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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5:59:02

영호남 지역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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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원
2.1. 통시적 관점2.2. 정치적 요인2.3. 경제적 갈등
2.3.1. 개요2.3.2. 1960년대 거점중심 경제개발2.3.3. 거점개발 방식의 변론2.3.4. 영남은 공업, 호남은 농업?2.3.5. 결국 사람이 하는 일2.3.6. 농업관련 보완 요소2.3.7. 결론
3. 갈등해소 또는 국토균형발전 노력4. 영남패권주의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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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권위주의의 재생산이든 기득권의 방어든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 반호남주의의 효과를 필요로 하는 체제와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이를 말하지 않고 사람들이 호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수백 번 여론조사하고, 영호남 간의 화합과 단결을 수천 번 강조해도,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지역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이데올로기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지역주의를 이데올로기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만들어진 현실 박상훈 저
요컨대 지역주의 문제와 관련해, 호남 출신의 경우 ‘사회구조적 차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체제’와 비판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반면, 비호남 출신의 경우 호남 사람의 타고난 부정적 특질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가해자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진국 1988, 236
사회적으로 유해하고 민주적 가치에 상응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모두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야 할 지역주의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반호남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는, 호남 출신에 대한 차별에 그 핵심이 있다. 반호남주의는 호남 출신에 대해, 거리감과 배제적 행위를 동반하면서 엘리트 충원과 경제 발전의 성과를 차별적으로 배분하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호남이 동질적 투표 행태를 통해 집단적 항의를 나타냈다고 해서 이를 같은 지역주의라고 일률화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
-만들어진 현실 박상훈 저
영남 지역과 호남 지역 간의 갈등. 다른 지역갈등이 대개 문화, 민족, 종교, 언어 등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과 달리 정치적 목적으로 생성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것 때문에 오히려 안심이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1] 지역감정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영호남 정도는 그냥 친구 수준이다.[2] 물론 그 경우들이야 대개는 수천 년을 따로 살다가 정치적 이유로 한 나라로 묶이면서 생긴 사단이지만 이 경우는 적어도 천년 이상을 한 나라, 한 민족으로 살아온 사람들 간의 문제라는 점에서 애초에 다른 케이스.

이 지역감정이 1970년대 이전에도 있었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데 주로 1950년대에도 호남에 대한 지역감정이 있었다는 증거로, 1959년 잡지 월간'야화'(夜話) 6월호에 조영암(趙靈巖)이라는 작가가 전라도 주민들을 가리켜 개땅쇠, 하와이, 인류가 아니다 라는 식으로 사적인 감정을 담은 글을 실은 사례를 든다. 이 하와이란 명칭에 대한 은 민들레씨처럼 떠돌지만 미군정이 우리나라에 가설한 직통전화의 지역별 호출 암호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 부산 미 제98군정 그룹을 플로리다, 광주 미 제101군정 그룹을 하와이로 한 데서 나왔다는 것인데, 유독 하와이만 기승을 떨쳤던 건 1. 조정래 작가의 소설 <한강>에서도 묘사된 이승만의 ‘하와이’ 야유와 2. 조영암의 필화가 한몫했을 수도 있다. 즉 이승만이 공석에서 최초 언급하고, 이후 작가 조영암이 잡지에 실어 해당 단어를 알린 덕분에 유독 하와이란 미군정 지역 호출명이 유명해졌다는 것이다.[4]

이 하와이란 명칭이 호남지역을 나타내는 말로 "공식석상에서 최초로 등장"한 건, 이승만이 백범을 열렬히 환영하며 강연을 요청하는 호남인들에 관한 소식을 들은 후, 젊은시절 외교독립노선을(이승만과 정한경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 위임통치 청원서’를 보냄) 지지하지 않았던 하와이 교포들에 빗대며 화를 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조정래는 소설 <한강>에서 주장한다. 8·15 해방 후 통일지향의 김구와 분단지향의 이승만은 대립했는데, 백범이 전국 순회강연에 나섰다. 큰 도시에서만 강연을 하곤 지나치려는데, 유난히 열렬한 호남에서는 “작은 군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와 겹겹이 기찻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김구는 예정에 없던 강연을 하고서야 기차가 움직일 지경”이었다. 이 보고를 다 받은 이승만이 기분이 나빠져 한 마디 내뱉은 것이 "하와이놈들 같으니라고!"었다는 것이다. 하와이에서 독립투사 박용만에게 미국의 위임통치를 중심내용으로 하는 외교노선을 주장하다 쓴맛을 본 이승만의 트라우마였으며, 경무대에서 궁중용어를 쓰던 시절이었던 만큼, 그 궁중용어의 대상(이승만)이 쓰는 표현 역시 그 주변 지도층 인사들에게 파장이 있었던 것이다.

영남과 호남간의 지역감정은 사실 실질적으로 그 지역 주민들의 살림살이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껏해야 정치 엘리트와 지역 토호 몇몇의 이해관계와만 결부되었을 뿐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의 실질적인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큰 지역감정은 수도권 vs 지방이다. 하지만 무려 35년 이상 대통령 등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영남의 케이스처럼 정치권력이 국가의 집권 세력의 다수로 장기간 국가 주도 개발을 해오면서 인구와 예산, 산업 등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지역 주민들에게도 상당히 미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엄청난 경제적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국가주도 개발시기에 영남 쪽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경제권력을 쥐게 된 재벌들이 수두룩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이 상당부분 남아 있다.[5][6] 사실 이처럼 과거부터 관가와 민가에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곳들의 인사권과 예산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지역에 따라 주민들조차 유불리를 겪을 수 있었고, 과거 사례라 통신과 촬영, 녹음기술 등이 발달한 현재와 달리 증거를 묻어버리기도 쉬웠는데 특히나 이승만, 박정희를 겪었던 한국에서는 정치권력이라는 건 거의 모든 분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전리품이었다.

요약하면 결국 호남에 대한 경제적 소외[7]와, 호남 소외의 원인을 여러가지 이유로 영남 집중에서 찾았던 것.[8][9] 양 지역 주민들의 발전 욕구가 정치적인 요구로 분출되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7대 대선에 폭발해서 지금까지 내려왔다는 분석이 다수설이며, 호남 소외에 대해선 세월이 흐르며 지역감정을 대놓고 조장하는 것을 자제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왔고, 21세기 들어서는 워낙 수도권 집중이 심해 영호남을 막론하고 지방 전반적인 경제가 침체, 하향평준화되고 있어서 대결구도도 다소 완화되어왔지만, 여전히 수출경제로 인한 입지적 조건과 압도적 인구수의 차이로 인해 영남과의 차이를 좁히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심지어 그 격차가 줄어든 편인 21세기에도 정권에 대한 불만이 지역감정으로 변질되어 더더욱 극복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대해선 여론을 주도하는 특정 세력이 있다는 점 등도 원인일 수 있다.[10] 그래서 양 지방 간에 혐오와 이에 대해 반작용이 나오면서 민생과는 관계 없는 갈등 구도가 생긴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과거 1970년대~199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영호남간 지역갈등은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어 더 이상 수습을 못할 정도로 사태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영화 《황산벌》 이나 《위험한 상견례》 등 각종 매체에서도 이와 관련된 블랙코미디를 볼 수 있다. 또한 최순실 게이트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최씨 무리들이 청와대 뉴미디어실을 통해 일베 같은 극우성향 사이트의 글들을 꾸준히 모니터링"확산을 지시"했으며, 재단 직원 채용에서 특정 지역 출신 사람 채용을 꺼렸다는 풍문들도 보도되면서, 무언가의 이득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갈등을 주도하는 특정 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어느 정도 현실로 입증되기도 하였다.

2. 기원


2.1. 통시적 관점

2.1.1. 삼국시대~고려 시대 등장설

이 지역감정이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존재했다고 여기는 설이다. 우선 삼국시대 이전과 이후만 봐도 마한변한+진한, 백제신라가 국가의 형태로 존재했다. 백제와 신라 역시 사이가 아주 좋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삼국시대의 국가를 각각 현대의 영호남관계에 대입할 수는 없다.[11]

백제의 경우 중심지가 초기에는 서울과 경기도인 위례성 일대, 천도 후에는 지금의 충청남도인 공주시, 부여군 일대였으며, 전라북도 일대[12] 역시 후기 왕가의 지역기반이었다.[13] 백제가 목지국을 타도한 뒤로는 백제가 목지국 대신 마한 연합의 맹주가 되었고, 이후로는 옛 마한 연합 일원의 모든 소국들을 중앙집권체제에 편제되며 호남전역이 백제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때문에 백제사에 대한 연고권을 현대의 경기도,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 꼭 어디 하나라고는 할 수 없다. 경기도(서울)는 아차산 유적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구려가 주둔했었고, 결국에 신라가 차지하였다. 충청도 동부지역 역시 신라와 꾸준히 경합을 벌였었다. 전라도는 전성기가 되어서야 완전히 통합하였다.[14]

백제부흥운동 같은 경우 한국과 일본의 기록을 모두 모아봐도 지금의 충남 및 전북지역이 중심이었고 나머지 지역 대부분은 별달리 큰 저항 없이 신라에 편입되었다. 통일신라신라방청해진을 구성했던 재당 신라인들도 실제 출신지는 호남 지역이 상당수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입당구법순례행기 등의 관련 기록에서도 이들이 백제 유민 정체성이나 원신라인, 즉 경상도 사람과 구분짓는 정체성을 가졌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자신들을 신라인으로 규정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당나라는 선대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걸 자랑으로 삼았기에 온갖 외교력과 협박을 통해 발해마저도 대외적으로 고구려 국호를 못쓰게 할 정도로 해당사항에 아주 민감했다. 그 당나라에서 백제 유민 정체성을 표출하면 우선은 신라부터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는데다가, 해당 사항에 대단히 민감한 당나라 당국한테 죽여달라고 호소하는 꼴밖에 안 됨을 모르는 단견이다.

후삼국시대후백제 같은 경우 충남 남부+전북 북부 일부 외의 호남은 백제 유민 의식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견훤이 거병 초반 892년에 무진주(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할 때는 아직 백제의 이름을 쓰지 못했고 900년에 완산주(전주시)로 옮긴 뒤부터 후백제 왕에 올랐던 건, 그전까지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없었을 뿐더러 견훤 자신이 우선은 대대로 신라인이었던지라 백제 유민의식을 이용하는데 상당한 결단을 필요로 했음을 더 눈여겨봐야 한다.[15] 물론 나주시를 중심으로 한 전남 서남부, 즉 옛 영산강 일대는 오히려 후백제에 동조하기는커녕 일찍부터 바다 건너 고려의 편이 되어 후삼국시대 내내 후백제의 후방을 노리는 비수가 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의 지역단위를 현대의 행정구역 및 지역감정으로 잘못 끌어오고 있다는 반증의 예로 볼 수 있겠다.

고려훈요 10조에서 "차현 이남의 공주강(금강) 밖의 사람들을 벼슬자리에 두지 말아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고려 때에도 호남 지역을 차별했다고 주장이 있었고, 실제로 과거에선 다수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해 '차현 이남의 금강 밖'이라는 곳은 즉 충남 및 전북 일대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기록된 공주강 밖의 지역은 과거 백제와 후백제의 중심지였던 위 부분을 가리켰을 것이며, 왕건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나주 일대의 전남지역은 오히려 해당이 없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중요한 점은 실제로 왕건 시대 때 오히려 전라도 출신의 사람들을 높은 관직에 많이 등용했단 거다. 왕건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혜종나주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인 장화왕후나주의 호족 가문의 딸이었다. 전남 순천 출신인 박영규는 고려에 귀부하고는 좌승 벼슬을 받았고, 나중에는 삼중대광에 올랐으며[16], 정종의 장인이 되어 두 딸인 문공왕후문성왕후는 왕후에 봉해졌다. 그리고 후대 왕들도 호남 출신의 사람들을 많이 등용했다. 그래서 훈요 10조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설, 실제로 차별했던 지역은 궁예의 지지기반이자 왕건을 괴롭혔던 호족 가문의 사람들이 많이 살던 청주 지역이었다는 설, 또는 당시의 해양도에 속했던 전라도 남부지역을 제외한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와 그 근방 지역인 전라도 북부와 금강이남의 충청도 지역이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신라 같은 경우, 경주에서 출발하여 경북 일대부터 제패한 후 경남과 경기도로 진출하였기에 역시 신라와 인연이 깊다곤 할 수 있으나 마찬가지로 경상도를 신라와 무작정 동일시 할 순 없다. 우선 경남은 신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경쟁했던 가야의 텃밭이었고, 대가야 같은 경우 신라에게 망하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백제와 깊은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문물 또한 백제로부터 많이 받아들였다.

562년에 경남 전체를 통합했다지만 그 이후에도 의자왕 시절까지 경남 지역은 충북 지역과 함께 백제와 계속 경합했었고, 백제의 신라 영역 탈취는 충북보다 오히려 경남에서 더욱 성공적이었다. 한편 후삼국 시절에는 오히려 후백제가 경상도에 고려보다 더 큰 영역을 항시 확보하고 있었던 것도 유념할 사실이다. 이후 고려가 진출하는 과정에서 경북 북부가 주로 고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었고, 훗날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도 경남북 일대에서는 외려 신라부흥군을 진압하려는 근왕군이 자발적으로 조직될 정도로 고려 정체성이 부각된다. 그러므로, 역시 경상도 또한 신라와 연관이 깊지만 그렇다고 경상도 전체를 신라와 바로 동일시하는 건 바른 인식이 아니라는 게 되겠다.[1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라도와 백제, 경상도와 신라의 강한 연계성을 부정하는 것 역시 위 못지 않게 잘못된 인식이다. 마한의 일원으로 출발한 백제는 호남 전 영역에 직접 지배를 관철한 최초의 국가였고 제 2의 수도 익산과 후백제의 수도 전주가 현 전라도에 위치해 있다. 신라와 경상도의 연계성은 더욱 강한데 신라의 전신 사로국은 아예 경북 경주에서 시작하였으며 현재 경상도를 타 지역과 구분하는 자연경계인 소백산맥은 신라의 주 방어선이자 오랜 국경이었다. 따라서 전라도=백제, 경상도=신라로 등치시키는 사고도 잘못되었지만 역으로 이들 지역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 역시 옳다고는 할 수 없다.[18]

그러나 설령 전라도와 경상도의 백제, 신라와의 유착성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현재의 영호남 지역갈등을 천 년도 훨씬 지난 삼국시대로 소급할 수 없는 노릇이다. 6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영호남의 지역감정에 대한 근거 자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현재의 영호남 지역갈등이 나제관계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증명한다. 물론 지역감정이 극심한 영호남인들이 간혹 서로를 '백제놈', '신라놈' 하며 비하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이는 현재의 지역 감정을 고대사에 소급해 보려는 시각에서 기인한 것일 뿐 1400년 전의 악감정이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도 유지되온 것이 아니다.

2.1.2. 조선 시대 등장설

파일:택리지.jpg
全羅道則專尙狡險易動以非 "전라도는 오로지 간사하고 교활하여 나쁜일에 쉽게 움직인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보관 택리지

한편 조선 시대에도 택리지, 동국여지승람, 임관정요 등 당시 기록을 근거로 이때에도 호남 지역을 차별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관찬 지리서로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에서는 이런 평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택리지의 경우에는 지역에 대한 평판이 기록되어있는데, 그런 기록들을 다 따져보자면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나쁘게 평가한 기록들이 있으니 모든 지역들이 다 차별을 당한 셈이 된다.

조선시대의 문인 황상은 이중환의 택리지를 반박하면서, "세상에서는 호남을 속이고 경박하다고 하지만"이라고 표현하여, 선입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중환은 남인 강경파로 정치색이 강한 인물로서 처가인 목씨 일가와 함께 남인과 협조적이었던 소론 강경파에 끼어들어간 탓에, 목호룡 사건과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몰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이중환이 전라도와 평안도를 가보지는 못했다면서 풍수적으로 비판한건 객관성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

택리지는 정치색도 강해서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서인지 왕실의 관향인 전주는 한양과 다를 바가 없고, 기운이 맑다고 극찬하는 등 택리지는 이런저런 정치적 계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택리지는 당시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탓에 많은 이본(異本)들이 나왔는데 필사할 때마다 본인 마음에 안들면 글을 바꾸는 경우도 많아서 택리지 이본만 200여 종이 넘는다. 사실 이중환이 직접 쓴 택리지 원본과 수정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영조 치세에 벼슬을 지낸 문신 성대중[19]이 쓴 <청성잡기>에는 사화로 인해 화를 입어 죽게 된 사대부 가문 여인이 (특정 붕당을 위해 죽으니) 영광스러운 일이라 말하는 대목까지 묘사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런 붕당의 폐해로 인해 공직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이중환의 사견이 들어갔을 가능성 역시 감안하고 걸러서 봐야 하는 부분이다.

또한 조선시대때는 영남학파가 많은 동인(북인, 남인)에도 호남 사람들이 많았으며, 일례로 정여립의 난 당시 호남 유림과 영남 유림들이 1000여 명이 엮여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은 선비들이 큰 화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우에는 선조광해군 시절에 자기네 지역 출신 사림들이 조정에서 주류 세력으로 형성해서 권세를 누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이괄의 난으로 인해 경상도나 전라도 역시 오래도록 벼슬길이 막혔다. 그 대신 그 자리를 경기와 충청 출신 사림들이 주류 세력이 되어서 관직을 독차지했다. 물론 정여립의 난이인좌의 난반역향에 찍혀서 조정에 들어오지 못한 사례가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광해군 시절의 빈번했던 옥사와 인조반정와 이괄의 난때 전례가 없는 숙청 때문이었으며, 이때부터 영남과 호남 출신의 관리 수는 줄게 되었다.[20] 이러한 역사적 경험으로 영호남 백성들간 사이는 오히려 친한 편이었고, 또한 조선시대에 지역 비하 기록은 풍수지리나 설담 등에 근거였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으며, 또한 이런 지역적 편견은 책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기에 글을 읽을 줄 알았던 지배층 및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생각을 하시면 된다.


2.1.3. 구한말~일제강점기 등장설

파일:이진숙팔도인.jpg

조선 시대~일제강점기 때에는 기호 지방평안도 지역과의 대립이 두드러졌다. 오죽하면 친일파인 윤치호기호 지방 출신의 독립운동가들과 평안도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대립하는 것을 보면서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도 조선시대부터 조정에서 차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더 큰 갈등은 신분 갈등으로, 형평운동에서 보듯 백정 같은 사람에 대한 차별 철폐 운동이 있었다. 평안도의 지역감정도 이 지역이 뒤늦게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과거에 많이 급제해도 한양 명문가에 밀리는 것과 관련 있어 윤치호도 명문가가 평안도 사위를 받아들인다는 주변의 반발이 있었다고 언급한다. 과거제도 자체가 명문가가 승진하기 쉬운 구조라 원 간섭기 이후 외침으로 전통적 명문가가 뿌리 뽑힌 평안도는 높은 자리로는 출세가 힘들었던 것이다. 함석헌도 상놈이 많은 것을 언급한다. 기호파, 서북파의 이야기도 기호지방에 많은 양반과 평안도에 많은 상놈이라는 계급을 중심으로 뭉친 것에 가까웠다. 신분이 비슷하다면 서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구한말 쯤 이미 제도적으로 문벌 타파 등의 움직임이 일어나 이미 갑신정변의 주도자 중 서광범 같은 평양 출신과 한양 권세가 출신인 홍영식이 같이 들어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서민끼리는 경평전 같은 두 도시만의 축구 대회를 벌이며 민족 화합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는 진짜로 서울(당시 경성)과 평양이 한반도에서 각각 1, 2등의 큰 규모의 도시였으므로 양반 상놈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민족 정기를 불어넣기 위해 경기를 할 따름이지 무슨 적대적인 두 도시를 화합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런 북쪽의 지방들은 양반이 데리고 오는 노비도 적었기에 전반적으로 조선 전역의 평균적인 신분의 높고낮음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한 전라도, 경상도라는 지역명칭은 고려 때에 이루어졌고 조선,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언급할 지역감정은 기호 vs 서북 대립이 주축이었고, 그나마도 신분 갈등의 일환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서로의 신분 차도 없던 호남과 영남의 대립은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편이다.

한편 서울대 심리학과 이진숙 교수가 "8도의 지역성에 대한 "선입견"을 연구주제로 한 1950년대 통계 자료에서도 전라도를 간사하다고 꼽는 선입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진숙의 조사에서는 표본집단이 편의표본으로 이는 무작위 추출도 아니고, 표본집단이 모집단(대한민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심지어 이진숙 조사 대상의 절반은 군인이다. 편의표본의 한 예가 1948년,1953년 킨제이 보고서이다. 물론 그 전에도 여러차례 오류는 증명됐고, 1990년 미국 인구조사국과 1991년 시카고 대학 조사에서도 킨제이 보고서 결과는 허구로 증명되었고, 단지 성이라는 영역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 의미를 둔다고 했다.

그래도 킨제이 보고서는 긍정적인 도전이라는 평가라도 받지만 이진숙의 조사는 지역감정 부추기기 외 다른 의미는 없다. 그리고 이진숙 연구 자체가 이중환의 택리지 내용을 "선입관념"으로 가정하고 이를 주제로 다루는 연구이다. 조선시대 당시로 치면 정치색이 강했고 이로 인해 몰락한 이중환의 개인적인 의견이 선입관념으로 포장된 것도 문제가 있다. 택리지 저자 이중환은 몰락한 남인으로 같은 남인 지역인 경상도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를 하였으므로 경상도에 대해서는 질문 자체 수위가 낮기도 했다.

특히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이진숙은 미 공군 산하 인적자원연구소(HRRI)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심리전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전담팀에 협력한 한국인 25인 명단에 들어있고, 미8군 심리전과와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에서 근무했던 사람이다. 해방 후 미 군정에 대한 반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영구적 남북분단 고착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와 좌우대립의 격화 속에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그리고 이어지는 한국전쟁과 휴전 후, 친미 우익 편향의 분위기 속에 군사정권이 집권하게 되는 이런 혼돈의 시대에 미군 심리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이 행한 조사 내용을 순수한 학문적 목적으로만 보기에는 의심스럽다.

2.2. 정치적 요인


2.2.1. 박정희 정부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의 선거구별 개표 결과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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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당시 대선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가 10월 9일 경상도를 방문한 당시, 찬조연설자는 "경상도 사람 좀 대통령으로 뽑아보자"며 지지를 호소했다.[21] 1963년 9월 10일에는 대구고등보통학교 수성천변 유세에서 찬조연설로 나온 이효상이 '이 고장은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건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하나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의 임금님으로 모시자"라고 발언했다.[22]

그러나 대선 결과를 보면, 이러한 발언들은 "우리 지역도 대통령 한 번 내봅시다"는 식에 불과할 뿐 지역감정을 본격적으로 유발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영남에서 60% 내외의 비율로 박정희 후보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호남에서도 박정희 후보의 지지가 50% 이상 나왔으며, 제주 지역에서는 70%가 넘는 주민들이 박정희 후보에게 투표했다. 해당 지역들은 이협우, 김종원 같이 반공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학살을 저지른 악인들로 인해 해당 지역들이 이념 문제로 한 차례씩 큰 피해를 입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5대 대선 당시 박정희의 과거 남로당 전력을 문제 삼아 매카시즘 공격을 하는 윤보선 후보를 거부한 것에 가깝다.[23]

1964년부터는 호남소외론이 제기되어 이는 민주당계 정당에 있어서 하나의 당론이 되었다. 한편 이것은 지역감정 조장 따위가 아니라, 그 당시 정관계인사와 함께 중공업 중심 수출경제로 체질개선을 하는 중에 기타 정치경제적 자원배분에 있어 호남이 소외되었기에 "호남도 좀 챙겨달라"는 발언에 가깝다는 시각도 있다.[24] 일례로,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 순회시 대부분 동승하며 신뢰받았던 나주 출신 공군참모총장 장지량이 고속도로 건설 양상을 보고 "각하, 국토가 짝발입니다."라고 면전에서 대담하게 발언한 부분에 대해 박 대통령이 웃으면서 "걱정 말라."고 답한 것도 이 무렵이다.

제한된 재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분배하면서 생긴 불균형 개발로 고속도로 인프라가 영남에 더 치우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25] 참고로, 현재 고속도로의 밀도가 제일 낮은 지방은 강원도경북 북부이다. 전국 고속도로 지도를 보면 그쪽만 휑한 것을 볼 수 있다. 영남권 고속도로를 먼저 뚫은건 서울-부산-일본을 잇는 수출 경제가 한국의 경제 개발과 산업 역량 발전에 있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위시한 신민당은 '호남 푸대접론'으로 공화당 정부를 공격한다. 당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며 점차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으나, 영농지역인 호남권이 기간 산업들이 더 많은 영남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 성장의 과실을 많이 얻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호남 푸대접론은 정부와 국민을 이간시키는 행위"(경향신문, 1967. 4. 27)라며 "이 나라가 잘되려면 여당도 정신 차려야 하지만 우리나라 야당이 그들의 머리를 근대화해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1969년 10월 13일 경향신문에, 김대중을 비롯한 신민당 의원 6명이 광주 유세에서 표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는 연설을 한 일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는 지역감정 호소가 타 지역을 저격하는 최초의 사례라 볼 수 있다. 이 보도는 당시 자의반 타의반 친여성향을 띨수밖에 없었던 경향신문의 상황[26]과, 1969년 9월에 3선 개헌이 이효상 국회의장의 청와대 직송으로 확정되는 대형사고[27][28]으로 보아 (3선개헌안 관련해 죄를 지은) 여권이 7대 대선을 염두에 두고 마타도어성 물타기를 한걸로 의심되는 정황이 있지만, 그 한달간에 어떤 정치적 공작이 있었는지 연결고리가 되는 물증이 없어 현재는 묻으려고 터뜨린다는 식의 음모론이란 반론이 건재하다. 문제의 경향신문 기사에 난 의원 6인(김대중 포함)의 발언은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는데, DJ의 경우는 대통령 선거까지 출마했던 고로 연설문 및 저서에 지역주의 관련 직접 말한 내용이 남아있으니, 한번 참고해보도록 하자.
진주민란이 일어났을 때 이에 호응하여 봉기를 일으킨 곳도 호남이었습니다. 동학혁명과 진주민란은 영호남 합작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자유당 치하에서 반독재 투쟁을 가장 강력하게 전개했던 곳도 경상도와 전라도였습니다.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하자는 데에 전라도와 경상도가 따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시절만 해도 호남 사람이 부산이나 대구나 경북 상주의 산골에서까지 국회의원에 당당히 당선되었습니다. 경상도 사람이 목포나 전주에서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 나는 그 당시 목포에 살면서 경상도 진주 출신의 후보를 지지해서 당선시켰는데, 그때 누구도 그에 대해서 정치적, 인간적 비판은 할망정 경상도 사람이니 안 되겠다고 배척하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화목한 관계를 이간시키고 마침내는 양 지역의 대결 감정을 제2의 천성같이 뿌리박아 놓은 것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의한 군사통치의 악랄한 공작정치였습니다. // 1963년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를 상대로 한 대통령 선거에서 겨우 15만 표 차이로 이겼습니다. 이때 박정희 후보는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 등지에서 모두 졌습니다. 그가 이긴 지역은 호남과 영남뿐이었습니다. 그는 호남에서 35만표를 얻었습니다. 만일 그가 호남에서 이만큼의 득표를 하지 못했다면 큰 표 차이로 낙선했을 것입니다. // 그러나 박정희 씨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호남 차별부터 시작했습니다. 영남민에게 우월감을 부추기고 호남인에게는 열등감을 조장했습니다. TV[* 드라마에 서남방언을 쓰는 범죄자가, 인정많고 의리있는 영남 사나이가 등장하는 식이다. 배우 변희봉도 젊었을 적엔 이런 호남 출신 범죄자로 출연한 적 있다.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 즈음 방영된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 (갑자기) 영남방언을 쓰는 밉쌀맞은 중년사내 배역이 등장하는걸 보고, 그해 가을 호남선전라선을 통과하는 무궁화호 객차 내부가 새마을호에 준하는 수준으로 달라졌다는 관광객들의 증언이 나오며 사람들이 비로소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했다고 한다.[29], 라디오, 모든 언론 매체가 이를 위해 동원되었습니다. // 30년에 걸친 군사 정권의 호남 차별 정책에 대한 사례를 드는 일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철저한 인사 차별이었습니다. 군부는 물론 관청, 국영기업 그리고 일반 대기업까지 호남 사람은 채용과 승진과 직책에서 철저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중견 간부 자리마저 제대로 오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 체면치레로라도 호남 사람을 지도적 위치로 승진시키려 해도 이에 해당하는 중간 간부 가운데 호남인이 없어서 승진을 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 호남 사람은 마치 천형의 죄인같이 기피당하고 차별되었습니다. 호남 사람이 형식적이나마 요직에 등용되었다면 그는 이미 권력 아래 철저한 변절과 복종의 과정을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일제가 우리를 차별한 것도 민족 차별이라 했지 민족 감정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언어를 바르게 써야 해결의 실마리가 나옵니다. 지역 감정이 아니라 지역 차별입니다.
김대중,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165쪽

1971년제7대 대통령 선거는 그야말로 양 지방간에 피 터지는 설전이었다. 앞서 말한 발언 외에도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도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 그러면 1백24만표 이긴다'(중앙 1971. 4. 1), '호남 사람이 받은 푸대접은 1천 2백년전부터이다. 서울가면 구두닦이나 식모는 모두 전라도 사람이며[30], 남산에서 돌을 던져 차가 맞으면 경상도요, 사람이 맞으면 전라도다'(조선, 1971. 4. 1),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나도 경상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서민이다'(조선, 1971. 4. 21), '경상도 정권하에 전라도는 푸대접 받을 수 밖에 없다'(동아 1971.4.30) 등이 있다. 이렇게 양쪽에서 지역감정에 호소한 자극적인발언이 언론을 타고 여과 없이 나왔다.

다만 이와 별개로 박정희 정부 때 치른 총선에선 의외로 영남과 호남의 결과는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실제로 전라도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가 경상도에서 신민당 후보가 제법 당선되었을 정도였으며, 부산직할시는 아예 신민당의 텃밭이기까지 했다.

2.2.2. 전두환 정부

전두환 정부, 즉 신군부의 5.18 민주화운동 때의 폭동적 시위진압으로 인해 호남권에서 반경상도 감정이 심해졌다는 의견이다. 즉, 북부경남과 TK를 기반으로 한 전두환 정부가 광주광역시에서 많은 시민을 학살했고 이로 인해 호남의 반경상도 감정에 더해 민주화 운동의 거두에 있었던 김대중-김영삼이 있던 민주당계 정당, 즉 신한민주당과 이들의 후신인 통일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강해졌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이미 공개 석상에서 "광주의 폭동을 진압했다"고 주장하는 뚜렷한 공공의 적이 나타난 상황이기 때문에, 주요 수뇌부의 출신지역까지 미워한다고 보는건 다소 무리가 있으며, 실제로 광주 시민들이 단체활동으로 진력했던 사안도, 진상 규명(과잉진압 및 학살) 책임자 처벌이었다.

다행히 점차 정치인들이 나서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언급하며 직접 참가하여 조문을 하고 있고 당시 사상자 유가족들에게 보상을 하고 있지만, 당시의 악몽과 상처가 아무는 것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전두환 정부 때 치른 총선에서도 영남과 호남간 정당 득표율의 차이가 의외로 나지 않았다.

2.2.3. 제13대 대선~제13대 총선

영호남 지역갈등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 현재까지도 영향력이 남아있다.

정치 평론가들은 87년 체제를 자주 현대 대한민국 정치를 설명할 때 사용한다. 1987년 체제의 기본은 소선거구제 국회의원 제도와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는데, 이에 대권 유력 주자였던 3김과 1노는 각자의 셈법으로 공천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지역정당 체제를 그리며 합의하였다. 결국, 그 이전부터 지역구도가 87년 체제 이전부터 있어왔고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에 1987년 체제가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양 김(김대중, 김영삼)이 당권[31] 문제를 놓고 후보 단일화 협상 최종 합의에 실패, 김대중이 탈당해 대선 직전에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면서, 김영삼은 통일민주당으로,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져서 이 때를 계기로 서로간의 갈등으로 격화되었다. 특히 김대중은 4자필승론이라는 지역주의에 근거하는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김영삼 vs 김대중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갈등이 심해졌다. 결국 당시 대선에서 광주에서 김영삼보다 노태우의 표가 더 많이 나왔다고 한다. 결국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김영삼 김대중 서로가 씻을수 없는 앙금을 이 대선에서 남기고 말았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 TK(대구/경북)에 지역 기반을 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는 대구에서 70.7%, 경북에서 66.4%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PK(부산/경남)에 지역을 기반을 뒀던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는 노태우 후보 득표율의 절반 수준에 해당하는 지지를 얻었으며 호남에 지역 기반을 뒀던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는 대구/경북 지역에서 3%에도 못 미치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반대로 호남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압도적 지지를 얻었는데 광주직할시 득표율이 무려 94.4%에 이르렀다. 이 당시 노태우 후보의 득표율은 4.8%, 김영삼 후보의 지지율은 0.5%에 불과했다. 전남과 전북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서 김대중 후보가 각각 90.3%(전남), 83.5%(전북)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이같은 지지 성향은 대선 후 4개월 후에 치러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TK에 지역기반을 둔 민주정의당는 이 지역에서 29석 중 25석을 얻었으며, PK에 지역기반을 뒀던 통일민주당(대표 김영삼)은 이 지역에서 37석 중 23석을 얻었다. 반면에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평화민주당(대표 김대중)은 이 지역에서 37석 중 36석을 얻었다.[32] 서울에서 평화민주당이 상대적으로 많은 의석을 차지한 것도 서울에 호남 출신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데 기인한 것이었다.[33]

2.2.4. 1990년대

이후 1990년, 선거 구도의 한계를 절감한 김영삼이 김동영의 의견을 수용해 민주정의당과 3당 합당에 합류,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하면서 민주화 진영을 포용했다는 명분까지 더해진 신 여권은, 점차 노골적으로 정치공학적인 지역대립 구도를 조장하게 되었다. 당선된 김영삼이 당초 의도했던 민주화 외에도 지역감정 완화를 위해 나름 정치적 배려를 하며 노력했지만, 아직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3당 합당의 결과로 4당 4지역의 구도에서 전라도와 반 전라도의 구도가 형성되었고 이 지형을 적극적으로 확대재생산하기 위해서 여권에서 일으킨 것이 초원복집 사건이다. 결국, 한국에서의 지역감정은 그 시작이 무엇이든지 간에 정치적 술수에 의하여 크게 증폭된 것이 사실이다.

당장 1992년 대선에서 호남은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90% 이상 지지했고, 영남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에게 최소 60% 이상[34][35] 표를 주는 등, 영호남의 인식차이가 확연히 드러났으며, 이후 각종 인재 등용 및 인사 정책과 예산 배정 및 프로젝트 수주까지 영남의 강세가 이어지면서 호남에서 느끼는 박탈감은 아직 남아있었다.[36]

그리고 이어진 1997년 15대 대선에서도 전라도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90% 이상 투표했으며, 전남, 광주는 97%의 몰표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영남권에서는 대략 10% 정도의 표를 얻었다.[37] 반대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경우 영남권에서는 약 50 ~ 70%[38]정도의 표를 주었다.[39][40] 참고로 이회창은 경상도 출신이 아닌 충청도 출신이었지만 민정계의 영향이 남아있던 한나라당이라는 점에 힘입어 530만 표 이상의 지지를 영남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41] 어차피 이회창-이인제 두 후보 모두 한나라당 계열에서 나왔으니 영남권 유권자들은 두 명 합쳐 80 ~ 85%의 표를 준 셈이다.

2.2.5. 2000년대

16대 대선 때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42]된 이후 부울경에서 민주당의 득표율이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고, 20대 총선에 이르러 민주당이 호남보다 부울경에서 의석을 더 얻게 되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그렇게 됨으로써 부울경 한정으로는 지역감정이 약화되고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다만, 호남 출신 후보가 나와도 그 정도의 지지를 보여줄 지는 미지수인데,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호남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승리를 거둬서[43]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정동영후보가 나왔는데 이명박에 무려 531만표차의 패배를 당했으나 호남지역에서는 그가 80%초반의 득표율을 기록하고 이명박은 호남지역에서 9%내외의 득표를 기록함으로서 지역갈등이 표면적으로 조금이나마 완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영남은 부울경을 시작으로 지역감정이 약화되는 것이 보이기라도 하지만, 호남지역은 90%넘는 대통합민주신당 지지율을 보임으로써 지역주의가 있는 것을 옅볼 수 있다.

2.2.6. 2010년대

제19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홍준표가 영남에서 높은 지지율이 보이자[44] 이명박근혜에게 속고 또 밀어준다고 말한다. 이는 호남에서 매우 낮은 홍준표 지지율로 보여주고 있다.[45] 홍준표는 호남보다는 영남 위주로 선거운동을 하였다. 언론에서 이런 보도가 나가자 홍준표도 결국 나경원을 내려보내 호남 지역 유세를 하였으며, 나경원이 호남 지역 유세를 하기 전부터 홍준표의 부인이 호남을 돌면서 이미 선거 운동을 하고 있었다.[46][47]

안철수가 없었다면 18대 대선처럼 박근혜vs문재인 = 영남vs호남 투표대결이 되었을 거라는 말도 나올 정도다.# 댓글을 보면 홍준표가 안철수를 누르고 2위에 오르자 영남을 욕하고 있다.

대선 개표가 끝나고, 호남은 문재인이 압도적인 1위를 했고, 부울경 지역 중 부산과 울산은 최소 십만 표 이상 문재인이 낙승했고, 경남에서는 만여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석패함으로써 부울경에서 이겼다. 선거 공식을 뒤엎는 혁명적인 변화다. 대경지역에서 홍준표가 압도적인 차이로 1위로 이긴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결국 16대 대선부터 시작된 부울경 변화의 움직임이 19대 총선, 18대 대선, 20대 총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거처 19대 대선에서 엄청나게 변하였다는 것이 증명됐다. 최소한 이번 대선에서 부울경의 민심은 다시 중간으로 모였다고 증명할 수 있다. 호남포위구도에서 TK고립구도로 반전되고 있다.[48]

하지만 2018년 후반기 이후 영남권을 중심으로 보수세가 강해지고 호남권은 민주세가 강해지면서 다시 영호남 지역주의가 부활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전과 다른 점은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 수도권의 민주당 지지세가 예전보다 훨씬 강하고 충청, 강원도 수도권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영호남 지역갈등이 다시 심해졌으며, 강원+영남(국민의힘) vs 수도권+호남+충청(더불어민주당)이란 동서 구도가 다시 벌어졌다. 다만 강원도는 춘천시,원주시란 교두보를 마련했고, 부울경인 경우는 낙동강 벨트를 어느정도 보전을 함과 동시에 이전에 비해 지역감정은 상당히 사라지고 수도권,충청권과 마찬가지로 세대구도로 이동했다는 평가가 주될 정도로 많이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한 성과를 남겼긴 하다.[49]

2.2.7. 2020년대

파일:20대 대선_지역별_투표결과_2.svg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선거결과이다. 호남권엔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90% 이상몰표를 줬고 영남권에선 국민의힘 후보에게 60-70% 수준으로 상당한 표를 줬다.[50][51]
2021년 재보궐 선거, 특히 서울특별시장 선거는 기존의 지역감정에 기반한 선거가 아닌 세대별 투표 양상을 보여 주목받았다. #[52] 이후 2022년 1월, 광주 지역의 20대 남성 사이에서 윤석열 후보가 이재명 후보를 18.2%p 차로 이기는 여론조사가 나와 호남 지역에서 세대별 투표 양상이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있었다.

22대 총선에서는 4년 전 총선과 비슷하게 동서구도가 이어졌으며, 특히 대구경북과 호남권은 직전 선거에 비해서도 주류 정당의 득표율이 올라가는 등의 극심한 격차를 보였다.다만 부울경인 경우는 지난 총선에 비해서도 더불어민주당이 더 선전함으로써 약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2.3. 경제적 갈등

2.3.1. 개요

호남영남의 대립이 호남쪽의 경제적 차별로 인해 일어났다고 여기는 견해이다.

이에 대해선 1960-70년대 당시 한국의 주된 수출 라인은 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태평양 라인이라는 점, 이로 인해 일본과 가깝고, 미국으로 나가기 쉽고, 들어오기도 편한 남동임해지역에 중화학공업이 집중된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점이란 반론도 있다.

전통적으로 전라도 지역은 곡창지대로서 농업이 발전하였고, 특히 을 집중 생산하는 한반도의 밥줄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농사 외에도 서해 남단과 남해를 낀 해안에서 어업이 발전하여 해산물도 풍부했다. 이 때문에 후삼국시대후백제가 국토가 훨씬 넓은 고려를 상대로 군사/경제적으로 우세를 점하며 싸울 수 있었으며[53] 임진왜란 당시 전 국토가 왜군에게 유린당하면서도 방어하면서 역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순신, 권율, 김시민 등 명장들의 으로 최대 곡창지대 전라도를 지켜내면서 보급이 이어졌기 때문.

그래서 궁핍했던 일제강점기 시기에 다른 지역 주민들은 만주로 많이 떠났지만[54], 호남의 경우 인구유출이 별로 없었다는 말도 있다. 호남은 곡창지대였던 연유도 있지만, 당시 호남의 대지주이자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준호가 전남 영암에서 900정보(270만 평) 규모로[55] 간척사업을 하여 세운 학파농장에서 5,000명이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을 만큼, 굳이 만주로 가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방안(대안)을 마련해준 공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간척 사업기간 및 그 이후에도 만주로의 인구유출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학파농장이 해준 것.[56]

하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때부터 더 많은 새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공업단지 개발이 경부고속도로 라인을 타고 영남 지역에 집중되고, 호남 지역은 쌀농사에 묶이면서 경제개발에서 밀리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영호남간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일자리를 찾아 인구이동이 발생하며 가속화된 것.

2.3.2. 1960년대 거점중심 경제개발

1960년대에 들어 경부선과 1970년에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해서 중공업 공단을 집중 유치, 발전하였는데, 그 연선에 속한 수도권이나 경북 남부와 경남 동부는 인구가 많이 늘어나는데 반해, 그 연선이거나 부근에 있지도 않은 지역은 농업 이외에는 뚜렷한 산업자원 없이 쇠퇴를 거듭하게 되고, 많은 지방 사람들이 돈 벌러 수도권, 영남의 대도시나 공업도시로 떠나는 인구 유출까지 발생하면서 쇠퇴가 가속화되었는데, 호남 또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이 유출되었다.[57] 이를 인구수로 비교해보면, 해방 직후 호남 대 영남 인구가 약 510만명 대 약 630만명으로 대략 1:1.2 정도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본격적인 영남 공업화가 시작된 후인 1970년대에는 호남 약 650만명 대 영남 약 1000만명으로 1:1.6 수준으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재 2010년대에 들어서는 호남은 전국에서도 유례없이 오히려 인구가 줄어서 약 500만, 영남은 약 1300만으로 영남인구가 호남인구의 2배를 넘어 3배에 가까워지고 있다.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의 산업박람회 전시현장이나[58], 개발과정의 우선순위가 밀린 지역들의 언론을 통해 강한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했는데, 호남 지역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다만 이를 무조건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의 결과라 간주하는 건 무리한 측면도 있다. 당시 경제개발은 거점중심 개발방식이었다. 즉 입지와 여건이 유리한 것을 먼저 개발하고 추후 확대하는 식이다.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과정은, 원조와 차관을 들여 산업을 일으켜 수출을 증대해 외화를 벌고, 이 돈으로 산업을 일으키는 과정의 반복이었는데, 전쟁으로 대부분의 기반 시설이 파괴된 상황에서 전 지역을 골고루 개발할만한 여력이 없었던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와중에 자금 및 설비, 부품을 들여오는데 유리한 일본과 태평양에 가까운 입지이자, 정권의 지원까지 기대할 수 있는[59] 영남 동부 항만이 기업인들에게 선호되었던 것. 무역 비중에서 미국-일본이 압도적이던 시절, 영남 해안 지역은 비용절감 측면에서 매우 유리했다. 포항, 울산, 부산은 해안선이 단조롭고 수심이 깊어 컨테이너선이 정박할 수 있는 대형 항만을 쉽게 조성할 수 있는 위치였다. 현대자동차 포니 정(정세영) 회장의 자서전에는 나중에 울산 공장의 노사분규가 거세지자, "30만대 규모를 넘어서면, 공장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미국인들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걸 후회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입지와 정치적인 조건까지 고려한 측면이 있다 해도 결국 제일 중요한 요소는 기업경영상 편의 및 수익성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반면 서해안 지역은 당장 대형 항만이 들어서기 어려운 입지였다. 서해안이 일본에서 거리가 멀다는 점은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큰 지역일 뿐만 아니라 바다가 워낙 얕아 갯벌이 넓게 발달해 있어, 당시 우리나라 기술 수준으로는 컨테이너선이 정박할 수 있는 규모의 항구를 건설할 수가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60]

1965년 포항제철 선정 역시 정치논리가 아닌 경제논리로 선택되었다. 포항이 선정된 것은 일단 자체 발전소 건설이 가능한 넓은 부지 확보가 가능했고 하루 25만 톤 이상의 공업용수를 공급할 수 있었으며, 8만 톤 급 화물선을 댈 수 있도록 접안 시설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육로, 해상 교통 등의 이점이 있었다.[61] 출처 바다를 매립해서 공단을 조성할 능력이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포항은 항만시설까지 포함한 대규모 제철소 건설이 가능했던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한편 30년 이상 정권이 지역 차별 정책을 썼는데, 정작 경상도민에게 무슨 유익이 돌아갔느냐 하는 겁니다. 경상도 출신의 많은 재벌과 고관대작이 생겼습니다. 군과 관료와 대기업에 경상도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진출하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 보았자 그 수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 일반 경상도민은 역시 전라도민처럼 잘살지 못합니다. 대구는 경상도 30년 정권의 상징인 TK의 본산입니다. 그런데 대구의 중소기업은 많은 수가 모두 망하고, 전국에서 어음 부도율이 가장 높은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 소득은 6대 도시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했고, 실업률도 6대 도시 가운데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 부산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아서 신발과 목재, 기계 부속품 공장들이 거의 대부분 문을 닫아 지금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상도 농민들도 다른 지방의 농민과 마찬가지로 파멸 직전의 상태에 있습니다. 농촌의 집들은 텅텅 비고 총각이 장가를 못 가고,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고, 무엇을 해도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 전라도나 충청도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습니다.[62] // 경상도에서 대통령이 나오고 다른 지방을 차별한다고 해서 경상도만 잘살게 된 것은 아닙니다. 지역 차별주의는 모두를 망치게 합니다. 집권자를 낸 지역의 극히 일부의 특권층에게 혜택을 주고 그 대가로 모든 국민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국민들은 분열되고, 우리의 경제 발전과 통일 역량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열하고 반국민적인 지역 차별정책을 증오합니다.
- 김대중,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167쪽

2.3.3. 거점개발 방식의 변론

이렇게 두 지역의 개발양상이 달랐던 배경은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의 핵심인 공업지구 조성에서 호남이 배제된 것이 1차 원인이다. 대한민국 정권의 중심지로 기본적으로 집중의 대상이었던 수도권과, 그 외에도 수출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천항의 열악한 환경을 대신해 집중개발할 거점이 필요했다. 그 점에서 지리적으로 영남이 대규모 항구를 유치하기 더 유리했던 것도 크다. 남북분단으로 육로가 막히면서 사실상 섬나라가 된 상황인 대한민국은 절대다수의 수출입을 항만에 의존해야 했는데,[63] 한국의 수출이 주도하는 산업구조에서 주요 공단, 산업단지들은 결국 대규모 항구 근처에 같이 따라붙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부산항이나 울산항 등 영남의 항구가 동남아시아, 일본, 미국 등을 잇는 세계적 기간항로에서 가까워서 허브를 만들기 더 유리했다.[64]

2.3.4. 영남은 공업, 호남은 농업?

군부독재 시절에 영남에는 공업에 투자한 대신, 호남은 농업 위주로 산업 분배를 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당장 농업의 기본이 되는 수리시설부터 영남에 훨씬 많이 투자되었는데, 수리조합의 경우 1968년 기준 영남은 72개, 호남은 23개였다. 실제 사례로 보면 1967년 전국적인 한발이 닥쳤고 이 중에서도 호남 지역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하지만 정작 양수기는 영남이 호남보다 6배 가량 설계되었다. 결국 산별 분화라고만은 옹호할 수 없는, 경제적 차별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영남 역시 공업화 이전의 호남처럼 농업이 활성화가 잘 된 지역이었으며, 호남에서 영남으로 농산물 지원보다는 영남 내에서의 농산물 지원의 기동성이 더욱 수월하면서도 인구는 이미 영남 측이 많으니까 호남보다는 영남에 좀 더 투자할 수 밖에 없었다.

2.3.5. 결국 사람이 하는 일

다만, 교과서에 기술된 거점중심 개발의 확대과정 이론은 이론이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이 직접 겪은 "예산 지원", 사업 프로젝트 선정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건 아쉬운 점이다.

호남 지역은 바다의 수심이 얕은 편이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편이기 때문에 대규모 항만이 발전하기 어려운 지형이라고는 하나, 공단을 조성하지 못할 만큼 악조건은 아니었기 때문. 무엇보다, 군산이나 광양만 지역처럼 수심이 깊은 편이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 대규모 공업단지와 항만이 발전할 수 있는 곳조차도 군사정권 시절 초창기에는 개발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그나마 군산은 군사정권이 끝난 1990년대에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아 중공업 사업체 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65] 광양(과 전남 동부권) 같은 경우 포항제철 창립자인 박태준강력하게 추진하지 않았다면 발전이 힘들었을 만큼,[66] 한국의 경제발전에서는 지형적, 기술적 여건 외에 당국관계자, 즉 사람도 매우 큰 변수였다.[67]

- 사례1. 쌀농사 중심의 곡창지대라는 것도 격차가 벌어지게 된 중요한 원인이라고 하는데[68], 영남에도 분명 김해평야 등 농업에 적합한 지역이 있었지만, 이 지역은 모두 개발확대의 수혜를 입었다. 또한 박정희의 고향인 구미시는 바닷가도 아니며 여러모로 공단이 위치하기에 딱히 좋을 것도 없는데도 오로지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발전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69]
- 이 구미국가산업단지에 대한 반론을 하자면 단순히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뿐만 아니라 1960년대 한국의 수출을 주도한 대구의 섬유산업과 연계된 수출전략산업의 육성 필요성 외에도 새로운 전략산업의(전자산업) 육성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에 따라 결정 된 것이라는 요지. 전략산업이었던 섬유산업과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한 공단 조성에 구미가 이상적인 지리적·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만 대구에 지으면 같은 조건의 상위호환이었으니, 결국 대통령 고향을 띄워준 것 자체는 사실이다.

- 사례2. 광양만 입지선정과정
그러나 국토개발연구원이 건설부 산하인 탓인가. 이런 의구심이 생길 만큼 용역 중간보고서는 건설부가 미는 아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모종의 이해관계가 개입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결국 안기부가 아산만과 광양만 일대의 토지 소유 현황을 샅샅이 조사했다. 여기에서 광양만은 깨끗한 반면, 아산만은 의혹이 생길 만한 결과가 나왔다. 일단 포철이 유리한 고지에 선 셈이다.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 ㅡ 29. 광양만의 승리

당시 최고결정권자였던 전두환이 안보를 명분으로 광양 유치에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외에도 육사 선배인 박태준을 좋게 보았던 것과, 존경하는 상관(박정희)의 숙원사업을 잇는다는 것, 그리고 포철 측에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전두환의 아들의 사업을[70] 도와주며 자사 의견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한 덕분이기도 하다.

- 사례3. 여수, 광양 지역에 여수 공단 조성계획이 수립된 게 1962년이지만, 여수국가산업단지[71] 조성이 완료된 건 1979년이고, 광양국가산업단지 조성이 시작된 것이 1982년이다. 즉 박정희 및 전두환 시절에도, 호남 지역에서 항구로서의 입지가 좋은 여수, 광양에는 산업단지가 조성되었고, 이들 지역은 1980년대 후반부터 이미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고소득 지역이 된 건은 옳은 얘기지만, 우선순위가 밀렸던 건 사실이며, 더욱이 광양은 박태준이라는 상식과 합리적인 사고를 갖춘 유력자가 없었다면, 더 훗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연고로 전남 동부지역 일부를 제외한 서해안 일대나 광주, 목포, 전주 등 호남 주요 도시들은 개발 진척이 늦어지게 된다.

- 사례4.
대전에서 시작된 호남선의 복선 공사는 20년이 넘도록 아직 목포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72] 남해 고속도로 역시 부산에서 순천까지만 온 뒤 전라도 남해안은 외면해 버리고 있습니다.[73] 서해안 고속도로는 매년 여기저기 몇 m씩 공사를 하는데, 이러다가는 완성까지 몇십 년이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74] // 목포의 대불공단은 기공식만 요란하게 해놓고 상수도도 하수도도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의 요란한 공약사업이었던 전북 새만금 간척사업도 현재의 예산배정 속도로 간다면 앞으로 30년은 걸려야 할 것입니다.[75] 이런 예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 김대중,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166쪽

비록 광주가 1986년 직할시로 승격돼 행정과 인재가 집중되고, 구한 말 ~ 해방 초까지 한국 10대 도시 중 하나였던 목포시가 이전의 활력과 일부 공단 유치로 버텨나갔지만, 대규모 공단을 유치한 전남 동부 지역이 세수 측면에서 호남을 든든하게 지탱하는 형국이다. 혹자는 이로 인해 지역 내 새로운 갈등이 일어나는게 아니냐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1960 ~ 80년대 지역차별로 설움을 겪어 본 지역 내에서 또다른 지역갈등을 부추겨 이익을 얻고자 하는 간 큰 지역 정치인은 없는 만큼, 그 실상은 지역민들 간이 아닌, 사업 진행 부처 간의 예산 배정 싸움 수준.

2.3.6. 농업관련 보완 요소

전라도 지역은 거점중심개발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일부 선견력을 갖춘 기업인(아시아자동차, 아남전자 등)이나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광주, 전주 등 주요 도시들을 제외하면, 농업에 주력하게 되었다.
(초기 거점개발에서 배제된 전국이 대체로 비슷한 상황)

그리고 이 거점구축 기간이 단시일에 끝나는게 아닌, 5년 ~ 10년 단위의 중장기 계획인데다, 공업중심계획이었던 관계로, 경부선 라인 공업발전을 통해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전국의 인력이 빠져나가는 동안 전라도는 성장동력을 잃고 농업에 의존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이 완숙기에 접어들자 정작 도태되고 고립되어 내수 외에는 소비 대안이 없던 한국의 농업기반은 제조업 중심으로 경제정책을 진행하는 동안, 답보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다. 농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FTA 등을 통해 점점 약화되고, 농민분들의 경제적 쇠퇴 또는 답보상태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 더군다나 과거 불균형발전기에 개발계획의 수혜를 입은 경부지역은 혁신도시 등 균형발전 개발계획에서도 적지않은 실리를 확보하여 타지역에서 보면 불만이 생길수도 있는 상황이다.[76]

다만, 상술했다시피 호남이든 영남이든 간에 어느 지역이든 국가 주도로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공업화된 곳도 있고, 여전히 농업비중이 높은 곳도 있는데, (전국의 농가가 아닌) 무작정 호남 지방만이 공업화로 인해 희생양이 되었다는 주장은 너무 비약되어 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강원도는 1990년대까지(이때까지만 해도 "개가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 할만큼, 탄광사업과 관광사업을 통해 지역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갔다) 전국에 석탄을 공급하다가, 석탄 가격 합리화 이후 희생된거나 마찬가지인데 이게 당시 강원 지역 신문들이 제목을 뽑은 것처럼[77] 강원도 죽이기 정책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또한 농업 부분이 마치 의도적으로 희생된 것처럼 주장하지만, 실상은 1인당 면적이 낮다는 이유로 생산량이 떨어지기에 생기는 문제점이다. 흔히 선진국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은 농지의 총 면적 자체는 줄지만, 전체 농가의 감소로 1인당 농지 비율은 오히려 늘어나면서 결과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이 주류의 현상인 반면 한국은 여전히 1인당 농지 면적이 미미해[78] 생산성이 여전히 낮은 상황이다. 한국의 1인당 경지 면적이 세계에 비교해서 얼마나 적은지는 나무위키 대한민국/물가 부분의 농업 부분 참고.

무작정 수입 농산물 개방은 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주장의 결과가 현재 한국인이 체험하고 있는 식료품 물가다. 현재 한국은 도시 노동자의 소득을 담보로 농업을 키우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지만, 과연 그게 옳을까? 위 문장에서 주장하는 공업화 과정에서 농민은 죽어나갔단 주장도 근본을 따져보면 웃긴 것이 도시 노동자들도 원래는 농민이었다. 공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어디서 마법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이들은 농가의 소득이 처참하자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도시로 왔고 당시로선 세계 최악이라고 불릴만한 노동환경 속에서 죽어나가면서 일하여 겨우겨우 먹고 살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말로 농민만 희생되었고 고통 받았다는 말이 당연하게 나오는 것이 과연 정상일까?

한국 사회는 이들의 노고를 과소평가하지만, 당시 모든 사람이 희생되었고 그나마 고부가가치인 제조업 분야는 노력 끝에 국제적으로 봐도 경쟁력이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지만, 농업은 기술발달, 1인당 농지 면적 축소 등으로 노력 끝에도 고 비용을 구조를 감당하지 못해 손해를 보고있는 것이 가깝다.[79][80]

물가 안정을 목표로 하는 한국 정부는 수입을 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그냥 무작정 수입개방을 연 것도 아니고 정부가 얼마나 보조금을 뿌렸는지 확인해보자.[81]

이런 농업의 상황이 아직까지도 이러한데 농업 비중이 높았던 전라도는 인구가 빠져나가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던 것이다.

2.3.7. 결론

결과적으로, 당시 호남 쪽의 발전이 영남에 비해서 늦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전라도 지역을 차별했다고만 보기보다는, 1960 ~ 70년대 개발 시기에 한국의 주된 수출 라인은 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태평양 라인이라는 점과, 이로 인해 일본과 가깝고, 미국으로 나가기 쉽고, 들어오기도 편한 남동임해지역에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은행 융자와 수출 금융, 공장 설립 지원 같은 한정된 자원이 집중되고, 수도권과 (교통이 편리한) 충청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들은 자원 및 지원분배과정에서 "계획된 사업의 진행" 우선순위가 밀렸던 것이 좀더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완전하게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된 것 또한 아니라는 점 역시 사실에 가깝다. 실제로 광양 제철소 건립 당시에도, 입지가 더 좋았던 광양 대신에 아산을 좀더 선호하거나, 당시 포스코 고위층이 "그래도 역시 호남은..."이라는 말을 하면서 광양만에 지을 거면 경남쪽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말하는 등 경제적 요소등 입지가 더 우수했음에도 호남이라는 이유만으로 개발을 꺼린 과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개발 초기 과정에서 정권을 장악한 영남권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지역 기반에 지원을 거들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례로, 1960년대에 자동차 크랭크축 "제조사"로 (정품 라이센스는 아니지만) 시중의 차량 수리 및 정비에 쓰기에 괜찮아 평판이 좋았던 부산의 O성기계공작소에서 만든 제품을 구입하고자, 호남 기업인이 현장을 방문했는데, 변두리의 공장에 단조(鍛造)용 기계나 가공용 선반이 전혀 없고, 연마기(그라인더) 1대 + 현장 직원 1명 + 간부 1명이 전부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즉 다른 실력 좋은 업체에다 도급을 주고 자신들은 정책 지원금을 넉넉하게 받는 식으로 사세를 키우고 있었던 것. 그리고 개발 초기의 박정희 정부가 외환 부족 및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합의하고, 독일 탄광 광부, 간호사 등 인력을 수출하고 베트남 전쟁 지원 파병 등, 자금 확보에 진력하던 상황 역시 사실이다.

또한 이 부분은 거점 개발 방식 자체의 단점과도 직접 연결된다. 앞서 말했듯이 거점 개발 방식은 특성상 특정 지역으로 개발이 집중되는 불균형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이 정치적 요소와 겹치면서 악순환을 일으켰다. 영남권 지역이 개발되면서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한 영남권 인사들의 입김이 더 커지고, 이 것이 다시 영남권 지역에 대한 재투자로 이어지는 것.

하여간 경제개발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전국의 불균형 개발의 폐해를 인지하고 있었고 일례로 10.26 사건이후 청와대 비서실 직원들이 대통령집무실을 수색해 보았는데 청사진들과 스탠드, 돋보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제2경제수석을 맡은 오원철은 대통령에게 관련 브리핑을 할 예정이었고 회고한다 서해안 무역벨트 사업, 가로림만 계획이 취소되어 박정희의 이루지 못한 영원한 유작이라 불리는데 이는 충청 해안을 중심으로 대규모 중화학 공단과 무역항 사업을 현 공주시로의 수도 이전 백지계획을 전제로 계획하였는데 10.26 사건 직전 고인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던 삽교천 행사 또한 이 일환이었다. 그러면서 수도 관련 계획과 해안 공단사업을 받기로 한 충청도, 특히 충남은 박정희의 사망으로 모든 계획이 엎어진 데다, 이후 충청도의 개발은 대부분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통하는 충청 내륙에 편중되게 집중 개발을 하였고, 충남 해안 지역들은 개발에 거의 소외가 된 채로 2000년대가 될 때까지 인구 유출과 쇠락을 함께 겪었다.[82]

이런 점들 때문에 소외되는 지역에 대한 대책과 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정치권에서는 지난날의 거점중심 개발과정 초기의 지원 및 자원분배과정을 아전인수 격으로 무리하게 해명하거나 자극적인 단어를 쓰기 보다는, 대승적인 차원의 국토균형발전 청사진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강구해나갈 것을 요구받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쩔 수 없으니 불만 갖지 말라” 또는 “예산 퍼주기다” 같은 단어가 나돌면 생산적인 의견이 오갈 수 없기 때문이다.

3. 갈등해소 또는 국토균형발전 노력[83]

3.1. 박정희 정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오해로는 호남 인사를 홀대했다는 것이 있다. 박정희 정권 초반 엄민영이 영남 출신 수재들을 끌어들여 친위세력을 구축하였지만, 이에 못지않게 3공화국 탄생 1등공신이었던(영호남, 제주도 우세로 선거승리) 호남 출신 인재들에게도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권 때보다 호남계 인물을 더 많이 등용하였으며, 전남 나주 출신인 장지량 공군참모총장 같은 경우는 대통령 면전에서 "각하, 국토가 짝발입니다."라 말하며 호남지역을 통과하는 고속도로가 없음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결국 경부고속도로 개통 직전인 1970년 4월 호남고속도로의 최초 구간인 대전~전주 구간이 착공돼 그 해 12월에 개통됐다. 전주~순천 구간도 박정희 정부 재임기였던 1973년에 개통된다.

또한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1966년 전남 여수 지역이 석유화학 분야 공업기지로 지정되어 여수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었고, 1978년에는 전북 군산이 산업기지로 지정되어 군산국가산업단지의 시초가 되었다.

다만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김대중이 야권의 거목으로 자리를 잡은 호남계에 대한 등용이 이전 시절보다 줄어든다.[84]

3.2. 전두환 정부

전라남도 광양군포항종합제철의 제2제철소인 광양제철소를 임기 중인 1985년 착공했고 제1고로를 임기 말 준공하였다. 고위직들은 새 제철소 부지가 호남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충청남도 당진군이나 또는 광양의 옆동네인 경상남도 하동군에다가 짓자고 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측근 출신이었고 전두환과도 인연이 가까웠던 부산 출신 포항제철 회장박태준이 반대하면서 광양에 제철소를 지었다. 이로써 여수-순천-광양을 하나로 묶는 광양만 경제광역권이 생기고 영남과 호남의 경제적 균등이 어느정도 맞춰지면서 호평을 받았다.[85]

또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광주 지역이 전기전자 분야 산업기지로 육성되어 삼성전자 가전사업부, LG이노텍, 구 대우전자[86] 등 굴지의 전기전자 분야 대기업들이 입지하기 시작했다.

교통 분야에서는1984년 전라남도 광주시대구직할시를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를 준공하였다. 또한 호남고속도로 대전-광주 간 구간이 4차선으로 확장되어 1986년 9월에 재개통하였다.[87] 철도 분야에서도 이전 박정희 정부부터 시행하던 호남선 대전조차장-송정리 간 복선화 건설에서 속도를 내어 1985년에는 이리(익산)-정주(정읍) 구간이 전두환 정부 임기가 끝나고 직후인 1988년 전구간 완공되었다.

호남 최대 도시인 광주시가 1986년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광주직할시로 승격했다. 1988년 1월에는 광산군송정시를 광주직할시로 편입시켜 광주의 시세를 넓혔다.

3.3. 노태우 정부

1988년 9월 6일, 노태우 시절 호남선 선로 이리-송정리구간이 복선화로 재개통되었다.[88]

인천직할시충청남도 당진군, 전라북도 군산시, 전라남도 목포시를 잇는[89] 서해안고속도로를 착공하였다.

전임자들(박정희, 전두환)의 집권 시절에 거의 감금을 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당했던 김대중을 여-야 영수회담이라는 명분 하에 청와대에 초청하여 영수회담을 갖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서[90] 두 정치 지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좀 더 부드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였다.

3.4. 김영삼 정부

1995년 12월,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정치보복이 진행되어 5공세력에 대한 사정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황영시, 정호용등 12.12 군사혁명 주요 인물들이 줄줄히 죄수복을 입는 불명예를 겪었다. 5.18 사태 특별법도 전두환 노태우 구속과 함께 제정되어 논란을 빚었다.

1996년 11월, 호남고속도로 광주 고서-순천구간이 4차선으로 확장되었다.[91]

3.5. 김대중 정부

그동안의 영호남 화합 정책 기조가 영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호남을 배려하는 것이었다면 호남 출신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영남지역 인사들을 중용하고[92] 영남지역에 각종 시설을 확충하는 방향으로 화합 정책이 시행된다.

대통령 취임 첫 해에 공공기관인 증권거래소서울특별시에서 부산광역시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해 실행하였다.

1999년 경상북도 안동시를 중심으로 한 경북 지역의 '유교문화권 개발 사업' 건의를 받아들여 2000년 사업에 착수하여 10여년간 추진되었다.# 1998년 대구포항고속도로 건설에 착공하였으며(2004년 개통. 전북 무주-전주-새만금 도로와 연결 계획), 2001년 12월에는 1989년 착수한 대구~춘천 간 중앙고속도로가 완공되면서 동부 내륙 지역의 도로 사정이 좋아졌다.

매번 개각 때마다 최소 30% 이상의 국무위원 자리를 영남 출신 인재들에게 안배하여[93] 세간에서 우려한 정치 보복 또는 홀대 논란을 불식시켰으며, 김종필과 약속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02년에 200억원의 예산을 책정-집행하였다.

3.6. 노무현 정부

개각으로 새로 임명될 국무위원들의 출신 지역을 고르게 배려했으며, 충남 연기군(세종특별자치시)으로의 행정수도 이전을 시도했고[94] 각 지역 별로 중점을 둘 사업 분야를 대통령이 직접 발언함으로써(예, 광주 : 문화 수도) 단순히 영호남 갈등 차원을 넘어 전 국토의 균형 발전을 꾀하였다.[95]

2006년, 중앙분리대 없는 2차선 고속도로였던 88올림픽고속도로의 확장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공사는 박근혜 정부 때도 꾸준히 예산을 투입해 공정이 진척되었으며, 2015년 12월 마침내 복선화 작업이 완료된다.

3.7. 이명박 정부

전라선 복선 전철화를 끝내고 KTX 운행을 시작했으며, 여수 엑스포를 개최했다.

3.8. 박근혜 정부

88올림픽고속도로(광주대구고속도로)의 복선화를 끝내고, 호남고속철도 1단계 구간(오송~광주송정)을 개통시켰다.

3.9. 문재인 정부

대통령 본인이 비서실장을 지낸 노무현 정부 시절의 지역 균등 인사를 재현하였다. 국민의 정부 시절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경북 울진)의 사례와 비슷하게 초대 국무총리와 비서실장을 호남 출신 인사(영광 출신 이낙연, 장흥 출신 임종석)로 임명하였으며, 검찰총장에도 문무일(광주일고)을 임명했다. 2018년에는 지자체 지원 예산에 이전보다 2배를 훌쩍 넘는 6조원을[96] 호남 지역에 투입해 그동안 산적했던 지역 숙원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대구와 광주를 잇는 달빛내륙철도를 추진하기로 했다.

2019년 1/4분기에는 전국의 지자체 지원 예산 일부(각 도별로 2조원씩)를 "예비타당성조사" 없이 내려보낼 수 있도록 하는 2019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를 발표하였다. "사실상 각 도에서 2조원을 기본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끔 한 것.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2%대로 접어든 시점에서, 전국의 지역경제 주체들이 버텨나가는 걸 돕는 자금을 내려보내는 한 편, 각 지자체에서 추진해야 하는 숙원사업을 적시성 있게 진행할 수 있도록 조처하기 위함이라는 취지.

3.10. 윤석열 정부

홍준표 대구시장이 강기정 광주시장, 이재명 대표와 만나서 광주와 대구를 잇는 달빛철도특별법을 통과시켰다.

3.11. 기타

경북대학교 윤용희 교수는 감소방안을 8개로 내놓았는데 정치의 민주화, 공정한 인사정책, 국민의 올바른 대선과 총선 자세, 균형과 조화로운 경제정책과 지역개발, 상호보완적인 사회문화정책, 지역갈등해소를 위한 민간단체 위주의 상호교류와 실천운동 전개, 모험적이고 진취적인 기업인의 역할, 공정하고 균형감각 있는 언론의 보도와 계몽자세가 있다.[97] 줄여서 말하자면 민주화의 개선경제민주화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세금 갈라먹기"이며, 정치 경제적인 지역간의 경쟁이 없어질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근본이 바로 국민들의 욕구를 다수결에 의해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패권주의와 코드인사 같은 비민주적인 상황이 지역갈등에 맞물려 판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지역 시민간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방해되고 있다. 또한 지역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뿐 실제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지 않는 위정자들도 많다. 이러한 상황은 아직도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현 헌법상 시스템은 정부나 각 지자체 수반의 강력한 권한으로 인해 엽관주의의 폐단을 막기에 무리다.

다만 지역갈등해소를 위한 민간단체 위주의 상호교류와 실천운동 전개에 대해서는 진전을 보이고 있다. 그 일례로 2010년대 들어서 대구와 광주를 중심으로 화해분위기로 가고 있는데. 예를 들어 2013년 달빛동맹[98] 결성, 2015년에 대구 2.28민주운동[99] 기념식(광주광역시장, 전라남도지사 참석),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대구광역시장 참석)에 상대 지자체장들이 참석한 사례, 광주은행, 대구은행의 업무협약체결, 양쪽 시장들의 각자 교환 근무[100] 등이다. 또한 두 광역시의 화해 움직임에 힘입어 대구경북과 광주 간에도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들끼리나 도,시의 지방의회 의원 사이에서 의외로 매우 활발한 교류가 있다. 전두환의 치적을 스스로 기념하는 명칭인 '88올림픽고속도로'를 4차로 확장 개통과 함께 기종점 지명에서 따온 평범한 명칭인 '광주대구고속도로'로 개칭하고, 더 나아가 양 지역 화합의 상징인 '달빛고속도로'로 바꾸자는 움직임도 있다. 웃기는 건 정작 대구과 광주의 시민들은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하나로 뭉치자는 분위기이나, 제 3지역 정치극단주의 성향의 네티즌들이 포털 사이트 뉴스 댓글 등을 통하여 노발대발하며 격하게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후반기에 개헌의 움직임이 있어 민주화의 개선이 기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서 개헌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2016년에는 여권인 새누리당 인사들이 먼저 제기하였고, 엽관주의 단점 극복방안,[101][102] 민주화의 저변 확산 측면에서 차후 다시 긍정적으로 검토될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에 19대 대선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도 개헌을 주장하고 있어 만약 개헌이 목적에 충실해 원만하게 해결된다면 영호남 갈등 요인을 억제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커질 것이다.

4. 영남패권주의

한 때 비문재인 계열과 진보정계에서 영호남 지역갈등은 단순한 지역감정이 아니라 영남이 고위직을 독점해야 된다는 패권주의적 정서를 기반으로 한 영남의 호남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이라고 보며 영남패권주의란 단어를 쓰기도 했으며, 홍세화#고종석#이 이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영호남 지역 갈등은 선술했듯이 단순한 영남과 호남의 지역 갈등이 아니라 영남의 패권주의적 정서와 호남의 방어주의적 정서의 대결이며, 그렇기에 보수정당에 대한 TK의 몰표와 민주당계 정당에 대한 호남의 몰표에 대해선 달리 봐야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세한 건 호남소외론을 참고하면 된다.

5. 관련 문서


[1] 그러나 그런 지역 감정을 조장한 정치 세력이 건재하는 한 영호남 지역갈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는 뜻도 된다.[2] 당장 영국(잉글랜드-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캐나다(-퀘벡), 스페인(-카탈루냐) 등등만 해도 알 수 있다. 특히 영국과 아일랜드는 독립 과정에서 수많은 유혈싸움으로 번졌다.[3] 미군 중 하와이 출신들이 유독 도주를 잘 하여 그렇다는 주장도 있지만, 2차대전 중 미군 교범을 새로 쓰는 전과를 올린 김영옥 대령이 지휘했던 2세 부대(니세이 부대)는 하와이에 모인 재미 아시아인들을 주축으로 편성된 부대였으며, 이들이 즐겨쓰던 돌격구호 역시 하와이 도박장에서 쓰던 "Go for broke"(의역 : "싸우다 죽어!")였다.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처럼 유색인종 출신 병사들에게 폭언을 퍼붓다 지휘에 실패한 사람들이 할법한 말을 끌어다 특정 지역을 비난, 비하하는데 쓰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4] 여기서 등장하는 조영암이라는 시인은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 승려 생활을 한 적 있는 사람으로 1950년대 중반, 베스트셀러가 된 통속소설 <신임꺽정전>을 집필해 이름을 알렸다. 안하무인의 성격이었며, 최남선, 박종화, 이은상, 백철 등을 비난하는 글을 서슴없이 썼고, 이에 항의하면 멱살을 잡았다고 한다. 물불을 가리지 않던 그가 결국 1959년 전창근이란 필명으로 <야화(夜話)>라는 야릇한 잡지에 ‘하와이 근성 시비’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특정 지역을 비하하고 모욕한 큰 사고를 치면서 그의 안하무인 행적은 종말을 고한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최대로 결집된 합의에 이르러 전라도민 필화수습대책위원회가 나설 정도로 당시 파장이 컸으며, 이들 지역민들이 반사회적 반민족적인 야비한 형용사를 나열한 글에 대한 배후 추궁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해, 정부가 즉각 잡지 판매금지 처분에다 폐간 조처를 내린 것이다. 또한 대검찰청은 전주지검으로 수사권을 이관해, 필자(조영암), 발행인(작가 최상덕), 편집인(이종열)을 구속했으나 발행인은 기소되지 않았고 두 피고는 보석됐다가 6월 징역형을 언도받아 재수감되었다. 이후 조영암은 문단을 떠나 수도승으로 생을 마감했다. 출처[5]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지만 호남이 집권하게 되자 역설적으로 재계 등에서 호남 출신을 전면에 내세워 정권과의 교섭창구로 활용했던 사례도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김대중 정권기 가장 활발히 교류했던 재벌이 현대(강원)와 삼성(대구)이었음을 감안하면 딱히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6] 이런 내용이 들어가는게 사족일수도 있지만, 사실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삼성그룹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의 물밑여론을 주도하던 광주일고 출신 임원을 이사급으로 내세워 정부 인사들과 소통에 나선 것이다. 삼성그룹은 선대 이병철 창업주 시절부터 회사에 보탬이 될 인재들을 출신지역 가리지 않고 중용한 덕분에, 삼성에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대표이사나 사장 직위를 수행 가능한 위치의 호남출신 임원들이 있었다. 즉 정부 관계자들과 교섭 가능한 인물을 대표이사로 내세워 소통을 담당하게 한 건데, 이게 비단 삼성그룹만의 사례였을지 생각해볼 일이다.[7] 거점 중심 개발 방식으로 흔히 설명되지만,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처럼 "연고(緣故), 정실(情實) 위주로 인사가 이루어졌던 것이, 결국 연고, 정실 중심의 행정이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혜택을 받는 지역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실제로 전두환부터 노태우를 거쳐 김영삼 정부까지 선호직위 재직자중 영남출신이 40% 이상으로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던 사례가 있다.3명만 해도 무려 17년 가량이다.[8] 그러나 실제로 전국에서 가장 집중적, 편중적으로 개발이 이뤄진 지역은 영남이 아니라 수도권이다. 호남이 소외된 이유를 가장 집중된 수도권은 제쳐두고 2번째랄 수 있는 영남 집중에서 찾아내려는 것이 바로 영호남 지역갈등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의도적 조장했다는 주요한 근거 중 하나다. 광복(1945년) 직전인 1944년 인구통계를 보면 경상권 약 490만명, 전라권 약 430만명에, 수도권은 약 289만명에 불과하여 약 260만명인 충청권보다 약간 앞설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는 수도권 인구가 2500만에 육박해 호남의 5배 이상, 영남의 2배에 달할 만큼 독주를 하고 있다. 전라권 인구는 초기 인구 자체가 상당했기 때문에 엄청난 엑소더스에도 경상권 다음으로 인구가 많았고, 2013년이 되어서야 충청권에 역전당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지역적으로 인구규모 1위인 영남과 2위인 호남의 헤게모니 다툼이 일어나기 쉬운 구조였다. 정작 수도권은 현재보다는 덜하지만 1940년대에도 해방 이후 전국에서 몰려오는 용광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역적 아이덴티티가 강하진 않았다. 결국 수도권과 역전 현상 이후 영남권에서는 수도권과 비교해가며 균형론을 펴고, 호남권에서는 영남권과 비교해가며 균형론을 펴기 쉬운 구조였다. 2010년대 후반에도 영남 인구만으로 호남 인구+충청 인구+강원 인구+제주 인구를 넘어설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도권은 그 영남의 2배가 된다.[9] 사실 수도권 집중 문제도 실제로 경부라인을 중심으로 하는 개발 정책에서 이루어진 문제점으로, 1960년대~1990년대에 영남패권주의에 비롯된 영남 출신 정치인들의 주도하에 했던 경부선, 경부고속도로 중심 개발은 경기도 해안일대, 충청 내륙, 경북 남부, 경남 동부의 산업 발전과 인구 증가를 촉발시키는 동안,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에 해당되지 않는 지역은 인구가 감소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일이 벌어졌다. 수도권 집중 개발과 영남의 인구 보존도 1960~1990년대 당시 개발 정책에 해당 지역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였다. 그 대신 국토 불균형을 발생시켰기 때문에 비판을 면치 못하였고, 호남도 개발 정책에 철저히 소외되었던 것이다.[10] 대표적으로 혐오의 발언이 누가 크냐 많냐 같은 주장.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비율이 나오지 않으며, 대개는 정치적 의도로 만든 목적이기 때문에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자료는 아예 없다.[11] 나제동맹의 사례를 보더라도 필요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무조건식으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12] 금마저 등 금강하구 지역[13] 백제 관련 문화재들이 많이 발굴되는 이유이다.[14] 호남 동부 지역 같은 경우 물론 남원시부터 여수시까지 대가야의 영역이었지만 그전에는 백제의 명목상 우위를 인정하는 마한의 일원이었음도 주지할 사실이다.[15] 전라도는 금강이남 호남이라는 명칭과 일치하는 후백제와 지리적 유사성이 가장 크다.[16] 출처는 고려사 권92 열전5. 삼중대광(三重大匡)은 향직 9품 16계 중 최고위 품계로 고려 말기(1308년)에는 정1품 문관의 품계가 된다.[17] 소백산맥에 둘러싸인 영토 덕에 더 일치시키기는 쉬운 것은 사실이나, 고대국가의 정확한 영역을 구분짓고 현대의 지역과 일치시키기는 어렵다.[18] 이러한 연유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전라도와 충청도를 백제, 경상도를 신라의 강토로 인식했다.[19] 서얼 출신으로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영조 임금을 배알해 덕담("하관이 강태공처럼 든든하고 좋다")을 듣기도 하였다.[20]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경기나 충청 출신 말고도 경상(영남)이나 전라(호남) 출신이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고 오히려 효종 시절에는 서인의 지분은 경기와 충청 출신으로 대부분 차지하게 된다.[21]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22] 이상우 <지역감정에 좌우된 대통령 선거:한국 대통령 선거의 결정 요인>, 월간조선 엮음 "비록 한국의 대통령:월간조선 1993년 신년호 별책부록"(조선일보사 1992, 327쪽) ; 광주매일 정사 5,18특별취재반 <정사 5.18 상>(사회평론 1995, 27쪽)[23] 즉 2024년 현재는 더불어민주당이나 진보당의 족쇄인 레드 컴플렉스를 당시엔 박정희민주공화당이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알고보면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24]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강준만 저, 인물과 사상사, 2004.[25] 지방자치제 이후 일부 도로가 지방도가 되기도 했고, 시대마다 물가에 따라 절대예산액이 변하기 때문에 당시의 국가의 지원 정도나 지역적 편중 정도를 정확히 알아내기가 쉽진 않다. 정권도 왔다갔다 하면서 그나마 열악한 지역도 어느 정도 땜빵이 되었는데 전국 고속도로지도를 참고하자.[26] 1964년 이준구 사장이 구속되었고 신문사 강제경매를 밀어붙여 기아산업(기아자동차)에 인수되었다. 그외에 경향신문 간부진이 청와대에 입성해 기자들과 정권 간의 사이를 중재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정권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기.[27] 국회 눈치를 보지 않아도 헌법을 개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秘錄) 박정희 시대(2)>>(이상우 저, 중원문화사, 1985) 164p[28] 김영삼 前대통령 기록관. 1969/08/08일부터 참조 링크[29] 변화 변신의 해 모든것이.바뀐 98년, 동아일보[30] 아닌게 아니라, 군사정권까지만 해도 드라마같은데에서 나오는 천한 직업을 가졌거나 깡패류의 인물들은 서남 방언을 구사하는 설정을 하나같이 달고 나왔었다. 이는 언론들이 조장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농현상으로 각지 지방민들이 상경하는데, 그중에서도 전라도 출신 상경민이 타 상경민에 비해 숫자가 많아 두드러졌고 이러한 당시 상황에 맞는 고증과 사회적 편견이 여과없이 당시 언론층에 반영된 측면도 없지 않다.[31] 결국 공천권 문제다. DJ 측은 대통령이라는 자리 자체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에 당권을 DJ 측이 가져가도 무리는 아니라는 입장이었고, YS 측에서는 1971년 대선 당시 대선주자(김대중)에게 모든 힘이 실리지 않았던 것에 대해 한계를 느꼈다는 명분으로 당권까지 가져가고자 했다(DJ에게 계파 수장으로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당할 것을 요구). 두 사람의 의견 모두 일리가 있었던 게, 1. 2000년대 초반에도 대통령이 직접 인사-예산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력한 공직이 6,000석에 달했고, 관선 형태라 지자체 인선까지 관여했던 1987년에는 그보다 더하였다. 2. 1971년 대선 당시 헌신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도운 김영삼이 관찰자로써 나름 보고 느꼈던 일인만큼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것.[32] 평민당이 얻지 못한 1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대중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이었다. 다만 이 당시 평민당 후보로 나섰던 한화갑의 후보 등록이 무효로 처리돼 한겨레민주당 소속 박형오 후보가 사실상 무혈 당선됐다. 그리고 훗날 박형오 의원도 평민당에 입당하게 된다.[33] 반대로 강남3구는 통일민주당이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남3구는 영남, 특히 PK 출신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다.[34] 당시 14대 대선 당시 영남 득표를 설명하자면 김영삼의 지지기반인 PK 지역에서는 최소 70% 이상 지지를 얻었지만 TK 유권자들의 성향은 달랐다. 일부 민정계 인사들이 들어가 있던 정주영에게 보수 성향 표가 갈려 그나마 저 정도 얻은 것이며 김대중 비토 성향은 그대로 이어져 심지어는 PK출신 박찬종 후보에게도 밀려 대구, 경북 한정 사실상 꼴찌였다.[35] 반대로 부산, 경남지역에서는 오히려 김대중이 부산에 있던 호남 이주민과 일부 젊은 층의 표심으로 2위, 박찬종이 3등을 차지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한 역풍의 영향도 있었는지 정주영이 제일 득표율이 낮았다. 민정계 세력들 일부가 다시 뭉친 있던 정당에 부산 유권자들이 표를 주기 어려웠던 것도 있다.[36] 이게 그나마 해소된 게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 시기다. 김대중 정부는 소위 소외된 호남을 밀어줬으며, 노무현 정부는 PK와 호남 두 지역을 밀어줬기 때문이다.[37] 김대중은 대구경북권에서 대체로 10% 중반대의 표를 얻었다. DJP연합으로 맺어진 자유민주연합 유력 의원의 지역구가 그랬는데 박태준포항시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김중권영양군, 울진군 지역의 경우 3자 대결에서 10% 중후반대를 기록했을 정도.[38] 이회창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과 달리 영남 출신이 아니기도 했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2위로 낙선한 이인제가 경선 결과 불복 후 탈당하여 신당 창당 후 독자 출마하자 이회창의 표를 적게는 20%, 많게는 40%까지 잠식했다.[39] 문민정부 출범 후 그 당시 대구, 경북 지역의 정서를 대략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자민주. 김영삼 및 민주계 세력들이 민자당을 창당해 들어온 이후로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이었던 민정계 출신 정치인들을 서서히 축출해가기 시작했다. 아예 집권한 뒤로는 사정(司正) 바람으로 부정 혐의가 있는 경북 출신 주요 정치인을 몰아낸 여파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에 이어 5.18 특별법 제정까지 대구경북지역이 민자당을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따가웠다. 오죽하면 킹메이커라 불린 선거전략가 허주가 영국에서 체류 중인 DJ에게 면담을 요청했을 만큼 경북에서는 집권당의 TK 추락에 대한 위기의식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1995년 첫 지방선거에서 대거 자리를 내줬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신한국당은 대구, 경북지역에서는 김종필이 일부 민정, 공화계 의원들과 민자당을 탈당하고 만든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에 패한다.[40] 다만 TK와 PK간의 소지역주의 대결양상은 전부터 있어온 사실이었고 TK 추락사건이란 용어는 1993년도 개각 및 사정(司正) 바람 후 조선일보 시사만화에서 나온 용어였다.[41] 오히려 YS는 경선에서 패한 후 승복하지 않고 탈당하여 독자 출마한 이인제를 암묵적으로 지원한 게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아예 거제시 등 경남 일부 지역에서는 이인제가 1위를 한 곳도 있었다.[42]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이 영남 출신인데 비해,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은 비영남 출신이라 영남의 몰표가 어려워지는 데에 일조하였다. 당시 노무현 48.9%, 이회창 46.6%, 권영길 3.9% 결과로 상당한 박빙이었는데 영남사투리를 쓰던 노무현처럼 이회창이 호남사투리를 쓰는 토박이였다면 어땠을까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민주노동당 후보였던 권영길이 출생은 일본에서 했지만 귀국 후 경상도지역에서 성장했는데 권영길이 결과적으로 케스팅보트가 되었다.[43] 충청도는 근소하게 이겼지만, 서울-경기-인천-강원-영남은 이명박에게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줬다.[44]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타 지역에 비해 홍준표 지지율이 높다는 것이다. 영남 출신에다가 당도 자유한국당인 점이 영향이 있다. 단, 부울+동부경남은 문재인이 가장 지지율이 높고, 대경+서부경남은 홍준표가 지지율이 가장 높다.[45] 호남 쪽에서 보기엔 둘 다 영남 출신이니 당이 어느 당인가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긴 하였다.[46] 홍준표 부인이 전북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 듯하다. 다만, 민주화 이후 5년 단임 대통령제 특성상 공직자도 아닌 영부인이 지역출신이라고 지역에 엄청난 혜택을 줄 수 있지는 않다. 이승만, 박정희처럼 십년이 넘도록 독재가 가능하다면 부인도 그만큼 인지도도 어마어마하고 환경에 따라 상당한 권력 행사도 가능할 순 있겠지만...[47] 박정희의 영부인인 육영수의 고향이 충북 옥천 출신이라서 오늘날 현재도 보수 지지 성향이 높은 동네라지만 충북 전체가 보수 텃밭인 것이 아닌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48] 인사권 행사 등을 볼 때 영남 출신이라도 노무현 시절 민주당계열이 집권했을 때, PK 주연에 호남을 준주연, 충청을 조연 정도로 써주는 형국이었고, 박근혜 시절 자유한국당 계열이 집권했을 때 TK 주연에 PK나 충청 등을 조연으로 써주는 형국이었음을 감안하면 지역기반심리의 투표도 없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49] 게다가 강원도와 부울경 모두 더불어민주당이 40%p대를 득표한 지역이 상당수였기도 하다.[50] 다만 울산 북구에선 이재명 후보가 0.7% 차이로 이겼고, 김해시,거제시,울산 동구에선 이재명 후보가 5% 미만 격차로 석패를 했다.[51] 객관적 통계치로 영남은 60-70%를 국민의힘에 줬지만, 호남은 90%이상을 더불어민주당에 준 것이다. 어디가 더 지역주의를 표방하는지 알 수 있는 통계이다.[52] 조사는 전라남도 거주 18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국내 통신 3사가 제공하는 휴대전화 가상번호(100%)를 이용한 ARS 자동응답조사로 이뤄졌으며 응답률은 10.0%다. 통계보정은 2021년 12월말 현재 국가 주민등록인구통계에 따라 성·연령·지역별 가중치를 부여했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p다.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53] 후백제의 영토는 전라도충청도 남부 일부인 반면 고려의 영토는 한반도 중부 전체였다.[54] 현재 조선족들의 출신지를 보면 함경도 출신들이 가장 많고(주로 연변) 그 다음은 평안도 출신들(주로 랴오닝성),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의외로 경상도 출신들이 꽤 많다고 한다.[55] 오늘날 읍이나 면이 대개 80만 평 ~ 250만 평 정도 되는 크기다. 즉 큰 읍면 한 곳 넓이의 물을 메워 전부 논밭으로 바꾼 것.[56] 그는 일제강점기 시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지낸 친일파다.# 한편, 그를 긍정하는 측에서는 '이 학파농장의 일과 민족자본(호남은행)을 설립한 공적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며, 6.25 전쟁 당시 잡혀 죽기 직전까지도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방 직후 노무자 대표들의 노임지급 요구에도 성실히 응해 품삯을 두둑히 챙겨주었던 것도 인심을 얻었던 이유'라고 주장한다.[57] 영남이 포항제철, 울산화공단지 등으로 발전할 때, 호남에는 아남전자, 호남정유, 아시아자동차(現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정도밖에 없었으며, 그나마도 호남정유의 경우 소유주는 영남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58] 영남 지역에는 건설계획, 개발계획 시행 후 완공, 공단 조성까지 완료되어 해당 지역의 지도에 빨간불 표시가 여기저기서 반짝반짝 빛나는데, 타지역, 특히 호남은 이렇다 할 공장 하나 변변한 게 없더라는 불만이 전시장에서 터져나왔다.[59] 일례로, 현대그룹이 포항의 철강공급 + 일본의 기술, 인력 협력을 고려해 울산에다 현대자동차 공장 건설을 결정했는데, 이 지역 출신의 이후락 중정부장이 정주영 현대 창업주를 깜짝 방문해, 감사 의미로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다.[60] 현재는 바다를 대규모로 매립하여 목포신항이 만들어지면서 호남에도 컨테이너선이 정박할 수 있게 되었다.[61] 제철소 부지로 선정한 2.5km에 이르는 해안 일대 지역은 서ㆍ남ㆍ북 3면의 육지가 영일만을 감싸면서 동해의 강한 풍랑을 막고 있어 천혜의 항구를 이루었다. 또한, 교통의 경우 경부고속도로가 이곳에서 36km 떨어진 경주를 통과하고 있었으며, 2개의 국도와 6개의 지방도가 있어 해안 교통이 유리하고, 해상으로도 부산ㆍ울산ㆍ묵호ㆍ삼척 등을 연결하는 중심지였다.[62] 이런 모습은 2010년대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2018년 12월 조선일보에 따르면, 호남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타지역으로 건너가는 대학생 구직자들이 매년 졸업자의 39% 비중을 차지하며, 영남 지역 역시 23%의 대학 졸업자들이 타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한다고.[63] 항공물류는 양으로 따지면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64] 서해는 크게 봐도 막혀있는 이고, 동해는 일본열도의 섬들 사이사이에 수로가 있어서 사실상 태평양으로 뻥 뚫린 바다와 같다.[65] 대신에 박정희 정부 시절 옆 도시인 익산에는 3만평 규모의 경공업 이리공업단지가 들어섰긴했다.[66] 당시 박태준 회장이 광양에 제철소를 세우려 할 때도 포철 고위직들이 호남인데...라며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67] 여기에는 당연히, 이전부터 쌓여있던 주요 국가 정책을 지휘할 정부요직 및 경제요직에 깔려있는 TK 인맥에 비해 전라도에는 정부요직에 올라간 사람 자체가 없었던 것도 크다.[68] 아직까지 농업 생산량에 한계가 있던 1960~70년대 대한민국 상황에서 중공업 발전을 통한 경제발전과 국민의 생활 개선을 위해서는 쌀 수입비중을 늘리는 한편 국내 생산주력인 지역에서 계속 쌀농사를 지으면서 가격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일례로 4대강 사업 대상이 된 주요 강변의 논밭을 갈아엎은 후 곡물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69] 다만, 전기시설은 매우 늦게 구축되었다.[70] 이것도 박태준 회장의 도움으로 설립된 소규모 회사였다고 한다.[71] 울산화학공업단지를 뛰어넘는 동양 최대 규모의 국가산업단지이다. 2004년 이 지역 입주기업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났지만, 이 과정에서 여수산단 노동자들이 받는 대우가 알려지면서 오히려 그 해 입사 희망자가 늘어나기도 하였다.[72] 이 당시엔 호남선이 광주송정까지만 복선화가 완료되었다.호남선 복선화 한국철도 호남선 복선화는 김대중이 대통령 임기를 끝내고 퇴임한 2003년에야 목포까지 모두 완료되었고, 호남고속선은 2023년에 완료 예정이다.[73] 남해고속도로 전남 남해안 부분은 2012년에 개통되었다.[74] DJ가 대통령 당선된 후인 2001년 12월 21일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75] 30년이 지난 2023년에도 새만금 간척사업은 지지부진한 상태이다.[76] 수도권을 제외하고 나눠먹기식으로 풀렸는데, 시도별로 나누는 과정에서 광역자치단체가 가장 많은 경상도 지역에 10개 혁신도시 중 5개가 돌아갔다. 역시 머릿수 많고 볼 일...[77] 요약하자면, 대안은 마련해놓고 일을 추진해야지, 대책없이 가격합리화 정책을 추진하느냐는 것이다. 1998년, 대표적인 탄광지역이었던 정선군 사북읍에 공기업 강원랜드가 설립된 것도 관광자원을 개발해 사람들의 발길을 이쪽으로 돌리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된 일이었다.[78] 1인당 농지 면적이 작다는 말은, 소수가 농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많은 사람이 조금조금씩 농지를 쓴다는 것이다.[79] 이러면 농업 물가를 무작정 올리면 될게 아닌가 싶은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국 제조업은 수많은 FTA를 통해서 자유무역을 하고서도 경쟁에 이길만큼 원가나 기술력 측면에서 경쟁력이 있지만, 한국 농업은 개방하면 그 즉시 망한다.[80] 애초에 땅이 작아서 무작정 한국은 농업에 어차피 안 돼 하는 사람도 있는데 한국과 비슷한 면적의(네덜란드 경작 면적(185만㏊) 한국(168만㏊)) 네덜란드는 우리보다 일조량도 부족하고 인건비다 훨씬 비싼 네덜란드는 농업 수출까지 할 정도로 한국보다 훨씬 잘 산다.#[81] 정부는 1992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이후,「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의 시행에 반발하는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상인들의 반발 등 1995년에서 2011년 쌀시장 개방에 합의되는 16년 간 무려 185조원에 달하는 농업보조금을 농업부문에 쏟아 넣었다. 전문기관과 재계, 경제학자들은 정부•정치권에 2025년까지 30조원을 추가 지원하는 보조금에 대해서도 재정의존도가 높은 정부정책보다는, 새로운 농업경쟁력지원을 위한 종합대책을 역설하고 있다.#[82] 충남 해안에 있는 지자체들은 2000년대 와서야 산업단지들이 아산, 당진, 서산에 유치가 되면서 그나마 해소되지만, 여전히 충청 내륙지역과 충남 해안지역의 개발 격차는 어마무시하다.[83] 각 정권의 지역별 공약 이행 내용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84] 이는 보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지역주의로 보는 사람도 있는 반면, 야권의 김대중이 호남의 인재를 다 빨아들여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85] 당진은 수심이 낮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당시 기술로는 제철소를 짓기 어려운 사정도 있었다. 당진에 일관제철소가 세워진건 시간이 훨씬 지난 1990년대의 일이다.[86] 대우전자가 분해된 후 여기서 가전 분야 사업장은 위니아전자가 공조 분야 사업장은 캐리어의 한국 합작회사인 오텍캐리어로 분산되었다.[87] 호남고속도로 확장 개통 ktv[88] 호남선 복선화 한국철도[89] 현재는 기점과 종점이 변경돼 전라남도 무안군이 기점, 서울특별시 금천구가 종점이다.[90] 노태우 본인이 DJ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가졌던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태우의 자서전에는 '대화 주제가 풍부하며 사람 보는 눈이 예리하다'고 DJ를 호평하는 대목이 나오며, 3당합당 제의 거절 → 9.19 선언(선거 중립을 지키기 위한 노태우 대통령 탈당 선언)의 사건 흐름 중에 DJ가 상황을 오판(대선 승리 확신)하는데 대해 안타까워하는 심경을 내비치기도 한다.[91] 호남고속도로 마의 코스 경향신문[92] 대통령의 최측근 자리 중 한 곳인 대통령비서실장 자리에 경상북도 울진군 출신이자 민주정의당에서만 3선을 지낸 노태우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 출신 김중권을 임명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93] 특히 법조계 요직까지 영남 출신 인재들이 차지하게 된 데 대하여 불만을 제기하는 측근에게, "대통령이 호남"이라 말하며 더이상 잡음 여지가 없도록 쐐기를 박기도 하였다.[94] 행정수도 이전에는 결국 실패했지만 정부세종청사를 중심으로 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95]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있던 공공기관이 전국 각 지역으로 분산 이전된 것이 참여정부 시절부터였다.[96] 반면 영남 지역은 경남, 경북이 각각 2조원, 1조 2천억원으로 이전 정권에 비해 규모가 크게 축소돼 지역사회에서 불만이 제기되기도 하였다.[97] 「영호남지역갈등의 원인과 감소방안」. 윤용희. 1998. 24-33p[98] 대구의 옛지명인 달구벌의 '달'과 광주의 순우리말인 빛고을의 '빛'의 합성어[99] 1960년 2월 28일 경북고 학생들이 야당후보 유세에 참가하지 말고 등교하라는 지시에 항의해서 일으킨 시위로 나중에 4.19혁명으로 계승된다.[100] 당시 강운태 광주광역시장이 대구광역시 일일시장으로, 김범일 대구광역시장이 광주광역시 일일시장으로 근무했다.[101] 한국처럼 2 ~ 3다리 이내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연결되는 곳에서는 최상위의 몇 사람이 모의하면 온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초대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줄곧 구설수에 오르곤 했던 친인척 논란, 측근 비리들이 대표적인 예.[102] 또한 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치인들이, 관련 법안을 정비해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면도 있다. 개헌이 만능은 아니지만, 개헌 문제가 논의될 정도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이면, 정치자금법안 문제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 광복 무렵 국내 활동을 시작한 이승만 박사가 지인을 만나 제일 먼저 꺼낸 얘기가 정치자금 문제였을 만큼, 이 역시 뿌리깊은 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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