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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성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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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18대 국왕
실성 마립간 | 實聖 麻立干
파일:Daerungwon_-_Hwangnam_Daechong.jpg
황남대총 전경.
출생
(음력)
350년대 추정[1]
사라 서라벌 탁부[2]
사망
(음력)
417년 5월 (향년 60대 추정)
사라 서라벌
능묘 황남대총(皇南大塚) (추정)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18대 국왕
402년 2월 ~ 417년 5월 (15년 3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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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김씨
실성(實聖) / 보금(寶金)
부모 부친 김대서지
모친 이리부인 석씨
왕후 아류부인
왕녀 차로부인
신장 181cm[3]~184cm[4]
왕호 실성 마립간(實聖 麻立干)
별호 실성 이사금(實聖 尼師今)
실주왕(實主王)[5]
사부지왕(斯夫智王)[6]
파사매금(波沙寐錦)[7] }}}}}}}}}
파일:external/times.postech.ac.kr/8332_23479_544.jpg
포항 냉수리 신라비

1. 개요2. 생애3. 《일본서기》 〈신공기〉 관련 기록4. 평가5. 《삼국사기》 기록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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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18대 임금. 김알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의 조카 이찬 대서지(大西知)[8], 어머니는 아찬 석등보(昔登保)의 딸인 이리부인(伊利夫人) 석씨이다. 같은 김씨 왕족이지만 전대 왕인 내물이나 다음 왕인 눌지와는 3촌 또는 4촌의 관계에 있다. 내물 마립간의 뒤를 이어 3번째 김씨 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칭호는 《삼국유사》에서는 마립간,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마지막 이사금인데 광개토대왕릉비 등 다른 사료와 종합해봤을 때 내물 마립간 때부터 마립간이라고 불렀다고 여겨지므로 주로 《삼국유사》를 따라 실성 마립간으로 불린다. 학자들은 그가 이사금이라는 호칭을 쓴 것이 선왕이자 자신과 계통이 다른 내물계 김씨 일족과의 의도적인 차별화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는데 마립간에 비해서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연륜있는 연장자의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실성 마립간이 왕이 될 당시에 내물 마립간의 아들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국정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위에 올렸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왕의 연륜을 강조하기 위해 마립간보다 이사금 왕호를 선호했을 가능성이 있다.

2. 생애

내물 마립간 재위 후반, 신라는 백제-가야- 사이에 끼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였고 북방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던 고구려의 힘을 빌리기로 방침을 정한 후 392년 정월 고위 귀족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400년 백제, , 가야의 연합군이 대규모로 신라를 협공했을 때 광개토대왕이 50,000명의 지원군을 보내 격퇴했고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린 대가로 고구려군이 신라 땅에 주둔하면서 정치적 간섭을 받는 거의 복속된 예속국 상태로 전락했다.[9] 실성은 401년 고구려에서 귀국했고 402년 내물 마립간이 승하하면서 즉위하게 된다.

그가 왕위에 오른 과정은 석연치가 않다. 내물 마립간이 죽었을 때 아들들이 어려서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비록 어리다고는 해도 내물 이사금에게 3명의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신라 내부에 굳건한 정치 세력을 이루기 힘들었을 실성이 401년 귀국하자마자 402년에 왕에 올랐다는 점은 실성의 등극 뒤에는 광개토대왕의 입김이 작용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실성도 고구려에 인질로 가서 있으면서 광개토대왕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장수들과 접촉하며 차기 왕권을 노렸을 것이고 광개토대왕 또한 인질 시절의 인맥을 터 놓아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 듯한 실성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성의 어머니가 석씨인데, 내물 이사금의 즉위로 왕위를 잃어버린 석씨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다시금 확보하기 위해서 석씨 왕실의 피가 섞인 실성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실성 마립간 이후 석씨는 신라 왕계에서 사라져버린다. 석씨 이전에 왕위에 올랐던 박씨의 경우 아달라 이사금 이후 왕위는 잃었어도 신라 중대와 신라 하대까지 주요 귀족 가문으로 계속 왕실에 남아있으면서 먼 미래에는 왕위에도 잠깐 다시 오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때 석씨가 실성을 밀었기 때문에 나중에 실성 마립간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한 눌지 마립간에 의해 석씨 일족도 신라 왕실에서 쫓겨났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10]

단, 실성 마립간의 왕비 아류부인은 정말로 미추 이사금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 신라사 연대 같은 경우, 아무리 올려잡아본들 내물 마립간 때부터 얼추 맞지, 그 이전 연대들은 고고학적 연대와도 상충되고 백제사 연구로 밝혀진 연대와도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걸 근거로 삼아 《삼국사기》 기록 전체의 신빙성을 낮춰보려 한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자들의 식민사관이 논파되었고, 적어도 신라 왕사에서 가계도는 얼추 아귀가 맞다는 게 입증된 이상, 아류부인은 정말로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고 봐야 한다.[11] 일단 재미있는 사실로는 실성 마립간은 내물 마립간과 동서지간이기도 하다는 것. 물론 내물 마립간도 끌어다대고 말고가 아니라 정말로 부인이 미추 이사금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기록은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내물 마립간의 왕비 보반부인과 실성 마립간의 왕비 아류부인은 자매인 것으로 보는 게 아귀가 맞다.

이 실성 마립간은 왕위에 오른 후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고 그에게 국정을 맡겼으며 즉위년(402년)에 내물 마립간의 3남 김미사흔와 화해하기 위해 인질로 보내고 412년엔 2남 김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외교 관계를 개선하려 제스쳐를 취한다. 그가 타국에 볼모로 보낸 미사흔과 복호는 전왕의 친아들들이니 실성 마립간의 최대 정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 인질을 보내는 이유는 '너희에게 거슬리는 짓은 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이고 만약 이걸 어긴다면 보내놓은 인질은 죽을 것이다. 보통 인질은 죽으면 곤란한 중요 인물을 보내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실성 마립간 입장에서 복호와 미사흔은 고구려와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더라도 손해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니 이득일지도 모른다. 고구려와 일본에 고위 왕족을 보내 신라가 명목상 고개를 숙이며 선심 쓰는 척도 하고 전왕의 아들들을 신라 밖 이곳 저곳으로 퍼트려 보내서 세력을 약화해 사실상 숙청시키려는 목적이었던 듯. 복호를 고구려에 보낸 것은 친고구려 노선을 재확인시키는 목적이며 소싯적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온 실성 마립간 본인의 후임이기도 하다.

백제(403년)와 왜(405년)의 침략이 있었지만 격퇴했다. 왜에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음에도 왜가 쳐들어온 건데 기록상 왜 이렇게 되는지 부연 설명은 부족하지만 왜국 측도 미사흔이 말만 왕족이지 인질로서 제대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던지 해서 뭔가 상황이 꼬인 것으로 보인다.[12] 특히 405년 싸움은 4월에 왜군이 침범하여 명활성(明活城)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갈 때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쪽에서 왜병과 2번 싸워 이기고 왜병 300여 명을 죽였다고 한다. 405년에는 신라가 승리했지만 407년 3월에 또다시 동쪽 변경을 침입하더니 6월에는 남쪽을 침범해 백성 10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한편으로 이런 기록도 있다. 이 때는 400년 때처럼 백제와 가야의 병력도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7년(서기 408년) 2월에 왕은 왜군이 대마도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병장기와 군수품을 저축하여 신라를 침범하려고 준비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왕은 우리가 먼저 정예병을 뽑아 왜인들을 쳐부수자고 했다. 그러나 예불감 벼슬에 있는 미사품은,
{{{#!wiki style="margin:1em"
"신이 들으니 병사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넓은 바다를 건너 남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험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막아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만약 우리 쪽이 이로우면 나아가서 적을 사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유인하는 것은 좋지만, 남에게 유인당하는 것은 가장 나쁘다는 교훈[13]으로 가장 좋은 계책인가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옳다 하였다.

14년(서기 415년) 7월, 왕이 친히 혈성원에서 군사들을 열병하고 또 금성 남문에 나아가서 군사들이 활 쏘는 모습을 보았다. 이 해 8월에 풍도에서 왜병과 싸워 이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왕조

유례 이사금 때와 비슷하게 왜국에 대한 선제 공격 이야기가 있었는데 비록 미사품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실성 마립간 개인적으로는 직접 전선에서 군대를 통솔하고 친정할 능력도 제법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쟁에 있어서도 호전적인 성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사위이자 전왕 내물 마립간의 장남인 눌지가 나이가 차고 점점 정치적으로 부상하자 417년 실성 마립간은 눌지를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다. 실성 마립간은 고구려에 있던 시절 알고 지내던 사람을 몰래 불러 "눌지를 보거든 그를 죽여라"라고 사주한 뒤에 그 고구려 사람과 눌지가 밖에서 우연히 만나도록 상황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만나보고 외모가 시원하고 군자의 풍모가 있음을 알고 오히려 눌지에게 암살 계획을 실토해 버리고 눌지가 실성 마립간을 원망해 그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 《삼국사기》와 달리 실성 마립간이 암살을 사주한 게 '한 고구려 사람'이 아니라 '고구려군'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눌지가 스스로 실성 마립간을 죽이고 임금이 됐다고 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군이 눌지를 임금으로 앉혔다고 되어있다. 기록에는 눌지가 덕이 있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나왔지만 대체로 학계에서는 눌지가 사전에 고구려 측과 손을 잡은 뒤 실성 마립간을 시해하고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보고 있다.
왕은 전왕의 태자인 눌지(訥祗)가 매우 덕망이 있는 것을 꺼려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고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들은 눌지가 어진 행실이 있는 것을 보고, 곧 창을 거꾸로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삼은 뒤 돌아갔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제18대 실성왕조 #
실성 마립간은 친고구려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구려에 의해 숙청 당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실성 마립간보다 눌지의 정치적 가치를 더 높게 쳤기 때문이라는 설이 중론이다. 실성 마립간은 겉으로는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지만 이는 정적 제거용에 불과했다. 인질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목숨을 볼모로 쥐고 흔들 협박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실성 입장에서 복호는 고구려가 죽여주면 오히려 고마운 입장이라 인질로는 가치가 전혀 없었다. 혹은 실성 마립간이 비록 고구려의 후원으로 친고구려파로서 즉위했으나 그 역시 근본은 신라인이었기에 즉위 이후에는 차츰 반고구려적 행동을 보였고, 이에 고구려 측이 이렇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실성 마립간을 버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대표적으로 415년 혈성 벌판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해석도 있다. 눌지는 고구려에 이미 인질로 있는 복호의 친형으로 눌지를 왕위에 앉히면 복호의 인질로서의 가치가 올라가고 신라의 행동 제약은 커지는 것이니 눌지가 왕이 되는 게 고구려한테도 이득이었던 셈.

한길사판 이강래 역주 《삼국유사》 〈실성왕조〉에서는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명 그릇을 근거로 들어 이 시기 신라의 정치 격변에 고구려가 깊숙이 관여했음을 고고학적 근거까지 더해 강조하고 있다. 실성 vs. 눌지의 대립 구도 또한 집안 싸움에 고구려가 끼어들어 정치 공작을 펼쳤다는 이야기.

왕릉은 문헌상 비정되는 곳은 없으나, 현대 고고학 연구로 대릉원의 황남대총 남분이 바로 실성의 왕릉이라는 설이 있다. 고고학적 비정에 관한 내용은 신라왕릉 문서 참조.

3.일본서기》 〈신공기〉 관련 기록

爰新羅王波沙寐錦 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은 미질기지 파진간기를 볼모로 하였다.
일본서기》 〈신공황후조〉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구 황후신라를 정벌할 때 신라 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이 미사흔을 일본에 볼모로 보내었다. '파사매금'이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파사 이사금을 가리키는데[14], 여기서 매금광개토대왕릉비통일신라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비에도 나오는 실제로 쓰였던 호칭이며 마립간과 같은 말로 추정된다.

기본적으로 《일본서기》는 당시 왜인들이 삼국을 실질적으로 복속시켜 지배했다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주가 되기 때문에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기사의 세세한 내용들은 지금에 와서는 매우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으로 가득하다고 한·일 양국 모두 판단하고 있으나, 《일본서기》의 〈신공기〉 기록 역시 《일본서기》 특유의 과장을 걷어내고 본다면 100% 허구로 비판할 수만은 없는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일본서기》 〈신공기〉 만큼 과장되진 않았지만, 기년조차 믿을 수 없는 게 대다수이기 때문이다.[15] 또 《일본서기》 한반도 관계 기사는 모두 《백제삼서》(《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에 《일본서기》 편찬 당시 일본의 번국사상을 걷어내고 본다면 오히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보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일본서기이다.

〈신공기〉 기록도 백제와 신라의 대결, 백제의 가야 평정과 마한 지역 평정에 더불어 일본의 신라 정토 사상[16]이 결합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때 파사 이사금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신라사 복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신라가 금관가야를 누르고, 진한 지역의 패자가 된 것은 〈신공기〉의 이주갑인상으로 보정한 연대에 따르면 4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때 이후로 낙동강 이동 지역에는 신라 토기라 할 수 있는 '이동양식토기' 양식이 분화되어 낙동강 이서의 가야 토기들인 함안 아라가야식, 김해 금관가야 양식과 구분된다. 이렇듯 파사 이사금과 석우로는 모두 4세기 이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신공기〉에서는 동시에 등장하고 있으므로 같은 시대 사람으로 보아야 하며, 이렇게 해석하면 도저히 1세기나 3세기 신라가 할 수 없는 활동 범위에서의 파사 이사금과 석우로의 활동이 모두 이해된다. 이는 아까 말했다시피 신라 토기의 성립과 분포 양상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점에서도 최신 고고학 성과조차 《일본서기》의 수정기년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해석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파사 이사금의 활동과 치적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빨라도 4세기 중엽에나 실현됐던 것들로, 이는 《일본서기》의 파사 이사금의 생존연대에 대한 수정기년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조〉에 파사 이사금이 등장하고 《삼국사기》 기록과 시기가 안 맞게 실려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빙성을 무시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일본서기》의 수정기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보다 더 믿을만한 것이다. 물론 백제의 시각에서 쓰인 원 사료에 8세기 일본의 지독한 번국 사상을 걷어내고 봐야 하는건 맞다. 사실 이렇게 《일본서기》가 더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음은 다른 사례도 많다. 예를 들어 무령왕의 생몰연대라던가 관산성 전투의 진행 양상 등이 있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훨씬 먼저 쓴 책이므로 《일본서기》 쪽이 좀 더 당시 기록(특히 백제 측 기록)을 많이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이렇게 된 데에는 7세기 경 단일 왕통이 확립되면서 기존의 이사금과 마립간들의 계통을 일원화시키면서 빚어진 촌극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포항 냉수리 신라비 등지에서는 6세기 초반까지도 지증왕법흥왕이 신라 6부 중 탁부 또는 사탁부의 대표로 나올 뿐이며 나머지 7명의 왕[17]이 존재한다. 갈수록 김씨 집단이 마립간을 장악하여 더 큰 권력을 행사한 것은 맞지만, 6세기 중엽 이전 신라는 그래도 6부의 여러 왕이 병존하고 동시에 판결을 내리거나, 어느 한 왕이 결정을 하였는데 이것이 일원화되면서 여러 계통의 왕의 순서가 뒤섞이면서 발생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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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잇다른 백제와 왜의 공세를 안정적으로 막아내고 기병대를 이끌고 직접 친정하는 모습까지 기록된 것으로 보면 내정은 차치하고서라도 군사적 능력 만큼은 꽤 준수했던 임금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실성왕은 키가 7척 5촌[18]이나 되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라고 《삼국사기》에 긍정적인 평까지 기록되어 있다. 實聖이라는 것도 성왕이라는 상당히 좋은 의미이므로 만약 그가 폐위되었다면 쉽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아니다.[19]

결국에는 내물왕계와의 지나친 갈등이 화를 불렀다는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원래 내물 마립간의 아들들이 나이가 어렸기에 그가 대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20]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욕심을 가지게 되었고[21] 그로 인해 왕위를 다시 주장한 내물계에게 밀려났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다. 실제로 이후 눌지 마립간은 자신의 동생인 복호와 미사흔을 다시 신라로 데려온다. 그리고 기록상 애매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자신의 형제들의 딸을 자신의 며느리로 받아들인다. 이는 자신의 손자인 소지 마립간의 왕비들도 자신의 형제들의 손녀들로 채워진다는 점에서 내물계의 왕위에 대한 공고함을 나타내주는 지표라 볼 수 있겠다.

5.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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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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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실성 이사금 본기〉
一年春二月 실성 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다
二年春一月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다
二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에 침입하다
三年春二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四年夏四月 왜병이 퇴각하는 것을 매복하여 물리치다
五年秋七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五年冬十月 서울[22]에 지진이 일어나다
五年冬十一月 얼음이 얼지 않다
六年春三月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입하다
年夏六月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입하다
七年春二月 대마도에 군영을 정벌하려다 그만두다
十一年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다
十二年秋八月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다
十四年秋七月 혈성의 들판에서 사열하다
十四年秋八月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기다
十五年春三月 동해 바닷가에서 뿔이 있는 큰 고기를 잡다
十五年夏五月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3장이나 솟아오르다
十六年夏五月 왕이 죽다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음에도 왜가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4개나 보인다. 사실 왜라고는 해도 이 시기는 일본열도에 통일 정권 하나만 있었는지도 불분명해서 서로 다른 세력일 수도 있다.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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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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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황남대총 · 포항 냉수리 신라비 · 명활성
가계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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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 황남대총 남분에서 실성 마립간의 유해로 보이는 뼈의 나이가 60대였는데 이 뼈가 진짜 실성 마립간의 뼈라면 실성 마립간은 35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 “탁부 소속인 사부지왕”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실성 마립간이 탁부에서 태어난 것으로 확인되었다.#[3] 출처 황남대총의 남분 주인 금동관 머리부터 신발까지의 길이로 추정한 키인데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이 실성 마립간이라고 가정하면 실성 마립간의 키는 181cm가 된다.[4] 《삼국사기》에 7척 5촌이라 나온다. 당시 신라에서 사용된 척도인 남조척 24.5cm를 기준으로 계산한 키이다.[5]삼국유사》 기록.[6] 포항 냉수리 신라비 기록.[7]일본서기》의 기록.[8]삼국유사》 〈왕력편〉은 대서지가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라고 기술했으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실성이 내물왕의 조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에 따르면 대서지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 된다. 정작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대서지가 그냥 '알지의 후손'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실성 마립간의 즉위는 미추 이사금이 승하하고 무려 118년 뒤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삼국유사》를 따라 실성 마립간이 미추 이사금의 조카라고 보기보다는 《삼국사기》를 따라 손자라고 보는 쪽이 더 설득력이 높아보인다.[9] 고구려군이 나제동맹이 체결되는 5세기 중반까지 신라에 주둔하는 모습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10]속일본기》에 기록된 723년 8월 8일 일본에 갔다온 사신단 중 부사가 한나마(대나마) 석양절(昔楊節)인 것을 봐서 석씨가 통일신라 시기에도 최소 5두품 이상의 귀족이었던 것은 확인된다. 그러나 한때 왕을 배출했던 것에 비하면 비중이 매우 낮아진 것이다.[11] 왕위 계승성을 높이기 위해 엄연히 누군가의 손녀인 자를 딸이라고 하는 등의 생각은,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그 사례가 없는 황당한 발상이다.[12] 사실 왜라고는 해도 이 시기는 일본 열도통일 정권 하나만 있었는지도 불분명해서 그냥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마냥 서로 다른 세력일 수도 있다.[13] 서불한 미사품은 여기서 손자병법 <허실>편 6-1 치인이불치어인(致人而不致於人)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실성왕 시기의 신라가 이미 손자병법을 용병에 이용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되는 구절(김광수, 1999)이라고 한다.[14] '파사'의 한자가 《삼국사기》와 다르지만, 어차피 신라 초기의 인명과 지명은 대부분 고유어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어서 한자의 자형은 큰 상관이 없다.[15] 이걸 기록한 김부식 살았던 고려시대 기준으로도 1,000년도 더 이전 이야기들이므로 참고한 기록들도 부정확한 내용이 매우 많았다. 김부식 본인도 너무 앞뒤 아귀가 안 맞는 내용에는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일단 써 둔다는 식으로 쓰기도 했다.[16] 〈신라본기〉에 나오는 수많은 왜병 침입 기사를 상기해보자. 광개토대왕릉비도 왜의 신라 원정은 사실임을 웅변하고 있다.[17] 다만 갈문왕이나 다른 여러 인명에서 보이듯 초기 신라는 진짜 국왕이 아닌 사람에게도 王이 붙는 사람이 많다.[18] 척은 시대마다 길이가 달랐고 보통 후한척 23cm, 남조척 24.5cm 정도로 본다. 따라서 남조척을 기준으로 미터법으로 환산해보면 184cm 정도가 된다.[19] 다만 휘가 실성이라면 의자왕의 경우처럼 이름만 그렇고 실제로는 폐위되었을 수 있다.[20] 이는 실성이 내물 마립간의 장남 눌지를 사위로 삼은 것에서 나타난다. 선왕의 사위가 즉위할 수 있는 신라 사회의 전통이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21] 대표적인 욕심이 드러나는 사례가 바로 눌지의 동생인 김복호김미사흔을 타국에 볼모로 보낸 것이다.[22] 원문은 京都로 당연히 경주 월성이 위치했던 현재의 경주시를 말한다. 서울을 뜻하는 京은 한강에 있는 서울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우리말 '서울'을 뜻하는 단어다.[23] 그대로 해석하면 '왕실에서 쌍둥이가 태어나면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다'는 뜻인데 사실 《삼국유사》에 등장한 표현인 성골남진(聖骨男盡)을 바탕으로 제작한 창작 설정이다.[24]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명나라 장수 양호 역.[25]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