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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23:25:36

회중시계

<nopad> 파일:Breguet Pocket Watch No.5.jpgBreguet N°5
1. 개요2. 역사
2.1. 시초2.2. 무브먼트2.3. 손목시계의 등장과 좁아지는 입지2.4. 휴대폰으로 흡수되다
3. 응용4. 유명인이 사용한 회중시계5. 각종 창작물에서의 회중시계6. 같이 보기
언어별 명칭
한자
영어 pocketwatch
프랑스어 montre de gousset
독일어 Taschenuhr
에스페란토 poŝhorloĝ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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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복 주머니 등 품속에 넣고 휴대할 수 있도록 한 작은 시계. 품을 회(懷) 자를 써서 회중(懷中)이란 '품 속'이라는 뜻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조끼를 입은 흰 토끼가 주머니에서 꺼내 보는 시계가 회중시계이다. 구조상 로켓이나 거울과 겸하는 경우가 많다. 형태는 크게 구분하여 시계의 앞 면이 유리로 되어서 시계판을 바로 볼 수 있는 오픈형과 앞 뒷면에 덮개가 있어서 막힌 헌터형이 있다.

2. 역사

2.1. 시초

시계가 기술이 발전되어 15세기 말엽 금속태엽이 발명되어 시계의 동력으로 자리잡았다. 그후 유사(遊絲: Hair Spring)·균형차(Balance Wheel) 등이 발명되자 사람이 휴대하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작은 시계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1510년 독일 뉘른베르크시의 시계장인 페터 헨라인(Peter Henlein)은 몇 가지 기술적 난점을 극복하고 휴대용 시계를 제작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전의 시계와 비교하면 획기적으로 작아서 사람들은 찬사하는 뜻을 담아 그가 만든 시계를 '뉘른베르크의 달걀'이란 뜻으로 뉘른베르거 아이(Nürnberger Ei)라고 불렀는데, 아닌 게 아니라 크기가 달걀만 하였다. 처음 휴대용 시계를 개발한 목적은 항해하는 선상에서 경도 측정용이었다고 한다.[1] 이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일정 규모 이상인 선박에는 초정밀 시계인 크로노미터를 필히 탑재토록 규정한다.

헨라인 이후 많은 유럽의 시계장인들이 휴대용 시계를 제작했지만 아직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하진 않았기 때문에 사슬이나 끈에 이어서 목에 걸고 다녔고, 휴대용 시계를 회중시계(pocket watch)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1675년 영국의 찰스 2세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시계를 주문하여 처음으로 진정한 '회중시계'가 등장했다. 찰스 2세가 회중시계를 들고 다니면서 유럽과 북미의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18세기에는 회중시계가 화려하게 디자인하고 보석으로 장식하는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가지고 싶어도 못 가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회중시계 그 자체와 함께 시계를 매다는 줄 또한 실용성과 패션을 겸비한 중요한 물품이었다. 회중시계용 시곗줄을 영어로는 워치 체인(Watch chain)이라고 부른다. 연미복실크햇이 남성의 정식 예복이었던 시대 그림이나 삽화 등을 보면 조끼 주머니에 흔히 시곗줄이 늘어졌다. 시계를 살 형편이 안 되는 일부 신사들은 주머니에 줄만 걸쳐 놓고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델라가 머리카락을 팔아 산 남편의 선물이 백금 시곗줄이었다. 참고로 남편은 그 시계를 팔아서 최고급 대모갑으로 만든 머리 빗[2]을 샀다. 대모갑은 요즘도 꽤 비싸지만 예전에도 대단히 비싼 물건이었다. 지금은 불법이다.

체인과 별도로 파브(fob)란 것이 쓰이기도 했다. 파브는 체인과 달리 줄이 짧아서, 시계를 주머니 안쪽에 넣으면 밖으로 조금만 나온다. 회중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내기 쉽도록 이렇게 한 것이다. 체인과 파브를 같이 달아 사용하기도 하였다.

회중시계는 19세기에 자전거가 발명되면서 조금씩 사양길에 들어섰다. 자전거가 발명된 후,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시계를 보기 위해 손목시계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 하지만 회중시계에게는 다행히도 당시 손목시계는 모두 기계식 시계라 소형화하려면 엄청난 기술력이 필요했고, 이 탓에 값이 비싸서 진짜 돈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회중시계로 만족해야 했다. 게다가 애초에 회중시계도 없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좀 큰 마을마다 시계탑이 있거나 최소한 성당에서 종소리로 시간을 알려줌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유럽 기계공업 기술의 상징이기도 하다. 무게추식 시계까지는 그럭저럭 베껴내던 아시아권 수공업자들도, 본격적인 정밀가공과 소재공학 등이 결합된 회중시계 레벨부터는 슬슬 따라가지 못했다. 여기에 종사하던 기술자들이 여러 정밀공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2.2. 무브먼트

1900년대 이전 회중시계들은 조그만 열쇠를 이용해서 태엽을 감고 시간을 조정하는 방식이었다. 헌데 이 열쇠가 크기도 매우 작은 데다가 잃어버리기도 쉬워서 대개는 시계줄에 함께 끼워두었다가 필요하면 떼어내서 태엽을 감게 하기가 일반적이었다. 이것도 불편한 사람들은 시계줄을 두 줄로 해서 한쪽에는 시계를 달고 다른 한쪽에는 열쇠를 달아 사용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Double Albert 방식 시계줄이다. 19세기 사람들이 시계줄을 양복 조끼에 줄줄 늘어놓고 다녔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태엽도 19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Fusee라는 매커나즘[3]이 사용되었다. 당시의 형편없는 야금술로는 태엽의 탄성이 부족하고 부위에 따라 탄성이 일정하지 않아서 태엽이 불규칙하게 풀리자, 이를 막기 위해 자전거 체인과 비슷한 부품을 추가해 태엽이 일정한 속도로 풀리도록 돕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메인스프링의 에너지를 휠트레인에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4]

체인 부품의 두께가 꽤 컸기 때문에 18세기에 널리 사용된 Fusee 회중시계는 두께만 거의 30, 40 mm에 달했다.[5] 여기에 투르비용 같은 부속까지 넣으려면 그만큼 시계가 두꺼울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시계를 얇게 만들수록 솜씨가 좋다고 인정했고, 영국제 한정으로 1890년대까지[6] Fusee 방식을 고집하여[7] lever escapement[8]와 결합하여 쓰였다.[9][10]
파일:fusee_pocketwatch_i.jpg
파일:fusee_pocketwatch_ii.jpg
이런 시계들은 굉장한 고급품이었기 때문에 시계판도 도자기로 구워서 만들거나 금속판을 손수 하나하나 깎아서 장식을 넣어 만들었다. 케이스도 금이나 은으로 제작하였고 무브먼트에도 화려한 장식을 넣었으며 천연 보석을 사용해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파일:fusee_with_pocketwatch_i.jpg
Fusee 무브먼트의 특징인 체인의 모습. 자전거 구동계와 흡사한 모습인데 자전거 구동계와 원리가 같기 때문이다.


lever fusee 방식의 영국제 회중시계 작동영상.[11]

영국을 제외한 회중시계는 1800년대 초반 이후로 Fusee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파일:old_france_pocketwatch_ii.jpg
프랑스의 회중시계인데 비교적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다.

1900년대 초 들어 오늘날과 같은 크라운(용두)을 돌려 태엽을 감고 시간을 조정하는 방식이 조금씩 도입되더니, 본격적으로 시계 산업이 스위스로 넘어가기 시작한 1920년대에 보편화되었다. 오늘날 기계식 손목시계의 크라운과 같은 원리이다.니켈 피니쉬과 제네바 스트라이프같은 여러가지 피니싱 방법이 개발되면서 시간이 많이드는 인그레이빙 공법 대신 현대의 피니싱과 동일한 방법이 적용되면서 현대의 손목시계의 무브먼트와 거의 같아졌다
파일:omega's_moden_pocketwatch.jpg

현재의 회중시계/손목시계의 무브먼트가 궁금하다면 태엽식은 기계식 시계 문서를, 건진지식은 쿼츠 시계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2.3. 손목시계의 등장과 좁아지는 입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장교만이 아닌 말단 병사수병, 해병들도 지원 포격이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 나는 언제 돌격해야 하는지 시간을 알아야 할 필요성 등이 생겼다. 그런데 가뜩이나 소총과 군장으로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손에 든 채로 회중시계를 휴대했다면,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멈춰서서 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품속을 뒤져서 시계를 꺼낸 다음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시계를 품속에 넣고 다시 손에 짐을 드는 불편한 작업을 해야 했다. 그동안 적의 총탄에 안 맞으리라 여긴다면 우스운 일이다.

이런 단점 탓에 이때부터 회중시계는 본격적인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문제점 때문에 손목시계는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일반인이 사용하기에는 상당한 귀중품이라서 시계가 주요 노획품에 포함될 지경이었으므로[12][13] 회중시계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에는 회중시계를 손목시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가죽 밴드가 나왔다.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괴상하게 생긴 회중시계의 탈을 쓴 손목시계도 많이 등장했다. 인류의 발명과 기술발전이 그렇듯 손목시계도 하늘에서 갑자기 뚝 하고 떨어진 것은 아니었고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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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ffany & Co.의 회중시계와 손목시계의 과도기 형태의 시계
파일:TELLUS LARGE SIZE ANTIQUE WRISTWATCH CONVERTED FROM POCKET WATCH 1.jpg파일:TELLUS LARGE SIZE ANTIQUE WRISTWATCH CONVERTED FROM POCKET WATCH 2.jpg파일:TELLUS LARGE SIZE ANTIQUE WRISTWATCH CONVERTED FROM POCKET WATCH 3.jpg
▲TELLUS의 회중시계와 손목시계의 과도기 형태의 시계

2차대전이 끝나고 회중시계가 실용품의 범주에서 본격적으로 밀려난 것은 쿼츠 시계가 등장할 때로 본다. 쿼츠 시계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손목시계도 싼값에 대량생산이 되었는데, 굳이 무겁고 크며 시간 확인 때마다 불편한 회중시계를 쓸 사람은 없었다. 이 시점부터 회중시계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지만 이후 기계식 시계 특유의 톱니바퀴들이 째깍거리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생동감 있는 모습과 기계 자체의 높은 장식성은 쿼츠 시계나 디지털 시계가 재현하기에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장인들이 제작하는 고가의 공예품에 가까워졌다.

2.4. 휴대폰으로 흡수되다

회중시계의 수명을 진짜 끝장 내버린 건 손목시계가 아니라 휴대폰이다. 휴대폰을 시계 대용으로 쓰는 사람들이 몸소 체감한 바이겠지만 일상에서 시계를 주머니 속에 넣고다니다가 꺼내보는건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렇기에 누구나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21세기에는 회중시계의 입지는 소멸했다. 2000년대 초반 폴더폰이 나오면서 뚜껑에 소형의 액정 화면으로 전자시계 기능을 넣기 시작했고 기능적으로 회중시계를 거의 완벽히 대체했다. 이후 등장한 스마트폰은 굳이 화면을 켜야 시간을 볼 수 있던 때도 있었지만, Always On Display 기능, 더 나아가 스마트 워치가 등장하면서 진짜 회중시계처럼 '별다른 조작 없이도 시계를 볼 수 있게' 되면서 마찬가지가 되었다. 오히려 회중시계야말로 뚜껑이 달린 로켓 형태라서 이 쪽이 더 불편하다.

그나마 시계를 사용해야 하는 특수 직업에서도 손목시계를 사용한다. 시험을 보는 학생, 대한민국 국군, 잠수부, 비행기 기장 등 파일럿, 의사, 간호사 등 전자기기의 사용이 제약된 일부 직종은 일과시간에는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밖에 시계에 남은 기능은 패션 아이템으로서의 기능 정도에 불과한데, 보여주기 위해서 시계를 착용한다면 회중시계보단 손목시계가 훨씬 적합하다. 패션 기능도 손목시계가 차지했고 진짜 순수한 시간만 보는 회중시계는 실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물건이 되고 말았다. 굳이 회중시계를 사용하는 곳은 일본 JR 신칸센의 기관사 등 아주 예외적인 경우밖에 없다.[14]

정말 드문 요소지만, 손목시계에 일반적인 손목용 끈을 대신해 패브릭 줄로 매단 뒤 카라비너를 달아두고 Carabiner Strap으로 부르거나, 아예 카라비너 그 자체에 시계나 나침반을 내장하는 경우도 아웃도어 용품으로서 드물게 발견된다.

Carabiner Watch 나 Clip Watch 등의 명칭으로 시계와 연결된 완제품을 팔고, Nurse band 라는 이름으로 밴드만 파는 경우도 있다. 놀랍게도 스마트워치에 대응되는 밴드가 많다.

3. 응용

현재에 와선 시간을 알 목적으로 회중시계를 사용하는 경우보단 단순 패션용으로 더 많이 팔리는 중이다. 말하자면 남자의 로망. 실크 해트와 더불어 스팀펑크 세계관에서도 꽤 많이 등장하는 악세사리다.

연구에 집중하던 아이작 뉴턴이 달걀 삶다가 회중시계를 집고선 달걀인 줄 알고 삶아 버린 적이 있다. 그 사람의 집중력이 엄청났다는 식으로 자주 소개되는 일화. 비슷한 것으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자기 주소를 못 외웠다는 일화 정도. 적어도 이 사람은 시계를 삶은 적은 없지만. 그나마 뉴턴은 시계를 삶는 걸로 끝났지만, 프랑스의 대수학자 앙페르는 계산에 쓰는 조약돌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학교에 간다는 것이 회중시계를 강에 수장시키고 조약돌을 들고 학교에 갔다고 하니(…).

일본에서는 상술한 것처럼 철도기관사들이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할 요소로, 입사할 때 지급받는 물건이기도 하다. 열차를 보면 이 시계를 끼울 수 있는 걸이대가 마스콘에 있을 정도. 이는 상당히 오랫동안 열차에 시계장비와 같은 정밀 기기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운전 중 다음 정거장까지 가는 데 필요한 시간(시격)을 보기에 손목시계보다는 회중시계가 더 편하단 이유도 있었다. 이 전통은 증기기관차 시절부터 있었다. 현대에는 열차에 당연히 컴퓨터에 기반한 각종 전자장비와 운전 편의시설이 채택되면서 운전 도중에도 디지털 시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회중시계를 지참함은 어느 정도 전통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15]

파일:SEIKO 회중시계.jpg
이렇게 생겼다. 1958년 SEIKO가 제작한 회중 시계. SEIKO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도 일본 철도회사의 회중시계는 모두 여기서 만든다. 예나 지금이나 디자인은 별 차이는 없다.

일본 철도기관사들은 정시성을 위해 매 운행시마다 시계를 조정해야 하는데[16], 쿼츠시계가 등장하기 전 기계식 시계를 쓸 적엔 붙박이로 있으면 시간 조정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 회중시계를 채택했다. 이후 쿼츠시계가 개발되고 전동차 운행이 늘어났지만, 일본은 시간대별 수요에 따라 차를 붙였다 떼는 병결운행이 패러다임이었기에 대부분의 차량이 중간문을 채택해 운전석이 상당히 비좁았다. 또한 별 탈이 없으면 습관을 바꾸지 않는 보수적인 관행 때문에 굳이 차량 계기판에 시계를 넣지 않는 것이 한참간 이어졌다. 이후 병결 운행에서 장대차량 운행으로 패러다임이 바뀐 지 한참 지난 2010년 중후반이 돼서야 모니터 화면에 시간 표출을 하는 등 회중시계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운전석 공간이 널럴한 신차(한큐 1300계 전동차)에 여전히 회중시계를 박아버리는 한큐 전철 같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디젤기관차가 6.25 당시 UN군 군수물자 입환용으로 일찍 들어오기도 했고 실용적인 이유 등 여러 원인으로 위와 같은 현상은 사라졌다. 애초에 지금까지도 옛 회중시계 방식을 고집하는 일본 철도기관이 특이한 사례. 한국에서는 디젤기 운전석에 시계가 있기도 했거니와 별도로 회중시계 대신 플라스틱제 작은 벽걸이 시계를 끈에 묶어 운전석에 걸어놓기도 했다. 이는 휴대용 회중시계가 그 시절에는 비교적 비싼 물건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간편한 손목시계도 있고 다른 수단도 많은데 굳이 회중시계만을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 기관사는 일찌감치 회중시계를 벗어나 통근열차 운전실에는 고속버스 수준의 대형 디지털 시계가, 다른 기관차/동차 기관실에도 디지털이든 모니터 안에든 시계가 들어 있다. 또한 기관사들이 모두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멋이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회중시계를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2014년 태백선 열차 충돌사고로 인해 운전시 휴대폰 사용이 금지되면서 대용으로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기관사도 많이 늘어났다.

한때 손목시계 밴드 부분에서 세균이 번식할 수 있다는 이유로[17] 의사간호사들이 회중시계를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예비 의학도에게 축하선물로 주기도 했고 특유의 고풍스러움 덕분에 은근히 팔렸으나, 현재는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잘 통용되는 관습은 아니다.

태엽으로 구동하는 종류는 3-4만 원 정도면 괜찮은 걸로 장만할 수 있고,[18] 전자구동은 만 원 정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쿼츠 시계 계통인 전자구동식 회중시계가 더 정확하며 추가적인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태엽으로 움직이는 시계같은 경우 적어도 하루이틀에 한 번은 꼬박꼬박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노고가 필요하지만[19] 의외로 제 때 태엽을 감아준다면 그럭저럭 시간이 정확하다. 이전에는 태엽의 토크에 따라 정확도가 변화했으나, 신소재 등의 활용으로 인해 의미 없는 이야기가 되었고, 태엽을 아무리 많이 감더라도 고장나지 않는다.

청바지 등의 앞주머니 안에 있는 작은 주머니는 사실 '와치 포켓'이라 하며 원래 회중시계를 보관하던 용도로 만들어진 부분으로, 여기에 회중시계를 넣고 체인의 다른 쪽을 벨트 고리에 다는 식으로 사용하였다. 현대로 들어서는 회중시계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기에 그냥 장식적 요소로만 남은 것. 비슷하게, 흔히 볼 수 있는 악세사리인 바지 체인도 마찬가지로 와치 포켓에 회중시계를 넣은 상황에서 벨트 고리와 포켓 사이에 드리워진 회중 시계의 사슬이 장식적 요소로만 남은 형태이다. 이러다 보니 원래의 용도를 모르는 현대인들은 이 바지 포켓이 동전 주머니인 줄 아는 경우도 제법 있다. 스티브 잡스아이팟 나노를 출시하면서 이 회중시계용 주머니에 대해 "모든 사람들의 청바지에는 아이팟 나노만을 위한 주머니가 달려있다"는 식으로 키노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아이팟 1세대 출시 당시 슬로건이 "주머니 속에 1000곡"이었는데, 나노를 출시하며 이 슬로건을 재이용한 것.

4. 유명인이 사용한 회중시계

파일:윤봉길2.jpg
윤봉길 의사가 거사 직전 김구 선생과 교환한 시계도 회중시계. 윤 의사가 건네받은 회중시계는 당시 2원짜리로 보물 제568-3호로 지정되어 있고 백범 김구 선생이 맞받은 윤봉길 의사의 금색 회중시계는 당시 6원짜리로 등록 문화재 441호로 지정되었다.[20] 다만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제법 많아 해당 일화가 그려진 위인전의 삽화나 학습만화 등에서 손목시계로 잘못 그려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또한 흥선 대원군도 회중시계를 사용했다. 운현궁 내부의 유물전시관에 가면 그가 쓴 회중시계를 볼 수 있으며 이 시계는 1966년 대원군의 묘를 오늘날 자리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물건이라고 한다.

파일:Vacheron Constantin 회중시계_순종.jpg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역시 회중시계를 사용했다. 사용하던 회중시계의 제조사는 바쉐론 콘스탄틴. 출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 경매회사를 통해 출품되어 신원불상의 개인 수집가가 1억 2500만 원에 낙찰받았다고 한다.

5. 각종 창작물에서의 회중시계

상술한 것처럼 들고만 있어도 뭔가 멋있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기에 각종 창작물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아이템. 모체가 모체이니만큼 시간 관련 능력을 가진 경우도 상당수 있다. 총에 맞거나 공격을 당해도 옷 안의 회중시계 덕분에 살아남는 경우도 가끔 있다.

또한 회중시계 사용자는 시계 안쪽에 사랑하는 애인, 가족 등 무언가 소중한 것의 사진을 넣어두는 게 클리셰. 그리고 전투 장면 등에서 시간 말고 굳이 사진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나아가는 건 훌륭한 사망 플래그로 정평이 나 있다.

다른 예로 최면을 표현할 때 도구로 사용하는 사례가 있다. 시계줄을 들고 진자처럼 좌우로 흔들고, 이를 시계를 바라보다가 최면에 빠지는 장면으로 잘 나온다.

6. 같이 보기



[1] 시계를 두 개 가지고 다니면서 가리키는 시간의 차이로부터 계산했다. 하나는 기준 시간대에 맞추어 놓고, 다른 하나는 매일 해가 중천에 떴을 때 12시에 맞추면 항상 두 시계의 시간차를 알 수 있고 이에 따라 경도의 차이를 계산할 수 있다.[2] 머리를 빗는 물건이라기 보다는 비녀처럼 긴 머리카락을 모아 올려 고정하는 장식용 빗이다.[3] 엄밀히는 프랑스어로 Fusée가 맞는다.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하였다.[4] 현재의 무브먼트에는 메인스프링의 에너지를 휠트레인에 전달하는 역할은 메인배럴에 통합되었다.[5] 주로 영국, 프랑스제인데 verge fusee라고 한다. verge escapement를 사용해서 붙은 명칭.[6] 이때쯤 영국의 시계장인들이 세금정책 때문에 스위스로 많이 넘어갔다. 현재 대부분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의 설립년이 1800년대 초중반에서 1900년대 초반임이 이 때문. 이전의 시계는 영국프랑스 그리고 독일이 제일이었다.[7] 왜 이때까지 비싸고 복잡한 Fusee 방식을 고집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태엽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태엽이 풀릴수록 스프링의 장력이 빠지는 물리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기술로도 가격, 메이킹 난이도 등에 비해 효율이 안 나올 뿐이지 Fusee를 사용하면 (특히 수동에서) 유의미하게 더 정확하다. Breguet, A. Lange & Söhne 등 하이엔드에선 Fusee를 탑제한 모델을 판매 중이고, 쿼츠 시계가 발명되기 전 항해용 정밀시계엔 영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도 Fusee를 사용했다.[8] 현대의 시계의 무브먼트에도 들어가는 탈진기 방식이다.[9] lever fusee라고 한다.[10] verge fusee 방식에 비해 1/2-1/3 가까이 얇아지고 정확성도 현대의 기준에서도 정확하다고 할 만큼 높아졌다.[11] 3분 33초경 부터 무브먼트를 보여준다.[12] 베를린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독일 국회의사당적기를 게양하는 장면에서도 한 장교가 양쪽 손목에 시계를 하나씩 찬 모습이 눈에 띈다. 당시 전후사정을 감안하면 최소한 오른쪽 손목의 시계는 약탈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사진은 이후 높으신 분의 검열에 걸려서 해당 장교의 오른쪽 손목이 수정되었다.#[13] 미드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도 한쪽 손목에 손목시계를 여러 개 찬 미군 병사들의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대충 지금의 스마트폰보다 더 비싼 수준.[14] JR 기관사는 JNR 시절부터 회중시계를 계속 고집하고 있으며 운전석에는 회중시계를 두는 받침대도 있다.[15] 한편 몇몇 곳에서는 여전히 열차에 디지털 장비가 탑재되지 않은 낡은 열차가 운행되는데, 이 경우엔 여전히 회중시계가 필수이다.[16] 승무 전에 사무소 기준시계와 시간과 자신이 가진 회중시계의 시간을 초까지 정확히 맞춰서 근무를 나간다.[17] 여름에 손목시계를 오래 차면 접촉한 피부에 습진이 발생하는 경우가 꽤 있다. 같은 이유로 수술실에서는 반지 끼는 것도 엄금이다.[18] 그러나 이 정도 가격대 시계는 질이 좋지 않은 중국산 무브먼트다 보니 오래 쓰려곤 하지 말고 회중시계를 체험해본다는 심정으로 구매하는 것이 좋다.[19] 회중시계 특성상 오토매틱 무브먼트는 거의 없다.[20] 참고로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5~6원이었다.[21] Don't forget 3.Oct.11[22] 강철의 연금술사 원작자인 아라카와 히로무와 일본 쪽 판권사 높으신 분들이 너무 퀄리티가 좋다며 단독으로 라이센스를 부여 중이라고.[23] 비행기 공포증과 해상공포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둘 중 하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두 개가 전부 겹쳐서 일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24] 사실 이 시계는 사용자의 종족을 바꿀 때 쓴다. 실제로 10대 닥터가 시즌 3의 8, 9화에서 이 시계를 이용해 인간 존 스미스가 되었다가 나중에 피의 가족을 속이고 타임로드로 되돌아온다.[25] 마술탐정 토키사키 쿠루미의 사건부 한정[26] 앨리스터 아지무스가 죽고나서 그 이후의 시간대를 다룬 코믹스에서 라쳇이 그의 회중시계를 보며 은하계를 구하는 일에 대해 회의감을 갖기도 했다.[27] 딸과 별거 한 지 5년이 흘렀을 때 자신의 부주의로 시계가 망가진 적이 있었고 그 여파로 무기력해지고 마는데 어느날 딸이 돌아왔을 때 시계가 멀쩡히 고쳐졌다.[28] 리턴 - 글래디아 한정[29] 시마카제 이상한 나라의 화이트 래빗 한정[30] 동화 속 공주님 - 타향의 갈림길에서 한정[31] 2023 아동절 '순수 인카운터' - 마음 훔치는 마술사 한정[32] 2023 '푸른 바다 위 검은 돛' - 피의 소용돌이 한정[33] 속설과는 다르게 김두한과 김좌진은 만난적이 있다. 다만 만남이 매우 짧았고, 또 당시 김두한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6세) 기억의 혼란으로 말이 바뀌는것 때문에 둘은 만난적이 한번도 없단 설이 퍼지게 된 것.[34] 바이올렛 위치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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