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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1:30

연개소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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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신과 계보
2.1. 출생2.2. 10월의 유혈 쿠데타2.3.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2.4. 정권 장악
3. 신라 김춘추와의 회담 결렬4. 당나라와의 대립
4.1. 당과의 전쟁4.2. 도교 우대와 불교 탄압4.3. 신라 공격4.4. 고구려-당 전쟁
5. 죽음과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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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개소문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출신과 계보

2.1. 출생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원래 천(泉)에서 생겨나왔으니, 이미 신(神)에 의탁하여 퇴지하였으므로 마침내 생겨난 데에 따라 그 족(族)을 불렀다. 마치 봉(鳳)이 단혈(丹穴)에서 나서 아홉 가지 색깔의 깃털에 기묘한 무늬를 드러내고, 학(鶴)이 청전(靑田)에서 나와 1,000년(千年)동안 신령스러운 모습을 지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공상(空桑)이 의(懿)를 낳고 허죽(虛竹)이 파(波)를 따르듯이 아울러 하늘의 정기(精氣)를 받아 인걸(人傑)을 드러내어 뽑아 결국 홍원(洪源)으로 하여금 끌어당겨 그 모습이 금구(金樞)를 가리고 일찍이 집을 넓혀 그 세(勢)가 경함(瓊檻)에 이르렀던 것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자유(子遊)이며 조부(祖父)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부(父)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었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軍權)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자(資)이었고, 봉래산(蓬萊山)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의 임무를 가졌다.
〈천남생 묘지명〉 中

삼국사기》 및 《구당서》, 《신당서》의 기록에는 고구려의 동부대인(혹은 서부대인)이었던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나온다. 서부동부 중 정확히 어느 쪽 출신인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서 알기 힘들지만 동부대인이었다는 기록이 더 많기 때문에 동부 출신이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 이를 근거로 연개소문의 가문을 동부여 계열 귀족으로 추론하기도 한다.[1]

연개소문의 출생연도에 관한 설은 590년설, 594년설, 595년설, 601년설, 603년설, 614년설까지 다양하다. 그 중 614년설의 출처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인용한 《고려고기》란 책으로, 내용부터가 오류가 많은 책이다. 당장 연개소문의 성씨부터 제대로 써놓지 않았고, 개소문과 개금이 같은 말이란 것도 모르고 '소문'을 벼슬 이름으로 착각해 오기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까지 범해놓았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595년설, 《환단고기》는 603년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전자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후자는 현전하지 않는 《조대기》라는 사서를 인용하고 있으나 애당초 《환단고기》 자체가 근현대에 창작된 위서로서 사료적 가치가 없으므로 신용하기 어렵다. 단지 연개소문과 연남생의 나이 차이만 가지고 614년설이 옳다고 하기에는 기록에 모순점이 많다. 보다 정확한 것은 연개소문의 묘지명이 발견되어야 분명해지겠지만 최소한 610년대 출생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의 직위를 계승한 연개소문은 642년 1월 영류왕으로부터 천리장성의 축조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아 고구려 북부의 국경지대로 파견나가게 되었다. 이는 6세기 이래 고구려의 귀족 연립 체제를 위협해오는 연씨 가문의 힘과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류왕과 관료들이 의도적으로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연개소문은 동부대인이 된 이후에도 흉포하고 잔악무도한 행동을 계속했다고 관련 기록에 전하며, 《구당서》에는 연개소문이 관직을 거머쥐고 왕권을 범하려 했다고도 적혀 있다. 이는 당시 고구려 내에서 강성한 세력으로 올라선 연씨 가문, 영류왕, 귀족들 간의 정치 투쟁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영류왕까지 포함된 연개소문 제거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연씨 가문의 힘은 고구려의 왕권마저도 위협할 정도로 비대하게 성장해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암살 모의도 이미 조정 깊숙히 세력을 심어두었던 연개소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하는 가운데 연개소문은 대담하게도 역습을 꾀한다.

2.2. 10월의 유혈 쿠데타

冬十月 蓋蘇文 弑王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을 시해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
임진일, 고려의 사신이 나니와진(難波津)[2]에 다다랐다.
정미일, 여러 대부들을 나니와부(難波郡)에 보내어 고려국에서 바치는 금•은 등과 아울러 물건을 살피게 하였다. 사신이 물건을 바치고는 “지난해 6월 아우 왕자[3]가 죽고, 가을 9월에 대신(大臣)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가 대왕이리코세시(伊梨渠世事) 등 180여 명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아우 왕자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 동성(同姓)인 츠스루코무루(都須流金流)를 대신(大臣)으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4 고교쿠 덴노(皇極 天皇)
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 性忍暴. 父爲東部 大人·大對盧, 死, 蓋蘇文當嗣, 國人惡之, 不得立, 頓首謝衆, 請攝職, 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嗣位. 殘凶不道, 諸大臣與建武議誅之, 蓋蘇文覺, 悉召諸部, 紿云大閱兵, 列饌具請大臣臨視, 賓至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殺建武, 殘其尸投諸溝. 更立建武弟之子藏爲王, 自爲莫離支, 專國, 猶唐兵部尙書·中書令職云.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씨이며, 자신이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비인 동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당연히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섭직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大臣)이 건무(建武)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알아차리고 제부(諸部)의 병(兵)을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들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의 아우의 아들인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나 중서령(中書令)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한다.
신당서》 권 제220 <동이열전> 제145

642년 10월, 영류왕과 대신들이 한통속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대담하게도 역으로 정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연개소문은 성 남쪽[4]에 여러 부의 군사들을 전부 불러 모아 놓고는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린 후에 대신들을 불러 들여서 함께 군대 사열식에 참여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에 참석하기로 했던 대신들은 사열식 도중 들어닥친 연개소문 밑의 동부 군사들에 의해 무참히 목숨을 잃었는데, 이때 살해당한 인원들이 임금과 대신들을 포함하여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대신들을 어육으로 만들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구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사열식을 하던 중에 갑자기 동부의 군사를 휘몰아쳐 대신들을 죽였다고 나오나 《신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자신의 군사들을 숨겨두었다가 대신들이 도착하는 족족 하나씩 죽여버렸다고 적혀 있다.

의문점이 있다면 왜 하필이면 고위 대신들이 자신들의 정적인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사열하는 행사에 참석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도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이미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에서 왜 그랬는지는 이해하기 꽤 힘든 부분이다. 이는 아무래도 그 행사가 보통 중요한 행사가 아니라 그들이 반드시 참석해야 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 행사는 연개소문이 동부대인의 지위를 내놓는 이임식 행사나, 혹은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위해 변방으로 떠나기 전에 베푼 송별식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인다.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 대신들을 없애버린 연개소문은 곧바로 궁궐로 쳐들어갔다. 다른 4부의 군사들이 저지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궁성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궁궐을 향해 달려가면서 일부러 창고에 불을 질렀다고 나와 있다. 이는 수도 경비병들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경비병들이 불을 끄기 위해 창고로 달려가는 동안 연개소문 휘하 병력들은 큰 저항없이 왕이 거처하는 궁전에 다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위해 아주 치밀하고 정교한 계략을 짜놓았고, 이를 신속히 행동으로 옮겼다.

궁궐에 군사를 이끌고 난입한 연개소문은 마침내 영류왕을 찾아내고는 그를 시해해버렸다. 《신당서》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한 후에 그 시체를 토막내서 시궁창에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스산하게 기록되어 있다. 642년 9월에 대신 이리카스미(연개소문)가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대왕과 대신 이리코세시 등을 비롯한 180여 명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이어서 왕의 어린 조카(고보장)를 신왕으로 세우고, 동성(同姓)인 츠스루코무루를 대신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동성'(同姓)이라는 기록이 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직관적으로 봐도 츠스루코무루보다 이리코세시 쪽이 연개소문과 동성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은 아예 그냥 오기라 하거나 혹은 동성(同姓)은 같은 부(部) 소속을 의미하기에 츠스루코무루도 연개소문과 같은 부의 인물이었으며, 이리코세시는 연씨 가문 내에서 연개소문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 등[5] 해석이 제각각이다.

2.3.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

이처럼 기록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포함한 집권 세력들을 도륙내고, 보장왕을 옹립하며, 자신의 세력들을 조정 대신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연개소문이 왜 이처럼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립하고 있다.

2.4. 정권 장악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시해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아우인 고태양(太陽)의 아들 고보장을 불러와 그를 임금 자리에 앉혔으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이었다. 이후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는 직책에 올랐는데 당나라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에 비견되며, 나라의 군사력과 궁중의 행정에 관여하는 직책이었다.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이나 <연남생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이 태대대로의 벼슬을 지냈다고 기록했는데 정권을 일으킨 이후 어느 정도 세력이 안정되자 제가회의의 장인 대대로 직위까지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8] 이 일로 말미암아 연개소문은 왕을 뛰어넘는 권세를 누리는 고구려의 최고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사실 《삼국사기》에서 이 시기의 고구려사를 기록한 <보장왕본기>는 사실상 <연개소문본기>라 해도 할 말 없을 정도.

이후로 연개소문은 권위적인 성격을 마음껏 뽐내고 다녔는데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자신의 관복을 온통 금으로 장식했으며, 평소에도 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고, 을 타고 내릴 때는 장수를 받침삼았다고 묘사했지만 실제로 모든 고구려 장수들은 기본적으로 다섯 자루의 칼을 가지고 다녔다. 이를 보면 《구당서》와 《신당서》의 경우, 연개소문의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짙게 각색하기 위한 내용일 수 있다. 《삼국사기》의 경우 이러한 《구당서》와 《신당서》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므로 논외로 한다. 연개소문이 행차를 할 때에는 호위병들로 하여금 엄중하게 대오를 이루어 다녔으며 길을 지날 때에는 행차를 큰 소리로 알리게 하였는데 이럴 때면 길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구덩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숨었다고 한다.

당태종이 들은 풍문에 의하면 안시성주[9]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대항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주는 이를 기어코 막아냈고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 속의 불화는 고당 전쟁 수행에 차질이 있었다는 가설로 설명하거나 반대로 당나라의 패배를 희석하기 위해 삽입된 과장된 풍문이라는 견해가 있는 등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는 않다.[10] 다만 647년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30,000명의 병력이 동원되어 안시성이 지휘를 받는 것을 보면 안시성의 반발은 과장되었거나 642년 당시에는 실제로 있었으나 고당 전쟁 시기 이전까지 어떻게든 봉합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당나라와의 대전쟁 때 명확히 알 수 있는 신성국내성의 지원군 40,000명을 시작으로 중앙의 통제에 따라 각 성에서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고 있었던 것과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150,000명, 667년 금산 전투에서 200,000명을 동원하고, 이후에도 남소성에서 150,000명과 말갈족 수만 명이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는 등 전력을 백제신라에다가 들이부었으면 과연 두 국가가 버틸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물량을 동원하는 등 국가 통제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전국을 통제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3. 신라 김춘추와의 회담 결렬

한편 642년 겨울 백제 의자왕대야성 공격과 김품석의 부하였던 검일에 의해 딸, 사위, 손주들을 모조리 잃게 된 신라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넘어와 고구려 조정에 있던 연개소문한테 함께 백제를 칠 것을 요청해 왔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직후의 일이었는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보장왕의 명을 받들어 김춘추를 맞아들이고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11]

이처럼 신라와의 회담은 처음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다음날에 김춘추가 보장왕과 만나 논의하면서[12]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많은 군사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위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보장왕은 고구려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는 조건으로 죽령 서북의 땅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죽령은 지금의 충청도경상도를 잇는 길목으로 고구려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영토로 이어지는 요충지였는데 고구려의 전성기인 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신라의 진흥왕이 이 곳을 빼앗아 신라의 영토에 넣었다.

비록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고 있었던 김춘추라고는 하나 그의 입장에서는 난처한 게 이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다. 그 요청을 그대로 들어주었다가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차단되고, 고구려에게 신라로 통하는 진격로를 열어주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보장왕이 신라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뜻이 되는데, 보장왕의 뜻은 사실상 실권을 움켜쥐고 있었던 연개소문의 뜻이었다.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구하도록 조치하였고, 곧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와의 국경 지대로 나아가 무력 시위를 벌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에서는 곧 김춘추를 풀어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김춘추가 풀려나 귀국하게 된 사연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신라본기>의 내용에 따르면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 국경에 나타나 무력 시위를 벌이자 보장왕이 그제서야 김춘추를 풀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유신 열전>의 내용에 따르면 보장왕의 측근이었던 선도해가 김유신으로부터 뇌물을 받고는 '토끼의 간'에 대한 이야기[13]를 들려주며 꾀를 내주자 김춘추가 이를 받아들여 보장왕에게 땅을 내어주기로 약조하고는 정작 국경에 이르자 이를 어기고 달아났다고 했다. 이 기록에도 김춘추 석방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김유신이 고구려 국경으로 군사를 끌고 가 무력 시위를 벌였다고 했다.[14]

연개소문이 무슨 까닭에서 김춘추의 제의를 거절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지 않고, 적대 관계를 만들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연개소문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나라와의 갈등을 빚어내 군사적인 긴장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연개소문이 애초부터 신라를 전혀 믿지 않고 있었으며, 후방의 신라 정도는 말갈과 백제, 왜를 이용해 견제할 수 있다는 연개소문의 판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설은 당시 고구려가 신라보다는 백제와 동맹을 맺는 것이 더욱 이득이 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에 신라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는 무왕, 의자왕의 2대에 걸쳐 신라를 압박했는데 이 때 교통 및 군사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 곳의 성주이자 김춘추의 사위였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이자 딸인 김고타소의 목을 베기까지 했으며 이후 40여 개의 성을 수중에 넣는 데까지 성공했다. 더욱이 의자왕은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있었다. 고구려 측의 입장에서는 한창 신라를 신나게 몰아붙이던 백제와 사이좋게 동맹을 맺고, 신라를 견제하여 후방을 안전하게 만든 후 곧 닥쳐올 당태종 이세민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으로 여겨졌을 공산이 크다.

《조선상고사》에는 백제의 성충이 연개소문에게 김춘추가 제의하러 왔을 시점에 맞춰 글을 보냈는데, 만약 신라와 손을 잡는다면 백제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그렇게 되면 당나라는 고구려에 진격할 길과 자원을 쉽게 공급받아 고구려가 앞뒤로 압박받게 된다는 서술이 있다. 원 출처가 되는 사료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가 김춘추의 제안을 거절한 속사정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도만 보면 한강 쪽은 신라 영토에 가로막히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싶지만 당시 신라는 백제의 맹공에 시달리며 국가 존망 자체를 걱정해야 했을 정도로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다. 백제는 후방 걱정없이[15] 모든 전력을 신라 방면에 집중시킬 수 있었던 반면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ㄱ자로 국토가 길게 뻗었고 백제보다 지켜야 할 국경선이 2배 가까이 길어져 있었다. 고구려도 간간히 신라의 북측 영토를 침범하는데다 후방에는 백제의 우군인 왜국이 수도 서라벌과 가까운 동해 바다를 직접 공격한 전례가 있었으니 신라는 양면전쟁을 넘어 3면에 수비병을 배치해둬야 해 지정학적으로 백제보다 열세에 있었고, 실제로도 거의 공세를 하지 못한채 수세에 몰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원 공급 쪽으로 가면 신라보다 백제 쪽이 훨씬 빠르고 수월했다. 당장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가로막는 요충지이자 당나라와의 교역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당항성을 고구려와 백제에게 나란히 공격당하며 큰 위협을 느꼈다. 해로나 수로를 통해 일시적으로 군사를 보낼 수도 있기에 고구려 입장에서도 꽤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특히 오랫동안 백제와의 마찰이 적었던 것과 달리[16] 신라와는 알게 모르게 마찰을 빚었고 대표적으로 김유신이 함락한 성이 고구려의 낭비성이었다. 그러니 연개소문과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보다 백제의 제안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연개소문은 옛 장수왕 때의 영토 반환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김춘추에게 하면서 거절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대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백제 쪽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 맞았다. 만약 신라와 손을 잡았다면 백제와 당나라의 손에 신라나 고구려가 멸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연개소문이 내건 죽령 서북 땅이라는 무리한 요구 또한 납득이 되는데 완곡히 신라와 결렬하는 이유로도 충분하고 만에 하나지만 수락이 되어 백제와 척을 진다 해도 이 정도의 땅을 가진다면 당나라가 수로를 통해 오는 것도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한 이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득보다는 손해가 많으니 거절할걸 노려 요구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어찌 되었든간에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일어났던 회담 결렬의 결과는 매우 큰 것이었으며, 백제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고립된 처지가 된 신라는 이후 당나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고구려와 백제는 나당연합군과 대립하는 형국이 된다.

그리고 김춘추가 적국 고구려까지 와서 무리한 협상을 시도한 것에 대해서 현대의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협상 자체 외에 신라 내부의 결속 목적도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성골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여왕이 즉위했고, 결국 언젠가 성골 여자도 모두 사망하면 진골이 왕에 올라야 하니, 이미 선덕여왕 말년쯤 되면 신라 내부에서도 나중에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17] 그런 김춘추가 목숨을 걸고 적국에 가서 담판을 지으려 했으니, 신라인들에게는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각인시켜주는 행동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춘추는 연개소문이 만약 우호적으로 나와주면 가장 좋지만, 그게 아니면 아닌 대로 나름대로 이득이 있다는 식으로 이미 계산을 해 두었던 셈이다.

4. 당나라와의 대립

4.1. 당과의 전쟁

이처럼 다루기 힘든 성격의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실력자가 되면서 당태종의 해동 삼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 및 고구려 정벌에 대한 준비 등에 걸림돌이 되었고, 고구려당나라의 관계는 차츰 나빠져만 갔다.

거기다 이세민은 당시 내부적으로 황태자 이승건 교체(643)의 후유증으로 인해 꽤나 통치력이 줄어든 상황이었고, 장손무기를 필두로 하는 외척의 힘이 역으로 커져서 한참 정국이 어지러웠던 시기였다. 심지어 인도에서 귀국한 현장에게 환속해서 자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정치적 어려움이 매우 심각했던 시기였으며, 스스로가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이기도 했으니 고구려 정복이라는 군사적 활동을 통해 당태종 자신과 막 세운 태자 이치의 권위를 세우고 정국을 안정화하고자 할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당태종은 연개소문을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문란케 하는 역적이라 일컬으며 고구려를 칠 것을 계획하였으나, 측근이었던 장손무기가 아직 방비가 단단하니 상황을 지켜봐야 옳다고 만류하자 계획을 보류하였다.

4.2. 도교 우대와 불교 탄압

643년 3월, 연개소문은 "우리 나라에는 유교불교는 번성하나 도교가 없다."라고 하면서 보장왕에게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에 도교를 전파해 줄 것을 요구하도록 했다. 당나라 조정은 이에 응하여 고구려에 숙달 등을 비롯한 8명의 도사를 파견하여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을 전해주도록 했다. 연개소문 역시 이에 화답하여 도사들을 절과 객관에서 머물도록 해주었다.

이미 당시 고구려에는 도교가 번성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영류왕본기>에도 당시 고구려에 도교가 번창했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즈음에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도 이전에 불교적 색채가 짙었던 것과는 달리 도교적인 요소가 매우 늘어났음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도 도교적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 연개소문이 새삼스럽게 당나라에 도교 전파를 요청한 이유는 당시 당나라의 농서 이씨 황실이 스스로를 노자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도교를 무척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즉, 연개소문이 당나라 황실이 받드는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나라에 대한 유화책이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연개소문이 당나라에서 온 도사들에게 절을 숙소로 내준 것은 불교에 대한 탄압책으로 여겨진다.[18] <보장왕 본기>에는 650년 6월에 변룡사의 승려인 보덕화상이 나라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한다 하여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반발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삼국의 불교가 왕실을 보위하는 호국불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왕실의 친위세력인 불교의 권위를 약화시켜 왕의 위상 자체도 떨어뜨리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마도 당시 스님들은 귀족 가문의 출신들이 많았고, 학문과 무예를 익힌 엘리트였으며, 스님들이 숙식하는 사찰은 유사시 대규모 병력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군사적인 기능도 수행했기에 그 대항마로 도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교 우선시 정책과 상대적으로 불교를 탄압한 점 때문에 이후 불교계에서는 연개소문을 수백 년 동안 굉장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듯 하다. 해인사 창건 기록인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에 의하면, 고구려가 불의(不義)를 많이 저질렀으니 제석(帝釋)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인간세상에 보낸 괴물 무상대귀(無常大鬼)가 바로 개금(=연개소문)이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도 수나라 장수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환생한 것이 연개소문이라는 전승을 싣는 등 대체로 당대 불교계 기록에서는 고구려를 망친 장본인으로 연개소문을 지목하며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4.3. 신라 공격

한편 연개소문은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했다. 결국 643년 9월에 신라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가 40여 개 성을 빼앗고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신라의 뱃길을 끊어 버렸다'라면서 당에 직접 도움을 청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644년 정월에 당태종은 고구려 조정에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는 일을 그만 두라는 내용의 국서를 전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침공하여 2개의 성을 격파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보장왕이 사자를 보내 부르자 그제서야 조정으로 돌아왔다. 상리현장은 개소문에게 신라를 치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연개소문은 지난날 수나라와 싸우는 중에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땅을 빼앗아갔으므로 이를 되찾아야 한다며 듣지 않았다.

사실 이 해에 이미 양국은 교전 상황에 돌입했다. 대릉하 일대에서는 고구려군과 당군이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644년 9월에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백금을 보냈으나 당나라의 대신인 저수량이 이를 고구려 측이 보낸 뇌물이라 주장했고, 당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백금을 받지 않았다. 또한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보낸 50여 명의 사신들을 가리켜서 '왕을 죽인 막리지를 섬기는 죄인들'이라 하며 붙잡아 처벌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분노하여 당태종이 보낸 사신 장엄을 인질로 삼고는 굴방에 감금해 버렸다.

4.4. 고구려-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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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신을 가두는 등 연개소문과 당태종 사이의 기류는 계속 험악해지다가 결국 645년에 수십만 대군이 격돌하는 본격적인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요동성 백암성, 비사성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1차적인 함락 이래로 진군조차 지지부진했고, 안시성, 신성, 건안성 등을 필두로 하는 고구려의 강력한 요동 방어선을 뚫지 못한채 패퇴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도 당태종은 소모전, 상륙전 등을 시도하며 고구려를 공략했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며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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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사수 전투 기록화

한편 그 뒤를 이은 아들 당고종 역시 650년대부터 내몽골과 요서 일대에서 고구려군과 각축전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660년대에 들어서는 소정방, 임아상, 계필하력, 정명진, 방효태 등을 필두로 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회심의 일격을 날려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연개소문은 외교력과 용병술을 발휘하여 이들을 모두 물리쳤고, 야전에서의 활약도 두드러져 사수에서 좌효위대장군 방효태 지휘하의 옥저도행군을 전멸시키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전원을 절멸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것이 바로 사수 전투이다. 연개소문은 당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말갈과 백제와 연합하여 655년 정월에 신라의 33개 성을 뺏들어가는 괴력도 보였다. 이 연합군에는 연개소문 부자들과 백제의 의자왕, 윤충도 있었을 것이고, 대야성 전투(642년)에 백제에 투항한 검일모척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죽음과 사후

고구려-당 전쟁 중에 동맹국이던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면서 고구려는 후방이 위험해지는 등의 위기를 맞았으나 연개소문은 당나라군을 전멸시키는 무용을 보인다.

이러한 난세 중에 연개소문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신당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자면, 642년 겨울에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를 제거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 지 20여년이 지난 후인 666년이었다.

그러나 천남생 묘지명에 따르면, 665년에 그의 장남인 연남생이 태대막리지가 되어 군국을 총괄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연개소문이 이미 665년에 죽었거나, 혹은 그때에 큰 병이 들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미리 연남생에게 직위를 넘겨주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 《일본서기덴지 덴노 3년 10월조의 기록은 연개소문이 664년에 죽었다고 전한다.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세 아들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며 죽었는데 죽으면서도 아들들이 서로 분쟁하여 나라를 분열시킬까봐 두려웠는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 달에 고려(高麗)의 대신 개금(蓋金)이 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맏아들이었던 연남생이 태막리지의 직위에 올랐으며, 남생의 두 아우였던 연남건연남산은 형을 도와 국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주위의 여러 사람들은 이들 삼형제들의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이간질하는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결국 맏아들 연남생의 마음이 흔들려 남건과 남산에게 첩자를 보내 염탐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 남생을 의심하여 왕명을 칭하며 연남생을 불렀으나 연남생은 이미 동생들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연남생은 국내성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무리들과 거란, 말갈병 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렇게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통치하던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버려 결국 당고종신라에게 침략할 기회를 허용하게 되었고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1] 동부여는 한국사에서는 별 존재감이 적지만, 고구려로 유입된 동부여 계열 귀족들의 후대에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는데, 《신집》 편찬 당시 시조 주몽의 출자를 동부여로 바꾸고, 해부루의 〈가섭원 천도 설화〉를 삽입해서 현대까지 학자들을 너무나 고생스럽게 만드는 북부여-동부여 혼재 표기의 주범이다.[2] 현재의 오사카시에 위치한 난바(難波) 인근을 의미한다.[3] 영류왕의 동생이자 보장왕의 아버지인 고태양[4] 정확히 어느 성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국왕을 시해해야 했고 여러 대신들이 모인 큰 행사였으므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추정된다.[5] 성씨의 개념을 만든 중국에선 '성'과 '씨'는 다른 개념이었다가 후대에 하나로 합쳐졌지만 중국 문물을 수입한 고대 일본에서는 '가바네'(姓)와 '우지'(氏)를 분리해서 구분했다.[6]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 대왕의 꿈이나 칼과 꽃 등에서는 이 설을 바탕으로 한 내용 전개가 펼쳐진다.[7] 특히 SBS에서 방영했던 사극 연개소문이나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 등이 이 설의 영향을 받고 있다.[8] 막리지는 1. 제일 높은 관직인 대대로와 같은 관직이라는 설 2. 두 번째로 높은 관직인 태대형과 같은 관직이라는 설 3. 연개소문의 정변 이후 신설된 관직이라는 설이 있다.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이 대신 이리거세사 등을 죽이고, 도수류금류 등을 대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연개소문이 쿠데타로 중앙 정계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처형한 후에 자신의 사람들로 자리를 메꾸는 등 대대적인 인사 개혁을 단행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9] 양만춘(楊萬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본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10] 풍문이 인용된 기록을 봐도 ‘연개소문과 반목한 성이라 쉬울 것이다’ 따위가 아니라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 지키는 성이니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뉘앙스이다.[11] 해당 기록에는 연개소문을 '태대대로 개금'이라 표기했다.[12] 김춘추의 보장왕 직접 면담 건은 연개소문과 사전 협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최대 실력자인 연개소문 입장에서는 김춘추가 연개소문 패싱을 하고 보장왕한테 간 것이 폭발할 일이었다.[13]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궁가>와 같은 이야기이다.[14] 세간에는 연개소문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김춘추를 가둔 것이 보장왕이고, 그렇게 하라고 부추긴 것은 신원 미상의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연개소문이 실권자인 상황에서 보장왕이 마음대로 김춘추를 죽이려고 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증거가 없는 셈이다.[15] 중국이 서해 바다를 연안 항해도 아닌 다이렉트로 건너서 10만명이 넘는 병력으로 백제를 공격하리라는 시나리오는 전례도 없었고, 실제 의자왕도 거의 대비를 하지 않았다.[16] 물론 서로의 왕을 죽인 흑역사가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는 이미 200~300년이나 지난 한참 전의 이야기이고 그 후에도 양국의 감정이 좋지는 않았다지만 6세기 신라의 급격한 팽창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사이좋게 영토를 빼앗기면서 공공의 적이 생겨버린 상황이었다. 당장 위덕왕 때까지만 해도 서로 이를 갈고 싸울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몇 대 뒤에 왕위에 오른 무왕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면 돕겠다고 먼저 제의해놓고서는 정작 수나라가 전쟁을 벌이자 발을 빼버리는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구사하면서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기도 했다. 허나 앞선 전적과 의자왕 대 이어진 신라에 대한 맹공 탓에 당나라는 백제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의자왕 역시 당나라의 위협을 무마하고 신라를 치기 위해서 고구려의 협조가 절실해졌다. 결국 양국의 이해 관계를 전부 충족하는 동맹이었던 것이다.[17] 다만 이 때까지는 비담, 알천 같은 다른 쟁쟁한 차기 왕위 후보도 아직 남아있었다. 김춘추는 유력한 대권주자인 셈이었다.[18] 실제로 삼장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서유기》에서는 도교의 도사들을 극악한 무리인 양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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