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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3:35:12

백래시(도서)

도서명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韓)
Backlash: The Undeclared War against American Women(英)
발행일 1991년(원서)
2017년(역서)
저자 수전 팔루디(S.C.Faludi)
황성원 역
출판사 Crown Publishing Group
아르테 (주식회사 북이십일)
ISBN 978895097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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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서 및 저자 소개
1.1. 출간 배경
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그래서 백래시란 무엇인가: 역사와 양상2.3. 대중매체가 불완전한 통계를 다루는 방식2.4. 피학증적 성격장애: 학문적 백래시?2.5. 백래시가 이윤추구를 이기다?2.6. 명예남성들: 위장된 페미니스트2.7. 페미니스트 수정주의자들2.8. 남성 권익 운동가2.9. 낙태 논쟁과 A.C. 사망 사건
3. 비판
3.1. 백래시의 모호함과 백래시 몰이3.2. 선구자 베티 프리댄 백래시 몰이
3.2.1. 베티 프리댄과 대립한 인물의 성향
3.3. 기타
4. 관련 문서5. 둘러보기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베티 프리댄의 《여성의 신비》 만큼이나 획기적이고 매혹적이다."
- 로라 샤피로(L.Shapiro), 《뉴스위크》 서평[1]

1. 도서 및 저자 소개

2015년 이후로 국내에 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이 급격하게 이슈화되는 와중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책이다. 저자 수전 팔루디(S.C.Faludi)가 정말 이를 악물고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막대한 분량을 자랑하며, 그 내용에서 전달되는 정보가 빼곡하다. 읽어야 할 양이 많기 때문에 접근성은 떨어지지만,[2] 그만큼 많이 인용도 되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책.

이 책은 특히 여성의 사회 진출과 모성적 성 역할의 약화에 대한 '반격' 을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반격의 과정은 먼저 언론이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은 불행하다" 는 이미지를 만들고, 별다른 근거자료도 없이 이 이미지를 확산시키자, 대중이 이에 반응하고, 마침내 트렌드에 통계적으로 감지되고, 이것이 다시 근거로 쓰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수많은 미국 여성들을 힘들게 했다는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즉 80년대 여성들이 힘들게 살기는 했는데, 그 원인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오히려 페미니즘의 적들이 펼친 백래시에 있다는 것이다.

시대적인 흐름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주장을 내놓기 위해, 저자는 있는 힘을 다해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책에서 매우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그 방대한 참고문헌에 있다. 참고문헌 페이지 수는 pp.665-781에 달하며, 이는 전체 책 두께의 14.6%에 달한다. 각 장마다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많은 경험적 연구와 사회조사 통계 데이터들과 당사자 인터뷰들이 근거로서 붙어 있으며, 각 장마다 미주의 번호는 대강의 평균이 150 정도이고, 심지어 마지막 14장에서는 무려 299에 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저자가 각 문단의 문장들마다 하나하나 제시하는 통계 수치에 대해서는 쉽사리 의문을 표하기 어려울 정도. 게다가 이 자료들은 주류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았던 학계의 동향 및 연구보고서에 근거하며, 각 문헌들에 사용된 연구방법론에 대한 학자들 사이의 학술적 비판까지도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다루는 내용의 중요성이 중요성인 만큼, 페미니즘 이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정도로 막대한 자료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외에도, 1980년대 사회사나 문화사를 고찰하고 싶거나, 혹은 이 시기의 미국 정치의 변화를 탐지하고 싶은 다른 사회과학도들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1980년대에 대해서 위에서 아래까지,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앞에서 뒤까지 극도로 철저하고도 세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 시절에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가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다. 아마도 80년대 미국 사회에 해박한 독자들은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저자 팔루디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그는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언론인으로, 1981년하버드 대학교를 수석(summa cum laude)으로 졸업한 뒤 《The Harvard Crimson》 을 펴내, 촉망 받는 젊은 언론인으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월스트리트 저널》 을 포함하여 다양한 언론사에서 취재 활동을 하다가 마침내 1991년에 본서를 펴냈고, 일반 논픽션 부문에서 전미도서비평가상(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에 또한 세이프웨이(Safeway) 사(社)를 심층 취재한 공로로 해설 및 보도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2018년 10월경에 한국에도 방한하여 코엑스에서 열린 제7회 "이데일리 W페스타" 에 참가, 기조연설을 한 적이 있다. 이때를 기회삼아서 서강대학교에서 토론회를 열기도 했으며 이때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다시 한 번 백래시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데일리 인터뷰에서는 한국에서 나타나는 "페미니즘 폭발" 이 흥미롭다고 말하면서 "배워가고 싶다" 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와 더불어 성별간의 연대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3]

1.1. 출간 배경

본서의 에필로그에서 표현한 바에 따르면(p.661), "반격이 지배하던 1980년대" 라고 정리될 수 있다. 이 시절, 특히 1980년대 말엽의 미국 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반감과 적개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예를 들어 1987년에 제작된 저 유명한 영화 〈위험한 정사〉 의 경우, 미국 각지의 영화관에서는 "저년에게 죽빵을 갈겨!", "저년 죽여, 저 쌍년을 당장 죽여!" 같은 남성 관객들의 미친 듯한 고함소리가 방음재를 덧댄 문 바깥까지 울려퍼질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이듬해 방영된〈피고인〉은 매사추세츠 주에서 벌어진 실제 집단강간 사건을 소재로 한 강간 생존자 회고 영화이며, 제작진은 강간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는 남성 관객들은 끔찍한 윤간 장면에서 휘파람을 불고 환호하며 열광했다고 한다.

저자 팔루디는 이 시절 백래시의 가장 큰 승리는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1970년대에 무섭도록 몰아닥치던 진보와 사회적 의식고양의 움직임이 가라앉은 뒤, 이번에는 레이건의 지휘 하에 정반대 방향으로 "전통적" 미국 가치로의 보수화가 무섭도록 몰아닥쳤다. 이것은 레이건의 재선과 아버지 부시의 당선으로까지 계속해서 사그라들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 결과 1960년대 수준의 사회상과 비교될 정도의 거대한 사회적 반동이 발생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60년대에서 70년대로 이행하며 이루었던 변화들을 모두 부정하고, 다시 60년대로, 더 궁극적으로는 다시금 빅토리아 시대의 "좋았던 그 시절" 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80년대 미국이 경험한 백래시.

본서가 출간된 이후로 현대의 학자들은 이 시절을 도덕적 패닉(moral panic)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으며, 실제로 이때에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온갖 유언비어들을 유포하며 떨곤 했다. 대표적으로 유년기 성폭행 억압설, 청소년 악마숭배 괴담, 맥마틴 보육원 아동학대 논란, 그리고 〈침묵의 절규〉 등의 낙태 반대 운동가들이 펼치는 낙태의 잔혹함 등이 날마다 언론을 장식했다.[4] 사람들은 "그래도 옛날엔 사람들이 순수하고 좋았지! 지금은 온통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무서워서 어떻게 살겠나!" 를 한탄하며 혀를 찼다. 당시 사람들이 손쉽게 지목한 희생양은 바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내버리고" 직업전선으로 뛰어든 커리어우먼들이었고, 이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준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즘으로 인해 단란한 가족들이 깨져 간다는 얘기다.

물론 불과 십 년도 되기 전에는 이들도 페미니즘의 열렬한 옹호자였기 때문에, 한순간에 태세 전환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이는 여성들에 대한 분노를 가장 격렬하게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그 결과, 여성에 대해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모욕과 멸시를 서슴지 않는 남성들은 80년대가 "포스트페미니즘[5]의 시대" 라고 주장했으며, 세상이 변했는데도 페미니즘이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분노에 차 있다고 개탄했다. 언어적으로도, 반낙태 운동은 '생명친화 운동' 으로, 성적 자유화 반대 운동은 '순결친화 운동' 으로, 직업여성 반대 운동은 '모성친화 운동' 으로,[6] 안티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대안' 으로 포장되었다.[7] 때마침 하술하겠지만 유명한 페미니스트들 역시 수정주의적인 관점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런 입장 변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류 언론에 의해 떠들썩하게 보도되기도 했다. 이런 언론들이 날마다 강조하는 것은, 페미니즘은 이제는 한물 간 낡은 사상이고, 80년대는 젠더 평등한 아름다운 시대이며, 아직도 욕심이 끝이 없는 페미니스트 전사들 때문에 사회의 기초가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전체적으로 구성이 매우 폭넓고, 포괄적이고, 꼼꼼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시된 것처럼, 1부는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잘못 알려진 편견 및 고정관념들을 다루며, 이것이 어떻게 확산되어 갔는지 보여준다. 2부는 특히 대중문화의 각 영역들에서 백래시의 내용이 확대 재생산되는 양상, 그리고 그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을 제시한다. 3부는 백래시의 본질과 정체, 그리고 주도적으로 백래시를 이끌고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취재한다. 마지막으로 4부는 백래시의 결과로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악화되었는지를 고발한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의 순서와 무관하게 소개할 것이다. 먼저 이 책이 주창한 개념인 "백래시" 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본서에서 묘사적으로 나열한 내용을 읽기 쉽도록 정리하고, 다음으로는 2장에서 보여주듯이 불완전한 통계 데이터가 백래시의 메시지에 부합한다는 이유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살펴본다. 그 다음으로, 그렇다면 과연 학문의 세계는 중립적이며 백래시에 견딜 수 있는가에 대해서 DSM-III-R 개정판의 사례를 들어 보겠다. 또한, "시장 원리에 따르면 경영과 마케팅 현장에 성차별은 있을 수 없다" 는 생각과는 다소 상반될 수 있는 몇몇 사례들을 거론할 것이다. 그리고 80년대에 저마다 다양한 행보를 보였던 뉴라이트 안티페미니스트들, '자칭' 페미니스트들과 페미니스트 수정주의자들, 남성 권익 운동가들을 차례로 소개하고, 저자가 낙태권 운동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보다시피 이 책에서 포인트를 두고 읽어야 할 내용이 무지막지하게 많다. 책 자체가 원체 큰 것도 있지만, 선대 페미니즘의 경험이 그 사회의 후대로 전수되는 것도 공익적으로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어떤 입장과 관점을 갖고 있는지와는 무관하게, 적어도 수십 년 전 미국인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지구 반대편에서 다시 반복하는 사회적 낭비만큼은 피하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역서에서 일괄적으로 "반격" 이라고 번역된 부분들은 전부 "백래시" 로 음차하여 전달하기로 하겠다. 상기했듯이 레퍼런스가 매우 두터우므로, 이하에는 일일이 전부 근거 문헌을 달았다. 따라서 하단에 서술된 내용에 대해서 혹시 반론을 펴거나 수정하고자 한다면, 먼저 본서를 구하여 해당 부분을 참조한 뒤 서술을 고치는 쪽을 권장한다.

2.2. 그래서 백래시란 무엇인가: 역사와 양상

백래시의 정의는 본서를 절반 넘게 읽어야만(…) 9장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이 책이 백래시의 양상을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데 치중했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시모어 립셋(S.M.Lipset)과 얼 랍(E.Raab)은 《The Politics of Unreason》 에서 백래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들에 따르면, 백래시는 "자신들의 중요도, 영향력,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집단에 의한 반동"(p.29-30)이라고 하며, 또한 미국에서 "절망의 정치는 전형적으로 반격의 정치"(p.3)라고도 하였다. 로절린드 페체스키(R.P.Petchesky)는 자신의 논문에서[8] 70년대 페미니즘은 보수주의자들의 가치나 이해관계 외에도 '생활양식' 까지 위태로워지게 만들었던 중요한 위협요소였다고 지적하면서 백래시가 주로 보수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백래시가 그 자체로 보수주의와 정확히 상통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믿는다.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Adorno)는 현대의 우익 운동 세력이 '사이비 보수층' 으로 고전 보수주의자들과 달라지며, 자신들이 현 상태의 지배질서를 수호하기보다는 철 지난 옛 질서나 상상 속의 질서를 복원하려 한다고 보았다. 또한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R.Hofstadter) 역시 자신의 저서 《The Paranoid Style》 에서, 이들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미국은 대체로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고 말함으로써 이들이 사회의 주변적 세력임을 확인했다.

백래시가 태동한 가장 중심적인 집단은 다름아닌 뉴라이트개신교 근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9] 특히 70년대 말에 갑작스럽게 청중이 감소해 가던 개신교계 텔레비전 설교사들이 가장 열정적인 백래시 홍보 집단이었다. 폴 웨이리치(P.Weyrich)나 제리 폴웰(J.Falwell), 팻 로버트슨(M.G.Robertson) 등은 "Moral Majority", "Committee for the Survival of a Free Congress", "American Christian Cause", "Christian Voice", "700 Club" 등등의 자신들의 이익단체 및 압력단체를 구성하고, 자신들이 당면한 사회적 어려움의 책임을 페미니즘으로 돌렸으며, 심지어 음모론도 공공연히 활용했다.[10] 특히 남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제임스 로비슨(J.Robison), 팀 라헤이(T.LaHaye) 등의 "목사님" 들은 설교 시간에 자신들의 폭력 전과를 공공연하게 자랑했다(…).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이 시절은 대통령 후보들조차 마초스러움을 과시하기 위해 "내가 한번 화를 내면 아랫사람들 모두가 무서워서 꼬리를 말고 도망칩니다!" 라고 방송에서 호언장담하던, 그야말로 싸나이들의(?) 시절이었다.

저자가 인용한 립셋과 랍의 문헌에 따르면, 백래시는 역사적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미국 역사를 되짚어 본 에이드리언 리치(A.Rich)와 같은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결론이 있다면, 이 또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에서 페미니즘은 19세기 중반, 1900년대 초, 1940년대 초, 1970년대 초에 네 번 크게 나타났으며, 그 사이에는 각각 백래시가 나타났다. 잠깐 간단히 예를 들어 보자. 엘시 파슨스(E.C.Parsons)라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한때 성차별이 존재했음을 후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박물관을 만들 때가 왔다" 고 주장했다. 이 사람이 이 말을 한 때는 1913년이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에델 클라인(E.Klein)의 《Gender Politics》 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여성운동에 대한 관심의 약화는, 여성들의 실패가 아닌 완성의 신호" 라는 인식이 언젠가 퍼져 있었으며, "페미니즘은 이미 제 역할을 다 했고, 이제는 포스트페미니즘의 시대가 왔다" 는 희망의 메시지가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다. 여기서 클라인이 묘사한 시대는 1920년대였다! 미국인들은 "페미니즘은 이제 그 목표를 완수했고, 페미니즘 이후의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 는 '똑같은 생각' 을 80년대까지 총 네 번씩이나 반복했던 것이다.[11]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후손들을 위한 한 가지 힌트가 있다면, 이 모든 케이스에서는 공통적으로 "여성에게는 질문도 안 해 보고 남성들끼리만 쑥덕거린 끝에 내린 결론" 이라는 특징이 있다고.

첫째, 19세기 중반에 부흥했던 페미니즘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E.C.Stanton), 수전 앤서니(S.B.Anthony)의 세네카 폴스(Seneca Falls) 선언에 대한 백래시를 맞이했다. 이때는 '상류층 독신 여성' 이라는 표현이 쓰였으며, 이들이 외설적이고 무분별하며 수많은 가정들을 붕괴시키고 있다고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둘째 백래시로서, 1920년대에는 대공황반공주의가 나타나면서, 전미여성당(National Woman's Party)과 헤테로독시(Heterodoxy)의 여성운동에 대한 반감이 나타났다. 반대자들은 전미여성당은 곧 빨갱이라는 식으로 몰아가곤 했으며, 1차 대전을 계기로 직업활동에 참여하게 된 여성들에게 그만하면 됐으니 부엌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질렀다. 1950년대에 세 번째로 나타난 백래시는 1940년의 저 유명한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의 "We can do it!" 이미지에 대한 것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여성들의 근면함에 갈채를 보내던 언론들은 1950-60년대에 태도가 돌변, "근무태도가 불량하다" 고 비난했으며, 윌러드 월러(W.Waller), 벤저민 스포크(B.Spock), 한때 자신이 페미니스트였던 마거릿 히키(M.Hickey) 등이 전쟁 기간 동안 여성들이 버릇이 없어져서 이혼과 미성년 범죄, 불임, 사회적 불안이 초래되고 있다고 공격했다. 그리고 미국 사회는 80년대 들어서 넷째 백래시를 맞게 된 것.

언제나, 백래시의 핵심 메시지는 "이번에야말로 여성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직업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여성들은 비참해졌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라" 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따라서 여성들의 불행에 대한 모든 일의 원흉의 원흉으로 페미니즘을 지목했다. 그런데 실상 이들은 당사자인 여성들에게는 전혀 물어보거나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 여성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페미니즘이 자신들의 삶을 개선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대중매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직장 여성들은 괴롭습니다! 가정주부는 행복합니다!" 를 외쳐대는 걸 보면서 자신도 불행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갖기 시작했고, 결국 이들은 처음부터 여성들에게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던 셈이 되었다. 백래시로 인해 여성들은 고립감과 우울감을 경험했고, 백래시는 이에 대해 "페미니즘이 너무 나갔다, 너무 빨랐다, 너무 이상적이었다" 고 홍보했으나, 실상 여성들은 바로 그 백래시 때문에 공연한 우울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대중매체는 백래시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저자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백래시의 조력자이며 동시에 홍보 담당자였다. 사실, 리버럴들의 세상이었던 1970년대에도 언론은 페미니즘의 동지라고 보기 어려웠다. 70년대 초에는 중립적이거나 혹은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가,[12] 70년대 중엽에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폭발적으로 호응하자 이번에는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적당히 끌어와서 자기네 상품을 팔아먹는 데 동원했다.[13] 그 이후 백래시의 시대인 80년대가 되자, 이번에는 "이제 페미니즘은 끝났다, 페미니즘은 죽었다, 그들이 얻을 것은 모두 얻었다" 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 이들은 여성들의 불행을 주제로 할 때 여성들의 목소리를 취재하는 대신, 여성이 우울해하는 일러스트 몇 장(…)을 그려넣었을 뿐이었다. 기사 본문에 익명으로 인용된 여성 서너 명의 말 한 마디씩을 추가하고, "감이 있다" 혹은 "더욱" 과 같은 모호한 표현을 쓰고, 미래시제를 활용하여 예측적인 진술을 하거나, 다른 언론사의 여성 트렌드 기사를 베껴오고, 일부 대중강연 전문가들의 발언을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완벽했다. 요즘 인터넷 뉴스도 똑같다고 생각되어도 일단 넘어가자.

언론은 이때 "직업여성들이 불행해지고 있다" 는 기사 한편으로 "점점 더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있다" 는 기사를 나란히 두었다. 이를 종합할 경우 여성들은 헛된 욕심에 빠진 채로 자기 자신을 불행해지는 길로 몰아가고 있다는 식의 분석이 나오는 셈. 1986년에 신문 기사들은 "성별 임금격차가 사라지고 있다" 면서, 페미니스트들이 낡은 통계수치를 그만 인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해의 임금격차는 1955년의 임금격차에서 떨어졌다가 원상복구된 것이며, 그나마 통계적 방법을 보정하고 남성임금 저하분을 배제하자 격차 감소는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많은 언론들은 또한 "여성들이 점차 금녀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다" 고 보도했지만, 그들 중 많은 수가 비서, 청소, 간호, 리셉션 등의 주변적 업무로 밀려나고 있다는 점이나, 그 직종의 임금이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어서 남성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를 채운 결과라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1989년에 《포브스》 는 오늘날 기업 내 성차별 처벌 건수가 크게 감소했다며 반겼지만, 레이건 행정부가 성차별 문제를 감시, 징계, 중재할 부서들을 지속적으로 감축시키고 약화시켰기 때문이라는 분석은 하지 않았다.

특히 이때 언론사들이 폭넓게 활용한 신조어 중 하나를 소개할 만하다. 광고 카피라이터 페이스 팝콘(F.Popcorn)은 1986년에 "고치 짓기"(cocooning)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본래는 히키코모리를 의미하는 젠더 중립적인 의미였지만, 언론은 무분별하게 이를 가져다가 "일을 그만두고 가사노동을 하며 행복해하는 여성들" 이라는 의미로 전용했다. 정작 팝콘 본인부터가 행복한 미혼 워커홀릭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한 부분. 사실 이러한 양상은 1980년대 초엽의 불황기에 경영악화를 경험하는 언론사들이 컨설팅을 받으면서 "요즘은 전통적 메시지가 먹혀드는 시대이니, 이에 영합하는 기사를 쓰면 구독자들이 좋아한다" 는 조언을 받았기 때문도 있다고 한다. 그 사례 중 극단적인 것을 하나 든다면, 한 언론사는 아침식사용 시리얼 판매량이 5년 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는 경제 기사를 가지고 "따라서 일하는 여성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 고 기사를 끝맺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백래시는 영화에서도 나타났는데, 70년대 영화들은 〈Up the Sandbox〉, 〈Private Benjamin〉, 〈My Brilliant Career〉 등에서 보듯이 자기 목소리를 과감하게 낼 줄 알고, 부당한 일에는 남편에게 뺨을 때리거나 항의할 줄도 알았던 능동적인 여성들이 많았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묘사되었으며, 탈진해 버린 직업여성들의 실패와 백치스럽고 의존적인 여성의 행복이 대조되었다. 이런 영화들은 반대로 모성에 대해서는 매혹적이고 신성하게 묘사하며, 〈Three Men and a Cradle〉 의 경우 남성들이 얼마나 아기를 못 돌보는지 (따라서 왜 엄마들의 보육이 필요한지) 우스꽝스럽게 연출했다. 이들은 남성이 여성을 자신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장면들을 삽입했고, 남녀 간에 갈등이 벌어질 경우에도 화해와 관계의 개선으로 마무리되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의 "승리" 혹은 파국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었다. 1980년대에 여성들의 입을 막은 주요 작품들로는 〈Overboard〉, 〈Nine Half Weeks〉, 〈The Untouchables〉 등이 있다고.

TV 브라운관에서도 변화는 감지되어서, 남성 등장인물들은 점점 마초적이게 되었고 여성들은 점점 더 "비키니 차림으로 해변에서 뛰어노는 헐벗은 소녀들" 이 되어 갔다. 1988년의 〈Angels' 88〉 에서 나타난 성 상품화 외에도, 〈Nasty Boys〉, 〈Hardball〉, 〈Moonlighting〉 에서는 억세고 우악스러운 남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백래시는 유독 TV에서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주 시청자층이 결국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의 선호에 따라 강인한 캐릭터를 보여줘야만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 수 있었다는 것. 예컨대 당시 여성들은 〈Roseanne〉, 〈Murphy Brown〉 등에서 등장하는 독설가 유형의 등장인물에 열광했지만, 조지 부시는 그 주인공 로잔느 바(R.Barr)에 대해서 "수치스럽다, 그녀를 이라크에 대적할 비밀 무기로 만들면 좋겠다" 고 투덜거리기도 했다고(…). 아무튼 그 결과 TV 프로그램들은 유독 페미니즘과 백래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런데 대중이 레밍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전방위적 선전이 대중에게 그만한 호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이는 남성들의 심리의 영역으로까지 내려가서 분석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14] 뉴라이트 세력의 면면으로 미루어 본다면, 어쩌면 백래시는 남성들이 생각하는 남성성(masculinity)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저자는 "남성성의 위기" 담론이 역사적으로 백래시 때마다 늘 제기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소설가 헨리 제임스(H.James)는 자신의 작품들에서 "요즘은 남자나 여자나 계집애가 다 됐다" 고 개탄했으며, 빌리 선데이(B.Sunday)는 "우리 기독교가 마초적이지 못하다" 면서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참고로 이 두 사람은 모두 19세기 말의 사람들이다. 사회학자 시어도어 로작(T.Roszak)은 이 시기를 가리켜서 "만취한 남성들끼리의 긴 파티가 역사책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것 같다" 고 했다(…). 둘째 백래시 때에도 어떤 사람이 나서서 "어린 소년들이 소녀처럼 굴지 못하게 만들어 놓겠다" 고 큰소리를 쳤으며, 그 결과 우여곡절 끝에 창설된 것이 보이스카우트였다. 셋째 백래시 때에는 소설가 필립 와일리(P.Wylie)가 자신의 작품들에서 "여성의 왕조에 맞서 싸워서 우리의 재산을 빼앗아오자" 고 독려했으며, 넷째 백래시 때에는 제리 폴웰과 랜들 테리(R.Terry) 등의 '목사님' 들이 "우리 예수님은 우락부락하고 야성적인 군인 같은 분이셨다!" 고 TV에서 설교했고, 실제로 80년대 남성 패션계에는 《뉴스위크》 가 '포식자 패션' 이라고 부른 공격적이고 거친 이미지의 옷차림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네 차례의 백래시 모두, 그 메시지 속에는 "고추 달린 싸나이 대장부가 어딜 계집애같이..." 라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페미니즘의 그림자만 드리워져도 남성들은 자신이 남성이라는 정체성이 말살되는 듯한 위협과 고통을 겪는다" 고 지적하면서, 사회조사 연구소인 얀켈로비치 모니터(Yankelovich Monitor)의 수석 연구원과 대담을 나눈 내용을 거론한다. "남성성을 정의해 주세요" 라고 이 연구소가 20년 동안 종단적으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어느 시대에나 남성들은 제일 먼저 "가족을 잘 먹여살리는 능력과 책임이 있는 사람" 을 들었다. 즉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것은 남성들이 남성이기 위한 조건, 가족을 먹여살리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지는 것을 가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으로 위협하기에 남성들이 격분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가 일을 하면 남편은 남자도 아니라는 식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경제적 양극화와 불황이 겹쳐지면 백래시에는 최적의 환경이 된다. 설문 응답 패턴 속에서 30대초 저소득 미혼 남성들은 그야말로 페미니즘에 대해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으며, 자기 자신을 '낙오자' 라고 소개했고, 여성들을 바라보며 심각한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80년대 말엽 인구학적 대표성이 보장된 한 데이터에서는 이들이 전체 응답자 표본의 20%를 차지했다.

저자에 따르면, 남성들의 사회적 불만과 분노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은 그 분노가 향하는 집단 속에서 여성누구 하나 끄집어낸 뒤 쫓아내 버리는 것이었다. 양극화가 문제가 되자, 캐런 밸런스타인(K.Valenstein)과 같은 여성 CEO들이 월가의 투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쫓겨났다. 부의 세습이 문제가 되자, 리오나 헴슬리(L.Helmsley)가 조세회피를 이유로 '마녀', '창녀', '인류의 수치' 라는 표현을 들으며 몰락했다.[15] 군납비리가 문제가 되자, 펜타곤은 여성 장교들이 임신을 해서 전투력이 저하된다는 주장과 함께 여성들을 군문에서 쫓아냈다. 레이건 정부의 외교 참사로 꼽히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벌어지자, 올리버 노스(O.North) 대령은 '오만한 페미니스트들' 에게 어떻게든 그 책임을 돌렸다. 남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만들어진 일련의 희생양들은 거꾸로 여성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일부 여성들은 백래시의 메시지가 옳다고 믿고,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자기 일을 그만두고 가정에서 자녀를 대여섯씩 낳으며 부엌데기로 일하는 요조숙녀처럼 지내 보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들이 지독한 우울증과 권태기, 그리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결과가 나타났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겪은 여성들은 뉴라이트의 낙태 반대 메시지를 굳게 믿는 남편의 강요에 못 이겨 자녀를 낳은 뒤, 그 길로 이혼 수속을 밟기도 했다. 페미니즘이 낙태를 허용한 결과로 더 많은 이혼이 발생했다는 뉴라이트의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뉴라이트는 도리어 여성들이 도저히 함께 지낼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남성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어떤 여성들은 매일같이 개처럼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런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믿다가 그만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이런 학대 여성들 중 일부는 살려달라고 신고했다가 정숙한 아내로서 제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도리어 공권력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본서에는 이런 안타까운 사례들이 셀 수 없이 널려 있다. 적어도 여성의 행복이라는 면에 있어서, 백래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가 본서 마지막에 정리한 결론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반격은 아무리 아버지를 섬기는 케케묵은 핵가족 환상을 입이 닳도록 칭송해도 다시 그것을 현실화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의 머릿속에 그 이미지를 심어 놓았고, 성가신, 심지어 고통스러운 불협화음을 빚어냈다. 1980년대에 여성들이 비참했다면 (많은 여성들이 비참했던 건 분명했고, 반격이 심화될수록 더 많은 여성들이 힘들어졌다) 그건 널리 알려진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페미니즘, 그리고 이와 함께 찾아온 자유는 여성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반격이 여성에게 쥐어준 행복의 처방전은 효과가 없을 것이고 없을 수밖에 없다. 이는 여성의 삶을 가정과 직장이라는 두 개의 반쪽짜리 삶으로 갈라놓은 뒤 가정만이 충족되고 완전한 존재 양식이라고 홍보했다. 여성들이 이 처방에 저항하면 심리적, 물리적 처벌을 통해 여성들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반대로 이 처방에 따르려고 노력한 여성들은 그것이 현대의 삶과는 전혀 맞지 않는 잘못된 치유법(반은 환상이고 반은 처벌인)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 반격의 처방은 단 한 번도 유효했던 적이 없었다. 그것은 항상 부실한 대체재였을 뿐이었다. 반격의 처방은 수 세기 동안 여성들이 누차 제시했던, 그리고 항상 사회가 바로잡고자 했던 열망과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를 한 번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 본서, p.656

2.3. 대중매체가 불완전한 통계를 다루는 방식

앞서 언급한 대로, 백래시에서 핵심적인 중심축의 역할을 했던 것은 다름아닌 대중매체였다. 그리고 이들은 백래시의 메시지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대중강연자들과 자기계발서 작가들, 심리상담 테라피스트들,[16] 무엇보다도 학계의 최신 연구결과를 적극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트렌드 분석' 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근거가 있다고 홍보해 왔다. 그런데 이 대중매체들은 "불행한 직업여성, 행복한 전업주부" 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일종의 "보도 편향" 과 같은 것을 일으켰다. 다시 말해, 언론에서는 백래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연구결과가 나올 경우 그 방법론적 한계나 문제점, 적용 가능성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인류의 '절대적 법칙' 인 것처럼 보도했으며, 반대 방향으로 연구결과가 나올 경우에는 (혹은 앞서의 연구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될 경우에는) 아예 보도하지 않고 침묵하거나 혹은 단신 처리하고 넘기곤 했다.

먼저 셰어 하이트(S.Hite)의 사례를 살펴보자. 하이트는 《Women and Love》 라는 페미니즘 문헌을 출간하면서, 4,500여 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여, 여성들의 전통적인 예속적 지위가 여성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며 백래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뉴스위크》 는 그녀가 대중문화 선동가라고 몰아붙였고, 《타임》 등 다른 언론사들도 그녀의 개인적인 스캔들이나 괴벽에 대한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비판자들은 하이트의 논의가 소표본이고(?) 일반화가 어렵다고 공격했지만, 실상 이는 억지에 가까웠다. 사회과학계에서 통용되는 논문들보다 압도적으로 큰 표본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다, 하이트 본인도 이 책에서 일반화에는 주의해 달라고 명시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물론 논란 없는 문헌도 없고 의의 없는 문헌도 없지만, 이 책은 이상하리만치 면밀한 검토보다는 무차별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비판자들은 이 책에서 인터뷰한 여성들이 "남성들을 몰아세우는 분노의 공격" 을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인터뷰들은 절망과 좌절에 더 가까운 맥락이었다. "남편이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포기했다" 는 여성들의 불평이, 정말로 남성들이 입을 모아서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었느냐는 것이다.

이번에는 백래시에 영합한 사례를 살펴보자. 80년대 남성들의 열정적인 추앙을 받은 책 《Otherwise Engaged》 의 저자 스룰리 블로트닉(S.Blotnick)이 그 주인공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직업여성들의 성공이 여성들에게 유해하다는 내용으로, 블로트닉은 이를 위해 3,466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다고 말했다. 언뜻 이 통계는 믿을 만해 보인다. ...적어도 이 양반이 인가조차 받지 않은 어떤 학위공장(degree mill)에서 우편으로 받은 가짜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블로트닉은 자신이 이 책을 위해 25년 동안 데이터를 수집했다고 말했지만, 이는 그가 고작 17살 때부터 이미 26기가바이트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누적해 왔다고 택도 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1986년에 댄 콜린스(D.Collins)라는 언론인이 처음으로 그 거짓 학위와 온갖 사기들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이 책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고, 심지어 그의 편집진 데스크에서조차 이를 기사화하기를 묵살했다. 그는 언론사를 옮기고 나서야 간신히 해당 기사를 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기꾼에 대해 정의가 구현되었을까? 결말은 조금 찜찜했다. 블로트닉은 사기죄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지만, 《타임》 은 이를 단신으로 보도했으며, 《뉴스위크》 는 언급 자체를 피했고, 그 와중에도 그의 책들을 출판해 온 출판사 "Viking Penguin" 사는 어쨌거나 그가 옳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히며 출판을 끝내 강행했다.

백래시의 시절에 널리 퍼지던 메시지 중 유명한 것으로는 "여성들은 보통 연상의 남성과 결혼하기 때문에, 직업여성들은 혼기를 놓치고 결혼하기 힘들어질 것을 고민하더라" 라는 것이 있다. 이는 실제로 수많은 직업여성들이 (그 메시지를 접하지 않았다면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으리라고 회고한) 결혼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리사 피터슨(L.M.Petersen) 기자는 예일 대학교 사회학과의 닐 베넷(N.Bennett)이라는 인물이 근래 수행한 "남자 품귀" 연구를 접하고 흥미가 동했다. 수많은 직업여성들이 남성들의 바짓자락을 부여잡고 제발 결혼해 달라고 늘어지는 추세라는 것이다. 피터슨 기자는 곧바로 이를 기사화했다. 이 연구가 학계에 미출판된 미완성본이라는 베넷의 만류는 기자에게도, 대중에게도 중요치 않아 보였다. 나중에 베넷은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의 데이비드 블룸(D.Bloom)과 협업하여 후속연구를 진행했으며, 곧 이는 하버드-예일 연구라는 이름을 달고 유명해졌다.

이 연구의 문제점을 발견한 인물은 미국 인구조사국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진 무어만(J.Moorman)이었다. 처음에는 이러이러한 방법론적 문제가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우편을 보냈지만, 이를 인구학회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하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베넷은 침묵했다. 몇몇 언론사들이 무어만에게 취재를 요청했지만, 당시 그는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그따위 연구 할 시간에 가난한 미혼모들이 보육서비스를 악용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연구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기에, 그 모든 요청을 고사해야만 했다. 한참 후에야 최대한 '미화' 되어 언론에 발표된 무어만의 반론은, 당연히도(?) 단신 처리를 피할 수 없었다. 중재자로 나선 통계학자 로버트 페이(R.Fay)는 데이터를 접하자마자 베넷이 틀렸다는 걸 알아보았고,[17] 결국 베넷은 자신이 틀렸으니 모든 미디어와의 접촉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미디어는 이 선언 자체를 보도하지 않았다(…). 인구학회에 간 무어만은 심지어 학회에서 관련 언급을 일절 할 수조차 없었다. 인구조사국의 상관들이 "이건 너무 논쟁적" 이라면서 베넷 이야기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일러두었기 때문. 최초 기사화 이후로 3년 반 만에 문제의 하버드-예일 연구는 겨우 논문으로 빛을 볼 수 있었지만,[18] 무어만이 지적한 데이터는 전부 삭제되어 출판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넷은 "저는 제 논문에 대해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라고 코멘트했고, 언론도 그 발언에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Battelle Institute, Langer Associates, Significance Inc., 미시건 대학교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 등의 연구소들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업여성들은 가능한 한 결혼을 꺼리며, 결혼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현재 생활이 완벽히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Great Expectation 연구소의 설문에 따르면, 미혼 생활에서 가장 높은 주관적 불행을 보고하는 인구집단은 바로 30대 미혼 남성이다. 가족사회학자 제시 버나드(J.Bernard)에 따르면, 도리어 결혼을 통해서 정신적인 혜택을 입는 사람들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며, 이에 관련된 연구 데이터들은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하버드-예일 연구가 퍼진 이후, Great Expectation, Mark Clements Research 등의 연구소에서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소식은 그 이전까지는 결혼에 대해 어떤 불안도 걱정도 없던 여성들을 순식간에 공포로 밀어넣었으며, 미래의 불행을 피하기 위해 누구라도 붙잡고 결혼하려 애쓰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1970년대에 제정된 '이혼무책법' 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이혼에 대한 새로운 재산분할 기준인데, 기존에는 이혼의 도덕적 책임을 가려서 재산을 분할했지만, 이 법 이후로는 각자의 필요에 맞게 재산을 분할하게 되었으며, 페미니스트들의 상당한 호평을 받은 입법 사례에 속했다.[19] 그런데 레노어 와이츠먼(L.Weitzman)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의 책 《The Divorce Revolution》 을 통해 "이혼무책법은 악법이다, 여성들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끝내는 대가로 이제 빈곤한 처지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기존에는 여성이 파경에 대해 자신의 책임이 없음을 (어떻게든) '입증' 하기만 한다면 많은 재산을 가져갈 수 있었겠지만, 이제 "지나치게 평등한" 무책법 하에서는 여성들이 그만큼의 재산을 분할받지 못할 거라는 얘기였다.

와이츠먼의 문제의 책 역시 대중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받았다. 그 와중에 와이츠먼이 직면한 첫째 이의제기는 "그 통계가 정확한가" 였다. 경제학자 사울 호프먼(S.Hoffman)과 그레그 던컨(G.Duncan)은 자신의 이혼통계 데이터에서 와이츠먼이 장담한 패턴이 재현되지 않았다고 문의했으나, 와이츠먼은 데이터 공개 질의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런저런 변명으로 일관하며 거부했다. 기다리다 못한 호프먼과 던컨은 와이츠먼의 데이터가 정확하다고 믿고 계산을 다시 해 보았는데, 이번에는 이혼 후 여성의 생활수준 하락이 73% 가 아니라 33% 로 나타나는 계산 실수가 있다는 게 나타났다. 이를 학계에 발표했을 때 언론의 반응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이젠 생략할 수 있을 것이다. WSJ 한 곳에서 짤막하게 단신 처리하고 넘긴 게 전부였다(…). 게다가 와이츠먼의 해당 도서를 더 자세히 보면, 데이터는 LA 지역에서 법률 시행 이후에 이혼한 커플 114쌍에게서 얻어진 회고에만 기초하는 대표성 문제가 있었으며, 그나마 그 73%는 수많은 수치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심지어 와이츠먼은 이혼무책법을 폐기하자거나 전통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하면서 현행 법률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온건하게 제안했을 뿐이었다.[20] 그러나 와이츠먼의 이런 신중한 결론은 이번에는 다같이 대답해 보자 어떤 언론사에서도 주목하지 않았다.

뉴라이트를 비롯한 백래시 진영에서 이혼은 가능한 한 막아야만 하는 문제였다. 미시건대 소속의 책임연구원 주디스 월러스타인(J.Wallerstein)은 자신의 저서 《The Second Chance》 에서 이혼이 자녀에게 끼치는 파괴적 영향에 주목함으로써 대중매체의 환영을 받았으나, 여기에는 통제 집단과의 비교가 생략되었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누구도 이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는 '사소한' 뒷이야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월러스타인은 이 연구가 통제 집단까지 선정하기는 힘들어서였다고 해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뉴라이트 세력의 이혼 반대 논리에 남용되는 걸 보면서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다음 이야기는 불임이다. "여성들의 가임 능력은 30세 이후로 급락한다" 는 연구결과를 들어 알고 있는지? 사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상식과도 같은 것이 되었는데, 저 유명하고도 권위 있는 의학저널인 《NEJM》 에 1982년에 실린 연구이기 때문이다. 이는 30대 말~40대 초 시점부터 가임능력이 급락한다는 기존의 선행연구에 상반되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언론은 발벗고 나서서 이 연구를 기사화했다. 《뉴욕타임스》 는 학계 인사들이 아니면 열람도 못 하는 이 연구자료를 자기네 1면에 전면으로 보도하면서 온갖 극찬을 했고, 온갖 언론사들과 작가들에 의해 이 수치는 원래의 40%에서 나중에는 68%로까지 부풀려졌으며, 나중에는 역시 "페미니즘의 실패" 라는 말이 덤으로 덧붙었다. 그러니까, 애를 낳고 싶은 여성들은 괜히 직업을 갖느라 혼기를 놓치지 말고, 너무 늦기 전에, 기왕이면 20대 초중반에 일찌감치 결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찬사와는 달리, 이 연구는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기관인 인공수정 센터에서 얻어진 완전 불임 커플을 대상으로 했으며, 가임능력이 4분의 1로 감소할 수 있는 냉동보관 정자를 가지고 수행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 연구에서 조작적으로 정의된 "불임" 역시 그 의미가 달라졌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임신 시도 기간을 5년으로 잡았는데, 이 연구에서는 부부가 1년 동안만 임신에 실패해도 불임이라고 훨씬 광범위하게 정의해 버린 것이다. Center for Policy Studies, Office of Population Research 등에 따르면, 학계에서 이 연구에 대한 비판이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 연구 저자들 중 일부는 후속연구에서 발을 뺐음에도, 그 중 어떤 것도 약속이나 한 듯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건강통계국에서 실시한 불임 연구는 30~35세 불임률이 겨우 13.6% 이며 20대초 여성과 비교할 때 겨우 2%p 높은 것인데, 이 역시 어떤 언론에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백래시의 메시지들 중에는 불임을 직업여성과 엮어서 홍보하는 것들도 많았다.[21] 닐스 라우어슨(N.Lauersen)은 아무런 역학적 근거 없이 직업여성일수록 자궁내막증 발병률이 높다는 뇌피셜을 풀어서 유명해졌다. 직업여성일수록 유산율 및 조산율이 높다는 주장은 실제 데이터와는 정반대였다.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을수록 불임률이 높다는 주장 역시 실제 데이터와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여성에게 낙태 경험이 있거나 많을수록 추후 불임율이 높다는 주장 역시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수행된 150건의 연구 중에서, 신뢰할 만한 연구방법론을 지킨 '제대로 된 연구' 라 부를 만한 것은 불과 10건(…)에 불과했으며, 잘들 한다 그 중에서 낙태가 불임을 예측한 데이터는 단 1건이었고, 뜬금없게도 그 데이터의 출처는 위험한 불법 낙태 시술을 받았던 그리스 지역의 여성들이었다.

싱글 여성들이나 직업여성들은 기혼 여성이나 전업주부에 비해서 우울증이나 번아웃(Burnout)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을까? 실제로 백래시의 시대에는 이런 이미지가 굉장히 많았다.[22] 《Women's Burnout》, 《The Superwoman Syndrome》, 《The Type E Woman》, 《Women Under Stress》, 《The Female Stress Syndrome》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문헌들이 직업여성들은 더 우울하고 더 소진되었다는 메시지를 세뇌에 가깝게 반복하고 있었다. 애넷 배런(A.Baran) 등의 일부 연구자들은 점점 더 많은 싱글 여성들이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면서 66% 의 수치를 들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연구들도 연구방법론이 조악하다는 것이었다. 배런의 연구는 데이터라고 할 것도 없이 순전히 추측만 가지고 을 푼 것이었으며(…), 나중에 이를 확인한 린 기지(L.L.Gigy)에 따르면, 데이터가 없는 것은 싱글 여성이라는 인구집단을 '예외' 적인 것으로 처리해서 누락시켰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비교를 위한 집단을 선정하지조차 않았던 사례인 것이다. Mills Longitudinal Study, Cosmopolitan 연구소 등에서 극소수로 수행된, 싱글 여성을 제대로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싱글 여성들은 다양한 종류의 기혼 여성들에 비해서 가장 높은 삶의 만족도를 보였다. 사실 이래서 데이터를 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건강통계국 조사에 따르면, 싱글 여성의 건강에 관련한 요인들인 고용, 결혼, 자녀 중에서 유일하게 가장 강력한 예측이 가능한 요인은 바로 고용 여부였다. 어떤 책들은 "전업주부로서의 스트레스도 있긴 해도, 직업여성의 스트레스에 비하면 이쪽이 더 쉽다" 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U.S. Health Interview Survey, Midtown Manhattan Longitudinal Survey 등에 따르면, 이 역시 실제 데이터와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Epidemiological Catchment Area, 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 Quality of Employment Survey 등의 조사에 따르면, 현대에 들어 우울증의 심화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빈발한다고 여겨졌던 우울증의 발병 빈도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이번에는 어린이집과 같은 보육서비스에 대한 뉴라이트의 반발을 살펴보자. 1980년대 뉴라이트는 보육서비스를 "1980년대의 탈리도마이드" 라며 맹비난했다. 어린이집이 아동학대를 저지르고, 자녀가 겁에 질리게 하며, 건강에 좋지 않고, 어머니가 직접 보육하는 것보다 유해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23] 어린이집이 질병 유행의 근원지라는 주장은 실제 데이터와는 정반대였다. 등원 초기에는 전염병에 자주 걸리지만, 곧 대중적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을 갖춤으로써 오히려 질병에 잘 저항하게 된다는 것. 어린이집이 모자녀 간 유대를 위협한다는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어린이집 등원생들은 어머니 이외의 다른 성인들과의 새로운 유대를 폭넓게 형성할 수 있었다. 어린이집은 적어도 신생아들에게는 유해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 시절 근거로 제시된 자료들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표본조사가 죄다 전시 고아원, 전쟁 난민 캠프 같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저 유명한 해리 할로우(H.Harlow)의 "헝겊엄마 철사엄마 실험" 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적어도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이 철사 모형처럼 비인간적이라는 이상한 이미지를 심어 주는 데에는 성공했다. 예외적인 경우로, Family Research Laboratory는 어린이집의 아동학대 건수가 1,300건인 반면 가정에서의 아동학대 건수는 무려 101,000건이라고 보고했다. 이 연구의 운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뉴욕 타임스》 의 작은 단신 기사로 처리되고 끝이었다.

어린이집과 관련하여 저자가 소개하는 또 다른 인물이 바로 제이 벨스키(J.Belsky)였다. 이 인물은 심리학자이면서 개인적으로는 리버럴이었는데, 한 문헌에서 어린이집의 유해성에 대해 단 한 번 조심스러운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리고 이것 하나만으로 온갖 뉴스 대담에 출연 요청을 받았으며 보수 인사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기자들은 실제 논문은 읽지도 않은 채 서로의 기사를 앞다투어 베끼며 재생산했다. 이것이 설득력이 약한 추론이며 아직 학계의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는 벨스키의 강한 코멘트는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원래 벨스키의 의도는 어린이집에 관련된 법적 기준을 높여서 양질의 보육서비스를 만들고, 더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모으는 것이었으나, 실상 이 논문은 보육서비스 자체를 우리 사회에서 없애버려야 할 해악으로 규정하는 인사들에 의해 인용되었다. 이 문헌에서 한 가지, 어머니가 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을 때 행복할 수 있는 가족 구성원이 단 하나 있는데, 연구에 따르면 그 구성원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리고 물론 이를 보도한 언론사는 없었다.

다른 챕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80년대 미국 미용 시장에서 크게 주목받은 산업 중 하나는 바로 안티에이징 산업이었다. 80년대 말 화장품점은 노화 및 피부 손상 방지 상품들로 가득했으며, 여성의 생식력에 관련된 특별한 능력을 지닌 '태반 추출물' 이 함유되었다고 광고했다. 하지만 대부분 효과 없는 것들이어서, 레이건 정부 당시 식약청이 23개 제품들의 광고중단을 요구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피부가 상한 여자는 여자도 아니다, 특히 여자가 일을 하면 피부가 일찍 상한다" 는 광고문구 덕분에 이들 제품들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되었다. 이 와중에 피부노화에 대한 치료방법으로 제안된 성분 중에 레틴-A(Retin-A)라는 것이 있었다. 《USA 투데이》 에 따르면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의 발견" 이었다. 이 발견으로 존슨 앤 존슨(Johnson & Johnson) 사 주식이 2일간 8%p. 급등했으며, 연간 판매량은 350% 증가하는 호조를 누렸다. 문제는, 제대로 된 임상시험 결과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임상시험 결과에서 효과가 나타난 사람은 단 1명이었으며, 73%에서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부작용이 나타났고, 20%는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연구 중에 중도탈락했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언론은 어디서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이 시절이 이런 식이었다. 오늘날에도 가짜뉴스팩트체크니 하는 것들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80년대 언론이 (그 자체로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통계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확증편향이 판을 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저자는 언론사들이 "절박하게" 입맛에 맞는 연구들만을 찾다가, 몇 가지 엉성한 연구들만 기사화하고, 입맛에 맞지 않는 나머지 연구들은 무시해 버린다고 고발한다. 근거 없는 주장일지라도, 남성들은 백래시에 부합하는 연구결과만을 필사적으로 갈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거짓 메시지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에 대해, 저자는 통계가 "여성들의 인생에 잔소리를 늘어놓는 자문단을 자처함으로써 사회 지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고 비판한다. 인구조사국 출산통계부장 마틴 오코넬(M.O'Connell)의 회고에 따르면, 레이건 정부 시절에 인구학자들은 불임과 낙태, 편부모가정, 보육서비스의 나쁜 면을 부각시켜 발표하라는 정부의 압력에 극도로 시달렸다고 한다. 오코넬에 따르면, 관료들의 입맛에 부합하지 않는 연구들은 검열되고 폐기되기 일쑤였으며 반발하는 연구원들은 해고되었다고.

2.4. 피학증적 성격장애: 학문적 백래시?

이 단락의 서술은 임상심리학 전공자의 확인 및 보완을 기다리고 있음에 유의. DSM의 변천과 개정에 대해서 학계의 중론에 해박한 이용자가 관련근거를 첨부하여 보완하기 전까지, 이하의 서술은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바라본 기술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편의상 위 단락에서는, 학계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미가공 통계 데이터들을 대중매체가 어떻게 선택적으로 '낚아채서' 사람들에게 퍼뜨리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학계 자체의 백래시 여부는 상당히 중립적으로 기술했다. 이쯤에서 생각해 볼 만한 것은, 대중매체가 그렇다면 과연 80년대의 과학자사회는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과학의 자기교정성동료평가의 프로세스를 통해서, 학자들은 (개인의 가치관이나 신념과는 무관하게) 경험적으로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설명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종종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팔루디가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지식사회학 분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샌드라 하딩(S.Harding)에 따르면, 과학자사회의 지식축적 프로세스 자체가 남성 편향적으로 작동하기에,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standpoint)까지 담아냄으로써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데 실패하게 될 수 있다. 본서에서 소개되는 분야는 임상심리학(clinical psychology)으로, 저자가 특히 12장에서 걱정스러워하며 소개하는 한 사건이 있다.

위에서 지나가듯 소개했지만 80년대는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문제를 여성 개인이 자초한 스스로의 잘못으로 설명하려 하는 자기계발서와 심리치료서들이 다수 나타났으며, 이때 여성들도 자기 자신이 심리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고 여겨, 자기계발서와 테라피의 수요가 폭증했다. 물론 p.506에서 인정하듯이, 삶의 어려움들 중 많은 것들은 개인적인 이유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어려움들은 사회적인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수많은 불쏘시개 수준의 자기계발서들과 TV 대중강연자들, 목회상담 전문가로 자처하는 '목사님' 들, 내면아이(inner child)를 이끌어내라고 권유하는 자칭 심리전문가들, 부부생활에 대해 강연을 하는 방송교수가 매일같이 강조했던 것은, "여성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결국 본인들과 페미니즘이 자초한 것이며, 이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여성해방" 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런 류의 서적들의 예를 들자면, 멜빈 킨더(M.Kinder)와 코넬 코완(C.Cowan)이 지은 80년대의 베스트셀러 《Smart Women/Foolish Choices》 가 우선 꼽힐 수 있고, 그 외에도 수전 프라이스(S.Price)와 스테판 프라이스(S.Price)의 《No More Lonely Night》, 임상심리학자이자 라디오 진행자 토니 그랜트(T.Grant)의 저서 《Being a Woman》, 여성성 회복 운동가 로빈 노우드(R.Norwood)의 베스트셀러 《Women Who Love Too Much》 등이 있다고 한다.

물론 저자 팔루디는 이런 대중심리학과 실제 학계에서 논의되는 것들을 구분한다. 이런 많은 "조언" 들은 그저 한철장사용으로 소비되고 잊혀졌다. 하지만 저자가 심각하게 바라본 것이 있었는데, 1987년에 임상심리학계에서 DSM-III-R 개정을 하는 과정에서 백래시의 요소가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앞서의 자기계발서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문제였다. 당장 의사들이 진단하고 처방하는 과정에서 쓰이는 권위 있는 문헌이 DSM이었고, 특히 질병의 진단코드가 등록되어 있는 경우에는 보험금 처리나 법적인 증빙까지도 가능할 정도로 절대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는 문헌이 바로 DSM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헌이 개정되던 과정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불만을 제기할 만한 지점이 있었다. 당시 새롭게 추가하려던 진단명 중에 "피학증적 성격장애", "월경전 증후군", 그리고 "성도착적 강간장애" 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피학증적 성격장애였다.[24]

임상심리 분야를 변호하자면, 피학증적 성격장애의 추가는 의도는 좋았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었다. 이것은 가정폭력을 당하는 일부 여성들이 그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하는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 제기되었다. 아무리 공권력이 "당신 남편이 문제라고요!" 라고 말해도, 어떤 아내들은 도리어 "아니에요, 제가 좀 참고 견디면 되죠, 우리 그이를 잡아가지 말아요" 라며 가해자 편을 들어서 사법 당국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경우가 있었다. 연구자들은 이것이 잠깐 그러다 마는 일과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평생에 걸쳐서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문제, 즉 성격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여성이 계속해서 생명의 위협에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의료적으로라도 개입해야 한다면 그렇게 개입해야 했다.

문제는,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임상심리학 분야의 여성 학자들은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진단명은 가정폭력 문제의 원인을 가해자의 공격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여성의 '학대를 즐기는' 성격에서 찾도록 논의를 오도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는 마치 이 진단을 받은 여성이 남편에게 매를 맞으면서 그것을 내심 즐기고 바란다는 듯한(…) 이상한 이미지를 풍겼다. 문제는 진단명이 등재되는 학술적 의의에만 그치지 않았다. 병원 현장에서 이제 여성들은 자기 삶 속에서 조금만 이타적으로 살기만 했어도 곧바로 "피학증적 성격장애" 라는 딱지가 붙는 과잉병리화의 가능성도 있었다. 팔루디는 DSM에 새로 추가하려는 진단명의 진단기준치고는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기준이 정해졌다고 비판했다.

이 새로운 진단명의 추가는, 저자에 따르면, 학계 내적으로도 절차적인 문제가 있었다. DSM에 피학증적 패턴을 성격장애의 일원으로서 추가하려 했던 학자들은 정작 정신의학 분과의 여성위원회 위원장 테레사 베르나르데스(T.Bernardez)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표결을 진행했으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그가 DSM 담당자인 로버트 스피처(R.L.Spitzer)에게 항의했으나 지속 묵살되었다. 베르나르데스는 공청회라도 열어 달라고 간청했지만 이는 계속 묵살되었는데, 페미니스트 상담 연구소(Feminist Therapy Institute)에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언하고 나서야 겨우 공청회가 성사될 수 있었다. 물론 이 공청회의 남녀 비율은 극심한 남초였고 그나마 허용된 여성 학자들의 '숙녀답지 못한' 발언도 자주 끊겼지만, 이런 것들은 학문적으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을 듯했다. 스피처를 포함해서 피학증적 성격장애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편향적으로 표집한 소표본은 "매우 신뢰할 만한 데이터" 라고 주장했지만, 그 반대자들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수집한 대규모 사회조사 데이터는 "우리 논점과는 무관한 데이터" 라며 묵살하기 일쑤였다.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적어도 이는 팔루디 개인의 피해망상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러네이 가핑클(R.Garfinkel) 등의 학회 직원들이 공청회 현장에서 목격한 바를 회고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DSM의 개정 과정은 마치 "점심식사 메뉴를 정하는 수준" 으로 조악한 의사결정이었다고 한다.[25] 이건 가핑클의 피해망상도 아니었다. DSM 개정에서 뒷말이야 늘 나오는 법이라지만, 이런 뒷이야기가 알려지자 미국심리학회(APA)가 공식적으로 항의했으며, 정신과 의사 수천 명의 탄원서가 빗발쳤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 진단명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는 데에는 성공했다. 물론 진단명이 다소 바뀌긴 했다. 피학증이라는 단어 선정 자체가 "이걸 어떻게 '즐긴다' 고까지 볼 수 있는가? 성차별적인 비약이다" 라는 지적을 받아서, 결국 그 이름은 자멸적 성격장애(self-defeating PD)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논쟁적인 위상에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더 많은 연구를 요청하는 의미에서 월경전 증후군과 함께 DSM-III-R의 부록에 추가하는 쪽으로 합의를 봤다. 이후 1994년에 다시 개정되었던 DSM-IV에서는 아예 PD-NOS로 퇴출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찜찜한 뒷이야기가 있는 데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대개 부록에 게재되는 진단명들은 진단코드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임상 현장에서의 활용을 자제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자멸적 성격장애는 예외적으로 301.90 진단코드를 부여받았다는 것. 팔루디가 인용한 한 문헌에 따르면,[26] 학계에서 오프 더 레코드(?) 식으로 주고받던 사적인 대화는 더욱 가관이었다고 한다. 당시 남성 학자로서 피학증적 성격장애 등재에 반대한 사람들은 "여자들에게 굴복할 셈이냐?" 는 조롱을 받았다는 것. 게다가 속칭 "조직의 쓴맛" 은 학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르나르데스는 여성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연임하지 못하는 이례적인 인사조처를 받았고, 그와 같이 일하던 다른 여성들도 이듬해 전부 인사교체되었으며, '숙녀답지 못하게' 굴어서 남성 학자들의 눈 밖에 난 여성 연구원들도 스피처에게 저마다 크고 작은 응징을 받았다는 것이다.

남은 이야기로, 당시 이 개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인물인 스피처는,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아마 이래저래 눈에 익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는 임상심리학 분야에서는 DSM의 대부격인 인물인데, 일찍이 "동성애는 정신병이 아니며, 따라서 DSM에서 삭제해야 한다" 고 꾸준히 압박을 가했던 경력으로 인해 동성애자들에게 감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 인물은 2001년에 "간혹가다 자신의 성적 지향을 변화시키는 사례가 있다" 는 논문을 쓰는 바람에 게이 커뮤니티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이걸로 "변절자"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당시 자신이 인터뷰했던 참가자 중 하나가 반동성애 진영의 전환치료(conversion therapy)에 참여한 이력이 있음을 숨겼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져서, 스피처는 마침내 자신의 논문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게재 철회 요청을 했으나, 저널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2.5. 백래시가 이윤추구를 이기다?

경제학경영학을 접한 적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은 이익에 반응한다" 는 말은 매우 익숙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변용하여 "기업은 돈이 된다면 원숭이라도 기꺼이 고용할 것",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결국 경제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기업이 자꾸 불법행위나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막으려면, 그것이 더는 이익이 되지 못하게 하면 된다", "결국 장기적으로 보아, 소비자의 수요와 선호를 의식하는 공급자만이 시장에서 살아남는다" 는 진술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를 젠더 문제에 질박하게나마 대입할 경우, 흥미롭고도 매우 논쟁적인 추론이 얻어진다. 즉, 성차별과 같은 백래시가 이윤추구의 목표와 직접적으로 상충한다면, 시장에서는 장기적으로 성차별이 소멸될까? 백래시에 관여함으로써 기업은 자신의 이익을 감소시키는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고, 이런 기업들은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장의 다수가 성차별을 한다 해도, 그렇지 않은 기업이 경쟁력을 지닌다면, 결과적으로 너도나도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성차별을 그만둘지도 모른다. 예컨대 방송국들은 여성들이 공감하기 힘든 요조숙녀형 주인공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면 시청률이 떨어진다는 여성단체들의 지적에 대응하여 시장조사를 실시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소비자들이 (여성단체들의 주장처럼) 정말로 주체적 여성상에 더 잘 공감하고 매료된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이를 근거로 좀 더 능동적인 커리어우먼 캐릭터들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 방송국의 더 많은 이윤을 보장할 것이다. 의류 제조사들은 여성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구매할 의향이 있는 옷들을 중점적으로 생산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할 것이며, 여성들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옷은 생산량을 줄이거나 아예 생산을 그만둘 수 있다. 만일 매출이 감소한다면, 공급자는 다방면의 시장조사와 분석을 통해서 소비자들의 선호와 취향이 어떻게 변화해 가고 있는지 예민하게 탐지하려 할 것이다.

...이상의 추론이 교과서 속에서 굴러가는 경제 속에서의 경제적 주체들의 의사결정 방식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성재기 씨 역시 이와 비슷한 요지의 발언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980년대 미국 경제에서는 이런 경향이 나타나지 않았고, 말하자면 오히려 정반대로 흘러갔다. 이번 단락에서 주목할 점은, 백래시는 때로는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비합리적' 이게 만들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겠다.

정말로 재화의 공급자가 재화의 소비자들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상품만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는 애써 귀를 막으려 하는 것이 가능할까? 팔루디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때는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그 산업의 불황과 소비자들의 불만으로 되돌아왔다. 일단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적어도 방송국들의 경우에는 그나마 소비자들의 여론을 들으려는 척이라도 하기는 했다고 하니, 본서의 묘사를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산업 분야마다 그 정도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팔루디가 충분히 많은 사전조사를 했다고 신뢰하는 한, 어느 분야에서도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완벽하게 시장 논리에 입각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가장 극단적으로 완고하게 '소비자들과 척을 지기로 작정한'(?) 산업 분야를 하나 꼽자면 아마 패션업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생각하더라도, 패션 디자이너들은 물론 소비자들의 수요도 생각해야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미학과 예술성 역시 중시하며, 소비자들에게 끌려가기보다는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선도' 하는 것 역시 중요한 자질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남성들이었던) 패션 디자이너들은 여성들이 대체로 추구하는 패션과는 사뭇 다른 옷차림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당장 이미 1947년에 전례가 있었다. 전쟁 중 바지와 헐렁한 옷, 굽 없는 신발의 편안함과 실용성에 매혹된 여성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옷차림을 포기하지 않았고, 패션업계 역시 "여성을 여성답게 하는" 자신들의 디자인 철학을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훗날 "패션 전쟁" 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이때의 갈등 속에서, 《타임》 은 이로 인해 패션업계 주문량이 60%까지 감소했다고 보도했었으며, 여성들은 "무릎 조금 아래 클럽"(Little Below the Knee Club)에 가입해서 패션업계에 압력을 가했었다. 참고로 이때 패션업계를 선도하던 디자이너가 저 유명한 크리스티앙 디오르(C.Dior)였다! 2년간의 전쟁은 결국 디오르가 승리하는 쪽으로 끝났었고, 여성들은 조금 덜 야단스러운(?) 드레스 대신에 더더욱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한 코르셋이라는 타협안을 얻었었다. 그런데 80년대에 또 다시 비슷한 구도가 재현된 것.

사실 80년대의 소위 '트렌드' 는 페미니즘 열풍이 불던 70년대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70년대에는 도리어 직업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성공하고 싶다면,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어라" 라는 파워 드레싱(power dressing)의 메시지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실용적이고 직업적인 용도의 옷을 찾게 만들면서, 점점 드레스 매출량이 줄어들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패션업계에 이는 골칫덩이가 되었는데, 정장은 유행을 잘 타지 않는 반면 드레스는 매번 새로운 유행이 닥치면 새로 사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드레스 시장의 규모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는, 80년대에 드레스 시장을 중점적으로 판촉하기로 한 것은 분명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때 드레스 디자인을 선도하던 디자이너들은 여성들이 어떤 디자인의 드레스를 원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당시 잘 나가던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라크루아(C.Lacroix)는 미국 최상류층 여성들을 타깃으로 하여, '인형 옷차림', '어린 처녀', '여성의 순결함' 으로 표상되는 "고결한 여성성" 컨셉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크리스티앙 라크루아의 드레스 보기 그 결과 이 업계에서는 여성스러운 주름 장식과 우아한 페티코트를 활용해 '어린 소녀처럼', '인형처럼' 차려입는 것이 갑작스레 주목 받았다. 남성들로 구성된 패션 담당 기자들은 "라크루아는 40년 후 다시 태어난 디오르다!" 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문제는, 정작 여성 소비자들은 라크루아의 집착에 가까운 코르셋과 버슬(bustle), 장미꽃 모자, 온갖 요란한 장식이 달린 풍성한 순백색의 드레스에는 흥미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최상류층 여성들이 사교 모임이나 심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간간이 막대한 대금을 지불하며 구입해 주자, 라크루아는 용기를 얻어 더 넓은 기성복 시장을 노리기로 했다. 물론 라크루아의 정신 사나운 장미나비 드레스는 일반인 여성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저자 팔루디는 이런 옷차림이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관건으로, "여성들이 이 옷을 입고 출근할 수 있는가? 적어도, 중요한 자리에는 입고 갈 수 있는가?" 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성들은 적어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예컨대 캐슬린 퓨리(K.Fury)라는 칼럼니스트는 "직장 남성 동료들부터 먼저 유아복(rompers)을 입고 출근한다면 우리도 생각해 보겠다" 면서 '파티 인형' 이 다 되어 버린 여성용 의류의 현실을 비꼬기도 했다. 그러나 남성 도매상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팔루디가 인터뷰한 도매상 로런스 윌스만(L.Wilsman)은 "(우리는 여성들이 이런 옷을 좋아할 줄 알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건 좀 더 진지한 사람으로 비칠 수 있는 옷인 것 같다" 고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디자이너들은 소비자들의 냉담한 반응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답답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여성들에게 정말 제대로 옷 입는 법을 좀 훈계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트렌드(?)의 또 다른 주도자였던 디자이너 아놀드 스카시(A.Scaasi)는 자신의 디자인 철학이 "페미니즘에 대한 전쟁" 이라고 공공연히 말했으며, 업계에서는 페미니즘 때문에 여성들의 패션 센스가 곤두박질쳤다고 불만스러워했다. 즉 "옷은 이렇게 입는 거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여자들은 도통 들어먹지를 않는다" 는 것이다. 디자이너 밥 맥키(B.Mackie)는 페미니즘이 여성들로 하여금 여성의 옷을 입을 '권리' 를 빼앗았다고 주장하며, 여성성의 아름다움을 고갈시켰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패션쇼에서 늘 모델들에게 꽉 끼는 코르셋, 가슴골을 내놓는 상의, 투명한 원단, 짧은 미니스커트를 강요했고, 자신들의 권위를 극대화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사랑스런 어린 딸' 처럼 아장아장 걸으라고 요구했다.[27] 이들이 기준으로 삼은 모델의 신체는 전체 미국 여성의 4분의 1도 채 만족시키지 못하는 비율이어서, 피에르 가르뎅(P.Cardin)의 옷 중 일부는 너무 몸에 꽉 조여서 모델이 팔을 아예 움직일 수 없었으며, 로메오 질리(R.Gigli)의 옷들 중에는 심지어 모델을 구속복처럼 밧줄로 묶어놓은 것도 있었다고. 이런 거 아니다 종합적으로, 당시 남성 디자이너들의 공통된 인식은 "여자들은 우리 생각대로 옷을 입어야 매력적이지, 여자들이 자꾸 남자처럼 옷을 입으면 여성성을 잃을 거다" 라는 것이었다.

대담하게도 소비자들의 수요와 선호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길을 선택한 라크루아에게, 시장은 얼마 못 가서 확실한 매출 실적으로 보답(?)했다. 라크루아의 드레스들은 패션잡지들의 열화와 같은 찬사를 받으며 출시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미국 전역의 백화점들에서 할인 행사에 들어가야 했으며, 한 시즌이 지난 뒤에는 백화점에서 가장 안 팔리는 재고로 분류되었다. 그 결과 1989년에 라크루아 디자인하우스 측에서 발표한 적자는 무려 930만 달러에 이르렀다. 팔루디가 보기에, 당시 시장 자체가 전반적으로 불경기여서는 아닌 것 같았다. 1987년 데이터를 바탕으로 볼 때, 성수기와 비성수기를 막론하고 여성복 판매량 수치만이 비정상적인 하락세를 보였으며, 같은 기간에 남성복 판매량은 도리어 2.1% 증가세였고 주택, 자동차, 외식, 의료서비스 등의 지출 역시 함께 증가하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장의 침체가 일종의 "추가타" 는 될 수 있었다. 동년 10월에 있었던 "블랙 먼데이" 는 침체된 패션시장에 가해진 최후의 일격과도 같았다고.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판매하기를 그만두고 도리어 공급자들이 원하는 것을 판매하려는 이상한 경향은 미용 산업에서도 나타났다. 향수 시장에서 70년대에 여성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브랜드 "찰리"(Charlie)는 당당한 싱글 직업여성 이미지를 내세워서 굉장한 브랜드 충성도를 확보했었다. 헌데 일반적인 기업논리와는 조금 다른 의사결정이 나타났다. 80년대에 이 브랜드가 갑작스럽게 광고를 중단한 것이다. 그 근거는 판매고 하락이나 시장 동향의 변화가 아닌, 제조사 내부의 고위 임원들끼리 "페미니즘의 시대는 지나갔다" 고 주관적으로 추측한 것 외에는 없었다(…). 향수 시장의 동향 역시 '숙녀다운 숙녀', '천상여자', '귀여운 아가씨', '창백하고 가녀린 숙녀', '연약하고 미성숙한 소녀' 쪽으로 흘러갔다. "레브론"(Revlon)이나 "니베아"(Nivea) 등 오늘날에도 이름만 대면 다 알 법한 회사들이 그 주축이었다. 하지만 이 시장의 주요 고객들은 그런 '품위 있고 우아한' 상류층 사교계 여성이 아니라 10~20대 중~저소득층 여성들이었던 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여기서도 그 결과는 처절했다. 1982년에 레브론 사는 이윤의 40% 폭락이라는 기록적인 사태를 맞이했으며, 1988년 4분기에 "에이본"(Avon) 사는 57% 이윤 하락으로 인하여 전체 직원의 3분의 1을 한꺼번에 해고했다.

앞서 소개하기로는 방송 업계에서는 그나마 백래시가 덜하다고 하긴 했지만,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만큼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70년대에 한창 인기를 끌던 여성해방, 낙태, 의식고양 등의 이슈들은 에스터 샤피로(E.Shapiro)와 같은 제작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방송국 고위 간부들의 격렬한 저항에 의해 (시청률과는 무관하게) 폐지 수순을 밟아야 했다. 80년대에 그나마 페미니즘의 의식을 잘 반영했다고 평가되는 〈The Women's Room〉 역시 된서리를 피하지는 못했다. 당초 미니시리즈로 기획된 이 드라마는 "어차피 그런 논쟁적인 건 여성 시청자들을 불쾌하게 만들 게 뻔하다, 시청률이 한 자리 수로 나오면 누가 책임지겠나" 와 같은 압력 속에서 단편 특집으로 축소 방영되는 데 그쳤다. 하지만 단 한 편 방송된 그 드라마는 그 주 사상 최대 시청률인 45%를 기록했다. 나중에 에미상까지 받은 건 덤. 반면 여성들이 죄다 집 안에 머무르는 전통적 가족관을 드러낸 〈Thirtysomething〉 의 경우, 남성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매우 좋았지만[28] 여성 시청자들은 심드렁했다. 이들은 꾸준히 "주인공을 집 밖으로 내보내라" 고 요구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시청자가 아닌 제작자들이 집을 지키는 주인공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그 결과 시청률에 유의미한 타격이 가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고주들은 애타기는커녕 "고급 시청자들에게는 시청률이 높다" 고 고집을 부리면서 애써 태연한 척했다. '시청자들의 니즈' 가 아닌, '제작자들의 니즈' 가 반영된 것이다.

더욱 극단적인 방송가의 사례는 아마 〈Cagney & Lacey〉 일 것이다. 이는 두 명의 강인한 여성이 등장하는 TV 영화로, 작중 몇 번 "젠장" 이라는 대사가 나온다는 이유로 CBS 임원들에게 '저속한 표현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고 불쾌해하는 반응을 얻어야 했다. 어쨌거나 이 TV 영화가 막상 방영되자 여성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의 강인함을 동경했고,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으며, 시청률은 42%를 기록했다. 이에 고무된 제작진은 이 기세를 몰아 TV시리즈로 확대 방영을 추진했는데... 윗선에서 갑자기 잘라 버렸다. 처음에는 거두절미하고 "시청률이 낮다" 고만 둘러대던 임원들은, 제작진의 간곡한 호소에 마침내 "방영 포스터가 고상하지 못하게 저게 뭐냐? 그리고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자들도 거칠어서 보기 싫다"(…)는 꽤나 솔직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고. 하지만 '시청자들의 니즈' 라는 것이 대단하기는 했으므로, 임원들은 타협안을 찾기로 했다. 이 작품의 강인한 여성에 대해 '저속한 여성', '문란한 여성', '하류층 여성' 으로 인식하던 임원들은 이 설정부터 뜯어고칠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두 주인공이 연약하고 의존적이며 조용하고 순결하다는 설정을 덧붙임으로써 '존경할 만한 상류층 여성' 으로 만들어내는 조건을 걸고 방영이 허가되었다. 당시 CBS 부사장 아놀드 베커(A.Becker)는 낙태와 같은 이 드라마의 몇몇 이슈들이 "직장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위협을 느낄 선량한 전업주부 여성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방영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팔루디의 취재에 따르면 당장 베커의 아내부터가 이 영화의 광팬이었고(…)[29] 정작 위협을 느끼던 사람들은 전부 방송 업계의 남성 간부들이었다. 이후로도 이 작품은 1983년에 이 심기 불편한 임원들 때문에 한 차례 폐지되었다가, 시청자들의 재방영 요구가 빗발치자 다시 방영했고, 에미상골든글로브상을 숱하게 수상한 뒤, 1987년에 또 갑작스레 폐지되었다.

물론 앞서 설명한 것처럼, 누군가가 정말로 소비자들의 수요를 정확하게 캐치해서 이들의 효용을 위해 상품을 만들어 판다면, 이 합리적인 공급자는 다른 경쟁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서에 따르면, 그런 사례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80년대 미국의 사회 분위기에서 이 우위는 업계 전반으로 확산되지 못했으며, 늘 편향된 의사결정으로 인하여 부정되고 거부되며 묵살되기 일쑤였다. 모두가 "그런 니즈는 없다" 고 부정하니, 결국 경제학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의사결정임에도 전체 시장에서는 한때 반짝 하고 사라져 버린 인기상품으로 끝나 버리게 된 것.[30]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속옷 시장의 브랜드 "Jockey for Her" 였다. 이쯤에서 한 가지 또 다른 통념을 되짚어 보기로 하자. 혹시 "여성들이 입는 팬티는 죄다 하늘거리는 레이스와 예쁜 리본에 프릴이 달린 연분홍빛 시스루 팬티" 라고 믿고 있다거나(…), 적어도 여성들이 그런 팬티를 다른 밋밋하고 장식 없는 팬티보다는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정말 그랬다면, 아마도 이번 단락을 관심을 갖고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적어도 80년대 미국 여성들은 거의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틈새를 절묘하게 파고들어서 떼돈을 번 케이스가 바로 이 "조키" 브랜드였다. 심지어 여성들 사이에 "조키 입는다" 라고 하면 뭔 말인지 다들 알아들었을 정도.

여성용 속옷 시장에서도 핵심적 주제는 투명한 레이스와 고급 란제리, 섹시한 가터벨트, 뷔스티에, 거들 등이었으며, 이런 퇴행적 변화는 '립스틱 페미니즘' 과 같은 일각으로부터 도리어 페미니즘의 성공으로 포장되기도 했다. "Limited" 사의 사장 하워드 그로스(H.Gross)는 "Victoria Secret" 을 인수한 뒤, "중역 여성들은 업무 회의 중에 자신이 남몰래 가터벨트와 뷔스티에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쾌감을 느낀다" 고 주장했으나, 확인 결과 이 주장은 남성 인원들끼리 진행하는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 나온 포르노급의 상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의외로 단순했다. 실제로 여성들이 자주 찾는 속옷은 편안하게 몸에 맞고, 빨래를 해도 줄어들지 않고, 포근하면서 따뜻한, 평범하지만 속옷으로서의 기본에 충실한 것이었기 때문. 물론 레이스 팬티도 꽤 많이 팔려나가기는 했다... 매대를 찾는 주요 고객들이 아내에게 속옷을 선물하려는 남편들이라는 것만 뺀다면(…). 이런 와중에 속옷 시장에서도 연간 팬티 구매량은 전년 대비 31% 하락했으며, 2년 가량의 시간에 걸친 여러 회사들의 손해를 합산하면 수백만 달러에 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어도 "Jokey International" 사는 이윤추구에 있어 경제학적으로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할 기회가 있었다. 하워드 쿨리(H.Cooley) 신임 사장이 여성들을 위한 실용적 속옷을 만들자고 제안했는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성 고위 간부들과 광고 대행사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 남성들은 입을 모아서 "세상에 레이스 없는 팬티를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느냐" 고 따졌던 것. 그러나 잃을 것이 없었던 이 신임 사장은 일단 부딪쳐 보기로 하고, 마침내 조키 브랜드를 만들었다. 내친김에 광고모델도 죄다 할머니나 여성 항공종사자 등으로 섭외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 신생 브랜드는 이후 5년만에 시장점유율이 40%까지 증가했으며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속옷 브랜드가 되었던 것. 하지만 주위의 다른 속옷 회사들은 조키의 성공을 보고도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 시절에 다른 회사들이 열중하고 있던 신상품은 다름아닌 T팬티였다(…). 유명한 디자이너 오마르 샤리프(O.Sharif)는 "란제리를 보면 그녀가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고 했는데, 이는 이 당시 속옷 시장이 여성 소비자들의 니즈보다는 남성 생산자들의 니즈에 더 치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6. 명예남성들: 위장된 페미니스트

"이들은 개인적인 자유와 젠더 정치에 대한 공적인 입장을 분리시킴으로써, 공식적으로는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개탄하면서도 사적으로는 페미니즘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들이 실제로 '모든 걸 가질 수' 있었던 건, 다른 모든 여성들이 자신들과 같은 기회를 누리지 못하게 저지하는 일에 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보다 더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적인 주류의 직장 여성과 싱글 여성들에게는 그들의 기분을 띄워 줄 응원단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비꼬듯이 흉내 내고, 자신들의 선택에 동정과 조소를 날리고, 자신들의 페미니즘적 '실수' 를 질책하는 대중문화로부터 매일같이 굴욕당했다."
- 본서, p.397 (서술 순서는 나무위키에서 바꿈)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이 시기에 백래시를 가장 강경하게 설파하는 사람들은 근본주의 개신교인들로 구성된 뉴라이트였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홍보 전략으로서, 여성이면서 동시에 안티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인물들을 언론에 대거 내세웠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은 실제로 수많은 미국 여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저자 팔루디는 이들에 대해서,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그들이 모든 걸 다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 여성들은 이미 자신의 삶 속에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기실현의 정신을 체화하고 살아갔기 때문에 여성들이 그런 그들의 삶을 동경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입으로는 페미니즘 타도를 외쳤지만, 실상 이들의 삶의 방식은 페미니즘의 실천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필리스 슐래플리를 먼저 꼽아볼 수 있다. 이 인물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미국에서 "페미니즘은 전염병이다!" 를 강조했던 근본주의 개신교계 여성으로, 오늘날 컨서버피디아를 만든 앤드루 슐래플리가 바로 이 인물의 아들이기도 하다. 슐래플리는 자신의 저서 《The Power of the Positive Women》 에서 마거릿 대처를 포함하여 여러 슈퍼우먼형 여성 인사들을 거론하며 상당한 호감을 표했는데, 이는 어찌보면 오히려 페미니즘적인 행보이기도 했다. 원래 뉴라이트는 "슈퍼우먼들의 신화는 끝났다" 는 백래시의 메시지를 설파하는 진영이었기 때문. 따라서 문제의 책 역시 뉴라이트에 의해서 "배신", "변절", "사상전향", "배교"(…) 같은 소리를 들었어야 할 것 같지만...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뉴라이트에서 거칠고 강한 여성상을 보여주는 여성 안티페미니스트의 다른 예로는 코노트 마슈너(Connaught Marshner)가 있다. 이 인물은 페미니즘 진영에 대해서 "여자들이 사근사근한 맛이 없고 마초 같아졌다" 면서 비난했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본인부터가 그런 마초 같은 성취지향적 인물이었다는 것. 이 사람은 그야말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철두철미한 능력주의 가치관을 가졌으며, 직장에서 굉장히 냉혹하게 일처리를 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이 사람도 물론 정계에서 여성으로서 활동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차별을 받았지만, 자기 자신이 차별받고 있다고 쿨하게 인정하면서도 "어 나 그거 아는데, 내가 내 실력으로 얼마든지 돌파해 보일 거야, 내가 다 짓밟고 올라간다"(…) 식으로 공공연히 반응했다고... 차별의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 차별을 대놓고 긍정하며, "난 해당사항 없는데, 여자들은 원래 안 돼" 라고 오히려 맞장구치는 인물이었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성격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뉴라이트 내부에서 여자가 돼 가지고 조신하지 못하다는 식의 지적 정도는 나왔어야 할 것 같은데... 역시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삶과 온몸으로 뉴라이트의 메시지를 거부해 보이는(…) 뉴라이트 여성들은 더 있다. 이번에는 엘리자베스 케플러(Elizabeth Kepler)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 인물은 국가의 어린이집 지원 제도를 반대하는 로비에 앞장섰던 사람이었는데, 여성들은 다시 부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던 자신의 지론은 유독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케플러는 자신이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권력에 대한 흥분감" 때문이라고 말했으며, 전통적 여성상의 대의에는 동감한다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만큼은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밝혔다. 심지어 케플러는 자신이 로비를 벌이는 것 자체에조차 진심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팔루디의 인터뷰에 따르면, 케플러는 자신이 20대 후반임에도 싱글 여성이자 정치인이라는 현재의 상태에 아무 불만 없이 만족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어린이집에 자녀를 위탁하는 것이 그리 싫은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 그러나 자신의 솔직한 심정이 어떻든 간에, 케플러는 늘 뉴라이트 세력의 입법적 압력에 있어 최전선에서 뛸 수 있었다.

사실, 이쯤되면 뉴라이트 진영이 대체 제대로 피아식별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보일 수 있다. 이들의 피아구분 기준은, 어떤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입장이 페미니즘적인가 아닌가의 여부도 아니고, 그 사람이 자신의 삶으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가의 여부도 아니며, 심지어 그 사람이 여성으로서 직업을 갖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가조차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여왕벌형 여성들이 자신들의 조직의 심장부에서 천하를 호령하는데도 조직 내부의 남성들은 어떤 반발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젠더 정체성 정치의 관점에서는 조금 맥빠지는(?) 기준을 갖고 있었다. 뉴라이트 진영은 어떤 사람이 근본주의 개신교를 긍정하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그가 아군인가 적군인가를 따졌다.

당시 근본주의 개신교 여성들의 선망의 아이콘이었던 비벌리 라헤이(Beverly LaHaye)를 살펴보자. 이 사람은 위에서 설교 시간에 자기 폭력 전과를 자랑했다고 소개됐었던 그 인물, 팀 라헤이의 아내이기도 하다. 라헤이는 사실 페미니스트들이 상당 부분 동감할 수 있는 인생의 궤적을 거쳐 왔다. 자신의 저서이자 개신교 배경의 자기계발서인 《The Spirit-Controlled Woman》 에서 묘사되는 회고를 보면, 라헤이 역시 일찍이 베티 프리댄(B.Fridan)이 《여성의 신비》 에서 제기한 바로 그 "말할 수 없는 문제" 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직업을 갖고 주체적으로 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은 남성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몰랐다. 라헤이는 상당히 교묘하게 말을 바꾸었다. "여성들이여, 페미니즘을 배워서 자신감과 능력을 갖추라" 가 아니라, "여성들이여, 성령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 자신감과 능력을 갖추라" 라고 선전했던 것. 저자 팔루디는 이것이 개신교 교리를 껍데기로 뒤집어 씌워서 위장한 자기실현 욕망의 표상이라고 하였다. 심지어 라헤이는 《The Act of Marriage》 에서 직장 내 성희롱의 배격, 여성주도적 섹스, 클리토리스 오르가즘, 피임 등을 (개신교적 용어로) 솔직하게 다루었으며 이 모든 것에 전부 찬성했다! 본질은 더할 나위 없이 페미니즘적인 메시지인데도, 그 위에 근본주의 개신교인들이 좋아할 만한 자기계발 용어들을 덧붙이자 그 시대의 안티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사격중지! 아군이다!

그 외에도 뉴라이트 조직 사무실들을 돌아보면 이들의 평소 메시지에 비추어볼 때 가관인 가족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빨래를 하고 아내가 자동차 오일을 교체하는 집안, 아내가 뉴라이트 정치 활동을 하느라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남편이 진공청소기를 돌리는 집안, 이런 비슷한 케이스가 수두룩했다고. 이들 여성들은 입으로는 안티페미니즘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갔다. 페미니스트들이 아무 맥락 없이 이들을 목격한다면 더없이 젠더 평등한 집단이라고 찬사를 보낼 수 있을 정도. 그리고 이들의 독립성이 어디까지나 "페미니즘이라는 사탄과 맞서 싸우는 거룩한 영적 전쟁" 을 위한 것이라면, 뉴라이트 남성들은 이들에게 기꺼이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미국 사회에서 젠더 전쟁의 이면에 깔려 있는 종교적 동기가 얼마나 문화적으로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의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뉴라이트의 사회적 저변의 확대와 지지를 위해서, 전통적 여성상이라는 더 큰 대의를 위해서 부득이 자신들의 모성과 가정 내 역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팔루디의 취재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런 여성들은 심지어 뉴라이트 운동 현장과 조직 내부에서조차 자기 남편들을 공공연히 무시했다. 처음에 뉴라이트 남성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확산시키기 위해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래도 자기 아내들이라면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게 따르려니 하고는 요직에다 자기 아내들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결과 부엌 일밖에 모르던 이 현모양처 '사모님' 들은 권력에 각성했다(…). 처음에는 남들 앞에 나서기도 부끄러워하던 천상여자 스타일의 새침한 새댁이, 나중에는 권력욕에 들떠서 남편에게 복종하기는커녕 남편을 짓밟고 올라서서 강자의 유열을 만끽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거, 앞서 말한 그 비벌리 라헤이 얘기다(…). 이 양반은 결국 "Concerned Women for America" 의 예산의결권과 법률대응권, 해외 진출 등을 총괄하더니 마침내 1987년에는 종신 회장직에 올랐다! 뉴라이트 조직 이곳저곳에서, 남편이 지시한 사항을 남편 보는 앞에서 아내가 전화 한 통으로 취소시키고, 대놓고 남편의 말은 듣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가 하면, 하급자들이 남편의 권위보다 아내의 권위를 더 높게 여기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비슷한 경험을 회고한 또 다른 우익 운동가 여성 로즈메리 톰슨(R.Thomson)은, 자신이 정치적 영향력을 갖기 전에는 자신이 이런 활동을 대범하게 할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여성으로서 안티페미니즘적인 관점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거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간의 관심을 모을 수 있었기에 그 파급력이 컸다. 그래서 뉴라이트 남성 인사들은 이들의 지배적이고 권위적인 횡포에도 차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던 것일 수도 있다. 실비아 휴렛(S.A.Hewlett)은 《A Lesser Life: The Myth of Women's Liberation》 의 저자이자 스스로를 네오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여성으로, 최근의 페미니즘이 역효과를 초래한다고 비판하여 언론들의 카메라 마사지를 받았다. "최근에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비판적이다" 라는 주장을 어떠한 근거도 없이 내세워서 인기를 얻은 이 인물은, 자신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한 페미니스트의 양심고백" 이라는 언론의 프레임과 함께 단숨에 권위자의 위치에 올랐으며, 미국 내 토크쇼 110개를 모두 순회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안티페미니스트로 유명세를 얻은 다른 여성인 카밀 파야(C.Paglia) 역시 거론해볼 수 있다. 이 인물은 《Sexual Personae》 에서 적나라한 비난조로 페미니즘을 공격함으로써 유명세를 얻었는데, 그 이전까지 거의 인지도가 없었던 이 인물은 단숨에 주요 일간지 표지를 장식하며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동기는 (본인도 인정하듯이) 학계의 페미니스트 동료들에 대한 앙심이자 복수라고 하였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종신 교수직도 얻지 못했으며, 출판사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무시를 당했기에 복수를 하겠다는 얘기(…). 물론 언론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리 없었고, 대중은 (아마도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즈 이전까지) 페미니즘 비판론자 하면 으레 카밀 파야부터 떠올렸다.

그러나 이처럼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우익 여성들도 일단 뉴라이트 진영의 궁극적 목표인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에 성공한 뒤에는 곧바로 토사구팽당하고 말았다. 뉴라이트 여성들은 레이건 집권 후 백악관에 진출할 것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여성들은 정계 및 법조계에서 밀려났으며, 재선 후에는 그 비율이 더욱 급격하게 감소했다. 여성 관련 부처들이나 기관들은 예산이 삭감되거나, 지원금이 끊어지거나, 조용히 해체되거나, 여성 임용이 감소하거나, 실권을 빼앗겼다. 백악관에 진출한 얼마 안 되는 여성들, 예컨대 최초의 여성 유엔대사가 되었던 진 커크패트릭(Jean Kirkpatrick)은 백악관의 가혹한 성차별을 견디다 못해 사표를 쓰고 나갔으며, 페이스 위틀지(Faith Whittlesey)는 문자 그대로 짐이 든 상자와 함께 백악관 밖으로 내쫓겼다고(…). 예외적으로, 여성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 이루어지는 반여성적 법안들의 홍보에 있어서는 여성 임용이 유지될 수 있었다. 예컨대, 낙태에 관련하여 '통고 규정'[31]을 홍보할 때에는 여성들이 나서서 그 필요성을 해명해야 했다. 또한, 가정폭력 문제에 공권력이 개입하여 가해자를 격리하고 피해자를 재활시키는 프로그램이 대관절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건전한 가정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이유로 중단될 때에도, 일선에서 시민들에게 이를 알리며 쩔쩔매는 일은 전부 여성들이 도맡아 했다고 한다.

2.7. 페미니스트 수정주의자들

저자는 백래시의 시대에는 페미니스트들 역시 사기가 떨어져서 패배의식에 가득차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80년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뭔가 심상찮은 기류가 감지되고 있었다. 페미니즘의 상층부에서, 소위 "빅 마우스" 로 알려진 유명한 페미니스트들이 하나 둘씩 백래시에 동참하는 듯한 태도 선회를 보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뭔가 크게 일을 그르치고 있으며 방법론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고, 동료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유명한 인물들이 그렇게 주장하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훗날 여성학자 주디스 스테이시(J.Stacey)는 80년대의 포스트페미니즘 시류 속에서 어려움에 직면한 인사들이 그 고통을 타깃팅할 대상을 찾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게다가 페미니즘 내부에서는 70년대에 논의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흐름도 감지되고 있었다.

먼저 살펴볼 인물은 이 시대의 최고존엄(…)급의 페미니스트이자 오늘날까지도 교과서들에서 권위 있는 사상가로 소개되고 있는 그 사람, 베티 프리댄이었다. 프리댄은 일찍이 전미여성기구(NOW)의 창설을 주도했으며, 《여성의 신비》 를 통해 페미니스트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은 바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80년대에 프리댄은 뜻밖의 주장을 펼쳤다. 그의 저서 《The Second Stage》 는 저자에겐 수정주의적 시각을 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의 기존 주장을 재서술하는 등 혼란스러운 논지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댄의 주장은 이랬다. 남성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알파 스타일"(alpha styl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며 수직적인 방식을 따르지만, 여성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베타 스타일"(beta style), 즉 자발적이고 우호적이며 친근한 방식을 따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프리댄이 보기에, 70년대를 거쳐 오면서 래디컬 페미니즘 세력에게 장악당한 페미니즘 진영은, 점차 기존의 베타 스타일이 아닌 알파 스타일로 '변질' 되어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 진영이 남성적인 방법론을 채택함으로써, 자신들이 비판하는 대상과 점점 닮아가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프리댄은 자신의 분석에 반발하는 페미니스트들은 70년대 특유의 극단적이고 반동적인 흐름을 따르는, 왜곡되고 일차원적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평범한 듣보잡(?)이었다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코웃음치고 넘겼을 주장이었어도, 하필이면 그 프리댄이 이런 말을 하는 바람에 미국 페미니즘 진영은 발칵 뒤집어졌다.

저자 팔루디가 래디컬 페미니즘 세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거나 옹호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저자가 주목한 부분은 약간 다른 곳에 있었다. 프리댄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베타 스타일이 없다" 고 말하긴 하지만, 저자는 실상 그들이 프리댄의 지시에 잘 따르지 않아서 프리댄의 알파 스타일에 대한 욕망(권력욕)을 좌절시킨 것이라고 분석한다. 다시 말해서, 프리댄의 주장은 현재 여성운동이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신중한 고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여성계 내부에서의 사내 정치(?)와 권력 암투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32]

해당 도서에서 프리댄은, 여성운동 진영에서 자신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던 경험들을 이상하리만치 자주 거론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프리댄은 이미 1970년대에 NOW 회장직에서 물러나던 때의 연설에서 "내가 여러분을 역사로 이끌었다" 고 운을 뗐을 정도로권력추구적이며 '' 의 발화법에 익숙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기성 페미니스트의 대표격으로서 프리댄은 NOW를 사실상 자신의 수족처럼 부렸으며, 점점 프리댄의 말을 안 듣는 구성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아래에서 보는 것 처럼 그 베티 프리댄의 말을 안 듣는 집단은 밸러리 솔라나스를 미화하는 인물이었고 베티 프리댄은 오히려 밸러리 솔라나스 미화를 거절하던 인물이란 점에서 팔루디의 주장에는 신빙성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G.Steinem)을 비롯한 래디컬 페미니즘을 따르는 소장파 페미니스트들은 베티 프리댄의 말을 듣지않았다. 이들 발칙하고 재기발랄하며 유쾌한 '영페미' 들은 "그런 남성혐오적(man-hating)인 과격한 방법론으로는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없다" 고 뜯어말리는 프리댄의 지시에 잘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도, 팔루디는 프리댄이 이들에게서 권력의 위협을 느꼈다고 분석한다. 스타이넘 등이 70년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자, 프리댄은 이것이 소장파 페미니스트들의 쿠데타 음모라고 이상하게 받아들였으며, NOW 내부에서 자신의 '영이 서지 않는' 상황에 대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작당질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프리댄은 뒷방 할머니(…) 취급받을 만큼 한물 간 인사는 전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방법론(예를 들면 살인미수범 밸러리 솔라나스의 미화를 거부하는 정상적인 사상) 을 따르지 않는 구성원들일 뿐인데, 그들이 자신을 뒷방 할머니 취급한다고 믿었던 것이 문제였다는 것. 사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프리댄의 시각은 뉴라이트의 시각과 상당히 닮은 점도 있어서,[33] 프리댄과의 갈등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당시의 영향력 있던 페미니스트들 중에 페미니즘의 정신을 저버린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은 프리댄 이외에도 더 있었다. 저 유명한 페미니즘 고전 《여성, 거세당하다》(The Female Eunuch)의 저자인 저메인 그리어(G.Greer)가 한 사례. 원래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여성들의 섹슈얼리티가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억압되고 있는지를 고발함으로써 페미니스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며, 사실 그 책 자체가 오늘날에도 탐독되는 페미니즘 서적들 중 하나로 당당하게 꼽히고 있다. 그런데 그런 저메인 그리어가 80년대에 동료들의 뒤통수를 야무지게 후려갈기는 행보를 보였다. 그는 《Sex and Destiny》 에서 성적 자유 이데올로기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공연히 중매결혼, 순결, 차도르, 아기방, 부엌데기를 옹호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심지어 이후 출판한 자신의 회고록 《Daddy, We Hardly Knew You》 에서는 어지간한 뉴라이트 인사들 이상으로 어머니를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했다. 해당 책에서 그리어는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거침없이 "주방의 미친개"(…)라고 불렀을 정도.

페미니스트 중에서 강간 문제의 심각성을 사실상 처음으로 대중화시켰던 인물, 수전 브라운밀러(S.Brownmiller) 역시 이때에는 의아한 행보를 자주 보였다. 그의 대표작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Against Our Will)는 강간 피해자가 "자기도 즐겼을 것", "자기가 먼저 유혹한 것", "생각이 있었으니까 따라간 것" 이라는 비난을 받는 현실을 고발한 책으로, 역시 오늘날까지도 강간에 대한 여성학적 논의를 할 때 빠지지 않고 늘 인용되는 도서가 되었다. 그런 브라운밀러는 1984년에 쓴 책 《Femininity》 에서, 페미니즘이 남녀 간의 생물학적인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물론 이것 자체만으로는 신중한 학술적 선긋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브라운밀러는 자신의 기존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발언을 해서 난리가 나기도 했다. 또 다른 문헌인 《Waverly Place》 에서는 가정폭력으로 인해 여성이 사망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 "피해자가 잘못한 것" 이라고 미리 덮어놓고 단정지었던 것이다. 물론 사법 당국의 판단 결과 정말로 피해자가 잘못한 게 맞는 걸로 확인되었다거나 해서 이를 수용한 거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 책이 출판되던 당시의 사법부는 아직 판결을 내놓지 않은 상태였다. 어찌됐든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는 "무슨 지거리야!" 가 절로 나오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런데 브라운밀러가 남녀 간의 생물학적 성차가 존재한다고 말한 부분은, 실제로 80년대의 페미니즘의 동향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는 '트렌디' 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었다. 80년대 초에 새롭게 떠오른 조류의 페미니즘은 속칭 관계적 페미니즘(relational feminism)이라고 하며, 브라운밀러의 생물학적 성차 언급도 그렇고 앞서 말했던 프리댄의 베타 스타일 언급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관계적 페미니스트들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확실히 서로 다르며, 이러한 성차를 평등의 실현에 있어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여성들에게는 남성들에게는 없는 "돌봄의 윤리" 나 "맥락적 사고" 가 존재하며, 이런 여성적 덕목들을 개발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정신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34] 오늘날에 특히 국내에서는 "양성 사이에 서로 다를 것은 없다! 차이는 오직 가부장적 사회화로부터 만들어진다!" 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메시지와 "여성은 남성보다 더 우애적이고 다정하며 연대의식이 강하다! 이는 여성운동을 하는 여성들의 자산이다!" 라는 관계적 페미니즘의 메시지가 이래저래 뒤섞여 있지만, 사실 두 입장은 양립 불가능하며, 시기로 따지자면 후자가 조금 더 늦게 나타났다는 것. 팔루디가 주목하는 것은 관계적 페미니스트들이 남녀 성차를 고려하지 않은 평등 요구가 "단세포적" 이라고 발언함으로써 80년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는 점이다.

그런 인기를 끌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만한 사례가 바로 여성심리학자 캐롤 길리건(C.Gilligan)이었다. 그는 여성의 마음에서 "여성적 돌봄" 의 가치를 크게 강조했던 인물인데,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80년대 들어서 페미니스트들이 이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책이 바로 길리건의 대표작 《다른 목소리로》(In a Different Voice)였다. (앞에서부터 대표작이라고 소개하는 책들 전부 다 페미니즘 분야에서는 희대의 필독서들이다.) 이 책은 하인츠 딜레마로 대표되는 심리적 도덕성 발달 연구가 남성중심적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며, 기존의 하인츠 딜레마는 여성들의 도덕성이 마치 남성들의 그것보다 "미성숙하다" 고 믿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이 책은 대중들에게도 읽기 쉬우면서도, 평론가들에게도 호평 받을 만큼 우아하고 고급스러우며 잘 읽히는 문체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팔루디는 이러한 성차 연구의 흐름이 페미니즘에게는 기회인 동시에 위협이라고 본다. 남성과 여성의 어떤 능력에 대해 "특별하다" 는 표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남성과 여성을 각각 한계짓는 표현으로 변화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엘렌 듀보이스(E.DuBois)는 관계적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덕목을 페미니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여성의 삶과 의미를 낭만화하며, 집 안에 갇힌 여성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길리건이 주장한 돌봄의 윤리 역시, 저자는 여성들이 돌봄의 도덕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충분히 사회적 권력관계의 압력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여자애들은 서로 챙겨주고 돌봐주는 거야" 라는 사회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길리건 본인조차 서문을 통해 그런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했음에도, 이것이 논의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바람에 뉴라이트 인사들과 백래시 지지자들에게 크게 오용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학술적으로도 길리건의 행보는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기존 연구의 표본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했음에도 자신의 연구에서 또한 대학 2학년 문제를 저지르기도 했으며, 낙태에 대한 여성들의 도덕적 선택을 연구할 때에는 심지어 통제집단조차 없는 N=29의 소표본을 선정하기도 했다. 또한 발달심리학자 로런스 워커(L.Walker)의 메타 분석에 따르면,[35] 실제로는 도덕적 추론에 있어 성차가 전반적으로 재현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길리건은 그러나 자신은 여성의 미성숙함에 대한 통념을 비판하는 것이 목적이며 성차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고 반론하였다. 아무튼 길리건은 이런 한계 많은 연구들이 자꾸 반페미니스트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에 대해 여성학 저널 《Signs》 에서 개탄하기도 했고, 기존의 저서에 개정판을 낸다면 그때는 사회화의 측면을 추가할 의향이 있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이는 물론 언론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학계 내 논의로만 남게 되었다.

2.8. 남성 권익 운동가

이 시기에 각계각층의 전문가 계층이나 대중 작가들의 동향은 남성들에게 자신의 무너지고 상처 입은 남성성을 다시 회복할 것을 독려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에서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저서로 유명한 철학자 앨런 블룸(A.D.Bloom)이나,[36] 페미니즘을 "반민주적 사상" 이라고 공격한 《Feminism and Freedom》 의 저자 마이클 레빈(M.Levin)과 같이,[37] 남성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페미니즘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안티페미니즘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한 철학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페미니즘이 "남성들을 정신적으로 쪼그라들게 만드는 보편적 거세행위" 이며, "이 땅 위의 신성의 상징이자 권위의 담보자인 아버지를 향한 숭배가 오늘날 사라졌다" 고 주장했고,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입을 여는 것조차도 남성들의 특권과 지위를 잃어버리게 만든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하지만 또 일각에서는 현대사회의 많은 남성들이 자존심이 무너진 채 축 처져 낙오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데 초점을 맞춘 인물들도 있었다.

팔루디가 본서에서 안티페미니스트로 분류하긴 했으나, 당시의 유명한 작가 조지 길더(G.Gilder)를 우선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친레이건 성향의 보수 작가로, 자신의 문학적 성취 이외에 사회평론 활동에 뛰어드는 것에도 의욕을 불태우는 인물이었다. 처음에 그다지 인지도가 없었던 그는 당시만 하더라도 중도보수에 속했고, 중도적 성향의 공화당원들이 읽는 기관지 《Ripon Forum》 에 보육법안 거부권 행사를 조심스레 옹호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글로 인해 페미니즘의 적으로 남성들 사이의 명망과 여성들 사이의 악명을 동시에 얻었고, 길더는 자신이 두각을 드러낼 기회를 찾아냈다. 곧바로 그는 극우로 전향했으며, 《Sexual Suicide》, 《Naked Nomad》, 《Visible Man》 등을 연달아 출간하면서 30대 미혼 남성들의 괴로운 처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이들의 남성다움의 상처를 강조했다. 다른 안티페미니스트와는 달리, 길더는 싱글 여성이 싱글 남성보다 행복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 이유를 "남성이 진짜 사나이가 되려면 가족을 먹여살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는 데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남자가 결혼을 못 하면 개코원숭이 같은 야만인이 되어 버린다는 것(…). 따라서 불행한 싱글 남성은 그에게는 애써 무시할 현실이 아닌,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동정과 연대의 대상이었다.

국내에도 꽤나 잘 알려진 인물인 남성 권익 운동가를 꼽아 보자. 남성 운동가 하면 첫손에 거론되곤 하는 인물인 워런 패럴(W.Farrell)은 80년대에 자신의 신간 《Why Men Are the Way They Are》 를 주제로 전미의 대학에서 강연을 돌던 유명인사였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70년대에는 가히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페미니즘 옹호 활동을 하던 인물이었다는 것. 실제로 그의 초창기 저서인 《The Liberated Man》 을 보면 그가 페미니스트라고 불려도 문제가 없어 보일 정도로 강도 높게 남성성 개혁을 부르짖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가정주부로 평생을 바친 모친이 늘 우울해하다 마침내 비극적으로 타계한 것과 관련하여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울분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시카고 트리뷴》 에 따르면, 패럴은 "남성 해방 운동의 글로리아 스타이넘" 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그러나 70년대만 하더라도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성은 남성을 상처입힐 뿐이다" 를 설파하던 패럴은, 80년대 중반에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서, "이제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한 억압을 받는 시대가 왔다" 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결혼에 기초한 전통적 가정이 남녀 모두에게 유익했으나, 페미니스트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여성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 안티페미니즘의 메시지에 열광하던 남성들이 그의 독자가 되어서 열렬한 성원을 보냈으며, 페미니즘 측에서는 그와의 교류를 일절 중단해 버렸다. 그런데 본서에서 팔루디가 패럴을 인터뷰하는 내용을 보면 꽤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저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패럴은 전혀 페미니즘에 대해 적대한다는 입장이 아니며, 도리어 그들과 교류를 지속하고 싶어했다. 특히 그는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상심하고 있었으며, 페미니즘 진영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38] 저자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서술상의 대조를 통해 볼 때, 페미니스트들의 이런 거부는 패럴의 독자층이 안티페미니스트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무렵에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한 남성 운동가는 또 있다. 미국의 시인이자 마스큘리스트인 로버트 블라이(R.Bly)는 이게 정말 동일한 인물의 행보가 맞나 싶을 정도로 180도 방향전환을 한 인물이다. 원래 그는 미국에서 유명한 평화주의자 시인이었다. 그는 1967년에 자신의 《The Light Around the Body》 시집으로 문학상을 받을 때, "미국 문화만큼 훌륭한 베트남 문화를 짓밟는 주제에 우리가 어찌 미국 문화의 우수함을 자축한다는 말이냐!" 라는 패기쩌는(…) 간지폭풍 일갈을 날려서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그의 반전주의의 접근 방식은 인류의 평화를 이루는 데에는 여성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를 따랐다. 즉,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억압되지 않은 여성성을 통해서 전지구적 평화를 이끌 수 있다는 지론이었다. 그는 미국 젊은이들에게 월남전 징병 도피를 공공연히 독려했으며, 한편으로는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 회의를 이끌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무구한 심성의 젊은 시인이 어쩌다가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을까? 팔루디는 80년대 들어서 평화 운동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블라이가 무력감을 느꼈고, 그 원인을 자신이 "지나치게 여성적인 남성들" 과 어울리다 보니 강단 있게 자신의 메시지를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쪽으로 돌렸다고 분석한다. 즉, 블라이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남성적이고 폭력적인 부분도 문제인 만큼, 지나치게 여성적으로 변해 가는 것도 또 다른 불균형이라는 문제를 초래했다는 것. 그 결과 "소년이여, 전사가 되어라!" 라는 자신의 새로운 슬로건 아래에서, 한때 평화주의자 시인이었던 블라이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블라이 역시 관점을 바꾸면서 80년대 언론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관심과 유명세를 얻었고, 돈도 정말 많이 벌었다. 그는 자신이 새롭게 갖게 된 생각을 바탕으로 저술한 마스큘리즘 저서 《Iron John》 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곧바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으며, (원래는 그림 형제의 동화에서 유래한) "강철사나이 존" 이라는 제목은[39] 그 자체로 야성적이고 강인한 신남성을 표상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가 주도하는 야성 체험 프로그램은 80년대 후반에는 5만 명의 각계각층의 남성들이 참석 경험이 있을 만큼 유명해졌다. 블라이의 야성 체험 방법론은 칼 융분석심리학을 접목한 것으로, 원초적 남성성에 대한 집합적 무의식을 깨워내는 것이 그 목표였다. 그의 집회에서는 백스테이지에서 끊임없이 콩가 드럼이 둥둥거리며 연주되었고, 참석자들은 야생동물 가죽 망토를 걸치고, 크고 거친 돌로 헤르메스 석상을 만드는 활동을 하거나, "바이킹 자세" 등을 통해서 '내면의 야수를 깨우는' 활동을 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그의 대중 강연에서도 요란한 샤우팅과 으르렁거림은 아주 예사였다.

한때 페미니즘과도 접점이 있었던 그는, 적어도 본인의 말에 따르면 페미니즘에 대해 자신이 유화적이며, 악감정이 없다고 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지 두 운동이 평행하게 서로 공존하는 것이라고. 저자가 왜 남성성 회복 프로그램에 여성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여성이 없는 환경에서만 남성들이 정직하게 자기 내면의 야수를 발견하고 깨워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에 따르면, "이 나라에 전사를 위한 장소는 없다" 는 것. 그러나 팔루디는 본서에서 블라이가 간접적으로 페미니즘에 책임을 돌린다는 찜찜한 느낌을 받았던 듯하다. 블라이의 분석심리학적 신화 치료법에는 종종 마녀가 등장하는데, 남성들에게 이는 페미니스트 내지 해방된 여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또한 그는 페미니스트들이 남성들을 과도하게 나약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부드러운 남성이 문제이고, 남성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라고 한다면, 어째서 페미니즘의 성취를 지지하고 그들에게 유화적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팔루디가 만찬 자리에서 블라이에게 "페미니스트가 남성들을 나약하게 한다는 근거가 있느냐" 고 묻자, 블라이는 "근거는 필요없다, 뇌를 쓰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면서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도 뇌피셜을 펼치다가 누가 이를 지적하면 이 한 마디를 인용하면서 화려하게 자폭해 보자. 응?

마스큘리즘, 즉 남성성 운동에 대해 페미니즘 분야에서는 다소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다. 초창기 마스큘리즘은 본서에서도 종종 암시되듯이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으며, "가부장적 남성성은 남성들에게 좋을 것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던 '남자다움' 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져야 한다" 는 메시지로 남성들에게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래디컬 페미니즘이 득세하는 동안 남성들은 변화에 대한 공감보다는 변화로 인한 피로감을 더 많이 느꼈고,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정체성 정치를 통해서 자신들을 적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이후로 오늘날까지, 마스큘리즘 내지는 남성권익운동(MRM; Men's Right Movement)의 흐름은 대부분 "현대사회에서 남성들은 수많은 상처와 책임과 고통을 견디면서 살아오고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쪽으로 모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그 책임은 남성들의 자존심을 꺾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있다" 고 말하면서 안티페미니즘 측과 손을 잡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이런 남성들의 문제에 대처하는 것 역시 페미니즘을 받아들인 남성들이 해야 할 몫이다" 라면서 페미니즘 측과 손을 잡기도 한다. 페미니스트들 역시 의견은 꽤나 갈리는 편이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여성문제의 근본적인 처방도 불가능하다" 면서 남성성 개혁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나,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우리가 왜 너네들 밥까지 일일이 떠먹여 주어야 하냐?" 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이처럼 양측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확고하기보다는 상당히 미묘하게 다양화되는 것은, 페미니즘에 대해 일방적인 짝사랑을 드러냈던 패럴이나, 암묵적으로 페미니즘을 비난했던 블라이를 통해 본다면, 80년대에도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9. 낙태 논쟁과 A.C. 사망 사건

낙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문제는 굉장히 논쟁적이며, 그 중에서도 팔루디는 본서에서 낙태를 전면적으로 합법화하는 쪽을 지지하고 있다. 오해가 없도록 첨언하자면, 팔루디 역시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와 같은 신중한 윤리학적 및 생물학적 난제가 개입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팔루디의 관점에서, 80년대 미국의 낙태 논쟁은 그렇게 차분하게 심사숙고하는 방식으로 굴러가지는 않았다. 적어도, 언론에서는 신중한 견해들 위주로 보도되었지만, 정작 낙태 반대 진영은 여성에 대한 반감과 울분을 동력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현대에도 현재진행형인 낙태 논쟁에 관련하여, 설령 낙태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이런 과거의 경험에 대해서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입장을 더 정교하게 업데이트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대중적으로 낙태 반대 진영의 이미지는 노년층 근본주의 개신교인을 연상하게 하지만, 팔루디가 실제로 파악해 본 결과에 따르면 이 진영의 주축이 되는 인구집단은 20~30대 저소득층 남성이었다. 다시 한 번,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젊고 화난 안티페미니즘 남성들' 과 인구학적으로 대단히 유사했다. 이들은 "태아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사회의 안정을 위해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와 같은 점잖은 논리를 동원하지 않았으며, 설령 그런 걸 들이대더라도 사석에서는 말이 전혀 달라지곤 했다. 팔루디는 이들이 남성들이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할 가부장적 권력이 축소되는 것에 대해 억울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자녀의 생산에 대한 결정권을 여성이 "빼앗아갔다" 는 데 불만을 느낀다는 것.

그 근거로서 팔루디가 제시한 사례들을 보면, 많은 낙태 반대자들은 겉으로는 "영아살해자" 라고 비난하면서도 사석에서는 낙태 여성들을 창녀라고 비난했다. 낙태 후 이혼 소송들의 속기록을 보면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졌다", "아내가 애를 낳으라는 내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아내가 내 뜻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낙태를 했다", "내가 낙태를 못 하게 하니까 이혼하려는 것이다" 와 같은 하소연들이 빗발치는 걸 볼 수 있다고. 이들은 자녀를 몇 명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자신들만이 통제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The American Spectator》, 《Grand Illusions》 등의 낙태 반대 서적들에서는 그 통제력에 위협을 가한 주체를 페미니즘으로 명시했다. 페미니즘이 여성들에게 성적 자유와 출산 선택의 자유를 주었기에, 생물학적 아버지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낙태와 피임, 혼전 성관계 등을 전면 반대하는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랜들 테리(R.Terry)는[40] 공식적으로 페미니즘에 중립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하는 행동은 여지없이 안티페미니즘적이었다.

앞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낙태 반대 운동 역시 언론에 의해서 굉장한 특혜를 받아 누렸다. 도미노피자 당시 회장이었던 토머스 모나한(T.Monaghan)은 "우리 피자를 주문하면 낙태 반대 시위에 대한 최신 정보가 담긴 전단지를 함께 드립니다"(…)를 마케팅에 포함시켰으며, 뉴욕 자이언츠 당시 소유주였던 웰링턴 마라(W.Mara)는 〈Champions for Life〉 라는 낙태 반대 비디오를 만들어서 학교에서 시청하도록 배포했다. 낙태 옹호 영화 〈Abortion for Survival〉 의 광고포스터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와 《워싱턴 포스트》 에 의해 "너무 논쟁적" 이라며 게재 거부 통지를 받았으나, 낙태 반대 영화인 〈침묵의 절규〉 는 여러 텔레비전 네트워크들에서 그 '논쟁적' 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방영이 수락되었다. 하지만 팔루디는 실상 미국인들의 여론은 오히려 낙태 옹호 입장이 다수였다고 지적한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심지어 가톨릭 교인들의 낙태 찬성론 비율이 백인 저소득 남성층의 찬성론 비율보다 더 높았다고.

80년대 미국 사회에서 낙태 반대론의 특징은, 팔루디에 따르면, 문제를 모체 대 태아의 구도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태아의 권리는 온전한 성인의 그것으로 존중하면서도 모체의 권리는 수동적이고 대상화되며 무생물적인 환경으로 여겨 존중하지 않았다. 즉, 태아는 이들에게 늘 '작지만 사색적인 성인' 으로 묘사되었으며, 자궁 속에서 늘 외부 세계를 동경하는 지성을 갖춘 존재로 그려진 반면,[41] 모체는 그저 이들이 잠깐 머물다 가게 될 임시 거처인 것처럼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심지어 법적인 수준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보였다. 1980년대 말에 태아는 실제로 살아 있는 아동에 비해 더 많은 법적 권리를 가졌으며, 뉴햄프셔 주에서는 태아를 보험금 수령 자격이 있는 '세대 거주자' 로 인정했고, 테네시 주의 한 법원에서는 최대 8개의 세포로 구성된 한 냉동 배아가 법적으로 자녀의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하기도 했던 것.

그 결과, 미국 사회는 태아의 권리를 모체의 권리보다 한참 높은 우선순위에 두게 되었다. 당시 의학회의 문헌들의 권고내용을 보면, 태아의 건강을 위해 의사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여성들을 체포하도록 제안하는 것이 있었다. 물론 의사의 지시라는 것이 따라서 나쁠 것은 없다지만, 이 시절에 임산부들은 의학적 개입이 불필요할 만큼 작은 위험요소가 있더라도 강제적인 제왕절개 수술을 제시받는 일이 많았으며, 만일 이를 거절할 경우에는 공권력의 철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제왕절개를 거부한 임산부를 신고할 수 있었고, 신고가 접수되면 빠르면 1시간 이내, 늦어도 6시간 이내에 그 임산부는 체포당했다. 비단 제왕절개뿐만 아니라, 이때의 미국 사회에서는 임신부가 음주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고 법적 처벌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물론 임신 중 음주가 도덕적으로 결코 잘한 짓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법적 처벌만큼은 태아에 대한 모든 종류의 학대가 실제로 '국가가 공권력을 사용해서 개입할 문제' 라는 사회적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참고로 이때 있었던 별의별 기막힌 아동(태아)학대죄 사건들을 팔루디가 본서에서 기록하고 있는데(pp.620-621) 그 내용들 중 일부는 가히 해외토픽감이었다.
낙태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가족계획기금은 80년대에 그 후원금과 보조금이 지속적으로 삭감되어 왔는데,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저소득층 여성들이 피임과 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0대 저소득층의 임신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문제를 깨닫고 다시 기금 지원을 재개하기도 했다고. 마찬가지로 낙태 제한은 이들 어린 여학생들의 "순결" 이나 "정숙함" 을 지켜주기는커녕, 이들에게 위험한 음성적 출산이나 무면허 낙태 시술만을 증가시켰다. 본서에서 제시되는 한 사례로, 미네소타에서는 낙태 제한법이 실시된 후 미성년 여성 출산율이 무려 40%p나 증가했다. 낙태 문의만 하더라도 의사가 직접 신고하고 사회적으로도 매장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여성들은 자기 집이나 욕실, 주방에서 몰래 출산함으로써 양육권 박탈이나 구금을 피하려 했다. 이 문제가 하도 심각해서 "화장실 아기" 라는 표현이 생길 정도였다고. 체포당한 여성들 역시, 산모와 태아의 건강이 직접적으로 위험에 처할 만큼 사법 당국의 산전 관리 실태가 열악한 데다, 자녀를 옥중에서 출산하기 위해 필요한 영양 보충제와 복지 수당은 늘 레이건에 의해 삭감되어 왔다. 일이 이 지경인지라, 팔루디는 이들이 겉으로나마 내세우는 "건강한 다음 세대" 라는 명분과 가치가 어디로 갔느냐고 비판한다.

이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비극적인 사례로 베키 벨 사망 사건을 들 수 있다. 이것은 1988년인디애나 주의 17세 소녀 베키 벨(B.Bell)이 겪었던 일인데, 이 소녀는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후 낙태 시술을 알아보았으나, 합법 시술소에서의 낙태는 반드시 부모에게 고지되며, 부모가 허락하더라도 판사가 직접 승인해야 한다는 (새로 제정된) 부모동의법으로 인하여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했고, 결국 그는 위험한 불법 낙태 시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사건은 1991년에 10대 여성 잡지인 《Seventeen》 에서 기사화된 후, 음성적 낙태 시술을 받다가 죽은 소녀의 친구들이나 죽을 뻔했던 경험자들의 독자 편지가 빗발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럼 좀 불편하더라도 법대로 따르면서 부모와 판사를 '설득'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부모동의법 하에서 낙태를 원하는 여성이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공개해야 하는 제3자의 수는 20명에 달했으며, 판결이 나기까지 1개월 이상 소요되었고, 문제의 인디애나 주의 경우 연간 사법적 허가는 단 6~8건에 불과했다고.

팔루디가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또 다른 비극적 사례를 하나 더 들자면 세간에 A.C. 사망 사건이라고 알려진 앤젤라 카더(A.Carder)의 사건이 있다. 이는 미국 사회가 태아의 생명권을 위해서 모체의 생명권을 기꺼이 내다버리려 했던(…) 사례라는 것이다. 사건인즉 이렇다. 1987년, 희귀한 골육종 환자인 카더는 임신 중에 뼈에 암이 재발하는 상황에 처했다.[42] 의료진은 카더가 태아에게 나쁠 수 있는 화학치료를 요청하자 강제 삽관 및 진정제를 투약하여 의식을 잃게 했으며, 이후 태아가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출생할 경우 자신들이 고소당할까 두려웠던 의료진은 결국 강제로 제왕절개를 하기로 결정했다. 제왕절개는 암 투병 중인 카더에게는 치명적인 수술이었지만 환자의 서면 동의는 생략되었으며, 병원측은 날림으로 실시한 제왕절개 법률 심사에서 수술을 일사천리로 승인했다.[43] 이에 시민단체에서 긴급 항소를 신청하자, 당장 수술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심사는 수술 전까지 16분만 진행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카더 측 변호사들의 변론은 제대로 진행되지도 못하고 끊겼다.[44] 결국 억지로 강행된 제왕절개 결과, 무리한 수술로 인해 태아도 사망하고 카더 역시 이틀 후 결국 사망했다. 3년 뒤 제대로 치러진 항소심에서는 이 심사와 수술 모두 카더의 생명권을 침해했음을 인정했다. 이 사례는 피해자의 이니셜인 A.C. 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 졸속 심사는 '16분 판결' 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이후로도 임산부의 생명권에 관련된 중요한 판례가 되었다.

여성의 출산에 관련하여 이 모든 이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이 있다면, 80년대 미국 사회가 임산부를 사실상 "자궁 그 자체", 요즘 말로 옮기면 "애 낳는 기계" 로 취급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여성의 가장 큰 가치는 자녀를 낳는 데에 있었으며, 여성의 권리는 자신이 출산하는 태아의 권리보다 더 적었고, 여성이 자신의 출산 문제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의사결정을 내릴 권리는 사실상 없었다. 낙태 반대 운동은 단지 그 하나의 양상 내지는 결과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팔루디의 취재에서 흥미로운 점은 여성의 자궁으로서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굉장히 낮게 평가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태아보다 자궁을 우선시하는 사회가 자궁보다 태아를 우선시하는 사회에 비해 장기적으로 더 많은 인구증가를 보일 것이라는 직관적인 생각에 반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로이 바우마이스터(R.Baumeister)가 자신의 저서 《소모되는 남자》 에서 우리 사회가 음경 과잉(penis surplus) 현상, 즉 남성들의 목숨은 얼마가 죽어나가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의 재생산 능력만큼은 끔찍하게 아끼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던 것과는 다소 다르다. 하지만 팔루디의 판단에 따르면, 당시 미국 사회는 인구증가의 잠재력을 일부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여성들에게 출산 문제에 대한 권리만큼은 넘겨주지 않으려 했던 남성들의 백래시로 설명될 수 있다.

3. 비판

우선적으로, 이 책에 대한 직접적인 서평으로서 연세대학교의 정승화(2018)의[45] 문헌을 거론할 수 있다. 정승화(2018)는 백래시의 원인을 지목하기 위해 팔루디가 뉴라이트 진영을 직접적으로 타깃팅하면서, 페미니즘 진영과 뉴라이트 진영을 적대 관계로 설정하는 바람에, 그만 직업여성들과 전업주부 여성들을 서로 적대 관계인 것처럼 묶어 버렸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뉴라이트가 상대방(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했듯이, 팔루디 역시 뉴라이트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페미니즘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됐다는 것이다.

3.1. 백래시의 모호함과 백래시 몰이

다음으로 생각해 볼 점은 "그래서 대체 백래시가 뭔데?" 라는 의문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 책은 엄밀한 학술적 정의를 시도하는 책이 아니라 단지 사회상을 묘사적으로 서술하는 책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려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전부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은 문제의 여지가 있다. 해결해야 할 질문은, 백래시라는 것이 과연 개개의 현상인지 아니면 어떤 시대적 풍조 내지는 조류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백래시에 대한 설명에는 '분석 수준'(level of analysis)이 누락되어 있어서 상당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신조어로서의 백래시를 국내 지식인들이나 언론사들이 소비하는 양상을 보면, 백래시는 개별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단어처럼 보인다. #사례1 #사례2 성균관대학교 위드유 특별대회의 경우 아예 행사명을 "백래시 박살대회" 로 정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하지만 이는 적어도 본서에서의 쓰임을 고려하면 올바른 활용법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본서에서는 3장에서 자세히 고찰하듯이 "백래시의 시대" 라는 것이 주기적으로 도래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서는 백래시의 확산과 전파에 있어서 대중매체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있으며, 이들이 사회적으로 개인들에게 규범적 압력을 가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백래시는 개별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미시적 용어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의 반여성적인 시대상을 일컫는 역사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하며, 더 한정할 경우 미국 문화에서만 한정적으로 통용되어야 할지도 모를 특수한 문화적 특징일 수도 있다. 팔루디는 미국이 아닌 국가에서 나타나는 백래시에 대해 본서에서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래시를 시대적 의미로 받아들일 경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저자가 백래시의 시대라고 말하는 80년대는 비단 젠더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담론의 영역들에서 극심한 보수화가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여성문제 외에도 복지 관련 예산은 늘 삭감되었고, 탈동성애 운동이 판을 쳤으며, 마이클 두카키스사형제에 대해 진보 관점에서 답변한 것이 미국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시대였다. 어쩌면, 젠더의 인식론을 한 걸음 벗어나서 본다면, 이 시대는 여성의 성취를 거부하는 시대가 아니라, 리버럴들의 성취를 거부하는 시대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백래시라는 개념은 진보에 대한 보수적 반동으로 더 넓게 환원될 여지가 있다.

페미니즘 비판서로 유명한 《포비아 페미니즘》 의 저자이자 잘 알려진 국내의 문화평론가인 박가분 씨 역시, 자신의 논문에서[46] 바로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개념적 오용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박가분(2018)의 경우 일차적으로 본서 자체보다는 본서가 퍼뜨린 백래시라는 신조어가 무분별하게 활용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춘다. 그에 따르면, 진보주의자들이 진보에 대해 가해지는 모든 반동적 개별 사건들에 대해서 백래시라고 주장하는 것은 엄밀한 학술적 진단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욕설에 가까울 수 있다. 이는 (그의 표현을 바로 빌리자면) 진보적 지식인들이 저지르는 또 다른 "반지성주의" 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진보주의자들의 미덕은 발터 벤야민(W.Benjamin)이 그러했듯 내부적으로 자신들의 사회 운동의 방법론적 한계를 인정하고 그 대안을 모색할 줄 아는 것이었지만, 근래의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등한시한 채 모든 반발에 대해서 짜증스럽게 "이것도 백래시, 저것도 백래시" 라는 식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 이래서야 어떤 유의미한 통찰이나 개선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진보주의자의 행보도 아니요, 지성인의 행보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각국의 친여성주의적 언론이 모든 반발에 "백래시"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작금의 현실에 정확히 부합한다. 대다수의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상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고, 소위 이름 좀 날리는 페미니스트들 중 몇몇이 현대 페미니즘에 회의적인 시각을 공개적으로 표출한다거나 심지어는 평범한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상핍하고 반여성주의적인 "스트롱맨"에 호감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캠페인에 나서는 것도 현실[47]이다. 또한 페미니즘 세력 내부의 분열과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소리나 남성혐오는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며 페미니스트들이 서로 간에 선을 긋는다는 것 자체가 그것의 방증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대체 어떤 의미있는 통찰이나 해결책을 제공하는가? 게다가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메시지보다, 안티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하지만 과거 주류 보수와 척을 지는 경우도 많으며 종교, 성역할, 낙태, 동성애에 대한 관점이 훨씬 다양하고 포용적인 2010년대 극우의 메시지는 여성들에게 압도적으로 매력적이다.

3.2. 선구자 베티 프리댄 백래시 몰이

또한, 저자 팔루디는 80년대 페미니즘 진영의 동향을 개관하면서 그것을 마치 (래디컬) 페미니즘의 정신에 대한 '변절' 처럼 묘사했다는 문제도 있다. 80년대의 움직임은 물론 기존의 성취에 대한 부정일 수도 있지만, 사회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수정주의적 모색일 수도 있다. 설령 그것이 정말로 변절일지라도, 팔루디는 다른 여러 강성 사회 운동가들의 문헌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치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하지 못하면 똑같이 백래시에 공모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 정승화(2018)는 이와 관련하여 위 문헌에서, 베티 프리댄에 대한 비판이나 관계적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 지점에서는 그것이 "다른 목소리의 성찰" 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백래시에 맞장구치는 것인 양 그 성찰들을 "폄하한다" 면서 팔루디를 비판했다.

저자가 직접 표명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베티 프리댄의 노선과 이에 저항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노선 사이의 관계를 다루면서 프리댄이 백래시의 사례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논쟁에서 팔루디가 서 있는 위치가 대체 어디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한다. 그저 충분히 '래디컬'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백래시에 공모한 인물, 다시 말해 페미니즘의 성취를 "부정" 하는 "반동" 적 세력과 결탁한 인물로 취급하는 것은, 어쩌면 저자가 암묵적으로는 "래디컬 말고는 전부 적이다(내지는 사상검증을 해 봐야 한다)" 는 위험한 진영논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일으킨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본서에서 제시하는 백래시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운동의 시각에서 '오점' 이나 '오명' 으로 가볍게 취급하고 넘길 무게의 수사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3.2.1. 베티 프리댄과 대립한 인물의 성향

그럼 여기서 베티 프리댄과 대립한 성향의 인물을 알아보자. 그 예가 티그레이스 앳킨슨인데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원래 베티 프리댄에 동조해서 NOW에 활동했으나 프리댄이 거절해서 NOW를 나간 인물인데, 그런데 베티 프리댄이 거절하고 앳킨슨이 나간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앤디 워홀을 총격으로 테러한 밸러리 솔라나스를 미화한 인물이다!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밸러리 솔라리스를 "여성 권위의 첫 번째 탁월한 챔피언", "페미니스트 운동의 주인공"이라고 노골적으로 미화한 인물이었다. #, #

당시 티그레이스 앳킨슨을 비롯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찬양한 밸러리 솔라리스의 성향
이 사회에서의 삶은, 최상의 경우에도 지루하기 짝이 없으며, 사회의 모든 측면은 여성을 배제하고 있으므로, 시민의식이 있으며, 책임감 있고, 모험을 원하는 여성에게 남은 길은 정부를 전복하고, 화폐 체계를 무너뜨리고, 산업의 완전 자동화[48]를 이루고 모든 남성을 제거하는 것 뿐이다.
...(중략)...
남성의 존재는 생물학적 실패이다. 남성 유전자 Y는 여성 유전자 X의 불완전한 형태이며 이는 남성이 유전적으로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남성은 불완전한 여성이며, 유전자 단계에서부터 실패한, 걸어다니는 실패작이다. 남성은 결핍이며, 정서적 결함이다. 남성성은 결함있는 질병이며, 남자들은 정서적인 불구이다.
- SCUM 선언문. 밸러리 솔라나스 r206에서 재인용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 대립한 베티 프리댄이 압도적으로 정상적이다.

3.3. 기타

그 외에도 가능한 비판점들로서, 정승화(2018)는 팔루디가 지나치게 여성의 사회 진출과 직업여성에 대한 반감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가족 관련 의제나 성범죄 관련 의제 등은 소홀히 다루었다는 점, 페미니즘의 이름을 걸고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 판매에서 많은 도용과 오용을 저질렀다는 점은 잘 지적했지만 그것이 왜 그러한지에 대해 메커니즘을 성찰하려는 노력은 부족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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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러니하지만 뉴스위크는 본서에서 까이기도 참 많이 까였던 언론사들 중 하나다.[2] 어쩌면 처음부터 이 책을 챕터별로 분리하여 더 얇은 여러 책들로 만들어서 시리즈로 출판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3] 참고로 기사를 보면 팔루디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급진적인 페미니즘이 미국에서 1960년대에 있었는데 최근에 재발견되고 있다”며 “세대간 소통이 붕괴되면서 페미니즘의 교훈들이 잘 전승되지 않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실제로 1980년대에 워마드와 비슷한 TERF가 신보수주의자와 연대한 적 있었고, 통수를 맞고, 백래시도 경험했기에 당연할 수 밖에.[4] 확신하기는 어려우나, 국내 개신교계 일각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그 논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당시의 미국의 근본주의자들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5] 사회구조의 변혁과 인권운동을 통한 여권향상은 이미 완성되었고, 남겨진 성차는 개인의 노력과 성취만으로 충분히 달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관점, 또는 그러한 시대상.[6] 그러나 팔루디에 따르면, 이런 슬로건은 쉽사리 믿을 수 없는 것 같다고 한다. 한 예로 '가족 친화' 슬로건을 내걸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공화당 의원 밥 돌(B.Dole)의 경우, 불과 몇 개월 전에 국회에서 "자녀 보육 문제 따위로 장난치는 건 그만하고, 이제 더 중요한 문제로 넘어가자" 면서 대놓고 불평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7] 실제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오늘날에도 오세라비 등 "페미니즘의 대안이 필요하다" 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티페미니스트 아니냐고 의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전후맥락을 알 수 있으리라 보인다.[8] Petchesky, R. P. (1981). Antiabortion, antifeminism, and the rise of the New Right. Feminist studies, 7(2), 206-246.[9] 근본주의 개신교계에서 "남편은 아내의 머리됨" 이라는 에베소서 5장 22-24절을 어찌나 자주 거론하는지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 에서 취재하기도 했다.[10] 제리 폴웰의 서적 《Listen, America!》 에는 페미니스트들이 전세계적인 비밀 조직망을 구축한 상태로 자유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정부 네트워크에 이들을 침투시키게 된다는 것.[11] 저자에 따르면, 80년대 남성들은 자신들이 페미니스트에 대해서 "다 안다" 는 듯한 냉소주의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페미니즘? 그거 이미 철 지났지, 지금은 1970년대가 아니니까" 등으로 비아냥거렸다고. 백래시를 옹호하는 남성들은 페미니즘의 메시지들을 낡은 것이라고 경멸하면서 농담거리로 삼았다고 한다.[12] 예외적으로 미스아메리카 반대 시위 당시 일부 시위대가 브래지어를 쓰레기통에 버린 일이 있었는데, 이것 하나로 3개월 동안 온 언론사들이 "브래지어를 불태우는 화난 여성들" 이라며 보도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은 이어져서, 미국에서 페미니스트에 대한 고정관념 중 유명한 것으로 브래지어를 불태운다는 이미지가 있다고.[13] 이는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저자 팔루디가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메시지가 자본주의에 의해서 강탈당하고 있다는 것. 이런 문제의식은 크리스토퍼 래시(C.Lash) 같은 역사학자나, 니나 파워(N.Power) 등의 다른 페미니스트들도 공유하는 부분이다.[14] 많은 사회학자들이 이런 남성들의 반감을 목도하며 몹시 당혹스러워했지만, 한 학문에서 미스터리하게 보이는 것이 다른 학문에서 쉽게 풀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컨대 사회심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정도의 즉각적이고 격렬하며 방어적인 반응은 그것이 자기위협(self-threat), 즉 자기개념에 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남성으로서의 역할이 남성들의 자기관(self-view)에 있어서 너무나 근본적인 탓에,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심리적으로 이들의 존재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학계에서 크게 논의되지 않은 사변적 추론임에 유의.) 그러나 사회학은 이런 학문들과는 분석 수준이 다르기 때문인지, 유의미한 협업이 이루어진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하다.[15] 참고로 이 비난에 제일 앞장섰던 인물이 다름아닌 도널드 트럼프였다고 한다.[16] 80년대 미국 사회는 심리치료 업계가 전례없이 호황을 누리던 때였으며, 실제로 그 수요 자체가 엄청나게 높았다. 현대에도 미국은 국내에 비하면 상담소나 심리치료라는 개념에 대해 훨씬 호의적이다.[17] 고졸 여성의 데이터는 좌측편포가 나타났지만, 대졸 여성의 데이터는 우측편포가 나타났다는 차이점이 반영되지 않은 연구였다.[18] 사실 이것 자체가 일반적인 학계 프로세스와는 완전히 거꾸로 간 사례다. 우선 학계의 평가와 검토를 거쳐서 논문이 나오고, 후속연구와 인용이 이루어지고, 리뷰가 나오고, 그 이후에야 일반 대중에게도 알릴 만한 학술콘텐츠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상대적으로 확신하기 어려운 사회과학이라면 더더욱 조심해서 언론에 알려야 한다.[19] 메리 메이슨(M.A.Mason)과 같은 인물들이 《The Equality Trap》 같은 저서들을 통해 비난한 것과는 달리, 사실 이혼무책법은 페미니스트들의 로비나 압박 때문이 아니라, 남성들로 구성된 법률 자문단인 미국변호사협회(American Bar Association)가 만든 것이었다. 이 법은 공포 이후에도 판사들에게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일부 판사들은 규정의 핵심적인 수치를 오독하기도 했다.[20] 게다가 와이츠먼 본인조차 이혼무책법이 사법 현장에서 무력화되는 경향을 지적했고, 심지어는 직접적으로 "백래시" 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법조계는 페미니즘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고까지 적어놓았다.[21] 때로 불임이 인종차별과 엮이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The Birth Dearth》 등의 서적들은 백인 여성의 출산율이 하락하고 흑인 여성의 출산율이 증가하는 것을 들어 "유행병" 이라고 비난했지만, 실상 이는 실제 출산율 변동 데이터와 정반대였다. 그러나 어쨌건 이들은 "멍청한 여자들만 아이를 낳다 보면 미국은 망한다", "못 사는 나라에서만 아이를 낳다 보면 전 인류가 퇴보한다" 면서 호들갑을 떨었다.[22] 이 시절 미국에서는 직장에서 짜증스럽게 머리를 쥐어뜯는 여성들이나, 서류더미를 앞에 두고 한숨을 쉬는 여성의 이미지가 대중매체에 매우 흔하게 돌아다녔다.[23] 이를 통해 보면, 국내에서 어린이집 관련 사건사고들이 벌어지는 것은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닐 것이다.[24] 월경전 증후군은 여성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자꾸 병리화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래도 학계에 가장 무난하게 안착했으며, 현대에도 유의미하게 통용되는 진단명이 되었다. 성도착적 강간장애는 남성들의 강간을 합리화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건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영 아니다 싶었는지 부정적인 의견이 많아서 최종적으로는 등재되지 못했다.[25] 이게 우리나라 문화에서 생각하는 그 이미지와도 거의 똑같다는 게 더 대단할 따름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말 그대로 "자네들 뭐 먹겠나? 난 짜장면. 어허 이 사람아, 의견 통일해" 수준이었다고 하니...[26] Winkler, B. (1986). Scholar's conflict in Sears sex-bias case sets off war in women's history. Chronicle of higer education, 5, 1-8.[27] 저자에 따르면 심지어 80년대 패션쇼에서 자주 활용되던 소품 중에는 모델이 안고 걸어야 할 테디베어 인형도 있었다고 한다.[28] 이 작품은 인기가 낮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지 부시도 이 작품을 언급한 바 있으며, 심리치료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제고했다는 호평도 많고, 에미상 등도 많이 수상했다.[29] 실제로 팔루디는 본서에서 "유명한 남성 아무개가 이러이러한 작품을 싫어하는데, 알고보니 그 사람 아내는 그 작품의 광팬이더라" 하는 사례들을 꾸준히 들고 있다.[30] 물론 인간은 최후통첩(ultimatum) 게임에서도 보듯이 얼마든지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자주 저지르곤 한다.[31] 10대 여성이 임신한 뒤 산부인과 클리닉에 몰래 찾아가서 낙태 상담을 요청할 경우 병원측에서 의무적으로 그 여성의 부모에게 이 사실을 통지하도록 하는 법적 규정. 사실상 암묵적으로 등짝스매싱(…)을 유도하려는 목적에서 입안되었다.[32] 이와 같은 프리댄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이 문서 말미에서 한번 더 다루도록 한다.[33] 뉴라이트 진영에서 야망 어린 직업여성들을 종종 "마초 페미니스트" 라고 불렀는데, 프리댄 역시 자신의 저작들에서 "여성 마초"(female machismo)라는 표현을 쓴 바 있었다.[34]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아예 옹호하고 사회화의 힘은 논외로 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컨대 앨리스 로시(A.Rossi)는 "남성들은 원래 뼈가 가늘게 태어났기 때문에 집안일에는 어울리지 않다, 따라서 가사노동은 오직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식의, 사회생물학적으로까지 보이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고.[35] Walker, L. J. (1984). Sex differences in the development of moral reasoning: A critical review. Child development, 677-691.[36] 비슷한 논조의 다른 인물들인 크리스토퍼 래시(C.Lasch), 로저 킴벌(R.Kimball), 빈센트 사리치(V.Sarich) 역시 80년대 말에 공통적으로 "미국 정신의 몰락" 을 강변했었다.[37] 팔루디는 마이클 레빈이 똑똑한 여성에 대해서 가히 병적일 수준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을 취재하면서, 여봐란 듯이 그의 아내 마가리타 레빈(M.Levin)을 함께 취재해서 본서에 기록해 두었다. 마가리타 레빈은 참고로 직업이 수학 교수였다(…).[38] 즉 자신의 노력 역시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을 '보완' 하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페미니스트들에게 "내 얘기 좀 제발 들어 봐요!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갖는 것도 페미니즘의 실천 중의 하나란 말이오!" 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소한 그는 페미니즘 자체가 남성성의 '적' 이라고 타깃팅하려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39]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빗대어 "Iron John" 에 대응되는 "Ironing John", 즉 다림질하는 남성이라는 표현을 만들기도 했다. 영어에서 다림질한다는 의미의 단어가 똑같이 iron이라는 점을 활용한 언어유희.[40] 그는 본래 독실한 근본주의 개신교인으로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던 빈곤층에 불과했으나, 어느 날 기도실에서 기도하던 중에 낙태 클리닉을 자신이 습격하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이것이 자신을 향한 하늘의 계시라고 여겨서 낙태 반대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로써 별 볼 일 없던 그는 갑자기 엄청난 유명세를 얻었다. 그는 미혼모 상담센터와 쉼터 등을 설립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을 돕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실상 이런 곳들에서는 낙태를 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선정적이고 종교적인 홍보 영상들을 강제로 보여주곤 했으며, 그나마 그 서비스를 이용한 미혼모들의 수는 폐쇄 전까지 불과 4명에 지나지 않았다.[41] 즉 이 사람들은 낙태 반대 운동을 할 때 늘 "어서 빨리 저 찬란하고 밝은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얼마나 아름다울까? 엄마! 저를 죽이지 말아요! 저는 바깥 세상을 만나보고 싶을 뿐이에요!" 와 같은 감성팔이(?)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낙태 반대 집회에서 동원되는 수사법과 메타포들이 더 궁금하다면 본서의 마지막 챕터를 참고할 수 있다.[42] 골육종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이 암은 뼈에 발생하는 악성 종양으로,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발병할 수 있으며, 일단 발병하면 재발률이 매우 높고, 치사율도 매우 높아서 생명을 걱정해야 할 정도이다.[43] 한 사람이 심사 마무리 즈음에서 혹시나 싶어서 카더에게 물어보았는데, 처음에는 진정제에 취해 있던 카더가 무심코 "Yes" 라고 대답했으며, 30분 후 정말 혹시나 싶었던 그가 다시 물어보자 이번에는 또렷한 정신으로 "아니오, 그런 거 안 할 거야, 나 수술 안 한다고 말해 줘요" 라는 요지로 정확히 발음했다. 그가 이 사실을 법관들에게 전해 주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았다(…).[44] 이들 변호사들은 경황 없이 이 사건을 떠안게 되어 다같이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여야 했으며, 그나마 관련 송사 경험이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현행법을 인용하면서 청산유수처럼 제왕절개의 법적 문제점을 강조하자 판사가 "짧게 말하라" 면서 매번 말을 끊었다고 한다.[45] 정승화 (2018). 누가 페미니즘을 모함했나? 백래시에서 시장 페미니즘까지. 한국여성학, 34(2), 179-187.[46] 박가분 (2018). 백래시와 페미니즘의 퇴행. 인물과사상, 244, 153-171. #전문공개[47] 대표적으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부터 유럽의 극우화에까지 통념과 달리 여성들이 상당히 관여했으며 심지어 마린 르 펜같은 우파 여성 지도자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실제로 뉴욕 타임즈는 브라질 여성들이 보우소나루를 지지하는 현상에 대해 취재한 적이 있고 본인이 "치료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이끄는 페이스북 그룹과 인터뷰한 적도 있다. 남미도 페미니즘 세력의 입김이 약하지는 않은 곳이다.[48] 솔라나스는 기계를 이용해 인류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