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영국 비커스 사의 다포탑 전차 A1E1 "인디펜던트 전차"가 개발되자, 각국은 이 기묘한 다포탑 전차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곧 다포탑 전차에 대한 근거없는 무적설로 이어졌다. 실전을 전혀 거치지도 않고 그저 "다포탑이니 화력이 강하겠지"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태어난 이 "육상전함"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듯 겉으로 보기엔 대단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 당시 관계자들 또한 같은 생각을 가졌음직하다. 각국은 이 다포탑 전차에 대해 크나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흐름 속에 소련도 있었으며, 실제로 인디펜던트 전차를 구입하려 했지만 결국 사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이 닥치자 각국은 이 돈 많이 드는 다포탑 전차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허나 그러한 경제 대공황의 여파를 그나마 크게 받지않은 소련은 다포탑 전차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게 된다. 1930년 소련은 T-30 프로젝트를 시작하나 막연한 디자인 때문에 실패하고, 이후 소련 당국은 또 하나의 프로젝트였던 "TG-1" 프로젝트에 올인한다.
테스트 중인 T-35
소련은 다포탑 전차를 개발하기 위해 당시 사이가 좋았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엔지니어 에트바트 그로터(Edward Grotte)를 초청해 볼셰비키 공장 OKMO 디자인팀의 특별 설계국 AVO-3에서 "TG-1"의 소련 기술자들을 지도하도록 요청했다.
그 결실은 이루어져 1930년 3월 TG-1의 설계는 모두 완료되었다. 하지만 소련 당국은 TG-1보다 강력한 35톤 전차를 원하게 되었고, AVO-3 설계국에게 1932년 8월 1일까지 정식으로 "T-35" 프로젝트를 완성시킬 것을 요청했다. 재검토된 T-35는 1932년 8월 20일, 첫 프로토타입이 공개되었고, 1933년 4월, 잠정적으로 T-32라고 명명된 프로토타입 전차가 쿠빈카(Kubinka)에서 여러가지 시험을 받았으며, 이후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 T-28, BT 계열 전차 같은 소련의 다른 전차와 부품 공유화 작업, 엔진, 서스펜션 개량을 거친 후 같은 해 8월 11일 T-35로써 제식화되었다.
T-35의 현가장치
T-35의 원래의 계획이 'TG-1' 중전차였기 때문에, T-35에는 상당히 많은 TG-1의 기술이 녹아들어갔다. M6 디젤 엔진, 마찰 클러치(friction clutch, 엔진에 시동을 걸거나 기어를 변속할 때 동력의 전달을 차단하고, 발진 때 엔진의 동력을 변속기에 전달하는 장치), 변속장치, 측면 클러치 등이 계승되었다.
T-35와 T-28
T-35 전차의 주요 무장은 T-28 전차와 비교해서 "수만 많을" 뿐이었다. 1문의 76.2mm PS-3 주포, 주렁주렁 달려있는 5~6문의 7.62mm DT 기관총은 T-28 또한 가지고 있는 무장이었고,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부포탑 숫자 및 후방 발사 기관총과 45mm 부포였다. 설상가상으로 생산초기에 PS-3 주포의 숫자가 부족하여 가짜 포를 매달고 있었다는 것. 이것은 후에 KT 주포로 변경된다. 결국 T-35, T-28은 모두 다포탑에 대한 환상에서 나온 산물들이었고, 두 전차의 포와 장비 등은 공유되었다.
원래 다포탑 전차라는 설계는 많은 화력을 장착함으로써 여러 방향을 동시에 공격하거나 강력한 화망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부포탑으로 인해 주포탑이 자기 위치보다 아래쪽의 표적을 사격하지 못하는 것 같이 많은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일단 적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워낙 거대하므로 발견해도 대처하기 힘든 사각이 많이 발생하며 포탑끼리 간섭현상이 발생하는 등 화력집중을 방해한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큰 덩치를 가지므로 고출력을 가지는 엔진이 필요하고, 장갑에 강화할 여유출력이 부족하며, 설령 아무리 장갑을 강화해도 상대적으로 약한 부포탑에 포탄이 명중하면 간단하게 관통되는 등 방어력이 취약해진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인원으로 인해 전차장의 통제를 어렵게 만드는 등 그야말로 약점투성이다.
게다가 가뜩이나 무전기 없고[1] 열악했던 소련 육군 초기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간신히 굴러가는 문제점 덩어리였다.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볼 것은 비록 T-35 전차가 실패로 끝났지만 후에 KV-1과 경쟁했던 SMK 전차, T-100 등에 녹아들어갔다는 점인데, 그것이 바로 3인승 포탑이였다.
T-35-1 프로토타입
T-35-2 프로토타입
전차에게는 언제나 초기형과 후기형, 기본형과 개량형이 존재하며, 그것은 T-35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T-35는 미처 생산하기도 전 "프로토타입"에서 두가지 형식으로 갈려 생산되었는데 T-35의 두번째 생산품은 무장의 개량이 아니라 사실상 디자인의 변경에 가까웠다. 디자인을 제외하고 엔진은 M-17 디젤 엔진, 변속기들의 개량을 거쳤다.
이 두 가지 프로토타입이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33년 11월 7일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분열식에서였다.
T-35 양산형
이 두 대의 T-35가 공개된 후, T-35 전차는 1935년부터 본격적으로 양산되었으며, 총 61대가 생산되었다.
그 두 가지 프로토타입 형식을 제외하고, T-35의 "정식" 파생형이라 한다면 1939년의 포탑 개량형과 T-38B가 될 것인데, T-38B는 아예 개발이 취소되어 버렸고, 1939년 최후기형이라 해보았자 경사장갑을 도입했지만 장갑 자체가 얇아서 별 쓸모가 없었다는 것과 함께 고작 6대 생산되어 전력으로는 별 가치가 없었다.
그것은 T-35A(1933형)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통 주력화된 전차는 적어도 100량은 넘게 발주하는 것이 보통인데 부품이 많이 들어가는 다포탑전차의 특성상 T-35 전차의 가격이 BT 전차 9대에 해당하는 가격이었으므로 61대가 생산된 것도 엄청난 생산량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T-35 전차의 실전을 생각해보면 거기에 들어간 자원으로 차라리 BT 전차를 뽑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막말로 이놈 60대랑 BT 540대 중 뭐가 더 효율적일까?
T-35의 첫 실전배치는 1935년 모스크바를 방위하는 제5독립중전차대대였다. 이때만 해도 정예 전력으로서 충분히 기대받고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일단 T-35는 1935년부터 정식으로 운용되었지만 1939년 겨울전쟁에서의 SMK 전차의 성과, 그리고 1940년 6월부터 제기된 "다포탑 전차의 실용성" 문제 때문에 T-35는 시작도 하기 전에 퇴역할 위기에 놓였다. 스탈린이 이 필요없는 다포탑 전차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는 KV-1 전차의 설계가 다포탑 전차에서 단포탑 전차로 진화하는 것에도 기여했다.
이렇게 슬슬 버려져 가던 T-35는 실전에 참가하기도 전에 전차학교에 돌려지거나 개량형 설명에서도 밝혔듯 자주포로 전용되는 등 입지가 좁아졌다. 하지만 완전히 퇴역한 것은 아니라서 제34전차중대의 68연대와 키예프에 상당량이 배치되었고, 마침내 T-35의 실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1년,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하여 소련을 기습 침공함으로써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갑작스러운 상황과 아직 대비하지 못한 붉은 군대는 순식간에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전은 커녕 아군 승무원들에게 부서지고, 박살나고, 자폭해서 길가에 버려졌다. 총 91.48%에 달하는 T-35 전차가 버려졌으며, 모스크바 방위전에 투입되기 위해 전차학교로 돌려놓은 T-35 전차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싸운 전차가 없다시피 하였다.[2]
문제는 소련군의 다른 전차들은 일단 작동만 하면 전선에 마구잡이라도 투입되었다는 것인데, T-35가 그러지도 못한 이유는 T-35는 성능이 너무나도 낮아 전차로는 쓸 수 없는 물건이었고, 자체적으로도 너무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T-35의 문제점은 고질적인 방호력문제(35mm 장갑)도 있었지만, 격파된 전차보다 버려진 전차가 더 많고, 독소전쟁 초기의 독일군 전차 또한 별반 다르지 않는 장갑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궁극적인 요인은 바로 기동성과 성능이 저질인 M-17 엔진에 있었다. 한 군관은 이렇게 푸념할 정도였다.
13도의 경사밖에 기어오르지 못하고, 물웅덩이를 만나면 멈추어야 하는 이 전차가 과연 전차인가?
군관의 말대로 T-35는 난장판인 전장에서 제대로 싸울만한 전차가 아니었다. 게다가 T-35 내부는 각 승무원들끼리 연결되지도 않았고, 다포탑에 의한 화력 분산, 지휘체계의 혼란, 부포탑 각도에 따라서 조종수 해치가 열리지 않는 등 피격 시 승무원의 힘든 탈출은 더욱 더 그러한 상황을 크게 만들었다.
거기다 웃기게도, 당시 소련군의 규칙상 10명 이상의 병력이 탑승하는 중장비에는 반드시 정치장교가 그 숫자에 추가돼야 했기에 T-35 전차 역시 전차장과 함께 정치장교가 탑승했다. 정확한 증언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정치장교 항목에서 보듯 그들의 군사적 상식을 망각한 행동 덕분에 저승길 동무가 된 T-35의 전차 승무원들 또한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전차를 상대하는 독일군의 입장에서는 거대한 크기에 압도당하지만 않으면 그야말로 고정표적 그 자체였다. 우선 T-35 자체가 느리고 지형을 까다롭게 가리는 데다가 선회 속도도 느려서 독일군 전차의 입장에서는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움직여도 될 정도였다. 게다가 일단 일정거리 이내로 접근하면 부각의 문제상 중앙의 주포탑이 하방사격을 할 수 없어서 무용지물이 돼버리고, 부포탑의 경우에도 사각이 있기 때문에 부포탑 옆의 기관총탑이 담당하는 각도에서 전투하면 가만히 서서 적을 박살낼 수도 있었다. 물론 덩치가 커서 포탄 1발에 박살나지는 않지만, 방어력을 강화할 수 없는 부포탑에 연속으로 포탄을 집중하면 쉽게 박살나며, 그렇지 않더라도 장갑이 얇기 때문에 어디를 때려도 장갑을 관통하는데다, 엔진룸 근방에 맞으면 그나마 움직이던 엔진이 박살나므로 그냥 서버린다. 따라서 전차 승무원의 능력이 출중하면 2호 전차로도 상대가 가능할 지경이었다.
[1] 무전기가 장착된 차량은 포탑 주변의 핸드 레일처럼 생긴 안테나의 장착 여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핸드 레일"식 안테나는 소련의 T-26이나 BT 전차, 일본 제국의 치하의 지휘 차량 사양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선 통신 기술이 열악했던 시기에 사용된 고육지책이다.[2] 구 소련군의 기록에 의하면, 67연대와 68연대에 배속된 총 47대의 T-35 전차 중에서 4대를 제외하고는 기계적인 결함이나 사고로 전투를 지속할 수가 없었다. 출처 : 5:45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