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따르면, "현종 20년(1029년) 정월 숭덕궁(崇德宮)에서 훙서하니 나이는 66세였고, 유릉(幽陵)에 장사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고려사 기록
참고로, 유릉에서 유(幽)라는 시호는 상당히 좋지 않은 단어로서, 천추태후에 대한 후손들의 평가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幽)라는 시호의 뜻은 動察難常(동찰난상), 나라가 크게 어지럽다라는 뜻으로 단적으로 말해서 나라를 크게 어지럽힌 자의 능묘 이라고 쓰여있는 셈이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병풍석과 3단까지 조성된 축대, 고종 때 세운 비석도 존재했다. 그러나 1963년 북한이 조사할 때는 봉토와 뒷산의 흙이 흘러내려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거의 다 묻혀 존재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화됐다. 발굴 당시 여러 차례 도굴당해 대부분의 유물이 원래 위치에 놓여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묘실에서는 부장된 청동제품과 철제품이 나왔다. 청동제품으로는 '청동원형 장식판', '청동화폐', '청동못', '청동 자물쇠' 등이, 철제품으로는 '쇠가위', '문고리보강쇠', '쇠조각' 등이 출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