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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0:11:58

김창환(작곡가)

<colbgcolor=red><colcolor=#000000> 김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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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K.C.Harmony, Midas-T
출생 1963년 3월 18일 ([age(1963-03-18)]세)
현직 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 회장
학력 보성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산업대학 (도예학 / 학사)
자녀 장녀, 차녀 김채연, 삼녀 김세연(1998년생)
링크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활동3. 대표작4. 프로듀스한 음반5. 논란 및 사건 사고
5.1. 서태지 이재수 고소사건5.2. 더 이스트라이트 폭언 및 폭행방조 사건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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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작곡가이자 프로듀서다.

신승훈, 김건모, 노이즈, 박미경, 클론, 홍경민, 디토, 채연, 심태윤, 이정 등을 데뷔시켰다. 작곡가 윤일상, 김형석, 주영훈 등과 함께 90년대를 대표하는 많은 히트곡들을 배출했으며 그가 작곡한 곡들은 당시 가요톱10에서 자주 1위를 탈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1] 다만 신승훈의 '날 울리지 마'를 작곡할 때 Sam Harris의 Don't Look In My Eyes를 표절하여 신승훈이 표절곡을 부르게 한 사건과 후술된 몇몇 사건으로 비판도 받는 제작자이다.

2016년 기준으론 마이다스이엔티 총괄 프로듀서로 'Midas-T'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이며, 프로듀스 101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곡 'PICK ME'도 그의 작품이다. 나이를 생각하면 감각이 녹슬지 않은 셈.[2] 2016년 11월, 수년만에 최연소 밴드 그룹 더 이스트라이트를 데뷔시켰고, 지금까지 프로듀싱했던 아이돌 그룹들과는 다르게 제법 팬층이 생기면서 좋은 반응을 얻나 했지만, 아래 언급될 폭언, 폭행 사건 여파로 팀은 해체되고 본인 커리어에도 큰 오점을 남겼다.

2. 활동

2.1. 데뷔 이전

첫 데뷔는 1987년 가수 김수철의 음반에 스태프로 참여한 것이다.

izm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80년대 대학 진학 후 나이트클럽을 다니며 흑인음악에 빠졌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강남에서 클럽(월드팝스)의 DJ가 되어 활동하던 중, 마돈나의 데뷔 앨범 Madonna의 프로듀서 "젤리빈" 베니테즈[3]가 DJ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본격적으로 프로듀서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대전에서 활동하던 무명 가수 신승훈을 발탁한 것이 김창환의 프로듀서로서의 첫 행보였다. 신승훈의 데모 테이프를 들고 6~7곳의 음반사를 찾아갔지만 퇴짜를 맞은 끝에, 어학 테이프 제조사였던 덕윤산업에 근무하던 사맹석 부장이[4] 신승훈을 주목하여 가까스로 데뷔 앨범을 제작할 수 있었다. 참고로 덕윤산업은 90년대 초중반 한국 대중음악계를 주도한 라인음향의 모기업이 된다.[5]

2.2. 1990년대

댄스 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린 일등공신.[6]
KBS 민일홍 PD

1990년대 초중반 가요계는 김창환 혹은 그가 기획한 가수들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숱한 히트곡들을 만들어낸 작곡가이자, 라인음향에서 본인이 프로듀싱을 거쳐 데뷔시킨 대부분의 가수들을 스타로 만든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한명이었다. 70~80년대 해외에서 주류였던 디스코를 바탕으로 하는 음악에 랩 등을 가미하며 90년대 가요 트렌드를 이끌었다.

그가 발탁한 대표적인 가수들은 역시 신승훈김건모. 물론 신승훈은 싱어송라이터이기에 프로듀서의 영향력이 적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신승훈을 발탁하고 통기타를 치는 포크 싱어였던 신승훈에게 지적이고 감성적인 발라더의 이미지를 만들어준 것은 분명 김창환의 힘이었다. 신승훈의 1집부터 4집까지는 모두 김창환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3집과 4집 때는 신승훈도 프로듀싱에 참여하였으며 5집부터 신승훈의 단독 프로듀싱이 이뤄지지만, 제작 자체는 김창환이 있던 라인음향에서 계속 담당했다.

반대로 신인 시절 대중가요계에서 "김창환의 제자"로까지 불렸던 김건모[7]는 확실히 김창환이 많은 공헌을 한 스타로 초기 히트곡 '핑계', '잘못된 만남' 등은 모두 김창환의 작품이다. 그 뒤 김건모는 3집 '잘못된 만남'을 끝으로 김창환의 둥지를 떠났다.

신승훈과는 대중적인 발라드 음악을, 김건모와는 R&B, 레게 등 흑인음악을 선보인 김창환은 이후 노이즈박미경의 곡들을 통해 댄스 뮤직과 가요를 융합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노이즈와 박미경 앨범의 커버 뒷면에는 트랙리스트와 함께 곡들의 세부 장르가 함께 표기되어 있다. 당시 대중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댄스 음악의 여러 세부 장르들을 알린 것은 김창환 사단의 분명한 공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후 데뷔시킨 클론을 통해서는 화려한 댄스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한 "보는 음악"의 진수를 만들어냈다. 90년대 초중반 가요계는 김창환과 라인음향의 시대였다. 김창환, 천성일, 김우진 등 댄스 음악으로 특화된 작/편곡진과 우수한 가수들이 뭉친 당시의 김창환 사단은 그야말로 적수가 없어보였다.[8]

하지만 이후 야심차게 기획한 신인 그룹 콜라가 히트를 치지 못했고, 97년 이후 H.O.T., S.E.S., 핑클1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가요계를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영향력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트렌드가 바뀌어가는 와중 성인 취향에 가까운[9] 음악을 만들어온 김창환의 전성기도 점점 저물어간다.

설상가상으로 98년에는 라인음향의 대표였던 사맹석[10]이 국세청의 탈세자 리스트에 오르고 라인음향이 세무조사를 받더니 탈세와 횡령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데뷔 이전" 문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라인음향은 김창환이 대표가 아니었고[11], 경영진이 잡혀가자 김창환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때 김창환도 조사를 받았고 애꿎은 신승훈까지 탈세에 연루된 것이 아니냐며 소환되었다.[12] 이 사건과 1세대 아이돌이 주도하는 가요계 시장 재편 등으로 라인음향은 쇠락하고 마는데[13], 훗날 나온 박미경 8집 앨범 소개글에 따르면 이때 라인음향 내부에도 갈등이 생겨 김창환이 독립하게 되고, 클론이 김창환을 따라 나갔다고 한다.

1999년에는 일본 시장에 진출을 시도하였다. 당시 아뮤즈 소속이었던 일본인 여성 4인조 그룹 "COLOR"의 1집 앨범을 프로듀스하였으며, 2번째 싱글 "Why?"는 소년탐정 김전일의 주제가로 타이업되었다. 그러나 COLOR는 별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14] 이후 "Why?"는 2008년에 와서 베이비복스 2기(리브)가 한국어 버전으로 다시 불렀다.[15] 참고로 2000년에 베이비복스가 불렀던 Why는 작곡가부터 다른 전혀 다른 노래다. 이쪽은 김형석 작사, 작곡. 사족으로 김형석 역시 김창환 사단으로 한동안 라인음향에서 활동하긴 했다.

2.3. 2000년대

라인음향이 "공중분해"된 이후, 김창환은 자기를 따라온 클론과 함께 우퍼엔터테인먼트를 창립한다. 물론 라인음향 자체는 2000년대에도 한동안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창환이 아닌 천성일이 프로듀스한 박미경 5집에 라인음향 로고가 붙어 있다. 하지만 김창환 프로듀스가 없는 라인음향은 정체성 자체가 바뀐 느낌이 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김창환이 세운 우퍼엔터를 라인음향의 실질적인 후신으로 보기도 한다. 참고로 라인음향의 모기업이었던 덕윤산업 자체는 원래의 사업 분야인 어학 교재 녹음을 위주로 2020년대까지도 운영 중이다.#

2000년에 록발라더였던 홍경민을 발탁한 뒤 '흔들린 우정'이라는 대히트곡을 탄생시키며 프로듀서로서의 감각을 재확인하였다. 또한 같은 해 트랜스 음악을 콘셉트로 한 남성 그룹 '디토' 또한 데뷔시켰다. 2001년에는 예능인이자 가수로서 무난한 인기를 끈 심태윤을 프로듀싱하였다. 그러나 이 해 강원래의 교통사고로 위기를 겪기도 했다.

2002년 베이비복스의 5.5집 프로듀서를 맡으며 처음으로 타 기획사 가수를 프로듀싱하였다. 타이틀 곡은 <우연>으로 자신이 1996년 제작했다 망한 콜라의 원곡 <우울한 우연>을 리메이크했는데, 2002 월드컵 시즌과 여름 분위기에 맞춰 큰 히트를 치게 된다. 이듬해 발매된 정규 6집 역시 히트를 쳤고, 베이비복스의 해외활동이 절정에 이르면서 김창환은 이전까지 베복을 주로 전담한 김형석과 함께 베이비복스의 전성기를 함께 한 프로듀서가 되었다. 또 클론이 2002년 월드컵 시즌에 발표한 <랄랄라>와 <발로 차>가 수록된 스페셜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이 역시 월드컵 응원가로 큰 히트를 치게 되었다.[16]

2003년에는 CJ미디어라인 아래에서 채연을 데뷔시키며 무난한 성공을 맛봤고, 같은 해 김건모를 연상시키는 이정의 1집 앨범도 프로듀싱했다. 이 시기 가요계는 급격하게 R&B, 발라드 위주로 흘러가게 되면서 이른바 소몰이 창법의 시대가 오고 김창환이 이끌던 하우스 댄스 음악의 수요는 줄었으나, 이정을 프로듀스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창환의 프로듀싱이 꼭 하우스 댄스 장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인지도 있는 신인 가수를 여럿 발굴해내며 여전히 능력있는 프로듀서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게다가 CJ의 자회사로 편입된 이 시기엔 자사 가수들의 뮤직비디오가 CJ 산하 케이블 채널에서 굉장히 많이 방영돼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특히 채연과 이정의 데뷔곡은 이 때 많은 수혜를 받았으며 뒤에 후술할 엠넷 신인발굴 프로젝트 '엠픽'을 통해 데뷔한 원우는 실패한 케이스다.[17]

그러나 2000년대 중반 발라드 장르를 위주로 프로듀스한 오세준(디토의 메인 보컬), 원종찬(데뷔 예명은 원우)은 큰 인기를 끌지 못했고, 2000년대 후반 본격적인 2세대 아이돌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금 김창환의 영향력은 한층 더 줄어들었다. 이시기 간만에 다시 김건모, 박미경과 의기투합해 김건모 12집과 박미경 8집을 프로듀스했지만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묻힌다.

2005년 발표된 클론 5집의 앨범 프로듀서를 맡았고, 강원래의 재활치료 기간동안 그를 위해 헌신한 안무가 김송에게 바치는 <내 사랑 송이>를 작곡했다.

2.4. 2010년대

아이돌 시대를 맞아 김창환의 미디어라인에서도 2010년 걸그룹 VNT[18]와 2011년 보이그룹 엔트레인[19]을 내보냈으나 아이돌 육성엔 영 젬병인지 시대착오적인 기획을 보여주며 각각 1장, 3장의 싱글을 발표한 후 활동을 중단했다. 김창환 본인은 엔트레인을 육성하면서 아이돌보다는 노이즈같은 남성그룹을 키우는 감각으로 임했다는데, 가면 갈수록 고도화, 팬덤화되어가던 아이돌 시장과는 맞지 않는 자세였다. 그렇다고 90년대 당시처럼 음악적으로 확실히 차별화가 된 것도 아니었다. 한편 이 시기 또 다른 걸그룹으로 제2의 오소녀라 불리는 가칭 '비바걸스'를 기획했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프로듀서로 당시 세계 주류 음악이 된 EDM을 연구하였다. 그 첫 작품으로 2012년에는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멤버인 스테파니의 솔로 앨범 <GAME>의 작사, 작곡, 프로듀싱을 맡았으나[20] 수준 미달의 유사 EDM을 선보이며 혹평을 받았다. 그런데 이후 절치부심했는지 2016년 프로듀스 101에서 선보인 과제곡들은 중박 정도의 인기를 얻으며 어느 정도 자신의 건재를 과시했다.

2016년에는 틴에이저 밴드 더 이스트라이트를 데뷔시켰는데, 문제는 후술되어 있듯 폭행 방조·폭언 논란으로 팀이 2018년 해체하고 만다. 뿐만 아니라 김창환 본인이 이 사건으로 인해 (집행유예긴 하지만) 형을 선고받고 휘하의 프로듀서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김창환이 더이상 현대 가요계에 필요 없고 해악만 끼치는 구시대적 인물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사건이 되어버렸다는 평까지 나올 정도로 그의 명성에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3. 대표작

4. 프로듀스한 음반

라인음향-우퍼-미디어라인에서 김창환이 프로듀스한 음반들. 작곡과 프로듀싱은 다른 것이며, 아래의 음반들을 전부 김창환이 작곡한 것은 아니다.

5. 논란 및 사건 사고

5.1. 서태지 이재수 고소사건

표면적으로는 서태지와 개그맨 겸 가수 이재수 간의 법정소송이지만, 사실상 서태지와 김창환 간의 소송으로 봐야 한다. 사실 김창환이 프로듀스한 플러그 앨범부터[28] 이재수 1집까지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시기 김창환이 서태지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이 있었던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했던 시기와 김창환이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5.2. 더 이스트라이트 폭언 및 폭행방조 사건

2018년 10월 18일, 한 매체를 통해 본인이 프로듀싱한 그룹 더 이스트라이트의 멤버들에게 폭언을 가하고, 소속 프로듀서 문영일[29]의 폭언, 기합, 폭행을 묵인·방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문영일의 행동으로 한 멤버는 폭언과 폭행의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폭행 내용 중 기타 케이블로 미성년자인 멤버의 목을 졸랐다는 이야기가 대중에게 충격을 주어 '범죄 행위이다', '처벌 받아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해당 사고가 알려지자, 결국 소속사 측에서 '약 1년 4개월 전에 발생했던 일을 지금 알았다'라며 폭행 논란이 있었던 프로듀서를 사임시켰다고 했지만 측근은 재발방지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언어폭력이 이어졌다고 증언했다. 결국, 더 이스트라이트의 리더 이석철이 '폭행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언론에 입장을 밝혔다.

4년간의 폭행·폭언 일지 사비로 원룸 생활+악기 사용+정산無 활동 중 대기실에서 폭행, 무대 위해 참았다 “가족 살해 협박까지”, 프로듀서와 주고받은 문자 공개 또한 10월 4일에는 문영일의 복귀에 항의한 이승현을 밴드에서 나가라고 해서 퇴출시켰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창환은 "한번도 폭행을 사주하거나 방조한 적이 없으며, 멤버들을 가르치거나 훈계한 적은 있어도 폭언이나 폭행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으며, 남아 있는 4명의 멤버들을 위해 "과장된 허위사실로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적극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초기 제자 김건모는 할 말 많을듯.

하지만 곧바로 JTBC 뉴스룸에 김창환의 협박성 폭언이 담긴 녹음 파일이 공개되면서 여론이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이승현이 감금된 상태에서 브이앱 방송을 했다는게 발견됐다. 공식 유튜브 컨텐츠에서 폭행 의심 장면 발견.

이에 대해 김창환은 "감정이 격해지기는 했지만 음악을 계속 하도록 도와주려던 것"이었다고 해명하면서도, "문영일의 폭행은 멤버 부모들의 동의 하에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계속 프로듀서를 맡게 되었고 이후 폭행은 없었다.", "이후 콘서트 준비 미흡으로 문영일을 해고하려고 했는데 이석철을 포함한 멤버들의 반대로 계속 일을 하게 된 것이지 일방적인 복귀가 아니었다.", "(이승현의 퇴출 이야기에 대해) 밴드 연습을 살펴보겠다는 문영일에게 이승현이 대들자 문영일이 '승현아. 힘들면 나가있어'라고 했는데 그걸 쫓아내는 걸로 오해한 것 같고, 나는 현장에 있지 않았다." 등 이석철이 공개했던 내용들에 대해 반박했다. 또한 이승현의 인성 문제[30]와 처음부터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레임을 짠 것 같다[31]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 스포츠서울과의 단독인터뷰 #1 #2

이런 김창환의 반박에 이석철 측에서도 추가 반박 내용들을 공개했다. 폭행 사진 추가 공개 "김창환 주장, 변명에 불과" 녹취록 추가 공개…더이라 이석철에 "난 꿈 이룬 사람, 누가 손해일까?" 김현정 뉴스쇼 인터뷰 이석철 "12살 멤버, 야구방망이로 20대 맞고 구토"

22일 오전 이석철 측에서 문PD를 상습 및 특수 폭행, 김창환 회장을 폭행 방조, 이 모 대표와 회사를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

같은 날 오후 미디어라인 측에서는 더 이스트라이트 나머지 4인 멤버와 계약해지를 한다고 발표했으며, 앞으로 진행될 법적 조사에 성실히 임하면서 그 과정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되 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

12월 20일, 문영일 PD가 폭행 혐의로 구속 송치되었다.#

12월 26일 미디어라인엔터테인먼트 김창환 회장, 이정현 대표와 더 이스트라이트 전 멤버 정사강, 이은성이 참석한 가운데 폭행 피해 관련 반박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정현 대표 "이승현 父, 추가 체벌 있었다" 더 이스트라이트 前 멤버 "이석철 대표로 고발? 배신감 든다" 이은성-정사강 "폭행無, 이승현 형제 거짓말에 꿈 잃었다"

이석철 이승현 측 변호인은 "팩트는 단 한 구절도 없다"며 재반박했다.공식입장

2019년 6월 14일 제6회 공판에서 검사로부터 징역 8개월을 구형받았다.# 12월 20일 공판에서 판사로부터 김창환은 징역 8개월과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으며 문영일 PD는 징역 1년 4개월이 선고되었다.#

2020년 5월, 미디어라인 측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증언했던 멤버 이은성과 정사강이 위증 혐의로 검찰 송치되었다.

한편 여러 음원 사이트에 등록된 김건모 12집 "Soul Groove" 앨범 소개를 보면 김창환이 김건모를 '친동생처럼 생각해서' 사생활을 억압하고 하루 10시간씩 로 때려가며 레슨을 시켰다는 내용이 마치 자랑거리라도 된다는 양 대놓고 적혀 있다. 이렇게 김창환 입장에선 일종의 사랑의 매를 주는건데 뭔 문제냐 싶은 잘못된 인식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는데, 저땐 그나마 권위주의 사회 의식이 제법 남아 있던 1990년대 초중반이고 김건모 본인도 이제는 김창환과 잘 지내고 있다는걸 감안하더라도, 그로부터 사회 인식이 많이 바뀐 3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10년대 후반에도 미성년자들을 상대로 비슷한 혹은 더한 행동이 벌어지도록 묵인한 것은 용납되기 힘든 일이었다.

김창환은 분명 감각이 있는 프로듀서는 맞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는데 구시대적 마인드로 일을 하다가 결국엔 디 이스트라이트를 끝으로 더이상 프로듀싱을 의뢰하는 곳도 없다. 사실 디 이스트라이트에 가한 폭행 및 폭행방조는 90년대에도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을 만큼 문제가 되는 행위들이 많기도 했다. 본인의 마인드를 변화시키지 못해 몰락한 경우라고 보면 된다.

6. 기타



[1] 가요톱10에서 싱어송라이터를 제외한 작곡가 부분에서 많은 1위 곡을 배출해냈으며(총 24번), 작사 부분에서도 꽤 많은 1위 곡을 배출했다(총 39번, 1위는 박건호 - 총 50번).[2] 물론 후술되어 있듯 2010년대 감각엔 영 안맞는 망작도 있는 것으로 봐선 절치부심한 결과로 보인다.[3] 마돈나의 1집은 원래 레지 루카스라는 프로듀서가 작업하였으나 마돈나와의 의견 충돌로 루카스가 물러나고, 그 자리를 베니테즈가 메워서 완성된 것이었다. 갓 20대가 된 신인 가수가 프로듀서를 갈아치운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4] 이후 라인음향의 대표가 된다.[5] 오봉준 1집과 신승훈 1집 초반에는 판기획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노이즈 1집 전후로 모아기획에서 라인프로덕션(라인음향)으로 사명이 바뀌었다.[6] 물론 대중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등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래서 후술되어 있듯 김창환과 서태지의 악연이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7] 1집, 2집 시절에는 연습을 시킬 때 아예 김창환이 김건모 옆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 "한 소절" 단위로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한 소절에서라도 감정이 안 느껴지면, 그대로 김창환이 연주를 끊어버리고 바로 30cm 자로 김건모를 때리고 혼낸 뒤 다시 부르게 했다고. 20년이 흐른 먼 훗날 김건모와 다시 만나 음반을 낼때 다시 한번 단 둘이 그런 식으로 연습을 했다고 한다. 한 소절씩 혼나며 감정을 잡으며 연습을 마치고 앨범을 냈는데, 당시 김창환과 함께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김건모는 오랜만에 20대 중반 젊었던 시절 느낌이 나서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수년 뒤 더이스트라이트 사건이 터지며(...) 이 일도 재조명되었고, 김창환이 폭행이 잘못이라는 개념도 없고 단순 훈육 정도로 생각한 사람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8] 라인음향의 발라드는 김형석 라인이 있었다. 참고로 김형석한테 프로듀싱을 배운 제자가 박진영인데, 이때 박진영은 라인음향에 일종의 연습생 개념으로 있어서 김건모 백댄서 등을 하다 박미경, 구준엽(강원래라는 말도 있다)과 함께 '프리스타일'이라는 이름의 3인조 혼성 그룹으로 데뷔할 뻔 하기도 했다. 허나 김창환 왈 셋을 하나로 뭉칠 컨셉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결국 혼성 3인조 그룹은 무산되었고, 박미경은 솔로로 나머진 이후 클론으로 데뷔하면서 빛을 봤지만, 박진영은 본인 왈 잘렸다고 고백했을만큼 붕 떠있다 대영기획으로 이적해 솔로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때문에 훗날 사맹석 사장이 흙 속의 진주를 못 알아봤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근데 그 박진영도 대표가 된 이후엔 아이유 등 놓친 진주가 많긴 하다.[9] 김창환의 음악은 일단은 하우스, 유로댄스의 탈을 쓰고 있지만 멜로디는 파고 보면 한국식 뽕짝 기류에 가까웠다는 의견도 있다. 그래서 당시 히트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뭐 김건모 노래들만 봐도 딱히 연령대 가리는 노래는 아닌지라 듣기 나름이다.[10] 1970년대부터 가요제작자로 활동했으며 1990년 당시 어학전문테이프 납품업체인 덕윤산업의 제작이사였다. 그 당시 신승훈의 데모테이프를 듣고 가능성을 발견하여 어음을 돌려가며 마련한 자금으로 음반을 제작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김창환과 함께 라인기획을 설립했다. 물론 정확하겐 덕윤산업이 설립한거고, 직원이던 사맹석은 덕윤산업의 자회사 라인음향 대표로 경영을 하고, 김창환은 대표 프로듀서로 라인음향의 음악을 이끌게 된다.[11] 비슷한 오해를 받는 경우가 룰라의 이상민이다. 샾 등이 소속되어 있던 월드뮤직은 이상민이 세운 회사가 아니며, 이상민은 월드뮤직과 프로듀서 계약을 맺고 활동했을 뿐이다.[12] 이후 99년 1월 신승훈은 탈세 무혐의 처분을 받게 되는데, 얼마 안가 신승훈은 라인음향과 계약을 종료하고 떠나게 된다.[13] 라인음향 소속이던 노이즈홍종구KBS Cool FM 박지윤가요광장에 출연하여 노이즈 해체 일화를 밝혔는데 회사가 세무조사를 받은 것, 그리고 당시 음악의 트렌드가 변화하던 시점이라 노이즈의 인기가 급감하는 걸 느꼈고 더 이상 버티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해체했다고 한다. 근데 옆에 있던 한상일이 큰 이유 없이 해체한거 아니었냐고 생각한건 함정.[14] COLOR는 이후 멤버 교체와 함께 Buzy로 개명하여 활동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별 반응을 얻지 못한 채 해체하였다.[15] 다만 COLOR의 원곡에 있던 랩이 빠졌다.[16] 강원래가 교통사고 이후 처음으로 발표하는 앨범이기도 했다. 다만 강원래는 재활치료가 아직 끝나지 않아 녹음에만 참여하고 구준엽이 혼자 클론으로 활동했다.[17] 이후 자회사 계약이 끝나 미디어라인은 다시 독립하게 되며 2004년경 SG워너비, 씨야 등을 발굴하던 김광수 대표의 코어콘텐츠미디어가 CJ미디어라인의 뒤를 이어 엠넷미디어에 속하게 되고 케이블 채널을 이용한 자사 가수들의 홍보 수혜를 잔뜩 받게 된다.[18] 현재 트로트 가수인 소유미가 소속되어 있었다.[19] 싱어송라이터 베이빌론과 훗날 음원 사재기로 논란이 된 가수 우디가 소속되어 있었다.[20] 스테파니 본인의 소속사는 SM이다. 업무상 제휴를 맺고 프로듀싱만 미디어라인이 맡은 것.[21] 후반부 '또 다른 내 친구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의 실제 주인공이다.[22] 1996년 작사/작곡했던 "콜라"의 "우울한 우연" 을 리메이크한 곡이다.[23] 신승훈 4집에 수록된 <사랑느낌>(신승훈 작사, 작곡)과는 다른 곡이다.[24] 작사로만 참여한 곡.[25] 편곡으로만 참여한 곡.[26] 1993년에 개봉된 영화 101번째 프로포즈의 OST이다. 조병석 작사 김형석 작곡. 가요톱10 12위까지 올라갔던 곡이다.[27] 허니 패밀리 멤버였다.[28]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하자마자 서태지 모창대회 우승자를 메인보컬로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과 비슷한 곡들을 부르는 플러그를 데뷔시켰다.[29] 문영일 대표는 이후 해당 사실의 여파 때문인지 회사에서 자진 사퇴했다.[30] 형인 이석철을 몽둥이로 폭행하기도 했으며 자신에게도 대들어 부모가 찾아와 아이의 인성을 만들어오겠다고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31] 석철, 승현 형제의 아버지가 형사인데 프레임을 짠 것 같다, 녹취록은 자신의 발언을 잘라서 이상하게 말한 것처럼 만든 것이며 이석철이 뭔가 유도될 질문을 골라서 한 것 같기도 하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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