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진나라 말기의 인물. 유태공의 첫아들이며 유중, 유방, 유교의 형이다.이름은 백중숙계에서 따온 유백(劉伯).
2. 상세
젊어서 요절하여[1][2] 큰 기록은 남기지 못했지만 그의 가족들은 영 좋지 않은(...) 의미에서 재밌는 기록을 남겼다.유방이 젊을 적 동네 한량 노릇을 할 때 사고를 치고 자기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패거리를 유백의 집에 끌고 온 적이 있었다. 당연히 유백의 마누라(유방의 형수)는 이런 꼴을 좋아하지 않았고, 국 한그릇 달라는 유방 무리한테 들으랍시고 솥바닥을 긁는 소리를 냈다. 유방 패거리는 화를 내면서 다 나가 버렸는데 유방이 나중에 보니 국이 있었던 것이다. 이 일로 유방은 큰 형수한테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 유백이 이 때 살아 있었는지는 불명.
이 때의 일을 유방은 가슴에 계속 품어뒀는지, 이후 권좌에 오르고서도 유백의 아들이자 자기 조카인 유신(劉信)에게는 작위를 주지 않았다.[3] 이에 부친인 유태공이 하도 부탁하니 작위를 주긴 했는데, 그 작위의 이름이 갱갈후(羹頡侯). "국 긁는 제후"(...)라는 뜻이니 어지간히도 뒤끝이 오래 간듯.
사망한 유백 본인은 한왕 5년(기원전 202년) 정월, 무애후(武哀侯)로 추봉됐고, 고후 8년(기원전 181년) 5월에 진평 등의 상소를 통해서 무애왕(武哀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다만 유방 생전엔 후로만 남겨두고 왕 호칭을 안 달아준 것을 보면 유방과 생전 사이가 안좋았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1] 결혼하고 자식도 보긴 했다.[2] 유방이 가족 잔치 중 한 말에 따르면 유태공은 큰 형인 유백은 언급하지 않고 둘째 형인 유중처럼 노력하지 않는다고 유방을 꾸중한 적이 있다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젊을 때 죽은 모양.[3] 한왕 신의 반란 진압에 종군하여 낭중장에 임명된 경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