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d86 0%, #007dbc 20%, #007dbc 80%, #004d86);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 이온 일리에스쿠 | 에밀 콘스탄티네스쿠 | 이온 일리에스쿠 | |
<rowcolor=#fff>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트라이안 버세스쿠 | 클라우스 요하니스 | 컬린 게오르게스쿠 |
※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현 루마니아 정부는
차우셰스쿠를 초대 대통령으로 가산하여 대수를 정한다.
차우셰스쿠를 초대 대통령으로 가산하여 대수를 정한다.
왈라키아 · 몰다비아 ·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루마니아 왕국 · 루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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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슈테판 3세 | 카롤 1세 | 미하이 에미네스쿠 | 미하이 2세 | 리하르트 부름브란트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이온 안토네스쿠 | 미르체아 엘리아데 |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 콘스탄틴 브랑쿠시 | 나디아 코마네치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 블라드 3세 | 조지 비칼리 | 헨리 코안더 | 게오르게 하지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이온 루카 카라지알레 | 니콜라에 이오르가 |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 제오르제 에네스쿠 | 그레고리안 비볼라루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미렐 러도이 |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 니콜라에 티툴레스쿠 | 페르디난드 1세 | 미하이 1세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데케발루스 | 트라이안 버세스쿠 | 게오르그 뮤레산 | 이온 I. C. 브라티아누 | 러즈반 루체스쿠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니콜라에 파울레스쿠 | 이울리우 마니우 | 이울리우 호수 | 에밀 시오랑 | 아브람 이안쿠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부레비스타 |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 페트레 투테아 | 코르넬리우 코포수 | 아우렐 블라이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이오시프 트리파 | 니키타 스터네스쿠 | 이온 크레안거 | 마델리나 마놀 |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트라이안 부이아 | 루치안 블라가 | 조지 에밀 퍼레이드 | 아나 아슬란 | 아드리안 무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플로린 피에르시크 | 미하일 코갈리차누 | 야노스 코뢰시 | 디미트리에 칸테미르 | 일리에 너스타세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게오르그 잠피르 | 기카 페트레스쿠 | 엘리사베타 리제아 | 불라 | 암자 펠라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마차시 1세 | 미르체아 1세 | 티투 마이오레스쿠 | 토마 카라지우 | 미하이 트라이스타리우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안드레아 마린 | 에밀 라코비차 | 빅터 바베슈 | 니콜라에 발체스쿠 | 호리아로만 파타피에비치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이온 일리에스쿠 | 마린 프레다 | 외젠 이오네스코 | 두미트루 스타닐로아 | 알렉산드루 토데아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투도르 게오르게 | 이온 티리아크 | 일리에 클레오파 | 아르세니 보카 | 바넬 니콜리타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두미트루 코르닐레스쿠 | 그리고레 모이실 | 클라우디우 니쿨레스 | 플로렌틴 페트레 | 마리우스 모가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니콜라에 스타인하트 | 로라 스토이카 | 커털린 흘단 | 안겔 살리그니 | 이반 피차이진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마리아 터나세 |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 | 옥타비안 팔러 | 무명용사 | 치프리안 포룸베스쿠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니쿠 코바시 | 두미트루 프루나리우 | 후녀디 야노시 | 콘스탄틴 노이카 | 바데아 카르탕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color=#fff><colbgcolor=#007DBC> 출생 | 1918년 1월 26일[2] | ||
루마니아 왕국 올트주 스코르니체슈티 | |||
사망 | 1989년 12월 25일 (향년 71세) | ||
루마니아 SR 듬보비차주 트르고비슈테 | |||
사인 | 심장마비[3] | ||
국적 |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
재임 |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 | ||
1965년 3월 22일 – 1989년 12월 22일 | |||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
1967년 12월 9일 – 1989년 12월 22일 | |||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 |||
1974년 3월 28일 – 1989년 12월 22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7DBC><colcolor=#fff> 배우자 | 엘레나 차우셰스쿠 (1916 – 1989) | |
자녀 | 장남 발렌틴 차우셰스쿠 (1948 – ) 장녀 조이아 차우셰스쿠 (1949 – 2006) 차남 니쿠 차우셰스쿠 (1951 – 1996) | ||
신장 | 165cm |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
학력 | 초등학교 중퇴[4] | ||
소속 정당 | |||
군사 경력 | |||
복무 | 루마니아군 | ||
1950년 – 1954년 | |||
최종 계급 | 중장 | ||
주요 전투 | 루마니아 혁명 | ||
범죄자 정보 | |||
죄목 | 제노사이드 | ||
형벌 | 사형(총살형) (집행일 1989년 12월 25일) |
[clearfix]
1. 개요
루마니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루마니아 공산당의 서기장 겸 독재자.차우셰스쿠 시절에 그에게 붙은 호칭은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Geniul din Carpați)'이자[6] '콘두커토르(Conducător, 지도자·지휘자)'.[7] 긴 칭호로는 '정열적이고 총명하며 매력적인 인격의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4 | 초대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선거 |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 465 (100.0%) | 당선 (1위) | [8] | |
1980 | 339 (100.0%) | |||||
1985 |
4. 자녀들
왼쪽부터 발렌틴, 엘레나, 니쿠, 조이아, 니콜라에.
루마니아인들은 엄격한 통제와 세뇌에도 루머를 통해 차우셰스쿠 가족들의 행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발렌틴과 부모와의 갈등, 조이아 사건, 니쿠의 음주운전, 중매결혼 실패, 나이트클럽 여급과의 추문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와 정보의 소통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니쿠의 악행이나 조이아가 관련된 수많은 사건들이 부풀려진 면도 없지 않다. 차우셰스쿠의 세 자녀는 체제의 수혜자들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긴축조치로 인해 여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미리 알아챘었고, 이 때문에 부모한데 긴축정책을 완화해서 불만을 달래라는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사실 1981년에 식량배급제가 재도입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거나, 1984년에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기도 했고, 1987년에 일부 지역에서 파업이 일어나는 등 심심치 않은 징조는 게속 있어 왔다. 하지만 니콜라에와 엘레나는 이러한 충고를 무시하고 자아도취적인 행보를 계속 보였다. 이러한 일을 겪어보고 나서도 1970년대 루마니아인들에게 열렬히 지지받았을 때만 추억하며 마이웨이적인 행보를 걸었던 것이었다. 이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부자세습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루마니아가 이 꼴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후일담이 나돌기도 했다.
4.1. 발렌틴 차우셰스쿠
1948년 2월 17일 ~
Valentin Ceaușescu
장남 발렌틴은 부모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우선 발렌틴 본인의 아내 이오르다나 보릴러가 유대계였으며[9] 하필이면 아버지 차우셰스쿠의 정적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장남이자 집안에서 맏이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냉대를 받아 특권층의 권리도 인정받지 못한 채 방 두 개짜리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차우셰스쿠 사후 헌법에 의해 설립된 구국전선들의 행동대원에게 자진해서 투항한 발렌틴은 당시 이오르다나와 이혼한 후 중앙위원회 의원이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차우셰스쿠의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재판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이때 발렌틴은 자신이 부모 차우셰스쿠 부부의 반대편에 섰다는 정당성과 어머니 엘레나를 증오했다는 사실로 맞서려고 했다. 차우셰스쿠 사후에 발렌틴이 근무하고 있던 '원자 핵 물리연구소'도 그를 지원했기 때문에 결국 최종적으로 재판은 면하게 되었다.
직업은 이론핵물리학자였고, 주요 연구 분야는 핵자내부의 소립자 상호작용 모델의 고안이었다. # #2 부쿠레슈티 대학을 거쳐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루마니아의 원자핵물리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2016년에 은퇴한 후 매달 450유로(약 66만 원)의 연금을 받으며 소박하게 지내고 있다. 2024년 4월 16일 한 다큐멘터리 시사회에서 목격되었을 당시 소박한 옷차림은 기본에 아직도 피처폰을 쓰는 모습으로 포착되었다. #
현 기준으로 차우셰스쿠 일가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차우셰스쿠의 세 자녀 중 유일하게 자손을 남겼다.[10] 이오르다나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다니엘(1981년 생)을 남겼으며, 이오르다나와 이혼 후에는 다른 여자와 재혼하여 딸 알렉산드라(1996년 생)를 보았다.
4.2. 조이아 차우셰스쿠
1949년 3월 1일 ~ 2006년 11월 20일
Zoia Ceaușescu
조이아의 경우도 오빠 발렌틴의 경우와 비슷하다. 수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을 때 조이아는 정권의 실체를 알고 역겨워 했다. 그래서 1974년 그녀는 가출을 했는데, 이 가출이 '조이아 사건'이라고 불릴 정도로 파장이 커지게 된다.
그녀가 가출하자 비밀경찰이 그녀를 찾기 위해 총동원됐다. 그녀를 찾기 위해 그녀와 친한 사람들을 모조리 가둬 그녀의 소재를 심문했다. 그렇게 잡혀간 사람들은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그녀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후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젊은 여성으로서의 조이아의 생활은 악몽 같았으며,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었지만, 결국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후 차우셰스쿠와 엘레나는 조이아에게 역심을 품게 만든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들은 조이아와 친하게 지낸 수학연구소 일원들이 조이아를 심리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을 조이아에게 보헤미안 기질을 주입시켰다는 이유로 연구소를 해산시켜버린 뒤 연구원들을 다른 연구소로 다 분산시켰다. '조이아 사건'의 충격이 루마니아 학계에 미친 영향은 가히 공포에 가까웠다.
결국 조이아 사건으로 약 200명이 넘는 능력 있는 수학자들이 루마니아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그러자 조이아는 인맥을 동원하여 수학연구소 일원들에게 출국비자를 얻어 주었는데, 이것이 차우셰스쿠 부부를 화나게 만들었다. 애시당초 부부는 조이아가 수학을 공부하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 결국 부쿠레슈티 대학의 심리학과도 폐쇄해 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이후 부모와는 거의 데면데면하게 지냈고, 부모가 혁명으로 죽은 후에는 조이아도 체포되었으나, 8개월 후 풀려났다.
그러나 조이아는 전의 직장에 복귀하지 못했고,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담배를 껴안고 살았으며, 결국 2006년 가을, 57세라는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11]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80년 미르체아 오프레안(Mircea Oprean)이라는 공학자(당시 부쿠레슈티 공과 대학 교수)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녀는 없었다.
차우셰스쿠 부부 사후에도 오빠처럼 공식적으로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증언들을 남겼다.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을 비밀 경찰을 통해 감시해 악영향을 남겼으며, 아버지가 게오르기우데지 전 서기장이 사망하고 난 뒤 공산당 서기장이 된 이후에 판단력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4.3. 니쿠 차우셰스쿠
1951년 9월 1일 ~ 1996년 9월 26일
Nicu Ceaușescu
장남인 형 발렌틴이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반항하여 후계자 자리에서 탈락한 관계로 차우셰스쿠의 후계자로 낙점되었으며, 실제로도 그나마 차우셰스쿠 부부와 사이가 괜찮았다. 별명은 '가족의 황태자'. 비운의 엘리트 학자라는 인상이 강했던 형, 누나와는 다르게 학창시절부터 공부보다는 노는 것을 더 좋아했고, 파티를 즐기고 도박으로 해외에서 거액을 날리거나 음주운전을 하는 등 말썽꾸러기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 보니 후계자같은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마냥 놀기만 하거나 문제만 일으키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서 루마니아 청년동맹 비서를 지내는 등 핵심 커리어를 거쳐 루마니아 제2의 도시인 시비우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젊어서 날라리로 놀다가 현장에서 실무를 맡으면서 좀 정신을 차린 모양인데, 시비우 시민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대단히 충격을 받고 아버지와 대립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책임비서로 재직하며 어려움이 있는 인민들에다가 배급품을 전달하는데 힘을 썼고,[12] 이때 일화가 나중에 재판 과정 중에 공개되어 어느 정도 평가가 반전된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부모보다는 훨씬 책임감이 있었고 나중에나마 약간 개념을 차린 듯 하다. 재밌는 것은 니쿠가 차우셰스쿠에게 시비우의 열악한 식량 사정에 우려를 표명하자 차우셰스쿠는 아들의 정치적 공적을 쌓아주기 위해서 시비우 식량 공급을 개선해주는 부성애를 보였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니쿠와 사이 좋았던 사람들 중 하나는 악명높은 전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장남 우다이 후세인이었다.
이렇듯 애초부터 루마니아 인민들에게 날라리라는 악평을 받았을 정도로 인간성에 문제가 많았던 인물이었고, 자신이 마음에 들던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을 때 그 여자가 어머니의 지시에 성폭행 당하는 등 부모와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던 면도 있었다. 하지만 반항이라도 한 형과 누나에 비하면 부모에게 직접적인 반항은 한 적은 없기에 각종 루머들이 나돌았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혁명 때 시민들에게 붙잡혀 자유 루마니아 방송에 강제 출연당하는 식으로 조리돌림을 당했고, 이후엔 재판에 넘겨져서 자신이 당서기로 재임하던 시비우 지역에서 시위 진압 명령을 내려 희생자 91명을 낸 것 때문에 학살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집단 학살 공모 혐의는 무죄를 선고받아서 사형 or 종신형은 면했다. 책임감 있는 모습도 많이 보여줬다는 증언들도 많았기 때문인지 징역 5년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자신이 학살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에 대해선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 무렵에는 부모의 오랜 만행들과 소련 멸망 이후 러시아도 본인들 코가 석 자가 된 상태라 지원이 끊긴 탓에 루마니아 경제 상황이 망할 대로 망한 상태라서 감옥에서도 식사 제공이나 난방도 제대로 안 되던 터라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또한 이때부터 간경변을 앓아서 교도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후 1996년 9월 26일, 간경화가 악화돼 수감된 감옥에서 오스트리아 빈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45세의 젊은 나이로 숨졌다. 남매들 중 가장 먼저 고인이 된 인물로, 누나도 이로부터 10년 뒤 숨졌고, 형은 아직 살아 있다. 술을 즐겨마신 것이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다. 사망 후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묻혔다.
사생활적인 면으로는 1983년에 폴리아나 크리스테스쿠와 결혼했다가 2년 후인 1985년에 자식 없이 이혼한 후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다.
5. 성격
인민의 고혈을 빨아서 자신의 사치를 위해 쓰고 잔혹한 유혈진압을 서슴치 않았던 차우셰스쿠의 면모는 얼핏 보기엔 계산적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무식한 사람이었다. 20세기 최악의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와도 닮은 구석이 있는 셈. 인간 히틀러가 독재자 히틀러로서의 모습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처럼 차우셰스쿠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어렸을 적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상식 수준이 거의 문맹이나 다름없어 간단한 전치사조차 헷갈릴 정도로 무식했다. 또한 대인관계에서의 사교능력도 부족했고, 말더듬이였으며,[13]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과거를 감추려 했다. 말더듬으로 인한 콤플렉스, 불투명한 미래, 가난한 삶으로 인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비참한 과거를 잊고 싶었다. 거기에 차우셰스쿠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것과 간단한 보고서 몇 페이지조차 쉽사리 읽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런 자신의 무식함을 가리기 위해 차우셰스쿠는 본인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큰 공헌을 한 천재적인 공산주의 이론가로 포장해 선동했으나, 실제로는 공산주의의 '공' 자도 제대로 모르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자신의 부족함은 스스로 통감하고 있었던지 나름대로 시간을 내 공산당 관련 서적을 탐독했으며 특히 공산당 기관지인 '불꽃'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챙겨 읽었으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말은 바로 이 작자를 보고 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덤으로 차우셰스쿠는 최고 권력자가 된 후에도 글을 쓸 때에 맞춤법은 물론 문법까지도 제대로 맞추지 못해 차우셰스쿠가 쓴 글들은 '정확한 루마니아어'로 교정해야 했다.
심지어 더 가관인 것은 그것도 아내인 엘레나 차우셰스쿠가 교정해 줘서 나아진 결과물이라는 것이다.[14] 1937년부터 2년 간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15]라는 변호사의 개인 비서로 일했던 적이 있던 미하이 포페스쿠(Mihai Popescu)[16]는 17살에 서로 가죽공장에 있는 구두 제조 노동자 조합의 노조원으로서 처음 만났을 적에 차우셰스쿠가 글도 읽을 줄 몰랐던 것은 기본이며, 심지어는 어린애들이 보는 만화책이라도 읽을 수가 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라는 비아냥까지 들었을 정도로 구제불능이었다고 한다.[17] 그 엘레나에게 교정을 받아야 했을 정도면 청년기의 차우셰스쿠는 진짜 상상 이상으로 무식했던 모양.
이렇게만 보면 차우셰스쿠가 정말 못 배워먹은 무지렁이인 주제에 운만 좋아서 정권을 잡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젊은 시절과 중년기에는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다. 사실 정치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매 순간순간이 혈투인 그 바닥에서 정말 머리가 청순한 호구 같았으면 의원은커녕 바로 목 잘리고 패가망신했지 일국의 권력 장악 따위는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소련군이 둡체크를 밀어붙이는걸 반대하면서 순수 체코슬로바키아에 방문하는 깡을 발휘하고 자기 입으로 스스로 소련군의 개입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면서 인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은 것은 물론, 서방 국가에게까지 깊은 인상을 남기며 서방에서 많은 투자자금을 끌어온 바 있으니 무식한 것과는 별개로 잔머리가 뒤떨어진 자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김두한과 같은 유형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차우셰스쿠의 학력 역시 사실 따지고보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었는데, 비록 본인은 초등단계에서 학교생활을 마무리 했지만, 형제들의 학업은 지원했고, 결과적으로 형제들 가운데서 고학력자는 여럿 있었기 때문에 본인의 학식이 무식하더라도 국정운영에 있어서 충분히 보충이 가능했었다.[18]
그러나 나중에 정권을 잡고 나서부터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다. 아무리 잔머리가 뛰어났다 한들 근본적으로 교육 수준이 너무 일천한 위인이라 한계가 심했는데, 심지어 그것을 본인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는 그것을 배움으로서 보완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19] 자아도취라는 도피책을 취해 버리면서 정무감각이 떨어졌고, 이 때문에 당시 루마니아의 가장 큰 위기인 외채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사실 긴축 정책만 해도 당시에는 미국 정치권과의 연줄이 있었으니 이를 잘 활용했으면 부담을 줄일 수 있었겠지만, 외채 협상 자리에서 원금을 다 갚겠다며 외국 채권자들한테 큰소리 떵떵 치는 바람에 탕감도 못 받고 호구처럼 고스란히 빚만 불린 셈이 되었다. 심지어 자기보다 훨씬 유식하고 지혜로운 측근인 자식들조차도 경기 침체와 긴축 정책으로 인민들이 불만이 높아졌다는 것을 경고했음에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지능이 퇴화해 버렸다.
일단 세 명의 자식 중 둘씩이나 물리학자/수학자가 되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것과, 과거 완전한 문맹이었던 시절의 자신을 가르쳐준 엘레나에게 배움을 받으면서 엘레나도 능가하는 수준으로 글을 어느 정도 원활하게(?)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릴 적에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멍청했던 것이지 정말 지능이 딸리거나 뇌에 문제가 있어서 바보짓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20]
차우셰스쿠는 엘레나밖에 몰랐으며 다른 여자를 굳이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의 측근들이 증언한 것으로 보아, 다른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1974년 젊은 시절의 동료였던 키부 스토이카가 실연을 당하고 자살하자 고작 그런 일로 목숨을 끊을 수 있냐며 경멸하기까지 했다.[21]
세간에 알려진 엽기적인 행위들과, 주변 사람들을 못살게 군 일들의 대부분은 그의 아내 엘레나가 저지른 일이었다.[22] 그는 그런 아내를 의지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아마 그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공처가일 것이다. 최소한 그녀는 대중 앞에서는 충실한 아내였지만, 사석에서는 차우셰스쿠를 남편으로 존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했다.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 시간이나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차우셰스쿠는 안절부절 못하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긴장하면 항상 그랬듯이 말 더듬는 습관이 튀어나왔고 땀까지 흘렸다."고 한다.
또한 나쁘거나 엽기적인 행각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친절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차우셰스쿠가 사냥을 갔을 때 머물렀던 별장의 관리인 여자는 차우셰스쿠의 뻔뻔스러운 충복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엘레나는 무척 싫어했다지만 차우셰스쿠는 좋아했다.
여자는 "차우셰스쿠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지요. 한 번은 비밀경찰견이 차우셰스쿠의 애견 코르부[23]를 물어버렸어요. 불경스러운 짓을 한 개를 비밀경찰들이 쏴 죽여 버리자 차우셰스쿠는 몹시 화를 냈습니다. 또 한 번은 거실 벽난로에서 새어나온 연기가 거실을 꽉 채운 일이 있었습니다. 엘레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동지에게 독약을 먹이려 한다고 꾸짖더군요. 그녀는 나를 비밀경찰에 넘기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나서더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엘레나를 말렸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1977년 3월 4일 리히터규모 7.2의 강진이 발생해 부쿠레슈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차우셰스쿠는 그 소식을 듣고는 국빈방문 중이던 나이지리아에서 곧바로 귀국하고는 "생존 한계로 간주되는 기간을 넘어서도 희생자들을 계속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 것을 보면,[24] 아내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공감 능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류의 증언은 여느 독재자들이 그렇듯 총애받던 하수인들의 주장에만 의존한 것이니 그다지 신뢰성은 보장받을 수 없다.
공식 월급은 1989년 기준으로 1,200달러 정도였는데, 이는 루마니아 평균 급여보다는 훨신 많기는 했지만[25] 미국인이나 일본인, 프랑스인, 서독인, 영국인 등 선진국의 급여수준보다 적었기 때문에 국가원수라는 직위치고는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차우셰스쿠가 해외에 비자금을 마련해서 사치를 부린 것이라는 얘기가 차우셰스쿠 후기때부터 나오던 추측이었지만 해외계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공적 자금을 빼돌려서 최고급 외제품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사치를 부렸던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이를 보면 자아도취에 취했던지라 굳이 해외비자금을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5.1. 음모론 신봉자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는 암을 진단받자, 자기가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가 루마니아 서기장 궁전에 방사선을 쏘아 그 방사선이 자기 방의 문고리를 뚫고 방안까지 들어와서 자신이 암에 걸리게 공작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망상을 들은 사람들은 어이없어했다. 차라리 KGB 요원이 루마니아 서기장 궁전까지 침투하여 방사선을 쏜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나마 그럴싸하겠는데 저 인간은 소련에서 쐈다고 했다. 즉, 소련에서 루마니아까지 방사선이 날아왔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어하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 그에 유일하게 맞장구쳐주는 사람이 바로 차우셰스쿠였다.사람들은 차우셰스쿠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와 오랫동안 친분이 있어서 일부러 말을 맞춰주는 것이거나, 더 큰 신임을 얻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야비한 술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차우셰스쿠는 저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은 것이었다.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아 글도 제대로 쓸 줄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었고 이게 암살에 대한 망상에 시달리는 이유가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해외여행 때에도 암살을 두려워하여 세균을 이용한 독살을 우려하여 악수하고 난 뒤 즉석에서 손을 닦았고, 자기가 먹을 음식을 가지고 다녔고, 식사 때마다 영양사와 감별사가 배석하였다. 차우셰스쿠가 먹을 음식은 소량을 먼저 연구소로 보내 검사를 거친 다음 24시간 동안 별도로 보관했으며, 선물받은 물건들을 다 뒤져서 확인하게 했다.
또한 그의 동료 스토이카가 자살한 이유가 소련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다니거나, 괴이한 음모론을 설파해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했다. 위에서 말했듯 스토이카는 실연으로 자살했는데 차우셰스쿠는 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이런 음모론을 믿은 것으로 보인다.
5.2. 일화
그래도 젊은 시절 투사의 면모가 있어서 마치 로버트 무가베와 아메드 세쿠 투레,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그랬듯이 "과거에는 순수한 꿈을 가진 혁명가였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아돌프 히틀러나 이디 아민, 폴 포트처럼 개인적으로 친절했던 사람도 아니었으며 태초부터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 차우셰스쿠와 같이 생활했던 동료들은 위의 사람들에게는 온갖 아첨과 아양을 떨었으나 아랫사람들은 무자비하게 괴롭혔으며 경멸하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진 인간이었고, 부하나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악한 인간이라고 주장했다.그의 인성을 보여주는 일례로 수감 시절의 에피소드를 들 수 있다. 그가 수감되었을 때 동료 재소자 중 오스만이라는 사람이 심각하게 아픈 상태였는데, 재소자들은 그를 위해 음식을 십시일반 모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그 음식을 차우셰스쿠가 중간에 먹어버렸다. 이를 두고 동료 재소자들이 차우셰스쿠를 몰아 세우며 비난하자 그는 성장기 청소년의 생존권(?)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26] 이에 재소자들은 크게 분노하여 그를 처참할 정도로 폭행했다. 이후 그는 말을 더듬는 버릇과 어눌한 말투, 잘 웃지 않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찍은 사진 중에서 차우셰스쿠가 활짝 웃는 사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공산권 국가들의 수장 중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그의 저질스러운 인성을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나치에 맞서 파르티잔 활동을 하는 등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티토는 집권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와 멧돼지 사냥을 나선 적이 있는데, 차우셰스쿠가 산탄총으로 먼저 멧돼지를 쐈지만 맞지 않았고, 티토는 백발백중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그가 달려와 자기가 잡았다며 멧돼지를 가로채려 들자, 티토는 "이봐, 당신의 총알은 땅에 박혀 있을걸?" 라고 디스하면서 멧돼지를 가져갔다. 이 일이 있은 뒤, 티토는 절대로 차우셰스쿠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단지 공식 석상에서만 가까운 척 했을 뿐이다.
한번은 한 외국 언론인이 차우셰스쿠에게 ‘엘레나가 귀하의 부인이라는 사실 이외에 정치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질문에 차우셰스쿠가 말하길.
“사회주의 정부의 조직제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집단 지도체제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심의기구의 의사 결정에 노동자들과 함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지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노동자를 포함해서 여러 사람들이 활동하는 기업이나 경제적, 사회적 조직에는 이런 심의기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여자들은 집단적인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모든 문제에 대해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하지요. 정부 또한 집단적인 지도체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회의 역할을 대신하는 당에서는 중앙위원회와 집행위원회가 국가 발전과 외교 정책에 관한 문제들을 결정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엘레나도 사회 발전에 관한 숙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한 마디 질문에, 저런 일장연설을 했다.[27] 이런저런 미사여구들을 다 빼고 요점만 짚자면, 엘레나는 우리나라의 의사결정을 하는 핵심 인물이니 외신 기자인 당신은 신경 끄라는 것.이오시프 스탈린을 너무도 존경한 나머지 누구라도 스탈린을 비판하면 화를 참지 못하여 말을 더듬거리거나 폭력까지 휘둘렀을 정도였으며, 차우셰스쿠의 누나 니쿨리나(Niculina)가 1966년에 밝힌 바에 따르면 15살이던 니콜라에가 갑자기 며칠간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자 구두 수선공이던 남편이 니콜라에의 뺨을 때리며 '네가 장사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라고 하자 차우셰스쿠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장사하는 것을 배우지 않을 거에요. 저는 루마니아의 스탈린이 될 거에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항공사고에 연루된 적이 있다. 1957년 11월 4일에 차우셰스쿠는 10월 혁명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하는 Il-14에 탔으나, 이 비행기가 모스크바 브누코보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직전에 악천후로 인한 조종사 과실로 공항 인근 숲에 추락했고, 이 과정에서 당시 외무부 장관 그리고레 프레오테아사(Grigore Preoteasa, 1915~1957)과 승무원 3명을 포함해 4명이 사망했으나 차우셰스쿠를 포함한 다른 승객들과 조종사들은 비행기가 화염에 휩싸이기 전에 간신히 탈출했다.[28]
상술했듯 공처가 기질이 있었지만, 이를 넘어 지도자로서도 사실상 아내에게 휘둘리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당시 공산당의 최고위 인사였던[29]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Iosif Maurer, 1902~2000)의 증언에 따르면 "엘레나가 차우셰스쿠를 지배하고 있으며, 니콜라에는 엘레나가 말하고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한다. # 또 니콜라에는 연설을 할 때 마치 엘레나의 얼굴에서 인정을 구하려는 듯 아내에게 눈을 돌리기도 했으며, 엘레나가 나중에 그를 비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먼저 엘레나와 상의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피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니콜라에가 보는 모든 문서들은 엘레나의 손을 거쳐야 했다. # 실제로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등 차우셰스쿠 시기 정책들 대다수는 엘레나가 입안한 것을 니콜라에가 승인한 것이다. 사실상 말년의 엘레나는 김정일, 말년의 니콜라에는 노년기의 김일성 포지션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30]
6. 평가
엘레나 차우셰스쿠 찬양가[31] |
그의 폭정에 걸맞게 그는 전세계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 죗값을 제대로 치른 독재자 중 하나로 꼽히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집권한 독재자들 중에서는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32] 새뮤얼 케니언 도[33], 모하마드 나지불라, 무아마르 카다피와 함께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은 독재자로 평가받으며, 특히 대중적으로는 카다피와 함께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독재자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루마니아 국내에서도 1989년 공산 정권 붕괴 후 국가를 파탄낸 역적으로 규정되어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처벌되고 있으며 과거 공산권의 맹주였던 러시아나 기타 과거 같은 공산 국가였던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체코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평가가 안 좋다.[34]
그나마 옛 소련이나 기타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은 독재 치하였다지만 상태는 좋았다. 소련의 경우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고 거기다 이들 국가군들은 한 집권자의 권력 독점을 제어하는 견제 장치도 그럭저럭 갖추고 있었다. 루마니아 같은 경우도 공산정권 수립 후 초기에 집권 지도자에 대한 견제 장치가 어느 정도 있었지만 1965년 차우셰스쿠가 집권하고 이후에 그가 지나친 실정과 정책 실패, 이외 다른 공산당 계파 세력들을 탄압, 제거하면서 그 견제 장치가 철저히 박살나버렸다.
집권기 당시 뛰어난 탈소련 외교 정책의 수완으로 한때 서방에서는 소련의 자국 간섭에 대항해 독자적 공산주의 노선을 취한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와 함께 그를 긍정적으로 보기도 했으나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 독재 정권의 핍박을 피해 미국 등 서방 세계 국가들로 망명한 루마니아인들을 통해 차우셰스쿠 정권의 인권 유린과 독재 정치, 천인공노할 만행들이 곳곳에서 제기되면서 그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서방 국가들은 경악하고 차우셰스쿠에게 등을 돌렸다. 거기다 1989년 차우셰스쿠 정권이 전복되고 냉전 체제가 종식되면서 이제는 서방에서도 그냥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은 독재자로 인식하고 있다.
사실 후반기의 폭정과 비참한 최후만 부각되어 잘 알려지지 않은 감이 있지만, 사실 집권 전반기 15년간의 차우셰스쿠는 경제개발정책이 어느정도 성과를 올리고 개방정책으로 서유럽과 미국에서 대규모로 투자를 유치하면서 인기는 정말 좋았었던 지도자였고, 이 때문에 우상화정책을 시행해도 인민들이 개인용 자동차를 소유하고 해외여행도 대중화될 정도로 삶의 질이 향상되었고, 소련에게 시원하게 일갈도 날려주니 기행을 벌여도 변변한 저항없이 받아들인 것이다.[35] 하지만 1980년대에 외채위기가 닥쳐오자 자국민 쥐어짜기식으로 경제정책을 운용한데다가 그러면서도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서 사치나 부려대구 국민들에게 우상화나 강요해대니 그동안 쌓아놓은 좋은 평가를 죄다 무너뜨리며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졌고, 긴축정책이 10년 가까운 장기간 지속되어 국민들에게 원한을 쌓아 놓은 결과로 몰락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영구집권 하지 않고 적당할 때 물러났으면 악질 독재자가 아니라 요시프 브로즈 티토처럼 흠결은 있되, 괜찮은 지도자로 기억되었을 테이니, 어떻게 보면 박수칠 때 떠나라의 반면교사 격인 인물이다. 오죽하면 루마니아 내에서는 '차우셰스쿠가 10년 일찍 죽거나 물러났으면 사람들이 차우셰스쿠를 소련에 맞서면서 경제적으로 유복하게 만든 위인으로 대접하면서 동상을 알아서 잔뜩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농담반 진담반 격의 말도 나올 지경이다.[36][37]
6.1. 루마니아 국내의 재평가와 엇갈리는 호불호
그렇지만 차우셰스쿠 이후로 민주화 되었지만 차우셰스쿠의 뒤를 이은 이온 일리에스쿠(Ion Iliescu)의 사회민주당 정권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남아있었다. 게오르기우데지와 차우셰스쿠가 없는 공산당 정부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이온 일리에스쿠는 긴축정책이 차우셰스쿠 몰락의 계기라는 점을 잘 느꼈기 때문에, 점진적 개혁을 취하려고 했지만, 환율자유화 조치를 취하면서 루마니아의 실질임금이 크게 떨어지고 물가가 2배 이상 올랐으며, 이 때문에 루마니아가 외채가 없던 나라였음에도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다시 받는 수모를 겪었다. 또한 이 때문에 많은 국영기업들이 민영화되면서 평생직장과 많은 복지혜택들은 사라졌으며 실업률은 고공행진하여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어야했다. 또한 민영화 작업을 이용해 옛 관료나 마피아, 암달라꾼을 비롯한 소수의 계층들이 대기업을 잡아먹어 벼락부자가 되는 등 부패가 기승을 부렸는데 이래서야 차우셰스쿠가 축출되어도 IMF에게 휘둘리는 꼴이 지속된 것이다.1996년 총선에서 중도우파인 에밀 콘스탄티네스쿠로 정권이 교체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제사정은 나쁘기는 매한가지였으며 민영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보조금이 제거되면서 서민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렇듯 1990년대 루마니아의 경제상황은 차우셰스쿠가 축출되었음에도 암울하기 짝이 없었고,[38] 긴축정책이 무려 20년 가까이 시행되면서 출산율이 급감하고 청년층들이 해외로 이민가면서 인구가 급속히 감소할 정도였다. 1980년대 이래로 나빠져만 갔던 루마니아의 경제가 다시금 회복의 길로 접어든 것은 2000년이 되어서였고, 사람들이 체감할 정도로 경제가 나아진 것은 2000년대 중반의 일이다.
때문에 90년대 중반부터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차우셰스쿠 시절 때가 좋았지 하면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향수가 크게 늘어났다. 현지인에 따르면 기성세대들 중에는 잘 살던 과거(사회주의 시절)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곤 한다고 한다. 단순히 일시적인 향수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게 실제로 차우셰스쿠 때 주택을 많이 건설했고 일리에스쿠 시절에 주택 민영화 조치를 단행하면서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주택소유율이 가장 높은 국가가 되었다. 또한 상기한 대로 집권 초중기에는 (비록 외채빨이 있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 제법 넉넉하게 살았던 시절(1965~1977, 길게는 1981년까지) 인민들이 꽤나 풍족하게 먹고 살았던 호황기가 있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차우셰스쿠가 행한 기행과 사치는 무시할 수 없는데다가, 임기 후반기의 무리한 경제정책으로 국민들의 삶이 중상위권에서 동유럽에서도 하위권으로 떨어진건 엄연한 사실이었고, 더군다나 차우셰스쿠 시절 정책의 후유증으로 에이즈 문제 같은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에 루마니아 내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 또한 여전히 많으며 특히 젊은층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루마니아 내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해 호불호가 엇갈리는 그야말로 팽팽한 평가를 보이고 있다. 2013년 여론조사에 의하면 차우셰스쿠 이전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게오르기우데지에 대해서는 42.3%의 긍정과 39.1%의 부정적 답변으로 나뉘었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 대한 질문에는 47%가 '루마니아 역사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부정적이었다.'는 46.9%였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의 부인인 엘레나 차우셰스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답변이 80.2%로 월등히 높았다. 공산정권에 대하여 18~34세 젊은 층은 51.2%가 부정적인 답변을 한 반면에 65세 이후의 연령층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51.7%였다. 공산주의 영향이 컸던 몰도바, 부코비나 지역은 51.7%가 공산주의에 긍정을 나타냈다. 반면, 바나트 지역은 루마니아인 뿐 아니라 헝가리인,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독일인 등 비교적 다양한 민족이 거주한 지역으로서 단 36.2%만이 긍정적이었다는 답변을 했다. 출처
어느 정도 경제가 나아진 2022년 기준으로도 부패인식지수는 아르메니아와 동점인 46, 64위로서 '상당히 부패'로 분류되며 역시 부패가 심각한 중국(45, 66위)과 비슷한 수준이다. 루마니아는 경제위기가 주기적으로 찾아오고 있기 때문에 몇년마다 한번씩 긴축을 실시하고 있으며, 1991년과 2009년에 다시 IMF 구제금융 신세를 졌고, 2012년에는 커다란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더구나 민주화 이후 차우셰스쿠 시절에는 없었던 실업과 빈부격차가 생겨나서 루마니아 국민들은 더 고통을 겪는 중이다. 말하자면 예전에는 공평히 고통을 분담했는데, 이제는 본인의 재산에 따라 겪는 고통이 달라졌고, 대부분의 서민은 상대적 박탈감을 더 느끼는 중이다. 아마도 경제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이상, 차우셰스쿠에 대한 재평가는 점점 힘을 얻어갈 가능성도 있다.
반공 성향이 강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여전히 강하며, 특히 차우셰스쿠를 그리워한다는 러시아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루마니아내에서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치와 그를 찬양하려는 움직임들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서 2015년, 루마니아 정부는 차우셰스쿠 부부에 대한 찬양, 고무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차우셰스쿠 케이크, 차우셰스쿠 보드카, 차우셰스쿠 초콜릿, 화장품과 음료수, 스포츠 용품에 이르기까지 차우셰스쿠 브랜드가 등장하고 있다. 독일 영화감독이 제작한 차우셰스쿠의 최후를 다룬 영화가 "차우셰스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라는 이유로 강한 반발에 직면해 일반 상영에 실패하기도 했다.
2014년 '오늘날 차우셰스쿠가 살아있다면 루마니아인들은 차우셰스쿠에게 투표했을까?'라는 주제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표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2018년 12월 27일 발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64%의 사람들이 차우셰스쿠에 대해 긍정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람의 폭정으로 인해 미하이 1세 등을 비롯한 루마니아 왕가가 재평가받기도 했다. 실제로도 귀국하니 10만 명 가량의 사람이 반겨주기도 했고, 아프가니스탄의 바라크자이 왕조와 더불어서 현 상황에서 왕정복고 가능성이 그나마 높은 케이스이다. 다만 미하이 1세는 폐위 당시에 미성년자여서 추축국 가담의 책임이 없기 때문에, 그를 위시한 구 왕가가 별다른 비판의 대상이 되지않고 동정론을 받는 게 크게 작용한다. 어쨌든 폭정을 휘두른 독재자라는 원죄가 있는 차우셰스쿠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바라크자이 왕정복고조차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왕정복고 가능성이 높은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차우셰스쿠에 대한 긍정론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로는 조금 줄어들었다. 반러감정이 증가함과 함께[39]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추축국으로 독일에 협력한 이온 안토네스쿠가 민주화 이후 반공의식으로 재평가를 받은 것처럼[40] 루마니아 내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평가는 예전부터 의견이 갈리는 주제였으며, 루마니아의 경제상황이나 국제정세에 따라 차우셰스쿠에 대한 루마니아 내의 여론은 계속해서 변동해 왔다.
7. 관련 서적
- 루마니아와 차우셰스쿠 - 이원복 구성, 전일봉 글/그림. 어문각. 1990.
-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 에드워드 베르[41] 저, 유경찬 옮김, 연암서가, 1991(2010년 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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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 |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 루마니아 혁명 | ||
관련 음악 | 친근하신 챠우쉐스꾸 동지의 노래 | ||
관련 인물 |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엘리자베스 2세 · 김일성 | }}}}}}}}} |
[1] 국제음성기호 표기는 [nikoˈla.e tʃe̯a.uˈʃesku\]. 국립국어원이 정한 루마니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체아우셰스쿠'로 표기되지만 관용적으로 '차우셰스쿠'가 많이 쓰였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차우셰스쿠'가 규정 용례이다.[2] 2월 5일이라는 얘기도 있다.[3] 총살형이 집행되었지만 사후 부검 결과 총살형 집행 직전에 공포감으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한 걸로 나왔다. 다만 심장마비는 처형 직전이 아닌 고문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며 총살형은 사후 연출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한국경제[4] 자신의 아내와 똑같은 학력이다. 다만 이는 당시 니콜라에의 집안이 굉장히 가난했고 학교 상황도 열악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절대 공부를 너무 못해서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5] 아돌프 히틀러에 버금가는 최악의 독재자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진심으로 자화자찬했겠지만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이 되었다.[6] 영어로 번역하면 'The Genius of the Carpathians'. 이 칭호는 그가 벤치마킹한 북한에서 김일성을 백두산과 연관짓는 것(이른바 백두혈통)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7] 영어 Conductor와 어원이 같다. 콘두커토르란 칭호는 사실 이온 안토네스쿠 때부터 썼던 (군사적) 독재관의 이름으로 두체, 퓌러, 수령같은 칭호과 비슷한 개념이다.[8] 간접선거[9]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 집권 이전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학살하던 전적이 있었다. 반유대주의는 2차 세계 대전으로 극우파들이 몰락하면서 약해졌지만 루마니아 사회에서는 반유대주의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부친 차우셰스쿠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10] 여동생 조이아는 결혼은 했지만 자녀는 가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남동생 니쿠는 결혼은 했지만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채 2년만에 이혼했고, 이혼 이후로는 재혼도 하지 않고 평생동안 남은 여생을 독신으로 살았다.[11] 남동생 니쿠가 죽고 꼭 10년만에 본인도 고인이 되었다.[12] 예를 들어 트럭에 신선하고 질 좋은 돼지고기들이 수출을 위해 잔뜩 실려 있었고, 이 돼지고기들은 아버지 차우셰스쿠의 부채갚기 정책에 따라 항구를 통해 소련, 그리스 등 타 국가들로 수출될 예정이었지만, 니쿠는 트럭들을 멈춰세우면서 이 돼지고기들을 자국내 인민들의 배급용으로 돌리는 조치를 취하며 아버지에게 대항했다.[13] 1989년 새해전야 연설 실황 녹화만 봐도 드러난다. 연설 능력이 부족했기에 그의 의회 연설 녹화를 보면 턱을 괴거나 하품하는 것은 기본에 아예 대놓고 조는 사람들이 대놓고 잡힐 정도. 참고로 조는 사람들은 죄다 공산당 정치인들이다. 영상의 0:38~0:49 부분[14] 웃긴 건 이 여자는 니콜라에보다도 훨씬 무식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14과목 중 무려 9과목을 낙제하고, 다른 과목들도 겨우 낙제를 면하는 수준이었던 주제에 유급이 싫다고 초등학교를 자퇴했던 빡통이었다.(그나마 이쪽도 가난해서 학교를 못 다녔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게다가 서류도 제대로 읽고 쓰지도 못하던 반문맹에 물의 화학기호도 모르던 인간이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공부해 고쳐나가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전문 화학자가 대필한 논문들로 '저명한 화학자' 행세를 했다니까 이쯤이면 배꼽을 잡는다.[15] Ion Gheorghe Maurer, 1902~2000. 1961년부터 1967년까지 국무원 부주석을 역임했다.[16] 공교롭게도 차우셰스쿠와 동갑내기였다.[17] 한편으로 포페스쿠는 이 발언 바로 다음에 '사람들은 차우셰스쿠 앞에서는 웃음까지도 삼갔다'는 말도 덧붙여서 이런 멍청이조차 마음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독재의 문제점도 경고했다.[18] 형인 마린 차우셰스쿠는 경제과학대학을 졸업했고, 동생들인 플로레아 차우셰스쿠는 언론사 주필, 일리 차우셰스쿠는 부쿠레슈티 육군 사관학교 출신에, 여동생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교사를 지냈고,(엘레나 차우셰스쿠와는 동명이인이다.) 막내동생 이온 차우셰스쿠는 농업경제학자였다.[19] 그나마 아내와는 달리 닥치는 대로 공산주의 서적들을 독파하며 무식을 해결하려 시도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조차 엘레나에게 조종당하던 터라 별 의미는 없게 되었다.(...)[20] 비슷하게 이디 아민도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을 줄은 아는데 쓸 줄은 모르는 반문맹이었으나, 어설프게나마 5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 정도로 머리 하나만큼은 좋았다.[21] 이것은 그의 생애와 연관지어 보았을 때 단순히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싸이코패스 기질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뮬론 이를 눈감아준 것은 차우셰스쿠 본인이니 그가 결백하다고 옹호해 줄 수 있는 수단은 되지 못한다.[23] 차우셰스쿠는 이 개를 얼마나 아꼈는지 축출 직전에는 개를 대령으로 승진시켰을 정도였다. 물론 차우셰스쿠의 축출은 개를 상관으로 섬기게 될(...) 군인들의 반발이 아닌 시민들의 민주화 혁명에 기인한다.[24] 정작 이후 차우셰스쿠가 토목사업을 명목으로 부쿠레슈티의 건물들을 히로시마에 비견될 정도로 하도 불도저로 밀어낸 나머지 해외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지진 매몰자가 생존해 있던 상황에서도 구조 작업으로 시간이 낭비된다며 지진으로 인한 잔해를 불도저로 싹 밀어버리도록 했다'는 헛소문으로 와전되었다.[25] 당시 루마니아의 1인당 GDP는 1,818달러였다. 즉, 차우셰스쿠의 연봉은 일반적인 루마니아인의 8년치 연봉에 달하는 거액이었던 셈.[26] 만약 이때 배가 고파 그랬다고 하면서 사과라도 했으면 동료 재소자들은 이해하고 용서할 여지가 있었지만 차우셰스쿠는 그마저도 걷어찬 것이다.[27] 한반도에도 이런 한 마디 말과 질문에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정일이다.[28] 원래 이 비행기에는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도 탈 예정이었으나, 며칠 전에 강한 독감에 걸려 타지 못했다고 한다.[29] 외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30] 그나마 니콜라에를 위해 변명하자면 엘레나가 정계에 입문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라 적어도 이때까지는 아내에게 조종당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때는 잘 쳐봐야 남편의 비공식적 정책 고문에 그쳤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마침 시간이 흐르며 엘레나의 직책이 높아질 때마다 차우셰스쿠 정권의 막장성이 증가한 것도 똑같고.(...)[31] 차우셰스쿠 부부의 비극적인 최후를 생각하며 들으면 묘한 느낌이 든다.[32] 북한의 장성택마냥 조카에게 통수를 맞고 처형당했으나 집권기의 악행과 처형 과정 등을 고려해보았을 때 이들 중에서는 가장 호상인 편이다.[33] 이쪽은 차우셰스쿠, 카다피조차 호상으로 보일 정도로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34] 특히 무식이 도를 지나쳐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공산주의 사상도 거의 아는 게 없었다는 것이 그의 펑가를 바닥으로 찍어버렸다. 심지어 집권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도 아니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국가 통치에서도 사실상 아내의 지시에 조종당하는 수준이었던 것까지 폭로되었으니 알고 보면 악랄한 독재자이기는커녕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희대의 찌질이였다.(...)[35] 차우셰스쿠가 본격적으로 우상화에 착수한 것이 1971년도인데, 인민들의 저항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77년도에 파업이 일어나면서 벌어진 일로, 그나마도 강도가 세지 않았다. 게다가 우상화는 여느 공산주의 국가라면 다 하는 일이었다.[36] 이런 면에 있어서는 무아마르 카다피, 셰이크 하시나와도 비슷한 셈이다.[37] 특히 시간이 지나며 엘레나의 권력이 커져가며 차우셰스쿠까지 조종, 차우셰스쿠 정권의 막장화에까지 일조한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38] 1991년 루마니아의 경제성장률이 -12.9%, 1992년 경제성장률이 -8%였던 것과 정반대로 차우셰스쿠 축출 이후 1993년까지 루마니아의 물가상승률은 200%대에 1994년, 1996년 물가상승률은 100%대였다. 그리고 루마니아의 경제성장률은 1995년(6.2%)를 제외하면 5%를 넘기지 못하는 높지 않은 수준이었다.[39] 여기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합병하고 몰도바와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병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것이 한 몫 했다. 루마니아 국민들 중 몰도바와의 통일을 지지하는 이들과 반러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자극했기 때문이다.[40] 차우셰스쿠의 재평가 여론처럼 이온 안토네스쿠에 대한 평가는 의견이 크게 갈리는 주제이다.[41] Edward Behr, 1926~2007, 프랑스의 유대계 저널리스트. 마지막 황제의 원작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