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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14:29:39

방시혁

파일:한시적 넘겨주기 아이콘.svg   사모펀드들과 손을 잡고 하이브 상장 직후 가파르게 오른 하이브 주식을 대량 매각함으로써 이득을 취하고 개미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에 대한 내용은 방시혁 4000억 비밀 계약 논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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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f00><colcolor=#000> HYBE 초대 총수
방시혁
房時爀|Bang Si-hyuk
파일:Bang Si-hyuk.jpg
예명 "Hitman" Bang[1]
출생 1972년 8월 9일 ([age(1972-08-09)]세)
서울특별시
거주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파르크한남[2]
로스앤젤레스 벨 에어 스트라델라 로드[3]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남양 방씨 (南陽 房氏)[4]
혈액형 O형
가족 아버지 방극윤, 어머니 최명자[5], 여동생[6]
학력 서울신천국민학교 (졸업)
언북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87회 / 졸업)[7]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 91 / 학사)[8]
서울대학교 (경영학 / 명예박사)[9]
직업 기업인, 작곡가, 프로듀서
현직 HYBE 총수
HYBE 이사회 의장
병역 불명[10]
데뷔 1994년 제6회 유재하가요제 동상
재산 29억 달러 (한화 약 4조 1천억 원)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11]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경력
3.1. 수상 경력3.2. 커리어3.3. 대표곡3.4. CF
4.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있는 아티스트
4.1. 총괄 프로듀서4.2. 기타
5. 논란 및 사건 사고6.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작곡가, 프로듀서. HYBE 총수이자 이사회 의장.

2. 생애

어릴 때는 운동도 싫어하고 5살 때부터 한글을 깨쳐 집에서 하루종일 책만 읽던 소년이었고, 부모님이 사회 생활에 문제가 있을까 걱정이 되어 기타를 사줄 정도였다고 한다.[12] 다행히 기타에는 관심을 가졌고, 처음엔 그래도 좀 얌전한 클래식 기타로 시작했지만 뭔가 성이 안차 일렉트릭 기타로 바꾼 후, 어쩌다보니 헤비메탈 밴드로 처음 아마추어 무대에 입문했다고 한다. 당시 그룹명은 훗날 보면 좀 오글거리기도 하지만 검치호였다고. 이때가 중학교 시절로 작사, 작곡도 이때부터 점차 한 것으로 보인다.

명문대 나온 부모님 공부 머리를 물려받은 게 있어서인지 시험 공부라곤 1시간 남짓 했음에도 다 했다고 나와 또 다른 책을 읽어대는데 성적은 잘 나와 부모가 그런 쪽으론 걱정 안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방시혁 본인도 이 시절의 자신을 ‘친구들이 매우 재수없어 할 정도로 노력 대비 공부 잘하던 천재끼 있던 아이’로 기억했다.[13] 대학입시를 앞두고 서울대 법대 진학을 희망했으나, 딱히 선망이 있던건 아니었고 그냥 남들이 가라고 하니 뚜렷한 꿈도 없이 따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법대 들어가기에는 점수가 간당간당한 김에 재수는 하기 싫어 법대 대신 일종의 안전빵으로 다른 과를 알아보던 중 미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집에선 반대했지만 떨어지면 재수 안한다는 협박 끝에 결국 서울대 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뭘 공부하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들어간 학과였음에도 예술과 탁상공론을 좋아하던 본인 기질에 운좋게 맞아 떨어져 수업이 매우 재미있었고 이전에 하던 음악 공부도 한동안은 내팽개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1994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수상 이후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 매진, 원투의 오창훈이 활동했던 그룹인 체크와 김민승이라는 가수에게 곡을 주며 창작 활동을 이어가다 1997년경 박진영에게 스카웃되어 2001년 8월부터 2005년 1월까지 JYP엔터테인먼트 수석 프로듀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14] 박진영이 작곡가 김형석에게 프로듀싱의 A to Z를 다 배웠다고 밝혔는데 방시혁도 박진영에게 프로듀싱의 모든 것을 배웠다고 수상 소감으로 말하기도 했다.[15] 회사를 설립할 당시만 해도 인원이라곤 박진영과 방시혁, 회계 담당 직원 한명이 전부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JYP의 핵심 임원으로 출발한 셈이다. 방시혁이 JYP 2대 주주였던 적도 있었다. 이때 둘이 프로듀싱한 대표적인 그룹이 1세대 국민 아이돌로 불린 god였다.[16] 당시 어찌나 바빴던지 한 달만에 음반 1개 작업을 모두 마친 적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방시혁은 사회성도 없었고 성격도 원체 시크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쟤 원래 저래?"라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본인 왈 신인 때부터 사람을 가려 사귀는 성격이었다고. 또 철학적인 얘기도 좋아해서 박진영이랑 작업할 당시 둘이 인간은 논리적으로 설득될 수 있는 존재인가? 친구라는 건 뭘까? 대중음악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등 철학 논쟁을 새벽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토론 와중에 서로의 사고를 조금씩 수용하며 대중적 예술은 천박하다 따위의 편협한 사고를 고쳐나갔다고 한다.

음악적으로는 주류 음악계에 활동하면서도 트렌드에서는 살짝 비켜가는 신선한 작곡을 했고, 당시 한국 가요와는 좀 다른 서구권 느낌이 나는 작곡으로 팬들과 평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몇 번의 실험적인 곡들이 히트에 실패한 이후로는 상업적인 히트를 목표로 작곡하는 경향이 짙어져 초기 활동 시절에 비해 비평적 평가는 떨어지고 있다.

2005년 2월,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법인상 現 HYBE)[17]를 설립했다.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JYP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회사에서 작곡 및 프로듀싱을 맡았다. SM엔터테인먼트의 보이그룹 블랙비트의 '날개'를 프로듀싱한 경력도 있다. 이때 필명은 현재도 앨범 크레딧에 사용하는 "hitman" bang이었다. 빅히트로 독립한 이후 JYP엔터테인먼트의 보컬그룹이였던 2AM의 매니지먼트를 2014년까지 전담했다.[18]

2009년에는 엠넷에서 런칭한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의 본선에서 메인 작곡가 및 프로듀서를 맡아 첫 생방 미션곡들의 편곡을 담당했다. TOP6 작사미션에서는 작곡 파트너인 Pdogg이 당시 신인 작곡가로서 참여하기도 했으며, 결승전에서는 TOP2인 서인국과 조문근에게 미션곡이자 데뷔곡인 ‘부른다’를 작사, 작곡했다.

2010년에는 MBC에서 시작한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에서 '직설적으로 말하는 심사위원' 역을 담당했었다. 사진1, 사진2 사실 방시혁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첫 프로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음악 심사에선 독설도 마다하지 않는 [19] 이중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얻게 되는데, 예를 들어 "싱어송라이터는 노래뿐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캐릭터가 된다. 미안하지만 외양에 좀 더 신경을 쓸 생각은 없나?"라든가, 3화에서 스스로를 힙합 프로듀서 라 칭한 점 등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뭔가 독기 있던 눈빛이 유독 돋보여 더 부각된 점도 있다.[20]

그리고 이때부터도 상업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해서, 상업화된 노선하곤 거리를 두는 참가자에 대해 그 상업음악 하시는 분들보다 많이 못 한 실력이라며 진짜 본인의 음악을 알릴 거면 실력부터 키우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이후 멘토로서 담당하고 있던 후보들이 그의 프로듀싱을 통해 되레 호불호가 갈리는 심한 변화를 겪어 시청자 평이 나뉘기도 했는데, 요컨대 자신이 담당하는 가수들을 음반 산업에 필요한 상품화 특성을 갖추는 쪽으로 채찍질하고 성형하는 방향성을 가졌었다. 물론 호평하는 쪽에선 다소 직설적이어서 그렇지 날카로운 심사평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프로 자체가 발라더를 찾는 프로였다 보니 뭔가 약간 안맞는 옷을 입은 느낌도 있었다.[21] 한편, 멘토들이 끝까지 자기 멘티만 뺀 나머지 참가자들의 심사위원 역할을 했던 프로그램 포맷상 다른 멘토인 이은미랑 파벌, 동맹 논란이 터지기도 했다. 여담으로 멘토스쿨에서 아직 데뷔 전이던 방탄소년단 멤버들의 이름이 나왔다.

2011년에는 동요계에도 진출해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요집'이라는 것을 펴냈다. 이때 조권이 '원숭이'란 노래를 불렀는데, 당시 유치원에서 많이들 들었다고 하는 걸 보면 꽤 인기를 끈 모양.

2011년, 백지연의 인사이드피플에 출연하여 살아온 인생 등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여기서 인정하는 아이돌팀이 있느냐는 질문에 노래, 춤, 외모, 몸매 다 되는 동방신기, 소녀시대 두 팀을 언급했고[22], 당시 신인이던 미쓰에이도 무대 장악력이나 라이브 안정성이 대단하다며 칭찬했다. 그리고 2세대 걸그룹의 모델을 제시한 원더걸스에 대해서도 창의적인 역량이 뛰어나며 K-POP가 비아시권에서도 뻗어나갈 수 있는 역량을 만들었다고 극찬했다. 또한 당시 나는 가수다의 흥행으로 아이돌 가수에 대해 나가수 팬덤을 위시한 일부 대중들의 비하가 이어지는 현상에 대해 평소 지론과 마찬가지로 "한국 아이돌은 외모도 갖추면서 노래와 춤도 모두 잘해야 하는 그야말로 극한직업인데 정작 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비난만 한다."는 식으로 나름의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2011년 4월 27일, 위의 발언의 연장선에서 서울대 ‘언론정보문화 포럼시리즈' 강의에서 오디션 프로그램 등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범람에 대해 "대중들의 귀가 높아지며, 소위 '듣는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게 됐다."고 밝혔다. 또한 그런 기류에 맞춰 아이돌계에서도 노래, 춤, 연주, 작사, 작곡에 능한 뮤지션돌, 즉 완전체 아이돌이 등장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기사) 당시에는 아이돌이 가수보단 외모만 믿고 활동하는 엔터테이너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인지 다 잘하면 아이돌이 아니라 다 잘하는 싱어송라이터 아니냐는 비웃음 섞인 반응도 있었으나[23], 애초에 방시혁은 발라드로 글로벌 시장은 한계가 있고[24] K-POP 한류에서는 댄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실제로 훗날 그가 제작한 방탄소년단이 아시아권을 넘어 서구권에서도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는 세계적 아티스트가 된 이후부턴 방시혁의 이런 소신 발언들이 재평가를 받고 있다.

2023년, HYBE 사옥에서 CNN과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어는 리차드 퀘스트(Richard Quest).[25] 여기서 케이팝 시장이 지적받는 문제점과 앞으로 나가야 할 비전 등에 대해 본인의 견해를 얘기하면서, 현재의 K팝은 그 핫함에 비해서는 실제 글로벌 음악 시장에서의 점유율이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때문에 여러 레이블과 매니지먼트 컴퍼니를 인수해 인프라를 구축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영상.

3. 경력

3.1. 수상 경력

방시혁의 수상 이력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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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커리어

3.3. 대표곡

3.4. CF

4.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있는 아티스트

4.1. 총괄 프로듀서

방시혁 총괄 프로듀싱 아티스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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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rowcolor=#fff,#000> 데뷔 연도 아티스트 비고
2013년 방탄소년단 빅히트 뮤직,
보이그룹
2019년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빅히트 뮤직,
보이그룹
2020년 ENHYPEN 빌리프랩,
보이그룹,
서바이벌 I LAND로 데뷔
2022년 LE SSERAFIM 쏘스뮤직,
걸그룹
&TEAM HYBE LABELS JAPAN,
일본 현지화 보이그룹,
서바이벌 &AUDITION-The Howling으로 데뷔
2024년 ILLIT 빌리프랩,
걸그룹,
서바이벌 알유넥스트로 데뷔
KATSEYE 하이브 유니버설,
미국 현지화 걸그룹,
서바이벌 The Debut: Dream Academy로 데뷔
}}}}}}}}} ||

방시혁이 총괄 프로듀싱하는 대부분의 곡 정보(Credit)에는 작사 또는 작곡 한 쪽에만 참여해도 작사, 작곡에 똑같이 이름을 올린다. 그 이유는 저작권료를 나눌 때 지분이 작사 50%, 작곡 50%인데 보통 작사나 작곡의 공동 작업자 수가 달라서 사람 수가 적은 쪽이 돈을 더 많이 가져간다.[36] 그래서 참여한 작사, 작곡진을 전부 한꺼번에 같이 올려서 한 곡 당 기여한 비중대로 저작권료를 배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있고 해외에서도 팀으로 작업하는 경우 'songwriter'로 묶어서 곡 정보에 올리는 경우가 많다.

공통적으로 매년 1년간 '아티스트 실록'이라 불릴 정도로 방대한 양의 비하인드 영상 기록들을 가득 담은 DVD포토북이 포함된 메모리즈를 판매하며, 매년 데뷔일 기념으로 약 1~2주 동안 미공개 사진 및 영상을 공개하는 콘텐츠 대잔치 축제기간이 있고, 웹툰 및 소설 세계관이 존재한다.

참고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에는 과거에 8eight, 2AM, 글램 등 여러 가수들이 있었지만, 그중에 방탄소년단이 2014년 1주년 때부터 데뷔일 기념 축제를 최초로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빅히트가 힘없는 중소기획사 시절이었고 방탄소년단도 아직 인지도가 많이 부족한 신인시절이라서 방송이나 행사에 나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고 스케줄도 너무 없었지만, 이대로 시간만 보내지 말고 팬들을 위해서 뭐라도 해보자고 멤버들이 직접 회사에 건의하여 시작된 것이 지금의 데뷔일 기념축제 FESTA이고, 팬들의 반응이 워낙 좋아서 이후 방시혁이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후배 아이돌 그룹들은 모두 따라하고 있다.

4.2. 기타

5. 논란 및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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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1] 방시혁이 예전 JYP 프로듀서일 때 당시 박진영이 지어준 이름이다. #[2] 기사[3] 기사[4] 창평공파(昌平公派) 29대손 ◯혁(○爀) 항렬이다.[5] 전주 최씨.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출신. 남동생은 최규식 전 국회의원.[6] 이화여자대학교 작곡과 출신.[7] 유태웅, 김성민과 고교 동기생이다. 강원래, 주영훈의 중학교-고등학교 직속 후배다.[8] 서울대 미학과 출신인 김지하, 진중권, 변희재 등과 동문이며, 인문대 차석으로 졸업했다. 당시 졸업식에 축하하러 갔던 박진영이 밝힌 바로는 방시혁은 본인과 같이 작업을 하느라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차석을 받은 것을 보고 언제 공부를 했느냐고 물어봤는데 방시혁이 '공부 안 했어'라고 대답하자 엄청 꼴보기 싫었다고 한다. #[9] 한국인으로는 13번째로 서울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10] 전시근로역이나 병역면제로 추정된다. 1991년 대학교에 입학한 이래 연예계 데뷔 이후 대학교 졸업 및 연예계 커리어가 공백 기간 없이 촘촘히 이어진다. 또는 병역 특례일 수도 있다.[11] 2018년 9월 9일 이후 트윗이 업데이트되지 않는다.[12] 부친 인터뷰.[13] 심지어 밤새 공부하는 게 쿨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시험 전에 쓱 흝어보고 만점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도 집안 분위기가 분위기라 공부를 아예 안 하진 않은 듯. 공부보단 오히려 프로 음악계 입문 이후 박진영, 신승훈, 김건모, 김형석 같은 당대 천재 싱어송라이터, 작곡가들을 보며 절망감을 맛봤다고 한다. 그래서 이땐 진짜 미친듯이 노력했다고.[14] 한국에 '신인개발팀'이라는 게 처음 생길 때부터 참여했으며, JYP에 있을 때 A&R, 매니지먼트 등 시스템적인 노하우를 많이 접했다고 한다. 2013년 인터뷰.[15] 2016년 AAA 시상식 프로듀싱상 수상소감 참고. 또 이후 2023년 예능 유퀴즈에 둘이 함께 출연해 말한 바에 따르면 이때 본인이 박진영 곡을 대신 써준다는 고스트라이터 루머가 있기도 했는데, 당시만 해도 본인은 작곡 능력이 딸려 1곡 다 완성시키기도 버거워했던 터에 오히려 박진영이 본인을 도와주고 그냥 니가 다 쓴걸로 하라고 할 정도였다고 감사함을 표하기도 했다. 필명인 'hitman bang'이란 표현도 박진영이 밝히길, 방시혁의 성이 Bang이었기에 미국 활동 당시 소개할 때 그냥 Bang이라고만 소개하기 뭐해서 Bang과 의미가 통하는 hitman을 붙인 거라 한다. 즉, 고스트라이터랑은 무관하고 단순히 히트곡을 많이 냈다는 의미일 뿐이다.[16] 여담으로 god 4집 Chapter 4의 수록곡 '모르죠'가 당시 방시혁이 겪은 사랑 이야기였다고 한다.[17] 실질적으로는 빅히트 뮤직이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후신이다.[18] 2AM을 처음 매니지먼트 했던 회사는 2008년까지 JYP엔터테인먼트 사장을 역임했다가 독립했던 홍승성의 큐브엔터테인먼트였다. 하지만, JYP와 큐브의 사이가 어느 순간 나빠지게 되었고 2AM의 매니지먼트는 빅히트로 넘어가게 되었다.[19] K팝스타는 위대한 탄생 이후에 방영했다.[20] 훗날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방시혁은 딱히 야망은 없었지만 불만은 많던 사람이던 자신을 설명하면서, 이 당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참가자들을 보며 분노하던 본인피셜 비호감이던 자신을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그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며 지금은 그렇게 분노하진 않지만, 여전히 자신의 상식에 맞지 않거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선 불만을 가지고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21] 물론 방시혁도 싱어송라이터나 발라더들을 키운 적은 있다. 진주, 케이윌, 임정희, 에이트 등이 대표적.[22] 사족으로 방탄소년단은 신인 시절 빅뱅을 롤모델로 언급한 바 있다. 방시혁 본인도 후술되어있듯 빅뱅 리더 GD의 작곡, 프로듀싱 능력을 극찬했다.[23] 물론 이건 오늘날도 비슷한 시선은 있다. 다만 연예인의 실력에 따라 나뉘는 것 뿐이다. 사실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긴 하지만.[24] 물론 장르적으로 비댄스 분야도 기회는 있지만, 트렌드 자체가 완전 발라드보단 힙합이나 알앤비 쪽으로 많이 넘어온 상태기도 하다.[25] CNN의 경제 전문 기자로, CNN에서 오랫동안 경제 전문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경제 전문가이다.[26] 출처[27] 출처[28] 앨범이 희귀한데다 방시혁의 데뷔작이라는 이유로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29] 그래미 어워드 투표권을 갖게 되었으며 2020년 그래미 어워드부터 수상자를 결정할 투표권 행사가 가능해졌다.[30] 이후 배슬기가 리메이크해서 디지털 싱글로 발표.[31] 원곡은 2000년에 데뷔한 걸그룹 티니의 'One Fine Day'.[32] 이후 김수찬이 리메이크 했다. 특히 보통의 리메이크와는 다르게 원곡자인 방시혁이 직접 프로듀싱을 해주었다고 한다.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2004년에도 스칼렛이라는 신인 걸그룹이 리메이크 하기도 했었다.[33] 가온 차트 기준 2010년 8월 월간차트 1위.[34] 가온 차트 기준 2010년 1월 월간차트 1위.[35] 조동진, 들국화,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김현철, 빛과 소금, 푸른 하늘, 한동준, 박학기 등 음악성 있는 많은 가수들과 함께 했던 기획사인 동아기획에서 최초로 내놓은 여성 아이돌그룹이었다. SeeU와는 다르다.[36] 해외에서 받은 곡은 저작권료를 그 나라에서 한 번 떼고 와서 비율이 약간 다르다.[37] 후기(코스모스) 졸업이기에, 졸업 인원이 적었다. 참고로 1997년 2월의 전기 졸업식에서 인문대학 졸업생은 284명이었다.[38] ‘친척관계’ 방준혁·시혁 총수 대열에...“회사 일궈 리스트서 만난 첫 사례”[39] 박진영은 미국 진출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 회사에선 실패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회사 돈은 못주니 굳이 하고 싶으면 설립자라도 개인 돈으로 하라고 했고, 그렇게 1년간 개인 돈 쏟아부어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이면 회사 돈을 투입하기로 했다고 한다. 허나 이때 박진영은 본인 저작권료까지 죄다 회사에 주던 시절이라 결국 둘은 미국의 아는 신혼부부 집에 비싼 시계를 하나 선물해주고 기어들어가 비좁은 방 한칸에 두명이 지냈다고 한다. 음악장비들은 차고에 겨우 세팅했다고.[40] 다만 그 직후 바로 귀국한 것은 아니고, 박진영이 좀 더 미국 시장을 파보겠다고 하자 추가적으로 곡 만드는 작업을 한참 진행해 놓고 나서 귀국했다.[41] 해당 곡은 백지영이 부른 내 귀에 캔디.[42] SM의 유영진도 본인 소속사 가수를 제외하고는 리메이크를 허용하지 않으며, 천재노창 역시 자신이 만든 트랙을 inst로 푸는 것을 싫어한다고 알려졌다. 천재노창의 경우는 자신이 공들여 만든 비트 위에 랩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수준 낮은 랩이 올라가는 것 자체가 싫다고 한다. 김동률, 양희은 등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가사가 위주인 싱어송라이터 몇몇 역시 리메이크를 꺼리는 편.[43] 그래도 박용택의 은퇴식 한정으로 박용택의 전설의 응원가를 하루 허용해주기는 했다.[44] 특히 진은 어느 순간부턴 대놓고 형이라고 한다. 근데 재미있는 건 반말하던 방시혁도 어느순간부턴 멤버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 방탄소년단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서 같이 늙어가고 있는 중인지라 존중의 의미도 담아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45] G-DRAGON의 작사작곡 능력이 뛰어나고 너무 잘하기 때문에 질투가 난다는 표현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46] GD는 당시에도 국내 톱 아이돌이고 한류스타이기는 했지만 지금만큼의 위상은 아니었다. 그 사이 국내 1티어에서 세계 1티어 문화 거물이 된 방시혁은 말할 것도 없다.[47] 이 발언은 "미국 프로듀서에게 받은 노래를 영어로 부른다면 그것은 이미 K-POP이 아니다"라고 왜곡되기도 했다. #[48] 이슬람교의 대표 성지 메카와 붙어있는 그 제다 맞다.[49] 해당 곡은 방시혁이 2008년 프로듀싱했던 바나나걸 4집 수록곡 '꽃'과 동일하다.[50] 한때 초록창에서 방시혁을 치면 연관 검색어로 '찰지구나'가 뜰 정도였다.[51] god 4집 Chapter 4의 수록곡 '모르죠'도 방시혁 사랑 얘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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