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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21:47:52

김건모

쉰건모에서 넘어옴
김건모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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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S 로고.svg 가요대상 대상
김수희
애모
(1993년)
<colbgcolor=#FFFFA1,#5D5E00> 김건모
핑계
(1994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핑계
(1994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스피드
(1996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스피드
(1996년)
임창정
그때 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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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희
애모
(1993년)
<colbgcolor=#FFFFA1,#5D5E00> 김건모
핑계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
Come Back Home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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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김건모
핑계
(1994년)
룰라
날개 잃은 천사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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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신승훈
<널 사랑하니깐>
(1993년)
<colbgcolor=#FFFFA1,#5D5E00> 김건모
<핑계>
(1994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핑계>
(1994년)
김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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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김건모
<스피드>
(1996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1995년)
김건모
<스피드>
(1996년)
H.O.T.
<행복>
(1997년)
* 2006부터 음반 대상디지털 음원 대상으로 나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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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가요대상 대상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colbgcolor=#FFFFA1,#5D5E00> 김건모
<핑계>
(1994년)
룰라
<날개 잃은 천사>
(1995년)
조성모
아시나요
(2000년)
김건모
<미안해요>
(2001년)
보아
<No.1>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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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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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04년
※ 200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공동 2위 4위 5위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현철
6위 7위 8위 9위 10위
태진아 신승훈 송대관 김건모 설운도
2009년
※ 200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장윤정 BIGBANG 태진아 이미자 소녀시대
{{{#!wiki style="margin: -16px -11px" 6위 7위 공동 8위 공동 10위
나훈아 조용필 현철 손담비 이승철 송대관 }}}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조용필 이선희 장윤정 아이유 태진아
6위 공동 7위 9위 10위
EXO 이승철 이미자 나훈아 소녀시대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방탄소년단 장윤정 나훈아 아이유 조용필
6위 공동 7위 9위 공동 10위
이선희 태진아 이미자 이승철 김연자
공동 10위 15위
이문세 홍진영 TWICE 박효신 남진
16위 17위 공동 18위
임창정 송가인 김건모 설운도 진성
21위 공동 22위
성시경 거미 BLACKPINK 잔나비
2024년
※ 202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임영웅 아이유 방탄소년단 나훈아 NewJeans
6위 7위 8위 9위 10위
장윤정 진성 영탁 송가인 BLACKPINK
11위 12위 13위 공동 14위
이찬원 성시경 김연자 김호중 조용필
16위 17위 공동 18위 공동 20위
이효리 전유진 IVE 이문세
공동 20위
이미자 이승철 장민호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예능인, 좋아하는 유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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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건모
金健模|Kim Gunmo
파일:attachment/kimgnm.jpg
출생 1968년 1월 13일[2] ([age(1968-01-13)]세)
부산직할시
(現 부산광역시)
출신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김녕 김씨 (金寧 金氏)
신체 168cm|57kg|O형
가족 아버지 김성대(1939년~2019년)[3]
어머니 이선미(1944년 1월 16일)[4]
형 김경모, 남동생 김현모[5]
학력 서울신월국민학교[6] (졸업)
화곡중학교 (졸업)
화곡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전문대학[7] (국악과 / 전문학사)[8]
병역 대한민국 해군 해군홍보단 수병 만기전역 (314기)
종교 개신교
소속 건음기획[9]
데뷔 1992년 정규 1집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별명 국민가수, 한국의 스티비 원더, 김건반, 깜상, 연탄, 마른털[10], 쉰건모, 쉰둥이, 흑(黑)기사[11]
취미 RC카, 드론, 게임, 킥보드,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종이접기, 음주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계정정지]

1. 개요2. 가수 활동
2.1. 1~3집 대한민국을 뒤흔든 국민가수의 탄생2.2. 4~6집: 성공적인 홀로서기2.3. 7, 8집: 제2의 전성기, 마지막 불꽃2.4. 9~13집
3. 음반 목록4. 수상 내역
4.1. 시상식4.2. 가요 프로그램 1위
5. 평가
5.1. 위상5.2. 역량5.3. 타인들의 평가
6. 논란 및 사건 사고7. 여담8. 방송 활동9. 배우 활동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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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가수.

1990년대 많은 히트곡들의 발매로 엄청난 인기를 끌어 '국민가수'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독특한 음색과 음악적 역량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명곡들을 다수 발표하였으며, 여러 가지 장르를 시도하고 유행시켰다.

대한민국 최단 기간 최다 음반 판매량 기네스 기록 소유자에 골든디스크 최초 3회 연속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며, 1994년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와 서울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시상식까지 5대 가요 시상식에서 모두 대상을 수상했다. 지상파에서 가요대상 시상이 사라진 현재 시점에서 이 기록을 보유한 가수는 김건모가 유일하다.

2. 가수 활동

김건모의 음악 인생은 '김창환 사단'의 첨병으로 과장 좀 보태 국민가수가 된 1집에서 3집까지의 전기, 김창환을 떠나 역량있는 솔로 아티스트로 성장했던 4집에서 6집까지의 중기, 대중성의 제고를 위해 최준영과 손을 잡고 다시 반등한[13] 7, 8집 이후의 후기로 나눌 수 있다.

2.1. 1~3집 대한민국을 뒤흔든 국민가수의 탄생

1999년 스타데이트 김건모 편 일부
서울예대 86학번 국악과였던 김건모는 졸업 후, 같은 학교 선배인 박미경의 소개로 프로듀서 겸 작곡ㆍ작사가인 라인음향김창환을 만나게 된다.[14]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혹독한 프로듀싱을 받은 김건모는, 1992년 10월 무렵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15]를 타이틀로 1집 앨범을 발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디오에서는 그의 노래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뛰어난 노래 실력만큼이나 독특한 음색에, 대중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음반판매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인기에 TV프로그램에서도 섭외전화가 쇄도하자, 그는 기쁜 마음으로 방송에 출연하기로 했는데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방송이 TV에 나오자 갑자기 음반판매량이 수직상승이 아닌, 수직하락을 하기 시작했다. 원인은 바로, 가창력과 음색에 비례하는 외모를 상상했던, 대중들의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상대적으로 못생긴 얼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낙심하지않고 계속해서 각종 오락프로그램에 열심히 출연하여 예능감각을 뽐냈고, 방송사를 오갈 때마다 타 가수와 직원들에게 꾸준히 인사하며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다져갔다. 결국 그는 멋진 외모가 아닌, 친근감과 가창력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다시 끌어모았고, 이로서 앨범판매량 또한 다시 상승하게 되었다. 덕분에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에서 이어지는 같은 앨범의 후속곡 첫인상이 1993년 11월 가요톱텐 5주 1위 골든컵을 수상하면서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된다.[16] 이것은 외모 공개 한 번 잘못했다가 묻힐 뻔 한 그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였으며, 데뷔한지 13개월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앞의 미담은 김창환이 방송에서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 기사화되어 사실처럼 와전된 것이다. 애초에 김건모는 가수 데뷔 때부터 얼굴을 공개한 채로 활동했으며, 아예 1집 앨범 커버에 대놓고 김건모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방송에 나오자 외모 때문에 앨범 판매량이 폭락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실제 기록을 봐도 '잠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는 가요톱10 93년도 2월에 10위권 내(7위)로 첫 진입한 후 6월까지 단 한 번도 10위권 밖으로 차트아웃 되는 일 없이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그의 음악은 가요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음색과 노래였으며, 당시에만 해도 생소했던 재즈와 소울을 기반으로 힙합, 레게가 가미된 '흑인 음악' 그 자체를 흥겨운 멜로디에 녹여내 대중음악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 1집 앨범은 70만 장이 팔리며 신인치고는 상당히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방송 3사의 신인상, 10대 가수상, 신세대가수상을 석권하며 크게 주목받았다.
1993년 7월 21일 KBS 가요톱텐
1집 때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1993년 12월쯤 2집 앨범을 발표했다. 후속작의 타이틀곡은 혼자만의 사랑이었지만 레게 리듬을 도입한 하우스 댄스곡 핑계가 소위 길보드차트라 불리는 불법테잎 노점을 통해 입소문을 타고 대박을 쳤다.[17] 이 곡 하나로 단숨에 '노래좋은 인기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위상이 급상승했다. 가요톱텐 골든컵을 또 다시 차지하는 건 물론이고 1994년 초반을 사실상 그의 독무대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발매하려던 수많은 인기가수들의 음반이 연이어 미뤄진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에 불과할 정도다.

1집에서 '재즈'와 '소울'을 알렸다면 2집에서는 자메이카 '레게'를 전국에 알리면서 이후 1994년을 '레게 열풍의 가요계'로 만들만큼 대중음악사에 미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18] 타이틀곡 핑계로 골든컵을 또 다시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후속곡 혼자만의 사랑으로 김건모표 발라드를 세상에 널리 알리면서 애절한 발라드도 잘 소화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후 앨범마다 유명한 발라드곡[19]을 매 앨범마다 남길 정도로 이후 그의 음악 커리어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앨범으로 180만장을 기록하면서 1994년 음반판매량 전체 1위를 차지했음은 물론이요, 방송 3사 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에서 모두 대상 수상이라는 영광스러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20] 그의 커리어 하이는 3집이었지만, 1위와 대상 수상에 있어서는 2집의 기록이 오히려 더 많을 정도였다.[21] 이때 10대부터 40대까지 트렌디를 쫒는 신세대와 트로트, 성인가요를 즐겨듣는 구세대까지 골고루 인기를 얻으면서 본격적으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이 인기는 다음 해인 1995년 2월 발매된 3집까지 이어져 공전절후의 히트를 쳤으며,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 바로 잘못된 만남.[22] 이번에는 강렬한 유로비트하우스 장르를 들고 왔는데, 엄청나게 빠른 비트에 말하듯 외치는 랩과 후렴구의 숨쉴틈 없는 고음 폭풍이 쉴새없이 몰아쳐, 이후 1990년대 말까지 전국에 하우스 열풍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 곡이었다. 이 곡 역시 KBS 가요톱텐 5주 1위 골든컵, SBS TV가요20 6주 1위,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2주 1위라는 기록을 달성했고 KBS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잘못된 만남의 인기야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엄청났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에 '너에게', '드라마', '넌 친구? 난 연인!', '아름다운 이별' 등의 앨범 수록곡들까지 많은 인기를 끌게 되면서 1990년대 초중반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한국 가요계를 휩쓸었다.

이 당시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1994년에는 영화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믹스'라는 제목으로 김건모가 미국 공연 도중 폭력조직에 납치됐다가 기지를 발휘해 탈주하는 과정을 엮은 코믹액션물. 미국 현지 로케까지 해가며 절반 가까이 촬영했지만[23] 도중에 상대 여배우가 교체되었고 영화 완성도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는 등 잦은 마찰로 결국 엎어진 망작이다. 그의 여러 큼직한 흑역사 가운데 손꼽히는 사건이지만 개봉은커녕 촬영 중에 중지된지라 천만다행으로 잊힌 흑역사. 그 전까지 가수들은 대부분 예능 출연을 자제했지만, 이와 달리 김건모는 예능 출연에 적극적이었고 특히, 당시 예능이 개그에서 토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에 편승하여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3집 잘못된 만남은 골든컵은 물론이거니와 무려 286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24] 그 당시 대한민국 인구가 4,500만 명이었으니 단순 계산으로 할 경우 적어도 16명당 김건모 음반 1장은 사갔다는 소리가 된다. 이 대기록은 한국 기네스에까지 당당히 올라가, 가요계의 명예의 전당의 정점에 손꼽히는 앨범으로 남게 되었고, 팬들과 평론가, 대중성까지 모두 잡은 불후의 명반으로 인정받게 되었다.[25]

다만 1~3집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것과는 별개로 김창환의 혹독한 프로듀싱과 사생활 관리, 김건모의 유별나게 자유분방한 성격이 부딪히며 불화가 겉잡을 수 없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성격이 둘 다 불과 같은데, 한번 뭉쳐진 응어리가 결국 맞불로 번지면서 더 이상 김창환 사단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한 리스크가 그에게 찾아왔던 것이다.

결국 3집 활동을 끝내고 최정상에 올랐을때 그를 정상에 올려준 은인이자 가장 많이 괴롭히고 혹사시켰던 김창환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다. 김창환 역시 공개적으로 그를 저격하면서 섭섭한 감정을 아낌없이 드러냈지만 워낙 오래된 일이고 나중에 와서 다시 화해하면서 그 당시의 일들은 현재로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 편이다.

2.2. 4~6집: 성공적인 홀로서기

3집 활동 이후 그는 당대 가요계의 미다스의 손 김창환의 라인기획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가요계에 충격을 주었다. 뮤지션으로서 지향점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강력한 상업성으로 호불호가 존재하던 김창환에게서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성장을 위한 홀로서기에 나선 것.

결별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프로듀싱한 4집 'Exchange'는 1996년의 별들의 전쟁 시기에 발매했고, 최준영, 솔리드정재윤 등과 손을 잡았다. 의외로 이 시기가 매우 큰 슬럼프였다고 하는데 2~3집 당시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한데다 김창환과 대판 싸우고 나가면서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지쳐있었던 상태였고, 워낙 큰 히트를 연이어 기록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네가 김창환 떠나서 잘 될 것 같냐' '넌 김창환 덕에 뜬 거지 네 능력은 제로야'라는 말을 매우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수 생활을 은퇴해야 하나하는 기로에 설 정도로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으나, '내 스스로 한번 보여줘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고 심혈을 기울여 앨범을 제작했다고 전해지며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매 앨범마다 변화하던 그의 음악적 성향에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신뢰감을 보내면서, 4집이 발매되자마자 타이틀곡 스피드를 비롯해서 제대로 된 활동이 없었던 수록곡들(미련, 악몽, 빨간우산)까지 차트에 이름을 올리며 크게 사랑받았다. 앨범 수록곡들도 대중이 원하는 스타일과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방향을 적절히 섞어 많은 호평을 받았고, 김창환을 떠나도 그 스스로 훌륭한 수작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워낙 전에 다져놓은 기반이 단단했던 덕분에[26] 스피드 역시도 골든컵 달성이 유력해 보였으나, 4주 1위를 달성하고 대기록을 세우기 직전 자신의 전 소속사의 신인 듀오에게 정상 자리를 넘기는 바람에 조용필에 이어 정규앨범에서 4장 연속이자 4년 연속으로 골든컵 수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된 게 매우 큰 화제가 되었다.

실제로 타 방송사에서도 3주 1위, 2주 1위에 그치는 바람에 1위 수상기록으로만 따지면 전작에 약간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다.(14회 1위)[27]

그럼에도 '스피드'는 무려 음악방송 14회 1위를 기록해 당시 최고인기가요로 우뚝 섰고, 동명의 MBC 프로그램 오프닝 삽입곡으로 유명한 '테마게임'을 히트시켰으며 또 다른 활동곡인 '악몽'과 '미련'도 준수한 인기를 얻으면서 160만 장의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KBS에서 3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그 해 MBC 한국가요제전에서 최고인기가요상(대상)과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최초로 3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면서 핑계-잘못된 만남-스피드라는 최절정 전성기의 마무리를 지었다.[28]

이후 1997년 12월 발매된 5집 'Myself'에서는 최준영 대신 윤일상, 방시혁 등과 손잡으면서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음악적 방향도 바꾸었다.[29] 앨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본격적인 프로듀서로서의 행보를 보여준 앨범으로, 두 번째로 직접 프로듀싱했지만 이전보다 한층 진보한 재즈와 소울을 기반으로 한 흑인 음악의 색깔이 더욱 짙어지며 평단의 호평을 이끌었다. 특히 타이틀곡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사랑이 떠나가네'가 매우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이전과는 조금 타이틀곡의 방향이 달라졌는데, 1~2집의 실험적 성향 타이틀곡, 3~4집의 트렌드에 맞춘 타이틀곡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게 5집 타이틀곡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쿵짜자 쿵짝'거리는 트로트 비트를 기반으로 한 타이틀곡이었다. 사랑이 떠나가네 역시 마찬가지로 다소 올드한 느낌의 리듬이 쭉 이어진다. 갑자기 올드한 느낌의 곡들로 활동방향이 바뀐 이유는 데뷔 초~최절정기인 1990년대 초중반에는 트렌디한 느낌의 재즈, 소울, 레게, 하우스 등을 바탕으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자신이 개척한 장르가 대세가 되면서 비슷한 장르의 가수들이 급격하게 쏟아져 나와 식상해진 감이 있었고, 김건모 본인의 나이도 30대에 접어들면서 대중가요 주 소비층인 10~20대층에선 다소 밀려난 듯한 인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핑계' '잘못된 만남'을 통해 트렌드에서 멀어졌었던 30~40대에도 큰 인기를 끌며 '국민가수' 타이틀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이름값을 바탕으로 상대적 고연령층을 타겟으로 방향을 살짝 옮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예전 3~4집만큼은 못 해도 초창기에 활동한 '당신만이'와 '사랑이 떠나가네'는 가요톱텐 기준으로 각각 10, 3위까지 오르면서 선전했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각종 가요차트 1위를 쓸어담고 110만장을 판매하면서 여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으나, 2년 후인 1999년 11월 발매된 6집 'Growing'은 뛰어난 작품성과는 달리 49만 장에 불과한 저조한 판매량과 미비한 홍보로 대중적으로는 처절하게 묻혔고 가요 차트에선 10~20위 권 정도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이 앨범은 그의 뮤지션으로서의 전성기였다.

이미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 있던 김건모는 그가 원하는 음악을 아낌없이 이 앨범을 통해 보여주었고, 왜 그가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는 평가를 받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앨범이었다. 비록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에 실패했지만 평단 역시 김건모의 변신과 새로운 시도에 호의적이었다. 다만 음악적으로는 현재까지도 3집과 더불어 그의 최고작으로까지 평가되는 6집이 상업적인 면에선 별다른 흥행을 하지 못하자, 그는 고심 끝에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된다.

2.3. 7, 8집: 제2의 전성기, 마지막 불꽃

2001년 김건모는 4집 때 호흡을 맞췄던 최준영과 함께 대중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7집 'Another Days...'에서 완벽히 재기하며 자신의 전성기였던 2~4집에 버금가는 반응을 얻었다. 애절한 발라드 타이틀곡 미안해요와 코믹한 댄스곡 짱가, 테크노 기반의 트렌디한 댄스곡 Double, 1964년 발표되어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성인가요 빗속의 여인까지 크게 인기를 얻으며 앨범 수록곡의 절반이 대중들에게 사랑받아, 4집 이후 가장 큰 인기를 누리며 음악프로에서 여러 번 1위를 수상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의 3배 가까이 뛰어올라 143만 장이라는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그 해 이미연의 연가(컴필레이션)와 god에 이어 최종 3위에 올라 다시금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한동안 뜸해졌던 예능계에서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활발하게 방송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 해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30]

반면 대중의 호응과는 별개로 활동곡인 '짱가'와 '빗속의 여인' 등에서 나타난 음악적인 퇴행은 음악 마니아들의 많은 안타까움을 샀다. 이전까지 흑인 음악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길을 걸었다면, 6집에서 실패를 맛본 이후 기존 행보와 너무나 반대되는 대중적인 행보에, 이미 데뷔 10년차로서 자신의 팬층 나이대가 올라간 것까지 감안하여 30~40대의 성인 취향의 곡들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리메이크곡 두 곡을 합해도 트랙 수는 9개에 불과했고, 실제 신곡은 겨우 7개에 그쳤다. 이전 5, 6집에서 15트랙까지 꽉꽉 수준 높은 곡들로 채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성도였고, 이쯤되면 대중가요 음반시장의 마지막 절정기로서 대부분의 가수들이 못해도 12트랙 이상, 많으면 20트랙 가까이 채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곡 수에 있어서도 날선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었던 '스티비 원더'스러운 음악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에, 팬들과 평단에서는 냉정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당시 MBC 음악캠프에서 문차일드의 '사랑하니까'에게 정상 자리를 넘겨준 직후, '음반판매량이 나의 1/10에 불과한 신인 가수가 어떻게 1위를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음악방송 순위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MBC 방송출연을 일절 거부하겠다고 선언해 방송사와 큰 마찰을 빚었다. 또 연예계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인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며 대중적인 호감도를 크게 깎아먹었다. 이때 저지른 사건으로 김건모는 스타병에 걸린 유아독존 지멋대로의 연예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아직까지도 이 꼬리표로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존재할 정도로 이미지를 크게 실추하게 되었다.

다만 대중들에게 보이는 이미지는 저랬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방송 순위는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수시로 바뀌거나 명확히 밝히지 않는 순위의 기준점 때문에 공정성을 잃은 상태였다. 문차일드의 소속사가 바로 그 유명한 김광수가 운영했던 GM기획이었으며, 이 소속사의 간판스타 조성모를 띄우기 위해 별짓을 다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대형기획사에 의한 힘의 논리라는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또한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 반기를 든 대다수의 연예인은 그들을 움직이는 언론, 정권, 조폭계의 실세에 의한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출연했었던 경향이 강하며, 김건모 자신도 그들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했다. 가요계의 거물이자 큰손인 만큼 그를 견제하는 정경계와 어둠의 세계에서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순위제 도입 때부터 2001년 중반까지의 가요 순위제는 대부분 방송 횟수나 시청자 투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팬덤이 많은 가수들이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음원이 차지하고 있는 대중성의 지표는 그 당시로서는 음반 판매였지만, 이는 거의 반영이 되지 않았다.

또한 투표라는게 조작이 매우 쉬운 분야고 인터넷이 덜 발달한 당시에는 그것이 더욱 쉬웠기 때문에 김건모 당사자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대중들 또한 납득하기 매우 힘든 순위 결과였다. 그 뒤 음반과 음원 분야 점수는 2001년 후반부터 도입되었으며 그 덕분에 2002~2004년까지는 아이돌보다는 비아이돌에게 1위가 많이 돌아갔다. 당장은 음악성과 인기를 등가교환한 셈이 되었고 위에 거론된 사건들과 이후 음반 시장의 침체로 7집이 그의 마지막 밀리언셀러가 되었지만, 한순간에 인기가 사그러들진 않았고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8집까지 지속됐다. 2003년 2월 발매한 8집 'History'에서는 앨범 메인 자켓에서 연탄사진을 실어 대놓고 올드 팬들을 겨냥한 듯한 인상을 주었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애절한 발라드곡 청첩장을 타이틀로 삼았다. 누가 봐도 완벽하게 7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앨범으로, '미안해요' - '청첩장'으로 이어지는 발라드 라인을 비롯하여 '짱가' - 제비로 이어지는 코믹한 후속곡에, 심지어 오래된 고전가요를 리메이크하여 행사와 나이트 위주로 인기를 끌은 '빗속의 여인' - 아파트 라인까지 동일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테크노 기반의 트렌디한 댄스곡을 밀었던 'Double'과는 달리, 이미 댄스 장르가 사양화되던 시기였던지라 자전적 가사가 담긴 소울곡 My Son을 또다른 후속곡으로 삼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앨범이었지만, 어릴적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가사로 실은 'My Son'은 그가 추구했던 음악적 방향성을 다시 살린 곡으로 높은 호평을 받았다. 7집에 못지 않은 폭발적인 인기를 통해 대중적인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지만, 순위제 방송사에선 많은 피해를 봐서 체감 인기와 음반 판매량에 비하면 1위 수상 기록은 매우 부실했는데 케이블 '쇼 뮤직탱크'에서 2003년 4월 5일~19일까지 '청첩장' 3주 1위, 지상파 SBS 인기가요에서 4월 6일 - 'My Son' 1위 수상이 전부였다. 일단 전작에서 MBC를 두 번이나 물먹인 전력이 있어서 음악캠프 측에서는 아예 1위를 할 수 없도록 대놓고 견제를 당했다. 물론 그 사이에 어찌저찌 MBC 화해를 했기 때문에 예능과 음악방송에 출연할 수는 있었지만 청첩장의 인기를 누를 정도로 막강한 경쟁자가 딱히 없었던 상황이었음에도 고작 1위 후보에 머물렀다.

또한 KBS 뮤직뱅크에서는 순위제를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1위가 가능한 지상파 방송은 오로지 SBS 인기가요 뿐이었음을 감안하면 8집도 어느 정도 많은 인기와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타이틀곡 '청첩장'은 지상파 1위는 하지 못했으나 케이블 순위제 프로인 '쇼 뮤직탱크'에서는 2003년 4월 5일~19일까지 3주 1위를 했으며 각종 음원 차트에서도 높은 순위에 랭크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김건모표 발라드에서도 자주 손꼽히는 명곡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삼속곡으로 선보인 '제비'는 순위제를 운영했던 음악캠프에서 1위 후보까지 오르는 등 선전했다. 이 앨범으로 대략 53만 장을 기록하면서 2003년 전체 음반판매량 1위를 가져가는 영광을 얻었다.

이는 앨범 발표 당해 년도에서 전체 1위를 차지한 것은 1995년 잘못된 만남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쉽게도 음반 산업의 침체가 가속화되면서 밀리언셀러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김건모가 메이저에서 남길 수 있었던 '국민가수' 타이틀에 걸맞은 마지막 성적이었다.[31] 또한 그의 8집 앨범이 대한민국 음반 역사상 한 해 동안 판매된 마지막 하프 밀리언셀러 단일 앨범이 되었다.[32]

이 시기가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다시 한 번 큰 전환점이 되었는데, 8집 앨범 활동을 마치고 불법 다운로드로 인한 음반시장의 악화와 방송활동과 음반홍보를 통한 후배 가수들과의 경쟁에 염증을 느끼고 공연활동으로만 팬들과 만날 것이라 밝히게 된다. 이 이유로 인해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와 음반 판매고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에서 1위를 많이 차지하지 못했고, 결국 골든디스크 대상이 99% 확실시 되었음에도 불참하면서 수상자리를 조성모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조성모는 당시 <피아노>를 타이틀 곡으로 한 5집 <가인>으로 4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2003년 음반 판매량 3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2위 이수영의 경우 앨범이 8월에 발매되어 12월에 들어서 조성모 앨범판매량을 추월했고, 골든디스크 음반판매량 집계 기준은 2002년 12월~2003년 11월까지였다. 따라서 김건모가 불참, 이수영이 역전 직전의 상황에서 3위였던 조성모가 정말 운 좋게 간신히 수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성모가 수상 소감으로 방송에서 은퇴하셨지만 이제 콘서트장에서 그를 열렬히 사랑해 주시기 바란다고 아쉬운 마음을 표한 적이 있다.

2.4. 9~13집

어느 예능 출연 중 MC가 PD에게 "게스트들이 힘들어하니 좀 쉬었다하자"라고 말하자 PD가 "쉬긴 뭘 쉬어. 쉬고 싶으면 뽑아 먹을 거 빨리 뽑아먹고 보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 방송활동 은퇴를 선언했다는 이야기를 2015년 1월 라디오 스타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완전히 트렌드가 바뀐 음반생태에 있어 방송활동을 제하고 히트를 기록하는 것은 그 김건모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8집의 경우 그래도 일부 예능에서는 출연을 했지만, 바로 다음 해 발매된 9집이 전작의 1/10 수준으로 판매량이 줄고 타이틀곡인 '잔소리'도 다소 묻히게 되자 결국 방송활동 은퇴 선언을 2년 만에 번복하고 2005년에 방송에 복귀했다. 이후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컸던 듯...

하지만 7~8집에서 대중적 인기를 상당히 의식했던 행보와는 반대로 방송 중단을 선언하면서 그의 음악적 행보는 완전히 극초창기 또는 6집 비견할 만한 수준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9~10집이 김건모 음악 커리어의 전성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자신의 음악적인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준 9집과 10집은 팬들과 평단에게 매우 좋은 평가를 받으며 비운의 명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9집의 경우 방송활동 중단이라는 행보와는 걸맞지 않게 전작의 구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 다소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였으나, 10집은 김건모의 팬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이견 없이 완벽한 앨범으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쏟아놓은 최고의 명작으로 칭송받는 앨범이다. 실제로 그가 처음으로 프로듀싱을 맡았던 4~6집 시기와 비교해서도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이때는 자신이 원하는 장르의 곡과 대중성을 의식한 곡을 적절히 분배하고, 흑인 음악 성향의 곡들도 1~2곡을 제외하면 대중성을 모토로 말랑말랑하게 분위기를 바꾸어 내었다.[33] 하지만 10집에 이르러서는 대중성을 의식한 하이브리드화를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재즈, 블루스, 소울 장르 본연의 색깔에 집중하여 미국 본토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 가장 '흑인음악 본연에 가까운' 농도 짙은 곡들 뿐이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던 발라드&댄스곡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다. 정통 재즈, 블루스, 소울음악을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한국 가요계에서 찾기 힘든 보석이라고 표현할 수준이었다. 다만 이 때문에 그의 역대 앨범 커리어 중 가장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는 앨범이어서, 최고의 역작이라 평가받지만 경우에 따라 단조롭고 지루하다는 의견도 일부 보이는 편이다.

이 시기에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곡은 2년 만에 방송 복귀하며 대중들에게 모습을 선보인 10집 타이틀곡 서울의 달이다. 블루스와 재즈를 적절히 섞은 이 노래는 기존의 발라드&댄스로 묶일 수 있었던 그의 활동곡들과는 엄연히 차별화되는 곡이었다. 대중들에게 인기를 못 얻고 그냥 김건모가 간만에 좋은 노래 들고 왔네 수준으로 기억되다가 201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빛을 보며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과 음원 차트, 노래방에서 스테디 셀러로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김건모 본인도 공연을 나갈 때 '잘못된 만남'과 함께 꼭 챙기는 곡 중 하나가 바로 이 '서울의 달'이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장르의 곡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곡으로, 뒤늦게나마 오래도록 사랑받는 것이 정말 감사하다고 밝히며 현재도 강한 애착을 보이는 곡이다.

계속되는 미진한 상업적 성취에 좌절한 김건모는 2008년 다시 김창환에게 돌아가 프로듀싱을 맡기는 초강수를 두며 12집과 13집을 발매했지만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4년 10월' 3년 만에 14집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앨범 작업이 늦어지며 연기되었다가 2016년 11월 19일, 신곡 1곡과 기존 곡을 리마스터링하여 듀엣으로 나눠 부른 미니앨범을 발매했다. 발매 3주 전 SBS 미운 우리 새끼에서 피아노 반주와 함께 부르는 것이 방송되며 일종의 선공개(?) 프로모션이 이루어졌다. 제목은 《다 당신 덕분이라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노년 부부의 이야기를 풀어낸 노래로 차이라면 노부부 이야기는 아내 혹은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남편 혹은 아내의 이야기라면 다 당신 덕분이라오는 두 부부가 당신이 있어 지금껏 살아왔다고 고마워하는 얘기를 담고 있다. 미우새 선공개 때 어머니들 모두가 찡해 하셨다.

3. 음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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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상 내역

4.1. 시상식


1990년대 데뷔한 가수 중에서는 H.O.T., 조성모와 함께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 골든디스크 시상식, 서울가요대상 이렇게 5대 가요 시상식의 대상을 모두 받은 경험이 있는 가수였다. 또한 H.O.T., 조성모, god, 김종국과 함께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 대상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기록을 가지고 있고, H.O.T., god, 김종국과 함께 한 해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 대상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기록을 보유한 가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수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1994년 한 해에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 골든디스크 시상식, 서울가요대상이 5대 시상식의 대상을 모두 거머쥔 진정한 의미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4.2. 가요 프로그램 1위

총 79회 1위
<rowcolor=#fff> 날짜 방송명 곡명 비고
1993년
3월 18일 SBS 인기가요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2회)
데뷔 첫 1위
4월 22일 1위
(통산 2주)
10월 13일 KBS 가요톱10 첫인상
(5회)
1위
10월 20일
10월 27일
11월 3일
11월 10일 1위
(5주 연속, 골든컵)
1994년
2월 13일 SBS 스타 서울 스타 핑계
(15회)
1위
2월 16일 KBS 가요톱10
2월 20일 SBS 스타 서울 스타
2월 23일 KBS 가요톱10
2월 27일 SBS 스타 서울 스타
3월 2일 KBS 가요톱10
3월 6일 SBS 스타 서울 스타
3월 9일 KBS 가요톱10
3월 13일 SBS 스타 서울 스타
3월 16일 KBS 가요톱10 1위
(5주 연속, 골든컵)
3월 20일 SBS 스타 서울 스타 1위
3월 27일
4월 3일
4월 10일 SBS 스타 서울 스타 1위
(9주 연속, 최다 1위)
4월 24일 SBS TV 가요 20 1위
1995년
3월 11일 KMTV 쇼! 뮤직탱크 잘못된 만남
(18회)
1위
3월 12일 SBS TV 가요 20
3월 15일 KBS 가요톱10
3월 18일 KMTV 쇼! 뮤직탱크
3월 19일 SBS TV 가요 20
3월 22일 KBS 가요톱10
3월 25일 KMTV 쇼! 뮤직탱크
3월 26일 SBS TV 가요 20
3월 29일 KBS 가요톱10
4월 1일 KMTV 쇼! 뮤직탱크
4월 2일 SBS TV 가요 20
4월 5일 KBS 가요톱10
4월 8일 KMTV 쇼! 뮤직탱크 1위
(5주 연속, 최강자)
4월 9일 SBS TV 가요 20 1위
4월 12일 KBS 가요톱10 1위
(5주 연속, 골든컵)
4월 16일 SBS TV 가요 20 1위
(6주 연속, 당해 최다 1위)
4월 21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1위
4월 28일
1996년
6월 8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스피드
(14회)
1위
6월 12일 KBS 가요톱10
6월 19일
6월 22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6월 22일 KMTV 쇼! 뮤직탱크
6월 29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6월 29일 KMTV 쇼! 뮤직탱크
6월 30일 SBS TV 가요 20
7월 3일 KBS 가요톱10
7월 6일 KMTV 쇼! 뮤직탱크
7월 7일 SBS TV 가요 20
7월 10일 KBS 가요톱10 1위
(4주 연속)
7월 13일 KMTV 쇼! 뮤직탱크 1위
7월 20일 KMTV 쇼! 뮤직탱크 1위
(5주 연속, 최강자)
1998년
3월 7일 MBC 젊은그대 사랑이 떠나가네
(1회)
1위
3월 18일 KBS 브라보 신세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6회)
3월 25일 KBS 브라보 신세대
4월 1일 KBS 브라보 신세대
4월 4일 KMTV 쇼! 뮤직탱크
4월 8일 KBS 브라보 신세대
4월 15일 KBS 브라보 신세대
2001년
6월 23일 MBC 음악캠프 미안해요
(11회)
1위
7월 5일 KBS 뮤직뱅크
7월 7일 MBC 음악캠프
7월 12일 KBS 뮤직뱅크
7월 13일 KMTV 쇼! 뮤직탱크
7월 14일 MBC 음악캠프
7월 19일 KBS 뮤직뱅크 1위
(3주 연속, 골든컵)
7월 20일 KMTV 쇼! 뮤직탱크 1위
7월 21일 MBC 음악캠프
7월 27일 KMTV 쇼! 뮤직탱크 1위
(3주 연속)
7월 28일 MBC 음악캠프 1위
(4주 연속, 통산 5주)
7월 8일 SBS 인기가요 짱가
(3회)
1위
7월 15일
7월 22일 1위
(3주 연속, 왕중왕)
2003년
4월 4일 KMTV 쇼! 뮤직탱크 청첩장
(3회)
1위
4월 11일
4월 18일 1위
(3주 연속)
4월 6일 SBS 인기가요 My Son
(1회)
뮤티즌 송

5. 평가

5.1. 위상

한국 가요계에서 범국민적인 인기를 얻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가요계에서 김건모의 입지는 절대적이었다.[36]

지상파 3사 연말 가요 시상식이 있던 시절 근접한 기록을 가졌던 가수들은 1997년과 1998년의 H.O.T., 1999년과 2000년의 조성모, 2001년의 god 등이 있다. H.O.T.는 1997년 MBC, SBS,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을 석권했지만 KBS는 임창정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고, 1998년은 KBS, MBC, SBS, 서울가요대상(젝스키스와 공동으로 수상)을 석권했지만 골든디스크는 김종환이 대상을 받으면서 또 다시 실패했다.

조성모는 1999년 KBS, MBC,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핑클과 공동으로 수상)을 석권했지만 SBS는 핑클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했고, 2000년은 MBC, SBS,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을 석권하였지만 KBS는 god가 대상을 수상하면서 또 다시 실패하게 되고, 동시에 한 해 지상파 3사 그랜드슬램의 기록도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된다.

god는 2001년에 KBS, MBC, SBS, 골든디스크를 석권했지만 서울가요대상은 김건모가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게 된다. 이외에도 2005년의 김종국은 KBS, MBC, SBS 지상파 3사 대상을 동시에 석권했지만 골든디스크 대상을 SG워너비가 수상하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서울가요대상은 아예 개최되지 않았다.

그 외 2005년까지 뮤직비디오 위주 시상식이었던 MKMF에서도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을 동방신기,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드렁큰 타이거가 수상하면서 김종국은 2005년 지상파 3사 이외의 시상식에서는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다.[37] 대신 김종국은 지상파 3사 가요대상 최후의 그랜드슬램, 트리플 크라운 수상자로 남아 있다.[38]

그 이유는 KBS와 MBC는 2005년 가요대상을 진행한 후 시상식이 폐지되었고, SBS도 2006년 가요대상을 진행한 후 더 이상 지상파 3사 가요대상 시상이 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39]

1990년대 레전드 3인방 중에서 가장 후배[40]지만, 1968년생으로 이제는 나이가 상당해서 가수들 중에 고참급이다.

핑계는 전국적으로 한국에 레게 음악이 유행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잘못된 만남은 역대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역사적인 기록을 올렸고, 그 외에도 히트곡이 즐비하다. 작곡가 윤일상은 자신의 책 <나는 스무살이다.>에서 그가 음악적 능력에 있어서 조용필 다음으로 대단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수라고 평가했다.

또한 1994년, 1995년, 2003년에 음반판매량 1위를 차지하며 총 3차례 음반판매량 1위를 했다.

5.2. 역량

<nopad>

[Mnet Legend 100-보컬_Legend 김건모]

흑인 음악이 생소했던 90년대 초반, 자메이카 댄스리듬의 레게장르를 내세워 등장.
매력적인 비음과 그루브한 창법의 절묘한 조화.
한국적 블랙 뮤직을 대중음악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보컬리스트.

장난기 어린 무대매너와 삐딱한 제스처,
음악으로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는 무대위의 광대.
목소리로 세대를 아우르는 이 시대의 가수. 위대한 광대 뮤지션, Legend 김건모.
'언제나 기다리고 있어'의 후반부 에드리브
(1994/06/04 토토즐)
보컬, 작곡, 편곡, 피아노 등 다방면으로 어마어마한 실력을 갖춘 뮤지션. 젊은 세대에게는 미운 우리 새끼에서의 코믹한 '쉰건모' 이미지 때문에 예능인 취급받는 경우가 있으나 그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한 명으로, 1990년대 국민가수로 불렸던 레전드이다. 하이톤의 까랑까랑하면서도 부드럽고 간드러지는 바이브레이션이 들어간 독특한 목소리 때문에 데뷔 때부터 주목을 받았고, 지금도 그의 목소리만 듣고 음색빨이라며 보컬 실력을 폄하하는 사람들도 왕왕 있다.

김건모가 독특한 음색을 가진 것은 맞다. 그리고 그것이 개성으로 작용하는 것도 맞고 가수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도 맞다. 하지만 결국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음색이 독특하기보다는 보편적인 호소력을 보여주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건모가 거의 최고의 자리에서[41] 가요계를 종횡무진할 수 있었던 것은 김건모가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건모의 노래를 집중해서 들어보면 그가 정말 사람이 아닌 것처럼 노래하는 것이 느껴진다. 음색빨이 있는 것은 맞지만, 자유자재로 그 음색을 가지고 노는 능력을 가진 것이 김건모다.[42] 심지어 김건모는 이 음색전환을 매우 순식간에 전환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곡의 흐름을 해치는 것도 아니라 곡은 곡대로 몹시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그냥 흘려가듯이 들으면 김건모의 가창력을 실감 못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가수가 노래할 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그냥 노래실력 과시를 하는 게 아니라 가창과 곡의 균형을 맞추는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김건모는 실로 악마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예시를 들자면 테마게임이라는 노래가 있다.[43] 김건모도 가벼운 안무에 맨날 술담배까지 하니 이 노래를 라이브에서까진 제대로 못하긴 하지만 노래를 가지고 노는 김건모의 특색이 잘 드러난 곡 중 하나다.[44] 특기할 만한 것은 이렇게 음색빨을 잘 보여주고 톡톡 쏘는 노래에서까지 김건모는 가창과 노래 전체의 균형을 잘 맞춰서 가창이 노래보다 넘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즉 듣는 사람이 편하고 즐겁게 흘려들을 수 있는 것과, 특이하고 개성적인 음색으로 귀를 잡아끄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모순적인 일인데 김건모는 언제나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런 엄청난 기량을 보여주지만 그게 과시용이 아니거나, 최소한 대중용은 아니고 알아들을 놈만 알아들어라 하는 게 김건모 노래의 특징이다.

거의 모든 가수들은 무대 위에서 어느 정도 연기를 한다. 어떤 장르건 곡이 절정에 달하면 보여주는 그 특유의 손짓 몸짓 얼굴각도 같은 게 가수들 사이에서 공식처럼 공유되고 있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나쁜 게 아니라 필요한 것도 사실인데 왜냐면 그래야지 관객들이 감정을 더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발라드를 부를 때 가수가 별로 힘들지 않거나 슬프지 않고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고 있어도 힘들고 슬픈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건모는 이런 티를 잘 내지 않는다. 발라드 같은 걸 할 때면 본인도 자제하긴 하는데 기분 좋으면 또 괜히 약간 광대 같은 짓을 하기도 한다. 특히 댄스곡 같은 걸 부를 때면 노래 잘한다는 티를 내긴커녕 그냥 덩실덩실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음 쭉쭉 뽑아내는 노래의 절정 부분에서도 김건모는 그냥 한 발로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다같이! 소리쳐! 이런 추임새를 넣고 간주 부분에서는 댄서들이랑 같이 춤춘다. 이런 게 의외로 대중들에게는 가창력을 느끼는 데 있어서 상당히 커다란 감점요소가 된다.[45] 사실 이런 식으로 부르면 진짜 탁 들어도 아는 전문가가 아니라면 집중해서 들어야 느낄 수 있는 게 당연하긴 하다.

김건모의 노래를 불러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의 노래를 완벽히 소화하기에는 힘든 경우가 매우 많다. 특히 2집 '혼자만의 사랑'의 인트로에서 3옥타브 도 음도 피아노 치면서 흔들림없이 라이브로[46] 선보일 정도의 넓은 음역대에 뛰어난 가창 테크닉이나 특유의 음색과 창법이 더해져 국내 역대 보컬리스트 순위를 매길 때 항상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실력을 갖춘 보컬이다.[47] 서울예술대학 재학 당시 천재로 불렸다는 증언도 있다.[48]

그의 영혼의 파트너 김창환이 옛날에 무릎팍도사에서 회고하기를 "너무 천재적이다보니 자기가 얼마나 노래를 잘 하는지 잘 모른다. 그는 스스로 노래 부르는 건 숨 쉬듯이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때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 불렸을 정도로 스티비 원더 모창을 정말 비슷하게 한다.#[49]#[50] 단순히 목소리나 창법 때문이 아니다. 그만큼 역량이 받쳐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스티비 원더를 모창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김조한과 같이 lately를 부른 영상도 있는데, 김조한이 아마추어로 보일 지경이다. #[51]

레게나 소울 방면의 창법에 능하며 초기 히트곡은 소울이었으나[52] 점점 레게나 하우스 쪽으로 가다가 2000년대 들어서 소울이나 R&B로 방향을 틀었다. 신승훈과 함께 프로듀서 김창환의 대표적인 아티스트 중 하나. 피아노 솜씨도 수준급이며[53], 많은 자작곡을 가지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나가수 출연이나 각종 예능 활동 등으로 인해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김건모 앞에서 실력으로 고개를 뻣뻣이 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역대 가수 순위를 선정해도 언제나 열 손가락 안의 순위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올타임 레전드급으로 실력과 커리어를 가진 대가수다.

자작곡 중에선 본인의 히트곡도 꽤 많이 들어 있다.[54] 나는 가수다에서 미션곡으로 선정되었던 미련사랑이 떠나가네는 둘 다 김건모가 직접 작곡한 곡이다.

단 김건모는 본인의 이런 압도적인 천재성으로 인해 때때로 대충대충 하는 경향도 있다. 특히 신인 시절을 벗어나 스타가 된 이후로는 노래나 음악 이외의 것은 좀 대충대충하는 경향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나가수 때 립스틱 사태가 김건모의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하나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55][56] 또한 가끔은 노래나 음악마저도 좀 본인의 이런 적당주의 예술가적 기질이 지나쳐서 이게 뭔가 싶을 때도 있다.[57] 그리고 관리를 열심히 하지 않은 편이라서 전성기가 지나고 나이를 먹은 이후로는 좀 기량이 떨어져 가고 있다.

5.3. 타인들의 평가

"제가 우리나라에서 노래를 제일 잘 하는 가수 그러면 처음 꼽는 사람이 김건모예요"
신승훈[58]
"가장 존경하는 대한민국 뮤지션은 김건모 선배님"
나얼#
"김건모 선배님은 나의 롤모델"
나윤권
"건모형은 너무 음감이 좋으니까... 엔지니어가 얘기했는데 그냥 (원음을)안 들어보고 쭉~ 해논 다음에 삭 틀어봤는데 (화음이)완성되어 있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런 엄청난 소문들이 있습니다"
성시경[59]
난 김건모 넌 나의 90년대
너랑 있을 때 난 최고
다이나믹 듀오 - 꿀잼의 가사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건모가 7등해서 너무 슬프단 말이야"[60]
이소라

6. 논란 및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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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

8. 방송 활동

8.1. 나는 가수다

2011년 3월 20일,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으며 지상렬이 3번의 공연과 경연에서 모두 매니저를 맡았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부르고 최하위를 해서 하차해야 했는데, 인터뷰에서 장난을 쳐서 떨어진 것 같다는 변명과 다른 출연자 및 스태프의 즉흥적인 재도전 기회 부여를 수락한 관계로 엄청 까였다. 재촬영 의혹 기사 결국에는 23일 기자회견을 통해서 자진 하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에 라디오 스타에 나온 지상렬의 말에 따르면 나는 가수다는 분류가 예능이다[70] 그러니까 노래하는 동안에는 예능을 조금 섞자고 지상렬 본인이 말하고 김건모가 공감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이후에 2011년 3월 27일 열린 2차 경연,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에서 항상 여유를 보이던 그가 손을 덜덜 떨면서 정엽의 You Are My Lady를 진지하게 불렀고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나가수에서의 경험이 20년간의 가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었는데 나가수가 매너리즘에 늘어져있던 천재를 각성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국민 가수라는 타이틀을 가진 김건모가 이 정도의 어그로를 끈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듯. 재도전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재도전 사건은 김건모 자신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 이어서 출연하게 된 김연우는 김건모를 좋아해서 함께 무대에 서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며 1차 경연에서 김건모의 노래를 편곡해서 불렀다.

이후에 룰루랄라우리들의 일밤에 컴백하였다. 다만, 나가수에 재도전 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가수다 2의 섭외를 거절하던 김건모가 김영희 PD의 끈질긴 설득으로 재출연이 성사되었다. 김영희 PD가 얼마나 끈질겼는지를 알 수 있는데, 김건모의 콘서트장에서 관객과 스탭들의 동의를 얻어 무대에 올라가서 나가수2에 나와달라고 팬들과 함께 외치고 그 콘서트 뒷풀이 자리를 따라가고 이후에도 포장마차에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많이 설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8월 경연에서 스케줄 조정에 따른 제작진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서 다시 자진 하차하게 되었다. 이후에 토토가 2014년 12월 20일 방영분에서 나가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가수다 경연 노래 순위
첫 공연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3위
첫 경연 립스틱 짙게 바르고 - 임주리 7위
두 번째 경연 You Are My Lady - 정엽 자진하차[71]
나는 가수다2 오프닝 쇼 서울의 달
5월 B조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 유재하 상위권
5월의 가수전 시인의 마을 - 정태춘
6월 B조 내 마음 당신 곁으로 - 김정수 하위권
6월 고별가수전 다행이다 - 이적
7월 B조 I Can Wait Forever - Air Supply 하위권
7월 고별가수전 어떤 이의 꿈 - 봄여름가을겨울
8월 A조 서른 즈음에 - 김광석 상위권
8월의 가수전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 변진섭[72] 자진하차
방송일 제목 가수
2011년 3월 27일 첫인상 박정현
2011년 5월 8일 미련 김연우
2011년 6월 12일 사랑이 떠나가네 옥주현
2011년 9월 11일 아름다운 이별 김조한
2012년 1월 1일 Double 바비 킴
2012년 9월 23일 미안해요 서문탁
2015년 4월 3일 미안해요 양파

8.2. 미운 우리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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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배우 활동

<rowcolor=#fff> 연도 제목 배역명 비고
1997 김건모의 스피드 김건모 주연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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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6년부터 지금의 SBS 가요대전으로 분리되어 실시된다.[2] 음력 1967년 12월 14일[3] 미운 우리 새끼 52회 출연. 카레이서가 꿈이었지만, 가족들을 위해 꿈을 접었었다. 김건모가 아버지를 모시고 강원도 인제 레이싱장을 가게 되었다. 이때 소속사 대표(손종민)와 김진표도 함께 출연했다. 2019년 5월 19일 지병 투병 끝에 사망했다. 향년 만 79세. 기사[4] 함경남도 원산(현 강원도 원산시) 출신. 1.4 후퇴 때 월남했었다고. 미운 우리 새끼차남 김건모와 함께 출연했었다.[5] 두 형제의 이름은 미운 우리 새끼에서 언급되었다. 김건모가 소속사 손종민 대표와 함께 떠난 소주 기행에서 당시 부산에 거주 중이던 친동생의 집을 찾아갔다.[6]서울신월초등학교.[7]서울예술대학교.[8] 現 음악학부 한국음악전공. 김건모가 입학한 1986년에는 실용음악과가 개설되어 있는 대학이 전국에 없었다. 이듬해인 1987년도에 서울예전이 전국 최초의 실용음악과를 개설했다. 가수 박미경이 서울예전 국악과 2학년에 재학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전기, 후기도 안 쓰고 지원해서 한 번에 합격했다고 한다.[9] 대표는 손종민으로, 미운 우리 새끼에서 자주 등장했다. 다만 연예 기획사 등록 현황에는 대표자가 김건모로 올라와 있으며 손 대표가 한살 동생인 탓에 김건모의 각종 기행과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에 자주 휘말렸다.[10] 이름 '건모'를 (마를 건)과 (털 모)로 해석한 것[11] 2001년 가족오락관 출연 당시 노래방 코너(도전! 30곡)에서 주영훈이 10번 카드를 뒤집었을 때, 뒤집은 카드에 흑기사를 고르라는 설명이 아래에 적혀있자, 주저없이 김건모가 선택되었다.[계정정지] [13] 최준영은 이미 4집 때 이미 협업하였다.[14] 당시 라인음향의 간판스타는 신승훈이었는데, 신승훈은 싱어송라이터다 보니 김창환은 곡 작업에 직접 개입한 부분은 적었고, 김건모부터 본인이 트레이닝, 작사, 작곡 등을 도맡으면서 본격적인 스타 제조에 나서게 된다. 물론 항목에도 있듯 김창환의 상당히 강압적인 트레이닝법은 오늘날 와선 비판도 받는다.[15] 박광현이 부른 '잠도 오지 않는 밤에'의 부분 리메이크.[16] 이 곡을 작곡/편곡한 당시 젊은 작곡가 김형석 입장에서도 본격적인 스타 작곡가의 시발점이 된다.[17] 오죽하면, 홍준표는 '핑계'로 성공한 사람은 김건모밖에 없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18] 이후 남자 3명, 여자 1명으로 구성된 혼성 4인조 그룹이 붐을 이루고 있었는데, 혼성 그룹은 김건모의 댄스 파트너로 관심을 끌었던 김송이 등장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19] 3집 아름다운 이별, 4집 미련, 6집 버담소리, 7집 미안해요, 8집 청첩장, 9집 잔소리, 11집 허수아비.[20] 한 해에 가요 관련 대상에서 2개 이상 대상을 받은 가수들은 있지만, 5개 주요 시상식에서 한 해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가수는 김건모가 유일하다.[21] 1994년의 김건모는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핑계>가 가요톱10 골든컵을 수상했던 1994년에는 이 곡 외에도 골든컵 수상곡이 6곡이나 더 있었지만 김건모의 <핑계>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015B의 <신인류의 사랑>과 김원준의 <너 없는 동안>은 살짝 임팩트가 부족했고 김민교의 <마지막 승부>는 표절 시비가 있었다.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은 립싱크 사건으로 인해 연말 가요시상식 무대에도 서지 못했고,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은 아직 풋풋했던 신인그룹의 곡이었다. 신승훈의 <그후로 오랫동안>은 신보를 낸 시점이 9월말로 김건모의 아성을 위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오히려 김건모 커리어하이인 3집 활동 당시에 김건모의 아성을 위협한 가수들이 쟁쟁했다. 1995년 한 해에 골든컵 2회 수상의 기염을 토한 룰라가 있었고 김건모의 소속사 동료였던 노이즈박미경이 자신들의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또한 마지막 앨범이 대박을 친 서태지와 아이들도 건재했다.[22] 원래 발라드곡 아름다운 이별이 타이틀곡이었지만 이 곡이 갑자기 큰 인기를 얻었다.[23] 이 영화촬영으로 인해 김건모는 <잘못된 만남>이 골든컵을 수상했을 당시 가요톱10 무대에 서지 못했다.[24] 다만 당시 한국에는 공인된 음반 판매량 집계 체계가 없었던 점은 고려해야 한다. 이 기록은 무려 24년 뒤 2019년 방탄소년단의 Map of the Soul: Persona 앨범이 깼다.[25] 또한 토토가 이후 잘못된 만남은 발매된 지 20년이 지난 2015년에 뮤직뱅크에서 4위까지 들었다.[26] 1집 후속곡 '첫인상', 2집 타이틀곡 '핑계', 3집 타이틀곡 '잘못된 만남' 모두 가요톱텐 골든컵을 달성했다. 특히 2집 핑계와 3집 잘못된 만남은 다른 지상파에서도 여러 번 1위를 한 상태였다. 참고로 첫인상 활동 시기에는 가요톱텐 외의 다른 방송 차트 프로그램이 없었다.[27] 다만 MBC와 SBS는 1995년 하반기부터 각각 3, 5주 연속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2주 1위를 한 뒤 상반기 결산으로 한 주 미집계된 것도 골든컵 수상 실패의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상반기 결산이 없었다면 스피드도 골든컵을 탔을 것이다. (상반기 결산의 최고 곡으로 수상은 하긴 했다.)[28] 지금까지 KBS에서 3연속 대상을 수상한 가수는 조용필과 김건모뿐이다. 물론 지상파들이 수상 제도를 폐지하고 엠넷, 멜론 등으로 시상식이 다변화된 이후엔 BTS 등이 더한 기록도 세우긴 하지만 대상도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등 4개로 쪼개서 주다보니 개별 대상의 위상이 사뭇 떨어진 감은 있다. 참고로 BTS는 엠넷에선 3연속(2019~2021), 멜론에선 2연속(2019~2020) 4개 대상 전부를 싹쓸이한 바 있다.[29] 음악적 코드는 솔과 리듬앤블루스 재즈 등 흑인 음악적 발라드다. 10대 취향의 댄스음악에서 탈출선언을 한 셈이다. '독백'의 원숙한 보컬, 가벼운 발라드 '아침 풍경', 샹송 분위기의 '이별없는 사랑', 권진원과 듀엣을 이룬 '오늘처럼 이렇게' 등이 그런 뜻을 머금고 있다. 김건모는 "음악의 내용과 형식을 통해 당장 절박한 내 이야기를 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동아일보 1997년 기사)[30] 이 대상이 큰 의미가 있는 게 당시 김건모를 제외하고는 대상을 받은 가수가 god 밖에 없었다.[31] 사실 그럴 수 없었던 것이 2002년 이후로는 음반판매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2002년에도 밀리언셀러는 나오지 않았으나 전체 판매량을 비교해볼 때 밀리언셀러 앨범만 제외하면 2001년과 비슷했다. 반면 2003년에는 2002년에 비해 80만 장 이상 음반판매량이 떨어졌다. 밀리언셀러는 1990년대에도 흔한 일이 절대로 아니었으며 실제로 음반판매량을 보면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가수는 한 해의 2~3팀 될까 말까.[32] 하프 밀리언셀러는 그 후에도 몇 차례 기록된 바 있었다. 바로 다음해인 2004년 1월에 발매된 서태지 7집, 그리고 2013년 이후의 엑소 앨범들이 그것인데, 서태지의 경우 2004년 앨범이 나온 당해에 48만 장, 이듬해에 2만 장을 판매하여 2년에 걸쳐 50만 장을 넘긴 사례였고, 엑소는 1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버전을 합해서 나온 컬렉션 판매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하프 밀리언셀러라는 표현은 틀린 표현이지만, 단 하나의 버전으로 한 해 동안 팔린 하프 밀리언셀러라고 하면 맞겠다.[33] 대표적인 예가 발라드로 바뀐 미련, 뽕짝 댄스곡으로 바뀐 사랑이 떠나가네이다. 각각 그를 대표하는 인기곡이었지만 처음 곡을 썼을 때는 전혀 다른 색깔의 곡이었고, 프로듀서의 권유로 대중성이 가미된 장르로 탈바꿈 되었다 전해진다.[34] 금상에 준하는 상이다.[35] 본상에 준하는 상이다.[36] 1990년대 초중반을 풍미한 최고 가요 스타 3명만 꼽으라면 김건모, 서태지, 신승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37] 단, 현재 벅스와 합병된 쥬크온에서 주관했던 쥬크온 뮤직 어워드 대상인 올해의 노래 부문, 올해의 앨범 부문 2관왕을 수상했고, 올레뮤직과 합병된 싸이월드와 네이버 등 주요 포털 사이트에 배경 음악을 공급한 온라인 음원 사이트 뮤즈에서 주관했던 뮤즈 뮤직 어워드 대상인 올해의 히트곡 부문, 올해의 가수 부문 2관왕을 수상했고, 엠넷닷컴으로 합병된 맥스MP3에서 주관했던 2005 맥스 어워드 대상인 Song Of The Year 부문을 수상했고, 2005 네이버 대중 음악계 결산에서도 대상인 올해의 노래 부문, 올해의 앨범 부문 2관왕, 2005 다음 대중 음악계 결산에서도 대상인 2005년 최고의 노래 부문상을 수상하여 지상파 연말 시상식과 음원 서비스에서 주관했던 모든 시상식 등 모두를 포함한다면 2005년 한 해에만 무려 대상 11관왕을 수상했다.[38] 최후의 지상파 가요대상 수상자는 2006년 SBS에서 대상을 수상한 동방신기다.[39] 음반 판매는 2019년 방탄소년단이 339만장 판매를 기록하면서 김건모의 330만장 판매 기네스북 기록을 깼다. 1년에 3번을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할 정도의 역대급 한류스타가 간신히 김건모의 기록을 깬 것.[40] 신승훈이 1990년에 데뷔,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 1992년 3월 발매, 김건모 1집이 1992년 10월 발매되었다.[41] 서태지, 신승훈 등이 있었으니 단독 1인자는 아니지만, 이 당시 가요계 사람들 가운데 가장 외적인 인물이 모자랐음에도 정상까지 올랐던 것은 실력 말고는 그 이유가 없다. 박진영이 최고 중의 최고는 아니지만 그와 비교를 할 경우 얼굴은 앞뒤를 다툰다 쳐도 키랑 덩치 차이가 있으니.[42] 프로 가수라도 귀에 꽂히는 음색 하나 내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핵핵대는 사람들 많은데 김건모는 꽉 찬 소리를 내면서도 순식간에 음색을 전환한다.[43] 타이틀곡 같은 건 아니지만 동명의 예능에서 쓰여져서 그 시대 사람들은 다 아는 노래다.[44] 음색빨로 밀고 들어가는 코러스, 역시 음색빨로 쏘아대는 싱잉랩, 가창은 천재적인 리듬감과 강약조절을 보여준다. 거기에 가사나 곡의 흐름에 맞는 감정조절에 노래 전체적인 밸런스까지 보면 사람 아닌 거 같은 김건모의 가창기량이 드러난 유명곡 중 하나다. 특히 90년대를 보낸 사람들이 이 노래를 다 알기야 알지만 김건모가 여기서 노래 잘했는지 모른다는 점에서.[45] 특히 김건모는 본인의 작은 키랑 그저 그런 인물 때문에 사실 뭘 해도썬글라스 쓰고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르는 거 빼면 가창력으로 누르는 거 말고는 무대에서는 진지하거나 멋있는 느낌이 잘 나지 않는 것도 있어서 멋있는 퍼포먼스보다 광대놀음을 좋아하는 것도 있겠지만...[46]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직접 확인해 보자.[47] 남녀 보컬리스트 설문조사[48] 서울예술대학 재학 당시 데뷔 전이던 김혜림과 박성신과 함께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49] 김건모 - Lately (1993) 영상을 보고 리액션하는 영상이다.[50] 김건모의 대표적인 스티비 원더 모창곡인 I Just call to say I love you.[51] 해당 퍼포먼스 구성 자체는 당시 유행하던 Jodeci의 버전을 많이 참고한 것이다.[52] 물론 『혼자만의 사랑』, 『아름다운 이별』 등과 같은 발라드 히트곡도 적진 않았다.[53] 대표적인 곡이 작곡과 편곡을 맡은 '미련'.[54] 이런 부분은 당대의 라이벌인 신승훈과 비슷한 면이 많다.[55] 윤종신이 라디오스타에서 김형석이 나왔을 때 김건모에 대해 얘기하다가, 이 형이 노래를 너무 잘 하니까 자꾸 딴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김형석은 이에 대해서 김건모는 자기 재능이 너무 자연스럽다. 건모는 노래 너무 숨쉬듯이 편한 거다 그냥 이렇게 받았다. 상술된 김창환과 같은 발언인데 한국 대중가요업계를 휩쓸면서 대표하던 창작자 2명이 같은 얘기고, 거기에 윤종신이 표정연기 몸짓연기를 안 하는 걸 넘어서 자꾸 헛짓거리나 한다고 꼬집은 거다. 그런데 중요한 건 김건모는 노래 부르면서 딴짓할 생각이나 하는데도 정작 노래 자체는 딱히 실수한 게 없다는 것.[56] 그 직전에 김형석은 라이브 앨범 발매 당시, 원래 라이브 앨범 이후 재녹음하면서 라이브에서 틀린 걸 고치는 부분이 있는데 김건모가 라이브 앨범 발매했을 때 오직 보컬만이 2시간 동안 전혀 틀린 게 없어서 보컬은 그냥 원본 그대로 한 방에 갔다고 한다. 즉 김건모는 무대 위에서 2시간 동안 온갖 광대짓을 하고 웃기게 춤을 추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노래 부르고 해서 사람들이 막 웃고 즐겁게 보내지만 이후에 다시 검토해 보면 다른 세션들은 다 틀려도 김건모는 무결점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물론 전성기 이후는 관리를 안 해서 마이크를 관중석에 넘기는 비중이 급증했지만...[57] 만약 역량이 좋은 프로듀서와 함께 했더라면 훨씬 더 긴 전성기와 좋은 결과물들을 남겼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했다. 김건모 초기 시절 김창환을 제외하고는 김창환, 최준영, 본인 다 프로듀서로서는 가수 김건모의 역량을 살리기에는 뭔가 모자랐다.[58] 참고로 신승훈은 김건모와 함께 1990년대 최고의 가수이자 발라드의 황제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런 신승훈이 본인의 동시대 가수에게 이런 평을 내린다는 점에서 김건모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가 입증된다.[59] 미우새에서 김건모 술담배 엄청 하는데도 라이브와 녹음이 비슷한 비결 - 녹음이라고 참지 말고 일상적으로 술담배 하면 라이브와 녹음이 똑같다는 얘기하다가.[60] 나는 가수다 출연 시절 일화.[61] 요즘 소주는 영하 17~18도 정도면 얼지만 가정용 냉장고로 단단하게 얼려면 오래 걸려서인지 소주 8, 물 2의 비율로 섞어서 각얼음으로 만들었다.[62] 다만 미우새는 예능이라서 과하게 설정했다.[63] 근데 정작 성시경도 연예계 주당에 골초로 유명하다. 그 선배에 그 후배. 20년이 지난 현재도 미성을 유지하는 게 신기할 지경. 다만 김건모와 달리 성시경은 공연이나 녹음 일정이 있을 때는 금연한다고 한다.[64] 좀 더 정확하겐 라인음향에서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연습생 생활을 하다가 실전 경험도 쌓을 겸 김건모의 백댄서로 합류한 것. 이후 박진영은 라인음향에 곡을 주던 김형석이 작업하는 것을 보고 반해 무작정 작곡, 프로듀싱을 가르쳐달라고 졸라 김형석 술친구 겸 보조 생활도 하게 되고, 이후 여차저차해서 라인음향에서 짤린 박진영은 다른 곳에서 솔로 가수로 데뷔하고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싱 능력을 살려 본인 회사도 차리게 된다.[65] 그런데 사실 3집 잘못된 만남의 가사가 본인 학생 때 실화였다고 한걸 보면, 연애 자체는 이전에도 했다고 보는게 맞다. 다만 이때 NTR 당해서(...) 진정한 첫사랑은 이때라고 보는건지도.[66] 국방부 직할의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 연예병사와는 다르다. 한무, 장용, 김종국, 김용만, 지석진, 김경민(이상 코미디언), 유희열(가수), 윤명선(음반제작자) 등이 해군홍보단에서 복무했다.[67] 노래방 기계는 성량과 박자에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 음정이 정확해도 성량이 크지 않으면 기계가 틀린 것으로 잘못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성량이 크고 박자감이 뛰어난 김건모같은 가수가 유리하다. 반대로 조성모의 경우 전성기에 비해 창법이 많이 바뀌고 성량이 큰 가수가 아니기에 점수가 낮았다. 즉, 점수가 실력에 비례해 나오는건 아니지만 점수 받기 유리한 스타일이 있긴 하다.[68] 여기서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리메이크해서 부른 바 있다.[69] 1981년생, 배우 장욱조의 딸, 배우 장희웅의 여동생[70] 이후에 힐링 캠프에서 밝혔는데 예능인데 뭘 그렇게 기를 쓰고 하냐고 얘기했다고 한다. 원래에도 김건모는 콘서트에서 장난을 많이 쳤는데 본인이 말하듯이 이것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잘못이라고 사과했다.[71] 순위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3위라는 추측이 있다.[72] 컨디션 난조로 실제 경연에 참여하지 못하고 하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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