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1-19 21:55:04

살리에리 증후군

1. 개요2. 유래3. 기억해야 할 점: 살리에리는 억울하다4. 반전 : 오늘날에 오히려 올라간 살리에리의 명성5. 관련 문서

1. 개요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e)은 주변의 잘난 인물 때문에 느끼는 열등감, 시기, 질투심 등의 증상을 이르는 말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대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2. 유래

피터쉐퍼가 집필한 희곡 《아마데우스》속의 살리에리는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모두가 그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모차르트를 만나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고 예술적 재능을 열망하며 신을 원망하게 되는 이상 심리상태에 빠지게 된다.

해당 용어는 연극아마데우스》를 평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고, 1984년 영화아마데우스》로 대중화된 용어이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시대 18세기~19세기에 만들어진 용어가 아니다. 살리에리 증후군이란 용어는 생각보다 최근에 만들어진 용어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오스트리아 출신의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당시의 대음악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음악을 바탕으로 한 그의 음악은 잊혀져 갔고 모차르트 사후 퍼졌던 사실과는 다른 풍문이 시간이 지나면서 창작물로 나오게 된다.

모차르트가 사망하자 여러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며 그중에는 당시 궁정악장으로 모차르트에게 불평을 듣던 살리에리가 그를 독살했다는 이상한 소문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 러시아 작가 푸시킨이 1830년, 항간에 떠도는 독살설을 설정한 짧은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을 내놓았고 같은 러시아인인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1897년 동명의 오페라를 내놓는다. 이후 시간이 흘러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가 푸시킨 희곡과 림스키 코르사코프 오페라에 착안해서 1979년 희곡 《아마데우스》를 발표했고, 이후 피터쉐퍼의 희곡과 각본을 바탕으로한 연극영화가 성공하며 해당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어지게 된 것이다.

살리에리 증후군의 한가지 특징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 또는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상대적 열등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어떠한 영역에서 늘 나보다 앞선 누군가가 있기에 더 높은 자리로 오를 수 없고, 그 사람의 업적을 더 빛나게 하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머무르는 처지를 비관하면서 살리에리 증후군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극단적인 2인자의 심리 상태를 투영한 용어가 바로 살리에리 증후군인 것이다. 

3. 기억해야 할 점: 살리에리는 억울하다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에서 유래해서 살리에리 증후군이라는 병명이 탄생하긴 했지만, 사실 이는 살리에리에게는 다소 억울한 일이다.

사실, 질투심을 느낀 쪽은 오히려 모차르트였다.영상 모차르트는 당시 음악가로서 최고의 자리인 궁정악장에 있던 잘나가는 살리에리를 질투하며, 편지나 대화 등에서 그를 탓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이야 모차르트 쪽이 더 명성이 높지만, 당시에는 살리에리가 당대에 여러 을 모시면서 계속 궁정악장 자리에 있는 큰 성공을 거둔 음악가였다. 당연히 부와 당대의 명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살리에리가 굳이 열등감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는 이야기. 모차르트도 유명했지만, 방탕한 생활과 사람들과의 불화(不和)로 가난갈등이 끊이지를 않았고 반면 살리에리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고 그에 맞는 명예를 누렸고 사람들의 존경심을 받고 있었다. 오히려 당대에는 "살리에리의 음악이 모든 공연을 가져간다."라며 벌이가 막막하다는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투정 섞인 편지까지도 발견되었을 정도.

모차르트가 지나치게 자기관리사회생활을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1] 살리에리 역시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그것은 당시 살리에리뿐 아니라 많은 음악가들이 그러했고 모차르트는 모두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자신을 비난하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살리에리는 그런 모차르트를 여러모로 챙겨주었다. 본인과 부인의 사치로 경제형편이 곤궁한 모차르트에게 살리에리가 일자리소개해준 일도 있으며, 모차르트의 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사정이 어려운 후학들에게 무료로 음악을 가르칠 정도로 그릇이 넓었던 사람이다.

즉,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싫어한 건 모차르트의 모난 성격 때문이었고 재능과 명성을 시샘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므로 살리에리 증후군이란 이름으로까지 남아서 질투의 화신으로 기억된 점은 살리에리 본인으로서는 매우 억울한 일일 것이다.

모차르트 생전에는 두 사람 사이에 그다지 접점이 있지는 않았지만 모차르트 사망 후 독살설이 퍼지면서 살리에리도 이 소문을 듣게 되었고 작곡가였던 이그나츠 모셸레스(Ignaz Moscheles)가 노년의 살리에리를 찾아가 인터뷰했을 때 이에 대해 질문하자 살리에리는 "나는 물론 모차르트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나 외에도 그 자를 싫어한 사람은 한 둘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죽였다는 설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정했다. 게다가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공동작업을 한 적도 있어서 사이가 좋지 않았을지언정 다툼이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견해이다.

4. 반전 : 오늘날에 오히려 올라간 살리에리의 명성

원래는 서양음악사나 고전음악 전공이 아니라면 살리에리의 이름을 알만한 사람은 매우 적었을 것이다. 전공자라 하더라도 이름이 스쳐가는 정도이며, 오늘날 대중들이 아는 이탈리아 음악가라고 해봐야 비발디와 파가니니 정도로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당대에 아무리 유능해도 사후평가가 중요하다. 위인전에 이름이 실리거나,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 하여[2] 후대에 재조명되는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모차르트도 비할데 없이 뛰어난 연주실력과 별개로 악풍이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당시의 정서에 맞지않는다는 이유로 당대에는 고액 유료 공연 관객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상류층에게 어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모차르트 사후 그의 곡이 점점 재평가받게 되면서 위상이 올라갔고 후세에까지 이름이 남은 것이다. 반면에 살리에리는 교회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당대 음악사조에 부합하는 잘나가는 주류 음악인중 하나였지만 후대의 조류에 어필하지 못하며 이름을 남기기 어려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질투 루머와 암살 음모론이 마치 정설인 것처럼 되어버렸고 모차르트가 불멸의 명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그와 불명예스러운 악성 루머로 엮인 살리에리도 모차르트라이벌로 대중들이 이름 정도는 아는 음악가가 되었다. <아마데우스> 연극과 영화의 성공으로 역설적으로 그간 잊혔던 살리에리의 오페라들이 다시 재조명 받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5. 관련 문서



[1] 인간이 어느 한쪽 분야에 너무 특별하게 발달한 경우 균형이 깨지거나 전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미흡할 때가 많다. 모차르트는 생애를 보면 생활에 있어 여러 문제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모차르트가 쉽게 작곡을 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며 모차르트의 사후 기록들을 보면 엄청난 노력을 했고 재능에 노력이 더해져 음악적 성과를 이룬 것이었다.[2]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화가가 대표적인 사례다. 차이점은 모차르트는 당대에 이미 신동이라 널리 인정받았고 다수의 흥행작들도 남겼지만, 빈센트 반 고흐는 생전 그림 딱 1점 팔았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