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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추존 황제 | |||
<colbgcolor=#A11><colcolor=#ece5b6> 전한 초대 황제 고제 | 高帝 | |||
출생 | 기원전 256년 혹은 기원전 247년[1] | ||
초 패현 풍읍 중양리 (現 장쑤성 쉬저우시 페이현) | |||
즉위 | 기원전 202년 2월 28일 | ||
전한 정도현 범수 북안 (現 산둥성 허쩌시) | |||
사망 | 기원전 195년 6월 1일 (향년 52세 혹은 61세) | ||
전한 장안 장락궁 (現 산시성 시안시) | |||
능묘 | 장릉(長陵) | ||
재위기간 | 후초의 한왕 | ||
기원전 206년 3월 혹은 4월 ~ 기원전 202년 2월 28일 | |||
한 황제 | |||
기원전 202년 2월 28일 ~ 기원전 195년 6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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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방(邦) | ||
부모 | 부황 태상황 모후 소령황후 유온 | ||
형제자매 | 4남 1녀 중 3남 | ||
배우자 | 정실 고황후 여씨 후궁 고황후 박씨, 척부인 등 | ||
자녀 | 8남 1녀 | ||
신장 | 179cm[2] | ||
자 | 계(季) | ||
작호 | 한왕(漢王) | ||
존호 | 고조(高祖) | ||
묘호 | 태조(太祖) | ||
시호 | 고황제(高皇帝) |
《사기》에 실린 <고조본기> |
[clearfix]
1. 개요
400여년 동안 이어진 통일 제국 한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이자 초대 황제였다.중국사에서 진나라의 시황제, 이세황제와 후초의 의제에 이어 네 번째로 황제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쓴 인물이었으며, 휘는 방(邦)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본 문서의 표제인 고제 보다는 한 고조나 유방으로 불린다.[3]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제후나 귀족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피지배층에서 황제라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진(秦)나라 말기의 대혼란에서 세력을 일으켜, 초한대전에서 숙적 항우(項羽)를 제압하고 천하를 차지했다. 중국 전 역사를 통틀어서 이렇게 평민이 패업을 이루고 왕조를 연 사례는 약 이로부터 1,500여년 뒤의 시대인 명태조 밖에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후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고 이성왕(異姓王)들을 숙청하여 대제국 한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특히 한(漢)족, 하나의 중국과 같은 오늘날까지 엄존하고 있는 중국의 국가적 문화 정체성을 만들어낸 왕조의 창시자로서 중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황제는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완벽히 하나로 묶어내는 것에는 실패했고, 시황제가 시작한 황제 체제는 한고조가 이를 완성했다고 평가된다. 또한 이후 중국에 분열기가 찾아왔어도 그때마다 통일 국가의 대의명분을 제공해줬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 혹은 한족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黃帝) 헌원씨로 대표되는 삼황오제가 있고 역사적 실증으로만 따져도 상나라 등 한나라 보다 이전의 시대가 있지만, 한고조가 창설한 한나라가 후세에 통일된 중국과 중화문명의 큰 기반을 제공하고,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한족(漢族)이라고 칭하는 것만 봐도 충분히 중시조라 부를 만한 사람이다.
주로 한 고조(漢高祖)라는 호칭으로 불리는데, 이는 정식 묘호나 시호는 아니다. 유방의 묘호는 태조이며 시호는 고황제(高皇帝)다. 즉 정식 호칭은 태조 고황제이며 사마천(司馬遷)이 유명한 저서《사기》에서 고조(高祖)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것이 유방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로 굳어진 것. 정확히 말하자면 고조는 태조 고황제의 약칭인 것이다.[4] 다만 이 고조(高祖)라는 용어가 한고제 본인을 칭하는 상징적인 칭호를 넘어, 후대 왕조의 창건자들에게도 붙는 묘호가 된 것은 고제의 영향이 컸다고도 할 수 있다.
2. 출생
유방은 패현(沛縣) 풍읍(豊邑)[5][6] 중양리(中陽里)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원래 송나라 땅이었으나 유방이 태어나기 3~40여년 전인 기원전 286년 송나라가 망하면서 초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풍읍은 위치에서 알 수 있듯이 초나라의 중심 지역보다는 위(魏)나라의 국경과 훨씬 가까운 지역이었다. 거기에 유방의 동생의 후손인 전한의 학자 유향의 말과 그를 인용한 《한서》의 기록에서는 위나라가 대량으로 천도한 기원전 4세기 중반 무렵 유방의 선조가 진(秦)나라에서 위나라로 포로로 끌려 갔다가, 이후 신릉군과 동시대의 사람인 유방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풍읍에 정착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유방의 증조부이자 유태공의 조부인 유청은 위나라의 대부 벼슬까지 지냈다고 하는데 위 왕실의 재산을 횡령한 사건으로 가세가 몰락해 평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사기》나 《한서》(漢書)에서는 아예 유방(劉邦)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대목이 없다. 그저 성이 유씨이고 자(字)가 계(季)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유방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후한[7]의 학자 순열(荀悅)의 《한기》(漢紀)에서부터인데, 후세 학자들이 《사기》, 《한서》에 주석하면서 한 인용으로, 발굴된 유물 자료들로써 대체로 옳다고 간주한다.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설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유방이 어렸을 당시에는 유계라는 호칭으로 통하다가, 즉위한 후 유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초한전쟁을 모르는 현재의 대다수 사람들마저 유방과 항우라는 유명한 이름을 아는 실정과 달리 유방 본인에게 '방' 이라는 이름은 일생 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본인으로서도 착 감기지 않는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소리이다.[8]
유방의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방의 어머니인 유온이 연못가 근처에서 쉬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신(神)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뇌성벽력이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근처에 있던 태공이 그 모습을 보자 유온의 배 위쪽에 교룡(蛟龍)이 떠있었고, 유온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사람이 유방이었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고제(전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가족 관계
부친은 태공(太公)이었고 어머니는 유온(劉媼)이었는데 태공이나 온은 남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호칭에 지나지 않았다고 《사기집해》나 《사기색은》 등의 주석서에서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유태공과 유온을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그저 유씨댁 어르신, 유씨댁 안주인 정도의 의미로 유방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찾을 수가 없다. 유방의 형제를 살펴보면 이름이 형제 간의 서열, 순서를 간편하게 나타내는 백중숙계(伯仲叔季)를 붙여서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방의 형들로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유계'라는 호칭이 어째서 생겼는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유방은 본래 개별적인 이름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저 '유씨네 막내'정도로 통용될 수 있는 유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학자 사타케 야스히코는 유방이 평민 출신이라 본래 이름이 없었으나 황제가 된 뒤에야 이름과 글자가 나왔다고 여겼다. 그러나 둘째 형 유중은 유희(劉喜)라는 휘가 알려져 있고, 이복동생 유교(劉交)는 유(游)라는 자가 따로 있었기에 모든 사람의 휘가 불명확한 것은 아니다. 백중숙계가 대충 지은 이름 같아 보이지만 그게 정식 자나 이름인 예가 꽤 있어 유계라는 이름이 개별적인 이름일 가능성은 다분하다. 더욱이 유교가 유학자로 특히 《시경》에 능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집안 사람들 중에 이름이 아예 없는 인물이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고제는 8남 1녀를 두었는데 여덟 아들의 어머니가 모두 다르다.
- 노원공주(魯元公主)여후 소생
- 제도혜왕(齊悼惠王) 비(肥)조씨(曹氏) 소생
- 효혜황제(孝惠皇帝) 영(盈)여후 소생
- 조은왕(趙隱王) 여의(如意)척부인(戚夫人) 소생
- 효문황제(孝文皇帝) 항(恆)박희(薄姬) 소생
- 회남여왕(淮南厲王) 장(長)조씨(趙氏) 소생
- 조공왕(趙共王) 회(恢)
- 조유왕(趙幽王) 우(友)
- 연영왕(燕靈王) 건(建)
5. 평가
자세한 내용은 고제(전한)/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기타
-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乃公居馬上而得之,安事《詩》、《書》!"《사기》<역생육가열전>"豎儒,幾敗而公事!"《사기》<유후세가>
여기서 보이는 내공(乃公)과 이공(而公)은 비슷한 표현인데, 이는 본래 '자신' 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乃나 而는 "너" 아니면 "자네" 정도의 의미가 되는데, 뒤에 公이 붙이니 그렇다면 "자네 아버지" "네 어르신" 정도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유방은 여기서 이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했다. 이건 자기를 일컫어 "네 아버지" "(너희 아버지에 해당하는) 이 어르신" 같은 묘한 어감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대 역시 "아들" "조무래기" 같은 상황이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고 어감을 살려 문장을 번역하면 이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이 어르신께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셨다. 그런데 시, 서 따위가 대관절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9]"하찮은 유생 놈 때문에 이 어르신이 대사를 그르칠 뻔 했구나!"
물론 황제 등은 3인칭으로 자신을 호칭하기도 했지만, 이건 황제의 어투라기보다는 건달 세계에서 보스가 쫄따구에게 하는 느낌에 더 가깝다. 그런 '쫄따구 풋내기' 등을 일컫는 수자(豎子)[10]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와 대조해서 보면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다. 이런 느낌으로, 여하간 평민 출신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어법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사실 멀리 갈 것 없이 유방의 이런 3인칭 화법은 오늘날로 치면 남자가 좀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 할 때 쓰는 "이 형이 말이야.", "오빠가 한 턱 쏜다" 이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좀 더 건달(?)스럽게 바꿔보면 "이 엉아가 말야~" 정도로 볼 수 있다.
- 자신을 따맀던 정강이라는 신하를 고발한 사람의 코를 베어버리는 형벌을 내렸다. 정황을 살펴보면, 정강이 유방과 함께 고생을 할 때는 전쟁 중에 요행히 죽기를 바라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가 이제야 그를 고발한 것을 괘씸히 여긴 듯 하다.正疆首茉事而當,上使參乘,解玉劍以之。天下定,出以爲守。有告之者,上曰:「天下方急,汝何在?」曰:「亡。」上曰:「正疆沐浴霜露,與我從軍而汝亡,告之何也?下廷尉劓。정강(正疆)이 수차례 사건에 대해 하는 말이 타당하자, 주상(유방)은 수레에 참승하도록 하고, 옥검을 풀어 그에게 채워주었다. 천하가 안정되자 (정강을) 내보내 군수로 삼았는데 그를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주상이 물었다."천하가 위급해졌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도망쳤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주상이 말했다."정강은 서리와 이슬로 목욕을 하며 나와 더불어 종군했는데, 너는 도망을 하고서 이제 고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그리고 정위에게 하명하여, 코를 베어버리는 의형에 처했다.《태평어람》(太平御覽) 648, 《초한춘추》(楚漢春秋)
- 생년에 관하여 논란이 있는데, 만약 기원전 256년으로 칠 경우[11], 진나라가 6국을 완전하게 병합한 것이 기원전 221년이었으니 인생의 반 이상을 전국시대에서 보냈다는 얘기가 된다. 기원전 247년으로 칠 경우, 인생(52년)에서 반에 가까운(26년)을 전국시대에서 보낸 셈이 된다.
- 아버지인 유태공보다 불과 2년 늦게 죽었다. 영포(경포)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꽤 이른 나이에 죽은 것 같지만 대략 5~60대에 사망했다. 당대 기준으로는 사실상 천수를 누리다 죽은 셈이었다. 의학과 영양학이 발달한 현대의 평균 수명이 80세 정도인걸 감안하면 오히려 유태공이 어마어마하게 장수한 편이다.
- 마오쩌둥은 유방에 대해 "봉건 황제 중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 말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 "그는 천하에 하나를 얻으면 정책을 결정해야 옳았고, 둘째는 사람을 쓰는 것이 적합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마오는 항우를 비정치가로 여겼고, 유방은 고명한 정치가로 여겼다고 한다. #
- 한국 한자음 한정으로 이름이 이름이다 보니, 종종 섹드립을 치기도 한다.
- 자신의 아내들 가운데 척부인을 제일 아끼고 사랑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척부인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최후를 맞게 한 원인 제공자라고 볼 수 있다. 척부인의 소생인 유여의가 정통성이 떨어지는 일개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개인적인 사심과 여후에 대한 견제로 추측되는 이유로 멀쩡히 살아있는 적장자인 유영을 폐위한 뒤 유여의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여 군주로서 계승법을 필두로 한 국가의 율법을 훼손했고, 가정에서도 정실과 첩 사이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려 정실의 체면을 훼손하는 문제 행위를 하여, 척부인 모자는 여후의 원한을 사고 신하들도 반감을 가지면서 본인 사후 여후의 손에 도륙을 당할 때 황제로 즉위한 유영을 제외하면 아무도 두 모자를 구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2] 만일 율법과 당대 사회의 상식을 지키면서 여후를 견제하려 했다면 여씨 일족을 대거 숙청하거나, 여후의 최측근들을 없애 여후를 정치에서 배제하거나 권력 기반을 없애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타당성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척부인 모자가 죽게 된 배경은 여후의 지나친 잔혹함도 문제였으나 유방의 그릇된 결정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한고조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후손 농사도 잘 된 황제였다. 당장 아들인 문제 유항과 손자인 경제 유계는 '문경지치'로 중국사에서 유명한 명군들이었던데다가, 이들의 후손들 중 무제 유철은 당태종 이세민과 더불어 중원 제일의 정복군주였고, 광무제 유수와 소열제 유비는 나라가 망하자 다시 나라를 일으켜세워 사직을 이어나간 영웅들이었다.
무제 유철은 자신의 선조를 일패도지시킨 흉노를 상대로 위청과 곽거병이라는 명장을 보내 대대적으로 토벌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본격적인 서역 진출의 문을 열었으며, 광무제 유수는 전한이 멸망하자 왕망이 세운 신나라와 각종 군벌들을 격파하고 후한을 건국해 한 황실을 부흥시켰으며, 소열제 유비는 후한이 위문제 조비에게 멸망당하자 익주 지방에 후한의 유민들을 모아 촉한을 건국해 사직을 다시 지켜냈다. 그 덕분에 유씨 황실은 전한이 멸망한 뒤에도 후한과 촉한이 연이어 건국된 덕분에 27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국 대륙에서 사직을 보전했다. 전한-후한-촉한을 합치면 중국 대륙에서 470년이나 사직을 이어나갔는데, 그 뒤에도 방계 후손인 무제 유유가 동진을 멸하고 유송을 건국했기에 유씨 황실이 중국 대륙을 통치한 기간을 헤아리면 무려 500년 이상이나 된다.
- 워낙 파격적인 행적이 많았고, 질기게 살아남아 버틴 인물이라 호불호가 꽤 극단적으로 갈리는 탓에 이를 배경으로 하는 《초한지》 등에서는 라이벌인 항우나 부하인 한신 등에 비해 인기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지만, 최후의 승자로서 가지는 역사적인 입지와 비중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인기일 뿐, 당대의 인기는 유방이 가장 좋았다. 한신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군 지휘에서는 탁월했지만 인간 관계에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고, 항우는 무분별하게 학살을 자행한 인간백정에 성격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그에 비해 유방은 비교적 부하들도 잘 챙겨준 편이었고, 병사들로부터도 신망이 두터웠으며[13] 무엇보다 사람을 모으고 분위기를 휘어잡는 재능이 있어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골고루 인망이 높았고, 심지어 후초의 의제나 그 신하들도 유방을 항우의 대항마로 내세울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국시대 말기 ~ 진나라 시기의 대혼란을 잠재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으며, 현재 중국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기도 하다. 유방의 평가가 다소 낮게 보이는 이유는 소설 《초한지》 등의 영향으로 고조가 마치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것처럼 나온 탓이 크다.
- 유방은 외모에 대해서도 융준용안(隆準龍眼)[14], 용안미수염(容顔美鬚髥)과 같은 식으로 용과 연결이 자주되는 편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수염이 아주 그럴 듯해서 멋있었다고 한다. 또한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반점의 숫자야 비범한 인물에 대한 묘사에서 자주 나오는 특징 중에 하나고, 용의 얼굴을 닮았다지만 사람 얼굴을 보고 연상시키는 동물이야 모두 다른 법이다. 그래도 일단 동네 깡패치고는 풍채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년에 동네 술집 에이스였기도 하거니와 장가를 가고도 여자들을 상대로 썸을 잘 탔던 걸로 봐서는 실제로도 잘 생기고 언변도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 유방은 휘하의 부하를 설(薛, 산동선 등현)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 대나무 껍질로 만든 관)을 만들어 오게 하여 외출할 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며 다녔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넒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
- 유방이 남긴 시로는 <대풍가>와 <홍곡가> 총 2수가 전해지고 있다.大風起兮雲飛揚[15]큰바람 일어나자 구름이 흩날리누나.威加海內兮歸故鄉[16]온 세상에 위세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나니,安得猛士兮守四方[17]어떻게 하면 용맹한 군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는지.<대풍가>(大風歌)
<대풍가>는 유방이 영포(경포)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향 패현을 방문해 연회를 베풀면서 만든 노래이다. 진시황이 죽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자신도 거병했던 과거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해 전국에 자신의 위세를 떨친 뒤 고향에 금의환향한 현재, 앞으로는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불안감을 나타낸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홍곡가>는 적장자인 황태자 유영을 교체하려다가 주변의 반대에 부딪히자 이를 한탄하며 만든 노래라고 전해진다. 유영 대신 자신의 아들이자 서자인 유여의를 태자로 만들려던 척부인은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7.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고제(전한)/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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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전 232년생인 항우와 15살 차이라고 했고, 유방의 절친인 노관도 기원전 247년생인데 심지어 같은 날에 태어나 가족끼리 서로 매우 친했다는 언급이 있어 아마도 기원전 247년이 출생년이 맞을 듯하다. 하지만 기원전 256년으로 보기도 한다. 여담으로 기원전 247년생이라면 시황제가 즉위한 해 출생이고, 기원전 256년생이라면 진나라가 시황제의 증조부인 소양왕 치세였던 시절에 출생한 것으로 시황제와는 고작 3살 차이밖에 안 난다.[2] 키가 7척 8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척단위인 23cm로 계산하면 179cm가 나온다.[3] 사마천 이후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정치인이나 관료, 학자들도 대개 한 고조라고 통칭한다.[4] 중국사 역대 2천 2백년 동안에 유방을 존칭하여 고조 또는 한고조라 했지 그냥 고제라고 부른 적은 없으며 시호인 고황제를 약칭하여 고제라고 부르는 경향이 근래에 있는 것이다. 문제나 무제 등 다른 황제들의 시호를 약칭하는 방식과 맞추려고 굳이 고제라고 부르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나 다소 억지스럽고 생소하다. 대학자 사마천이 의미 없이 또는 착각해서 고조라고 호칭한 것이 아니다. 이후 중국사의 많은 왕조들이 있었고 다른 고조(高祖)들이 있었지만 중국사의 중시조 격인 의미를 담아 2천2백년 동안 유방을 특히 한고조라 호칭하는 것에는 한나라 태조 고황제라는 의미가 모두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5] 지금의 장쑤성 (江蘇省) 펑현(丰县, 병음: Fēng Xiàn)[6] 풍읍의 패현이라 '풍패'라고도 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전주의 별칭이 풍패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관이 전주이기 때문이었다.[7] 이라고는 해도, 이 시기는 이미 조조가 집권하여 위나라나 마찬가지였다.[8] 하지만 원래 옛날 사람들은 본명인 휘를 잘 사용하지 않았고 보통 자나 호로 불렀다. 당장 유방과 항우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 항우부터가 우(羽)는 휘가 아닌 자이며, 항우의 휘는 적(籍)이었다.[9] 이 발언에서 유래하여, 유방을 마상옹(馬上翁) 혹은 마상지내옹(馬上之乃翁)이라고도 한다. 말 위의 어르신, 의역하자면 말 좀 타본 형님 정도?[10] 더벅머리 놈 정도로 번역되기도 한다.[11] 여담으로 동주의 마지막 왕인 난왕이 같은 해에 사망했다.[12] 다만 척부인도 억울한 피해자는 아니다.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유방에게 유여의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밤새도록 울며 애걸복걸을 하는 등 그녀도 율법 및 사회적으로 질타를 받을 문제 행위를 당당히 했기 때문이다. 여후가 도를 넘은 잔인한 보복을 가했고 후대에도 평가를 깎아먹는 악행들을 저질러서 그렇지, 척부인의 경우 1차적인 원인은 고조 유방이 제공했고, 본인도 악의없는 무지함이 커 잘못에 비해 지나친 처형을 당한 것은 동정받을 부분이 맞지만, 국정을 농간한 요부 및 상전인 황후의 권리를 침해한 방자한 첩으로 비판받을 사항이었다.[13] 싸우다가 죽은 병사들을 하나하나 시체를 찾아서 고향에 보내주었을 정도니 따를 수밖에.[14] 여기서 유래하여 유방을 '패상융준'(沛上隆準) 또는 '한준'(漢準)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참고로 이 융준용안이라는 말은 훗날 조선의 건국자인 이성계와 이방원을 묘사할 때도 등장한다.[15] 대풍기혜운비양[16] 위가해내혜귀고향[17] 안득맹사혜수사방[18] 홍곡고비 일거천리[19] 우핵이취 횡절사해[20] 횡절사해 당가내하[21] 수유증격 상안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