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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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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청 제6대 황제 건륭제 | 乾隆帝 | |||
출생 | 1711년 9월 25일 | ||
청나라 베이징 옹화궁 (現 베이징시 둥청구) | |||
사망 | 1799년 2월 7일 (향년 87세) | ||
청나라 베이징 자금성 양심전 (現 베이징시 둥청구) | |||
능묘 | 유릉(裕陵) | ||
재위 기간 | 보친왕 | ||
1733년 ~ 1735년 10월 18일 | |||
제6대 황제 | |||
1735년 10월 18일 ~ 1796년 2월 9일 (60년 114일)[1] | |||
청 태상황제 | |||
1796년 2월 9일 ~ 1799년 2월 7일 (2년 328일)[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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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중국식 : 홍리(弘曆) 만주어 : 훙리(ᡥᡠᠩ ᠯᡳ) 한국어 독음: 홍력 | ||
부모 | 부황 세종 헌황제 모후 효성헌황후 | ||
형제자매 | 9남 4녀 중 5남 | ||
배우자 | 정후 - 효현순황후 부찰씨 계후 - 계황후 휘발나랍씨 | ||
후궁 |
| ||
자녀 | 17남 10녀 | ||
신장 | 약 160~165cm[3] | ||
한호 | 만주어 : 압카이 워혜허 한 (ᠠᠪᡴᠠᡳ ᠸᡝᡥᡳᠶᡝᡥᡝ ᡥᠠᠨ᠌) | ||
칸호 | 몽골어 : 텡그린 테트국센 칸 (ᠲᠩᠷᠢ ᠶ᠋ᠢᠨ ᠲᠡᠳᠭᠦᠭ᠍ᠰᠡᠨ ᠬᠠᠭᠠᠨ)[4] | ||
묘호 | 고종(高宗) | ||
시호 | 중국식 :
만주어 : 용캬하 황디(ᠶᠣᠩᡴᡳᠶᠠᡥᠠ ᡥᡡᠸᠠᠩᡩᡳ) | ||
별호 | 십전노인(十全老人)[5], 중외공주(中外共主, 만국의 군주), 천하대군(天下大君, 세계의 제왕)[6] | ||
연호 | 1736년 ~ 1795년 중국식: 건륭(乾隆) 만주어: 압카이 워혜허(ᠠᠪᡴᠠᡳ ᠸᡝᡥᡳᠶᡝᡥ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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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년기의 모습.[7] |
건륭제는 1735년에 옹정제가 57세로 붕어하자 25세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였고, 60년이나 재위하며 중국 역사상 강희제 다음으로 오랫동안 재위한 황제이자 청나라 황제들 중유일하게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황제이기도 하다. 이는 건륭제가 존경하는 조부인 강희제의 61년 치세라는 대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1795년 재위 60년만에 퇴위하여 상황(上皇)이 되었고, 가경제가 다음 황제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건륭제는 퇴위 후에도 3년간 권력을 아들한테 주지 않았고 말이 상황이었지 실제로는 황제나 다름없어 사실상의 실세로 군림하였다. 가경제가 부패로 악명 높은 건륭제의 총신 니오후루 허션을 건륭제가 죽은 뒤에야 처벌한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건륭제는 퇴위 4년 만인 1799년에 89세로 붕어하였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건륭제가 정치 실권을 쥐었음을 들어 현직 황제로서의 60년에 상황으로서의 4년을 더해 64년으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쥔 황제로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2]
2. 생애
즉위 초기의 어진.[13] |
2.1. 황제가 되기 전
건륭제가 태어난 해는 강희제의 치세가 50년에 다다랐을 때였다. 홍력은 1711년에 (미래에 옹정제가 되는) 윤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홍력의 어머니 희귀비 니오후루씨(熹貴妃 鈕祜祿氏)는 만주인이지만 홍력이 태어날 당시에는 흔히 격격(格格:숙녀/아가씨)라고 불리는 시첩이었다.[14] 홍력은 황자들의 교육 기관인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를 했지만, 당시 강희제의 아들들은 20명이 훌쩍 넘었고 손자들까지 따지면 100명에 육박했다. 강희제는 이런 손자들 중에서 황자들의 후계자가 될 황손들 위주로 황궁에 데려와 키우거나 만남을 가졌다.강희제가 여러 손자들 중 홍력을 총애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건륭제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프로파간다이다.[15] 강희제는 자신이 가장 아낀 아들인 윤잉 소생의 손자들을 무척 아꼈고 그중에서 장자인 홍석을 총애했다. 윤잉을 폐위하고 유폐한 뒤로도 폐태자비 과이가 씨와 윤잉의 자식들을 황궁에 거주하도록 했고 강희제가 황장손 홍석을 총애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실릴 정도로 유명했으며, 건륭제가 등극한 후에도 강희제가 옹정제에게 홍석을 차기 황위 계승자로 지명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강희제는 죽기 직전, 황위를 물려준 옹정제에게 홍력을 후임으로 삼으라고 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6] 건륭제 역시 자신에게 후계자의 가능성을 열어 준 사람은 강희제였기에 일평생 동안 강희제를 대단히 존경했다. 강희제의 초상화를 보면서 자신을 다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재위 60년에 상황으로 물러난 이유도 강희제의 재위 기간보다 더 오래 통치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옹정제는 즉위 초부터 태자밀건법을 시행하여 홍력을 차기 후계자로 지명했디.
실제로 건륭제는 아버지 옹정제의 가벼운 일을 도우며 정치에 관여했다. 강희제 때의 황태자 사건과 만주족의 전통 등의 요인으로 청나라는 다른 왕조들과 달리 차기 황제를 미리 정하지 않았지만 넷째 홍력이 보친왕에 책봉되고 감국으로 임명되는 등, 거의 대놓고 옹정제가 홍력을 황태자이자 후계자로 대우하였고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셋째인 홍시는 기이하게도 옹정제 즉위하기 전 성인이 되었고 측복진 소생의 (실질적) 장자인데도 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고, 옹정제가 즉위한 후에도 홍시 대신 차남인 홍력이 치제를 하는 등 장자 대우를 전혀 받지 못했다.[17] 그리고 옹정 4년 황실 족보에서 제명된 8황숙 윤사의 양자로 연좌되어 황실 족보에서 제명되고 1년 후 사망한다. 다섯째 홍주는 일찍부터 정치와 멀리하고 형에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건륭제 즉위 후에도 상당히 예우받았다.[18] 옹정제는 워커 홀릭이었던 터라 재위 10년차에 건강이 악화되어 앓아눕게되자 홍력은 실질적으로 황태자나 다름없는 감국(監國)에 임명[19]되며 사실상 옹정제의 업무를 상당 부분 떠맡았다. 3년 후 옹정제가 붕어하자 후계자는 당연하게도 홍력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건륭제는 25세의 나이로 청나라의 황제에 즉위한다.
2.2. 재위 기간
건륭제의 재위기간은 매우 길어 60년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건륭제는 죽어서 재위가 끝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강희제의 61년 대기록을 깨고싶지 않았기에 자발적으로 황제일을 그만두었다. 그 이후 자신의 아들인 영황귀비 소생 가경제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었으나 3~4년 동안은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었기에 사실상 재위 기간은 64년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재위기간 동안 일어난 자세한 일들은 밑 문단에서.2.2.1. 개혁
백마를 조공품으로 받은 건륭제 |
건륭제는 옹정제 때 탄압받은 숙부들을 사면하고, 숙청당한 대신들의 신원을 회복시켜주었다.[23] 다만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드는 것은 되도록 막았다.[24]
그 다음에는 보갑제(保甲制)와 이갑제(里甲制)라는 제도를 뜯어 고쳤다. 보갑제는 100 가구를 모아서 갑(甲), 그리고 그 10개의 갑을 모아 보(保)로 나누어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끼리 서로 질서와 치안의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고, 이갑제는 보와 갑에서 세금을 인구에 따라 모아서 재정을 충당하는 제도였다.
본래 북송의 왕안석이 신법으로 쓰려다가 수포로 돌아간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이후 강희제가 부분적으로 시행하다가 옹정제 때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보·갑의 장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백성들의 호적을 조사하고 그 기록을 관아에 바쳤고 수상한 촌민들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고 뒤로는 세금을 무겁게 매겨 막대한 사익을 취하자, 1740년(건륭 5년), 건륭제는 정확한 인구 조사를 위해 각지의 보·갑장에게 가구당 세는 사람의 수를 군역을 지는 장정이 아닌, 집안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계산하였는데 계산한 백성들의 수는 나이, 성별과 이름을 패에다 적어 각자의 집 문 앞에 걸어놓고 매년 인구 조사를 하여 북경의 군기처와 호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건륭제는 청나라의 총 인구 수를 보다 정확히 알게 되었고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여 사익을 취하려 한 경우를 차단하여 또한 이를 방치하거나 세금을 빼돌린 총독이나 순무에게도 중징계를 내려 특히 이 중 그 행태가 심한 자는 참수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건륭제의 남순 |
그러고 훗날 사서 등을 편찬할 때 자신의 남순을 강희제의 남순, 사냥 원정[27]과 비교하며 정당화하였다.
한편 아버지 옹정제의 실패한 정책을 뒷수습하기도 했다. 옹정제는 물이 부족한 북방 지역에 논을 개간하게 했는데(수리영전), 무리한 개발로 인해 농민들의 손해가 막심했고 극심한 가뭄까지 겹쳐 옹정 9년(1731년)에는 일부 논이 밭으로 바뀌기도 했다. 결국 건륭 2년 "백성의 뜻을 따른다"는 조령을 내려 논을 밭으로 바꾸고 건륭 27년에는 "지력은 강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조칙을 내려 수도 부근에서 수리영전을 금지했다.
<소정잡록>에서는 건륭제의 조치에 대한 민간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순황제께서 즉위하시며 헌황제의 엄숙함을 물려받으셨으나 관대한 정치를 행하셨다. 개간을 중단하고 매관매직을 금지하며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승려와 도사를 추방하라는 조서를 내리시자 만민이 기뻐하며 칭송이 우레와 같았다.
조선에서도 건륭제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옹정(雍正)은 가혹하고 각박하다는 이름이 있으나 건륭(乾隆)은 관대한 정치를 행합니다. 구언조(求言詔)를 보면 과궁(寡躬)의 궐실(闕失)과 대신(大臣)의 시비(是非)를 논하지 않았다 하여 대간을 죄주기까지 하였으니, 어진 임금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옹정제가 상서로운 징조에 집착했던 것과 달리 건륭제는 조부 강희제처럼 상서로운 징조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고 이런 일을 아뢰지 못하게 하였다. 말년에도 이런 태도는 바뀌지 않았고 상서로움과 군주 또는 지방관의 덕망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2.2.2. 십전 무공
갑옷을 입은 건륭제.[28] |
이 당시 건륭제의 최대 업적은 바로 준가르의 복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희제, 옹정제 때부터 이어져 온 청나라 최대의 위협 세력인 준가르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국경을 신장 일대까지 넓혔고, 또한 이후 대금천과 소금천을 완전히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네팔을 정벌하여 티베트 서부 국경을 안정시킴으로써 청나라와 그 뒤를 잇는 현대 중국의 서부 국경을 확정한 것은 건륭제의 온전한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만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이 신강의 면적은 한반도의 10배 가까이 되며, 만주와 맞먹는다. 현재 중국 영토의 1/6을 늘려놨다. 여기에 티베트를 보호국으로 병합하여 강희제 시절의 청나라의 영토에서 40% 가깝게 늘려놓았다. 이 신강 지역은 후에 이슬람교도의 난이 벌어지기도 하며, 100년 후에는 야쿱 벡이라는 중앙 아시아의 모험가가 침입해서 난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19세기 안 그래도 흔들리는 청나라의 혼란을 더 증폭시켰지만, 대부분의 영토는 고스란히 중화민국으로도 전해졌고, 현재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건륭제의 정복 전쟁은 성과가 애매모호한 경우도 있었다. 버마에게 4번의 침략이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베트남(여왕조) 정벌에 있어서는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전염병 등의 문제로 인하여 완혜에게 패하고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형식적인 복속을 얻어내는 데 그쳤다. 어떤 역덕들은 이런 원정이 청나라의 재정에 부담이 되어 이후 청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설명한다.[30]
군사적 성공을 거두지 못해서 이 원정의 의의가 낮게 평가되는 면이 있지만, 이 전쟁 결과 청나라는 버마와 베트남과 형식적인 조공관계는 맺었으며, 이런 조공관계는 국내적, 대외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건륭제의 정치적 성공으로 선전되면서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데 기여했고, 외교적으로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이런 조공관계는 형식상의 명분을 받으면서 경제적으로는 "황제의 배포"라는 이름으로 더 큰 답례품을 줘서 조공국을 회유하는 성격이 강했는데, 이 형식으로 공식적인 외교 채널이 열린 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현안이 생기더라도 군사적 충돌보다는 외교적 교섭으로 해결할 여지가 생긴다는 점에서 꼭 실속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후 버마와 베트남은 이후 조공무역이 짭잘하다는 것을 알게되자, 형식상의 "상국"인 청나라의 영토인 북쪽으로의 확장은 단념했고, 버마는 그 대신 동서(타이 및 아라칸)로, 베트남은 남쪽(참파)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버마와 베트남 방면에서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별 충돌이 없었으므로 건륭제의 원정은 군사적 완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남방을 안정시킨 업적으로 칠 수 있다.
이후에도 청나라의 보호국 티베트를 침략한 네팔과 비슷하게 강화를 맺고 형식적인 군신관계를 맺으면서 네팔의 조공품에 후한 답례품을 주면서 네팔의 침략을 억제했다.
2.2.3. 말년
말년의 건륭제[31] |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곧바로 민생에 나쁜 영향을 주어서 건륭제가 퇴위한 이듬해인 1796년에는 한족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쇠퇴의 조짐은 보다 일찍부터 있었는데, 이미 1774년 백련교도 왕륜(王倫)이 난을 일으키다 진압된 바가 있고, 1786년에도 대만의 임상문(林爽文)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건륭제 말년의 문제들은 가경제와 도광제 대에 고스란히 짐이 된다.
건륭제는 태상황으로 퇴위하고도 권력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국정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지 않고 정무를 처리하고 조정에 자주 참석했다. 그러나 말년에 가면 건륭제의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기 시작했고 피접을 여러번이나 갔음에도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32] 결국 1799년 2월 7일에 건륭제는 자금성의 양심전에서 세상을 떠난다. 사후 그의 장례를 아들 가경제가 국상으로 성대하게 치르며 시신을 청동릉에 매장했다.
여담으로 건륭제는 8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는 중국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축에 속한다.[33] 역대 중국의 황제들은 혹독한 업무로 인한 과로나 스트레스 혹은 궁중 생활에서 비롯된 비만과 질병 등의 문제 때문에 의외로 수명이 길지 못해서 40~50세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34] 이에 반해 건륭제는 하루에 식사를 두 끼만 먹었으며[35] 콩과 나물류 등의 채식과 생선을 위주로 한 소박한 음식[36]과 제비집 요리를 즐기는 등[37], 극히 절제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장수의 한 비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8] 사실 따지고 보면 일중독자였던 조부와 아버지에 비하여서 여유를 가지고 놀았던 것도 장수의 비결이지 않을까 한다. 왜냐면 조부와 아버지, 특히 아버지 옹정제의 행적은 그야말로 과로사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옹정제는 과로사했다. 특히 명나라 주원장이 만든 권력 제도[39]에서 황제의 일은 사실 제대로 한다면 쉴 시간이 없어야 정상이다.
2.3. 문화 정책
2.3.1. 예술 애호 황제
시상을 떠올리는 건륭제.[40] |
하지만 건륭제는 이런 청교도적인 선대 황제들과는 달리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예술을 애호하는 황제였다. 본인 스스로도 서예나 서화에 능했고, 특히 글씨는 동진 시대의 왕희지, 송나라 시대의 미불, 명나라의 동기창체(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명필이라고 불릴만 했다.
또한 예술품을 수집하는 것을 즐겼다. 건륭제는 유명한 예술가들을 후원하거나 황궁에 초청해 다회(茶會)[41]를 여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런 예술가들은 초청받은 댓가로 황제 앞에서 글씨나 그림을 남겨 기증하는 대신 그림값 명목으로 두둑한 은자나 값비싼 다기를 받는 일종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건륭제는 예술가들이 팔지 않고 소장하려고 한 작품들도 팔라고 떼를 썼고, 그래서 당대의 이름난 서예가나 화가들은 걸작을 그렸을 경우 두 벌을 마련해 황제가 달라고 했을 때 복제본을 진상했다고 한다. 자기 내탕금 외에도 심복 허션이 부정축재로 모은 비자금을 써서 저명한 고서화를 수집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신은 고서화의 운치를 망쳐버린 인물로 악명이 자자하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중국화 학자로 유명한 마이크 설리번이 탐욕스러운 미술 수집가이자 빈약하고 독단적인 감식안의 소유자라고 비꼬았을 정도. 당시 고서화는 그림이 수집가에게 넘어갈 때마다 새 주인이 자신의 소유물임을 과시하기 위해 인감을 찍거나, 좋은 그림에 어울리는 감상평 혹은 시상을 적어 놓곤 했다. 생각 있는 주인들이라면 그림의 운치를 망치지 않기 위해 가장자리에 작게 찍고 썼으나[42], 건륭제의 소장품은 여러 개의 도장을, 그것도 큼지막한 도장을 그림 한가운데에 떡하니 찍고 시를 쓴 것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건륭제의 행적은 후대에 반달리즘으로 간주되고 있다.
고고정도(高高亭圖) |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 |
심지어는 북송의 휘종이 직접 그린 "계산추색도"라는 걸작을 수집하고 나서, 상술한 "고고정도"에 찍힌 것과 동일한, 큼지막한 인장을 찍어놓고, 여러 자잘한 인감을 찍은 뒤, 좌측 상단부에 자신의 엉터리 시까지 적어놓았다. #
이처럼 예술 작품을 좋아하고 유명한 시인을 초청해 시를 낭송하는 것뿐 아니라, 창작 또한 즐겨했다. 건륭제는 평생 동안 무려 43,630수나 되는 시를 썼는데, 건륭제 평전을 쓴 장훙제의 말에 따르면 당나라 시대에 활동안 시인 2000여 명의 시를 모은 선집 '전당시'에 들어간 시들이 모두 48,000수 미만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엄청난 양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건륭제의 문재는 너무나 형편없었고, 그래서 그의 시들은 전부 문학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는다. "조조의 시는 몇십 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오늘날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인데,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그저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있을 뿐이다", 건륭제가 시를 셀 수 없이 썼어도 한고제 유방이 읊은 얼마 안되는 시인 대풍가(大風歌) 세 구절의 호방함을 이길 시는 하나도 없다[43] 같은 말이 나올 정도다. 건륭제의 이런 초등학생만도 못한 작시 실력에 대한 일화도 있다.
어느해 겨울, 건륭제는 총애하던 시인 심덕잠 등 여러 신하들과 함께 항주 서호로 갔는데 마침 눈이 내렸다. 눈꽃이 바람이 휘날려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를 보자 시흥이 일은 "대시인" 건륭제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시구를 읊었다.
"일편일편우일편(一片一片又一片, 한 송이 한 송이 또 한 송이)"
사람들은 이 싯구를 듣고는 모두 '좋다'고 소리쳤고 역시 황상의 솜씨는 비범하여 한마디를 하니 천하가 깜짝 놀랄 정도라고 아부를 했다. 원칙도 없는 아부의 소리를 들으면서 건륭제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하여 읊었다.
"삼편사편오륙편(三片四片五六片, 세 송이 네 송이 대여섯 송이)"
이제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것이 '시'라면, 어린아이라도 하루에 몇 편씩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계속하여 밀물처럼 호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떠받들리기 좋아하는 주인에게 아부를 계속한 것이다. 건륭제는 기운이 나서 뒷구절을 또 읊었다
"칠편팔편구십편(七片八片九十片, 일곱 송이 여덟 송이 아홉열 송이)".
이 싯구까지 나오자 모두 멍해졌다. 설마 이 어르신이 숫자를 세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뒤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이 "백편천편만만편(百片千片萬萬片, 백송이 천송이 만만송이)"는 아니겠지? 이것도 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건륭제 역시 여기까지 읊은 후에 더 이상 시구를 잇지 못했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이런 난감한 순간에, 심덕잠이 일어나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황상의 시는 너무나 좋습니다. 바라옵건데 신이 개꼬리로 담비를 잇도록(狗尾續貂)[44]해주십시오."
마침 난감한 처지였던 건륭제로서야 당연히 윤허할 수밖에. 그리하여 심덕잠이 마지막 구절을 완성시킨다.
"비입매화도불견(飛入梅花都不見, 매화꽃으로 날아 들어가니 모두 보이지 않네)"
이 마지막 구절로 인하여 전체 시의 품격이 살아났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크게 칭찬하면서 그에게 담비가죽 옷을 하사했다. 그리고 이 시는 건륭제의 소유로 되었다.
"일편일편우일편(一片一片又一片, 한 송이 한 송이 또 한 송이)"
사람들은 이 싯구를 듣고는 모두 '좋다'고 소리쳤고 역시 황상의 솜씨는 비범하여 한마디를 하니 천하가 깜짝 놀랄 정도라고 아부를 했다. 원칙도 없는 아부의 소리를 들으면서 건륭제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하여 읊었다.
"삼편사편오륙편(三片四片五六片, 세 송이 네 송이 대여섯 송이)"
이제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것이 '시'라면, 어린아이라도 하루에 몇 편씩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계속하여 밀물처럼 호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떠받들리기 좋아하는 주인에게 아부를 계속한 것이다. 건륭제는 기운이 나서 뒷구절을 또 읊었다
"칠편팔편구십편(七片八片九十片, 일곱 송이 여덟 송이 아홉열 송이)".
이 싯구까지 나오자 모두 멍해졌다. 설마 이 어르신이 숫자를 세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뒤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이 "백편천편만만편(百片千片萬萬片, 백송이 천송이 만만송이)"는 아니겠지? 이것도 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건륭제 역시 여기까지 읊은 후에 더 이상 시구를 잇지 못했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이런 난감한 순간에, 심덕잠이 일어나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황상의 시는 너무나 좋습니다. 바라옵건데 신이 개꼬리로 담비를 잇도록(狗尾續貂)[44]해주십시오."
마침 난감한 처지였던 건륭제로서야 당연히 윤허할 수밖에. 그리하여 심덕잠이 마지막 구절을 완성시킨다.
"비입매화도불견(飛入梅花都不見, 매화꽃으로 날아 들어가니 모두 보이지 않네)"
이 마지막 구절로 인하여 전체 시의 품격이 살아났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크게 칭찬하면서 그에게 담비가죽 옷을 하사했다. 그리고 이 시는 건륭제의 소유로 되었다.
이 이야기는 청패류초(淸稗類鈔) 순행(巡幸) 에 나오는 일화라고 한다. 청패류초는 청나라의 야담, 야사를 모은 책이라서 이 시 이야기 자체는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확실한건 건륭재의 시재가 얼마나 형편없었으면 민간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는 것.
그리고 건륭제는 자신의 시재가 썩 대단하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시를 대신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은 물론 조선 사신에게도 하사했다고 한다. 청 신하들은 위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절대 권력자인 황제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겠으나, 원래부터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조선 사신들은 이를 돌려보면서 비웃었다고…
그렇다고 건륭제가 예술에 아예 부정적인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다. 건륭제는 고대 상나라 때부터 제작된 중국의 각종 예술품을 시대별, 장르별로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했으며, 등급을 매겼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거의 없었던 일이며, 이후 청나라가 망했을 때도 그대로 자금성에 소장되어 있었다. 이는 이후 국부천대 때 장제스가 그대로 옮겨가서 현재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에 가면 볼 수 있다.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
참고자료 3
2.3.2. 만주족 정체성 보존 사업
만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주족의 한화(漢化)를 걱정한 황제이기도 하다. 강희제 이후, 궁궐 내에도 중국어가 스며들게 되자 건륭제는 이 때문에 만주 귀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건륭제는 너무 많은 중국어가 만주어 상주문에 스며들었다고 불평한 후, 대학사 나친을 우두머리로 새로운 만주어 단어를 만들 테스크 포스팀을 구성했다. 이들의 활약 덕택에 중국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만주어에서 대거 사라졌는데, 대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가 생겼다고 한다. 이와 함께 만주어로 각종 중국 고전들을 번역하는 사업도 진행하였다.하지만 이미 만주어는 강희제 초기부터 쇠퇴하고 있었다. 지배계급이 된 만주족은 열심히 한학을 공부하여, 번역판 대신 한문을 직접 읽고 만주어 대신 중국어를 말하게 되었다. 건륭 연간 중후반기인 1775년에 만주족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심양 출신인 만주족 관리 과이민(果爾敏)이 조정에 출사했는데, 봉금령 때문에 한족이 거의 없었던 그 곳에서 자란 그도 건륭제의 만주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건륭제는 할 수 없이 한어로 영을 내려야 할 형편이었다.[45]
만주족의 기원을 연구해 집대성한 약 20권의 《흠정만주원류고》라는 방대한 연구서를 펴냈다. (흠정이란 말은 황제의 저서라는 뜻이다) 이 책의 편집진에서는 한족을 배제하고 만주족 석학들을 총 동원했다. 이는 아무래도 한족에 비해 역사적 기원이 불분명한 만주족의 기원을 밝혀 민족적 자긍심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의외로 이 책은 만주족의 기원에 부여, 백제, 신라 등도 포함시켰다. (정작 만주족의 전신인 말갈을 복속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빠졌다. 자세한 이유는 흠정만주원류고 항목 참조바람) 이런 시도로 만주족이 한족에 뒤지지 않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만주족의 자긍심을 세웠다.
2.3.3. 사고전서 사업
한편, 건륭제는 막대한 문화 사업을 단행하여, 중국은 물론 그때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과사전 사업을 완수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사고전서". 이 사업의 동기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그중 청나라가 진행한 '문자의 옥(文字之獄)'의 일환으로써, 전국의 책을 검열하여 백과사전에 등재하면서 청에 비판적인 서적을 삭제하고 수정하며 폐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다만 이 사업을 위해서 청나라는 수많은 선비를 고용했고, 원래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으면 백수였고 백수들은 체제에 불만이 많았겠지만, 이렇게 고용된 선비들은 국가에서 녹을 받으며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청나라에 대해 고마워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고전서 사업은 국가적 문화 진흥 및 반청 사상 규제, 지식인 계급의 회유라는 여러가지 목적을 가지고 행해졌다는 분석이 있다.
2.4. 외교
시사만화가 제임스 길레이 (James Gillary)가 매카트니 사절단의 중국 방문을 풍자한 카툰[46] |
건륭제의 재위기는 당시 조선의 영조 (재위: 1724년 ~ 1776년)와 정조 (재위: 1776년 ~ 1800년)의 시기와 거의 일치하며 청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서 그런지 청을 배경으로 한 중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조공무역에만 익숙한 중국은 명나라 초기까지 외국과의 무역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명나라 중반에 희망봉을 돌아온 포르투갈에 마카오(아오먼)을 개방한 후, 해외무역이 짭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제 비단, 도자기, 차 및 각종 수공예품은 서양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막대한 무역흑자를 보았고, 이는 막장이 되었던 명나라의 재정을 지탱해주는 것이었다.[47] 청나라는 명나라 제도를 고스란히 계승했고, 서양과의 무역이 큰 이익을 본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방 문화나 기독교가 중국에 유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광저우나 일부 남부 해안지방에서만 무역을 제한적으로 허가했다.[48] 조정의 허가를 받은 중국인 상인들을 공행(公行)이라고 불렀는데, 이 공행들만이 서양의 배에 올라가 거래할 수 있었고, 서양 선박의 선원의 상륙은 금지되었으며, 오직 상품과 보급품의 선적만이 가능했다.
18세기에는 영국과 영국 동인도회사가 경쟁국이던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를 모두 제치고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건륭제 말년에 통상확대를 요청하는 사신을 청나라 조정에 파견했다. 인도 마드라스 총독을 지냈던 외교관 출신인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49]는 이 사절단의 대표를 맡았다. 이 사절단은 여러척의 배로 구성된 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792년 9월 영국 포츠머스에서 출발한 후 계절풍 시즌을 기다리며 일단 남미의 리우데자네이루로 갔고, 그곳에서 보급한 후 희망봉을 돌아 다음해 6월에야 광저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들은 황제를 알현하고 싶다고 청나라 관리에 밝혓으나, 외국인의 상륙을 금지하는 청나라측과 옥신각신했는데, 매카트니는 황제에게 진상할 선물은 직접 들고가야 한다고 우겨서[50], 결국 허가를 받아 황해를 거쳐 톈진에 도착, 다시 대운하를 타고 1793년 8월에야 베이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륭제는 당시 베이징을 떠나 피서산장(여름 궁전)이 있는 숭덕에 주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영국 사절단도 숭덕이 있는 만리장성 근처까지 이동해야 했고, 결국 영국을 떠난지 1년만인 9월 14일에야 건륭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이때 청나라 신료들은 매카트니에게 청나라식 삼배구고두례를 갖출 것을 요구했으나 매카트니는 거부[51]는 했는데 동양권의 조공 문화에 익숙지 않은 서양인에게 행하라고 했으니 온전히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던 것.[52] 건륭제의 뒤편에 영국 왕 조지 3세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결국 매카트니는 한쪽 무릎만 꿇었다고 한다.[53] 조공국의 방문으로 여긴 건륭제와 대등한 관계의 접촉으로 여긴 영국의 입장 차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에 양보하기 어려운 순서이기도 했다. 여하튼 건륭제가 관대하게 매카트니의 주장을 받아줘서 매카트니가 한쪽 무릎만 꿇는 것으로 예를 표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기록으론 건륭제의 단호한 요구대로 결국 절을 하고 말았다는 기록도 있다.
여기엔 당시 영국 사절단의 행동이 본의아니게 청나라의 오해를 산 부분도 있다. 영국에서 보낸 사절단에 대해 건륭제와 청나라 조정에서 무작정 '외국에서 오는 사신은 무조건 조공하러 오는 것'라는 식의 단세포적인 판단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매카트니를 비롯한 영국 측에선 처음 청나라 측에 방문 사실을 통보할 때부터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러 왔다.', '황제에게 진상할 선물을 직접 가지고 가서 알현하겠다'라고 밝혔다. 즉 공식적으로 밝힌 접촉 목적부터가 동아시아식 조공을 위한 사절단으로 오해받기 쉬웠던 것. 청나라 측에서 영국 측의 반응에 대해 당황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조공을 하러 온게 아니다'라고 밝힌 것도 아니니 청나라 입장에선 '황제 폐하의 생신을 축하하러 왔다며? 선물도 직접 가져 왔다며? 그럼 조공하러 온게 맞는데 왜 저래?'라는 오해를 사게 만든 것.
당시 매카트니 사절단이 가져온 조지 3세 친서에는 청의 공행 무역을 폐지하고 자유 무역 허가, 교역량 증대, 대사관 설치, 대사의 상주를 허용, 덤으로 일부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즉, 중국 해안의 작은 섬을 할양해서 영국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영국이 요구한 자유 무역은 그렇다 쳐도 영토 할양은 상당히 무리한 요구였다. 현재도 그렇지만 이런 요구는 전쟁까지 부를 수 있는 무례한 요구임에 틀림없고, 상대가 천자국을 자처하던 청나라였으니 더욱 더 받아들여질리 만무했다. 결국 이 사절단이 실패한 원인은 일부에서 말하는대로 매카트니의 삼배구고두가 거부가 아니라, 영국이 요구가 워낙 무리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매카트니와 영국 사절단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그래도 건륭제는 나름 자세히 이유를 설명한 거절 답서[54]와 함께 조지 3세의 선물에 대한 답례품을 챙겨 줘서 매카트니 일행을 보냈다.[55]
매카트니 사절단이 가져온 조지 3세의 선물은 각종 모직물과 기기묘묘한 완구 및 마차, 열기구와 지도 따위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하필이면 마차의 마부가 황제 바로 앞에 앉게 되는 식으로 설계가 된 바람에 건륭제의 기분이 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지만, 사절단이 실패한 것은 이런 기분 탓은 절대 아니고, 결국은 영국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요구는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하고서야 굴욕적인 난징조약의 조건으로 포함되었고, 그 결과 50년 전 매카트니 사절단의 요구대로 중국의 대부분의 해안 항구가 개방되며, 홍콩이 영국에게 넘어간다.
일부 서방역사가들은 이렇게 매카트니 일행을 거부한 건륭제의 쇄국정책이 청나라의 몰락을 불렀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건륭제의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세계관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건 명백히 영국이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건륭제를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게 서방의 인종주의인 백인의 의무적 관점에서 판단한 것이다. 어차피 영국도 그 이전(1780년대)부터 중국에 아편을 팔고 있었고, 이를 확대하기 위해 건륭제에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기 때문에 선의를 가지고 청나라에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1762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왕조의 지도자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베이징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해당 사절단은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북인도의 마라타 동맹을 격파한 전공을 과시하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하였다. 두라니 왕조 사절단은 네 마리의 최상급 준마를 선물하였지만 건륭제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측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다 한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은 군비 문제로 신장 서부 지역으로 추가적인 원정을 실시하지는 못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측 역시 아흐마드 샤 두라니 이후 두라니 왕조가 와해되면서 청나라 조정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대치상태도 막을 내렸다.
한편, 조선과 다른 쪽으로 연관이 있기도 한데,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 사신단에 끼어간 인물이 바로 박지원. 즉, 열하일기가 바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저서였던 것이다.[56]
보호국인 티베트를 두고 네팔과 전쟁을 벌였다. 힌두교를 믿던 네팔은 티베트 불교의 원산지였던 티베트와 사이가 나빴고 건륭제 치세에 계속 침략을 벌였다. 1788년에 벌어진 이 전쟁에서 티베트는 계속 패했고 종주국인 청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청나라는 군부실세 부찰 복강안이 이끄는 병력을 보냈으나, 워낙 고산지역인데다가 네팔군의 주력이 구르카병이었기 때문에 천하의 팔기군도 전투에서 밀렸다. 복강안은 네팔군 격파가 쉽지 않음을 알고, 네팔측에 크게 양보해 강화를 맺었다. 겉보기에는 네팔이 형식상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지만, 티베트는 네팔에게 조공을 바치고, 네팔의 청나라와 교역을 허가하여 네팔에 경제적 이익을 안기는 것으로 티베트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할아버지인 강희제 때와 비슷하게 본인 치세의 각국의 군주들 또한 묘하게도 중흥기 아님 전성기를 가져온 군주들이었다. 우선 조선에는 영조·정조, 오스트리아-헝가리·보헤미아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 러시아 제국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 그리고 미국엔 군주는 아니지만 미국 최초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도 있다.
2.5. 신앙 및 종교 정책
신하들한테 충성을 강조하면서 과거 명나라의 신하였다가 청나라한테 항복했던 전겸익(錢謙益)[57]을 가리켜 "글재주는 있었지만 지조가 없었으니 입에 담을 가치조차 없다. 그가 쓴 책은 모조리 불태워야 한다."고 혹평하면서 이신전(貳臣傳)이라는 문헌을 만들어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했던 신하들을 비난하였다.[58] 그리고 명나라 사직을 위해 만주족이나 이자성군과 싸우다 전사한 명나라 충신들에게 대거 시호와 벼슬을 추증하고, <흠정승조순절제신록>을 펴내 이들의 충절고사를 기록했다.그러나 유교는 신봉하지 않았다. 강희제와 옹정제는 한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유학자 코스프레를 하며 공자의 상에 경의를 표했으나 만주족의 전통을 보호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던 건륭제는 이러한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티베트 불교를 국교로 삼은 원나라 황제의 후신인 몽골의 대칸을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륭제는 티베트 불교의 신자이기도 했다. 만주족 왕은 대대로 문수보살의 현신으로 자처했으며,[59] 건륭제를 문수보살로 묘사한 티베트 불교의 탱화도 존재한다.[60] 티베트 불교의 지주인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삼고 북경에 모셔와 법론을 듣기도 했다. 건륭제는 늙어서는 불상을 모으는 취미를 가져 금불상을 사들이거나 궁정에서 직접 주조하기도 했다. 부처님을 묘사한 도자기나 그림, 조각에 본인이 직접 글씨를 남긴 작품도 여럿 전한다.
대체로 강희와 옹정은 도교를 이전 왕조만큼 대접했지만, 건륭제는 도교를 탄압했는데, 도교와 불교가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옹정제가 병환에 들자 도사가 바친 금단을 먹었는데 효과가 없이 옹정제가 죽자, 건륭제는 도교에 깊은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고도 한다.
건륭제는 강희 시절부터 부침이 있을지언정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자라왔기 때문에 서양 문화에 대해서 관심은 제법 있었으나 이를 개인적 취향이나 사치가 아닌 국가 과학 기술, 문화 예술 부흥으로까지 개방하는데에는 무관심했고, 서양이 중국에 퍼뜨리려고 한 기독교, 특히 가톨릭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금지령을 내렸다.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를 기용한 강희제처럼 건륭제 역시 예수회 수사인 화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등의 서양인 측근을 일부 거느리고 있었으나, 이들은 겉으로는 선교활동을 하지 않고 황제의 개인적인 공부에 있어서만 도움을 줬기 때문에 무사했으며, 카스틸리오네를 따라온 천주교 북경교구의 수사들도 건륭제의 개인적인 취향 덕에 오랫동안 방조와 묵인 하에 지하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청나라에 드나들던 조선 역관과 상인들이 북경의 '천주학' 서적을 입수하여 조선에 들여와 연구하다 스스로 신앙의 차원으로 천주'교'인이 된 것 역시 이 시기. 허나 가톨릭은 강희제 시절 중국에서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비난하는 전례문제를 일으킨적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이에 민감하게 대응했고, 그리하여 강희 이래로 청조는 천주교 박해를 이어갔으며 건륭제 역시 1746년 금교령을 내림과 동시에 이를 어기고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마카오로 추방하고 중국인 신자와 사제들은 전부 신강을 비롯한 사막 오지로 유배보냈다.
문제는, 건륭제가 북경의 선교사들을 개인적 취향[61]으로 거느리면서 국가정책으로는 천주교를 금한다는 내로남불적인 입장을 표하다보니 지방 총독, 순무, 포정사부터 최말단 지현까지, 그리고 주방팔기 군인들까지 이에 대해 입장이 제각기 따로놀았다는 것. 어떤 지방관들은 조정 관료들의 가족들도 입교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에 따라 지방 선교사들의 활동을 묵인하거나, 더러는 선교사들로부터 보호비 성격으로 뇌물을 뜯거나 도리어 자기 식솔들이 몰래 세례를 받아서(…) 적극적으로 은폐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지방관은 건륭제의 금교령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여 서양인 신부를 하느님 나라로 보내버리자 건륭제에게 칭찬을 받아 승진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번은 포르투갈이 명나라 때부터 깃발을 꽂아놓아 청나라가 함부로 손댈 수 없던 (잘못 건드리면 아편전쟁이 반세기 일찍 터질 수도 있는 위치인) 마카오까지 청나라 광동의 지방관들이 쳐들어가 단속을 벌이자 서양인 신부들이 대폭발하여 성당 앞에 뛰쳐나와 "불쌍한 신자들은 냅두고 내 머리를 가져가라! 순교자가 되어 천주님의 곁으로 가겠다!" 하며 뻗대는 기이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오히려 천주교인들은 백련교를 비롯한 사이비 종교와 혼동한 사람들이 사교를 믿고 역적질을 꾀하는 무도한 서양인들을 고발한다고 관청에 신고하다 정체가 드러나는 일도 잦았는데, 이 경우에도 지방관의 자비에 따라 운명이 크게 갈리곤 했다.
다만 러시아 정교회는 18세기부터 중국 선교의 자유를 얻어 중국에 신학교를 세우고 포교하고 있었고, 안정된 법적 지위를 보장 받았다. 이는 19세기 중반에야 공식 외교 관계를 맺은 다른 서양 국가들과 달리, 러시아는 이미 17세기에도 청이 정확히 실체를 파악하고 공식 외교 관계(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를 맺은 서양 국가이기 때문이다. 1727년 캬흐타 조약을 통해 청 정부는 북경에 러시아 정교 성당 및 선교사 거주를 허락했다.
3. 가정 관계
수많은 후비가 있었지만 건륭제 사이에서 자식을 낳은 이는 효현순황후, 계황후, 효의순황후, 철민황귀비, 숙가황귀비, 순혜황귀비, 유귀비, 흔귀비, 서비, 돈비로 열명에 불과하다. 혜현황귀비, 용비는 총애를 받은 것으로 보이나 자식은 없었다. 할아버지 강희제가 여러 후궁에게서 수십명의 자식을 본것과는 대조적이다.열 명의 후비 가운데 아이를 둘 이상 낳은 이는 효현순황후, 계황후, 효의순황후, 철민황귀비, 숙가황귀비, 순혜황귀비, 흔귀비다. 아이를 낳은 이들 대부분이 보친왕 시절부터 함께한 후비인 것이다. 건륭황제가 즉위한 뒤에 들어온 후궁 중에서는 효의순황후와 흔귀비만 아이를 여럿 낳았다.
이들이 건륭이 총애했던 후비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남아있는 초상화를 보면 화법 때문인지는 몰라도 공통적으로 매우 마르고 좁은 얼굴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옛날 초상화임에도 상당히 미인들이다.
건륭제의 후궁은 출신이 다양하고 이야기도 많아서 여러 야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건륭제의 후궁들 역시 출신이 다양한데, 또한 조선 출신 조상을 둔 숙가황귀비, 위구르 족인 향비, 팔기군도 아닌 한족인 순혜황귀비 등이 있다.
3.1. 아내
효현순황후 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1712년 출생 ~ 1748년 사망
- 황장녀 1728년~1729년
- 황2자 단혜황태자 영련(永璉) 1730년~1738년
영련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옹정제가 지어준 것으로 璉자에는 이어지다라는 뜻이 있다. 건륭 원년에 밀건법으로 황태자에 임명하였다. 영련이 죽자 건륭은 슬퍼하며 무덤을 성대하게 만들었다. - 황3녀 고륜화경공주 1732년~1791년[62]
- 황7자 화석철친왕 영종(永琮) 1746년 ~ 1747년
부처님오신날에 태어났는데 가뭄이 오래 지속되었다가 마침내 단비가 내렸다고 하며 태어나자 마자 엄청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천연두로 요절하게 되며 친형이 안치되어있는 단혜황태자원에 안치되었다.
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 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건륭제도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효현순황후는 성정이 어질고 소박했으며 태후에게도 효성스러웠고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다. 한번은 건륭제가 크게 앓은 적이 있는데 쾌유한 뒤에도 어의는 "반드시 100일은 푹 쉬어야만 원기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당부했다. 황후는 매일 밤 건륭제의 침실 밖에 거주하면서 정성을 다해 100일 동안 시중을 든 뒤에야 비로소 합방했다.[63]
하지만 효현순황후는 건륭 13년에 지방 순행 중 더저우 (德州)에서 죽었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 그 지역에는 건륭제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의 개혁 성향이 이즈음부터 크게 꺾이고 본인은 천자 놀음에 더 신경 쓰면서 제국은 슬슬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런데 건륭제는 이 황후의 남동생인 푸차 푸헝(富察 傅恒)의 부인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야사가 있다.
계황후 호이파나라씨(繼皇后 輝発羅拉氏)
1718년 출생 ~ 1766년 사망
수녀 선발에 참여했다가 옹정제의 눈에 띄어 보친왕 왕부에 시집을 갔다. 시집 올 때부터 측복진으로 들어왔다. 당시 보친왕부의 여자들은 적복진(훗날 효현황후) 부찰씨 말고는 모두 격격이었는데 휘발나랍씨는 바로 측복진으로 들어온 것이다. 왕부에 들어온 여인들 가운데 완귀비 진씨와 함께 제일 어린 편이었고, 제일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다.
측복진이 된지 9달만에 보친왕이 건륭제로 즉위해 후궁이 되었다. 건륭제 즉위 후 ‘우아할 한’의 봉호를 받고 한비(嫻妃)에 봉해졌으며, 이는 효현황후와 귀비 고씨에 이어 서열 3위의 위치였다.
후에 귀비(嫻貴妃)로 올랐다. 효현순황후가 죽고 난 뒤 황귀비섭육궁사에 봉해져 사실상의 건륭제의 아내가 되었다. 이 는 전례를 깨뜨리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전에도 후궁이 내궁의 일을 분담하는 것은 일상적이었으나 감히 황제의 정식 아내인 황후의 역할을 후궁 한명이 전담하는 것은 원칙상 불가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섭육궁사라는 지위를 만들어 아직 후궁인 호이파나라씨에게 황후의 역할을 맡기고, 효현순황후의 상이 끝난 뒤 바로 정실 아내로 삼았다.
황후가 된 호이파나라씨는 일가가 만군 팔기 상삼기인 정황기로 승격되었으며, 건륭 사이에서 아이를 연이어 셋이나 낳으며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건륭 30년 남순 중 미스터리하게 북경으로 돌려 보내지고, 총애를 잃은 채 냉대를 받다가 죽게 된다. 심지어는 죽고 난 후의 장례 절차마저도 황귀비의 예에 따라 치르도록 건륭제가 명령하였으며, 건륭제는 슬퍼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친자인 황12자만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64] 그녀가 갑작스럽게 총애를 잃은 이유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있으며, 여러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뒤끝이 장난아니던 건륭제는 계황후가 그려진 초상화를 모두 태우거나 얼굴을 고쳐 그렸으며, 계황후에 대한 처사가 부당하다는 대신들 역시 파면되거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유일하게 장성한 황12자 영기 역시 죽고 나서야 동생 가경제에 의해 패륵으로 추존되었다고 한다.
효의순황후 워이기야씨(孝儀純皇后 魏佳氏)
1727년 출생 ~ 1775년 사망
- 황7녀 고륜화정공주 1756년~1775년[65]
- 황14자 영로(永璐) 1757년~1760년
- 황9녀 화석화각공주 1758년~1780년[66]
- 황15자 인종 예황제 영염(永琰) 1760년~1820년
- 황16자 영선 1762년~1763년
- 황17자 화석경의친왕 영린(永璘) 1766년~1820년
만주 정황기 포의 출신인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 위씨를 총애하였다. 청나라는 기인 중에서 후궁을 뽑고 상삼기 포의 중에서 궁녀를 뽑는데 위씨는 정황기 포의 출신이라 처음에는 궁녀였을 것으로 본다. 건륭의 눈에 띄어 건륭 10년 귀인으로 봉해졌다. 같은 해 ‘하여금 영(令)’의 봉호를 받고 영빈으로 오르고 4년 뒤에 다시 영비로 오르는 고속 승진을 했다. 황7녀, 황14자를 낳은 후 건륭 24년에 귀비에 봉해졌다. 계황후가 유폐된 후 황귀비(令皇貴妃)로 승격되어 서비 예허나라씨 등과 함께 육궁을 관리했다. 계황후와 달리 평범한 후궁작위로서의 황귀비였다. 황후가 될 수 없었던 출신으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황제에게 큰 총애를 받아 황7녀 고륜화정공주를 시작으로 해마다 아이를 출산했다. 역대 청나라 후비를 통틀어 제일 아이가 많다. 건륭 치세 후반기에 낳은 아이들은 거의 효의순황후 사이에서 본 자식들이다.
첫째 딸이자 맏이였던 고륜화정공주가 죽고 불과 몇달뒤에 훙(薨) 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이후 건륭제가 그녀의 아들인 황15자 영염에게 선위하여 가경제가 된다. 그녀는 사후 남편인 건륭제가 직접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로 추증해주었다. 황제의 생모는 무조건 황후여야 했기 때문이다. 성씨에 ~가(佳)가 붙여져[67] 일가가 만주족 팔기에 편입된다.
효의순황후가 죽은 뒤 비빈 중 가장 연장자였던 서비 예허나라씨와 유비 커리예트씨가 육궁을 관리했지만 그마저 죽은 뒤로 내명부는 건륭이 완전히 다스리게 된다.
3.2. 후궁
철민황귀비 푸차씨(哲憫皇貴妃 富察氏)1735년 사망
- 황장자 정안친왕(定安親王) 영황(永璜) 1728년 ~ 1750년
- 황2녀 1731년 ~ 1731년
- 보친왕부 격격 - 철비(哲妃)로 추봉(옹정 13년, 1735년) - 철민황귀비(哲憫皇貴妃)로 추봉(건륭 10년, 1745년)
혜현황귀비 고기야씨(慧賢皇貴妃 高佳氏)
1711년 출생 ~ 1745년 사망
- 보친왕부 격격 - 보친왕부 측복진 - 귀비(貴妃, 옹정 13년, 1735년) - 죽기 전 황귀비(皇貴妃)로 특진(건륭 10년, 1745년) - 혜현황귀비(慧賢皇貴妃)로 추봉(건륭 10년, 1745년)
건륭제는 즉위하면서 고씨를 첩의 작위 중 제일 높은 등급인 귀비(貴妃)로 봉했다. 건륭제의 등극 이후 고귀비는 초봉 귀비(처음 봉해질 때부터 귀비)로 봉해졌다. 한단계씩 승진하여 올라오는 다른 귀비들과 달리 초봉 귀비는 봉호도 없고[70] 황후에 감히 미치지는 못하지만 준정실의 지위이다. 고씨는 동서궁복진[71]의 예우를 받은 돈숙황귀비의 선례를 따랐고[72], 황후처럼 명황색 용포를 입을 수 있었다. 고씨는 명문가의 숙녀로 오랜 시간 건륭제를 성심성의껏 모셨지만, 몸이 약해 34세의 젊은 나이로 병을 얻어 일찍 사망했다. 건륭제는 그가 죽기 직전에 황귀비로 특진시켜 주었다. 몸이 약해 일찍 죽었기에 자식은 없다. 고귀비 사후 권세를 누리던 고씨 일가는 몰락했다. 만주 팔기로 편입되었긴 했지만 말이다. 건륭의 부황인 옹정제의 총비였던 돈숙황귀비 연씨와 매우 흡사한 인생을 살았다. 살아생전 부군인 황제의 총애를 많이 받았지만 일찍 요절했다. 사후 형제들이 황제의 처벌을 받았다는 점도 비슷하지만 그것이 가문의 권세까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순혜황귀비 소씨(純惠皇貴妃 蘇氏)
1713년 출생 ~ 1760년 사망
- 황3자 순군왕 영장(永璋) 1735년~1760년[73]
- 황6자 화석질장친왕 영용(永瑢) 1743년~1790년[74]
- 황4녀 화석화가공주 1745년~1767년[75]
- 보친왕부 격격 - 순빈(純嬪, 옹정 13년, 1735년) - 순비(純妃, 건륭 2년, 1737년) - 순귀비(純貴妃, 건륭 10년, 1745년) - 죽기 전 황귀비(皇貴妃)로 특진(건륭 25년, 1755년) - 순혜황귀비(純惠皇貴妃)로 추봉(건륭 25년, 1755년)
숙가황귀비 긴기야씨(淑嘉皇貴妃 金佳氏)
1711년 출생 ~ 1755년 사망
- 황4자 화석이단친왕 영성(永珹) 1739년(건륭 2년)~1777년[76]
- 황8자 화석의신친왕 영선(永璇) 1746년(건륭 11년)~1832년
- 황9자 영유(永瑜) 1748년(건륭 13년)~1749년
- 황11자 화석성철친왕 영성(永瑆) 1752년(건륭 17년)~1823년[77]
- 보친왕부 격격 - 김귀인(貴人, 옹정 13년, 1735년) - 가빈(嘉嬪, 건륭 3년, 1738년) - 가비(嘉妃, 건륭 6년, 1741년) - 가귀비(嘉貴妃, 건륭 13년, 1748년) - 죽고 난 뒤 숙가황귀비(淑嘉皇貴妃)로 추봉(건륭 20년, 1755년)
경공황귀비 육씨(慶恭皇貴妃 陸氏)
1724년 출생 ~ 1774년 사망
육귀인(陸貴人, 1748년) - 경빈(慶嬪, 건륭 16년, 1751년) - 경비(慶妃, 건륭 24년, 1759년) - 경귀비(慶貴妃, 건륭 33년, 1768년) - 경공황귀비(慶恭皇貴妃)로 추봉(가경 4년, 1799년)
상재(常在)로 있다가 귀인으로 진봉했다. 효의순황후의 아들이자 훗날 가경제로 즉위하는 15황자 영염을 키웠다. 이 때문에 태상황 건륭제가 죽은 뒤 가경제의 손에 의해 황귀비로 추봉된다. 별 탈 없이 귀비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건륭제의 여러 총비 가운데 하나로 보이나 자식은 없다.
유귀비 커리예트씨(愉貴妃 珂里葉特氏)
1714년 출생 ~ 1792년 사망
- 황5자 화석영순친왕 영기(永琪) 1741년~1766년
- 해상재(海常在, 옹정 13년, 1735년) - 해귀인(海貴人, 건륭 2년, 1737년) - 유빈(愉嬪, 건륭 6년, 1741년) - 유비(愉妃, 건륭 10년, 1745년) - 죽은 뒤 유귀비((愉貴妃)로 추봉(건륭 57년, 1792년)
완귀비 진씨(婉貴妃 陳氏)
1716년 출생 ~ 1807년 사망
- 보친왕부 격격 - 진상재(陳常在, 옹정 13년, 1735년) - 진귀인(陳貴人, 건륭 2년, 1737년) - 완빈(婉嬪, 건륭 13년, 1748년) - 완비(婉妃, 건륭 59년, 1794년) - 완귀태비(婉貴太妃, 가경 6년, 1801년)
영귀비 바린씨(穎貴妃 巴林氏)
1731년 출생 ~ 1800년 사망
- 나상재(那常在, 건륭 13년, 1748년) - 나귀인(那貴人, 건륭 13년, 1748년) - 영빈(潁嬪, 건륭 16년, 1751년) - 영비(潁妃, 건륭 24년, 1759년) - 영귀비(潁貴妃, 가경 3년, 1798년)
흔귀비 다이갸씨(忻貴妃 戴佳氏)
출생시기 알 수 없음, 1764년 사망
- 황6녀 1755년 ~ 1758년
- 황8녀 1757년 ~ 1767년
- 흔빈(忻嬪, 건륭 18년, 1753년) - 흔비(忻妃, 건륭 28년, 1763년) - 죽은 뒤 흔귀비로 추봉(忻貴妃, 건륭 29년, 1764년)
순귀비 이르건기오로씨(循貴妃 伊爾根覺羅氏)
1758년 출생 ~ 1798년 사망
- 귀인(貴人, 건륭 41년, 1776년) - 순빈(循嬪, 건륭 41년, 1777년) - 순비(循妃, 건륭 57년, 1792년) - 사망 후 귀비로 추숭(가경 2년, 1798년)
서비 예허나라씨(舒妃 葉赫那拉氏)
1728년 ~ 1777년효의순황후의 딸인 황9녀 화석화가공주(和碩和恪公主)를 길렀다.건륭 40년(1775년) 내명부와 육궁을 다스리던 황귀비 위씨(효의순황후)가 병사하자 궁중 비빈 가운데 제일 높은 비빈이 되어 육궁을 관리하게 되었다. 건륭제는 계황후의 유폐 이후로는 황후를 따로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짬 있는 후궁들도 저마다 한가닥 할 수 있었다. 서비 예허나라씨가 이들 가운데 제일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제일 발언권이 강했다.
용비 호자씨(容妃 和卓氏, خوجام, Xojam) 일명 향비
1734년 출생 ~ 1788년 사망
본명은 화탁 파티마 (위구르어 : فاتىمە, Fatime)라는 설이 있다. 아버지는 엘리화탁씨 (위구르어 : ئەلى خوجام), 동생은 투르드화탁씨 (위구르어 : تۇردۇ خوجام)이다.한국어 위키백과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건륭제가 위구르의 소화탁훠지잔(霍集占)을 쳐 그 전리품으로 데려온 여성이고, 소화곽탁집점의 딸 혹은 첩이었다고 한다. 출생이 출생인지라 많은 전설이 내려오는 여성이다. 외모는 아주 아름다웠고 페로몬 내음이 강하게 났다는 전설도 있다. 건륭제는 그녀를 아주 깊게 사랑했다고 한다. 건륭제는 출신과 문화가 달랐던 용비 화탁씨를 위해 자금성 밖 북경 황성 중난하이에 보월루를 지어 궁에서도 이슬람식 생활을 영유할 수 있도록 특별히 보장해주고 보월루에 가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또한 용비에게 회족 요리사를 붙여주었으며 보월루에서 매일 내려다 볼 수 있는 거리에 회족거리를 조성해 그녀가 고향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도록 해주었다. 건륭제는 위구르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문제 없이 이뤄졌다고 한다. 황제의 딸 2기에 나온 함향이 이 향비이다(그리고 드라마에서는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
돈비 왕씨(惇妃 汪氏)
1746년 출생 ~ 1806년 사망65세 때 돈비 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늦둥이 딸을 특별히 총애했다고 한다.[82] 자연히 어미였던 왕씨도 총애를 많이 받았다. 화효 공주는 건륭제의 외모며 성격, 재능을 유난히 닮아 여러 면에서 출중했던지라 건륭제는 그녀를 보며 '네가 아들이었다면 너를 태자로 삼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딸을 각별히 사랑한 건륭제는 그녀가 후궁 소생의 공주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고륜 공주로 봉해주었으며[83], 미행이나 사냥에도 그녀를 동반하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또 본인이 각별히 총애했던 권신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巨富)였던 허션의 장남 니오후루 펑션인더(ᠨᡳᠣᡥᡠᡵᡠ ᡶᡝᠨᡤᡧᡝᠨᠶᡝᠨᡩᡝ, Niohuru Fengšeninde, 紐祜祿 豊紳殷德, 뉴호록 풍신은덕)와 일찍이 정혼시켰고, 1789년 11월 17일에 결혼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남았는데, 그녀의 혼인 당시 융숭한 총애와 사치스러운 혼수는 저번 공주의 혼사에 비해 10배나 되었고, 공주의 집으로 실어 보내는 물건들은 대충 어림잡아 봐도 수백만 금이 넘었으며, 그녀가 시가로 가던 날에는 수천 수백 명에 달하는 고관들이 참석하여 작별을 고하는 절을 했다고 한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청나라의 최대 강역[84] |
건륭제의 치세는 할아버지 강희제, 아버지 옹정제와 함께 강건성세[85]라고 불리며 청나라 최대 전성기로 여겨졌고, 음습한 느낌에 내치에 주력한 아버지 옹정제의 치세와 달리 건륭제는 정복 전쟁이라는 화려한 군공도 세웠기에 오랜 시간 고평가를 받았다.
건륭제가 청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힌 것은 본인도 "십전노인"으로 자화자찬하는 최대의 업적이다. 이것은 준가르부를 멸망시킨 부산물로 얻어진 것인데, 건륭제는 명나라 때부터 역대 중국왕조에 골치를 썩이던 준가르(오이라트)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 멸족을 결정했다. 요새 말로 하면 학살자라 할 수도 있는데, 건륭제는 출진하기 전에 준가르가 명나라 때부터 이어져 온 중국의 골치거리였고,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변명했다. 실제로 준가르와 그 전신인 오이라트는 북로남왜에서 알 수 있듯이 명나라 시절부터 감숙성과 섬서성 일대를 약탈과 노예납치로 어지럽혔고, 청나라는 처음에는 조선이나 내몽골처럼 군신관계로 복속시켜 이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준가르는 입조와 배신을 반복하면서 청나라의 신경을 긁는지라 건륭제는 아예 씨를 말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준가르부는 청나라는 물론 주변 민족[86]에 성상납 강요나 노예 납치 등 여러 원한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준가르족을 돕거나 퇴로를 열어주지 않았다.[87]건륭제는 준가르부가 멸족되어 공지가 된 지역에 타림분지 서쪽에 있던 카자흐족과 남쪽의 위구르족을 불러 살게 했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인도적으로는 매우 비난받을 일이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준가르가 여러 민족의 원한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에는 어쨌든 청나라 백성뿐만 아니라 주변 민족들은 준가르부 멸족을 기뻐했고[88], 건륭제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외몽고, 일리를 중국의 영역으로 들여온 것은 바로 건륭제의 업적이다. 청나라 고유영토였던 만주에다가 명나라 영토를 더했던 강희제 시대의 청나라 영토에서 40% 정도를 늘려놓았다. 다만 일리는 러시아에 잃어버리고, 외몽고는 이후 분리 독립한다. 이런 확장이 지금에 봐서는 엄청난 전비 지출 및 이후 점령지 관리 비용 증가로 청나라의 멸망의 한 원인이 된다고 보기도 한다.[89] 하지만 어떤 대제국도 이러한 확장 후에 쇠퇴가 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건륭제 개인의 오판이나 실책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영웅사관적 관점이다.
건륭제가 여러모로 강희제나 옹정제보다 사치를 좋아하고 과시욕이 강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건륭제의 사치는 주로 서화나 도자기와 같은 예술품을 모으는데 사용되었으며, 도로나 운하를 보강하는 인프라 공사를 많이하긴 했지만, 진짜로 국가재정에 무리를 줄 수 있는 사치성 토목공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90] 당시 청나라의 재정은 세금을 계속 깎아줄 정도로 철철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에, 건륭제의 사치때문에 청나라가 쇠퇴했다는 주장은 침소봉대나 다름 없다. 또한 이런 건륭제의 과시욕과 수집욕이 옹정제의 금욕적 정치와 비교되기는 하지만, 옹정제식의 독재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중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옹정제 자신이나, 그 신하들의 피로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결과적으로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보다도 훨씬 단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건륭제가 재위 초창기에 아무 생각 없이 신하들을 방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옹정제가 태묘에 같이 가자며 신임했던 장정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장정옥은 옹정제 시절 혹사를 당했고, 건륭제가 재위에 오르자 계속 건강을 핑계로 사직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고, 건륭제 시절 장정옥은 낙향하고 다시 부름을 받아 출사하기를 반복했다.
그 밖에 건륭제가 할아버지 강희제를 본받아 강남순방을 하면서도 할아버지와는 달리 백성들에게 비용을 징수, 강남을 황폐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건륭제는 총 6차례에 걸처 강남을 순행했는데, 준가르부 토벌이 마무리된 청나라 중기부터는 청나라는 재정이 풍족하여 건륭제는 오히려 가는 곳마다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그 이유는 강남에는 반청감정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토닥이려는 의도도 있었다.[91][92] 건륭제 시절까지만 해도 청나라 조정은 늘어난 재정을 주체를 못해서[93] 계속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을 폈고, 막대한 무역흑자를 볼 수 있는 대 서방 교역도 매우 꺼릴 정도로 재정이 풍족했다.
건륭제 말기에 민생이 어려워진 것은 건륭제의 원정이나 사치로 인한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의 폭발적 증가 때문으로, 강희제 초에 1억5천~2억에 불과했던 청나라 인구는 건륭제 말기가 되면 3억에 달해서 100년만에 인구가 두배로 뛰었기 때문이다. 옹정제도 이런 문제에 심각성을 느끼고 황무지 개간 사업을 했으나 강희제 시절보다 1인당 실 경작지가 감소했다. 이미 쓸만한 땅은 강희제 시절에 대부분 개간되어서 옹정제는 해안가나 북방에 하천을 정비하고 저수지를 확보하여 논농사를 지을 땅을 확보하고자 했는데 일부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제외하면 성과가 미미했고 가뭄으로 인해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건륭제는 논농사를 짓기 부적합한 땅을 밭으로 바꾸며 옹정제의 실패한 정책을 수습한 것이다.
아래에 일부 재중 선교사들의 견해로 중국에 대한 평가가 서양에서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정작 당시만 해도 서방에서 중국이란 동쪽에 있는 최강대국이었다. 가경제 시기에 프랑스의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만 하더라도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마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에서 당시 중국에 대한 평가가 드러난다. 중국의 쇠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던 시기는 건륭제나 가경제 시기가 아니라 그 다음인 도광제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재정이 박살난 원인은 가경제 초기(실질적으로 건륭제의 말년)에 발생한 백련교도의 난 및 묘족의 반란이 거의 10년을 끌어 전비만 수억냥을 지출할 정도로 악전고투했고, 1810년대부터 중국에 아편이 유행하면서 무역수지가 적자로 들어서고, 아편 중독자들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여 현대로 말하면 "쌍둥이 적자"를 기록하면서 청나라가 국가막장테크를 탔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건륭제의 치세를 살펴보면 대외적으로는 가장 크고 화려한 시기였다. 물론 이런 확장으로 인한 과다한 전비지출과, 풍요로 인한 관료 기강의 해이가 시작되었으나, 적어도 건륭제 시기에는 심각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역사가 진순신은 그의 저서에서 건륭제 시대를 '가장 행복했던 세대'라고 기술하였다.
4.2. 부정적 평가
옹정제 때까지 쌓아놓은 국부가 이후 건륭제의 팽창정책으로 건륭제 말기엔 이미 청나라 쇠퇴의 전주곡을 울렸다는 것이 요지이다. 또한 옹정제가 잡아놓은 관료들의 기강도 건륭제시절부터 해이해져서 부패나 축재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겉으로의 화려함이 과시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말년의 건륭제는 신하들과 상인, 거부들로부터 금전을 끌어모으는 데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옹정제 시절부터 강력하게 추진된 황무지 개간 사업에서 아버지와 달리 자신에게 올라오는 보고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었다는 말도 있다. 실례로 옹정제는 초기 개간의 성과가 좋자 크게 기뻐했으나, 계속되는 보고에 '이렇게 빨리 개간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의심해 실상을 자세하게 조사했고 그에 따라 엄청난 토지가 서류에만 등록된 개간지임을 밝혀냈다. 이는 관료들이 황무지를 개간지로 등록해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관료들은 격분한 옹정제에게 갈렸다. 허나 건륭제는 '나만 한 군주가 어디 있어'라며 자뻑에 빠져 살았다.
또한 서양에서 중국에 대한 평가가 하락하던 것도 건륭제 시기였다. 건륭제의 할아버지였던 강희제는 가톨릭 군주가 아니라는 점만 빼곤 최고의 군주라는 극찬과 함께 엄청난 학구열과 뛰어난 군공과 정치력을 선보여 서양 선교사들을 감격시켰고, 그 영향으로 서양에서 중국학이 널리 유행하게 한 최고의 명군이었다. 건륭제의 아버지였던 옹정제는 가톨릭을 탄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능력있는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여기에는 가톨릭을 안 믿는데도 윤리 의식이 뛰어난 동방의 대국이 있다더라는 신기함도 한몫 했다. 즉, 가톨릭 따위 없어도 대국이 될 수 있다는 표본으로 동방의 대국인 청나라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가톨릭의 교리와 유교를 엮으려는 경향이 있었다.[94]
이에 따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프랑스의 루이 14세 같은 절대 왕권으로 유명한 왕들조차 중국 문화 애호가임을 자처하며 자신들을 중국 황제로, 주변 귀족들을 중국 문관에 비유하는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고평가가 이루어진 시기가 강희 - 건륭 연간의 청나라였다. 이때의 중국 문화 애호를 가리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 부른다.
결정적으로 서양 선교사들이나 유럽 인문학자들의 평가가 강희 - 옹정 시대엔 가톨릭을 믿지 않거나 탄압했지만 뛰어난 무공, 검소함, 국가 체제 정비 등을 이유로 로마 제국 오현제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등과 비견되는 명군이라는 찬양일색에서[95] 건륭 시대엔 당시 유럽에서 과시욕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막장으로 통하던 루이 14세로 절하된 점이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평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96]
건륭제에게 쫓겨다나시피 해서 중국을 떠난 매카트니는 "중국 제국은 늙고 미친 일급 군함인데, 유능하고 추호도 방심하지 않는 관리들이 과거 150년 동안 이 배(중국)을 용케 물에 떠 있게 하고 그 외관상의 덩치만으로 이웃들을 위압해왔지만, 능력이 부족한 사람[97]이 갑판에 올라 명령권을 갖기만 하면 배의 규율이나 안전과는 고별이다. 그 배는 아마도 철저히 파괴되어 가라앉지는 않고, 난파선으로 한참 떠돌다 산산조각 나서 해안으로 밀려들 것이다. 그러나 그 배는 이전의 기반 위에서 절대 다시 건설될 수 없을 것이다."[98]라고 평가했다.[99]
당장 건륭제 때 파견된 조선 사신들이 남긴 기록만 봐도 당시 "황제에 대한 비방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예전보다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진 것 같다."고 평한 걸로 봐서는 인심도 그다지 얻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연행사로 다녀왔던 실학자 홍대용은 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라면서 정조와 노론들 앞에서 칭송할 정도였지만, 원명원[100]이 사치스러웠던 점을 들어 건륭제는 깠다.
그리고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와는 달리 서방을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발전된 서방의 과학기술에 관심을 보였지만, 건륭제는 영국 사신들이 바친 지구의, 괘종시계 등을 보고 "이런 장난감은 어디다 쓰겠냐"고 비웃고, "천조(청나라)는 지대물박이라 서양 오랑캐의 기술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특히 총포금지령을 내려서 군대의 화약무기 개발을 금지했는데, 이는 중국의 화기발달을 늦춰 이후 서양 세력에게 된통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양은 과학혁명으로 이미 17세기에 천동설이 무너지면서 근대과학이 시작되었고, 건륭제 시기부터는 확연히 서양과학기술의 우위가 보이는데도, 건륭제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고 중국의 전근대적 과학기술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건륭제의 이런 오만은 그의 사후에 아편전쟁의 발발과 청나라 자체가 열강의 간섭으로 멸망했을 뿐만 아니라, 2,000여 년간 유지되었던 중화라는 질서가 무너지고 근대국가 성립에 차질을 빚어 넓게 보면 19세기 20세기 내내 중국에서 여러 내외적인 변란(문화대혁명도 포함)이 일어나 대다수의 중국 백성이나 인민이 고된 삶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는 중국 국내뿐 아니라 동아시아 주변국들인 조선, 일본, 류큐까지 좌불안석하게 하는 근원이 되었다.
다만 이는 청나라의 기원과도 관련이 어느정도 있는데, 유목 부족으로 시작된 뿌리인 부족제 씨족제 시절의 전통이 남아있는 팔기군은 황제의 군대이자 부족간의 화합과 공존의 상징 그 자체였다. 유럽에서 점점 기병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화약을 위시한 총기와 대포의 중요성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화약의 발상지인 중국,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한 청에서 당연히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청나라는 알다시피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국가였고, 이를 전부 편제를 교체하거나 신식 군대화 하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얼마나 어떻게 변화시킬지 감조차 잡기 힘든 군대였다.
이 같은 신식 병기로 대체하게 된다면 팔기군과 같은 기병대 위주의 병력 편제의 중요성은 대폭 줄어들고, 따라서 팔기군을 대폭 축소할 필요가 당연히 생기는데 이를 행한다면 부족간의 불화 및 기존의 정치층을 구성했던 다른 부족의 지도자들과 유력 가문들, 고위 군사 지도자들의 어마어마한 반발을 불러옴이 자명했다. 청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국가였고 당연히 피지배 민족인 한족을 높은 자리에 두지 않았는데, 그로 인하여 고위직에 한족이 들어오거나 기존에 있던 만주족 부족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반발, 혹은 반란을 일으킨다면 군사적 혼란은 어마어마했을 것이 뻔했다.
한때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를 포위하며 유럽을 벌벌 떨게했던 오스만 제국 역시 팔기군과 비슷한 기존의 권세 군대 세력인 예니체리 때문에 군사적 개혁이 주위국과 유럽에 어마어마하게 뒤쳐져 몰락을 맞이했던 이유와 비슷하다.
4.2.1. 언론 탄압 및 사상 통제
청나라는 기본적으로 소수 (수백만)인 만주족이 최상위 지배층이 되어 다수 (수억) 한족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게다가 명나라 시절까지만 해도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은 한족의 지배를 받았던 문명 수준이 낮은 이민족이었다. 이렇게 오랑캐로 불리던 만주족이 여러가지 호조건이 맞아 떨어져 중원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이민족 지배에 대한 한족의 반발은 피할 수 없었다. 여러 선비들이 정통중화와는 결이 다른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하는 현실을 개탄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글을 쓰기도 했으나, 이들은 가차없이 처단되었다. 건륭제 뿐만 아니라 명군으로 추앙받던 강희제나 옹정제, 심지어는 청나라 말기에도 만주족 황실에 대한 비방에는 전혀 관용이 없었다. 이는 건륭제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문자의 옥이라는 청나라의 언론과 사상 탄압은 건륭제 시대에 들어 더 심화되었다.그렇다 보니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글이 반청사상으로 해석될까봐 몸을 사리게 되었다. 이는 사실 건륭제뿐만 아니라 성군이라고 추앙받던 강희, 옹정제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옹정제는 사사정이 시경에서 인용한 維民所止(유민소지) 문구를 유와 지가 자기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에 있는 변을 뗀 것이니 자기를 참수할 뜻이 있다는 억지를 써서 죽였는데, 건륭제 시절에는 이런 문인이나 학자에 대한 억압이 훨씬 강화되었다.
건륭제 시기에는 문자의 옥이 활발히 일어나서 청나라 기간에 벌어진 문자의 옥 전체 사건의 80%가 건륭제 시기에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명나라가 망한지 1세기나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반청운동이 일어났을 리는 없을 텐데 그럼 왜 일어났냐면 사소한 걸로 건륭제가 침소봉대했기 때문이다. 사사정 사건이 더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로 별의 별 이유로 문자옥이 마구 벌어졌고 오죽하면 이 시기에 이르자 청나라 학자들 사이에서는 고서만 죽어라 파고드는 학문인 고증학이 유행했으며 단순한 서신을 주고받는 일조차 꺼렸는데 서신을 주고받으면 문서가 남게 되고 어느 순간에 그 문서들에 적힌 글자 어디가 트집잡혀 죽을지도 모르니 서신을 주고받는 일을 꺼렸고 설령 서신을 주고받더라도, 조선 사신단과 필담을 하고 나면 문서를 읽고 나서 불태우는 게 국룰이던 시대였다. 여기에 건륭제 자신도 문자옥을 남발하기를 꺼리지 않아 심지어는 자기를 불쾌하게 만든 사람을 문자옥에 얽어넣어 보복했을 정도다,
문제는 워낙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들을 때려잡다 보니 사람들의 불만도 올라가고 문자옥 앞에선 한족과 만주족이 평등했기에 한족도 때려잡았지만 만주족도 때려잡았다. 거기다 아부하려는 사람들조차 문자옥에 걸려 죽기도 했으니 건륭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했을지…
건륭제에 대한 비판자들은 저렇게 서슬퍼런 문자의 옥이 수십 년 간 이어지다 보니 그 시간 동안 도저히 정상적인 학문 연구나 문학 활동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까딱하면 목이 날아가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학문을 연구하고 문학 활동을 하겠는가? 즉 문자의 옥으로 인해 건륭제 자신이야 목표인 황권 강화를 이루었을지는 몰라도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반대파는 물론 자기에게 아부하는 사람들, 동족인 만주족까지 때려잡은 병크에[101] 중국의 학문과 문학의 발전까지 가로막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이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청나라는 문화적 수준이 낮았고[102], 머리수에서 소수인 만주족이 지배층인 정권이다보니 이렇게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는 문제에 관대할 수 없었다. 건륭제 시절에는 이런 탄압 때문에 반만주족 정서는 수면아래 가라앉았지만, 아편전쟁 이후에 청나라의 행정력이 약화되자, 북경 정권의 힘이 닿지 않는 남부 (특히 광동성)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태평천국의 난으로 타오르고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멸망까지 이르게 된다.
여담으로 신해혁명 이후 반청, 반만주족적인 입장에서 문자의 옥이 실제보다 과장되어 알려진 경우도 있는 듯 하다. 조선왕조실록의 정조10년 3월 27일자 기사에 의하면 건륭제가 황제를 비방했다는 혐의를 받아 옥에 갇힌 사람을 여러모로 따져보고 "이사람은 무고하다"고 판정해 풀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건륭제의 나이가 이미 80이었으니, 건륭제가 늙으면서 망녕이 들어 총기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상식적인 판단은 내릴 정도의 인지능력은 갖추고 있었으며, 따져보고 무리하다 싶으면 풀어주었으니 무고한 사람을 꼬투리를 잡아 처형했다는 식의 선전은 반청적인 입장의 한족이 과장한 듯도 하다. 하지만 이건 건륭제가 이미 말년에 온건 성향으로 전향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미 문자의 옥이 슬슬 종식되어 가고 있던 시점의 사건이라 이걸로 문자의 옥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4.2.2. 말년의 혼미
노년에 접어든 재위 말년부터 통치의 대부분을 만주족 측근 니오후루 허션에게 맡겼는데, 이 허션은 대단한 재주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103] 허션은 건륭제가 50대에 접어든 시기에 벼슬을 시작하여, 20대에 이미 국무총리격인 의정대신[104]에 올랐다. 워낙 승진이 빠르고 건륭제의 무차별적인 총애를 받아서 나중에는 건륭제의 동성애 연인이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다.처음에는 건륭제의 기대를 만족시키며[105] 신임을 받고 벼슬이 점점 올라갔다. 건륭제가 70대에 접어들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해지자, 권신 노릇을 하며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했다. 1786년 허션의 벼슬은 화전대학사[106]와 군기대신(국방장관)을 겸직하여 병권을 쥐고, 실질적인 황제 노릇을 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중신들을 모조리 몰아내거나 숙청하고 독재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허션은 건륭제 밑에서 24년간 출사했는데 이때부터는 국정에 흥미를 잃은 건륭제를 대신해 실질적인 황제노릇을 하며 가경제가 즉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난 건륭제가 붕어할 때까지 13년간 조정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107]
젊었을 때는 번뜩이던 재주를 가졌던 허션은 중년이 되자 흑화되어, 병권을 군기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태업을 했다. 정규군이었던 팔기군과 녹영은 점점 녹슬고, 결과적으로 허션 재임전에 준가르부를 멸망시키고 서역을 평정했던 막강한 청나라군은 허션 재임 당시 발생한 백련교도의 난에 쩔쩔매면서 진압에 10년이 걸렸다.
허션은 매관매직[108]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청나라판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즉 관리가 징계를 받게 되었을 때, 돈을 내면 사면을 받고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청백리들은 사소한 실수로 중형을 받고 처형되거나 파직되었는데, 탐관오리들은 돈을 내고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선비들이 허션의 전횡을 비난하는 상소문을 건륭제에게 내었으나, 건륭제는 말년에 상소문을 볼만큼 정무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허션이 이를 보고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역적으로 몰아 처단했다. 안 그래도 문자의 옥 탓에 표현의 자유가 위축된 청나라에서 이런 식으로 허션의 문제점을 알릴 경로가 차단되니 건륭제는 허션의 전횡을 알 수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허션은 건륭제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호가호위를 하며 엄청난 권력 및 축재를 할 수 있었다.
가경제 집권후 조사된 허션이 축재한 재산은 1100만냥이었는데, 이것은 황실 예산의 15년치였다고 한다. 게다가 국법을 어기고 몰래 서양과 교역을 주선하여 뒷돈으로 챙긴 엄청난 액수의 영국, 프랑스의 금은화, 회중시계나, 벽시계와 같은 신기한 서양 물품 수백점, 여기에 600명이 넘는 첩도 거느렸다고 한다. 건륭제 말기 청나라 1년 예산이 4000만냥정도였으니, 1년 정부예산의 25%를 개인재산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중 상당수는 건륭제가 허션에게 선물로 준 것도 있다니, 진짜 애인설이 그럴듯 하기도 하다.[109]
허션은 건륭제가 수렴청정하던 가경제가 재위기간에도 자리를 유지하다가, 태상황 건륭제가 붕어하자 실권을 잡은 가경제에게 숙청된다. 가경제는 이런 허션을 능지형으로 다스리려고 했으나, 허션의 며느리였던 이복누이 고륜화효공주가 간곡히 부탁해 자살형으로 수위를 낮추었다. 하지만 허션이 20년간 타락시킨 청나라 관료조직 및 군대는 이후 청나라가 서양세력에게 얻어터지는 원인이 된다.
5. 여담
- 현대에 와서는 학자들에게 비판도 많이 받고 재평가도 혹독하게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강희제와 옹정제의 치세를 이어받은 건륭제 때 청나라의 국력이 가장 왕성할 때이기도 했고, 풍류를 좋아하고 장난도 치는 친근한 이미지 때문인지 각종 매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건륭제 당시부터 내려오는 민간 야사의 숫자도 엄청난 수준이다. 그 때문인지 중화권에서는 건륭제를 주인공으로 하는 궁중 암투극들이 1950년대부터 자주 제작되었다. 이 점에서 숙종과 비슷하다. 노년에 변덕이 심해져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많은 고관이나 선비들이 트집을 잡혀 극형을 당하기도 했지만, 본인은 태평성대에 황제직을 즐기며 살았으니. 실제로 전해지는 일화들을 보면 확실히 성격이 재미있는 사람이긴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태평성대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몸을 갈아넣었지만, 본인은 두 사람이 이룩한 평화와 풍요를 즐기며 살았고(본인도 어느 정도 기여는 했지만), 말년에는 국정을 권신에게 맡긴 채 여생을 즐기며 그 기반이 무너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풍류가로서 보이는 다채로운 면모는 온 힘을 다해 성현의 도를 추구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비하면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 건륭제는 밀복(평복)을 하고 사람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렇게 백성들 속에서 놀다가 느닷없이 가까운 신하의 집으로 찾아가서는 식사나 잠자리를 청해, 온 식구들이 넙죽 엎드리고 혼비백산하는 꼴을 보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었다. 건륭제가 각종 매체에서 혈기왕성한 젊은 명군으로 묘사될 때도, 흥청망청 황제놀음에 취한 중년의 꼰대 내지 개그캐로 묘사될 때도 꼭 빠지지 않는 필수요소가 바로 이 평민 코스프레이다.
- 건륭제는 차 애호가였고, 종종 평복으로 갈아입고 소수의 시종들만 거느리고 이름난 찻집을 찾아가 차를 마셨다고 한다. 남순시에 소주의 한 이름난 찻집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평복차림으로 시종과 함께 그곳을 찾았는데, 본인이 시종에게 차를 직접 따라 주었다고 한다. 시종은 원래 황제가 차를 따라주면,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모두 평복을 입었기 때문에 신분이 들통날까봐 거기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종은 손가락으로 찻상을 몇번 두드려 황제께 감사를 표했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차를 대접받으면 탁상을 가볍게 두드려 차를 대접하는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는 풍습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 아내들과 딸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것은 후한 편이지만 반대로 아들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것에는 다소 매정한 편이다. 가장 총애하는 효의순황후의 가문을 2번이나 대기(抬旗)[110]시켜줬고, 측실부인 소생의 공주들에게조차 화석공주가 아닌 고륜공주로 승격시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들들 가운데 건륭제로부터 직접 친왕 작위를 받은 아들은 몇 없다.[111]
- 권신 니오후루 허션이 사실은 건륭제의 동성 연인이라는 의혹이 있다. 또 청나라 황실인 아이신기오로 씨족이 아님에도 버이서에 오르고 죽어서는 군왕작을 추증받을 정도로 허션 이상의 권세를 누렸으나 건륭제가 퇴위하던 해에 요절한 부찰 복강안이 실제로는 건륭제의 혼외자라는 의혹도 있다.[112] 현대 매체에서 아주 빈번히 묘사되는 건 아니지만 대중과 문학가들에게는 흥미로운 소재로 꼽힌다. 동성애야 딱히 검증할 방법이 없지만 다른 형제들처럼 복강안도 부마로 삼으라는 제안을 건륭제가 허허 웃어넘겼다는 일화라든가 초상화로 남아있는 복강안의 외모[113]가 아버지 부항이나 부찰 가의 다른 형제들보다는 옹정제나 건륭제와 비슷해보이는 등 여러 정황이 있어서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다.
- 흥미롭게도 동시대에 재위한 군주들 중 바로 옆 나라인 조선의 정조와 매우 비슷하다. 사실 건륭제는 정조보다 40년 먼저 태어났지만 사망 시기는 비슷하다. 건륭제가 1799년 2월 7일(양력)에 먼저 사망한 후 1년 6개월 후인 1800년 8월 18일에 정조가 사망했다.[114] 그런데 세상을 떠난 시기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서 본인 대가 나라의 전성기 혹은 중흥기였고 본인 사후 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고 그 발단이 본인에게 있다는 점이다. 다만 정조는 재위기간 내내 나라가 기울게 할만한 실책은 없었고 단지 김조순을 세자의 후견인으로 밀어준 것이지만 김조순은 막후의 실세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다가 결국 조선을 세도정치라는 최악의 외척 정치로 넘어가게 한 원흉이 되었다. 반면 건륭제는 자기 실책도 있고, 허션을 중용한 자기 재위기부터 쇠퇴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 일을 하다 시간이 나면 무조건 시를 왕왕 썼으나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별로라서 별로 좋은 평은 듣지 못한다.
- 건륭제는 자신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온 조선의 사신에게 정조의 안부를 묻고, 이때 훗날 순조가 될 왕자가 2달 전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자, 건륭제는 경사라며 정조에게 자신이 걸고 있던 염주를 주었다고 한다. 정조는 이를 받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를 본 신하 윤행임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춘추의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조대왕은 "의리는 의리고 은혜는 은혜다"라고 건륭제에 대한 감사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일성록(日省錄) 1781년 4월 18일 기사에 의하면 조선 사신들한테 융숭한 대접을 해주어 청나라 민간에서 고려황제(高麗皇帝)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 문서 상단 젊은 시절의 어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외모가 손흥민과 매우 닮았다.
6. 대중매체에서
왠지 상당수의 창작물에서는 뉴호록씨 소생이 아니라 친모가 따로 있는 걸로 나온다.- 1999년 드라마 <옹정황제>에 등장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열하로 떠난 사냥에서 아버지 4황자 윤진(훗날의 옹정제)이 몸이 안 좋아서 불참한 사이 제법 많은 동물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생포해낸 8황자 윤사와 가장 많은 동물을 잡은 13황자 윤상 중 누구에게 상을 줘야 하는지 강희제가 홍력에게 묻자, 아버지 윤진의 만류에도 더 많은 짐승을 잡은 윤상에게 주는 것이 옳다며 또박또박 자신의 주장을 읊어서 강희제가 이런 홍력을 매우 예뻐하며 아들에게 주려던 상을 손자에게 줘버린다.
이후 윤상과 14황자 윤정이 주먹질을 하다 걸리고 이와중에도 말대답이나 하는 윤정에게 강희제가 칼을 겨누면서까지 역정을 내다 혼절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윤진이 동복동생 윤정을 포박해서 어머니랑 함께 잘못을 빌러왔는데도 오히려 홍력이 좀 데려오라 하면서 본격적으로 손주 사랑이 묘사된다. 눈밭에서는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며 대청 황제와 내관과 시위들까지 눈밭에서 휘청이게 만드는 깨알같은 재롱도 보이고, 더 커서는 강희제가 백발 노인의 몸으로 손자에게 손수 무예를 가르치는 걸 보고 신하들이 황상께서 아직 정정하시다며 감탄하기도 한다. 극중에서 등장할 때마다 자식들 싸움질에 혈압만 오르며 고통받는 강희제가 아무 근심 없이 진심으로 웃는 장면은 전부 홍력과 보내는 시간이다.
- 한국에서는 1998년 드라마 <황제의 딸>의 건륭제가 유명하다. 황제의 딸에서 건륭제는 용서의 아이콘 혹은 주인공 일행이 친 사고를 수습해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나온다. 그 때문에 건륭제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드라마에서 건륭제로 나온 배우인 장철림은 쌍룡회나 철치동아 기효람 등에서도 건륭제를 맡았던 건륭제 전문 배우로서 북경 전영 학원 출신의 연기파 배우다. 워낙 장철림이 불같으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잘 연기했기 때문에 자녀 및 신하들에게 다소 박정한 면이 있었던 건륭제의 본래 모습이 많이 희석되기도 했다.[115]
- 1997년 드라마 건륭대제에선 강대위가 맡은 증정과 연적 관계로 나온다. 증정이 무림 고수라는 설정.
- 2011년 드라마 옹정황제의 여인에서는 아버지인 옹정제가 메인이다 보니 본인은 4황자 홍력으로 나오며 마지막화에는 아버지 사후 황제로 즉위한다. 후속작인 2018년 드라마 여의전에서는 메인으로 등장..
- 2011년 황제의 딸을 리메이크한 드라마 신 황제의 딸에서도 구작과 마찬가지로 등장했다. 구작과의 캐릭터성으로 보면 굳이 달라진 것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신작의 경우 구작에서 보여진 제비와 영기의 서사를 추가하는 바람에 구작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제비의 활발한 모습에 매료되어 딸로서 총애를 하는 것은 같으나, 구작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유비의 등장과 현실성을 극대화 하는 바람에 극중 건륭제가 빌런이 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유비는 영기의 앞날을 위해 만주족 혈통을 지닌 좋은 집안의 여식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한 탓에 제비를 견제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반대까지 하게 되는데, 건륭제는 처음 이를 보고 최대한 영기와 제비를 이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극단적으로 몰리게 되면서 건륭제는 유비의 뜻을 들어주게 된다. 이 대목에서 중요하게 봐야 될 것이 있는데, 제비는 처음부터 정실이라던지 명분이나 신분에 얽메이지 않고 오직 영기와 단둘이 이어지는 것을 원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건륭제로서는 나름의 합의점이라고 찾은 것이 제비를 영기의 측복진으로 삼아 둘의 혼인을 허락해주는 것이다. "애초에 혼인을 반대하지 않으니 뭐가 문제냐?"라는 식으로 반론을 했다. 이를 통해 건륭제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다.[116]결말부에서는 구작과 동일하게 자미를 명주공주로 책봉하지만, 황궁에서 돌아오지 않은 제비는 환주공주의 신분을 유지시켜 민간공주로 둔다.
- 2018년 드라마 연희공략에서 메인 남주로 나오며, 여의전과 같은 배경이나 이쪽은 여의전보다는 훨씬 나은 성격이다. 주인공에게는 처음에는 주인공이 충성하는 황후를 박정하게 대하는 일로 매우 싫어하는 존재였으나 나중에는 주인공의 사랑을 얻고[117] 승리자가 된다. 성격도 츤데레에 가까운 편이며 주인공의 사랑을 얻은 뒤에는 과도한 집착이나 의심을 하지도 않는다. 의처증 수준으로 집착했던 후궁여의전과는 다르다.
- 1955년 소설 서검은구록[118]에서도 건륭제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건륭제가 한족인데 아기 때 황후가 딸을 낳자 한족 대신의 아들과 바꿔치기를 해서 태후에 올랐다는 설정이다. 한족 출신인데 아기를 바꾸면서 황족이 되었다는 전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 사실 정사에서도 건륭제는 증조할머니가 한족 출신[119]이었기 때문에 미약하게나마 한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건륭제가 실은 완전히 한족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주인공인 진가락의 친형으로 그가 한족이라는 증거와 교환 및 진가락의 연인이자 히로인 객사려(향향 공주)와의 결혼 등의 대가로 한족의 나라를 만들기로 계약하나 태후가 그 일에 대해 알아채고 황제 자리에서 몰아낼 것 같자 대뜸 배신을 때린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눈치챈 객사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진가락이 건륭제의 배신을 눈치채고 홍화회 동료들과 떠난다. 작중에 주인공 진가락이 이끄는 홍화회에 사로잡혀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당하는 장면도 있는데 김용은 이 부분에 덧붙여 쓰기를 이때 손모가지가 날아갔어야 명작에 도장 찍고 글자 끄적거리는 미친 짓을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까기도. 이외에 불륜까지 저질러 사생아 부찰 복강안을 두는 등 전반적으로 찌질한 악당으로 묘사되고 있다.
- 1976년 TVB 판을 보면 정소추가 1인 3역[120]을 하는데 의외로 잘 어울린다.
- 2020년, <후궁의 법칙>이라는 게임에서 남안 4명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여주인공을 후궁으로 맞이한 황제.
- 1981년작 TVB 드라마 영웅출소년에서 황일화가 애신각라 홍력 역을 맡았다.
- 2011년작 드라마 창궁지묘에서 건륭제가 등장한다. 다만, 서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청나라 말기의 시대라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 이미 죽은 시점에서 한참 지난 시점에서 서태후의 눈에만 보이는 허상으로 등장한다. 서태후가 "이 손자며느리가 청나라를 다시 반석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며 청나라를 어떻게 이끌어가면 좋을지에 대해 건륭제를 기리는 곳에서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건륭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서태후의 의도를 꿰뚫어 보며 바로 대답해주지 않고 의미심장한 말만 늘어놓으며 사라진다.
- 2014년 드라마 궁쇄연성에 등장한다. 비중은 적지만 경공이 뛰어나고 공정한 편이다.
- 2018년작 TVB 드라마 <천명>에서는 가경제에게 양위한 후의 태상황으로 등장하는데, 시골 전직 이장님 같은 깨방정 노인으로 그려진다. 황위를 물려준 후에도 화신을 총애하며 화신의 쌈짓돈으로 아들들 몰래 오만군데 싸돌아다니며 YOLO를 누리고 있다. (황궁 시위들의 도박판에 난입하여 같이 주사위를 굴린다거나…만리장성에 놀러갔다가 군부대에 찾아가 줄다리기를 하며 논다거나…딸내미랑 외손주 보러 사돈댁에 불쑥 들이닥쳐 아이들이랑 놀다가 가경제가 쫓아와서 제발 궁에 돌아오라고 사정한다거나..) 허수아비 황제나 다름없는 아들 가경제를 자꾸만 무안하게 만들며 가경제가 화신에 대해 이를 아득바득 갈게 만들지만, 의외로 건륭제 스스로도 화신이 마냥 깨끗한 놈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가경제가 황제 노릇 좀 해보겠다고 태상황이 되었는데도 실세로 군림하는 자신에게 서서히 중독시키는 독약을 모른 척 먹은 후 가경제가 화신을 족치려는 공작에 힘을 보탠다. 하지만 화신과 친하게 놀던 옛 정을 모른척하지 못하여 화신을 제 손으로 죽이기를 포기했고, 가경제의 원망 속에 독이 몸에 퍼지며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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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장 정극상 정극거, · 이정국 액역도 · 비영동 ,삭해 왜흑, · 하화례 ,다적례 화석례 도류, · 안비양고 · 호이한 238권 「장혁덕등전(蔣赫德等傳)」 장혁덕 · 액색혁 · 차극 · 파합나 · 송권 · 부이점 · 여궁 · 성극공 · 김지준 · 왕영길 · 당숭아 247권 「팽이술등전(彭而述等傳)」 팽이술 · 육진분 · 요연저 · 필진희 · 방국동 · 우붕거 · 왕천감 · 조정표 250권 「이위등전(李霨等傳)」 이위 · 손정전 · 두입덕 · 풍부 · 왕희 · 오정치 · 황기 · 송덕선 · 이상아 · 아란태 · 서원문 251권 「도해등전(圖海等傳)」 252권 「감문혼등전(甘文焜等傳)」 마가도해 · 이지방 감문혼 · 범승모 · 마웅진 · 부홍열 253권 「막락등전(莫洛等傳)」 막락 · 진복 · 왕지정 · 비아달 · 이흥원 · 진계태 · 진단적 · 마비 · 엽앙류 255권 「장용등전(張勇等傳)」 장용 · 조양동 · 왕진보 · 손사극 256권 「채육영등전(蔡毓榮等傳)」 채육영 · 합점 · 항애 · 화선 · 동위국 · 동국정 · 주유덕 · 장덕지 · 윤벽 · 왕계문 257권 「조국조등전(趙國祚等傳)」 조국조 · 허정 · 주구 · 서치도 · 호세영 · 당희순 · 이린 · 조응규 · 조뢰 · 이방술 · 진세개 · 허점수 261권 「양첩등전(楊捷等傳)」 양첩 · 석조성 · 만정색 · 오영 · 감리 · 황오 · 방태 · 목혁림 · 단응거 262권 「위예개전(魏裔介等傳)」 263권 「왕홍조전(王弘祚等傳)」 위예개 · 웅사리 · 이광지 왕홍조 · 요문연 · 위상추 · 주지필 · 조신교 264권 「학유눌등전(郝維訥等傳)」 265권 「탕빈등전(湯斌等傳)」 학유눌 · 임극부 · 유홍유 · 유건 · 주배 · 장정추 탕빈 · 손지욱 · 육롱기 · 장백행 266권 「엽방애전(葉方藹等傳)」 267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엽방애 · 심전 · 여두눌 · 서원공 · 허삼례 · 왕사정 · 한담 · 탕우증 장옥서 · 이천복 · 오전 · 장영 · 진정경 · 온달 · 소영조 · 숭축 · 왕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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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중국의 군주들 중 강희제 다음으로 오랜 기간 동안 재위했다.[2] 태상황제의 재위 기간까지 합치면 63.24년 정도로 역대 중국 황제 중 가장 오랫동안 다스린 황제가 된다.[3] 출처 당시 청나라를 방문한 영국인 매카트니의 기록에서는 건륭제의 키를 약 5피트 2인치(五英尺二英寸)(약 160cm)로 기록하였고 건륭제가 생전에 입었던 예복으로 추정하면 165cm로 건륭제의 건륭제의 실제 키는 약 160~165cm로 추정된다고 한다.[4] Tengryin Tedqügsen[5] 건륭제 자신이 자칭한 별호이다(…). "10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긴 노인"이라는 뜻인데, 몇몇 원정은 득보다 실이 많은 것도 있고 대충 끼워 맞춘 것도 있다.[6] 너무 거창한 표현인지라, 한국 웹상에서는 건륭제가 인류의 주인을 칭했다는 드립을 치기도 한다.[7] 1736년 건륭 원년에 그린 것으로 그의 나이 26세 때 모습이다.[8] 강희, 옹정, 건륭을 거치며 이어진 청나라의 번영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 강건성세는 건륭제 때에 절정을 맞이했다. 이시기 청나라는 중국 통일왕조 중 원나라와 더불어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여 중국의 인구는 명나라 때부터 유지되던 1억 선을 훌쩍 뛰어넘어 무려 4억에 달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부흥하여 청나라는 전대에 확립됐던 지정은제의 영향으로 은의 블랙홀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추었다.[9] 뒤에 나오겠지만 황제 본인도 금불상 3만 개를 생일 선물로 받는 등 재산 축재에 골몰하여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10] 문자의 옥으로 한족들이 탄압을 당한 것 자체는 할아버지인 강희제와 아버지인 옹정제 때부터 이어져온 거였지만 최소한 이 두 황제는 문자의 옥으로 숙청한 대상도 거의 대부분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추구하던 이들이나 부패한 관리들이었으며, 청나라의 번영에 도움이 되는 적절한 비판은 대부분 수용했다. (물론 옹정제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황위 정통성에 대한 시시비비 문제가 있었기에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러한 경우에는 최대한 죽이기보다는 회유하고자 하였다.) 반면 건륭제는 정당한 비판마저 반역 행위로 간주하는 막장 행각을 보이면서 정작 청나라의 번영에 걸림돌이 되는 부패한 관리들은 숙청하지 않고 방치한 탓에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지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이나 청렴한 관리들에게 피해를 주었으므로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해 질이 나쁘다.[11]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모두 외정과 국제적 과시에 집중해서 당대부터 후대까지 주위 지역과 세계사에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주며 찬란한 전성기를 상징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선대로부터 착실하게 다진 기반을 적당한 선이 아닌 뿌리째 뽑아버리며 써버리면서 국가의 내정에 악영향을 끼친, 양면이 아주 명확한 왕들이다. 건륭제 역시 이들처럼 선대의 강희제와 옹정제에 비해 중국 내외에서 평가가 좋지 못 한 편이다. 시기도 중국인들, 특히 한족들이 치를 떠는 영국 식민 지배 시기와 아편 전쟁 시기의 저열하다 못해 끔찍한 수준의 패배와 치욕의 씨앗이 건륭제 시대에 심어진 셈.[12] 근데 이게 끝이 아닌 게 옹정제가 제위 10년차에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고 제위 13년에 과로사하기까지 3년간 옹정제의 대리를 한 것까지 합치면 67년을 통치한 것이다. 게다가 강희제는 재위기간이 61년이라지만 8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보정대신들의 대리통치를 해야했고 16세가 되어서야 친정을 하기 시작했다.[13] 다른 황제의 초상화와 비교하면 알수 있듯이 이때는 청나라와 유럽 간 교류도 활발했던 터라 서양식 화법이 적용되어 그려졌다.[14] 기록에 따라서는 건륭제의 생모는 효성현황후 니오후루씨가 아니라 전씨라고 설명하지만,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이라고 보는 편이다.[15] 정확히는 옹정제가 짜준 것이다. 옹정제는 강희제가 궁에 데려와서 키운 손자가 홍력 밖에 없는 것처럼 서술된 유조를 남겼다. 옹정제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라는 화술을 매우 능수능란하게 사용해서 학자들이 실록에 기술된 기록을 근거로 연구하다가 원본 기록물을 번역하면서 옹정제가 진실의 일부만을 알려주어 사서를 읽는 후대인의 착각을 유도한 것임을 깨닫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16] 조선왕조실록 경종 시대에 사신이 가져온 강희제 전위 조서에서도 실린다. (덤으로 "저 오랑캐 놈들이 아직 태자를 정하지 않았으니 한바탕 쌈박질하지 않겠냐?"는 호조판서 이태좌의 첨언까지도 있다. 옹정제 등극 전 일어났던 암투를 생각하며 이런 예상을 한 모양이었지만, 홍력이 너무 압도적이라 홍시는 뻘짓만 하다 몰락하고, 홍주는 알아서 대권에서 멀어지는 길을 택해서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실록에는 "윤진의 제2자는 영웅의 기상이 있으니 반드시 봉하여 태자를 삼도록 하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았다.[17]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사항이다.[18] 홍주는 그야말로 개망나니짓을 저지르면서 수차례 사고를 쳤지만 형인 건륭제가 감싸준 덕분에 별 탈없이 잘 먹고 잘 살다 가버렸다.[19] 감국은 나라 전반을 감독하라는 특별 직책으로, 섭정으로 봐도 무리가 없으나 섭정왕이라는 타이틀은 이때까지 온전히 복권되지 못하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라는 영 거시기한 예가 있어서 다른 직책명을 쓴 듯 하다.[20] 다만 강희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한 것은 준가르의 갈단 칸 정벌 때뿐이다. 그리고 친정할 이때에는 갈단이 동으로 공격해와서 외몽골지역을 점거하여, 청의 북변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21] 1706~1762. 작위는 1등 무용공 겸 3등승은공. 3등승은공이라는 작위에서 알 수 있듯이 자오후이의 고모할머니는 옹정제와 순근군왕 윤제의 생모인 효공인황후다. 즉 건륭제와도 6촌 관계[22] 여담이지만 황제의 딸에 등장하는 이강과 이태가 복(福)씨로, 극중 영비의 사촌 친정(즉, 영비가 이강과 이태의 이모 뻘)으로 나온다.[23] 옹정제의 숙청으로 많은 황족들과 만주 가문들이 피해를 입었고, 만주 사회는 씻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 더군다나 백성들도 옹정제의 숙청과 미심쩍은 즉위 과정에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건륭제는 이 상황을 수습할 의무가 있었다. 건륭제의 조치 이후 선교사들은 만주 사회와 백성들이 환호하며 새 황제의 덕을 칭송했다고 기록했다.[24] 이는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들어 제위쟁탈을 벌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25] 최소한의 인원으로 편성해서 최대한 조용한 방식으로 갔다왔으며, 지나가는 길에 총신들의 집에서 유숙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아꼈다. 이에 강희 말년 부정부패에서 위동정이라는 총신이 이 비용을 부담하느라 국고에서 돈을 빌렸다가 큰일이 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강희제는 내탕금을 써서 위동정의 돈을 갚아주었다.[26] 다만 백성에게 뜯어냈다는 이야기는 사실 무근으로, 건륭제 중기 이후 청나라는 지정은제 확립 및 서방과의 관세가 폭증하여 오히려 감세정책을 썼고, 오히려 건륭제는 남순할 때마다 반청감정이 극심한 해당지역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면세를 해주었다.[27] 강희제는 몽골 귀족들을 모아 놓고 사냥으로 군사 훈련을 병행했는데, 청나라의 부와 번영을 과시하고 청에 대한 몽골 귀족들의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 시행했다. 강희제의 유조에 남아있는 사냥에서 어쩌구~는 이 사냥 원정의 결과물들이다. 강희제 시기에는 산해관 입관 이전까지의 정책적 영향과 조모였던 몽골 출신의 효장문황후가 생존하였고, 삼번의 난으로 북변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이후 갈단의 공격에 외몽골의 부족들이 남하하면서 이들에 대한 충성을 받아야 하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건륭제 시기에는 변방이 안정되어 그런 것들이 거의 없었고,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다.[28] 이탈리아의 선교사 카스틸리오네가 서양식 화법으로 그렸다. 청나라 황제는 팔기군 정황기(노란 깃발 부대)의 수장이기 때문에 황금색 갑옷을 입는다.[29] 준가르 2회, 위구르 1회, 진촨 유역 2회, 대만 반란, 베트남, 미얀마, 그리고 네팔 샤 왕조 2회[30] 비슷한 경우로 요나라가 있다. 요나라 또한 여요전쟁에서도 처참하게 패한 후 고려를 형식상 요나라의 제후국으로 만들었을 뿐 상국으로서 고려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지는 못했다. 송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제압하는데 실패하여 송나라를 제후국이 아닌 형제국으로 그치게되었다. 나중에는 발해 멸망, 발해부흥운동 진압, 여요전쟁 등 한민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와 군사력을 소모하는 바람에 결국 요나라의 국가 재정과 인력 문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 고려를 공격하는 와중에 발해멸망 이후 압록강 서안에 자립하고 있던 여진족을 복속시켰으며,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란의 황제가 동생이 되었지만, 소태후가 송황제의 숙모가 되면서 가장 윗자리를 가지면서 막대한 세폐를 지급받으면서 경제적 풍요를 가지게 되었다. 오히려 거란의 멸망은 정치체제 자체적인 결함과 세폐로 인한 경제적 풍요에 거란인들이 무사적인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곳, 그리고 황실 내부 권력 암투 속에서 찾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또한 이러한 점은 수나라도 비슷한 편이다. 수나라 역시 수문제까지는 정치가 잘 발전되어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수양제 이후 잦은 원정으로 수나라의 영토를 넓혔고 웬만한 나라들을 복속시켜 수나라의 부하처럼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긴 군사원정은 후기로 갈수록 국력이 약화되고, 고구려 침략에 대한 집착과 명군이자 성군인 영양왕과 명장인 을지문덕과 영류왕 고건무가 있는 고구려 원정에 실패를 하면서 역으로 수나라만 더 심해졌다. 통일하여 대국을 만들고 웅장하고 온화한 문화를 만들었음에도 지나치게 잦은 군사원정은 훗날 대운하를 다시 공사 및 억지로 빨리 완성시켜 백성들과 일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준 것과 더불어 단명왕조가 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고 훗날 수나라가 망한 후 수나라 전역은 빈 공간처럼 되다가 훗날 당나라가 차지했다. 그나마 건륭제는 강남 유람을 즐겼을지언정 진나라의 만리장성이나 수나라의 대운하처럼 무리한 대규모의 공사 작업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폭정도 수양제나 진시황 같은 폭정까지는 아니었다. 준가르부에 대한 학살문제가 있긴 하지만, 현대가 아닌 전근대 시절의 학살은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고, 준가르 자체도 주변민족에 여러가지 약탈이나 납치 같은 악행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 당시에는 크게 비난을 받는 일은 아니었다.[31] 위의 초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늙고 수척해진 모습이 눈에 띈다.[32] 건륭제는 70대에 접어들면서 건강이 나빠졌는데 수면이 줄거나 아예 일어나지 못하고 늦잠을 자는 일이 많아졌으며 왼쪽 눈의 시력이 나빠져서 잘 보이지 않고 건망증까지 심해졌다.[33] 어느 정도냐면, 천명제부터 선통제까지 청나라(후금)의 군주가 12명 11세대인데 건륭제는 자신의 위로 2세대, 아래로 4세대, 본인 세대까지 합쳐서 무려 7세대를 겪었다. 건륭제 생전에 가장 젊은 세대는 청나라의 제11대 황제인 광서제와 같은 항렬이었다.[34] 특히 암살당하거나 살해된 황제들도 많다.[35] 중간에 간식을 먹기도 했다.[36]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두부와 생선조림이었다.[37] 다만 그렇다고 고기를 안 먹은 것은 아니고 닭고기, 오리고기, 양고기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다. 오리알과 거위알도 좋아해서 자주 먹었다.[38] 이는 조선에서 가장 장수했던 국왕인 영조와도 흡사하다. 영조 또한 채식을 좋아하며 규칙적이면서도 매우 절제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장수의 비결로 손꼽힌다.[39] 명나라의 멸망으로 그냥 사라진 게 아니라 청나라에서 상당부분 계승했다.[40] 아이러니하게도 한족의 한푸 착용을 금지한 것과 반대로 만주인 귀족들과 심지어 청의 황제들은 한푸를 입고 생활한 적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물론 변발 풍습은 청이 망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지만, 대신 시대가 흐르면서 청나라의 변발도 점차 머리를 덜 밀어내는 형태로 변해갔으며 그로 인해 청나라 말기에는 청나라 변발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인 음양두가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참고로 이 그림은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이자 청나라 궁정 화가였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 이름은 낭세녕)가 그린 그림이다.[41] 차를 마시며 노는 모임.[42] 예를 들어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 신숙주, 박연, 김종서 등이 그림에 감상평을 적어 놓았지만, 그림 옆에 같은 사이즈의 종이를 계속 잇대어 거기에 쓴 것이기에 똑같이 취급하기는 어렵다.[43] 건륭어제시천만, 불급유방구근삼(乾隆御製詩千萬, 不及劉邦句僅三。)[44] 구미속초, 보잘것없는 것으로 훌륭한 것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다.[45] 다만 이 일화를 실제로 만주에서 만주어가 쇠퇴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주어 중흥을 꾀하던 건륭제가 구사하던 북경식 만주어가 근고한어 관화와 섞여 원판에 비해 많이 변형된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목은 이색과 주원장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예나 지금이나 중국어 방언은 서울말과 영호남 사투리의 차이 정도를 넘어 아예 다른 언어로 여겨지는 것을 생각하면 온 대륙을 장악하고 각지의 팔기주방에 뿌리내린 기인들의 만주어도 입관 후 두갑자나 지난 건륭 시절에는 서로 잘 통했을리 없다. 물론 신하와 황제의 만주어 중 어느 쪽이 원판에 더 가까웠을지는 불분명하나(영미권의 지역별 발음 차이나 미주 한인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고향을 떠나 이주한 사람들의 모어보다 이주자들이 떠나고 남은 고향에서의 토착어가 더 큰 변화를 겪고 이주자들이 토착어의 옛 모습을 더 잘 보존하는 예가 꽤 있다), 건륭제에게는 그런 언어학적 지식이 있었을리 없으므로 다짜고짜 만주어가 쇠퇴하고 만인들이 근본을 잊어가고 있다고만 단순하게 인식했을 것이다.[46] 길레이는 매카트니와 동행하지 않고, 매카트니가 중국으로 떠난 이후 영국에서 이 카툰을 그렸다. 그래서 청나라 조정의 묘사는 고증과는 거의 맞지 않는다. 카툰에 묘사된 청나라 황제나 관리들의 위로 올라간 눈과 비정상적인 체형, 거기다가 사신 앞에서 아편을 피워대는 황제의 모습에서 영국인들의 동양에 대한 편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47] 심지어 황제가 일을 안해서 나라가 개판 5분전이 되었던 만력제 시절에도 대외무역은 계속되었다.[48] 강희제 시절까지는 제사를 금지하지 않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입국 및 포교 활동을 허용할 정도로 서양과의 무역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옹정제 시절부터는 선교사들의 출입을 철저히 막고 해안도 죄다 봉쇄해버리는 등 보호무역으로 돌아서게 된다.[49] 비틀즈 소속으로 유명한 폴 매카트니와 성은 같지만 혈통으로는 상관 없는 인물이다. 매카트니라는 성씨 자체는 아일랜드계 성씨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실존인물 문서를 보면 폴 매카트니와 엮는 드립이 나온다.[50] 중국은 조공 사절로 파악했다.[51] 3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3번씩 총 9번 머리를 찧는 의식으로,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고 삼전도의 굴욕 때 인조가 시행한 바로 그 의식이다.[52] 매카트니는 이때 "내가 영국 국왕 폐하의 신하지, 귀국 황제의 신하인 줄 아나?" 라고 거부했다.[53] 사실 서양에서는 이런 방식이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54] 이 거절답서는 "청나라는 지대물박(地大物博)이라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으으니 외국과의 교역이 필요없다."의 요지로 서술되었다. 형식은 황제가 조공국에 보내는 국서형식이었다고 한다. 즉 "지구 반대편까지 미치는 나의 은덕에 감사함을 느끼고 예의를 갖추어라."는 구절은 잊지 않고 넣었다.[55] 당시 영국이 대중국 외교 노하우가 떨어진 원인도 있다고 봐야 한다. 포르투갈의 경우 명나라 시대부터 마카오를 실효 지배를 하고 있었다. 법적 지배는 아편전쟁 이후지만 이미 몇백 년 동안 실질적 자국 영토로 관리하고 있었으며 이는 포르투갈이 오랫동안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중국 정부의 비위를 안 상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도 사절단과 그들의 수장 이삭 티치가 건륭제의 6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영국 사절단이 거부하던 삼배구고두례를 하자 건륭제가 기뻐하며 이삭 티치와 네덜란드 사절단을 특별 대우하면서 선물도 많이 챙겨 주었다. 하지만 역시 통상확대는 거부했다. 추가적으로 러시아 역시 청나라와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을 맺어 청과 교류 중이었으며 당시 베이징에는 러시아 외교 공관(근대적 의미의 외교 공관은 아니나, 러시아 외교관들이 상주했다.)과 정교회 신학교가 있었다.(이 정교회 신학교는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가 다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멀쩡히 남아서 근현대까지 존속했다. 신학교에서 중국어를 러시아인들에게 가르치고, 통역관을 육성하며 중국어 사전과 한자 사전을 편찬한 것은 덤.) 러시아도 영국과 비슷하게 고두 문제로 청과 외교적 마찰을 빚었으나, 생각을 바꿔 고두를 하겠다고 양보함에 따라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래서 매카트니 사절단이 방문했을 때 같이 있던 러시아 사절단은 영국 놈들 앞에서 고두를 하는 추태를 보이기 싫어서 잠시 뻗댔다가 "너네 지금까지 고두를 잘만 하더니 갑자기 왜 그래?" 라고 한 소리 듣는 촌극도 있었다.[56] 열하일기는 당시 조선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57] 명나라의 대신이자 학자였고, 한 때 남명 정권에 가담하였으나 홍광제가 청나라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청나라 군대를 찾아가 항복하였다. 그래서 그와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은 전겸익을 배신자라고 무척이나 미워하였다.[58] 출처: 중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117쪽. 조선으로 치면 조선 중후기 이후로 역성혁명을 주도한 정도전이나 계유정난을 주도한 한명회 등이 역적 또는 간신으로 규탄되고, 최영, 정몽주 등 고려 말기에 끝까지 고려에 충성하다 죽어간 인물들이나 세조를 제거할 모의를 하다가 모두 처형된 사육신이 높이 평가받은 것과도 비슷하다.[59] 만주라는 명칭도 문수보살의 음차라는 주장도 있다.[60]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예수회 소속이었던 카스틸리오네였다. #[61] 사실 개인적 취향이 아니어도 청나라는 서양인들에게 흠천감 역법 담당이나 엔지니어링, 통번역 같은 일부 업무를 전담시켰기 때문에 역법 등의 필수불가결한 업무를 위해서라도 서양인 선교사들을 꼭 거느릴 필요가 있었고, 변발이나 만복 착용 등의 문화적 규율에까지 기꺼이 협조하는 이들 '서양 스님'들을 구슬리기 위해 고액의 급여와 사생활 존중 등의 당근을 금하지 못했다. 이들 수사들은 이렇게 존중받는 사생활의 영역에서 사적으로 재산을 불리는척 부동산 자산을 늘려 소작농, 상인, 수공업자 등을 중심으로 신자 수를 늘렸고, 마카오에서 북경 밖의 타지로 벌이는 선교사업에 있어서도 도움을 줬다.[62] 1745년 몽골 과이심부 좌익중기 찰살극 달이한친왕 색포등파륵주이에게 하가. 참고로 달이한친왕가는 효장문황후의 남동생인 박이제길특 만주습례가 창설한 가문으로 할아버지 박이제길특 반제는 순치제의 양녀이자 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의 손녀인 고륜단민공주와 결혼하며 아버지인 나복장곤포는 강희제의 이복동생 유친왕 복전의 딸과 결혼한다. 실제로 건륭제는 이 딸을 매우 아껴서 결혼 당시 북경에 민가 200채를 허물면서까지 공주부를 지어준다. 이후 남편인 달이한친왕이 준가르와의 전쟁 중 과실로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음에도 한 번 용서해 주었으며, 공주가 죽은 후에는 공주와 그 남편의 무덤의 격을 능으로 올려준다.[63] 출처: 옌 총니엔 저, 대청 제국 12군주 열전.[64] 건륭은 황후가 화를 내며 머리를 잘랐다며, 머리를 자른것은 국상 중에나 하는 행동인데, 이는 매우 큰 불경이라며 황후를 유폐한 이유를 말했다.[65] 1773년 찰살극 외몽고 새음약액부 중좌익 말기 친왕(a.k.a 초용친왕)박이제길특 납왕다이제(1754~1816)에게 하가. 참고로 납왕다이제의 할아버지인 고륜액부 책릉(1672~1750)은 강희제의 10녀인 고륜순각공주와 결혼하였으나 1723년 준가르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옹정제는 책릉의 작위를 고산패자에서 친왕으로 올려준다. 참고로 납왕다이제와 화정공주는 6촌 간이다. 이후 납왕다이제는 1803년 가경제 피습사건 당시 가경제의 목숨을 구해 더욱 총애를 받는다.[66] 1780년 화석액부 오아 찰란태에게 하가. 참고로 오아 찰란태의 왕대고모는 효공인황후이다. 효공인황후의 조카손자인 우야 자오후이는 건륭제 당시 준가르 정벌전에서 큰 공을 세워 공작 작위를 받았다.[67] 만주족 성씨에는 ~가(佳)씨로 끝나는 성이 많아, 한족을 만주족으로 편입시킬 때는 성씨 뒤에 가(佳)를 붙여 승격시켜주었다.[68] 만주족이 일부다처제이던 시절의 흔적이다. 만주족은 푸진(한자명 복진, 아내)를 여럿 두던 풍습이었다가, 중국 정복이후 일부일처제를 확실히 제도화했다. 확실한 정실 아내를 적복진으로, 아내에 버금가는 지위지만 첩인 이를 측복진으로 제도화했다.[69] 청초기를 제외하면 황족의 측복진은 일반적으로 격격, 사녀 출신이고, 황제가 수녀를 측복진으로 사혼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 중 후자가 측복진으로서 격이 높다. 하지만 고씨는 드물게 격격이었으나 황제의 명으로 측복진이 된 케이스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황제의 명으로 측복진이 된 계황후와 동격인 것이다.[70] 귀비와 황귀비는 일반적으로 한 명 이상은 없기 때문에 봉호가 붙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경우엔 오히려 봉호가 없는 것이 더욱 권위가 있다. 조선 초기에 왜 왕비의 봉호가 있다가 사라졌겠는가.[71] 청초기의 직위로 황후는 아니지만 정실 취급을 받았다.[72] 동서궁복진이 책봉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빈, 공주, 명부에게 인사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후의 초봉귀비들은 봉호를 받지 않는다는 관례는 유지했으나 동서궁복진과 같은 책봉 의식은 치르지 않았다.[73] 적모인 효현순황후의 장례에 슬퍼함이 부족하여 황위계승권을 박탈 당했으며 생모인 순혜황귀비가 죽은 후 3개월 뒤에 죽었다. 참고로 아내인 보르지기트씨는 옹정제의 양녀인 화석숙신공주와 박이제길특 관음보의 딸이다. 화석숙신공주는 원래 강희제의 망나니 황태자 윤잉의 딸이었지만, 옹정제의 양녀가 된다. 이후 남편이 원정 중 일찍 죽고 큰오빠 이친왕 홍석이 역모에 몰렸음에도 황실의 큰 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건륭제의 총애를 받는다.[74] 강희제의 21황자이자 건륭제의 동갑내기 숙부인 윤희의 양손으로 출계하였으며 그의 복진은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참장 부겸의 딸이다.[75] 복륭안에게 하가하였으며 복륭안은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대학사 군기대신 부항의 차남이다.[76] 강희제의 12황자인 이의친왕 윤도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윤도의 복진은 의정대신 마제의 딸이고 마제는 효현순황후의 백부이다.[77]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부항의 딸 중 하나가 적복진으로 시집을 갔다. 부항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들이 모두 총애를 받았으며, 다른 딸은 예친왕 도르곤의 후계자에게 적복진으로 시집을 갔다.[78] 상삼기 포의(내무부 포의)는 황실의 예속귀족이다.[79] 이때부터 김씨 일가의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한다.[80] 훗날 도광제의 장자 혁위가 후사 없이 죽자 영성의 증손자 중 하나인 재의가 혁위의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동치제가 후사 없이 죽자 재의의 아들인 부륜이 동치제의 양자로서 제위에 옹립될 뻔 했으나 실제 혈맥이 너무 멀다는(실상은 서태후가 제어하기 까다롭다는) 이유로 무산되었고, 부륜을 제외하면 이 항렬까지 세대교체가 빨리 이뤄진 가까운 황족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는 결국 같은 항렬에서 선정되었다.[81] 사실 이는 긴기야 가문 뿐만 아니라 다른 조선계 만주족 가문의 후손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82] 다만 돈비 왕씨는 자신의 딸을 믿고 궁녀를 때려 죽이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래서 돈빈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후 다시 돈비로 돌아왔는데 어찌나 성격이 나빴던지 어지간한 후궁은 모두 2등급 이상의 품계를 올려주었던 가경제조차 그녀를 그냥 돈태비로 놔두었다. 건륭제가 죽고 난 뒤 그녀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황궁 내 태비들 사이에서도 왕따 신세가 되고 기고만장하던 과거와는 달리 초라한 말년을 보냈다.[83] 일반적으로 청나라에서 황제의 적녀는 고륜 공주로 봉해졌고 서녀는 화석 공주로 봉해졌다. 조선으로 치면 고륜 공주는 '공주' 에, 화석 공주는 '옹주'에 해당하는 셈. 물론 조선의 공주, 옹주와는 달리 모친의 지위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예외도 있었다.[84] 빨간 선은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동쪽의 흑룡강 이북 땅과 연해주 지역은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에 의해 러시아에 귀속되었고, 외몽골은 1921년 소련에 의해 독립하였다.[85] 원래는 강옹건성세라고 해야 하겠지만, 옹정제의 재위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도 있고, 묘하게 옹정제는 전통적으로 폭군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평가가 박했다.[86] 티베트, 위구르, 카자흐, 키르기스, 몽골족 모두 준가르를 증오하고 있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족은 티베트 불교를 믿던 준가르가 가장 탄압하던 민족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준가르는 체왕 랍탄 시절 포탈라궁을 불지른 일로 티베트인들에게도 원성을 들었다.[87] 비슷한 케이스로 오이라트족의 일파가 오늘날 러시아의 칼미키아 일대로 이주하면서 원주민인 노가이족을 학살한 사례가 있는데, 노가이족의 경우 이웃 국가들이 퇴로를 열어주어 전멸은 피했다.[88] 위구르족과 외몽골 부족들은 청나라의 준가르 원정을 도왔다. 청군이 중원으로부터의 보급로가 수천킬로미터에 달하는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 민족들이 청군의 편을 들어 보급을 도왔기 때문이다. 다만 청군에 일찍 항복한 준가르의 부족들은 팔기군으로 편제되어 멸족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89] 준가르 멸족의 경우는 국방비 절감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라서 이런 비판이 합당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베트남과 태국, 미얀마 등 동남아 국가들과의 분쟁은 특별한 성과 없이 막대한 전비만 낭비하는 것으로 끝났다.[90] 건륭제가 추진한 사치성 토목공사는 이화원 정도가 있고, 건륭제 시절의 청나라 1년 재정의 1/10정도인 480만냥 정도를 들였다. 다만 이것은 물이 부족한 북경에 저수지를 건설해서 물공급원을 확충하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에, 사치로만 보기는 힘들다.[91] 출처 중국어 위키백과 건륭제남순[92] 단 세금 감면은 미봉책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이같은 순행 의도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청나라는 강남(현재의 절강성, 강소성, 안휘성) 보다도 훨신 더 서쪽의 호북성에서 발발한 백련교도의 난과 그 남쪽의 광동성에서 벌어진 태평천국의 난 때문에 큰 멸망 테크를 걷게 된다.[93] 강희제 중기인 1685년 3100만냥이던 청나라 세수는 옹정제 시대 (1725)년에는 3500만냥, 건륭제 중기인 1766년에는 4800만냥까지 늘어났다. 건륭제는 감세정책을 폈고, 건륭제 말기 1791년에는 4300만냥으로 줄어들었다. #[94] 다만 이는 계몽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라기보다는, 중국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의도가 더 강했다. 어느 날 갑자기 "너희 생각은 다 틀렸다"고 하는 것보다는, "공맹께서 하시던 말씀으로 보더라도 가톨릭은 설득력이 있다"고 하는 게 훨씬 중국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 이러한 경향을 '보유론(補儒論)'이라 하는데 명나라 시대의 예수회 선교에서부터 나타난 경향이며, 훗날 조선에서 특히 많은 공감을 받았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이 생각하기에도, 가톨릭은 인류 보편적 논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쪽이 훨씬 와닿는 설명이기도 하고. 실제로 천주교에서 제사를 금지하자 조선에서 배교자들이 많이 나왔다는 점도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95] 참고로 옹정제는 유럽 현지에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다 처형한다는 악평까지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옹호론까지 등장했다. 비록 순교자들을 탄생시켰지만 검소하고 정력적이며 능력 있는 황제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것이 일명 오현제들과의 비교.[96] 그런데 이 비교들은 은근히 황제들의 성향과 잘 어울린다. 강희제 - 트라야누스, 옹정제 - 하드리아누스 그런데 갑자기 건륭제 - 루이 14세 크리. 루이 14세 이전에 프랑스는 유럽에서 강력한 국가였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목상 유럽의 유일한 제국 밑에 있었다. 거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위를 차지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여러 강대한 세력들과 혼인관계를 형성하면서 원 신성 로마 제국의 지역인 독일을 벗어나 스페인까지 통치하는 등 유럽 제1의 위치에 있었다. 이에 루이 14세는 이전에 축적한 자본을 가지고서 팽창할 당의성이라도 있었다.(이후 가톨릭적인 성향으로 인하여서 위그노들을 탄압하여 상업은 붕괴시켰지만, 이것은 신/구교간의 차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프랑스의 대다수는 가톨릭이었고, 왕은 다수의 의견을 청취한 것에 불과하다.)[97] 누구를 뜻하는지는 당연하다. 이 당시 황제는 건륭제였다.[98] 피터 C. 퍼듀작 중국의 서진에서 인용[99] 물론 이것은 78000파운드의 거액의 예산을 들여 중국에 통상 사절로 왔다가 별무성과로 떠난 매카트니의 개인적인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 매카트니 자신이 여러 영국 식민지에서 총독으로 식민통치를 하던 인물로, 비서구권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인물이었고, 특히 삼배구고두에 관련된 논란에서 보듯이 당시 중국인들의 세계관이나 중국 전통의 조공체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매카트니는 애당초 중국과의 통상을 위해 온 사절단이었는데, 목적 달성에 실패했고, 그 실패를 자신이 아닌 청나라 탓으로 돌리려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또한 매카트니는 전형적인 식민관료 출신이다 보니 국수주의가 강해 중국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했고, 그가 남긴 중국 회고록이나 보고서도 악의적인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중국 정계의 문제점과는 별개로, 한낱 장사치가 주제넘게 남의 나라 정치판을 제대로 통찰하지도 못했으면서 멋대로 주절거린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100] 그 후인 제2차 아편전쟁 당시에 영불연합군에 의해 파괴당했다.[101] 오죽하면 문자의 옥을 피해 한족으로 위장하는 만주족이 속출할 정도였다.[102] 물론 기존의 중국 정복왕조였던 원나라에 비하면 문화적 수준은 훨씬 높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수준과 관련된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103] 대한 여러 일화들이 많은데, 임기응변이나 꾀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4] 다만 명청시절에는 승상직을 폐지했기 때문에 의정대신이 국무총리와 1-1로 매치되지는 않는다.[105] 허션은 타락한 권신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흑화되기 이전에는 허션만큼 부패한 관리나 탐관오리 등을 잘 때려잡고 건륭제를 대신하여 통치를 잘 한 신하도 없었다. 따라서 통치에 유능했던 것은 사실이다. 나중에 권신으로서 국정을 농락한게 문제였지.[106] 조선으로 치면 대제학정도가 되겠다.[107] 위에서 설명한 매카트니를 접대한 것도, 영국과의 통상을 불허하기로 실제 결정한 것도 모두 허션이었다. 매카트니는 중국에 다녀온 후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많은 중국인들이 허션을 제2황제라고 부른다"고 썼다.[108] 이 매관매직의 공범이 건륭제라는 이야기도 있다. 즉, 허션이 건륭제의 묵인하에서 뒷돈을 받고 벼슬을 팔고, 그 자금을 건륭제의 유흥이나 예술품 구입비용으로 썼다는 것이다.[109] 또는 허션이 건륭제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는데,가경제가 건륭제의 실책을 모두 허션에게 뒤집어 씌우고, 건륭제의 비자금을 허션의 개인적인 부정축재로 몰아 처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근거는 이렇게 몰수된 재산이 국고가 아닌 가경제의 내탕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허션은 권력이동기에 처신을 제대로 못해 죽은 것이니, 아주 무고한 죽음은 아니다.[110] 팔기가문에 속하는 기(旗)를 변경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111] 17명이나 되는 황자들 중에서 5황자 영기, 8황자 영선, 11황자 영성, 15황자 영염만이 건륭제 살아생전에 친왕 작위을 받았을 정도였다. 결국 아버지 건륭제로부터 봉작을 받지 못한 황자들은 이복형제인 가경제가 즉위하고 나서야 겨우 봉작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건륭제가 아들들에게 친왕직을 안준 이유는 조부 강희제 시절 아버지 옹정제와 숙부들의 궁정암투를 보고 자랐고, 본인도 차기 황위를 두고 셋째형 홍시에게 도전을 받았던 과거 때문인 듯하다. 청나라는 황자들에게 전부 친왕직을 주지 않았는데 친왕직을 준다는 건 그만큼 후계자 후보로 생각한다는 뜻이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당장 건륭제부터가 옹정제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친왕으로 책봉되었다. 친왕이라는 작위 자체에 후계를 비롯한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다보니, 건륭제 입장에서도 아들들에게 친왕직을 주는 걸 꺼릴 수밖에 없었을 것. 실제로 건륭제 시절 친왕으로 책봉된 황자들 중 8황자 영성을 제외하면 5황자 영기나 11황자 영성도 후계자 후보로 추정되던 황자들이다.[112] 건륭제의 첫 황후였던 효현순황후의 친정조카로 부찰 부항의 아들이다. 유아기 때부터 황궁을 들락거리며 성장해서 고모부인 건륭제에게 유달리 사랑받았다. 복강안말고도 부찰 부항의 차녀가 건륭제의 며느리가 되는 등 부항의 자식들은 황족과 혼인하며 청대 최고의 명문가로서 영예를 누렸다.[113] 특히 능글맞은 눈매.[114] 정조는 일 중독자에 골초요 주당이었지만, 건륭제는 40대 이후로는 일보다는 노는 걸 좋아하고, 술 대신 차를 더 애호했다. 이런 차이가 건륭제를 희대의 장수황제로 만든 것이다.[115] 환주격격 시즌2에서 향비가 나오는데 아마 경요가 서검은구록 내용을 가미한 거 같다. 서검은구록 향향공주가 바로 향비다.[116] 제비와 자미를 자신의 양팔에 비유할 정도로 제비를 아끼던 딸임에도 저런 반론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같은 상황에 놓인 자미에게 측복진 자리를 권유할 수 있을지도 봐야하는 관점이다.[117] 주인공인 위영락이 임신했을 때 직접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 작품에서 인증했다.[118] 우리나라에서는 청향비로 소개되었다.[119] 정확히는 한화된 여진족의 후손이지만, 조상 대에 이미 한화된 만큼 한족의 혈통이 많이 섞였을 것이다.[120] 홍력, 진가락, 복강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