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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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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27대 국왕
영류왕 | 榮留王
파일:강서소묘.jpg
영류왕릉으로 추정되는 강서소묘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c1d1f>580년대 초반[1]
고구려 평양성
사망
(음력)
642년 10월
고구려 장안성
능묘 강서소묘 (추정)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제27대 국왕
618년 9월 ~ 642년 10월 (24년 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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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호 건무태왕(建武太王)[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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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의 영웅2.2. 대당 정책
2.2.1. 비판2.2.2. 옹호
2.3. 비극적인 최후
3. 여담4. 《삼국사기》 기록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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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27대 태왕. 즉위 이전에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나라의 수군 장수 내호아의 침략을 평양성에서 격퇴한 전쟁 영웅이었다.[9] 그러나 재위 중 당나라와 친교 노선을 걸었으며 아마 이에 반대했다고 추정되는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10]

2. 생애

2.1.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의 영웅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걸출한 명장이었다. 수양제가 대대적으로 일으킨 2차 대침공에서는 직접 일선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적에 맞서 싸웠다. 중국의 사서인 《수서》(隋書)에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 장수로는 그 이름을 올린 단 둘뿐인 장수일 정도로 맹활약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돌격해 내호아가 이끄는 별동대인 수나라 수군[11]정예군이었다.] 40,000명을 패퇴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평양성으로 쳐들어온 수나라의 수군 중 살아돌아간 이들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으며, 이마저도 부관이었던 주법상이 대오를 갖춘 뒤 처절히 막아낸 결과였다. 총 해군 10만 명 중에서 정예로 훈련받았던 4만 명 거의 전부가 한꺼번에 몰살을 당했으니 단단히 혼쭐이 난 셈이다.

기록에 따르면 영양왕과 함께 평양성 외곽에서 패배를 가장해 내호아를 평양 부근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군사를 매복시킨 후 패배하는 척하며 수나라 군대를 안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내호아의 군사들은 평양성 내에서 약탈에 몰두하다가 대열이 흐트러졌고, 고건무가 지휘하는 500명은 이때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치고 나가, 당황하는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켰다고 전한다.

당시 수나라의 대전략은 내호아의 수군이 실어온 물자로 평양성으로 전진하고 있는 별동대 30만명을 먹이고, 그 병력들로 평양성을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수군을 괴멸시킨 것은 수나라의 전략을 뿌리부터 박살낸 엄청난 업적이었다.

당시 행적을 정리해보면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수 전쟁이 낳은 최고의 전쟁 영웅이자 명장 중 한 명이라 봐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살수대첩에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지 한국사 대첩 중에서 그 전공이 충분히 손에 꼽는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12]

그러나 이때 통일된 중원 왕조를 상대하면서 영류왕은 전쟁에 대한 염증을 느낀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 국가인 수나라를 상대로 대승한 고구려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였지만 문제는 전쟁이 고구려 영토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고구려 영토 깊숙한 곳에서 전쟁을 벌인 만큼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기더라도 피해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2.2. 대당 정책

결국 고건무는 태왕이 되자 태도를 바꿔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와의 화친 정책을 폈다.

당고조 때까지만해도 어느 정도 양측이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외교가 진행되었으나 당태종이 즉위하면서 당나라가 무리한 요구를 강압하기 시작했다. 전승기념비에 해당하는 경관을 허물게 하는가 하면 사신을 빙자하여 간첩 행위를 자행했다.[13][14]

이렇게 달라진 당나라의 태도에 영류왕 역시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천리장성의 수축을 진행하며 전쟁 준비를 하기까지에 이른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기 전에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시해되었다.

2.2.1. 비판

영류왕의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고수전쟁에서 국력을 많이 소모했을 고구려로서는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안정책을 통해 다시 국력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류왕은 굴욕은 있는대로 겪으면서 내치를 안정시키거나 후방을 안정시키고 대비를 하는 등의 실리는 챙기지 못하고, 급기야 반대파들의 불만만 축적시켜 영류왕 본인이 비참하게 시해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는 고구려의 국가적 위상, 즉 주변 말갈 - 거란 - 실위 등 북방 이민족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한반도 역시 언제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남진을 실행할 수 있다는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었다. 강대국이라는 입장에서 다른 강대국인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볼 때 지나친 소극주의로 일관했고, 결과적으로 주변 북방 이민족들의 이탈, 분열, 갈등이 이어진 끝에 고구려는 결국 668년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한반도 남부의 백제 - 신라 등에 대해서는 강력한 당나라라는 적을 앞두고 사실상 무의미한 소모전 형태를 치르는 상황이었던 것을 백제와 를 끌어들이고 남방 전선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그것을 되찾아나간 것은 연개소문이었다. 또한 영류왕의 친당 정책이 당나라의 침공 의지를 꺾거나 막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당태종은 우호적으로 나온 아버지와는 달리 전쟁을 억제할 장애물들을 하나 둘씩 치워 나갔고, 주변 국가들도 정리하면서 고구려로 원정갈 준비를 꾸준하게 하고 있었다. 애초에 당태종은 고구려를 정복해서 수나라 때의 뼈아픈 상처를 씻으려고 한 것이 사실이다. 영류왕의 친당 정책은 결과적으로 안보 위협을 막은 것이 아니라 침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17]

외교의 급에 있어서도 631년에 있었던 경관 철거 사건 당시 사절로 온 장손사는 광주 도독부의 사마였다. 종5품하의 벼슬로 지방관 휘하의 보좌쯤 되는 인물로 오늘날로 치면 시•군•구청 국, 과장(국장은 일반직 4급 서기관, 과장은 일반직 5급 사무관) 쯤 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더 문제는 이 경관 철거가 수나라와의 대전쟁이 끝난 지 채 20년도 안 된 시점이라 당시 참전용사들의 불만을 강하게 야기했다는 것이다. 영류왕 본인이야 나도 당시 활약한 참전용사인데 백성들 떼죽음 당하는 전쟁 안하는게 중요하지 이게 무슨 대수냐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강경파 입장에선 그야말로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을 것이다. 640년에 있었던 태자 입조 사건 역시 반발을 불렀다.[18] 한국사에서 태자가 입조하는 경우는 대개 상대국에 제압당한 상태거나 종속되는 경우에 해당한다.[19] 심지어 답사로 온 당나라측 사절인 진대덕은 직방 낭중이었다. 고구려는 태자를 보냈는데 종5품, 군대로 치면 장군도 아니고 대대 작전과장 정도되는 말단 관리가 왔고, 태왕이나 대대로가 와서 하루 3번씩 의전해준 것이다. 참고로 고구려 시절엔 다른 시대와 달리 중국이 보낸 사신이 임금과 대등한 의전을 받는다거나 국서에 절을 하는 등의 의전은 없던 시대였다. 여기에 더해 진대덕은 고구려 내부를 마음껏 정탐했고, 고구려는 이를 막지 못했다.

정리하자면 영류왕은 기나긴 전쟁 뒤에 국력 회복, 내치 안정, 적성국 제어 등의 시대적인 과제를 맡았으나 외교적 굴욕은 굴욕대로 당하고, 정작 당나라의 야욕을 무마하지는 못했으며 빈약한 정치력으로 무리수를 두다가 본인 목숨도 잃고 고당전쟁의 빌미만 제공해주는, 더 길게 보자면 고구려 멸망까지 가는 시발점이 된다고 볼 수도 있는 비운의 군주가 되고 말았다.

2.2.2. 옹호

영류왕의 초기 노선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고수전쟁이 대규모로 4차에 걸쳐 무려 16년 동안 지속된 상황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욱이 당나라는 내부적으로 반란의 연속과 북방의 강자인 돌궐의 침입 등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 기조를 띤 건 결국 상대적으로 여수전쟁에 대한 상호 적대심이 강해진 상황에서 대등한 입장에서의 외교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게다가 당고조 역시 국내 사정과[20] 국외적 입장에서 새로운 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던 점이 결국 각자의 이익에 서로 부합하여 충분히 상호 온건 노선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이다. 영류왕 초기의 온건 노선은 고구려 스스로가 자국의 생존과 국력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물론 당고조의 아들인 당태종현무문의 변으로 형제들을 살육하고 626년 집권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다. 당태종 치세기의 당나라는 내부적으로 안정되었으며, 본격적으로 국력을 키우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고구려 역시 웬만한 전후 복구를 하고, 국력을 어느 정도 회복 중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나라에게 지도를 보낸 것은 당나라의 외교 노선이 변화한 것에 대해 평화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결국 영토를 분명히 하여 당나라로 하여금 특정선 이상은 쳐들어오지 말라는 입장을 당태종에게 알린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21] 실제 631년 당나라의 다소 무리한 요구로 인한 경관 철거 이후 영류왕 역시 당태종을 경계했기 때문에 그해 바로 상당한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천리장성을 수축하는 형태로 전선 정비에 들어간 것이며, 당태종과 전쟁을 치르던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방치한 것 역시 고구려로서는 대전 전력이 있는 돌궐을 쉽게 신뢰하여 함께 연합 전선을 구축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22]

내부적으로 고구려는 평원왕의 중흥 이후로 영양왕과 영류왕에 이르기까지 실추되었던 태왕의 왕권을 어느 정도 본 궤도에 올려놓았지만 왕권의 강화와 귀족 세력들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중요한 과업이었다. 고구려는 후기에 들어서면서 귀족 연립 정권의 성격을 띠었는데, 중흥 군주 평원왕 시절과 영양왕 시절에는 그나마 귀족들의 지나친 힘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모습을 보였으나, 영류왕 시대에는 연개소문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었고[23] 영류왕은 이를 제어하기 위해 외부적 위협 요인은 최대한 줄이려고 한 것으로 보이나 종국엔 연개소문을 치려다가 선수를 당해 그에게 시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그의 집권기 고구려는 전후 복구와 국력 회복에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천리장성 축조의 경우, 이러한 장성은 당군의 발목을 묶어 지연전을 강요하면서 그 틈에 아군에게 적의 침공 소식과 위치를 알리는 "경보"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24] 중국은 물론 페르시아 제국이나 로마 제국도 건설했었다. 만리장성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장성이 "경계"로서의 역할은 충실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25]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 원인을 영류왕에게서 찾는 것은 너무나도 과한 평가이다. 영류왕은 그가 하려던 계획을 완수하지 못하고 쿠데타로 죽었으며 사후에 연개소문에 의해 국가의 방향이 결정되고 운영되었으므로 그 인과관계는 단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연개소문의 아들들에 의한 내분으로 멸망했으므로 영류왕이 생존해 있었다면 멸망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가정도 해볼 수 있을 것이며, 연개소문의 치명적인 후계 실책이 고구려 멸망의 스노우볼로 흘러간 만큼 고구려 멸망에는 연개소문이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론적이지만 연개소문의 남방정책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하여 고구려의 고립을 초래해 이후 벌어진 내분과 겹쳐 고구려의 멸망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만큼, 연개소문의 남방 정책은 무조건 옳고 영류왕의 정책은 다 틀렸다는 것은 과하다. 실제로 백제와 신라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을 핍박한 결과 나당동맹 같은 극단적인 결과가 나와버렸고, 그렇게 손을 잡았던 백제가 멸망하면서 양면전쟁을 강요받게 된 만큼 성과도 별로 좋지 못했다.

그리고 당고조 때까지만해도 서로의 필요에 의해 원만했으며, 이로서 고구려도 전후 복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당태종의 즉위 후 달라진 당의 무리한 요구들 때문이다. 국가정책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싹 바뀔 수는 없고 서로 화해무드인 상황에서 은근히 그 분위기에 무리한 요구들을 끼워넣어 추태를 부린 당태종을 비판할 부분이지 영류왕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각종 무리한 요구가 지속되자 영류왕도 서서히 달라진 변화에 맞춰 천리장성 축조를 하며 전쟁을 준비했으며, 달라진 변화의 결과를 보기 전에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죽었던 것이다.

또한 비록 결과론적인 시각이기는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고구려 멸망 직후인 669년 토번의 발호로 당나라가 동이 전선에 전력을 투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발발했고, 이러한 이중전선 문제는 나당전쟁을 수행하던 신라에게 이득을 안겨다 주었다. 만약 영류왕의 외교정책대로 조금 숙이더라도 전쟁을 지연하며 국력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는 방책을 택했더라면 고구려로서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회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 입장에서 아무리 고구려 원정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장안과 가까운 토번 전선만큼 중요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추가적인 영류왕의 옹호론적인 재평가 문제는 이곳도 참고. 영류왕은 사대주의자인가?

2.3. 비극적인 최후

왕위에 오른 지 24년이 흐른 642년 10월,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이를 알게 된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역으로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시신을 다섯 토막을 내어 구덩이에 넣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정변 및 집권시의 행적은 중국 측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특히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대놓고 그를 까기 위해 부정적인 면모만 골라 쓴 만큼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당태종이 고당전쟁을 일으킬 때의 핑곗거리 중 하나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했기 때문"이다.

3. 여담

속일본기》에서는 지난날 고려 왕 고무(高武)가 일본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고무가 영류왕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는데, 해당 기록에 의하면 '조정의 위엄을 빌리기 위해 형제 관계를 맺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라고 일본 측이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는 일본 측의 일방적인 주장인데다가 평범한 외교행위도 볼모라거나 조공이라고 왜곡하는 등 일본 역사서 특유의 과장이 더해졌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하지만, 영류왕 때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도 따로 존재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25년 승려 혜윤을, 630년 대사 연자발(宴子拔)과 소사 약덕(若德) 등을 파견한 기록이 있다. 이 사신들이 일본에 파견된 사실만 기록돼 있을 뿐 파견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속일본기》의 기록과 종합하면 영류왕이 당나라의 침략을 예상하고 대비하기 위해 외교를 다각화한 시도라고 보기도 한다. 다만 영류왕이 아니라 '고씨지세'(高氏之世) 부분에 주목해 보장왕 말년에 고구려가 멸망의 위기에 놓였던 제3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일본에 저자세로 지원군을 요청한 기록이 남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들로 태자 고환권(高桓權)이 있었는데, 영류왕 23년(640년) 2월의 기록 외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 외에 《신찬성씨록》에서 고복덕이 영류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상반된 기록도 가지고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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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영류왕 본기>
一年秋九月 영류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당에 조공하다
二年夏四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二年夏五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秋七月 당에 조공하다
五年 고구려 내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을 모아 돌려보내다
六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七年春二月 당에서 도교가 전래되다
七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八年 당에 가서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九年 신라와 백제가 당에 가서 고구려의 침략 행위를 호소하다
十一年秋九月 당에 봉역도를 바치다
十二年秋八月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쳐부수다
十二年秋九月 당에 조공하다
十四年 당이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어버리다
十四年春二月 천리장성이 완성되다
二十一年冬十月 신라 칠중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26]
二十三年春二月 당에 자제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二十三年秋九月 태양이 3일간 빛을 잃다
二十四年 당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가다
二十五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다
二十五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다

5. 대중매체에서

5.1. 소설

5.2. 드라마

나라고 한없이 문약한 태왕이 되고 싶은 줄 아는가? 세상에 어느 태왕이 그 따위 소리를 듣고 싶어하겠는가. 어느 태왕이 나라의 사정을 소상히 적은 봉역도를 갖다 바치며, 또 어느 태왕이 굽실거리며 책봉을 받고 책력을 받는단 말인가! 그리고 어느 태왕이 피 흘려 싸운 대가로 얻은 승리를 되물리며 저 오랑캐들에게 허리를 굽힌단 말인가.

...자넨 그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아. 나는 백성을 먼저 생각하였네. 치자의 근본은 백성이야. 백성이 없이는 임금도 없고 나라도 없는 것일세.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우린 나라 전체가 모조리 불모지가 되어버렸어. 집집마다 전사자가 있고 농사를 제대로 지을 만한 장졸들이 없어. 이제 간신히 비어있는 곳간에 곡식을 들여놓기 시작하였네. 10년이 훨씬 지난 이제서야 말이야.

(중략) 자네의 뜻이 아무리 옳다 해도 이 태왕을 위해 숙여줄 수는 없는 것인가? 약속함세. 나라의 기반이 확실히 서면 그땐 내가 앞에 설 것일세. 그리고 서토로 갈 것이야. ...허나 분명히 말하건대, 지금은 아니야.
67화에서 연개소문을 설득하려는 영류왕
허나 결국 당나라에게 굽실거린다고 태학박사 이문진과 장수들(강이식, 온사문)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최후에는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독주를 마시고 자결하는 비운을 맞는다.[31] 그래도 연개소문도 나름 영류왕을 인정했는지 영류왕이 날아가는 새들도 해가지면 저들의 자리로 돌아간다며 자신들도 둥지로 돌아가는 새처럼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하자 연개소문은 그 새는 아침이 되면 다시 둥지를 떠나 천지를 비상한다며 지금이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라며 마지막까지 그를 설득하려 하지만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최후를 맞이한다. 죽으면서 한 마지막 말인 "우리는 가는 길은 달랐으나 똑같은 마음으로 고구려를 사랑했다"는 명대사라고 부를 만한데 작중 연개소문도 이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드라마에서도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러나 후대에 연개소문을 깎아내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으므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32][33] 작중 고건무는 뛰어난 명장으로, 강대하고 위대한 고구려를 꿈꾸고 원하며 서토 정복의 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작중 연개소문, 을지문덕, 강이식은 전쟁을 통해 위대한 고구려를 만들려 하는, 그 표현이 지나친 끝에 오히려 전쟁광스런 면모를 보인다. 반대로 드라마에서 고건무를 외교를 통해 최대한 전쟁을 막고, 이를 통해 힘을 키워 강대한 고구려를 만들어 서토를 도모하겠다는, 좀 더 현실에 타협한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실제 영류왕 집권 뒤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많이 좋아졌다는 묘사도 있고 당 태종 또한 온갖 굴욕을 참아가며 백성들을 전쟁으로부터 지켜내는 모습을 보며 백성에겐 그만한 군주가 없다는 칭찬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때의 내실 다지기는 아이러니하지만 연개소문이 당과 전쟁할 때 밑천이 된다. 극의 첫 시점인 수문제의 고구려 침공 시점부터 수염 기른 성인의 모습으로 등장함에도 이로부터 44년 뒤인 최후 시점까지 분장에 별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나와 전혀 세월을 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명의 배우가 번갈아 연기하며 막판에는 완전히 노인이 된 연출까지 나오는 연개소문과 차이가 극명하다. 연개소문이 출생연도 설에 따라서 40대 장년 정도의 나이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는 반면 영류왕은 부왕인 평원왕의 유복자라고 가정을 해도 수명이 최소 50은 넘기에 최후 시점에 환갑 넘은 노인이었을 가능성이 무척 높은데도 이 작품에서 표현된 모습은 정반대이다.* 2007년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살해된 직후라 언급만 되는데 연개소문이 가상 인물이자 매국노가 되는 부기원이 당나라와의 화친과 혼인정책을 보장왕에게 몰래 부추겼다는걸 알자 직접 그를 불러낸 후 "당나라에게 굽신거리려 들다니 너도 영류왕 꼴 나고 싶냐?" 식으로 협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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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남 고임무 고덕남 고덕무 공주
 
부흥
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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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식백과에서 형인 영양왕의 출생연도가 559년 무렵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아버지 평원왕이 뒤늦게 얻은 아들임을 고려하며, 동생인 대양왕의 존재를 감안해서 영류왕의 출생연도를 580년대 초반으로 추정했다.#[2] 《신찬성씨록》 기록.[3] 묘지명에 따르면 태자 고환권의 증손으로 영류왕의 고손에 해당한다. 경위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에서 환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유명한 환관인 고역사를 양자로 들이기도 했다.[4] 《삼국사기》.[5] 《삼국사기》.[6]삼국유사》.[7] 당나라로 건너간 고구려 유민 고을덕의 묘지명 기록.[8] 上柱國[9] 수나라 육군은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으로 패퇴시켰다.[10] 다만 이에 대해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로 들어지는 것이며 여러 설이 난립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개소문/생애 항목 참조.[11] 바다를 통해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평양성을 직접 공격한 10만 명 중에서도 가려뽑은[12] 당시 수나라 수군을 격파하지 못했다면 살수대첩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고구려는 수도에 틀어박혀 수십만 대군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거나 평양성이 함락 되었을 수도 있다.[13]삼국사기》에 따르면 628년(고구려 영류왕 11, 당 정관 2) 가을 9월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당태종이 동돌궐(突厥)의 힐리 가한(?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치하(致賀)하고,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를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한쪽에게 불리한 외교를 강요하게 된다.[14] 《봉역도》(封域圖), 고구려에서 제작한 지도.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15] 당태종 이세민의 치세 동안 고구려에 간 사신의 품계는 종5품하 이하에서 심지어 종6품하까지였다. 오늘날로 치면 행정고시에 갓 합격한 5급 공무원이나 연대 작전과장쯤 되는 인사가 와서 대통령국무총리를 동원한 의전을 받고 내정 간섭을 한 격이었다.[16] 어찌보면 이 점이 가장 큰 실책인데,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에서 고구려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거란, 말갈, 토번 등의 유목민족들이 당나라의 뒤통수를 계속 치고 있었기 때문에, 당이 고구려에 전력을 퍼부을 수 없었던 것이 컸다. 대운하가 완성되고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이미 본토 생산력은 당이 고구려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의 생존법은 말갈과 같은 유목민족과의 연대를 통해 당을 다방면으로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관계가 깨지면서, 당은 뒤통수 걱정 없이 마음껏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17] 다만 당태종이 쳐들어올 때의 표면적인 명분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이긴 했다.[18] 다만 631년 경관 철거 이후 그해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고, 기록상 9년이나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영류왕도 당고조와 달리 당태종에 대해선 상당히 경계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19] 연개소문 말년, 혹은 연남생 정권 초기에 태자를 봉선 행사에 참석시킨 경우도 있지만 이는 무력의 우위를 보여준 직후인지라 화친의 목적이 크지, 제압당해서 간다는 분위기는 아니었다.[20] 당나라의 건국 초기만 해도 사실 당은 수를 완전히 이어받은 통일제국이라기보단 여러 지방 군웅들을 제압해야 하는 패자(覇者) 정도의 수준이었다.[21] 비판론 일각에선 《봉역도》=지도=1급 군사기밀이란 논리로《봉역도》를 바친 것이 곧 군사기밀까지 들어다 바친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사료에는 《봉역도》를 바쳤다는 것만 나와있을 뿐이지 그것이 얼마나 자세하고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휴전 상태란 이유로 갖가지 정보에 규제를 행하는 대한민국도 지도의 국외반출 불허는 1:50,000 이하의 대축척 지도에만 해당한다. 단순히 지도를 바쳤단 이유로 군사기밀 유출까지 운운하는 것은 확대해석이며, 당대의 불만은 어디까지나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로 봐야할 것이다.[22] 이미 그의 조부였던 양원왕의 재위기인 551년에 돌궐이 군대를 이끌고 신성과 백암성에 쳐들어온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이 전쟁에서 고흘의 맹활약으로 적군 1,000여 명을 전사시키며 침입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후방에 전력이 텅 비어버린 탓에 그대로 밀고 올라온 나제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내주고 말았다. 당연히 고구려 입장에서는 돌궐을 쉽사리 믿기 힘들 수밖에 없다.[23] 연개소문의 부친과 조부가 연이어 국정을 관장하는 최고 관직인 막리지를 역임했다고 한다.[24] 고구려의 방어선을 보면 수백 개의 성채와 파발, 봉화 등 각종 시설들을 연계한 거대한 기동 방어 시스템식으로 운영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동 방어 체제를 운용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적군의 침공 경로와 같은 정보를 빠르게 알 수 있는 경보 통신망이었는데, 적군의 방향을 알아야 제대로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5] 몽골군 침입 당시 금나라는 만리장성의 경보 덕분에 몽골군의 침입 소식을 파악하고 대규모 군대를 모집할 시간을 얻었다. 만약 만리장성이 없었으면 화북 허허벌판 지대에 몽골군이 순식간에 휘몰아쳐 대비할 시간조차 못벌었다.[26] 신당서에는 태자 환권으로 되어 있다.[27] 드라마의 원작이라고는 하지만 드라마는 원작의 내용과는 전혀 딴판인 전개를 보인다.[28] 연개소문의 첫사랑이었으나 연개소문과 이뤄지지 못하고 고건무의 첩이 되고 이후 흑화하여 고구려판 달기, 장녹수가 되고 만다.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연개소문의 자비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이후 김춘추의 첩이 되어 김춘추를 도피시킨다. 나체 수면을 하는 버릇이 있다.[29] 쿠데타 후 고건무를 죽일 때 그가 살려달라고 빌자 "내가 존경했던 고건무 장군은 어디갔소?"라고 절규한다.[30] 배우는 훗날 대조영에서 연개소문 역을 맡은 김진태.[31] 고건무는 연개소문의 재능을 높이 사며 연개소문과 함께 가기 위해 끝까지 연개소문을 설득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냈으나 도리어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말았다.[32] 그러나 드라마의 선택적인 사료 선택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정작 드라마는 수양제 양광의 (다소 작위적이거나 후대의 가필을 의심할 수 있는) 위선적인 면모(가령 독고황후 사후, 몰래 술고기를 즐기며 위선적으로 통곡을 하는 양광에 대한 묘사)는 사료 그대로 묘사하였다. 게다가 당 고조 이연의 장남 이건성의 취급도 좋지않게 나오는데 분명히 장남임에도 차남 이세민과는 다르게 당나라 건국 후에 등장하며 최후 또한 비굴하게 묘사되었다.[33] 사실 <연개소문>의 극본을 담당한 이환경이 이 무렵에 완전히 환빠로 타락해버린지라 그 객관성은 점점 저 세상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