작전이었는데 지상조는 염산 살포 등의 공격에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1층부터 건물의 계단은 농성자들이 설치한 장애물로 인해 진입에 차질이 있었다. 보통 이럴 경우에는 상황을 감안하여 크래인을 추가적으로 투입하여 고공 투입 인원을 늘리던가, 지상조가 투입할 수 있는 시간을 벌던가 하여 충분한 연계작전을 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현장에선 이를 감안하지 않고 무리하게 크래인 한 대에 5명 정도만 태운 상태로 수십 명을 진압하려고 하면서 일이 제대로 꼬였다.[11] 거기다 당시 경찰들의 복장을 보면 고층에서 추락할 경우를 대비한 안전고리나 장비 등은 보이지도 않고 단순히 진압장비만 차고 있었다.[12] 해당 시위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경찰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한 진압을 주문한 경찰청의 잘못은 컸다. 이렇게 급하고 허술한 구상에서부터 사상자가 예견된 진압 작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후
3.1. 2016년 이전
이 사건 이후 '상가권리금 문제'나 '강제 퇴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자 시도하긴 했지만 여전히 제정되지 않고 있다.[13]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차원에서의 용산 참사 진상 조사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다. 하지만 공약으로 내걸지는 않았으며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위원회는 구성된 적이 없다.
2015년 서울시에서는 '용산사고 재발방지를 위해 기록화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새로이 진상을 규명하기로 했다. 이 기록물은 용산참사 7주년인 2016년 1월에 발간될 예정이었다. 관련 기사
하지만 보고서 발표를 연기하였으며 작성 중에 있다고 전해졌다. 방대한 양으로 인하여 이를 정리하고 작성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
짤방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가 이 사태에서 나온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상황을 보도하던 MBC 뉴스데스크의 리포트에서 내보낸 철거민의 외침이다.
참고로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이었던 김석기는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무소속[14]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는데 용산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경주까지 내려가 낙선운동을 벌였다.
한편 유가족들은 2013년 공항공사 사장 후보로 김석기가 거론되자 이를 반대하는 긴급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화재 가능성이 높은 장소에서 위험한 작전을 펼쳤다는 점에서 1989년 5.3 동의대 사태와 공통점이 많다.
3.2. 2016년
2016년 4월 '용산4구역 정비계획 변경안'이 통과되면서 주거 및 공원지구로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기사 한편 서울시는 재개발과 함께 이전 세입자와 용산참사 사망자에 대한 위로·보상 합의안도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용산참사가 벌어졌던 곳에는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가 들어섰다.그러던 중 김석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바로 공천을 받으며 다시 경주시에 출마하였는데 이때에도 희생자 유가족들이 경주까지 내려가 낙선운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44.97%의 득표율로 무난히 당선되었고, 용산참사 당시 변호인이였던 권영국이 이에 대항하여 무소속으로 경주시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참사가 벌어졌던 국제빌딩 용산4구역은 이 사건으로 인해 건설사가 발을 빼면서 사업이 중단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효성그룹과 건설 계약에 성공하면서 2016년 11월 28일 기공식을 가지고 사업이 재개되었다. 2020년경까지 아파트와 오피스텔, 공원 등을 건립하는 복합단지로 조성할 예정이었다. 기사 서울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바로 앞으로 입지는 뛰어난 편이었으나 용산 참사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부담을 진 건설사들이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는데, 2015년 말에 와서 효성그룹이 사업자로 나서서 조합과 재계약에 성공한 것이다.
3.3. 2017년
연합뉴스에 따르면 2017년 12월 29일 용산참사 사건의 철거민 중 재판받던 1명을 제외한 25명이 특별사면되었다.2017년 7월 5일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인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로 일반 분양이 완료되었으며 2020년 8월 입주가 완료되었다.
3.4. 2018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각종 진상규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경찰청 진상 조사위에서 "경찰지휘부가 안전 대책이 미비했지만, 진압을 강행했다"며 "(진압과정에서) 순직한 경찰특공대원과 사망한 철거민 등에게 사과를 하고, 유사사건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3.5. 2019년
1월 6일 MBC의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에서 용산참사를 다뤘다. 방송 중에는 뜻밖에도 삼성이란 이름이 등장하며 삼성물산이 철거업체를 감독했단 것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서 삼성물산은 감독한단 것은 진행 상황을 보고받는 것일 뿐 직접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스트레이트 34회 Full] 경찰특공대는 왜 용산으로 갔나?1월 17일 유가족들은 지난 6일 방영된 MBC '스트레이트' 인터뷰에서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이었던 김석기 자유한국당 의원이 "지금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현재 경찰도 똑같은 그런 원칙을 가지고 하지 않을까"라고 답해 공분을 샀고 이에 항의했다. "철거민 계속 죽어가는데... 김석기는 국회 활보"
1월 19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용산참사를 다뤘는데 당시 사망한 경찰청 소속 김남훈 경사의 아버님 김권찬이 직접 출연하여 "대체 작전 받아서 움직이는 아들이 왜 아들만 1층에서 죽었는지 나에게는 숙제다."라며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15][16] 그알은 김석기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을 찾아가서 이에 관하여 물었지만 김석기 의원은 "경찰의 법 집행은 정당했다고 믿고 있다. 민간인 조사위원들의 판단이 대법원 판단 위에 있냐"며 이미 대법원의 판단으로 끝난 건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것이 알고싶다’ 용산참사와 김석기, 전과자가 된 철거민들(종합) 하지만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당시 경찰이었던 당사자까지 나와 당시 경찰이 이상했단 식의 진술, 그리고 민갑룡 경찰청장은 경찰의 진정성이 인정되었을 때 사과를 하겠단 입장까지 밝혔다. 민갑룡 경찰청장 "'용산참사' 사과, 진정성 인정받을 때 할것" 더불어 그알에서는 용산참사에 관련해서 경찰에 유리한 쪽으로 몰아가기 위한 댓글부대가 있었단 것까지 보도했다. 강호순 사건을 활용해 촛불을 차단하라는 지시 메일까지 발견됐다. # 이에 대해서 윗선은 개인적인 행동으로 마무리를 지었다고 한다. ‘그알’ 용산참사 덮기 시작, 댓글부대 동원+강호순 사건 활용 지시
1월 21일 김석기 의원이 용산참사를 다룬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그것이 알고싶다가 경찰이 잘못되었단 식으로 일방적인 편파방송을 했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정당한 판단 하에 명령을 내렸을 뿐이며 최근 민노총 관련 폭력 사태가 벌어져도 경찰이 지켜보는 한심한 모습이 문재인 정부 탓이라고까지 했다. 당연히 이에 대해 유가족들은 성명을 내고 그게 정당하단 것은 또 다시 시민과 경찰이 죽어도 된단 소리냐고 비판하면서 그가 지키려고 한 것은 시민도, 경찰도 아닌 경찰청장으로 내정된 자신의 안위와 범죄자 이명박 정부의 안위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해당 기사
이에 대하여 한겨레는 [사설]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린 김석기의 '적반하장'을 통해 김석기 의원을 비판했다.
1월 31일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박주민, '용산참사 진압 책임자' 김석기 징계안 발의 경찰청이 공식적으로 위법성이 있단 것을 공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들을 상처 입히는 김석기 의원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웠다며 징계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5월 31일 법무부 검찰 과거사 위원회 『용산 지역 철거 사건』조사 및 심의 결과 특공대의 조기 투입 부분의 위법성 여부에 대하여 화염병 등의 투척으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화염병 등이 소진되기를 기다릴 경우 더 큰 공공의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특공대를 조기 투입한 조치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하여 현저하게 불합리한 위법한 조치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6월 24일에는 도봉산에서 당시 농성에 참가했다가 징역 4년을 선고받고 3년 9개월간 복역하다가 가석방으로 출소했던 철거민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기사
3.6. 2020년
이전 선거에서 당선되었던 김석기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경주시에 다시 출마해 당선되었다. 권영국 변호사는 정의당 소속으로 경주에 출마해 김석기 의원과 대결했으나 이번에도 결국 낙선했다.한편 대구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터졌는데 철거 관련 문제로 고공시위를 하던 철거민들을 상대로 크레인에 컨테이너 박스를 달아 철거하는 영상이 뉴스에 나오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단독) 컨테이너로 망루철거…'용산참사' 있었는데 (2020.04.25/뉴스데스크/MBC)
3.7. 2021년
용산참사 당시 서울시장을 지내고 있었던 오세훈 후보가 3월 31일 열린 관훈토론에서 본 사건에 대해 “과도하고 부주의한 폭력 행위 진압을 위한 경찰력 투입으로 생겼던 사건”이라는 발언을 하였다가 논란이 일어난 바가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오세훈/비판 및 논란 문서의 해당 문단을 참고.4월 3일 보궐선거에 미래당 후보인 오태양이 오세훈의 유세현장에서 용산 참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유세장에 난입하려다가 바닥에 밀쳐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미래당측에선 영상을 공개하면서 제보를 받고 선관위와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했다.난입, 밀치기[17] 이에 이준석은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볼 필요도 없이, 선거캠프에서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상대 후보를 대자로 누워있도록 폭행하겠느냐. 영상이 있으면 나도 알아보게 공개해봐라.'라고 주장했다.
4. 관련 인물/단체
- 김석기: 용산 참사 당시 무리한 진압을 명령한 당사자이자 용산 참사 이후 경찰청 수사국을 통해 투표를 독려하였다.
- 전국철거민연합: 용산 참사 당시 강경한 농성을 주도한 단체. 이후에도 각종 철거현장에서 점거 및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 백동산: 용산 참사 당시 용산경찰서장. 정년퇴임 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취재진의 용산 참사 인터뷰 요청에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저 새끼들이 왔다고, 저런 새끼들 만나서 할 얘기가 뭐가 있어! 저 새끼들 내가 쥐어 팼으면 어쩔 거야 그 순간에!"라는 폭언을 했다. 본인도 어지간히 시달린 듯.
- 김권찬: 용산 참사로 사망한 김남훈 경사의 아버지. 그의 아들과 경찰특공대가 과잉진압을 했다고 주장을 하지 않고 경찰은 올바른 일과 정당한 일을 했고, 경찰특공대는 질서유지를 위해 임무수행을 충실히 했을 뿐 경찰특공대는 아무런 잘못과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5. 관련 작품
- 영화
- 두 개의 문 - 사건 당시와 재판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 공동정범 - 사건 이후 투옥되었던 5인이 특별사면된 후 용산파와 연대파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 소수의견 - 사건에 대해 직접 다룬다기보다는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한다. 원작 소설은 용산참사 이전에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 신과함께-인과 연 - 원작 신과함께의 이승편을 다룬 영화. 원작 자체가 용산참사에서 비롯된 철거, 재개발 문제에 영향을 받고 만들어져 이러한 요소에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다만 시대상이 달라 원작처럼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는다.
- 염력 - 강제 철거에 맞서는 철거민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연상호 감독이 사회 문제를 반영했다고 한다. 다만 해당 작품은 초능력 설정과 사회 고발이라는 두 메시지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 만화
- 연극
- 리스트 - 극단 '날'이 제작한 연극
- 용산, 의자들 -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을 각색한 연극으로 고립의 장소인 망루에서 밤을 지내던 부부가 서울 산동네에서 재개발로 철거민 신세가 된 자신들을 위로하고자 사회적 인사들을 초청해 메시지를 전한다는 줄거리로 구성되었다.
- 여기,사람이 있다
-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인칭 교차극으로 진행되는 연극
- 타인의 고통
- 장막을 걷어라
- 소설 / 기타
- 망루
- 예순여섯 명의 한기씨
- 나정민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이기호)
- 평범한 사람(루시드폴 / 4집 레 미제라블의 1번 트랙) - 이 사건의 철거민 측 희생자를 화자로 한 노래라는 해석이 있다. 우리는 모두, 평범한 사람 참 평범했던, 평범하게 죽어간 평범한 사람
- 소년이 온다(한강): 소설 자체는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했으나 작가가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다룬 에필로그에서 언급된다.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 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 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아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 깃발(YB / 8집 공존의 3번 트랙) -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쓴 곡으로, 멤버들이 현장을 다녀오고 쓴 곡이라고 한다.
- 예능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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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철연회원 3명, 철거인 2명, 경찰관 1명[2] 농성자 7명, 경찰관 16명[3] 2018년 용산 4층 건물 붕괴사고가 일어난 건물 근처에 있다.[4] 주거세입자에게는 4개월분 주거이전비가 지급되었으나 임차상인에게는 3개월분 휴업보상비만 지급될 뿐 권리금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권리금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원인은 첫째로 이 지역에는 상권에 비해 권리금이 없다시피했다고 한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재개발지구로 묶여 있었고 상가 주인들도 그것때문에 임대료도 저렴하게 내놨다고. 권리금 따위는 붙일 여지도 없었다.(상식적으로 언제 재개발될지 모르는데 권리금이라는 게 말이 되겠는가?) 게다가 권리금은 세입자들끼리 주고 받는 돈이지 상가 주인과는 관계 없다. 당시 세입자들의 주장도 이 정도 월세로는 이 정도 상권에 들어갈수 없다는 것이었다.[5] 다만 당시 철거민들이 철거 몇 개월 전에 가게를 계약하고 '알박기'를 했다는 건 잘못된 주장이다. 당장 언론 인터뷰에 자주 등장했던 '레아호프'와 '공화춘'의 점주 모두 10년 넘게 해당 장소에서 장사를 했던 사람들이다. 애당초 알박기는 '소유권'을 통해 토지보상금을 노리는 경우를 가리켜 사용하는 말이다.[6] 세녹스로 추정[서울고등법원] 2010. 5. 31. 선고 2009노3108[8] 원심은, 제1심 및 원심이 적법하게 채택하여 조사한 증거들, 특히 판시 동영상 화면에 의하여 알 수 있는 화재의 양상, 진압작전에 참여한 경찰관들과 피고인들의 각 일부 진술 및 제1심의 현장검증조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서의 각 기재 등을 종합하여, 이 사건 화재가 피고인들 및 농성자들이 불붙은 화염병을 던져 그 화염병이 망루 3층 계단 부근에 떨어지고 그 불에 의해 계단 부근에 뿌려져 있던 세녹스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하였고, 불붙은 세녹스가 망루의 틈을 타고 아래쪽으로 떨어져 1층 부근에 다량 뿌려져 있던 세녹스에 불이 붙어 큰 화재로 전개되었다고 인정한 다음, 결국 이 사건 화재는 피고인들 및 농성자들이 던진 화염병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와 관련한 피고인들의 상고이유 주장은 결과적으로 사실심인 원심의 전권인 증거의 취사선택과 사실의 인정을 비난하는 취지에 불과하여 적법한 상고이유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달리 원심의 사실인정 및 판단에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위배하고 자유심증주의 한계를 벗어나 사실을 인정한 위법을 발견할 수도 없다. 대법원 2010. 11. 11. 선고 2010도7621[9] 서울중앙지방법원-2009고합153[10] 실제로 화염병은 사람의 생명에 직접적으로 위해를 주는 위험한 도구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제조 및 소유를 금지하고 있다. 자세한건 화염병 문서 참조.[11] 아무리 훈련을 받았다지만 쪽수에서 밀리면 답이 있겠는가. 거기다 단순히 맨손싸움도 아니고 쇠파이프, 화염병 등으로 중무장한 시위대를 상대로 기껏해야 진압봉과 방패 정도만 든 특공대가 무슨 진압을 할 수 있을까. 역으로 제압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12] 주변에 추락사를 방지하기 위한 쿠션 등이 깔려 있다 하더라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다.[13] 권리금은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서 다루고 있다.[14] 본래 새누리당으로 출마하고자 하였으나 비난 여론으로 인하여 공천받지 못하였다가 이후에 입당하여 2016년, 2020년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되었다.[15] 여기서 김권찬은 용산참사의 유가족들도 괴로운 분들이라고 말했다.[16] 김권찬씨는 재건축을 기다리면서 47년째 신림 5동 무허가주택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전해졌고, 김권찬 본인도 무허가 주택에서 살면서 없이 살아 봤다고 하면서 철거민들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17] 둘 모두 비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