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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愛新覺羅 永琪 애신각라 영기 | |
시호 | 화석영순친왕(和碩榮純親王) |
자 | 균정(筠亭) |
호 | 등금거사(藤琴居士) |
생몰년도 | 1741년 3월 23일 ~ 1766년 4월 16일(25세) |
부친 | 청 고종 건륭제 |
모친 | 유귀비 가리엽특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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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 고종 건륭제의 다섯번째 아들로, 생모는 유귀비 가리엽특씨다. 청 인종 가경제의 이복 형이다.2. 생애
1741년 3월 23일 유귀비 가리엽특씨 소생으로 건륭제의 다섯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기는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학문을 좋아하여 매일같이 여러 황자 중에서 가장 먼저 서재에 가서 수업을 받았다.청사고 기록에 의하면 건륭 22년에 영기가 총독 액필(額弼 )의 딸이자 악이태(鄂爾泰)의 손녀 서림각라씨(西林覺羅氏)를 적복진으로 맞아 혼인을 했다.[1] 혼례식을 거행하기 전에 영기는 궁에 있는 황태후와 제후, 비빈에게 절을 올렸다. 혼례식 당일 영기는 장인어른 댁에 가서 부인을 맞이하고 다음날 영기와 부인은 궁에서 함께 황태후, 제후와 비빈에게 절을 했다. 건륭 25년에 영기는 원명원에서 자금성 내의 조상소로 거처를 옮겼다.
건륭 28년에 원명원 구주 청연전에서 불이 났을 때 영기는 친히 부황인 건륭제를 업고 위험에서 벗어났다. 건륭제는 매우 흐뭇하여 영기가 병에 걸렸을 때 그를 영친왕으로 책봉했다.
병석에 누은 영기의 몸상태가 도통 나아지질 않자 건륭제는 "5황자의 병은 수 개월 동안 치료 했지만 아직 낫지 않았는다는 것은 의원의 실력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건륭 31년에 결핵을 앓은 지 여러 달이 지난 끝에 결국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순(純)'이 내려졌다. 이 시호는 그의 일생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되었다. 영기는 생모인 유귀비가 그닥 높은 신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에 걸린 그를 위로하고자 한 건륭제에 의해 친왕으로 봉해졌다. 심지어 건륭제는 많은 아들들 중에서 영기를 황태자로 세워 보위를 물려주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유귀비가 신분이 높지 않았고 총비가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영기에 대한 건륭제의 애정은 영기 그 자체를 향한 것이지, 효현순황후 소생의 아들들인 단혜황태자 영련과 화석철친왕 영종처럼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그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진 사례가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건륭제의 눈에 비친 영기는 총애하는 후궁의 소생이든 어미의 신분이든 상관없이 후계자감으로 손색이 없는 가장 훌륭한 황자였다.
이렇듯 영기는 부황에게 극진하게 총애를 받으며 차기 황제가 될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그의 일생은 25년밖에 불과하였다.
건륭제는 황자들 대부분이 자신보다 먼저 죽자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며 효현순황후 소생의 적자들이 죽은 후 장자와 어진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여러 번 밝힌 적이 있다.[2] 여기서 장자는 영황, 어진 이는 영기를 말한다. 즉, 계황후의 적자인 황12자 영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이 두 사람이 후보였다. 건륭제는 황5자 영기가 황장자인 영황보다 더 낫다고 여긴 듯하다.
"그때 짐은 5황자를 눈여겨 보며 황자들 중에서 더욱 총애하였다. 그가 한문, 만문, 몽고어, 기마, 활쏘기, 셈법 등 모든 일을 능숙하게 익혀 자못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그 뜻을 밝히지 않았다. 그도 병으로 죽었다."
《흠정고금저이금감》건륭 48년에 대한 기록
《흠정고금저이금감》건륭 48년에 대한 기록
건륭제는 영기가 세상을 떠난지 2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영기를 후계자로 고려하고 있을 정도로 그 재능을 높이 샀지만 안타깝게 요절한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영기의 후손들은 양홍기로 편입되었다. 영친왕부는 선무문 안의 태형호 서쪽에 위치하고 소련에 의하면 "정원은 모두 좋고 정원도 아름답"고 기록되어 있다. 영친왕부는 순친왕 혁혁의 저택이 되었다. 영기는 건륭제의 장자인 화석정안친왕 영황과 같이 바로 북경 성동북면의 불로둔진 양각장촌 2리에 매장되었다. 다라군왕 영장도 이곳에 매장되었는데, 그곳은 풍수가 매우 좋다고 한다. 건륭의 장자 영황과 영기는 가장 총애 받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을 '태자릉'이라 불렀다. 1958년에 밀운저수지를 건설한 관계로'태자릉'건축군은 이미 철거되었고 옛날에 묘원이 있던 곳도 저수지 아래에 묻혔다.도굴당하지 않아 지하궁을 열었는데 부장품이 풍부해 진품이 수도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3. 가족 관계
3.1. 부인
- 적복진 서림각라씨(西林覺羅氏): 총독 액필(額弼 ?~1763)의 딸 / 악이태(鄂爾泰 1677~1745)의 손녀
- 측복진 색작라씨(索綽羅氏): 좌도어사 관보(觀保)의 딸
- 측복진 과이가씨(科爾佳氏)
- 측복진 이이근각라씨(伊爾根覺羅氏)
- 측복진 만류합씨(萬琉哈氏)
- 첩 호씨(胡氏): 호존주(胡存柱)의 딸
3.2. 자녀들
- 서1남(1759~1759): 측복진 색작라씨 生 / 요절
- 서2남(1760~1760): 첩 호씨 生 / 요절
- 서3남(1761~1763): 측복진 색작라씨 生 / 요절
- 서1녀 현군(縣君 1762~1780): 첩 호씨 生/ 왕근반파이(旺勤班巴爾)에게 출가
- 서4남(1764~1764): 측복진 색작라씨 生 / 요절(5남과 쌍둥이)
- 서5남 다라영각군왕 면억(多羅榮恪郡王 綿億 1764~1816): 측복진 색작라씨 生(4남과 쌍둥이)
- 적1남(1765~1765): 적복진 서림각라씨 生 / 요절
4. 여담
영기의 8대손으로 중국 태생의 언어학자인 아이신기오로 울히춘이 있다.5. 대중매체
- 연희공략
파일:연희공략 영기.jpg
태중에 있을 때부터 고귀비의 음모에 휘말려 고생을 했고, 가까스로 태어났건만 나라를 망칠 운명을 가진 금동이라 하여 어머니 아연과 함께 생매장을 당할 뻔하였다. 다행히도 영락이 가짜 황후의 금인을 가져와서 영기를 구해내고, 엽천사가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리면서 가까스로 살아나게 되었다.
영락이 후궁이 되었을 때에는 어느 정도 자란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아연은 영기와 영락을 만나게 하여 뒷일을 도모하였고, 영락도 한때 자기가 구해낸 아이가 어엿하게 자란 것을 보고 반가워하며 간식을 나눠주고 놀아주었다. 그런데 영기가 연희궁에 놀러간 이후 갑자기 아픈 일이 일어났고, 영락은 간식에 독을 넣어 영기를 해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심문 결과 영락이 준 간식에 독이 든 것이 아니라, 영기가 어린 몸으로 무리하게 인삼 조각을 많이 먹어서 탈이 난 것임이 드러났고, 영기에게 인삼탕이 아닌 인삼 조각을 주어 영기를 아프게 한 아연이 시행범, 그리고 뒤에서 아연을 조종하던 소정호가 이 사태의 진범으로 드러나 둘 다 벌을 받았다.[3] 영기는 어머니를 구명하기 위해 온 궁궐을 돌며 황실 어른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 빌었고, 영기를 딱하게 여긴 태후가 아연을 출궁시키는 선에서 끝을 맺는다.
후반부에선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며, 문무를 겸비하고 인품도 좋아 부황인 건륭의 총애를 받았다. 영기에 비해 능력이 부족했던 4황자 영성은 그런 영기를 질투하여 조총 시연장에서 영기가 쓸 총을 망가뜨려 망신을 주고자 했으나, 원춘망의 계략으로 영기가 다리를 못 쓰게 되어 더 큰 사달이 났다. 본인의 처첩들과 서모들이 문병을 왔을 때는 슬퍼하는 그들을 의연하게 다독였지만, 영락이 문병을 오자 울면서 불구가 된 고통과 원통함을 토해낸다. 문병을 온 영락에게 '불구가 되어 보니 내 처지가 억울하고, 건강한 형제들을 향해 악의가 샘솟는다. 하지만 내가 죄인을 벌하자고 함부로 나서면 부황께선 또 아들을 잃으실 것이고 그건 나라에 큰 손해가 된다'면서 더 이상 죄인을 추적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건륭은 불구가 된 영기를 친왕에 책봉해[4] 총애가 여전함을 보여주었고 남순에 데려간 후 낙향했던 엽천사를 불러 다리를 고쳐주고자 했다. 엽천사가 집도하고자 했던 수술은 특수한 벌레들을 사용하는 수술로, 벌레들이 썩어 있는 환부를 먹어치우게 한 후 새 살이 돋게 하는 방법이었다. 하나 엽천사에게서 수술의 성공률이 높지 않다는 말을 듣고[5], 영기 또한 본인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각오했는지 양모인 영락에게 '그간 키워주셔서 감사했다'고 전해달라 부탁한다. 이후 수술에 들어갔지만 원춘망이 영기의 다리를 고치는 데 쓸 벌레들을 미얀마 독충으로 바꿔버렸고, 이를 막고자 한 영락도 덩달아 감염되었다. 이후 외전에서 누이동생 소화의 언급을 보면 머잖아 사망했던 모양.
전반적으로 의젓한 모범생으로, 이런 면모 덕분에 황실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만 놀기 좋아하는 양어머니 영락이 동생들에게 나쁜 본이 될까봐 자주 잔소리를 했던 모양인지, 영락이 항주에서 돌아온 영기를 피해 도망가는 이야기도 나온다.*여의전
전반적으로 의젓한 모범생으로, 이런 면모 덕분에 황실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만 놀기 좋아하는 양어머니 영락이 동생들에게 나쁜 본이 될까봐 자주 잔소리를 했던 모양인지, 영락이 항주에서 돌아온 영기를 피해 도망가는 이야기도 나온다.*여의전
[1] 양람기 서림각라씨는 악이태의 처형 이후 위세가 줄기는 했으나 여전히 당대 대명문가에 속했다.[2] 여진족은 장자나 현명한 자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추대한다. 장자가 나이가 많을 경우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여 막내아들을 선택하기도 하며, 청나라 초기엔 말자상속제가 유행하였다.[3] 이 인삼은 순귀비 소정호가 '내 말을 안 따르면 네 아들을 해치겠다.'고 준 협박의 징표였다. 그런 인삼을 아연이 역이용하여 순귀비를 몰락시켰던 것. 물론 그 과정에서 아들을 아프게 했기에, 아연 또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4] 비록 태자밀건법 때문에 공식적으로 태자를 세우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청대에 어느 황자가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먼저 친왕에 책봉되었다는 것은 부황이 유력한 차기 계승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당장 영기가 죽은 이후로 동생인 영염이 가친왕에 봉해진 후 양위받았으며, 조카인 면녕도 사실상의 적장자라는 정통성에 더해 황궁에 침입한 반군을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지친왕에 책봉된 후 황위를 승계하였다.[5] 황제와 영락이 있는 자리에서는 쉬이 나을 것이라고 하얀 거짓말을 했지만, 영기와 단 둘이 남자 진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