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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6:24:47

보도연맹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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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國民保導聯盟虐殺事件
National Bodo (Protection Guidence) League massacr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odo_League_massacre_mass_grave_US_ARMY_1950.jpg
<colbgcolor=#f5f5f5,#191919> 발생 시기 1950년
발생 위치 대한민국 전역
관련 기관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국군, 대한민국 치안국
국민보도연맹
피해
내역
<colbgcolor=#f5f5f5,#191919> 사망자[1] 4,934명
사망자
(추정)
[2]
100,000명 ~ 300,000명[3]
부상 추정 불가
파일:보도연맹학살사건.png
대전형무소 학살 당시 촬영된 사진으로,
비교적 학살 초기의 사례다.[4] 이도영 박사(1947-2012)가 대한민국에 소개한 사진이다.
1. 개요2. 국민보도연맹
2.1. 국민보도연맹의 조직과 성격2.2. 실체
2.2.1. 보도연맹의 기원2.2.2. 가입 절차와 연맹원
3. 전쟁 발발과 학살
3.1. 전쟁 발발 무렵 보도연맹원들의 동향
3.1.1. 보도연맹원들이 배신했다?
3.2. 정권의 보도연맹원 대량 학살
3.2.1. 학살의 명령과 지휘계통3.2.2. 지역별 학살 현황
3.3. 학살의 종결
4. 은폐와 진상 조사 및 사과
4.1. 장면 내각의 진상조사 노력4.2. 연좌제, 유족들의 고통4.3. 2000년대 참여정부의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4.4. 노무현 전 대통령 사과문
5. 현대의 평가와 해석
5.1. 학살 사건의 성격5.2. 학살의 부당성
6. 기타7. 매체에서8. 참고 영상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민간인 학살만을 놓고 본다면 이민족 지배하의 학살[5]에 비해 동족 내의 '빨갱이 사냥'이 규모나 강도에서 훨씬 잔혹했다.
「대한민국사」 1권, 한홍구, 한겨레출판, 2008, 137쪽
40명 중에서 거의 반수를 골라내어 호 앞에 세웠다. 줄지어 선 사형인에게 마지막 할 말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어부나 농민 차림의 청년들은 우리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냐고 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한 늙은이는 "영명하신 성주님 살려달라"고 소리쳐 울었다. 그러나 도시(부산)에서 끌려온 젊은이들은 "뭣 때문에 죽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죽는다고 했고, 이왕 죽는 몸이니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죽겠다고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총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마구 쏘는 총성 속에 거꾸러지며 발악하는 아우성소리,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처절히 들려왔다. 붉은 피를 쏟는 시체는 아직도 꿈틀거린 채 호 속에 던져져가고 그 위에 흙이 덮어져갔다.
당시 보도연맹원 학살의 한 현장 묘사[6]
6.25 전쟁이 시작된 1950년 7월 초부터 8월 말에 걸쳐서 경기 수원-강원 횡성 이남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진 6.25 시기 가장 많거나 '부역 혐의 학살' 다음으로[7]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학살의 범주(유형)[8]다. 보도연맹원과 기타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몇 몇 개인의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었으며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대한민국 국군경찰에 의해 계획적이며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6.25 전쟁 기간 벌어진 대한민국의 대표적 학살이자 전쟁범죄다.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게 함락된 지역에서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이적 행위(군경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밀고 및 체포, 살해 등)를 하자 여순사건의 영향을 받은 이승만 정부가 보도연맹원들의 이적 행위에 대한 '처리'를 명령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국의 보도연맹원들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 헌병, 경찰,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 특히 우익청년단원 이하 서북청년회 등에 의해 소집, 연행, 구금된 이후 집단학살되었다.[9] 연구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당시 전국적으로 약 60,000명에서 200,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20세기 한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비극적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이 사건은 민간인들이 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부에 죽임을 당한 6.25 전쟁 당시 발생한 끔찍한 대량 학살이자 명백한 전쟁범죄였다. 당시 공무원들은 보도연맹 가입 실적을 올리려고 공산주의자 출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까지 무리하게 보도연맹에 가입시켰기에 실제 보도연맹 구성원들은 개인의 이념 이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았으며[10] 심지어 보도연맹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았던 평범한 주민들까지도 학살 과정에 휘말려 숱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공산당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우익 청년단 단원이 경찰이 마을 당산나무를 베어 파는 것을 막았다가 미움을 샀다는 이유만으로 보도연맹 학살 와중에 잡혀가서 살해된 일까지 있었다.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58년만에 최초로 국가를 대표해 당시 국가에 희생된 국민들의 유가족들에게 공식 사죄하였다. 참여정부 이전의 정권들은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고 금기시했다. 심지어 민간인 처형자 명단을 3급 기밀로 분류해 학자들과 유족들의 진상 규명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이후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당시 처분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고 2020년 2월 14일 "재판부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호응하는 등 이적 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없어, 범죄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학살 사건 이후 약 70년만의 일이었다.

2. 국민보도연맹

파일:보도연맹증.png
보도연맹증

2.1. 국민보도연맹의 조직과 성격

강령
1. 우리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자.
2. 우리는 망국적 북한괴뢰 정권을 절대 반대하자.
3. 우리는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하자.
4. 우리는 이론무장을 강화하여 남북로당의 멸족정책을 분쇄하자.
5. 우리는 민족진영의 각 정당 사회단체와 보조를 일치하여 대한 기상을 발휘하자.
국민보도연맹(국민보호선도연맹, 약칭은 보련)은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서 과거 좌익에 몸 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다. 여기서 보도는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의미인 '保導'를 쓴다. 뉴스 보도의 '報道'가 아니다.

이 단체는 친(親) 대한민국, 반(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향을 분명히 하였고 이를 위해서 좌익 용의자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입시켰다. 선우종원의 회고에 의하면 6.25 전쟁 직전 연맹원이 33만을 넘어섰다. 남한에서 꽤 유명한 인사들도 보도연맹에 들어갔는데 코주부 삼국지로 유명한 일러스트가 김용환 선생, 《삼대》의 작가 염상섭, 《카인의 후예》와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시인 정지용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전후 남한에서도 대단한 지위에 올랐다. 보도연맹에 소속되었다가 북한에 생포되어서 재전향한 정현웅[11]이쾌대월북북한 예술계의 거두가 되었다.

2.2. 실체

2.2.1. 보도연맹의 기원

일제강점기 말 정치범 전향 교화 시설인 대화숙(大和塾; 야마토주쿠)이라는 게 존재했는데 이를 모방해서 이런 걸 만들자고 한 사람은 오제도고 그의 아이디어로 임의로 설치된 단체다. 오제도는 당시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등 사상검사들의 거두였는데 선우종원과 함께 보도연맹의 결성을 추진했다. 1999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보도연맹 사건은 정부의 커다란 과오'라고 시인하고 '범국가적 차원에서 보도연맹 희생자들을 위해 위령제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2.2. 가입 절차와 연맹원

김수환(65): 아무 관계 없는 사람도 보도연맹 가입하라고 강연도 했어요. 국민학교 4학년, 5학년 때...
채의진(83): 당시에 시군으로 인원 배당을 했어요.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부역 안 한 사람도 가입하면은 쌀 준다, 비료 준다... 가난한 사람은 그거 타기 위해서 전혀 (대상이) 아니면서도 한 거예요.
보도연맹원 가입에 대한 증언
지서 순경이 과거 전력이 있는 자의 명단을 작성해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우익 단체인 대한청년단 회원, 자주통일청년단 회원, 서북청년단원을 가입 권유자로 앞장세워 리마다 일정한 할당을 주었다. 해방 초기 좌우익이 뭔지도 모른 채 민족 해방에 들떠 권유하는 대로 아무 단체나 가입해 겅중댄 농민들도, 당신 전력에 문제가 있다며 윽박지르면 지레 겁부터 먹고 가입 명부에 손도장을 찍었다. 해방 직후, 조국 건설에 따른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주최 교양 강좌 모임에 몇 차례만 참석했거나, 해방 이듬해 가을 인민위원회 중앙지도부의 사주 아래 남한 전역을 휩쓴 '추수봉기' 행진에 줄을 섰어도, 당신이 과거 그런 일했잖냐는 넘겨짚기에 놀라,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김원일, 『불의 제전』 17쪽
국민보도연맹은 실제 남로당 세력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남로당에서 전향한 사람들이 연맹원의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로당과 무관한 일반인들이 상당수였다. 공무원들의 건수 올리기 실적주의 때문에 가입에 강제 수단이 포함되어 있었고 경미한 단순 동조자, 좌익 경력자가 아닌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12] 특히 시골로 내려가면 갈수록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서 가족들 가운데 공산당 당원이 있었다면 전부 다 반강제적으로 가입당했다거나 김원봉의 사례처럼 월북한 주요 인사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반강제로 가입한 경우도 많았다. 관련 기록 문서에 따르면 경남 김해 일대에는 족청 출신이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여기에 문학가, 예술가들도 보도연맹에 반강제적으로 가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양주동, 황순원, 정지용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무렵에 접어들면서 보도연맹에 반강제적으로 가입된 사람들 가운데는 우파 계열 정당인 한국독립당 쪽의 성향과 가까운 사람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절 많은 "일반인이 아닌" 전향한 '빨갱이' 공산주의자는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대표적으로 독립유공자 이효정이병희의 친척이자 동지인 독립운동가 이병기가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당했다. 보도연맹원이었다는 것은 전향했다는 말인데도 서훈을 못 받고 있다. 조선공산당 문서의 독립운동가 목록을 보면 학살 피해자가 꽤 높은 비율인데 독립유공자로 지정받지 못한 등의 이유로 인지도가 낮아 문서가 없는 학살당한 항일운동가는 당연히 훨씬 더 많다.
여전히 양민과 빨갱이,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김득중, ‘빨갱이’는 국민-비국민 가르는 이분법에서 태어났다

국민보도연맹에는 지역마다 경찰서별로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무리해 가입시킨 경우도 많았는데 일단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소집되어서 기합, 체벌을 받아가며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다. 당시 정부는 보도연맹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완전히 전향했다고 판단되면 '국민'으로 받아들인다고 공표하였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요시찰대상'으로 취급하였다. 특히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으로 감시 대상이 된 사람들은 여순 반란 등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 체제 하에서 정치, 사회적으로 낙인 찍히고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13] 이들에 대한 폭력 행사도 빈발하였다.

사실 이러한 행태야말로 전후 수십 년간 대한민국의 모습이 가장 잔혹하리라고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부터 반 세기가 넘게 지난 시점에서 돌이켜보았을 때 우리는 대한민국의 관료조직에서 수도 없이 비슷한 모습을 보아 왔다. 가령 공무원 조직의 무리한 실적 채우기 용으로 폭력배뿐만 아니라 노숙인이나 가출 청소년, 백수, 심지어 퇴근하고 돌아오는 직장인을 납치하듯 잡아서 삼청교육대에 처넣은 사건이 있었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은폐되고 넘어갔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비슷한 종류의 비극을 몇 번이고 더 겪어야만 했다.

3. 전쟁 발발과 학살

3.1. 전쟁 발발 무렵 보도연맹원들의 동향

전쟁 발발 무렵 보도연맹원의 대부분은 정부의 지시에 잘 따랐다고 한다. 오제도정희택[14]에 따르면 6월 28일 서울을 철수하기까지 각 구(區) 보도연맹 지부를 돌아다니면서 보도연맹원들의 모든 '동태를 장악'하였는데 서울 지역 보도연맹원은 개전 초기 예비검속되어 각종 반공 구호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6월 28일 정부가 피난 가기까지 서울지방 보도연맹원들 상당수는 예비검속된 후 담당 검사의 통제를 받았다. 서울 지역은 각 구(區) 보도연맹원은 검찰 지휘 하에 소집되어 반공 활동을 하였고 보도연맹 의무실(전 공산당에서 전향한 의사, 간호원으로 편성)에는 비상구호반이 조직되었다고 하며 그들은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란민 안내와 구호사업, 포스터 부착 등의 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희택은 "시민이 피란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16,800명의 보련은 일사분란하게 상부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15]

보도연맹원들이 대한민국에 충성했다는 자료 내용
"1950년 3월 철도보도연맹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6.25 때 후퇴하는 가운데 철도 수송에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정부에 충성했었다. 6.25 사변이 돌발하자 25일에는 타공전시체제(打共戰時體制) 강화를 했고, 26일과 27일 양일은 특히 보련 의무실이 청량리 밖 문이과대학 교정터에 이동의무실을 가설하고 2백여 명의 피난민을 무료로 구호했던 것이다."
오제도, 『공산주의 ABC』, 삼훈출판사, 1984.- p131-
"특히 후방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중심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던 7월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많은 보도연맹원이 국군 위문금과 금품을 자진해 거출하였고, 남한 정부에 재차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 자원입대를 혈서로 쓰기도 했다."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비평사, 2002, 89~94쪽.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각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한강 이남 지역에서 대채로 보도연맹원 등 좌익들이 소요나 무장폭동 등과 같은 집단적인 행위를 야기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서울 함락 전야에는 일부 소요가 있었긴 있었다)."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
이처럼 보도연맹원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을 다하려고 했다는 기록과 증언이 있다.

3.1.1. 보도연맹원들이 배신했다?

다만 인민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던 지역에선 전쟁 발발 이후 군, 경이 후퇴하자 다수 지역에서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을 지지하는 행동을 한 사실이 있다. 전쟁 개시 당일부터 개성 등의 '적에게 점령된 곳'(즉 공산당의 통치가 이뤄진 곳)에서는 일부 보도연맹회원들의 반역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보도연맹은 본래 공산당으로부터 전향한 조직이므로 명백한 배신자라고 할 수 있다.[16] 북한은 점령지마다 보도연맹원으로 보이면 자신의 의사와 상관 없이 의용군에 대규모 강제징집하거나 자위대에 동원하였으며 남한 체제에 전향한 보도연맹원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북한이 남한을 점령할 경우 이들의 배신 행위에 대한 처벌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전쟁이 터진 후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당했을 때 북한군의 처벌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앞장서서 인민재판과 남한 정부인사 및 군경 패잔병 색출에 나섰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백이었다. 정백은 공산당 최고참격 간부 출신으로 보도연맹 명예 간사장을 맡았던 핵심 간부였다.

그러나 정백은 북한군에 의해 '기회주의자의 표본'으로 몰려 인민재판으로 처형되었고 전쟁 당시 인민군은 생존한 보도연맹원을 징집하고 각종 사업에 동원하긴 하였으나 사사건건 의심하였다. 특히 점령 지역에서 이들에게는 어떠한 책임부서 일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열성적으로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사업에 협조하는 정도의 일을 시켰다. 이들은 북한 정권으로부터도 신뢰를 잃고 감시와 통제를 당하였던 것이다.
{{{#!folding ※ 보도연맹원들의 '배신' 행위를 말하는 자료 내용 펼치기·접기 (클릭·터치)
"1950년 6월 25일 당시 38선 바로 이남에 있었던 개성에서는 인민군이 내려오자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이 인민군측과 협력하여 우익인사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서울이나 강화 등 경기 북부지방의 경우 워낙 갑작스럽게 인민군이 남하하여 미처 보도연맹원을 구금하거나 수감된 보도연맹원을 어떻게 할 수 없었으나 평택 이남 지역에서는 강화 등 북한 점령 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곧바로 구금하여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전쟁과 사회> p220-221
"남침 5시간 만인 오전 9시 개성이 그들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자들이 오히려 반공인사와 양민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의 그 같은 만행은 대한민국에 전향했던 사실만으로도 공산군에게 살해될 충분한 이유가 되므로 두렵고 불안하여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라도 황급히 그들의 앞장에 서서 만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사실 그날 아침 공산군은 그들을 모아놓고 전향한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앞장설 것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개성보도연맹원들의 잔인한 행동이 정부로 하여금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들의 행동을 경계하도록 조치시킨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 <한국학생건국운동사> p517
"6월 28일 새벽 1시 20분경 서울 역전에 도달해보니 여러 대의 전차(電車)로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붉은 완장을 팔에 두른 2명의 청년이 피난민들 틈에 끼어서 이제 서울이 영용한 인민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니 피난가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며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이 지프차 라이트 속에 보였다. 나는 즉시 한호 상사에게 공산분자를 색출하여 처치할 것을 지시했다. 한상사는 광복 직후 함경도에서 월남하여 서북청년단에서 반공활동을 하다가 제18연대 창설과 함께 입대한 청년이었다. 그는 즉시 현장으로 가서 두 명의 적색분자를 처치하고 돌아왔다. 삼각지 진지를 출발한 중대는 용산구청 앞과 공덕동 뒷산을 거쳐서 마포형무소 앞을 통과하다가 뜻하지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 형무소에서 뛰쳐나온 한 무리의 죄수들이 수의를 입은 채 북한군을 환영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중대 대열이 접근하자 저항하려는 태도(돌팔매질과 작대기를 휘두르는)를 취하고 나왔다. 적개심에 불타있는 장병들이 그런 꼴을 보고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중대장님! 저 놈들은 빨갱이 운동을 하다가 징역을 살고 있던 놈들인데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처치해 버려야 합니다." "좋다. 그러나 주동자들만 색출해서 처치하라." 나의 승락이 있자 대원들은 그들을 포위하고 주동자 15명을 색출하여 즉결처분하고 나머지는 훈방했다. - 18연대 3중대장 김상덕 중위 <7일간의 한강방어> p33,45-46
"6월 28일 남산 남쪽 해방촌으로 내려와 주민들에게 아군의 행방을 물었더니 (한강교 폭파로) 서빙고에 집결하여 도하하는 중이라 한다. 서빙고로 가려고 해방촌 한 모퉁이에 서서 내려다보니 길목마다 행인들의 신분을 조사하는 청년들이 눈에 띄었다. 50대 부인과 한 주민에게 알아보라고 했더니 조사하는 청년들은 보도연맹원들이며 붙잡히면 인민군에 인도된다고 한다." -2사단 병기중대 부관 길관우 <노병들의 증언> p381
"6.25가 터진 지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뒤쳐진 국군 패잔병들을 잡는 대로 총살하여 강뚝에서 뒹굴러 버리는 광경을 보고 또 어린 학생들을 불러 모아 소년군을 조직하여 집집마다 숨어있는 청장년을 고발하여 닥치는 대로 붙잡아 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이리 저리 피해 다니지 않을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더욱이 보도연맹원 출신 동리 빨갱이들은 보광동 양민들(주로 통반장 가족)을 젖먹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30여명을 한강백사장(공영사 근방)에 끌어다가 구덩이를 파게 하고 무차별 총살시켰다." - 이희태 전 S고 학생주임 <6.25비사> p48
"6월 28일 이문동에서 광나루를 목표로 정하고 분산철수가 시작되었다. 낮 1시 하산하는데 벌써 북괴군은 밀어 닥친다. 순식간에 수명이 달려들어 생포하려 한다. 나는 돌아서서 소리쳤다. "거기 서! 오면 쏘겠다!" 서로 총질도 못하고 헤어졌는데 이번에는 보도연맹원들이 떼를 지어 작대기를 짚고 산으로 올라오면서 잡으려 한다. 나는 권총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거기 서! 오면 쏜다!" 두세 번의 위기를 모면하고 이문동 뒷산을 간신히 빠져 나왔다." - 8연대 8중대 2소대장 강영활 중위 <노병들의 증언> p754
"6월 28일 흑석동에서 적정을 수집하던 중 김포지구에 적 전차 40여대가 침입했다는 제보가 있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밤중에 현지로 떠났다. 가는 도중 보도연맹원을 만나는 것이 적보다 더 두려웠다." - 육군본부 정보장교 최명재 <노병들의 증언> p616
"적 전차포의 사격을 피해 급히 골목길로 차를 몰아 적의 관측에서 벗어났다. 다시 큰 길로 빠져나왔을 때 안양 읍사무소 건물이 눈에 띄었고 어느새 인공기가 걸려 있었다. 그동안에 인공기를 보기도 하고 탈취하기도 했지만 아직 국군이 있는 지역 안의 건물에 인공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저 기를 게양한 자가 건물 안에 지금도 있을 것인지, 기를 내려 찢어 버릴 것인지 나는 망설였다. 전차의 캐터필라 소리가 들려왔다. 5분의 시간이 아쉬웠다. 5분만 허용된다면 반역자를 처단할 수 있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이 광경을 통해서 불리한 전황이 반역자나 그의 동조자들에게 실제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나를 목격할 수 있었고 국가의 전쟁지도방침과 행정기능 치안유지 및 주민통제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 18연대 부관 이병형 대위 <대대장> p51
"7월 4일 저녁 무렵 안성군의 한 마을에 도달했다. 약 60호 정도의 촌락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20여 명의 청년들이 인공기를 들고 도로를 막고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인공기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도적놈 피하면 강도 만난다고 하더니..." 일제히 임전태세를 취했다. 천천히 다가가 살펴보니 그 청년들은 비무장이었다. 그쪽에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하다는 듯 웅성거렸다. 우리 일행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환영 나온 사람들이었다. "인민군 동무 환영합니다." 우리들은 어리둥절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청년들은 어떤 사람들이요?"하고 이북출신 장교가 나서서 물어보니 그들은 서슴없이 "인민군 환영준비위원"이라 했다. 우리는 계속 인민군 행세를 하면서 주동자를 가려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 밤 저 산 계곡 아래서 숙영할 테니 환영위원들은 나와서 우리를 도와주면 좋겠소." 손관도 소령이 이북 사투리를 써가며 그들에게 당부했다. 손 소령은 이북출신인 데다 달변가였기에 그들은 깜빡 속고 있었다. 그들 핵심 빨갱이를 유인한 우리들은 그 계곡 쪽으로 갔다. 얼마 후 그 계곡에서는 수십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 육사 생도2기 주성노 <어머니와의 약속> p32
"평택역 근방에는 동원된 많은 제대군인이 화차에 실려와 있었으며 전방에서 후퇴하는 병력까지 합쳐 역구내와 광장은 크게 붐비고 있었다. 이때 쌕쌔기가 날아와 기총 공격을 하여 평택역 일대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팔 다리가 끊어지고 목이 떨어진 사체가 역 광장엔 물론 부근 논두렁에 즐비했고 붉은 피가 흥건했다.(평택역 오폭사건) 밤이 되니 부대는 다시 후퇴를 개시했다. 얼마쯤 걸어가는데 이곳저곳에서 요란하게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고함이 들린다. 알고 보니 창고 속에 갇혀있던 보도연맹원들이 후퇴하는 우리를 인민군으로 잘못 알고 소리치고 있었다." - 육군본부 직속 독립대대 화기중대 소대장 정규화 <노병들의 증언> p354
"7월 초순경 한밤중에 필사적으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오근장을 통과할 무렵 날은 밝았다. 이 지방의 보도연맹원들은 간악했다. 우리에 의해 창고에 갇혔던 빨갱이 보도연맹원들은 창고를 부수고 나와 곳곳에서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는가 하면 결사적으로 대항해 와 후퇴하는데 2중 3중의 어려움을 겪었다." - 1연대 소대장 이본령 중위 <노병들의 증언> p516
"진천전투에 참가했으나 세가 불리하여 야간에 청주로 이동하는 도중 지명을 알 수 없는 지점을 통과할 무렵 난데없이 "인민군 만세"를 외치며 북괴를 찬양하는 함성이 들려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총성과 수류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니 도로변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창고 속에 수용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이 아군을 인민군 선발대로 잘못 알고 성급하게 환영했다는 것이다." - 18연대 소대장 김용건 중위 <노병들의 증언> p 707
"문안산을 철수한 연대는 미호천변에서 잠깐 싸우고 청주 입구의 오창리를 통과할 때 어느 창고 건물에 보도연맹원을 모아 사살했다는 말을 들으며 (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아군의 후퇴병력을 북한군이 들어오는 줄 알고 만세를 부르며 떡과 과일을 내놓고 환영했다는 것) 청주를 통과하였다." - 기갑연대 병사 안용현 <한 노병의 잡화> p60
"본교에서는 6.25가 발발하기 이전부터 부녀동맹 또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좌익활동을 해왔던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수들의 행적을 학생들 앞에서 낱낱이 열거하여 즉석비판에 붙인 다음 파면신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7월 24일 경에는 120명의 교수 중 7,8명만 남기고 모두 축출되었으며 7월 31일이 되자 총궐기대회가 있다고 교수들을 강권하여 모이게 하고는 강제 납북을 기도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교수들은 출근하지 않고 피신했으나 형편을 잘 모르고 나왔던 교수들은 납북되었다." - <이화100년사> p321-322
"사변이 난 3일 후인 28일 서울은 지하의 빨갱이들로 구성된 맹원을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이 미쳐 피난을 못간 우익인사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눈치 빠른 '보도연맹원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데"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이들의 행동으로 인해 아직 아군지역인 한수 이남에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사상범으로 몰려 모두 체포되는 지경이 되었다." - 장군(張群) <남기고 싶은 이야기> p139-142
"전쟁 초반 국군과 경찰조직이 와해되면서 후퇴하자 곳곳에서는 치안공백 상태가 되었다. 무법천지에서 제 세상을 만난 보도연맹원들이 경찰, 군인 가족, 우익인사를 공격해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대전까지 후퇴하면서 한숨 돌린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이 저지른 만행을 전해 들었다. 이들을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대대적인 검색을 통해 보도연맹원들을 체포하여 처단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도 다수 학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25 당시 경기도 파주지역에 있던 초등학교 소사(경비 청소 등의 일을 하는 비전문 기능직)가 빨갱이(북한군)들이 오자 완장을 차고 설쳐대며 학교장을 포함하여 지역사회유지들을 죽이고 자신이 교장 노릇을 하다가 국군이 들어오자 살해된 일이 있었다. 오늘날 이 사람의 아들이 유사한 짓을 한 사람들의 자식들과 함께 역사 재조명작업을 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자금협조까지 받아 위령탑을 세우고 있다. 이들의 조상에게 피살된 지역유지의 자녀들은 이들의 행위를 구경하는 처지가 되는 등 민족정통성과 민족정의를 훼손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 전재혁 <회색시대> p 60,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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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증언들을 토대로 보도연맹원 학살을 반란 행위에 대한 대응책 정도로 주장하기도 한다. '보도연맹은 두 말할 것 없이 위장으로 가입했고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7]

또 이들을 일사불란하게 소집, 연행, 구금한 이후 극히 형식적인 심사와 분류 절차를 거쳐 집단학살을 감행한 것은 이들의 '구체적인 행위'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개전 초기에 급격히 후퇴해야 했던 상황, 그리고 이들이 이미 전쟁 이전부터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통제를 당해온 존재였기 때문에 예방 차원에서 감행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100명 가운데 단 1명이라도 이상한 짓을 했다면 그 100명을 죽여야 사회가 안정된다'는 논리가 당시 정부의 입장이었다.[18] 즉, 이승만 정부가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는(실제로도 일부는 그러했던) 보도연맹원 등 남한의 좌익 세력들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것이 가해 이유라는 것이다.[19]

그러나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해도 단지 적에게 협력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것은 국제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잔혹 행위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 단체는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만든 자수, 전향자 조직의 반공단체였다.

3.2. 정권의 보도연맹원 대량 학살

3.2.1. 학살의 명령과 지휘계통

"6월 27일 경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 및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지시를 직접 받았다.
당시 헌병대 6사단 상사 김만식의 증언
남한 군경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북한 방송의 보도는 과장됐지만 사실이다. 전쟁 초기의 학살 명령을 최고위층(Top Level)이 내렸다는 건 의심할 바 없다.
미군 소속 에드워드 중령의 기록(1951.4.30)
6.25 전쟁 중에 수도 서울을 탈출하여 부산으로 피난 갔던 이승만 은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그 빨갱이 놈들은 역시 배신자였어!"를 외쳤고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 확보하고 있는 남부 지방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저질렀는데 여기서 가장 주동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김창룡이다. 이승만이 CIC 특무 헌병대장 김창룡에게 지시하여 '조선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20] 이승만은 이에 대해 하와이 현지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유족들이나 국민들에게 사과나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그의 외국인 배우자였던 프란체스카 도너도 한 번도 이에 대해 사과나 언급조차 하지 않고 사망하였다.

상부에서 처단 명령이 하달되자 각 지역에서는 집합 장소로 예비검속[21]된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경찰서로 구금하였다. 일부는 교도소로 보내고 일부 인원은 개인적 친분이나 뇌물로 석방하기도 했으며 일부 인원은 이승만과 같은 이씨 종친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었다.[22] 석방되지 못한 나머지 인원은 군경이 유치장이나 마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차례대로 트럭에 실어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총살했다.

3.2.2. 지역별 학살 현황

6월 하순부터 전국적으로 학살이 시작되었다.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의 후퇴와 함께 이뤄졌다. 처음에는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학살이 있었고 이후에는 삼남 지역으로 내려갔다. 전쟁 발발 후 북한군이 점령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던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에서는 7월 경에 대량 학살이 있었다. 대전, 공주, 전주, 목포, 진주, 대구 지역에는 형무소가 있었는데 여러 지역에서 군경이 후퇴하기 직전에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보도연맹 학살과 북한군의 학살이 맞물리면서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은 내걸린 국기가 바뀔 때마다 좌우가 서로 번갈아가며 보복 학살을 벌였다. 특히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낙동강 방어선 안쪽 지역(대구 이남 지역)과 제주 지역에서의 학살은 너무 끔찍하고 규모 면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

※ 보도연맹원 학살 관련 증언 및 자료 내용 펼치기·접기 (클릭·터치)
특정 지역의 학살과 밀접하게 관련된 증언일 경우에는 아래에 후술된 지역별 학살 문단에 수록하였으므로 참고 바람.
배경 있고 후원자 있는 사람들, 돈 가져온 사람은 차에서 내리고... 찌끄랭이는 다 죽고, 아무데다 개 죽이듯 막 죽이잖아.
유족 이수기의 증언
"1960년 국회에서 양민학살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게 국회속기록으로도 지금 남아있는데요. 그 속기록을 보면 1950년 7월 15일 마산형무소로 잡아갔던 보도연맹원들 중에서 여성이 50명이 있었고, 그 50명 중에 강간에 응하지 않은 3명이 학살되었고 강간에 응했던 47명이 풀려났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학살된 희생자들 중에는 일제 시대[23] 독립운동가들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런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의 증언
"광산에 갔어요. 6.25 사변 나고... 광산 가는 길로 갈 때 이미 각오했어요. 끝이다... 이젠 아무 것도 바랄 것도 없고... (좌익) 행동한 사람, 안한 사람 구별하길래 나는 행동 안했으니까 안했다고 주장했고 끝까지 주장을 하니까 인정을 해줘서 살아 나왔지..."
학살 생존자 김종철의 증언
"올 때 트럭에 한 가득 싣고 왔어. 그 다음 차가 또 사람들을 싣고 재를 넘었어. 천으로 뒤로 묶어 내리게 하고 안 풀어줬지. 총 소리가 팡팡팡 나고 탄피가 나돌았어. 나중에 보니 전부 죽어 누워 있더라. 신발이고 옷이고 전부 뒹굴었어. 좀 있다 올라와보니 뼈가 나와 있었지.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묻은거야."
경남 의령지역 학살에 대한 목격자의 증언
"아주 잔혹한 장면들이 충분히 연상되는 그런 모습들이었어요. 큰 구덩이 속에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있는 상태에서 위에서 말이죠 약간 높은 곳에서 아래쪽을 보고서 이렇게 총을 난사했던 그런 결과로 살해된 유골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중의 일부는 아마 총을 맞고도 바로 죽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기어 나가는데 그 모습 그대로 이렇게 머리에다가 총을 쏘아서, 얼마나 당시 모습이 참혹했겠느냐 하는 그런 것이 짐작이 됐죠."
여양리 학살지 유해 분석가 김재현 교수의 증언
"1948년에 내가 다니던 안성농업학교에는 '민주학생연맹'이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나는 여기에 가입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어. 소년원에서 살다가 1949년 8월에 석방되었는데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서 법률공부를 하고 있다가 6.25를 만났지. 전쟁이 나니까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그때가 1950년 7월 5일경이었어. 우리 집은 이천군 설정면 수산리였는데 가보니 이미 7월 1일에 보련맹원들이 끌려가 학살당했다는거야. 경찰에서는 나를 찾다 내가 없으니까 대신 아버지를 끌고가 학살시켰던 거야. 장소는 장호원면 '밀목'이라는 곳이었는데 아버지 시신을 찾으려고 학살현장에 가니 그 참상은 말도 못했어. 총상입은 데는 구데기, 파리가 들끓고 피가 시커멓게 썩어 있었어. 시체를 운반할 수 없어서 10구는 가매장하고 20여 구는 그 자리에 흩어져 있었지."
학살 생존자이자 유족 이천재의 증언
"죽어도 억울하게 죽은 거야. 그때는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죽였어. 무서워서 나는 숨었어. 이틀 뒤 알았어. 희율이가 골로 간거. 산에서 총소리가 나 감으로 알았지만 죽였다는 생각은 못했어. 공산주의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경찰이 미전고개 골로 끌고가 죽였어. 땅에 묻지도 않았지."
밀양 삼랑진읍 학살에 대한 목격자의 증언
"내가 형무소에 잡혀 들어간 날은 한국 각지에서 군인 경찰들이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도 없이 무차별 총살한다고 미군 당국에서 한국에 강력하게 항의한 다음날이었지. 내가 숨어있는 동안에 형무소에 끌려들어간 사람은 죄다 죽었고, 내가 들어갈 때도 사람들이 수없이 잡혀 들어왔어... 어느날 내 차례가 되어 명령대로 형무소 마당에 늘어섰지. 앞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 가는데 내 차례가 되자 갑자기 누가 옆구리를 쿡 쑤시는 거야. 돌아보니 군인 하나가 날 보고 '아니! 김 선생님 아니십니까?'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더군. 가만히 보니 일제 때 내가 이북에서 선생으로 있으면서 가르쳤던 제자인 거야. 서북청년단으로 내려와 학살에 가담하고 있던 제자였어. 그가 날 옆으로 비켜 세우는 거야... 우리가 빠지니까 끌려가는 행렬들은 우는 낮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당신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 세상에 이 원통함을 알리고 원수를 갚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떠났어. 그날 나와 노백용 씨 말고는 전부 죽었지."
보도연맹원이자 학살 생존자 김정한의 증언
"남자들 주먹만한 돌 있지 않습니까. 그 돌을 바지에다가 꽉 넣으라고 했다는 거예요. 열 명씩을 다시 묶어 가지고 돌이 있는 대로 달린 사람을 밤중에 뱃전에 딱 세워서는 중간에 차버림련 다 딸려가 물에 넘어지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악랄하게 죽이냐 이 말이죠."
유족 효전스님의 증언
"(부친)이 목포로 가서 교도소에서 하룻밤을 잤어요. 그 이튿날 달밤에 배에 싣고 가서 일일이 간수들이 허리찍는 기계로 하나씩 찍어서 바다에 넣었어 버렸어요.
유족 노진곤의 증언
"비가 많이 와 가지고 도랑에 물이 내려가는데, 물이 벌게."
맹노환, 당시 학생이었던 주민[24]

그 밖의 학살 관련 신문 기사들이나 경험담들은 다음의 링크들을 참조 바람. 링크 1, 링크 2

양산군 웅상면, 합천군 가회면, 영동군 용화면 등 몇몇 지역에서는 면장이나 경찰 중 의인이 있어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가 죽는 것을 막아서 희생자가 적었다고 한다. # 이들 중 몇몇은 그 대가로 자신이 목숨을 잃었다.
3.2.2.1. 경기도
3.2.2.2. 강원도
3.2.2.3. 충청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xecution_of_South_Korean_political_prisoners_by_the_South_Korean_military_and_police_at_Daejeon%2C_South_Korea%2C_over_several_days_in_July_1950.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uth_Korean_soldiers_walk_among_dead_political_prisoners%2C_Taejon%2C_South_Korea.jpg
1950년 7월 3일, 예비검속되어 끌려가는 보도연맹원[25] 1950년 7월 3일 대덕군 산내면[26]에서의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27]
3.2.2.3.1. 충남
천안시에서는 김종대 당시 경찰서장이 주동자 소수만 처리하고 나머지는 풀어줘 북한군 점령 시 그들의 보복과 학살이 다른 지역에 비교해 적은 편이라고 한다. # 하지만 직산읍 직산관아 부근에서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200여 구가 발견돼 김 서장의 경우에만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산시에서는 40~50명씩 탕정면 구령리(87년 배방읍 편입)# 남리, 중리 곳곳으로 끌고 가 처형했다. 2015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에 관한 조례'를 자체 제정해 2018년에 자체 예산으로 중리 매장지를 발굴, 수습했다.#

서산시에서는 대략 3곳에서 총 100여 명 가량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며 2021년 3월 자체 예산 6천만원을 들여 그 중 하나인 매지골 암매장지를 발굴했다. #
3.2.2.3.2. 충북
충북에서는 5,800여 명이 죽었다고 충북대책위원회는 추정하지만 공식 확인된 건 800여 명에 불과하다.

충북 청원군(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옥녀봉 골짜기에서 700여 명이 총살당했으며 남일면 쌍수리와 고은리 분터골에서도 사격이 진행되었다.

1950년 7월 6일과 10일 사이 충북 청원군 오창면(현: 오창읍)과 진천군 문백면, 사석리에서 끌려온 보도연맹원 400~500여명이 오창 양곡창고에 감금된 뒤 국군의 사격에 이어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선 100여 명이 사망했다고 하며 괴산군, 증평군에서도 여기저기 수십 명씩 분산 수용 후 사살되는 식으로 1,000여 명 가까이 죽은 걸로 추정되지만 휴전 이래 조사하지 않아 아직까지는 추정 단계일 뿐이다.
3.2.2.4. 전라도
6.25 전쟁 당시 호남 지역의 학살 피해자는 8만 400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학살 피해자 12만8936명의 65%에 이른다. 이는 극심한 좌우대립의 결과로서, 이 지역에 내재해있던 지주-소작농 갈등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연감(1953년)」 내무부 통계국. 이 통계는 보도연맹 사건이 아니라 반대로 북한군과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 규모이다.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 문서 참조.
1950년 7월 중순에 전라남도 해남군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다. 이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1946년 11월 11일 해남 지역에서 일어난 추수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이었다. 경찰은 후퇴하기 전 해남 각지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고 어디론가 끌고 가 버렸다고 한다.

당시 보도연맹원의 가족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끌려간 후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고 하며 진도 근처의 무인도에서 이들이 학살 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이 보도연맹원들은 진도 근처에 있는 갈매기섬[28]이라는 무인도에 내려진 후 총살당했다고 하는데 이때 끌려간 사람들 중 3명이 극적으로 탈출했다고 전해진다. 전후 일부 유족들은 감시를 피해 이 섬에서 가족의 유해를 탐색하기도 했다.

한편 전설로 남을 뻔했던 이 사건은 의외로 제주 4.3 사건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해남신문 2002년 7월 12일 기사) 진실화해위에 의해 2009년 60여 명의 피해 사실이 인정되었다. 구전상으로는 200~300명의 사람들이 처형당했다고 전해지지만 추가적인 발굴 작업 등은 진행되고 있지 않다. 해남신문 2018년 6월 28일 기사
3.2.2.5. 경상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odo_League_massacre_near_Daegu.jpg
대구광역시 가창 근교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학살 당시의 사진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계속해서 행정권을 유지했으며 일부 인민군에 점령된 지역도 가장 늦게 점령된 지역인 만큼 보도연맹 학살에서 가장 피해가 큰 곳은 경상도였다. 경북에서는 대구 가창골 일대에서 수천 명이 학살당하고 경산 지역의 코발트 폐광에 약 3,500명을 모아 두고 갱도 내에서 집단 학살한 뒤 아예 콘크리트로 막아 사건 은폐까지 했다. 자세한 내용은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 문서로. 이승만의 친위대인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29] #, #

게다가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한창 진행되었을 때 경남 마산, 진해, 통영, 거제 일대에서 이들의 손과 발을 묶거나 돌과 함께 열댓명을 굴비처럼 한데 엮어[30] 배에 태운 뒤 총격 유무에 상관 없이 바다에 수장시켰던 일[31]이 비일비재했다. 일단 경남 거제도 시골 일대의 나이 지긋한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거제 지심도 앞바다에서 이걸 꽤 많이 했다고 한다.[32] 경남 남해군에서는 강진만 앞바다에 30여 명을 선상 위에서 총살하여 바다에 빠뜨렸는데 주검 일부가 대마도에서 발견되었다.[33]

부산과 양산에서는 부산 금정구 노포동 녹동과 양산 동면 사송리, 여락리 남락마을 등지에서 수천 명이 집단학살당했다.[34][35] 부산 중구의 영주터널 위 야산에서도 수백 명이 사형 후 매장당했다는 증언이 있다. #

울산에서는 울산경찰서와 국군 정보국이 울산 보도연맹이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높다며 1950년 8월 이들을 집단 처형했다. 2007년 과거사위는 407명을 울산 보도연맹 희생자로 확정했고 2012년 대법원이 유족 282명에 대한 국가배상을 확정했으며 2016년 8월에 희생자 확정사실을 몰랐거나 뒤늦게 처형 기록을 확인한 유족 43명이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 지급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과 2심은 원고들의 국가배상 청구권이 소멸시효(5년)로 인해 사라졌다고 판단했지만 2심이 판결된 지 2주가 지난 2018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에서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 '중대한 인권 침해사건' 등에 대해서는 소멸시효가 적용되어서는 안된다고 결정했고 이에 따라 대법원은 소멸시효 제한 없이 국가가 유족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여 2020년 6월 9일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되돌려보냈다.

경남 마산의 여양리에 위치한 골짜기 도둑골에서도 수백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36]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키겠단 목표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는데 당시 조직을 키운다는 이유로 사상과 무관한 국민들도 비료와 식료를 나눠 준다며 가입시켰기 때문에 명단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좌익 사상을 가진 적이 있다며 언제든 인민군과 연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투와 관련 없는 지역에서도 학살을 자행했다.
3.2.2.6. 제주도
제주 지역에서는 6.25 전쟁 발발 이후 제주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오름, 해안가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당시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는 1950년 8월 4일 도내 4개 경찰서에 820명의 주민들을 예비검속했다고 한다. 그 중 모슬포 경찰서 관할이었던 한림, 한경, 대정, 안덕 등지에서 374명이 검속되었고 이들 중 252명이 군(해병대)에 송치되었다.

한림지서에 검속된 63명은 한림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하였다가 1950년 8월 20일[37] 새벽 2시경 섯알오름 탄약고 터[38]에서 집단총살당했다. 학살 당일 소식을 들은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다 군이 무력 저지하면서 수습을 포기해야만 했다. 결국 6년이 지난 1956년 3월 30일 유족들이 밤중에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그 중 46구[39]를 한림읍(당시 한림면) 금악리 갯거리오름 만벵디 공동장지[40]에 안장했는데 이 묘역을 만벵디묘역이라고 부른다.

다른 149명은 대정읍 상모리 절간 고구마 창고에 수감했다가 같은 날 새벽 4~5시경에 집단 학살하였다. 섯알오름 터는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학살이 일어나 암매장 구덩이도 2개가 만들어졌다. 희생자 유족들은 나중에 한림지서 학살자들의 시신 수습 소식을 듣고 1956년 4월 28일에 시신 수습을 시도하였으나 군의 저지로 무산되었지만 유족들의 요구로 시신 발굴 허가를 받아 1956년 5월 18일 발굴을 통해 149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때 학살된 사람들 중 식별이 가능한 17구의 시신을 제외하고 나머지 132구의 시신은 신원을 가려내지 못해서 한꺼번에 매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41]다. 하지만 1961년 6월 15일 군사정권은 유족들을 협박하여 백조일손지묘비를 철거하고 23기의 묘를 강제 이장시켰다.

2005년 섯알오름 학살터는 4.3 유적지로 선정되었고 2006년부터 학살터 정비사업이 추진되었으며 2008년부터 백조일손유족회와 만벵디유족회가 공동으로 매년 음력 7월 7일에 '예비검속섯알오름희생자영령 합동위령제'를 병행하다가 2016년부터 각각의 묘역에서 제례를 지내기로 했다.

3.3. 학살의 종결

1950년 내내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학살을 멈춘 것은 미국의 압력도, 정부의 변심도 아닌 1950년 가을부터 시작된 새로운 전쟁이었다. 바로 "항미원조" 라는 명분을 앞세워 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이었다.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온 이래 10월 말의 제1차 공세를 시작으로 이듬해 4월말의 제5차 공세(중공군 춘계공세)에 이르기까지 중공군은 매번의 공세마다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국군 및 유엔군과 격돌했고 한때는 수도 서울을 중공군에게 다시 빼앗겼다가 되찾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막대한 인구 수를 바탕으로 대규모 병력을 쏟아내다시피 하는 중공군은 전쟁 초반에 밀어붙이는 듯 싶다가 반격 한 번에 지리멸렬해진 인민군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당연히 이를 막아내는 국군의 소모율도 급증했으며 정부는 "이대로 가다가는 중공군한테 밀려 모두 죽는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유엔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의 지도 아래 국군의 대규모 개편이 이루어졌으며 중공군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국군의 대규모 확충 역시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장 최전방에서 병사들이 떼거지로 죽어나가는데 후방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짓은 말그대로 헛짓거리였고 좌익 "빨갱이"든 우익 "애국청년단"이든 간에 똑같이 최전방으로 끌려가 소모되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1951년 초부터는 자연스럽게 학살이 끝났다.

4. 은폐와 진상 조사 및 사과

4.1. 장면 내각의 진상조사 노력

4.19 혁명 직후 전국에서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 유족들의 분노에 찬 여론이 들끓어오르자 대한민국 제4대 국회(제2공화국)에서는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가장 많이 학살당한 지역인 경상남도경상북도 등 학살 현장을 돌면서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 조사와 피해 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총리는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듬해 터진 1961년 5.16 군사정변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 놓고 말았다. 정변의 주축인 군부세력은 '소급법'(특수범죄처벌법)을 만들어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혈육의 유골을 수습한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혁명재판'이라는 이름 하에 유족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처벌시켰다.

이 '혁명재판'에서 유족들을 처벌할 때 군사재판의 논리가 대단히 놀라웠다. '이렇게 군인에 의해서 학살된 일이 비록 불법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것이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라는 것이었다. # '즉, 군사 쿠테타 세력들도 불법적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지만 정작 기사 원문을 읽어보면 당시의 공소장에는 '당시 학살된 자들을 애국자라고 선전하거나 그들이 불법하게 학살된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북괴에 이득이 되는 것이었다'라고 적혀 있을 뿐 그 내용이 맞다고는 적혀 있지 아니하다. 당시 재판을 보면 피고인석에 있었던 유족들이 너무 억울했는지 법정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자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 이들은 2010년, 2011년 무렵에야 재심으로 무죄, 복권되었다. #

4.2. 연좌제, 유족들의 고통

이후 군사독재 정권은 유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 규정하여 항시 감시하고 연좌제를 적용해 오랫동안 옥죄었다.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 희생자 가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하였고 이후 정부는 이 자료를 관련자 신원조회에 활용하였다. 이처럼 정보 기관은 민간인 학살에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의 정보를 보관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권침해를 해 왔다. 연좌제는 유족들까지 피해자로 만들었고 그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각종 불이익을 당했다. 국가의 피해 유족들에 대한 감시와 신원 조회에 따른 각종 불이익은 경제적 곤궁으로 이어졌다. 국가 기관의 보도연맹원과 그 유가족에 대한 관리는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특히 5.16 군사정변으로 수립된 군사정권은 유족회 활동을 금지시키고 그들에게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유족들에게 또 한 번의 자기부정을 강요하였으며 학살과 관련한 정부 기록을 모두 소각해 진상을 철저히 은폐함으로써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존재를 철저하게 금기시했다.

1960년대에 진상조사 시도가 있긴 했는데 5.16으로 묻혀 버렸고 참여정부가 들어선 후에 '과거사 진상 규명' 등을 통해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당대 많은 작가들의 6.25 전쟁 회고담이나 소설에는 '어떤 단체' 내지는 'B연맹' 정도로 표시되기도 했다.

4.3. 2000년대 참여정부의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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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군사정권이 6월 항쟁으로 종결된 후인 1990년대 들어서 이 사건이 다시 밝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간단체에 의한 유해 발굴 정도였지만 국가 주도가 된 것은 2007년 5월부터였다.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겼다. 이들은 2007년 5월부터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충북 청주시에서 110여 명의 민간인 유해들이 발굴되었다. 이 가운데 10대 청소년으로 추정되는 유해들도 발굴되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3년 동안의 조사 결과 확인된 것만 들어도 민간인 4,934명이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밝혔지만 2000년 즈음에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밝힌 사망자 수는 그 이상이었다. 제주도에서만 10만 명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 수치는 4.3 사건 당시의 피해자 수[42]와 합쳐서 추산하더라도 다소 높게 잡은 감이 있다. 광복 직후 제주도 인구가 40만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죽었으면 인구의 절반은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현재 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 추산되는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 정도다. #, #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위원회에서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전술한 것과 같이 군사정권이 대대적으로 관련 기록을 소각시키면서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고 한다.

2006년 12월 6.25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전국 154곳의 지표조사와 유해 발굴 가능성 조사 등을 실시해 59곳의 매장 추정지에서 유해 발굴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역별로 보면 경기·인천 21곳, 강원 1곳, 충북 19곳, 충남 9곳, 경북 28곳, 경남 41곳, 전남 27곳, 전북 6곳, 제주 2곳 등이었으며 진실화해위는 2010년 14곳의 매장 추정지를 추가해 모두 168곳에 민간인 학살자들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사료 조사, 주민 증언 등을 종합해 우선 발굴 대상지를 39곳으로 압축했지만 실제 발굴이 이뤄진 것은 2007~2009년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 등 13곳에 그쳤다. 당시 발굴을 통해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2010년 12월 31일 위원회 해산을 끝으로 매장 추정지로 밝힌 168곳의 7.7%, 우선 발굴 대상지 39곳의 33%만 발굴이 이뤄진 채 모든 활동은 멈췄다.

발굴된 유해는 2007~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유해발굴단장이었던 박선주 전 교수가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재직했던 인연으로 충북대의 전산원 건물 2~3층을 새단장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을 만들어 임시 안치되어있다.

2011년 6월 30일 이 사건에 대한 의미 있는 대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는데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이었다. #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왔다. #

2014년 3월 6.25 전쟁 유족회를 비롯한 민간 시민단체들 주관하에 경남 진주에서 1차로 유해 발굴을 착수하였으며 2015년 2월에 대전 동구 산내(낭월동)에서 2차 유해 발굴에 착수했다. #, # 2017년 2월에도 진주 보도연맹원 희생자가 드러나기도 했다. #

4.4. 노무현 전 대통령 사과문

2008년 1월 24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사과하였다.#
존경하는 울산시민 여러분,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사건 유가족 여러분,

58년 전,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입니다.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도연맹에 가입되었고, 6·25 전쟁의 와중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가족들은 연좌제의 굴레에서 고통 받으며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수십 년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서 당시 국가 권력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당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이 기회를 빌려, 지난날 국가 권력의 잘못으로 희생되거나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과 유가족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과거사 정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진실을 밝혀 억울한 분들의 맺힌 한을 풀고 명예를 회복해서 진정한 화해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훼손된 국가권력의 도덕성과 신뢰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아직도 의혹이 있는 사건이 있다면 그 진실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밝혀진 일들에 대해서는 명예회복, 사과와 화해, 추도사업, 재발방지 대책과 같은 후속조치들을 착실히 추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사 정리 사업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관심과 성원을 당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5. 현대의 평가와 해석

이 사건과 관련한 의미 깊은 판결로 유족들이 국가에 제기한 소송에 대한 대법원 2011.6.30 2009다72599 판결이 있다. 국가법령정보센터 전문.
1. 본질적으로 국가는 그 성립 요소인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부담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박탈할 수는 없다.

2.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개인에 대하여 국가기관이 조직을 통하여 집단적으로 자행한, 또는 국가권력의 비호나 묵인하에 조직적으로 자행된 기본권 침해(이다).

3. 여태까지 생사 확인을 구하는 유족들에게 처형자 명부 등을 3급 비밀로 지정함으로써 진상을 은폐한 국가가 이제 와서 뒤늦게 유족들이 위 집단 학살의 전모를 어림잡아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는 취지로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여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것(이다).
해당 대법원 판결문 中

5.1. 학살 사건의 성격

6.25 전쟁을 전후하여 거창 사건을 비롯하여 전국(남한) 도처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되었다. 민간인 학살은 국군과 경찰, 특무대, 서북청년단 등 우익세력에 의해 '빨갱이' '통비분자'로 몰려 자행되고, 미군에 의해 집단학살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나 1950년 6~8월에 자행된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수법이나 희생자 수에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보도연맹은 1949년에 반공검사 오제도가 제안해서 만들어졌는데, 이른바 좌익운동 전향자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전과를 묻지 않는다며 조직한 단체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군경ㆍ서북청년단 등이 이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한다. 실제로 이들은 예비검속을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출두할 때까지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군경과 우익단체들은 이들이 북한군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한 전역에서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자행되었고, 해안지방에서는 시신을 배에 싣고 나가 돌을 매달아 수장한 경우도 많았다.
김삼웅, 이승만 평전(개정판), 두레, 2020, 268~269쪽.
위의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 그대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역사학계에서도 본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정의할지, 학살로 정의할지 많은 의견들이 오갔다.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제노사이드의 정의를 넓게 보았을 때 본 사건은 '보도연맹'이라는 특정 집단에 대한 학살이었기 때문에 제노사이드의 구성 요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한다. 학살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보도연맹 자체가 특정 정치적 집단이기보다는 민간인(구 용어로 양민)의 비율이 높은 집단이었기에 학살(massacre)로 정의하며 본 사건은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학살이기에, 일반적인 학살과 구분을 두기 위하여 정치적 학살(Politicide)로 정의하자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보도연맹원은 일단 죽이고 보자는 식의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는 특정 집단(보도연맹)에 대한 학살이자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간 학살이었다.

국제법적 관점에 의하면 보도연맹 학살은 국제법에서도 최악의 전쟁범죄로 꼽히는 "민간인 주민에 대한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공격의 일부로서 그 공격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범해진 위해"로서의 인도에 반하는 죄(crime against humanity)에 해당한다. 쉽게 말하자면 자신들이 민간인을 향한 학살을 한다고 분명히 인식하면서 공격했다는 의미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협정인 로마 규정(Rome Statute) 27조 2항에 의하면 이러한 범죄에 대해서는 심지어 대통령이라도 공적 지위에 의한 면제를 주장할 수 없다.

5.2. 학살의 부당성

정부당국은 국가 존망이 걸려 있는 위기 상황에서 국가안보를 위해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방적 학살'이 불가피했다는 입장을 취했으며, 사상검사 장재갑은 "박헌영은 서울만 뺏으면 남로당 당원의 봉기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전국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했다.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것은 대한민국을 위험에서 건져준 행위였다."라고 학살을 정당화했다. 과연 정말 보도연맹원들이 대한민국에 위협적인 존재였을까? 당시 상황에서 보도연맹원들은 위협적인 존재일 수 없었다. 6.25 전쟁이 일어날 당시 남한 내의 혁명역량은 거의 초토화 되어 있었다. 작은전쟁을 통해 이미 10만여 명이 학살되었으며, 또 그만큼의 숫자가 감옥에 있었다. 좌익 검거과정에서도 보도연맹 전향자들의 정보 제공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는 남로당의 당조직을 파괴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보도연맹원들은 정부에 협조하여 정부·시민들의 피난을 도왔다. 이러한 사실들은 정부의 정당화론이 전혀 설득력이 없음을 드러낸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 선인, 2005, 555~556쪽
위의 인용문에 나온 것과 같이 정당화론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전시나 특수 상황에 민간인에 대한 살상은 그것이 설령 법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아도 사회 문제가 된다. 베트남이나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이 대표적인 사례고 6.25 전쟁 당시까디만 해도 즉결처분은 엄연히 군대 내에서 법적인 명령을 받고 행해졌음에도 전후에 사회 문제가 되었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사실상 그런 법적인 처형 명령도 없이 벌어진 일로서 국가 차원의 사과가 필요한 사항이다.[43] 북진 중에 발생한 보복성 학살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이 대량으로 희생되긴 했지만 이 시기의 학살은 보도연맹원을 잡기보다는 적극적인 부역자를 색출,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 보도연맹원이 포함되었을 뿐이다.

보도연맹만이 아니라 당시의 광기(狂氣)는 상상을 초월한 마경이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에 인민군 복장을 한 무리가 북을 치면서 나타난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김일성 만세를 외치면 전부 학살, 이때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끌어내 "김일성 만세"를 외치라고 강요한다. 강압에 못 이겨 시키는 대로 하면 또 즉시 처형. 결국 목에 총이 들어와도 "이승만 만세!"라고 외쳐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되나? 순간의 위협을 모면하기 위해 김일성 만세라고 외쳤는데 알고 보니 서북청년단원들이었다면 그냥 그렇게 빨갱이가 되어 살해당하는 것이다.[44] 이 정도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죽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형법에는 기대가능성이라는 게 있는데 쉽게 말하자면 '범행 당시 상황에서 법을 위반하지 않을 것을 기대할 수 있었는가?'다. 마을 사람들은 쳐들어온 자들을 인민군으로 오해했으니 기대가능성이 아예 없어 죄를 물을 수 없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건 없었다.[45]

심지어 정희상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각지에서 군인과 경찰들이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도 없이 무차별 총살한다고 당시 전쟁에 한국측으로 참전한 영국군 내에서 무력까지 사용하며 항의하기 시작했고[46] 초기에 미적이던 태도를 보인 미군 당국마저 전쟁 후반이 되면서 한국에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링크 당시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에서 항의할 정도였다.[47]

보도연맹은 애초에 그 설립취지가 대한민국의 품에 좌익 경력자를 포섭하는 것,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을 강령으로 내세웠지만 그토록 국민으로의 포섭과 포용이라는 명분이 강조되던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자 그 용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승만 정부는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적성분자들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전쟁 초기부터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처음부터 보도연맹이 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직 초기에 보도연맹은 좌익을 교화시킴으로써 국민의 폭을 확대하려고 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협조할 수 있다는 혐의만으로 국민에서 배제되어 학살당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적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하여 취해진 예비학살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은 공산주의 활동을 반성하고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사람들을 포용한다고 말했으나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가장 먼저 죽음을 당해야 했다.

6. 기타

학살 당시 사망한 시신의 일부는 해류를 따라 일본 해안으로 가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런 시체들의 발견이 일본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고 이들의 시신이 일본에 안장되어 이들을 위한 합장묘소도 만들어졌음이 확인됐다. 당시 신문에 수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일:머마신문.gif
아자모 먼 바다에 부패한 시체
타살인가? 어선이 건져
야마구치현 고시가하마의 선장 스에다케 토라마츠 씨 소유인 마에마루(7명 승선)가 9일 오후 4시께 츠츠무라 아자모와 고토의 중간에 위치한 아자모 서쪽 근해 35마일 부근에서 주낙 조업 중 해상에 표류중인 시체를 발견하여 어선에 올려, 10일 이즈하라에 입항하여 이즈하라마치 경찰서에 신고했다. 검시에 의하면 죽은지 1개월이 경과하여 흉부와 복부에 걸쳐 부패하고, 인상은 판별하기 어렵지만, 신장 5척 5촌[48]이고, 연령 추정은 30~40대 남자로 흉부를 굵은 새끼줄로 묶여 있었으며 양손에도 같은 흔적이 있었으므로 이즈하라 경찰서는 타살을 의심하고 있다.
1950년 9월 12일자 《대마신문》보도.
1999년에는 미국이 보도연맹 학살 당시의 몇몇 사진을 기밀 해제했는데 모두 미 극동부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 소속인 애버트 소령이 촬영한 사진이다. 보도연맹 학살에 관련된 사진은 거의 이 미군 소령이 찍은 사진들이 유일하다. 미국이 1999년에 기밀해제한 사진 자료

과거사 규명 차원에서 발굴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무수히 많은 유골들이 아직도 발굴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이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자 그제서야 이승만이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지금도 얼마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대한 연구자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활동한 한성훈 교수와 김동춘 교수가 있다. 한성훈 교수의 대표 저서 '가면 권력'과 김동춘 교수의 저서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는 보도연맹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최호근의 '제노사이드(부제: 학살과 은폐의 역사)'에서도 보도연맹 학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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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매체에서

8. 참고 영상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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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있는 대한민국의 국가폭력 사례 목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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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 시대에 걸친 경우 시작 시점을 기준으로 함[2] 국가재건최고회의 시기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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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적으로 발견된 피해자 시신 수.[2] 60,000-110,000명(김동춘), 200,000명(박명림)[3] 당시 국민보도연맹 소속원은 300,000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것이 알고싶다에 소개된 증언에 따르면 정작 학살 피해자 중엔 보도연맹원보다 일반인이 많았다고 한다. 사건 재발굴 초기에는 몇십 명 내지 몇백 명일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공식 확인된 피해자만 4,000명이 넘어 버리면서 무색해졌다. 6.25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등 민간단체들은 "60,000명의 보도원이 학살됐다는 증언과 자료를 확보했으며 실제 희생자 수는 200,000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전쟁 직후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된 숫자를 명확히 규명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매우 힘들다. 학살 피해자를 최대 30만 명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으나 국가인권위원회는 약 10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 추정한다.『대한민국 인권 근현대사 제2권』, 2020, 국가인권위원회, 146p. 진실화해위원회가 전체 피해규모 파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4] 학살 중반 이후부터는 총알도 아깝고 시간도 아까우니 폐광갱도에 몰아내 추락시키거나 총으로 위협해 개머리판으로 때려 구덩이에 밀어 놓고 구덩이에 총을 난사하는 등 거의 가축 살처분하듯이 처리했다.[5] 제암리 학살사건, 관동대학살 등. 다만 의외로 세계사적으로만 보면 사실 같은 민족도 명분이나 특정 조건(사상, 가치관 등)만 충족하면 이민족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학살하는 일이 흔했다. 사실 선전선동에 묻혀서 그렇지 역사를 보면 민족주의 등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민족이 지배해도 의외로 지역 국가나 민족의 힘이 별로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강해지는 이유도 분명 존재하긴 한다.[6] <부산일보> 1960년 5월 30일자 기사.[7] 진실화해위원회 접수 건수는 부역 혐의보다 보도연맹이 많고 진실화해위원회 접수 건수를 이용해 피해자 수를 추산하는 경우가 많지만 유족회와 일부 학자는 부역 혐의 학살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고도 한다. 부역 혐의 학살이 피해자 수 추산이 어렵다.[8] 보도연맹 학살, 형무소 재소자 학살, 부역 혐의자 학살은 학살의 범주다. 이러한 범주로 각 지역에서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고양 금정군 학살 사건은 부역혐의자 학살의 범주에서 금정군에서 일어난 학살이며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은 형무소 재소자 학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범주에서 대전 골령골에서 일어난 학살이다.[9]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규명결정서(2009).[10] 당시에는 '보도연맹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쌀을 준다', '밀가루를 준다'고 홍보하면서 공무원들이 열심히 할당치를 채웠고 훗날 그렇게 이름을 올렸던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 학살을 당하게 되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해당 상황이 묘사되었다.[11] 화가. 일제강점기부터 만화와 일반 미술을 넘나드는 활동을 하였다. 마루타 소설을 쓴 정현웅과는 동명이인.[1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청산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보도연맹원들 가운데 일제강점기독립운동했던 사람들도 많이 반강제적으로 가입되었다고 한다. 일례 게다가 당시는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한 데다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서 이데올로기 싸움을 하던 시기라 사회에 불만만 가져도 좌익으로 몰아가기 일쑤였음을 감안한다면 일반인들의 보도연맹 가입은 충분히 납득이 되는 부분이 있다.[13] 1949년부터 발급되기 시작한 도민증도 이들에게는 발급되지 않았고 대신 맹원증이 발급되어 사실상 비국민 취급을 공식화했다.[14] 대한민국 제1공화국 초창기에 오제도, 선우종원과 함께 사상검사로서 보도연맹 창설과 운용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오제도와 더불어 오늘날 공안 검사의 '대부'의 위치 격에 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6.25 전쟁 시기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지내다가 9.28 수복 후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심사실장으로서 부역자들을 심사했던 인물이며 1980년대에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15] 정희택은 "6.25가 터지자 나는 보련맹원들을 각 구별로 집합시켜 그들의 동태를 장악했고, 이들을 시켜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난민 안내, 구호사업, 포스터 부착 등의 일을 했다. 서소문동 본부에서 자신과 맹원 간부들이 지휘를 했으며, 시민이 피난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1만 6천8백 명의 보련은 일사분란하게 상부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이어 정희택은 '(북한군 점령기에) 보도연맹원이나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좌익범' 중 부역을 한 사람이 적었다'고 증언했다. 정희택 증언,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3◆, 1983, 132쪽.[16] 실제로 북한에는 이들 보련원들을 '반동분자'로 규정한 문서 기록이 있다.[17]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박헌영이 전쟁을 일으키면 '남한 내 주민 100만 명이 일제히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는데 막상 전쟁이 터졌을 때는 조용했다. 이것에 대해서 보도연맹원들을 사전에 예비검속 차원에서 학살한 것이 주된 효과였다"고 강변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진 숙군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공산당 조직들은 속속히 붕괴되고 있었고 당시 농지개혁을 통해서 농민들이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굳이 공산당을 지지할 이유가 없었던 것도 있다. 박헌영이 월북할 당시는 농지개혁이 시작되기 이전이어서 개혁이 진행 중이었던 당시 상황을 몰랐던 것이다.[18] 재미있는 사실은 대숙청을 주도한 NKVD의 수장이었던 니콜라이 예조프가 "수십 명이 고초를 겪더라도 한 명의 반동분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망언을 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다.[19]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20] 한편 일부에선 상부에서 내려온 일명 빨갱이 처리를 위해 지역 내 '빨갱이' 숫자를 무슨 수단으로든 채우고 보고해 상부의 포상을 노리거나 재산 몰수를 위해서 살상하기도 했기 때문에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다고도 한다.[21] 아무런 일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어떤 상황에 대비해 사람들을 구속하는 행위다. 일제강점기에 생겼다.[22] 진실화해위원회 2009 하반기 조사보고서, 752쪽.[23] 원(原) 증언을 인용한 것임을 고려하여 수정할 수 없으나, 일제 시대라는 말은 지양해야 하는 표현으로, '일제강점기'라고 지칭해야 한다.[24] 말에 따르면 차에 타거나 국군을 따라가지 않아 화를 피했다는 듯하다.[25] 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Report no. R-189-50, Records of the Army Staff G-2 ID File, Box 4622, RG 319, NARA.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 충남 국민보도연맹 사건Ⅱ, 528쪽. 사진의 트럭에는 한자로 '논산읍'(현재 충청남도 논산시)이라고 적혀있다. 다만 이들이 논산 소속 보도연맹원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으며 논산 지역의 보도연맹원의 일부를 대전형무소로 이송하여 구 대덕군 산내면에서 이들을 모두 처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6]대전광역시.[27] 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Report no. R-189-50, Records of the Army Staff G-2 ID File, Box 4622, RG 319, NARA. 위 사진은 미군 소속 애버트 소령이 촬영한 사진으로, 당시 이곳에서만 최소 7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 충남 국민보도연맹 사건Ⅱ, 482쪽.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 대전ᆞ충청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220쪽.[28] 갈명도라고도 한다.[29] 경상도 말에 "골로 간다(죽는다)"는 표현이 보도연맹 학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 표현은 전쟁 전에도 존재했다. 일설에 의하면 한양 서쪽에 "고태골"이라는 처형장이 있었던 것 때문에 골로 간다는 말이 죽으러 간다는 뜻이 되었다고 한다.[30] 이는 하나하나 총살할 여력이 없어서 한 명을 물에 빠트리면 나머지도 줄줄이 딸려들어갔기 때문이다.[31] 확인사살 유무에 상관 없이 일단 손발을 묶고 돌까지 엮어놓으면 자력으로 수영이 불가능하다.[32] 진실화해위원회 2009 하반기 조사보고서: 통영, 거제 국민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희생 사건, 216쪽.[33] 진실화해위원회 2009 하반기 조사보고서: 경남 고성, 남해, 하동 국민보도연맹 사건, 754쪽.[34] 해당 지역들은 부산과 양산 행정구역 경계에 모두 붙어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92881[35] 다만 부산 전역에서 15,000명 이상이 학살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당시의 인구와 사회체계를 무시한 추측이다. 실제로 그랬으면 사회가 붕괴될 정도의 사태다. 당시 인구가 40만이었던 부산에서 20,000명 가까이가 죽었으면 얼마나 큰 사태인가. 군대에 징집되어 행방을 모르는 사람 일부가 포함된 걸로 추측된다.[36]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이 학살을 다루는 '도둑골의 붉은 유령 - 여양리 뼈 무덤의 비밀' 편을 방영했고 PD수첩에서도 2004년 5월 11일 '55년 간의 침묵 민간인 학살'이라는 제하에 다룬 바 있다.[37] 이날은 음력으로 7월 7일, 칠월칠석 날이다.[38] 이 탄약고 터는 1944년 말 일본군이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곳이다.[39] 나머지는 개인묘지에 묻혔다고 한다.[40] 이 장지는 유족 중 하나가 무상으로 제공했다고 한다.[41] '조상은 백 서른둘이 돼 자손은 하나니,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이 백 할아버지를 다 내 할아버지 모시듯 모시라'는 의미다. 즉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어 뼈가 뒤엉켜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전부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42] 보고된 숫자는 14,000명이고 실제 피해자 수는 그 이상으로 추정된다.[43] 형무소 재소자에게 사형을 집행할 때도 명부를 기록하고 절차에 따라 이뤄지는데 보도연맹원들은 어떠한 기록도 없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으니 정치적인 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44] 임철우의 단편 소설 '곡두운동회'에서는 어느 시골 마을에 인민군들이 들어와 행세를 하자 일부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하지만 이들 인민군은 알고 보니 좌익 색출을 위해 교묘하게 변장한 국군이었다. 그리고 눈치를 보면서 인민군 편에 붙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으니, 바로 나주부대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다만 이 경우는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주범이 국군이 아닌 경찰관들이었는데 6.25 전쟁 무렵에는 경찰들도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투입되어 사실상 군인이나 다름없었다.[45] 이청준의 단편소설 '소문의 벽'에서는 야간에 군인들이 나타나서 총을 겨누며 "이승만 지지자인가? 아니면 김일성 지지자인가?" 하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군인들이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야간이라 잘 보이지도 않고 위에서 나온 일화처럼 인민군 복장을 갖추고 나타난 우익 단체일 수 있으니까 그저 세금 제때 내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민초라고 말하며 덜덜 떨었다고 묘사되어 있다.[46]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나치 독일홀로코스트로 인한 대학살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이런 비윤리적인 대학살을 벌이고 있었으니 그들 입장에선 본인들의 트라우마를 건들기 충분했다.[47] 출처 1: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 정희상/ 돌베개/ 1990년 7월 #[48] 약 165cm.[49] 보도연맹 학살 사건 사진은 대부분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