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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5 16:24:59

남성 페미니스트(도서)


도서명 남성 페미니스트(韓)
Men Doing Feminism(英)
발행일 1998년(초판)
2004년(역서)
저자 Tom F. Digby 편저
Sandra Bartky 외 18명
(김고연주, 이장원 공역)[1]
출판사 Routledge
도서출판 또 하나의 문화
ISBN 978041591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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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및 출간 배경
1.1. 저자 소개
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비-페미니즘 남성들에게 답변하기2.3.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 답변하기2.4. 남성 페미니스트가 해야 할 일들2.5. 성 소수자로서의 위치?
3. 가능한 비판4. 관련 문서5. 둘러보기

"세상에는 억압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남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들도 가부장제에 의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인류의 절반을 억압하는 것에 공모하기를 원치 않는다."
- 샌드라 바트키(S.Bartky), 서문, pp.16-17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의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답변하는 학자들이 함께 펴낸 도서이다. 남성 페미니스트가 개념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혹은 남성으로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혹은 남성이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것이 여성 운동에 도움이 되는가의 질문은 오랫동안 페미니즘 연구자들과 운동가들을 괴롭혀 왔던 난제에 속한다. 그 중에서 이 책은 "Yes" 의 방향으로 답변할 수 있는 남성 저자들과 여성 저자들이 모여서 각자의 저술을 모아 엮어 낸 핸드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저자들마다 생각이 다 조금씩 다르므로, 2장의 저자처럼 확신에 차서 "Yes!" 를 외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역서 기준) 10장의 저자처럼 "Yes, but..." 이라며 조심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편저자 톰 디그비(T.F.Digby)는 페미니스트 남성들이 살아온 독특한 삶의 여정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페미니즘 이론가들이 깊은 고찰 없이 이들을 섣불리 포용하거나 거부하는 일을 막고, 남성 페미니스트 본인들에게도 자신의 삶을 좀 더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책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에게 남성 페미니스트 역시 '당연히' 가능하다는 식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 가능성이 어느 정도나 될지, 만약 가능하다면 페미니즘 내부에서 남성의 입지는 어디일지, 그리고 남성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점은 무엇인지, 더불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등을 고찰하기 위한 작업에 속한다.

머리말에서 샌드라 바트키는 여성학계에 한때 젠더 분리주의가 대세였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남성들을 환영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젠더를 기준으로 하여 이쪽 저쪽 나누어 피아식별을 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을 만큼 여성운동의 지형이 불분명해졌고, 한때는 분리주의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시절이 아니며, 오늘날의 남성들 역시 자신들에게 강요된 정체성과 남성성에 혼란을 느끼고 사회생활 속에서 페미니즘의 가치를 실천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뉴잉글랜드 대학교에서 열었던 동명의 세미나 《Men Doing Feminism》 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당시 대학원생들이 반응했던 비평과 코멘트를 수렴하여 다시 한 번 정리한 것이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영미권의 철학자, 사회학자, 여성학젠더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이 남성 배타적인 페미니스트들을 향해 펼치는 철학적 반론과 재반론들 역시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6장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매우 쉽게 읽히는 글에 속한다. 이는 대부분의 저자들의 글이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가독성이 뛰어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2장에서의 남성 배타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Hopkins(1998)의 파상공세적인 비판은 상당히 탄탄하게 짜여져 있다.

아마도 이 책은 페미니즘의 주요 메시지와 정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나 내지는 스스로를 남성이면서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싶어하는 어떤 남성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많은 지지와 위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상당한 고민거리와 생각해 볼 점들을 한아름 떠안게 될 것이다(…). 유념할 것은, 이 책은 《소모되는 남자》 나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누가 페미니즘을 훔쳤는가》, 《포비아 페미니즘》 과 같은 종류의 페미니즘 비판서에서 지향하는 것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책은 맨스플레인, 미러링, 강간 문화, 여성혐오 등의 주제들에서 다수 여성 페미니스트들과 뜻을 같이 하는 남성들을 위해 쓰여졌다. 즉 가장 비슷한 포지션의 다른 책으로는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지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동조하지는 않는 수준의 다른 남성들 역시 이 책으로부터 많은 생각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1. 저자 소개

편저자 톰 디그비를 제외하고 볼 때, 저자들은 원서 기준 19명, 역서 기준 14명이다. 인원이 매우 많기 때문에 저자들 개개인의 약력은 부득이 아래와 같이 표기하기로 한다. 약력의 출처는 가능한 한 국내 역서에서 제공되는 정보를 참고하였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위의 목차는 원서의 것과는 다르다. 국내 역서의 경우, 원서에는 포함되어 있는 인종 관련 챕터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략된 챕터는 각각 다음과 같다.

또한 국내 역서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지막 16장과 17장 역시 생략되어 있다. 생략된 챕터는 각각 다음과 같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편의를 위하여 각 챕터의 번호는 국내 역서 기준으로 통일하기로 하겠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의 순서와 무관하게 소개할 것이다. 먼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성 페미니스트가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에 대해서 저자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정리한다. 다음으로, 남성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한 남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FTM 트랜스젠더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그것은 어떤 삶이 될지에 대해 간략히 기술한다.

편의를 위하여, 이제부터는 '남성 페미니스트' 라는 표현을 줄여서 '남페미' 로 부르기로 하고, '여성 페미니스트' 는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임을 고려하여 '페미니스트' 라고만 부르기로 하겠다.

2.2. 비-페미니즘 남성들에게 답변하기

본서가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안티페미니즘 지지자들, 페미니즘에 별 관심 없는 남성들, 남성권익주의자들, 하여간 남페미가 아닌 다른 남성들을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서에서 어쨌든 이들의 주장들이 일부분 나타나 있고, 이에 대해서도 몇몇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여기서 약간의 공간을 할애하여 각 저자들의 대답을 나란히 놓아 보도록 하겠다.

흔히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남성들의 권리와 일자리, 활동영역을 빼앗아가는 운동이라는 관념이다. 이에 대해 남성들은 굉장한 박탈감과 무력감을 느낀다고 호소하며, 대표적으로 남성권익운동가로 유명한 워런 패럴(W.Farrell)이 이런 주장으로 유명하다. 굳이 패럴까지 갈 것도 없이, 많은 사회과학적 연구들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남성들의 낮은 자존감과 우울증에 정적 상관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이 우울한 호소는 수전 팔루디(S.Faludi)의 저서 《백래시》 나, 우에노 치즈코의 저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에서도 발견되는 전세계 남성들의 고충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먼저 언급할 만한 인물은 남성교육 강연자 마이클 킴멜이다. 3장에서 Kimmel(1998)은 이런 '남성 약자론' 에 대해서 반론하는데, 이를 간략하게 줄이면 남성 집단이 권력을 갖고, 권력은 고통을 동반하며, 그 고통은 남성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남성 집단이 갖는 젠더 권력은 젊은 남성들에게 "당신도 언젠가는 반드시 남성이 되어서 당신이 받아야 마땅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남성이 될 때까지 조금만 참으라" 고 속삭인다. 그러나 Kimmel(1998)은 이런 권리의식(entitlement)을 갖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여성들이 우리 남성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 고 말할 때, 그 일자리가 언제부터 '당연히' 남성들이 갖기로 약속되어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런 허황된 약속을 한 것은 남성들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있는 내면의 왕자(inner prince)[2]라고 그는 비유한다.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우리 남성들을 향하는 칼날" 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역시, 세상이 남성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속삭이는 내면의 왕자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9장의 저자 Brod(1998)는 공저자들 중에서 아마도 남성들의 '상처 받은 남성성' 에 대해 가장 우호적이고 동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남성들이 다양한 박탈감과 상처의 경험들이 있다는 것을 우선 인정한다. 그렇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페미니즘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더더욱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보통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므로 이런 상처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며, 가부장적 책임의 짐을 짊어진 남성들을 위로할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남페미라고 제안한다. 이런 남페미들의 활동이 없기 때문에 남성들이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게 되고 안티페미니즘에 혹하게 된다는 것.

Brod(1998)는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의 경험에 대해서[3] 말하는 것은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제도를 폭넓게 바라보게 할 수는 있어도 (자기 일이 아니기에) 흐릿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한다. 여기서도 남페미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이들은 남성이기에 여성들처럼 사회를 바라보긴 힘들지만, 적어도 남성들의 삶에 있어서만큼은 명료하고 정확하게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말하는 남성의 삶은 어슴푸레한 탐조등이라면, 남성이 말하는 남성의 삶은 레이저에 비유될 정도의 정확도를 갖는다고 말했다.

12장의 저자 Sterba(1998) 역시 남성의 불이익으로 세간에 알려진 것이 사실은 성차별적 전통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 전통이 수많은 남성들을 '그렇게나 괴롭게 한다면', 어째서 아직도 그처럼 느리게 사라져 가고 있느냐고 반문한다. 저자에 따르면, 실상은 그 전통들을 통해서 남성들이 얻는 실보다 득이 더 크기 때문이며, 그 중 약간의 실에 대해서 늘 불평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Sterba(1998)는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이 유익한 이유 중 하나로, 이를 통해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불공정하게 주어지는 이익을 포기함으로써 도덕적인 우위를 획득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다음으로 살펴볼 주장은 남성권익운동 일각에서 실제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흔히 독박육아에 대한 비판이 페미니즘에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은 남성들이 여성에게 양육을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양육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아버지들은 사랑하는 자녀와 함께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며, 아버지들에게 양육의 권리를 빼앗아 간 사회가 도리어 아버지들에게 양육권 박탈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따라서 남성들에게 독박육아에 대한 책임을 비난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잘못된 공격을 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이에 대해서, 남페미가 아버지가 되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를 전개했던 11장의 저자 Gardiner(1998)는 신중한 동의의 의견을 표한다. 그 역시 아버지-자녀 간 관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하며, 아버지들이 육아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쉽사리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적 육아 이론으로서 부모 양친의 공동 육아를 제안했던 낸시 초도로우(N.Chodorow)의 저서 《The Reproduction of Mothering》 가 이미 너무 낡아 버렸다고 비판한다. 페미니즘이라고 해도 육아 이론이라면 결국 남성들의 삶의 경험을 기본적으로는 반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이제는 맞벌이가정, 이혼, 가족의 파편화, 조손가정, 편부모가정, 직업활동의 다양화 등이 빈번한 현대 사회에 맞지 않게 뒤떨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Gardiner(1998) 역시 결국 남페미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페미니스트들만으로 육아 이론을 업데이트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남페미들이 의욕적으로 육아 이론을 개발하는 데 참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저자의 관점에서 남페미들이 많아지게 되면 독박육아 문제가 해소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2.3.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 답변하기

아무래도 "남페미는 충분히 가능하다" 는 말은 남성들에게보다는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에게 더 도발적인 게 현실이다. 실제로 국내에도 《근본없는 페미니즘》 의 공저자이자 래디컬 페미니스트인 국지혜(2017) 씨는, 한때 남성들을 동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좋은 남성은 죽은 남성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고 밝힌다. 실제로 본서 역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들고 있는 논리들이 다수 소개되면서, 이들의 주장들에 대한 광범위한 반박이 이루어지고 있다.

흔히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남페미라는 말이 "둥근 네모" 나 "밝은 그림자" 같은 표현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선적으로 언급할 인물은, 입장 이론으로 페미니즘 지식사회학에 공헌한 인물인 샌드라 하딩이다. 8장에서 Harding(1998)은 리버럴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래디컬 페미니즘, 사회주의, 다문화주의, 성소수자 등등의 다양한 철학적 흐름들을 검토하면서,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시각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저마다 장단점이 있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남성들에게 변화를 촉구하고 각성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8장에 따르면, 래디컬 페미니즘의 정신은 생물학적으로 XY염색체인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남성성의 젠더를 내면화한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래디컬 측에서는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먼저 "남성" 이 되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본다. 이 주장으로 유명한 래디컬 페미니스트 존 스톨텐버그(J.Stoltenberg)는 일단 본인부터 남성이었으며, 《포르노그래피》 의 저자로 유명한 안드레아 드워킨(A.Dworkin)의 남편이었는데, 모든 남성들은 가부장제의 공모자라거나 잠재적 가해자라는 등의 도발적인 주장들 사이에서 "남성들은 남성이기를 거부(refuse)하고, 그 전에 먼저 평등하고 정의로운 (젠더 중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인간이 되어라" 라는 주장을 남긴 바 있다.

페미니즘 이론가인 로지 브라이도티(R.Braidotti)를 포함하여, 래디컬 진영에서 가장 빈번하게 제기되는 주장은, "남성이 페미니즘적 태도나 입장을 갖는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라고 볼 수 없다, 페미니스트는 한 사람이 여성으로서 평생 겪는 억압의 경험에 있다" 는 것이다. 그러나 2장의 저자 Hopkins(1998)는 이에 대해 몇 가지로 반박하는데, 우선적으로 그는 여성됨의 경험이 모두 같지 않고, 남성됨의 경험이 모두 같지 않기에 래디컬 진영이 힘을 잃은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들의 주장은 마치 근본주의 기독교 우파 세력이 "남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각자의 성 역할에 충실한 전통적 사회를 수호해야 한다" 고 주장하는 것과도 서로 겹쳐 보인다고도 했다. 특히 이들이 가부장제에 친화적인 여성들에 대해 "명예남성" 이라며 날을 세우는 것은, 역설적으로 페미니스트의 기준이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아닌, 관점 내지 입장에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사회적 여성으로서의 주관적 경험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페미니스트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물어보더라도, "페미니스트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면 경험 여부가 아니라 태도 여부에 입각해서 대답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3장에서 Kimmel(1998) 역시 남페미들의 활동은 여성의 경험에 대해 남성이 아는 척하고 알려주려 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의를 주었으며, 13장에서 Rubin(1998)은 한때 정체성 정치의 논리에 따라 남성배제적 의견이 힘을 얻기도 했지만, 오늘날 페미니즘의 요건은 결국 페미니즘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는가에 달렸다고 거들고 있다.

이에 더해 Hopkins(1998)는 2장의 미주 36번에서, 사회학계 일부에서 제기되는 다른 논리에 대해서도 반론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이 주위에 있을 때 남성에게 복종, 맹신, 희생하도록 사회화되었으므로, 남성들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서 남성들의 참여는 부득이 배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여성들만을 위한 "안전 공간" 이 필요하다는 것. 이에 대한 Hopkins(1998)의 비판은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우선, 여성들이 학습하거나 생산하는 활동에서 남성의 존재 자체가 유해하다면, 이는 남성들이 여성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제안밖에는 내놓지 못하게 된다. 이 논리에 따르면 공립학교에서 남녀 학생들을 나누어 수학과학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만, 래디컬 진영은 또 이에 대해서는 성차별이라며 반대하는 모순을 보인다. 더불어, 남성들이 페미니즘 수업에 동참하는 것은, 여성들이 자신이 배운 바를 강의실이라는 안전한 환경에서 호의적인 남성들을 향해 직접 실천해 보는 (이를테면 "학이시습지" 라 할 수 있는)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사실, 페미니즘 강의 자체에 대해서도, 여성들이 남성의 말을 그렇게나 맹신한다면, 이들은 대학 페미니즘 강의를 남성 강사가 진행하는 것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이 논리는 "게이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오픈한 게이가 곁에 있으면 이성애자들의 전투력이 떨어지니 군문에 받아줄 수 없다" 는 혐오 논리와도 상통한다고 한다.

앞서 소개했던 인물인 존 스톨텐버그가 강조했듯이, 래디컬 진영은 모든 남성들은 결국 직간접적으로 가부장제의 프리미엄을 받으며 공모하게 되는 입장이므로, 남페미들도 어쩔 수 없이 가부장적이라는 데에는 예외가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는 3장에서 페미니즘 강연을 하는 Kimmel(1998)이 하소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간혹 강연이 끝난 후 매우 불편한 심기로(…) 앉아 있는 일부 여성들이 질의응답 시간에 이런저런 까칠한 질문들을 던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에 작정하고 트집을 잡으려고 드는 이 여성들은 어렵지 않게 트집거리를 찾아내고, "그거 봐요, 결국 당신도 똑같은 가부장적 여혐주의자일 뿐이야. 하, 역시 모든 남성들은 다 똑같아!" 라며 안도(?)하곤 한다는 것이다. Kimmel(1998)은 이들이 남페미들에게 지나친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적어도 남페미들은 그 동기에서만큼은 진솔하다는 것을 알아 달라고 부탁한다. 이와 관련해, 9장의 저자 Brod(1998)는 이런 주장 자체가 페미니즘의 지속 가능성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남성배제적 관점은 얼마 못 가서 페미니즘으로 정치화된 남성 개인들을 다시 파편화시켜서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래디컬 진영에서 유명한 또 다른 논리는, 남성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다면 사회로부터 온갖 칭찬과 환영을 받지만, 여성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다면 온갖 멸시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스트 선언은 일종의 "커밍아웃" 이고, 남성들에게는 자신의 명성과 도덕적 우위를 더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젠더 권력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3장에서 Kimmel(1998)은 그 반례로서 프레드릭 더글러스(F.Douglass)를 들고 있다. 흑인 남성인 그는 페미니즘의 역사에 크게 기여한 남성들 중 하나로, 세네카 폴즈(Seneca Falls) 선언에 참여한 대가로 동료 남성들과 언론에 의해서 "남자 낸시 아줌마"(Aunt Nancy Man), 도로변의 작은 소년들, 남자답지 못한 남자라는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남성들의 세계에서 페미니스트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2장의 저자 Hopkins(1998)의 회고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4] 남성들 사이에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이들이 남성성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를 보여주는 것인 셈.

래디컬 진영의 논리 중에서 본서의 공저자들이 가장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남페미들은 여성을 위한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여성만의 영역에 침입하여 그 여성들을 몰아내고 정복하는 남성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공저자들은 이 주장에 대해서는 일부 인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3장에서 Kimmel(1998)은 페미니즘 운동의 중추에는 여성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 맞고, 적어도 남성들이 그것에 "동참" 하고 "촉진" 하며 "계몽" 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본다. 10장의 저자 Kahane(1998)은 남성들이 순수한 의도를 갖지 못한다 해도, 남성들이 그런 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공헌이자 여성들의 소득이라고 제안한다. 10장의 미주 25번에서 그는 페미니스트들이 남페미들에게 윤리적 완전무결성을 다그치고 있다고 말하면서, 남페미들이 그런 목표를 지향할수록 더더욱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인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12장의 저자 Sterba(1998) 역시, 일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이나 페미니즘에 공헌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남초 집단에서 페미니즘을 옹호할 수 있는 사람들은 결국 남페미라는 것.

일부 저자들은 그런 걱정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예컨대 8장의 저자 Harding(1998)은 남페미들이 페미니즘을 오해, 도용, 침투, 사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런 생각이 의욕 있는 남페미들의 열정을 저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남페미들과의 연대를 지향하자는 것이지, 서로의 영토를 통일하자는 게 아니라고 부연한다. 한편 9장의 저자 Brod(1998)는 보다 직접적으로, "남성의 정치와 여성의 정치가 왜 분리되어야 하는지" 를 근본적으로 반문한다. 그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남페미들을 실무자 내지 팔로워로 만드는 것조차도 유해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한편으로 남페미와 페미니스트들 간의 관계는, 남페미가 여성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되, 비생산적으로 매사 승인 받으려 하거나 의존하려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5]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것은, 1장의 저자 Bordo(1998)가 주장하는 것이다. 흔히 인류학자 데이비드 길모어(D.D.Gilmore)나 역사학자 대니얼 보야린(D.Boyarin)이 주장했던 것처럼 유대계 미국인들의 문화는 여성지배적 문화라거나, 유대인 남성들은 여성성이 높다는 설명이 퍼져 있는데, Bordo(1998)는 적어도 자신의 아버지만큼은 마피아 조직에 연루될 정도의 마초에다 가부장적이기 짝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볼 때, 유대인 남성들은 적어도 페미니즘에 호의적이거나, 내지는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유대인 문화는 굉장히 지식추구적이며 우선적으로 아들들에게 높은 지성을 요구하긴 하는데, 들이 지적인 소양이나 적성이 있을 경우에는 딸들에게도 고등 교육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좋아하는 여성, 논쟁하기 좋아하는 여성, 지성미 있는 여성에 대해서 유대인 남성들은 전혀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게다가 저자는 《Bar Mitzvah》 라는 문헌 속의 한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유대인들의 토론 문화반-권위주의적인 성격이 있다고도 하였다.[6]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남성이 여성을 깔아뭉개는 논쟁이 아니라는 것.

2.4. 남성 페미니스트가 해야 할 일들

미국의 대표적인 남페미 단체인 NOMAS를 비롯하여, 많은 남페미들은 래윈 코넬(R.Connell)이 에페미니즘(effeminism)이라고 말하는 "남성성에 대한 부정과 폐기" 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처럼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이라는 생각은 남성성으로부터 모든 젠더 차별과 억압이 유래했다는 페미니즘 진영의 인식과도 상통하며, 이들이 마스큘리즘 진영과 선긋기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남성권익주의자들은 도리어 현대에 들어서 남성성이 "상처 받았고 무너졌기에"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

그러나 과연 남성성을 버려야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2장의 저자 Hopkins(1998)는 남성적인 것이라면 뭐든지 다 버리려 하는 남페미들의 태도는 결국 페미니즘의 효율적인 실천 전략들을 줄인다고 우려했다. 남성성은 매우 다양하며 복합적이고, 맥락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무엇이 유해하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 더 본격적인 논의로서, 9장의 저자 Brod(1998)는 남페미들이 남성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도울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남성권력을 해체하는 일은 결국 스스로를 긍정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요컨대, 자학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남성들의 경험과 고충, 상처들에 대해 남페미들이 귀를 기울이고 위로해야 하며, 그들의 삶에 대해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남페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통합하고 신념에 맞게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여러 종류의 제안들이 나와 있다. 우선 4장의 저자 Pronger(1998)는 질 들뢰즈(G.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Guattari)의 논리를 바탕으로, 전통적 남성의 두 가지 욕망을 제시한다. 그 중 하나는 공간 확장, 정복, 지배를 표상하는 발기된 페니스의 욕망, 다른 하나는 공간 폐쇄, 보호, 응축을 표상하는 꽉 닫힌 항문의 욕망이라고 한다. 전자는 타인의 영토를 빼앗아서 통제하고 지배하려 한다면, 후자는 그렇게 얻은 영토를 타인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고 양보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많은 남성들이 어째서 호모포비아적으로 게이에 대한 혐오를 보여주는지를 상징적 수준에서 보여준다. 리오 버사니(L.Bersani)에 따르면, "직장(直腸)이란 남성 권력의 무덤이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4장의 저자는, 많은 남페미들이 전자의 욕망, 즉 발기된 페니스로 대변되는 공격성과 지배성, 압제의 욕망은 잘 인식하고 어떻게든 버리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후자의 욕망, 즉 꽉 닫힌 항문처럼 자신의 것을 양보하지 않고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완고함의 욕망만큼은 잘 인식하지도 못하고 버리려 하지도 못한다고 지적한다. 전자의 욕망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물론 그들의 폭력성은 감소할 것이니 좋은 일이긴 하지만, 페미니즘의 욕망에도 완전히 도달하지 못한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성이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면 항문성교도 한번쯤 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위의 논리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수준이라는 걸 감안해 보면, 어째서 많은 남성들이 거래, 협상, 경쟁, 스포츠, 게임, 논쟁에 있어서 그렇게나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지지 않으려 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남페미들은 '항문을 열어서',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개방하고, 더 많이 타협하고 양보하며, 더 많이 나누고 허락하고 받아들이는 유연한 삶의 양식을 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페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남성 폭력성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한 축이 된다는 것.

5장에서 저자 Schmitt(1998)는 동성사회성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을 제시한다. 많은 남성들은 동성끼리는 어느 정도 이상 친밀하고 끈끈한 우애를 나누기를 꺼리며, 마초적인 성격일수록 "시커먼 남자놈들끼리 무슨..." 하면서 껄끄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부 남성들은 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꼬셔 보기 위해', 혹은 '잘하면 모텔도 함께 갈 수 있을까 해서' 접근하곤 하는데, 남페미들은 이런 경향에 대해 분명히 문제시하고 있고 경계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저자는 남페미들조차 동성의 친구들과 우애를 다지는 일은 흔치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조차 다른 남성들에게는 얕고 무심한 수준의 우정만을 나눈다는 것이다.

5장의 저자는 흔히 "남자들은 감정 표현을 못 해서 그렇다" 는 통념이 퍼져 있는 것에 반대하며, 그 대신에 남성들이 남성 간 경쟁 속에서 자신의 남성성을 반복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강인함과 독립성의 덕목에 신경을 쓴다고 말한다. 남성들은 독립적이고 자립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남성들이 표면적으로 위장하는 것이며, 이들은 젠더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실제 의존성과 나약함을 더 잘 감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남페미들은 거짓된 남성성의 허상에 공모하지 않기 위하여, 깊은 우애와 유대를 나누는 대상을 남성으로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여성들의 우정에는 많은 대화와 경청, 관심, 조화, 감정적 동조가 강하게 나타나며, 남페미들은 여성들에게서 이런 인간관계를 맺는 법을 배워야 한다.[7] Schmitt(1998)는 적어도 남페미들만큼은 남페미로서 이와 같은 '긴밀한 관계' 를 형성할 줄 알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따라서 남페미들은 동료가 힘들어하고 있으면 한번 꼬옥 안아주는 것도 좋겠다(?).

다음으로, 7장의 저자 Wartenberg(1998)는 철학 교수로서 자신이 겪었던 "불편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옛날에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후 자신의 전문분야를 임마누엘 칸트 및 19세기 독일 철학으로 정했는데, 그 사이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오랜만에 다시 그리스 철학을 (이번에는 가르치는 입장으로서)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 철학 텍스트를 읽어내려가며 그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들의 위대한 철학적 업적 이면에 여성에 대한 온갖 불평불만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들의 업적 자체는 무시할 수 없었기에 어쨌든 이들을 강의해야 했지만, 문제는 저자가 몸담은 학교가 바로 여대였다는 것.

이 문제로 고심하던 Wartenberg(1998)는 남페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철학 교수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가 내린 결론은, 섣불리 이들 철학자들의 혐오발언에 대해서 쉬쉬하고 넘긴다거나,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강의 몇 시간을 넘길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텍스트를 독해하는 법 자체를 가르쳐주자는 것.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무언가가 남페미들에게 PC하지 못하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접하는 것을 무작정 막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명하게 통찰하고 잘 받아들이는 방법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야 그 텍스트의 가치를 수용하면서도 한계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위의 조언들을 자신의 삶에서 잘 실천한다면 남페미들은 어디 내놓아도 한 점 부끄럽지 않은 페미니스트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인가? 불행히도 본서의 몇몇 저자들은 이 가능성에 대해서 비관한다. 남페미들은 다른 페미니스트들에 비하여 남성이기에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먼저 10장의 저자 Kahane(1998)의 메시지를 살펴보자. 우선 저자는 현실적으로, 남페미들의 상당수가 페미니즘 사상가들과 그 이론들을 머리로는 줄줄 읊으면서도 그걸 자기 삶에 녹여내고 실천할 줄 모른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페미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조차도 없다. 남성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강자라는 입장이 우리 사회의 권력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장의 저자는 그런 실천을 최대한 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결국 남성이기에 한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네 가지 남페미의 유형을 정리한다. 이론에만 빠삭하고 뼈를 깎는 실천은 하지 않는 허식가(poseur) 유형, 공개적으로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여 찬사를 받지만 이를 통해 자부심을 느끼는 것 이외에는 어떤 젠더적 관심도 없는 내부자(insider) 유형,[8] 가부장제가 남녀 모두에게 불리하다고 말하면서 남성성의 개혁을 주장하지만 여성들의 고통에는 오히려 무관심한 인본주의자(humanist) 유형,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늘 채찍질을 하며 탈출구 없는 젠더억압의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가는 자기학대자(self-flagellator) 유형이 그것.[9] 보다시피 네 가지 유형 모두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 이 상황에서 저자는 오히려, "차라리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낫겠다" 고 제안한다. 즉, 개인은 어차피 윤리적으로 복합적이고 불완전하기에, 남페미들은 그저 자기성찰을 유지하며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갖고서 '되다 만 페미니스트' 처럼 살아가는 게 최선일 거라는 얘기다. Kahane(1998)은 남페미들에게 이를 위해서 상호비판적, 반권위적, 헌신적인 자세로 페미니즘을 경험하라고 제안한다.

위에서도 잠시 지나가듯 언급했지만, 남페미는 아버지의 양육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에도 언뜻 일반 남성들보다도 불리한 점이 있을 수 있다. 11장의 저자 Gardiner(1998)는 에드워드 크룩(E.Kruk)의 보고를 인용하여,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아버지들이 권위주의적이고 돈만 벌어다 주는 전통적 아버지들에 비하여 이혼 상황에서 멘탈붕괴하기 쉽다고 지적한다. 자녀와의 유대가 끊겨 버렸다는 느낌, 자녀들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도 크지만, 그와 함께 자신이 또 '못난 남성의 모습' 을 보였다는 도덕적 자책으로 인해, 이들은 극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하지만 저자가 위로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권위주의적 아버지에 비하면 차라리 이것이 낫다는 것이다. 전통적 아버지들은 자신이 자녀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자녀와 애착 관계라는 사실을 "차마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겉보기에만 이혼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2.5. 성 소수자로서의 위치?

본서는 성소수자 문제를 특히 FTM 트랜스남성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으며, 더럽게 안 읽히는 6장, 그리고 역서 최후반부를 차지하는 13장이 그것이다. 가뜩이나 트랜스남성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트랜스남성이면서 동시에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은 평범한 남페미로 살아가는 것과는 또 다른 여러 어려움들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본서의 두 챕터의 저자들 역시 트랜스젠더로서의 호소와 남페미로서의 호소가 서로 섞여 있는 글쓰기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FTM 트랜스남성으로서 과연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6장의 저자 Hale(1998)은 미국여성철학회를 돌아다니며 자문을 구했다. 태평양 지부에 있던 샌드라 하딩은 적극 환영의 뜻을 밝혔지만, 불행히도 모두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저자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은 저자를 애초부터 남성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저자를 남성으로 인정하면서 그와 동시에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부정했다고(…). 이 골치 아픈 문제는 남페미 문제와 트랜스젠더 문제라는 페미니즘의 두 가지 난제를 동시에 건드리는 것이지만, 6장에서 저자는 그나마 그 논쟁 속에서조차 늘 쑥덕이는 것은 시스젠더끼리였으며, 트랜스젠더의 발화 권력은 늘 한계를 겪었다고 토로한다. 재니스 레이먼드(J.G.Raymond)와 같은 혐오자들 사이에서 그나마 홀로 장판파(…)를 하며 싸웠던 인물이 예술가이자 친트랜스 운동가인 저 유명한 샌디 스톤(S.Stone)이었다고.

여기서 Hale(1998)은 젠더퀴어가 우리 사회의 친숙하고 편안한 관념들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지 설명하기 위해 마리아 르곤(M.Legones)이 주창한 세계 여행(world-traveling)의 개념을 소개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범주들과 용어들, 담론들이 다양한 '세계' 들을 만들어내고, 이들 세계들은 의외로 불완전하고 망상적이다. 젠더퀴어들은 이들 여러 세계들 사이를 여행하고, 어떤 세계로부터 쫓겨나고, 여러 세계에 동시에 거주하기도 하고, 각각의 세계 속에서 서로 다른 존재로서 살아간다. 문제는 트랜스남성이면서 동시에 페미니스트인 입장에서 다양한 세계들 사이를 '여행' 하는 경우인데, 이들은 페미니즘의 세계에서 배우고 갖게 된 것들을 트랜스젠더들의 세계에 가지고 가야 한다는 골치 아픈 문제를 낳는다. 그래서 이들은 어느 쪽에 정체화(동일시)를 해야 할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지만, Hale(1998)은 기존의 세계 중 하나에 정체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 즉 새로운 담론과 새로운 존재의 방식을 출발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많은 경우 현대사회는 새로운 뭔가가 나타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므로, 이를 위해서는 결국 소수자들 사이의 연대가 필요하며, FTM이자 페미니스트인 사람들은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본다.

트랜스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13장의 저자 Rubin(1998)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한때 여성이었던 사람들', '남성으로 분장한 여성들', '남성의 이득을 누리는 여성들' 이라고 비난을 퍼붓는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트랜스남성들의 삶의 경험은, 그들이 처음부터 남성이었으며, 단 한 순간도 여성의 마음을 갖고 살았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 혐오자들은 마치 FTM들이 남성의 이득을 실컷 누리면서 투쟁은 뒷전으로 미루었던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이들이 MTF들에 비해 비가시성이 더욱 크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기에" 유독 오해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소수자에 대한 무지를 뒤로 하고, 저자는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식별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로의 정체화에 중요치 않으며, 단지 페미니즘의 정신을 실천(doing)한다면 그것이 바로 페미니스트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Rubin(1998)은 트랜스남성이자 페미니스트인 사람들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그는 트랜스젠더들은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시스젠더 여성들과 트랜스남성들이 밤 거리를 걷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시스젠더 여성들이 우선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폭행이나 강간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트랜스남성들은 자신이 실제로는 여성의 몸을 갖고 있(었)으나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발각될 것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두려워한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치안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10] 이처럼 트랜스젠더들은 자신의 몸과의 긴장관계 내지는 갈등관계가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앨리스 자딘(A.Jardine)이 제안했던 "자신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기"(Talk Your Body)에 있어서만큼은 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나설 수 있고, 이를 통해 '진짜 사나이가 되라' 고 압박하는 문화적 기대를 뒤흔들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샌드라 하딩이 제안했던 개념, 삐딱한 정체성(perverse identity)으로도 요약될 수 있다. 트랜스남성이자 페미니스트인 사람들은 삐딱한 정체성을 갖고 있기에, 가부장적인 주류 문화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거부함으로써 페미니즘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3. 가능한 비판

물론 이들이 입을 모아 "남페미는 가능하다" 고 말하더라도, 이것이 정말로 이견의 여지가 없는 문제였다면 아직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 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철학적인 정통 논쟁들이 그렇듯이, 이에 대해서도 여전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몇몇 지점들이 있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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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 번역서에서는 5개 장이 생략되었으므로 Sandra Bartky 외 13명이 된다.[2] 서양에는 흔히 "우리 마음 속에는 어린아이가 있다" 는 식의 내면아이(inner child)에 대한 비유가 널리 퍼져 있다. 3장의 저자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표현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는 심리치료 및 상담에 있어서 아무런 학술적 근거가 없는 대중심리학에 속한다. 해당 문서들을 참고할 것.[3] 굳이 예를 들자면 아마도 남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여러 어려움, 가부장적 프리미엄이 존재하는지의 여부, 아버지로서 짊어져야 하는 고통,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에서 오는 답답함 등이 있을 것이다.[4] 2장의 요지를 국내의 사례와 비교하자면, 남성들 사이에서 "너 페미니스트냐?" 라는 말은 "너 일베하냐?" 와 동급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5] 즉 남페미들이 뭔가를 기획하거나 실천할 때 그것이 정말로 페미니즘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매번 여성들에게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요?" 를 질문하여 여성들의 권위로 승인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6]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랍비가 서로 율법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다. 랍비 B는 아까부터 별다른 근거 없이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자꾸 랍비 A에게 우겨대고 있었다. 마침내 랍비 B가 외쳤다. "나는 근거는 없지만 내 말이 옳다는 걸 안다. 내가 옳다면 회당 밖의 강물이 거꾸로 흐를 것이다!" 그러자 정말로 강물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랍비 A는 "강물은 당신의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고 말했다. 그러자 B는 다시 "내 말이 옳다면 회당의 벽이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라고 말했고, 정말로 벽이 저 혼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랍비 A는 이번에도 "회당 벽은 근거가 되지 못한다!" 라고 말했다. 마침내 B는 "내 말이 옳다면 하늘의 신께서 나를 증명해 주실 것이다!" 라고 말했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그의 말이 옳다. 왜 그를 믿지 않느냐?"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A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토라는 하늘에 있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거이지, 목소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7] Schmitt(1998)는 남성들이 대부분 이런 인간관계를 맺는 법을 잘 모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어릴 때부터 시작된 사회화의 결과인데, 소녀들이 서로의 문제로 인해 울고 웃으며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법을 익히는 동안, 소년들은 친구를 짓궂게 놀린다거나, 서로 장난감 칼싸움이나 주먹다짐을 하며 우정을 확인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8] 저자는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상층의 권력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유명 정치인들 중 일부가 여성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기꺼이 "저도 사실은 페미니스트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유형에 속할 것이다.[9] 이런 사람들은 모호함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로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하게 검열하며, 자신이 또 다시 여성을 억압했다며 끝없이 괴로워한다. 얼핏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 같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생산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페미니즘을 체화하는 것 역시 지속 불가능하다.[10] 아마도 이와 같은 경험의 차이가 있기에, 여성으로서의 삶의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TERF 성향을 드러내는 이유가 (어느 정도는) 설명될 수도 있겠다.